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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last modified: 2014-12-02 03:54:57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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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기타

1. 개요

장 칼뱅에 의해 발흥된 칼뱅주의 개신교가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영국 국교회(성공회)와 대립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깨끗하다'는 의미로 개신교도들이 퓨리턴(puritan)이라고 자칭했다. 그래서 교도. 청나라 교도들이 아니다.

2. 역사

금욕주의와 강경한 성공회 반대 노선을 취한 탓에 탄압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찾으러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반대로 청교도는 영국 성공회, 곧 왕실과 정부에게 처음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던 것이 아니다.

탄압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제임스 1세때였다. 청교도는 가톨릭에 대해서 성공회 이상으로 반감을 가졌지만, 그들의 시각으로는 전례 같은 형식면에서 가톨릭과 차별화되지 않은 성공회 역시 좋지 않게 보였다. 그러던 차, 때마침 가이 포크스 등이 연류된 영국 국회의사당 화약 폭파 음모로 영국내 가톨릭의 입지가 위태해지자, 청교도들은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을 통해 영국내에서 가톨릭과 교황의 영향력을 뿌리 뽑길 바랐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서 가톨릭 성향이 남아있는 영국왕 제임스 1세는, 메리 여왕엘리자베스 1세의 막장극을 자기 대에 되풀이되어 좋을 게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 하에 음모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처벌과 성공회의 입지 확대만을 꾀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가톨릭과 야합하려는 모습으로만 보였던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 맞을 짓반항했고, 그때부터 청도교식 예배를 금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결국 성공회로 대표되는 영국 주류 교회와의 마찰로 스스로 왕따를 자청한 것.

물론, 그래봐야 프랑스에서의 위그노 학살을 생각하면 대단한 탄압도 아니었다. 그 유명한 이플라워 역시 근왕적인 태도를 취했다.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영어가 귀찮다면 여기로)에서 "제임스의 충성스런 신하들..."이란 식으로 자신들을 지칭한 것을 볼때 어느정도는 근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청교도 주류는 영국 내에서는 소수파였음에도 상공계급(부르주아, 젠틀맨)에서는 상당수를 차지했기에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에 계속 영국에 잔류하며 반국왕운동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 영국 스튜어트 왕가가 성공회를 유지하면서 가톨릭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청교도는 지속적으로 내전에서 의회파를 지지했고, 기어이 호국경 크롬웰로 정권 접수(교도 혁명-1642)에 성공했지만, 그가 죽자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다.

결국 청교도의 시대는 찰스 2세의 복위로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역공으로 청교도는 거의 소멸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다시 복권의 단계를 밟은건 예 혁명 때였으나, 이 시기부터는 이미 국교회 우위의 상황이 유지되었기에 그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되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금욕, 근검, 절약 등으로 도리어 우위를 점유했다는 견해가 많은데,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장이 스 베버의 청교도 자본주의다.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대표되는 주장인데, 이게 기독교를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전환되어 현장에서 써먹히기도 한다. 사실 청교도의 금욕주의와 인간의 욕망에 기반한 자본주의의 연결고리가 좀...

3. 기타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성공회에서 떨어져나온 분리주의자들이고, 청교도들은 성공회 내부에 남아 저항을 계속한 이들이 자처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이플라워 같은 이들의 기록에는 청교도라는 표현이 전혀 없다.

청교도 문학으로는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