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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

last modified: 2019-03-26 00:56:2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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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1989년 6월 4일에 있었던 중국의 민주화 항쟁
2. 1976년 4월 5일에 있었던 봉기 혹은 혁명

1. 1989년 6월 4일에 있었던 중국의 민주화 항쟁

2. 1976년 4월 5일에 있었던 봉기 혹은 혁명

마오쩌둥 체제 말기인 1976년 4월에 일어났던 봉기.,, 위의 천안문 사태와는 천안문광장이라는 같은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 빼고는 관계가 별로 없다. 같은 장소에서 주석과의 갈등으로 실각한 온건파 전 총리의 사망을 추모하는 데서 시작되어 실제적인 거대한 (충돌을 포함한) 시위로 일어났다는 것은 공통점이나 이후의 전개와 후일의 중국 당국에서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반발한 민중의 봉기이다. 배경은 대강 이러한데, 마오쩌뚱은 본래 저우언라이를 중용하고 있었으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마오쩌뚱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마오쩌뚱에게 충성을 바치고 때때로 자아비판을 하는 등 마오에게 숙이는 모습을 보여줫으나, 마오는 4인방을 이용하여 저우언라이를 견제하게 되었다. 특히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미-중 간 외교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을 때, 저우언라이가 대부분의 실무 회담을 담당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저우언라이의 명성이 높아지자 마오의 저우언라이 견제 움직임은 더욱 강해졌다.

국내에서도 문화대혁명병크를 그나마 수습하고 홍위병으로부터 대놓고 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보호를 해주는 사람이 저우언라이였기 때문에, 관료, 군인, 민중들은 마오의 직계 4인방 보다는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에게 더 호감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마오는 저우언라이의 국제적, 국내적 인기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저우언라이를 몰아낼 꼬투리를 잡지 못했고, 억지로 저우언라이를 쳤다가는 대규모 반발을 부를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한다.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마오는 기뻐하였고, 4인방 측은 저우언라이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 추모 집회가 각지에서 계속되었고, 추모 집회에서는 자연스럽게 4인방 비판이 터져나왔다. 이렇게 중국은 저우언라이 총리 사후 자본주의화 세력인 주자파 계열을 까는 극좌파가 득세하는 상황이 되었다.[1]

그런 상황에서 4월 4일은 명절이었다. 베이징 민중들이 故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 기념비를 향한 행진을 했다.[2] 전통적으로 조상의 무덤을 참배하고 벌초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이날의 저우언라이 추모 집회에는 특히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다. 저우언라이를 추모하여 화환을 걸고, 시를 바치고, 인터내셔널 노래를 부르며, 심지어 감정이 격해져서 4인방을 비판하는 연설도 터져나왔다. 공안에서는 단속을 나왔는데 워낙 사람들이 격렬하게 반응하다보니 그만 단속을 포기해버렸다.

이에 분개한 4인방이 지시를 내려 4월 5일에는 공안이 추모집회를 공격하는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 정부는 이 기념비에 바쳐진 화환을 전부 철거해버렸다. 그러자 성난 민중들이 4월 5일에 봉기하여 건물을 부수고 자동차에 불을 붙이는 등의 폭력 시위를 전개했다. 심지어 마오쩌둥 체제를 뒤집어 엎으려는 시도도 일어났다. 중국 공안은 이들을 반혁명세력으로 간주하고 철저하게 탄압했으며, 4인방은 이때다 싶어서 덩샤오핑 부주석에게 모든 책임을 물리고는 실각시켰다.

하지만 4인방에 대한 반감은 이미 극에 달하여, 인민일보는 이를 "반혁명사건"으로 보도하였으나, 4월 12일에는 인민일보에 "괴벨스"라고 비난하는 벽보가 붙을 정도였다.

그 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마오쩌둥 비판론이 힘을 얻으면서 2년 후인 1978년에 들어서는 '천안문 사건은 혁명이었다' 라는 평가를 받고 4.5 운동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89년의 천안문 사건에 대한 평가도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존재하지만 문혁은 누가 봐도 명백한 병크인 반면 천안문 사태는 당시 중국 당국을 무작정 까기에는 워낙 사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재평가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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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이 점에서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는 한다. 온건한 2인자가 죽고 추모 열기가 지속되었는데 무리한 진압이라는 병크가 사건을 키운 것이다.
  • [2] 기념비에는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