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찰리 매뉴얼

last modified: 2014-02-19 16:26:32 Contributors



이름 찰리 매뉴얼 (Charles Fuqua Manuel)
생년월일 1944년 1월 4일
국적 미국
출신지 웨스트 버지니아주 Northfork
포지션 외야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좌타
프로입단 1963년 미네소타 트윈스 자유계약
소속팀 미네소타 트윈스(1969~197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974~1975)
야쿠르트 스왈로즈(1976~1978)
킨테츠 버팔로즈(1979~1980)
야쿠르트 스왈로즈(1981)
지도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타격코치 (1994~1999)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2000~2001)
필라델피아 필리스 감독 (2005~2013)

197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야마다 히사시
(한큐 브레이브스)
찰리 매뉴얼
(긴테쓰 버팔로즈)
기다 이사무
(닛폰햄 파이터즈)


메이저리그일본프로야구에서 활동했던 선수이자 前 메이저리그 감독. 2000년대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덕장으로, 선수생활 초창기에 그리 주목받지 못하다가 일본 리그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서 명성을 날린 이력이 있다.

일어 가타카나로 チャーリー・マニエル이라 표기하는데, 2000년대 들어서 일본 언론에서는 마니엘(マニエル) 대신 영어발음에 가까운 마뉴엘(マニュエル)로 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에 일본에서 임팩트가 있었던 인물이라 경력이 좀 오래된 기자들은 아직도 마니엘을 선호한다고. 한편, 한국에서도 매뉴얼 감독의 일본시절 활약을 알고있는 팬들은 '매뉴얼' 대신 'C.마니엘'로 표기한다.

Contents

1. 선수시절
1.1. 그저 그랬던 메이저리그 생활
1.2.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용병
2. 지도자 시절
2.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2.2.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3. 이모저모


1. 선수시절

1.1. 그저 그랬던 메이저리그 생활

매뉴얼 감독은 고교시절 야구, 미식축구, 농구, 육상을 병행했을 정도로 만능스포츠맨이었다. 본인은 농구에 흥미가 더 있어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할 계획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당뇨·심장 합병증 투병 중에 자살을 하는 바람에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야구선수가 되길 결심했다. 그리고 그는 미네소타 트윈스에 입단하게 된다.

6년 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보내고 1969년에 메이저리그에 콜업됐지만 외야 백업과 대타요원으로 활약, 그 당시 트윈스 자체가 안습했던 시절이라 그리 주목을 받지 못하고 1974년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이 당시 다저스는 내셔널리그 최강팀. 고로 그에게 기회가 별로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다저스에서도 대타요원으로만 활약했다. 메이저리그 6년 간 홈런 4개가 고작 전부였던, 별볼일 없던 타자였다. 그런데...

1.2.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용병

1976년 그의 나이 서른둘이 돼서 미국을 떠나 일본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적을 옮긴 매뉴얼은 첫 해에 새로운 리그에 적응을 하느라 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2년차인 1977년부터 대 폭발했다! 1977 시즌 타율 .316, 42홈런 97타점을 기록하며 일약 일본리그를 쥐고 흔드는 강타자로 자리잡게 됐다. 소속팀 야쿠르트도 창단 이래 최초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리그를 쥐락펴락 하셨던 대투수 이 분이 계셨어도 답 없는 팀이었다는 걸 상기하자면...

1978 시즌, 야쿠르트는 오스기 카츠오-찰리 매뉴얼-스기우라 토오루로 이어지는 강력한 클린업을 구축하며 처음으로 일본시리즈를 제패했다. 1978년 시즌 성적은 타율 .312, 39홈런 103타점. 하지만, 관리야구의 창시자 로오카 타츠로 감독은 매뉴얼의 느린 발과 엉성한 수비실력을 줄곧 깠고, 당시 좌완투수가 필요했던 야쿠르트의 사정에 따라 매뉴얼을 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 시켰다. 그리고 야쿠르트는 이듬해에 처참히 무너져 좆망이 되고, 반대로 킨테츠는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를 얻으며 일약 파리그의 강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1979~80년은 매뉴얼의 가장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가히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할 수 있을 듯. 1979 시즌 타율 .324, 37홈런(리그 1위), 94타점, 장타율 .712(리그 1위)를 기록하여 외국인 선수로서는 최초로 양대리그 출범 이후 시즌 MVP 수상을 했다.[1] 1980 시즌 타율 .325, 48홈런(리그 1위), 129타점(리그 1위), 장타율 .673(리그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이 시기 OPS가 10할을 넘은 걸 보면 그야말로 파리그를 씹어먹었다. 게다가 소속팀 킨테츠 버팔로즈를 2년 연속 파리그를 제패하며 일본시리즈로 이끌었다. 하지만 두 번의 일본시리즈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무릎을 꿇었다. 정말 안습인게, 이 당시 감독이 일본프로야구 콩라인의 대부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이 팀을 이끌던 시절이라...

이 당시 그의 특유의 승부근성을 옅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1979 시즌 중 롯데 오리온즈의 야기사와가 던진 빈볼을 맞아 턱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어 97경기만 뛰고도 저런 무시무시한 성적을 냈다.[2]

저 당시 매뉴얼은 야구 헬멧에 미식축구 페이스 마스크를 붙인 특수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섰는데, 이 때 많은 일본야구팬들이 놀라 붉은 마귀(赤鬼 아카오니)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이고 어떻게든 첫 우승을 안기고 싶다고 했지만 결국 킨테츠와의 관계가 깨지게 된다. 당시 돈질에 아낌이 없었던 세이부시카고 컵스의 강타자 스티브 온디베로스와 3년에 10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계약 소식을 들으며 일본 최고의 용병에 걸맞는 대우를 제안했으나 킨테츠는 1년계약을 요구했고, 결국 관계가 틀어져 매뉴얼은 로오카 타츠로 감독이 사임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돌아왔다. 그리고 킨테츠는 다시 조트망의 수렁으로... 아니지. 일본시리즈 우승도 못해보고 역사 속으로 빠이빠이 일본에서의 마지막 생활은 평범하게 맺은 채 1981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완전 은퇴하게 된다.

2. 지도자 시절

2.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은퇴 뒤 매뉴얼은 바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의 타격코치-감독을 맡으며 지도자 경력을 쌓아갔다. 영화 메이저리그가 생각날 정도로 안습이었던 인디언스 산하 마이너리그 팀을 재정비하여 좋은 타자를 발굴했고, 그의 성실성을 인정받아 1994년부터 인디언스의 정식 타격코치로 승격된다. 이 당시 알버트 벨, 짐 토미, 매니 라미레스 등의 무시무시한 빅 뱃을 키워냈고 리그에서 가공할만한 타격진을 구축하며 두 차례의 월드시리즈(1995, 1997)를 경험했다.

이후 1999 시즌이 끝나고 은퇴한 마이크 하그로브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승격됐다. 2000 시즌에는 갑툭튀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밀려 지구 2위를 기록했지만, 2001 시즌에 다시 중부지구 패권을 차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2002년 마크 샤파이로 단장 취임 후 시작된 팀의 리빌딩과 맞물려 성적추락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시즌 중에 자진 사임을 하게 된다.

2.2.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2004년 중 사퇴한 래리 보와 감독 이후 임시감독 체제를 거쳐 2005년 필리스는 매뉴얼 감독을 임명했는데, 이는 에드 웨이드 단장의 보기드문 치적으로 평가받는다(...) 2005년 필리스를 처음 맡아 와일드카드 레이스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한게임차까지 추격했으며, 팻 길릭 단장이 취임하면서 자신의 애제자 짐 토미와 주전 우익수 바비 아브레유 등의 베테랑들을 팔아넘기고 체이스 어틀리, 라이언 하워드, 콜 해멀스, 셰인 빅토리노, 제이슨 워스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와 타팀에서 주워온 쩌리들을 중용하기 시작한 마당에 팀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아 필리스의 5년 연속 디비전 우승과 월드시리즈 제패 등 필리스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다만 루벤 아마로 주니어 단장이 취임한 이후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3] 매년 은퇴 떡밥이 나오기도 했다.

필리스에서도 인디언스 시절처럼 작전야구나 수비 강화 등 MLB 전체에 비하면 스몰볼로 분류되는, 그런 형태의 동양적인 야구 색채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리드오프 지미 롤린스의 뒤에 배치할 2번타자로서 작전야구 구사에 능한 2루수 플라시도 폴랑코[4]를 기용하기 위해 짐 토미팻 버렐이 부상 중이거나 인터리그를 뛸 때 체이스 어틀리를 1루로 돌리거나 폴랑코를 좌익수 3루수로 옮기는 등의 (미쿡 야빠들은 상상도 못할) 갖가지 괴랄한 선수기용을 벌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론 라이언 하워드의 신인왕모드 갑툭튀까지 맞물리고 팻 버렐도 돌아오자 폴랑코는 끝내 자리가 없어져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떠나게 되었지만, 매뉴얼 감독은 5년 뒤 폴랑코를 다시 3루로 돌려 쓰겠다는 의지를 발휘하며 아마로 단장에게 폴랑코를 다시 데려올 것을 요청하였고, 2010년부터 2012년까지 폴랑코는 필리스의 3루수 겸 2번타자로 활약했다.[5]

2011년 종료 후에는 통산 600홈런을 넘어선 애제자 짐 토미가 대타/1루 백업으로 필리스에 다시 입단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2012년부터 굉장히 많이 까였다. 기본적으로 투수교체 타이밍이나 불펜 운용 등이 썩 좋지는 않다는 평이었지만 타격코치 시절부터 타자 조련에는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었기 때문에 까이지 않았는데 투수진의 상태가 점점 막장화하며 아마로 단장과 함께 까임을 양분했다. 그나마 2013년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되고 은퇴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아마로를 더 많이 까곤 하지만, 기자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한 기레기가 좋지 않은 성적으로 어그로를 끌자 분기탱천하여 "어느 천년에 10득점 경기를 하겠노ㅋㅋㅋㅋㅋ" 하는 빈정거림에 "너이새끼 좀 쳐맞자 내가 널 때려눕히고 나면 될걸?" 하는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벌어진 2013년 6월 24일 경기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원정에서 경기 후반부로 갈수록 얻어맞아나가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클리프 리를 완봉하게 해준답시고 9회초 2사 3루 득점권에서 대타로 교체하지도 않고 놔뒀다가 연속안타 허용한 후 뒤늦게 조나단 파펠본으로 교체했지만 동점 허용하고 연장에서 끝내기 패배까지 당한 날이라서 매뉴얼 감독이 안 까일 수는 없는 날이었다는 것. 팬들은 그저 건강도 안 좋은데 괜히 열불내지 말고 말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라며 예전같이 실드를 쳐주지 않는, 진절머리가 난 반응을 보였다.

결국 8월 16일자로 해임되었다. 감독대행으로는 코치를 맡던 라인 샌버그. 일단은 이후에도 구단에서 다른 직책을 맡게 될 것이라고는 하나 나이와 건강을 감안할 때 이것이 감독으로서는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다.

3. 이모저모

  • 일본-미국 양국 리그에서 선수-감독으로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손꼽힌다. 그와 비슷한 케이스로는 데이비 존슨 감독(워싱턴 내셔널스)이 있다. 다만, 데이비 존슨은 일본에 가기 전에 메이저리그에서도 괜찮은 내야수였지만 일본에서는 '교진군 최초의 외국인 선수'라는 타이틀만 남았을 정도로 활약이 미미했다.

  • 그의 팀 운영 스타일은 동양 야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01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감독 재직시절 로베르토 알로마를 3번 타자로 기용하여 당시 미국 야구계에 충공깽을 선사했다.[6] 이후 2010년 H2O와 2011년 PHantastic 4가 등장하기 전에는 불펜에 중점을 두는 투수진 운영과 빠른 발에 작전 수행능력이 좋은 선수를 상위타선에 배치하는 등의 타선 운영이 그 예다. 이런 타선운영은 2012년 어틀리와 하워드가 모두 부상으로 이탈한 때에도 보였는데, 나이가 들며 장타력이 많이 떨어진 지미 롤린스를 3번에 배치하기도 했다.

  • 2008년 10월 10일 어머니를 여의었다. 문제는 그 기간이 필라델피아의 플레이오프 기간이었던 것. 다행히 필리스가 LA 다저스를 상대로 5경기만에 승리를 거두며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
  • [1] 양대리그 이전 단일리그 시절에 빅토르 스타르핀이 MVP를 수상하긴 했지만 스타르핀은 유년시절 러시아 혁명을 피해 일본에 정착했기에 외국인 선수가 아닌 사실상 일본선수로 본다.
  • [2] 부상 당시 5시간 반이나 걸리는 심각한 수술이었고 말 그대로 시즌아웃이어서 부상을 당한 직후 미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고. 하지만 매뉴얼 감독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출장하면서 '킨테츠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란 말로 일축했다.
  • [3] 인디언스 시절부터 결장 막힘 증세로 인공항문을 달기도 했다고.
  • [4] 작전구사에 있어 필수요소인 밀어치기와 일반적인 당겨치기에 모두 능하여 타구를 모든 방향으로 날려보내면서 3할을 칠 수 있고, 삼진도 잘 당하지 않으면서 내야 수비도 전천후로 뛰는등 여러모로 쓸모가 많아서 좋은 중심타선을 보유한 MLB 감독들이 2번타자로서 가장 선호하는 선수 중 하나다. 역대 두번째로 두개의 포지션에서 골드글러브를 수상하는 기록을 세운 선수기도 하다. 항목 참조.
  • [5] 폴랑코가 없던 시절에는 빅토리노가 2번을 쳤다.
  • [6] 일반적으로 3번 타자는 거포가 자리하는 타순인데, 작전야구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타율 좋은 작전형 똑딱이 3번타자가 유행했고, 이후로도 간간히 교타작전형 3번타자가 기용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