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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last modified: 2018-01-05 19:43:27 Contributors

중국의 역사
중화민국

대청제국
大清帝國
국기
존속기간 1616년 ~ 1912년
국가 공금구
위치 중국 대륙과 몽골,러시아 일부 + @
수도 선양(1636~1644)
베이징(1644~1912)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언어 만주어,중국어,몽골어
민족 만주족,한족,몽골인
종교 불교,기독교 등
주요사건 1616년 후금 건국
1636년 국호 개칭
1644년 중국 통일
1840년~1842년 1차 아편전쟁
1856년~1860년 2차 아편전쟁
1911년 신해혁명
1912년 해체
통화 위안(1899년 부터)
성립 이전 명나라
멸망 이후 중화민국/중화제국[1]
청나라 소조정[2]
일본제국
타이완 민주국
티베트 왕국
영국령 홍콩

Contents

1. 개요
2. 건국
3. 건국 이후
4. 멸망
5. 기타
6. 국가(國歌)
7. 역대 황제
7.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
7.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7.3. 항렬
8. 추존 황제
9. 대외관계
9.1.
9.2. 조선
9.3. 일본
9.4. 그 외
10. 관련 항목
10.1. 기타
10.2. 사건 (시대순)
10.3. 인물 (시대순)


1. 개요

淸朝(Qing(Tsing) Dynasty)

만주족중국 정복 왕조이자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 보통은 청나라라고 부르지만 정식 국명은 대청제국(大淸帝國)이다. 대청(大淸)의 만주식 독음+만주어로 나라(國)를 의미하는 구룬일 뿐이므로 뜻은 같다.

국명이 지명이나 종족명에서 딴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인 이유는, '불'을 상징하는 명조(明朝)를 제압했다는 의미에서 물 수(水) 변이 들어간 청을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7세기 초인 1616년 만주에서 건국되어, 1644년 중국 본토에 입관(入關)했고, 이후 20세기 초인 1912년신해혁명까지 300여년 동안 유지되었다. 황성(皇姓)은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애신각라).

2. 건국

옛날 금나라를 세웠던 여진(女眞)족의 추장 중 하나였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민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금을 잇는다는 의미로 아마가 아이신 구룬(Amaga Aisin Gurun), 중국식 국호로 후금(後金)이란 나라를 세웠으며, 청이란 이름으로 일어선 건 그 아들인 청태종 때부터이다. 임진왜란 때의 많은 대외파병과 썩은 정치, 명 4대 암군의 대활약 등이 있었음에도 명나라는 멸망 직전까지도 청나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공성전을 하다가 전사할 정도였으니… 명이 멸망한 이유는 청 때문이 아니라 이자성의 반란 때문이다.

건국 시조에 대한 신화도 있다. 만주 시조 신화 참조.

3. 건국 이후

운이 꽤 좋은 나라였는데, 순치제(順治帝),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등 유능한 황제들이 몇 명씩이나 연달아, 그것도 엄청나게 오랫동안 통치를 하여[3] 동아시아는 물론 주변 아시아 세계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동방으로 넘실넘실 넘어오던 러시아군과 강온정책을 번갈아 구사하며 끝내 국경선을 확정했고, 서방과의 접촉도 점점 더 활발해졌다. 중국이 티베트위구르, 몽골, 만주와 연해주를 확실하게 지배에 넣은 것도 이 때였다.[4] 전성기의 청은 지금의 중국보다도 더욱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국력을 자랑했다. 지금 중국이 각종 반발속에서 확보하고 있는 티베트와 위구르만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톡과 몽골 전체, 더불어 타이완까지 전부 청의 영토였다. 이렇게 영토가 넓었던 만큼 단순한 중국이라기엔 보다 다양한 속성을 가진 나라였다. 다중수도체제가 있어서 한인 신민의 천자가 머무는 중국 본토의 베이징, 만주인-몽골인의 칸의 거처인 만주의 묵던(지금의 선양),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숭배하는 문수보살이 강림한 내몽골의 청더(承德)까지 총 3개의 수도를 운용했다. 1762년 건륭제가 1년 중 자금성(紫禁城)에서 머문 시간은 1/3에 불과했다. 특히 청이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한자로 씌여진 문건을 전혀 남기지 않았고, 오직 만주어와 러시아어만으로 기록을 남겼다. 관련 기사[5]

비록 언어나 문화면에서는 동화를 면치 못했으나 만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종족은 청나라 말기에도 명확하게 구분되었을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청조 말기 한족(漢族)들에 의해 사용된 '멸청흥한(滅淸興漢, 청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킴)'이니 '부청멸양(扶淸滅洋, 청을 돕고 서양인을 멸함)'이니 하는 구호에서도 한족과 청(만주족)은 청 말기까지 엄격히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멸망

partition_ching.jpg
[JPG image (Unknown)]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6] 르 프티 주르날, 1898

멸망의 원인은 시기적으로 서구 열강에게 터질만큼 터지고, 뺏길만큼 뺏기고, 심지어 안중에도 없던 일본에게까지 처절하게 관광을 타는 굴욕 등 외침이 원인이었다. 이 무렵 지방에선 군벌들이 따로 세력을 키우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신사조가 널리 퍼져서 더 이상 과거처럼 통치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청나라의 끝없는 굴욕으로 청 황실의 명성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원래부터 지배층 만주족과 피지배층 한족으로 분리된 민족 구성이었기 때문에 한족 지식인들은 민족주의 사상에 따라서 '청나라' 자체마저도 일종의 '외래민족 침략세력'으로 보고 만주족의 청 왕조로부터 한족 민중의 독립을 추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이것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1911년에 신해혁명으로 산하의 지방 정부들이 독립을 선언하여 청 왕조는 지방통제권을 잃고 전국이 한시에 공중분해되면서 파멸을 선고받았다. 1912년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총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창을 돌려 청 왕조를 폐지시켜 버림으로서 1912년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는 청조 멸망 이후에도 중화민국 정부와 체결한 "청실우대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잔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실우대조건>
1.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존호는 계속 유지되며, 폐지되지 아니한다」. 중화민국은 대청황제를 "외국 군주를 대하는 예"로 우대한다.
2.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세금 사백만 냥을 사용하며, 이후 신화폐가 주조되면 사백만 원이 중화민국에 의해 지급된다.
3.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자금성에 잠정적으로 계속 거주하며, 이후 이화원으로 옮기게 된다. 시위(侍衛)하는 사람 등은 계속 쓸 수 있다.
4.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그 종묘와 능침에 대해 영구히 제사를 받들며, 중화민국은 적절히 호위하는 병사를 두어 그것을 신중히 보호한다.
5. 덕종(광서제)의 능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므로, 제도에 맞게 수리하며 옛 예법에 맞게 한다. 그 경비는 중화민국이 지출한다.
6. 궁중에서 고용하는 집사 인원은 계속 유지되나, 이후에는 환관은 더 고용할 수 없다.
7. 대청황제는 물러난 이후, 지금 가지고 있는 자산은 중화민국이 특별보호한다.
8. 현재 보유한 금위군은 중화민국 육군부에 편제되며, 그 수 및 녹봉은 예전과 같이 한다.

<청 황족 대우조건>
1. 청나라 왕공작위는 예전과 같이 유지된다.
2. 청 황족은 중화민국 국가의 공권과 사권에 대해서는 보통 국민과 같다.
3. 청 황족의 사유재산 일체는 보호된다.
4. 청 황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

( 각족대우조건은 생략)


이 조건으로 부의는 자금성 안에서는 청 황제로서 행동할 수 있었고, 자금성 내에서는 계속 선통 연호가(음력과 함께) 쓰였다. 그러나 북양군벌 정부는 청실우대조건을 지키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부의는 1924년 10월 군벌에 의해 자금성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1924년 11월 5일에 청실우대조건이 수정되면서 사실상 청 황제 존호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의는 천진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31년 11월에 장개석은 부의가 천진에 남는다면 청실우대조건을 회복시켜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이하라 겐지가 획책한 천진사변을 비롯한 수차례의 암살 협박을 받아왔기 때문에 부의는 거절한다. 그리고 군벌 손전영이 벌인 서태후 능 도굴사건에 대한 처벌에 장개석이 소극적 태도를 보였던 점이 부의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국 그 달 10일에 부의는 만주로 가게 되고, 이듬해(1932년) 일본이 세운 괴뢰정권 만주국의 황제가 되기에 이른다. 일본은 만주국이 청의 후신이라고 선전했지만.. 그럴리가.

5. 기타

위 템플릿의 지도는 청의 최대 판도는 아니다. 러시아에게는 연해주를, 일본에게는 대만을 상실한 1896년의 지도. 현재의 중국 + 몽골의 판도보다 조금 넓은 수준이다. 타이완 성을 추가하면, 중화민국의 명목상 영토와 거의 일치한다.

Map-Qing_Dynasty_1820.jpg
[JPG image (Unknown)]

가장 자세히 나타나있는 지도. 이 지도는 청나라가 근대적인 조약을 통해 확정한 영토다. 원본이 올라와있는 사이트로 들어가면 더 큰 것을 볼 수 있다. 단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사할린[7]과 우다[8] 강 주변 등은 중국 이외에서는 동의하지 않는다.[9]

한편 조선은 오랑캐가 세운 나라라고 청을 대차게 까다가 병자호란 이후 항복했다. 그 까닭에 청을 외교적으로는 인정하였지만, 실제 뒷담화를 까는 모습을 보였다.

이 시대의 문학작품 중에는 홍루몽이라는 소설이 크게 유명하다. 중국 본토에서는 삼국지보다 더 유명하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연구자가 많은 소설이라고 한다.

오늘날 베이징에 남아 있는 왕조 시대의 대규모 건축물 중 많은 것들이 청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는데 이화원이 대표적이다.

청 황가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애신각라이기 때문에 신라 왕조와 연관지어 만주족도 원래는 신라인과 같은 푸리가 아니냐는 물음도 있으나, 애신각라는 만주어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를 빌려서 가차한 것일 뿐이어서 신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여기에는 만주족의 성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 아이신은 만주어로 쇠(金)라는 뜻인데, 만주족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참고로 '신라' 또한 우리말인 '사로' 혹은 '서라벌' 등의 음차로, 되도록 뜻이 좋은 한자를 쓰려다 보니 부르게 된 것이다. 신라=사로=서라벌은 모두 같은 말을 다른 한자로 썼을 뿐인데, 실제 이 단어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되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한족우월주의자들은 청나라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청나라 전통 복장이나 헤어스타일을 경멸하고 명나라까지의 전통이 진짜 중국이다라고 생각한다. 여담으로 일부 한족우월주의자들은 한족들만의 중국을 원하면서 티베트와 위구르 등 소수민족 독립을 지지하기도 한다고.

결과만 놓고 보면, 현대 만주족의 입장에선 차라리 병자호란에서 자기 조상들이 지는 게 나을 뻔 했는데, 병자호란에서의 승리를 토대로 만주족이 중원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한족에 동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이후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만주족이 점차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가다가 청나라 멸망 후 만주족이 급속도로 한화되어 결과적으로 현재는 거의 사라지기 직전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이겼다면 만주족은 후방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식량문제 해결에도 실패하여 그 여파로 사분오열되어 제대로 된 중원침략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부동항을 찾아 내려온 러시아군에게 각개격파당해 러시아의 피지배민족으로 전락하여 당장은 큰 불행에 빠졌겠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한족에 동화될 염려가 없어지면서 시베리아 원주민들처럼 자신들의 민족정체성을 계속 유지하여 훗날 서양에서 들어온 민족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러시아 제국의 쇠퇴를 틈타 독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족들 또한 변발, 치파오 등 만주족의 풍습을 강요당할 일 없이 속발, 한푸 등 자신들의 풍습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진짜로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가 중국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겠지. 특히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춘리만두머리가 아닌 선녀머리에 치파오가 아닌 한푸를 입고 나온다고 생각하면...

6. 국가(國歌)

국가는 공금구(鞏金甌)로, 견고하게 빛나는 상배라는 뜻이다. 1911년에 제정되었으나 1년 만에(...)


鞏金甌, (Gǒng jīn'ōu 궁 진어우)
국토를 금잔[10]처럼 단단히 하고,

承天幬, (Chéng tiānchóu 청 톈처우)
하늘의 덮임을 받아들이라[11]

民物欣鳧藻, (Mínwù xīn fúzǎo 민우 신 푸짜오)
만물 백성들은 물 속에서 장난치는 오리들처럼 기뻐하라.

喜同胞, (Xǐ tóngbāo 시 퉁바오)
동포를 기쁘게 마주하며,

淸時幸遭。(Qīng shí xìngzāo 칭 스 싱짜오)
태평성대에 행복하니,

眞熈皞, (Zhēn xī hào 전 시 하오)
모두가 화목하리.

帝國蒼穹保。(Dìguó cāngqióng bǎo 디궈 창충 바오)
제국은 하늘의 보우[12]를 입는다.

天高高, (Tiān gāogāo 톈 가오가오)
하늘을 날로 높아가고,

海滔滔。(Hǎi tāotāo 하이 타오타오)
바다는 끝없이 세차게 흐른다.

7. 역대 황제

  • 추존 황제는 제외된다.
  • 시호는 각주로 병기하되 만주식과 중국식의 순서로 한다.
  • 한호는 만주식 군주 칭호, 칸호는 몽골식 군주 칭호이며 연호는 00제로 알려진 중국식을 먼저 쓰고 만주식을 뒤에 쓴다. 세조 때부터는 한호가 연호 + 한(ex : 순치제는 이지슌 다산 한, 강희제는 얼허 타이핀 한)의 형태로 나타나므로 생략한다.
  • 국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는 생략한다.

7.1. 국호가 후금이었던 시기

대수 묘호 연호 시호 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능호
01 태조(太祖) 천명(天命, 1616~1626)[13] [14] [15] - 누르하치(努爾合赤) 1616.2.17 1626.9.30 10년 225일 복릉(福陵)
02 태종(太宗) 천총(天總, 1627~1636.3)[16] [17] [18] [19] 홍타이지(皇太極) 1626.10.20 1636.5.15 9년 208일 소릉(昭陵)

7.2. 국호를 청으로 변경한 이후

대수 묘호 연호 시호 칸호 즉위년일 퇴위년일 재위기간 능호
02 태종(太宗) 숭덕(崇德, 1636.4~1643)[20] [21] [22] 홍타이지(皇太極) 1636.5.15 1643.9.21 7년 129일 소릉(昭陵)
03 세조(世祖) 순치(順治, 1644~1661)[23] [24] [25] 풀린(福臨) 1643.10.8 1661.2.5 17년 120일 효릉(孝陵)
04 성조(聖祖) 강희(康熙, 1662~1722)[26] [27] [28] 히오완예이(玄燁) 1661.2.5 1722.12.20 61년 318일 경릉(景陵)
05 세종(世宗) 옹정(雍正, 1723~1735)[29] [30] [31] 인전(胤禛) 1722.12.27 1735.10.8 12년 285일 태릉(泰陵)
06 고종(高宗) 건륭(乾隆, 1735~1795)[32] [33] [34] 훙리(弘曆) 1735.10.8 1796.2.9 60년 124일 유릉(裕陵)
07 인종(仁宗) 가경(嘉慶, 1796~1820)[35] [36] [37] 용얀(顒琰)[38] 1795.2.9 1820.9.2 24년 206일 창릉(昌陵)
08 선종(宣宗) 도광(道光, 1821~1850)[39] [40] [41] 민닝(旻寧)[42] 1820.10.3 1850.2.25 29년 145일 모릉(慕陵)
09 문종(文宗) 함풍(咸豊, 1851~1861.7)[43] [44] [45] 이주(奕詝) 1850.3.9 1861.8.22 11년 166일 정릉(定陵)
10 목종(穆宗) 동치(同治, 1862~1874)[46] [47] [48] 자이슌(載淳) 1861.11.11 1875.1.12 13년 62일 혜릉(惠陵)
11 덕종(德宗) 광서(光緖, 1875~1908)[49] [50] [51] 자이티얀(載湉) 1875.2.25 1908.11.14 33년 263일 숭릉(崇陵)
12 공종(恭宗) 선통(宣統, 1909~1911)[52] X [53] [54] 푸이(溥儀)[55] 1908.12.2 1912.2.12 3년 72일 없음 [56]

7.3. 항렬

강희제 시대에 아들 대의 항렬자가 윤(胤: 또는 允)으로 정해졌고, 그것은 옹정제의 휘 胤禛에서 나타난다. 손자 항렬은 홍(弘: 건륭제), 증손자 항렬은 영(永) 또는 우(顒: 가경제)로 정해졌다. 건륭제 대에 와서 손자대 항렬로 면(綿) 또는 민(旻: 도광제)이, 증손자대 항렬로 혁(奕: 함풍제), 고손자대 항렬로 재(載: 동치제, 광서제)가 정해지고, 도광제 대에 추가로 부(溥: 선통제), 육(毓), 항(恒), 계(啟)가, 함풍제 대에 그에 덧붙여 도(燾), 개(闓), 증(增), 기(祺)가 추가되었다. 1938년에 애신각라씨 족보를 수속(修續)함과 동시에 부의는 敬志開瑞,錫英源盛,正兆懋祥의 12글자를 더 추가했다.

8. 추존 황제

묘호 시호 이름 재위기간[57] 능호 비고
시조(始祖) - 부쿠리용숀
(布庫哩雍順)
- - 태조 추숭, 만주족 시조
조조(肇祖) 원황제(原皇帝) 먼터무(孟特穆) 1405~1433 - 태조 추숭, 태조의 6대조
- 순황제(順皇帝) 충샨(充善) 1433~1467 - 태조 추숭, 태조의 5대조
- 흥황제(興皇帝) 톨로(妥羅) 1467~1481 - 태조 추숭, 태조의 4대조
- 정황제(正皇帝) 시버오치피양구
(錫寶齊篇古)
1481~1522 - 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흥조(興祖) 직황제(直皇帝) 푸만(福滿) 1522~1542 - 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경조(景祖) 익황제(翼皇帝) 기오창가(覺昌安) 1542~1571 - 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현조(顯祖) 선황제(先皇帝) 탁시(塔克世) 1571~1583 흥릉(興陵) 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성종(成宗) 무덕수원광업정공안
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
民立政誠敬義皇帝)
예충친왕
(睿忠親王)
도르곤(多爾袞) - - 세조 추숭, 태조의 14자
- 보국공(輔國公) 푸쥔(溥儁) - - 서태후에 의해 보경제(保慶帝) 잠칭. 곧 폐위

9. 대외관계

9.1.

명과는 후금 건국 당시부터 줄곧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명의 국력이 쇠하고 정정불안이 가속화하자 먼저 조선을 침공해 후방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명을 압박, 결국 이자성의 난을 계기로 명이 멸망하자 남진하여 명의 영토를 접수하였다. 이후 남명 정권이 토벌되면서 명과의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청 말기의 쑨원같은 혁명가들이나 반청복명 인사들은 청나라와 '중국(명)'의 관계를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마라타 연합이 무굴제국에 독립을 선포하듯이?

9.2. 조선

군신관계 하나만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역사관계로 보자면 좀 다르다.

처음에 이성계가 고려 변경에 살아서 고려인들이 이성계를 여진족 취급한 적도 있지만 정작 조선을 세운 뒤에 제일 먼저한게 여진족 혼내주러 가는거였다.(...) 종 대왕이 원래 여진족의 땅이었던 함경도를 강탈 개척한 적도 있고 수시로 예방전쟁[58]이 일어났다.

임진왜란 때 적대국이었던 조선을 돕기도 하고, 조선도 친명(親明), 숭명(崇明) 사상으로 인해 청보다는 명과 관계가 깊어 조선을 명과 함께 적대국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광해군 때는 조선이 굳건한 중립노선을 지켜 상대적으로 적대감이 줄어들었으나 뒤이어 인조반정이 발생해 인조가 즉위하고, 숭명, 배청(排淸) 노선을 주장하는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여 조선에 공격적인 성향으로 돌아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등이 일어난 것이 옛날까지만해도 세론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한명기 교수등에게 지적되었듯이 칭제이전까지만하더라도 조선측에서는 겉으로는 배금을 하는듯하였으나 웬만한 청의 요구는 상당수 들어주었으며, 조선의 외교보다는 청의 내부적 정세가 전쟁의 원인으로써 꼽힌다.

만주지역의 대기근으로 인한 그나마 시도할려했던 농업지역에 대한 대타격과, 50-100만에서 최소 200-250만까지 늘어난 청나라의 인구, 명과의 무역중단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써의 경제적이유와 몽골족을 굴복시키고 요동지역의 한족등을 흡수하며 신장된 국력과 홍타이지의 누르하치보다 강경적인 대외정책으로 인해 결국 1627년에 1차로 정묘호란, 1636년에 2차로 병자호란을 일으켜 마침내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 결과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봉림대군(효종)이 청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후에 즉위한 효종이 한때 청을 치겠다는 '북벌론(北伐論)' 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효종이 40대의 짧은 나이로 승하[59]함에 따라 계획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이후엔 명대와 같이 적대감이 희석되고 관계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였다.

개화기에 들어서는 메이지 유신 뒤 세력확장을 꾀하는 일본과 서구 열강을 배척하기 위해 조선과 접촉하는 일이 많아졌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청군이 민씨 정권의 요청에 따라 김옥균 등 개화파와 일본군을 우정국에서 몰아내기도 하였고 그 해 청불전쟁이 터지면서 청나라 군대 일부가 전쟁터에 투입되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청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군대가 파병되었고, 이를 근거를 일본 역시 자국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일본에 참패한 청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1897년 고종대한제국을 수립하며 기존의 조청관계는 끝났다. 이후 1899년 한-청 통상 조약[60]을 체결함으로써 대등한 관계로 전환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조선의 식민 지배를 약속받자 마침내 공식적으로 조선을 포기. 뒤이어 1910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경술국치, 일제강점기)가 되었고, 청 역시 1911년 신해혁명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1912년에 멸망하였다.

9.3. 일본

일본과는 막부시절 및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는 특별히 눈에 띄는 관계가 없었으나[61], 메이지 유신 뒤 일본이 아시아에서 세력확장을 꾀하며 위협세력으로 떠올랐다.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양국관계는 악화일로에 들어섰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양국이 군대를 파병함에 따라 갈등이 폭발,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승리를 거두었다. 패전 결과 청은 일본에 타이완을 내주어야 했다.

반면에 극우단체 흑룡회에서 손문의 흥중회,중국혁명동맹회 등 혁명단체를 대륙침략 목적으로 신해혁명을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등,결국엔 청이 멸망하여서 티베트,위구르,몽골 등 소수민족들이 분리독립을 시전하였다.결국엔 외몽골은 독립을 성공했지만 내몽골,위구르,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사실 외몽골도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에 성공한 케이스이며 몽골인민공화국은 사실상 소련의 속국이었다.

1912년 청이 멸망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을 향한 세력확대에 나선다. 그러나 청의 경우는 나라가 아니라 왕조만 망한 것이어서 바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어 일본의 팽창을 견제했고 이후 만주사변으로 이어서 푸이를 끌어들여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건국케한다.

9.4. 그 외

외몽골의 경우 오이라트의 후신인 준가르가 강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국력차를 이기지 못해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지고 외몽골은 청에 완전히 흡수되어 청의 외몽골 지방이 된다. 그러나 청이 멸망한 뒤 외몽골은 다시 독립을 추진. 1921년 다시 몽골인민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물론 자력은 아니고 적백 내전 당시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했고 이후 소련의 속국이 된다. 반면 일찍이 원의 옥새를 바치며 만주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계속 청과 호흡을 같이 하고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진다. 내몽골의 보르지긴 일족은 청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자격을 누렸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 한성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내몽골 팔기군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몽고병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몽골족과의 관계에선 만몽 연합정권을 내세웠고 실제로도 내몽골의 보르지긴(보르지기트)일족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청의 통치 영역이 아닌 외몽골의 할하 유목민은 회유책을 썼고, 청의 통치에 저항하던 오이라트인은 무력으로 응징해 버렸다. 오이라트인들은 청에 의해 준가르가 멸망한 직후 유럽으로 도망가서 캅카스의 칼미크인이 된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두고 견제를 주고받는 사이였으며 영국, 프랑스 등은 교역을 하러 왔으나 청은 교역에 별 관심도 없었고 교역이 확대되는 것도 원하지 않은 반면 영국에서는 은이 자꾸 청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역 문제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양측의 갈등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10. 관련 항목

10.3. 인물 (시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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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위안스카이가 선통제를 쫓아낸 이후 잠시 황제로 등극한 후 세운 국호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쑨원에 의해 금방 해체(...).
  • [2] 국가라기 뭐하지만 청나라 해체 이후 중화민국은 청 황실에게 자금성에서만의 통치권을 잠시 부여해줬다.
  • [3] 건륭제는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가장 장수(89세)했고, 가장 오래 황제 자리에 있었던(현직 60년+태상황 4년) 사람이다. 현직 황제로서 가장 오래 앉아있던 이는 강희제(61년)였다.
  • [4] 몽골은 연합제국의 측면도 있다. 황후들은 원칙적으로 몽골에서 선발되었다. 일종의 한족 견제구.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는 황제의 스승으로 모셔졌기 때문에 티베트는 단순한 번국이라기엔 굉장히 격이 높았다.
  • [5]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캬흐타 조약(이하 청-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청-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겼냐 하면, 청-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중국적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고, 결국 청-러 조약은 평등조약이 되었다. 즉, 중국적 중화 세계 개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돼 버린 것. 이 때문에 청-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한문 기록이 전무하고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조약의 체결 자체에도 한족 관리는 참여하지 못했다. 청-러 조약이 만주어로 기록되어 전해진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 이는 청조가 청-러 조약에 대한 한문 기록에서는 '대등'이나 '평등'을 연상케하는 구절이나 어휘를 없애거나 모호하게 만든 것에서도 입증된다. 자세한 내용은『청나라, 키메라의 제국』(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
  • [6] 독일이 중국이라고 써있는 큼지막한 파이 조각에 칼을 꽂아놓은 채 영국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 역시 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독일을 견제하고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독일과 영국이 싸우는 그 틈에 목을 내밀고 큰 파이 조각이 어디없는지 유심히 들여다 보고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도 한 몫을 차지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파이를 들여다 보고있다. 뒤에선 청이 열강들에게 본토가 유린당하는 걸 보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국은 당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함께 청을 삥뜯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가 축에 들건만 후발주자인 독일과 일본은 나오고 미국이 안 나오는게 이상하다.고증오류
  • [7]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 참고
  • [8] 발음은 우이다. 표기는 여기. 제시한 링크엔 표기의 출처도 있으니 참고바람. 여담으로 우다란 강이 부랴티야 공화국에도 있는데, 헷갈릴 수도 있으니 주의하자. 이 우다 강은 하바로프스크 크라이에 있다. '디'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잘 보면 '다'의 모음부분의 키릴문자 표기는 'a'이며, 발음 역시 우리나라의 모음'ㅏ'에 대응될 수 있다. 키릴문자 항목을 참고하라. 따라서 우강이 맞는 말이다. 영어권 국가에서도 우라고 한다. 영어권 국가의 발음방법은 구글 지도의 표기를 참고하였다.
  • [9] 참고로 우다 강 주변은 조약 체결 당시 미결정지로 놔둔 영역이다. 그래도 괜찮았던 이유는 이곳에 오는 사람이 극도로 적어서.... 이후 아이훈 조약이 맺어지면서 망했어요.
  • [10] 국토라는 뜻도 있음
  • [11] 承受로 해석. 帱은 휘장, 장막이라는 상반된 뜻을 가지고 있다.
  • [12] 保佑: 보호와 도움. 애국가의 '하느님이 보우하사'의 그것.
  • [13] 만주어로 압카이 풀링가, 몽골어로 텡그린 술데투.
  • [14] 더르기 황제. 승천광운성덕신공조기입극인효예무단의흠안홍문정업고황제(承天廣運聖德神功肇紀立極仁孝睿武端毅欽安弘文定業高皇帝).
  • [15] 거런 구룬버 우지러 겅기연 한. '모든 나라들을 이롭게 하는 지혜로운 군주'라는 의미.
  • [16] 만주어로 압카이 수러.
  • [17] 겅시연 수 황제. 응천흥국홍덕창무관온인성예효경민소정융도현공문황제(應天興國弘德彰武寬溫仁聖睿孝敬敏昭定隆道顯功文皇帝).
  • [18] 언두링거 한.
  • [19] 복다 카간.
  • [20] 만주어로 워시훈 어르더뭉거, 몽골어로 데게데 에르뎀투.
  • [21] 겅시연 수 황제
  • [22] 복다 카간.
  • [23] 만주어로 이지슌 다산.
  • [24] 얼덤부러 황제. 체천융운정통건극영예흠문현무대덕홍공지인순효장황제(體天隆運定統建極英睿欽文顯武大德弘功至仁純孝章皇帝).
  • [25] 아이비어 자사크 칸.
  • [26] 만주어로 얼허 타이핀.
  • [27] 고신 황제.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 [28] 엔크 암갈란 칸.
  • [29] 만주어로 후왈리야순 톱
  • [30] 텀거툴러허 황제. 경천창운건중표정문무영명관인신의예성대효지성헌황제(敬天昌運建中表正文武英明寬仁信毅睿聖大孝至誠憲皇帝).
  • [31] 나이랄트 토브 칸.
  • [32] 만주어로 압카이 워이여허.
  • [33] 용키양가 황제. 법천융운지성선각체원입극수문분무흠명효자신성순황제(法天隆運至誠先覺體元立極敷文奮武欽明孝慈神聖純皇帝).
  • [34] 텡게린 테트게센 칸.
  • [35] 만주어로 사이쿵가 펑션.
  • [36] 숭기연 황제. 수천흥운수화수유숭문경무광유효공근검단민영철예황제(受天興運敷化綏猷崇文經武光裕孝恭勤儉端敏英哲睿皇帝).
  • [37] 사이시얄투 이루겔투 칸.
  • [38] 永琰(영염)에서 顒琰(옹염)으로 바꿨다.
  • [39] 만주어로 도로 얼덩거.
  • [40] 상간 황제. 효천부운입중체정지문성무지용인자검근효민관정성황제(效天符運立中體正至文聖武智勇仁慈儉勤孝敏寬定成皇帝).
  • [41] 터르 게렐트 칸.
  • [42] 綿寧(면녕)에서 旻寧(민녕)으로 바꿨다.
  • [43] 만주어로 굽시 얼기영거.
  • [44] 일러투 황제. 협천익운집중수모무덕진무성효연공단인관민장검현황제(協天翊運執中垂謨懋德振武聖孝淵恭端仁寬敏莊儉顯皇帝).
  • [45] 투기멜 엘베그트 칸.
  • [46] 만주어로 요오닌가 다산.
  • [47] 필링가 황제. 계천개운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繼天開運受中居正保大定功聖智誠孝信敏恭寬毅皇帝).
  • [48] 부린투 자사그치 칸.
  • [49] 만주어로 바다랑가 도로.
  • [50] 암발링구 황제. 동천숭운대중지정경문위무인효예지단검관근경황제(同天崇運大中至正經文緯武仁孝睿智端儉寬勤景皇帝).
  • [51] 바다라울트 투르 칸.
  • [52] 만주어로 거훙거 요소.
  • [53] 후에 구황실이 올린 시호로는 배천동운법고소통수문경부관예정목체인입효민황제(配天同運法古紹統粹文敬孚寬睿正穆體仁立孝愍皇帝). 하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고 부른다. 참고로 그 의미는 겸손할/사양할 손.
  • [54] 휴브트 요스 칸.
  • [55] 이미 만주족이 중국에 한참 동화된 후의 청의 마지막 황제라 그런지 만주식 발음은 알려져 있지 않다. 흔히 알려진 푸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발음. 헨리(Henry)라는 영어 이름이 있는데, 푸이의 개인교사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헨리 8세의 이름에서 따서 붙여준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1920년부터 1932년까지 서양인들과 대화할 때만 잠깐 사용되었을 뿐이며, 중국에서는 잘 쓰이지도, 알려지지도 않았다. 청나라 때는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당연히 본명이 불릴 일이 거의 없었고, 제위를 잃고 평민이 된 후에는 그냥 푸이 선생이라고 불렸다. 아이신기오로라는 성은 잘 쓰이지 않았다. 그의 동생 중 한 명인 푸런(溥任, 1918.8.17~2015.4.10)은 이름을 진유즈(金友之)로 바꿨다. 즉, 이름을 바꾸면서 성도 진(金)씨로 함께 바꾼건데, 현재도 많은 만주족들은 진씨 성을 사용한다.
  • [56] 사후 베이징 바바오산 혁명공묘(北京 八宝山 革命公墓)에 묻혔다가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마련된 화룡황가능원(華龍皇家陵園)에 매장되었다.
  • [57] 건주위 추장
  • [58]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심심하면 쳐들어와 여진족들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개박살내서 여자,노인,아이들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조선에 쳐들어오기 전에 미리미리 박살냈다.
  • [59] 음력 5월 5일날 출전하려고 했는데 음력 5월 4일 밤에 죽었다는 야사가 있다. 실제로 효종이 음력 5월 4일에 죽은 건 맞지만, 그 이하는 어디가지나 카더라. 대제국을 상대로 한 출정이 장난도 아닌데 그렇게 소리소문 없이 비공식적으로 가능할리가 없다.
  • [60] 당시 청의 상태도 막장이었기에 의외로 대등한 관계였다.
  • [61] 사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나라는 조선에게 일본도 입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 후 청나라가 중국 본토 점령에 올인하는 와중에 흐지부지된듯 하다. 실제로 청나라는 병자호란 직후에도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에는 전혀 관여를 안하는 등 일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