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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last modified: 2015-04-12 17:18:21 Contributors




기본 정보
시기 1894년 8월 1일 ~ 1895년 4월 17일
교전 지역 만주, 한반도, 타이완, 황해

교전국
청나라 일본제국
지휘관
광서제 메이지 덴노
이홍장 야마가타 아리토모
여창 토 스케유키
세창 기 마레스케
참여 병력
병력 63만 명 병력 24만 명
양 군벌 일본 육군
양 함대 일본 해군
전투 결과
사망: 35,000명 사망: 1,132 명
부상: 3,758명
부상사: 285명
병사: 11,894 명

청일전쟁에 참전한 양국 해군 비교
청나라 북양함대 일본제국 해군
철갑함 정원(定遠), 진원(鎮遠): 총 2척 철갑함 후소(扶桑): 총 1척
갑순양함 경원(經遠), 내원(來遠): 총 2척
호순양함 치원(致遠), 정원(靖遠): 총 2척 호순양함 마츠시마(松島), 이츠쿠시마(厳島), 하시다테(橋立), 나니와(浪速), 타카치호(高千穂), 야에야마(八重山), 아키츠시마(秋津洲), 요시노(吉野), 이즈미(和泉): 총 9척
뢰순양함 제원(濟遠), 초용(超勇), 양위(揚威): 총 3척 순양함 치요다(千代田): 총 1척
양전투함 평원(平遠): 총 1척
콜벳 콴챠: 총 1척 장갑 콜벳함 히에이(比叡), 콘고(金剛): 총 1척

Contents

1. 개요
2. 청일전쟁 당시 양국의 참전 해군 비교
3. 발단
4. 전개
5. 개전
5.1. 조선에서의 전투
5.2. 중국에서의 전투
6. 정전회담
7. 결과
8. 관련 항목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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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낚으려는 청나라와 일본의 낚시 경쟁. 러시아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1894년 8월 1일 ~ 1895년 4월 17일까지 벌어진 청나라일본의 전쟁. 단, 교전 자체는 7월 25일에 이미 발생한 상태.

그러나 어째선지 몰라도 정작 주요 전쟁터는 조선이었다. 이유는 바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전한 동학농민군의 진압을 위해 청의 병력을 빌려서 제압하려는 조선 조정의 판단 때문. 그러나 10년 전 청에게서 갑신정변의 치욕을 당해왔던 일본에게는 10년만에 설욕을 갚기도 하고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를 잡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에 결국 한반도에 주둔중인 청의 군대와 교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당시 동학농민운동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조선의 동학농민군까지 포함하면 결국은 동북아 3국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2. 청일전쟁 당시 양국의 참전 해군 비교

3. 발단

이게 사정이 복잡한 게, 청은 양무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다시 동아시아 패권자의 위치를 되찾으려 했다. 또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조선 뿐 아니라 아편전쟁 이후 서구 열강에서 블루 오션 사업 새로운 식민지화 시장으로 떠오르던 청의 이권과 영토 빼앗기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두세력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역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조선이었다. 청은 청불전쟁의 패배로 안마당 중 하나인 베트남프랑스에게 내준 상황에서 마지막 안마당인 조선까지 내주는 건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일본도 조선을 집어삼켜 중국을 공격하는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청은 당시 조선에서 임오군란갑신정변을 진압해 일본의 세력을 잠시나마 축출한 상황이었고, 일본은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에서 뜻밖의 변수가 일어나니 그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조선군이 힘을 못 쓰고 패배하고 진압에 난항을 겪자 조선은 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청은 조선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병했고 일본도 곧바로 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1]
하지만 동학군은 외국 군대가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외세에 빌미를 줄까 봐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해버렸다.

4. 전개

당연히 조선 정부는 일본과 청에게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시져?"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갑오개혁을 요구하는 등 점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수도인 한양을 장악하고 경복궁을 점령해버렸다! (6월 23일) 여기서 조선은 사실상 망했어요... [2][3]

이후 일본은 조선에 청에서의 독립 선언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게 좋은 의미가 아닌 게 당시 조선은 그러니깐 청의 식민지라는 뜻이다. 청이 서구 열강 침략을 받고 실제로 주변 조공국들을 식민지처럼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건 일단 넘어가고.[4]게다가 독립을 한 이유도 조선에서의 청의 종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독립 협회를 비롯한 많은 수의 조선 지식인들이 이 말에 속아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을 응원했고, 1905년 11월에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1894년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와 주청, 주한 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외무성 참사관 혼노 이치로는 청국과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국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천을 평양에 마옥곤의 의군 2천을 의주에 각각 진출시켰다. 이홍장은 러청비밀조약에 의거해 러시아에게 일본군 철병 권유를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2회에 걸쳐 철병을 권고하였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국은 청국의 부탁을 받긴 했으나 일본과 비밀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자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 받는다.

5. 개전

5.1. 조선에서의 전투

7월 25일 인천 앞바다 풍도에서 정여창이 이끄는 청국의 북양함대와 이토 스케유키가 이끄는 일본의 연합함대가 격돌한다. 아산만으로 병력을 수송하던 청국의 군함 제원, 광을과 수송선 조강, 고승을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연합함대 제1유격대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고승호는 격침되었고 조강호는 나포됐으며 광을은 도망치다 좌초하고 만다. 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7월 28일 육지에서 성환전투가 일어나며 본격적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된다. 8월 1일 양국은 동시에 선전포고 하였으며 곧이어 평양에서 격돌한다. 청국 1만4천여 대 일본군 3만(섭지초의 보고, 일본측 자료는 1만2천)이 붙어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9월 17일 황해에서 청, 일 양국의 해군이 다시 전투를 벌였다. 정여창의 기함 정원을 선두로 11척의 군함이 출전하였고, 이토의 기함 마츠시마를 선두로 10척의 군함이 이에 맞섰다.[5] 양측의 군함 숫자는 비슷했으나 일본 연합함대가 전체적으로 3000t 이상의 견실한 순양함들로 이루어져 있었던 반면 청국은 전함인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2000t 내외의 작은 순양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일본측은 기함 미츠시마마저 4000t대의 순양함급이었던 반면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던 정원과 진원은 7000t이 넘는 압도적인 배수량을 자랑했기에 개함 전투능력은 청국이 더 유리했다. 하지만 6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청국의 북양함대는 패퇴하였다. 5척의 군함이 침몰하였고 3척은 1개월 이상 취역할 수 없을 만큼 파손되었다.[6] 반면 일본 연합함대는 4척이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7] 전쟁 발발 3개월전 영국은 청국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하였으나 청국은 그 돈을 서태후의 생일 축전에 비용으로 써야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병크를 저지른다.[8] 이 2척은 일본이 구입하였고 그 중 1척이 요시노. 정여창은 전투 후 이홍장을 직접 찾아가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이홍장은 거부하면서 단지 위해위의 수비만 하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청군은 일본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청군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을 이홍장의 회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는 점이다. 이홍장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잃을 것을 우려해 소극적으로 나섰다. 육군의 경우에는 지킬수 있으면 지키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무조건 퇴각, 해군의 경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선 싸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때문에 휘하의 지휘관들은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퇴각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면서 청나라군의 부패가 심화되어 훈련도와 사기가 낮은 것까지 더해졌다. 덕분에 일본의 진격은 거칠 게 없었다. 일본은 먼저 발해만 방면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위해위와 여순을 공격,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5.2. 중국에서의 전투

야마가타 아리노부의 제1군은 의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안동으로 진격해 요동반도에 교두보를 구축하였고, 오야마 이와오의 제2군은 화원구에 상륙하여 금주, 대련을 공격하였고 다시 여순을 점령하였다. 뒤이어 개평, 영구까지 일본군이 점령하며 요동반도는 완전히 제압당한다. 이때 일본군이 벌인 학살로 여순에선 단지 36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영국의 타임즈지가 보도하였다.

1895년 1월 19일 일본군은 위해위 공격에 나선다. 청국의 북양함대는 육군과 호응하여 해상에서 육지의 일본군에 포격하였으나 일본군에 의해 만의 입구가 봉쇄되며 만에 갖히게 되었고 결국 일본군에 의해 궤멸당한다. 정여창은 휘하 외국인 장병들이 항복을 촉구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해산시키고 음독자살한다. 정여창 휘하의 장교인 유보섬, 황응양도 이때 자결하였다. 일본군은 12척의 청국 함대를 나포하였으며 이중 1척은 정여창의 군인정신에 대해 예를 표하며 그의 유체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

한편 북양함대가 이렇게 궤멸당할 동안 남양함대는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으며 중립을 선언하는 병크까지 저질렀다. 이유는 북양함대는 회군계지만 남양함대는 상군계다. 물론 이들역시 이전 청불전쟁때 복건함대가 신나게 쳐발릴때 구경만 하는 병크를 함께 저질렀었다.

청국은 회군이 신나게 털리자 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이미 엎지러진 물로 상군도 신나게 털렸고 결국 주화파 공친왕 혁흔이 총리가 되면서 화친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화친을 맺기 위해 호부시랑 장음환과 호남순무 소우렴을 히로시마에 파견한다. 그러나 장음환은 청국의 전권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는 거부하였고 혁흔이나 이홍장이 직접 와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동안에 일본은 대만과 팽호열도까지 점령하며 청국의 목을 죄고 있었다.

6. 정전회담

마침내 3월 20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정전회담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은 아래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 대고, 천진, 산해관의 성지와 보루는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고 청군의 군수품 일체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천진, 산해관간의 철도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정전기간 내의 일본 군비는 청국측이 부담한다.
  • 정전 일시 및 양군의 경계선 등 세부사항은 중국이 전기 3항에 동의했을 때 다시 논의한다.

얼핏 살펴만 봐도 막대한 재정부담은 물론이거니와 청나라의 수도 코앞에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심산까지 나타났으므로 이홍장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가혹! 가혹!이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몇차례 회담이 벌어지던 중 이홍장이 고야마 도요타로라는 일본인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일본은 이홍장에게 사죄하며 무조건 정전하겠다며 태도를 바꾼다. 이홍장은 참의 이경방을 대리로 내세워 3월 20일 정전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

이 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명확히 확인하였으며 이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청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요동반도, 대만과 그 부속도서, 팽호열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냥을 7년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를 당시 일본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엔으로 일본정부 4년치 세입이다. 또한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재무장관 비테는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러시아 이익에 해를 끼치며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독일과 연합하여 삼국간섭을 벌였다.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래도 요동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청으로부터 은 3천만냥을 추가로 뜯어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요동반도 반환에 대한 대가로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

7. 결과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징후로 받아들였고 정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본격적으로 군국주의와 팽창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삼국간섭을 벌인 러시아와 서방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기 위해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면서 훗날 러일전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또한 청은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무운동에 대한 회의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단지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일본의 유신처럼 체제 자체를 뒤엎자는 변법자강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변법자강운동의 경험이 나중에 신해혁명으로 어느 정도 결실을 얻게 되니 사실상 청을 멸망으로 몰고 간 요인 중 하나. 특히 아편전쟁 등 서양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던 것에 재수없게 지나가던 미친 개에게 물린 일[9] 정도로 여기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완전히 양이화된 자기네 문화권에서 별 볼일 없었던 변방의 섬나라에게 어처구니없이 털리고 중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앞마당 국가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일은 비로소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서 물러났다는 엄청난 충격과 상실감을 주게 된다. 여기에 변법자강운동의 실패와 뒤이은 의화단 전쟁으로 열강들이 아편전쟁 때보다 더 확실하게 중국 대륙을 짓밟으면서 중국 지식인들은 그제야 비로소 일본을 모델로 한 개혁, 혁명운동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다.

사실 청일전쟁은 청군과 일본군의 문제가 모두 드러난 전쟁이기도 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은 후속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현지 사령관이 임의로 평양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는데, 보급부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정신력만 믿고 '일단' 저질러버린 이 무모한 공격 때문에 일본군은 전투 도중에 탄약이 떨어질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이 때쯤 청군이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일본군은 오히려 예상보다 일찍 평양을 함락시키는 큰 전과를 올리게 된다(…).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다.

일부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단순히 한반도 농민 궐기운동이나 내란 등으로 종지부를 찍었을 경우 청일간의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으나 일본이 이미 한반도 지배와 장악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한반도의 내전과 궐기운동을 틈타서 일본이 벌써 한반도를 장악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기회에서는 가만히 있을리가 없는 일본이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한편 조선은 이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망할 위기에 처했으나 러시아가 일본 세력을 몰아내자 친러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을미사변도 이러한 친러 정책으로 불안해진 일본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벌인 더러운 만행 무리수이다. 아관파천을 거친 후 조선에서 외세의 균형이 잠시 평행 상태에 이른 틈을 타 대한제국으로 개편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이전과 달라진 점이 없거나 오히려 일부에서는 퇴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이전 벌어진 개혁들은 비록 외세의 개입이 있긴 해도 나름 시대적 변화를 따르는 모습을 보였으나 고종은 대한제국 성립 후 이런 내용을 없애버리고 전제 왕권 강화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법 개편을 벌였다. [10] 게다가 여전히 정부는 외교 부문에서 외세를 끌어들여서 사채 돌려막기하듯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사실 자체는 뭐라고 할 수 없는게, 미국이 집안싸움 하느라 손 뗀 사이 메이지 유신 등의 개혁을 한 일본이나 라오스, 캄보디아 등등 속국들 잘라주면서까지 국제적 지위를 확보해 독립을 유지한 태국 등도 외교 상황을 당연히 이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11] 하지만 외교가 어찌되었건 내정 개혁은 시대에 따르지 못했고, 결국 러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과 러시아와의 세력 균형이 깨져버리면서 청과 러시아가 모두 사라지자 조선은 일제식민지의 길을 걷게 된다. [12]

한편 일본에게 할양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대만인들은 격분하여 봉기를 일으켜 순무 당경숭에게 조약 폐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청국은 당경숭을 비롯한 청국군 전원을 본토로 철수시켜 버렸다. 이에 대만인들은 구봉갑을 통령으로 선출하여 저항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여기에 청군 총병 유영복이 이끄는 흑기군이 호응하였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은 해군대장 가바야마 스게노리를 대만총독으로 근위사단을 파견하였으며 5개월에 걸친 전투끝에 대만을 점령하였다. 구봉갑, 유영복은 하문으로 도망쳤으나 저항은 이후 7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망자 5천, 부상자 2만 7천명의 피해를 입었다. 요동, 산동 방면에서 1만 7천여명의 손실을 입은 것과 비교하면 당시 대만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현 21세기 최고 일빠국가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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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때 아산만으로 군대를 파병한 청나라와 달리, 일본은 인천으로 병력을 보냈다. 동학농민운동은 남부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충청남도와 경기도 사이에 있는 아산만으로 들어오는 것이 접근하기 용이했다. 반면 인천은 서울에만 가깝지, 정작 봉기가 발생한 지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 청군은 진짜로 농민군을 진압할 의도로 조선에 들어왔으나, 일본은 처음부터 봉기를 진압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후술하듯 바로 서울로 진입해 경복궁에 침입한 것을 볼 때, 일본은 아예 처음부터 청과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하고 군대를 파병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 [2] 이 사건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을미사변이나 다른 것들과 달리 분명한 명칭이 없다. 그래서 "경복궁 쿠데타"나 "경복궁의 변"과 같은 불명확한 이름을 쓰고 있다. 일본은 고작 이 30분의 교전을 하나의 "전쟁"으로 보고 프라파간다에 적극 활용하였다. # 그말만 따지면 영국-잔지바르 전쟁보다 짧은 전쟁이 되는 셈. 그리고 이 경복궁을 습격한 장본인이 오오시마 요시마사로 아베 신조의 고조부뻘되는 사람이다.
  • [3] 일설에 따르면 이때 고종이 쉽사리 잡혀버리면서 무장해제한 별기군의 무장은 일본군을 경악시킬 수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화기가 통일되지 않았고 근대군으로서의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결국 너무나 허무하게도 한무리의 일본군에 한 나라의 수도가 털려버리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 그것도 10년 간격으로 두번이나 . 근데 이미 여러번 수도가 털려온 조선이라 별 감흥도 안드는게 더 문제
  • [4] 다만 확실한 노선이라기보단 실패한 양무운동과 같은 맥락이기에 청 내부에서 보수파나 개혁파 내 당파의 대립에 따라 이견이 갈리고 정책이 오락가락하긴 했다.
  • [5] 어뢰정같이 배수량 1000t도 안되는 함선이나 전투능력이 없는 수송선은 제외한 숫자
  • [6] 다만 제일 중요한 정원과 진원은 정원이 파손된것을 제외하면 무사했다.
  • [7] 이는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청군의 훈련상태도 한몫했다. 가령 청국 순양함 '제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적전도주했다(...)
  • [8] 이때 청국은 순양함보다 훨씬 큰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두척 보유하고 있었으니 안사도 충분히 자국 함대가 강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중화스러운 자신감은 청일전쟁에서 그동안 깔봐왔던 일본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면서 산산조각나지만.
  • [9] 서구식 국제관계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청은 자신들이 맺은 조약이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째서 불평등 조약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저녀석들이 힘으로 개기니 그냥 원하는 거 주고 적당히 달래자란 식의 중화식 조공관계로 생각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북경 함락등의 치욕도 사실 중국사에서 왕조의 수도가 유목민계 이민족에게 털리던 일은 그 전에도 있었기도 했고.
  • [10] 하지만 전제 왕권 강화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볼 수도 없다. 독일, 러시아 모두 카이저와 차르의 전제왕정 아래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기 때문.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세계의 트렌드는 공화정이 아닌 제정이었다. 고종은 독일식 전제왕정 개혁을 추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개혁이 실패했던 가장 큰 이유는 외세에 대한 지나친 의존, 황권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인민들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해 근대국가 인민들의 원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 [11] 쉽게 생각해서 세력 균형을 통한 중립국 정책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열강들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정책. 그렇기 때문에 각종 이권을 외세 열강에 넘겨준 것 역시 상대적으로 중국에 집중된 열강들의 관심을 조선으로 유인하면서, 세력균형을 꾀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 살 깎아먹기식이 되어, 조선의 식민화를 가속화시켰다.
  • [12] 사실상, 청일전쟁시기와 러일전쟁의 시기 사이, 그러니까 일본과 러시아가 조선을 두고 세력균형을 꾀하고 있던 약 10년간(1894~1904)의 기간이 조선으로서는 독립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였던 셈이다. 하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견제 속에서 을미사변, 아관파천등이 일어나면서 고종은 개혁의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지 못했고, 망국의 길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