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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드라마)/고증

last modified: 2015-04-13 20:51:14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복식
2.1. 관복
2.2. 촌마게
2.3. 당대 기모노와 머리모양
2.4. 명나라 황제와 관료 복식
2.5. 명나라 후궁 복식
2.6. 조선 저고리
2.7. 류큐 복식
3. 무기류
3.1. 함선
3.2. 휴대 장비
3.3. 갑옷
4. 문화 및 제도
4.1. 외국어 대사
4.1.1. 일본어
4.1.2. 중국어
4.2. 형벌
4.3. 바둑
4.4. 지도
4.5. 건축
4.6. 일본측 부장들에 대한 묘사
4.7. 조선 사회에 대한 묘사
4.8. 이순신 등장 관련

1. 개요

외면적인 고증은 이전에 많이 나온 지적들을 피드백하였는지 그럭저럭 많이 나아진 모습이다는 개뿔이고 아직도 자잘한 고증에 오류가 있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대한 묘사는 아직까지 부족한 점이 많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다. 특히 다수의 사극에서 원성을 들었던 일명 포졸복에 비판이 있어 눈길을 끈다.

2. 복식

2.1. 관복

예전 조선시대 사극에서 내시들이 쓰는 관모에 사모뿔이 안 달려 있게 나온 것과 달리 여기서는 제대로 달려 나온다.

2.2. 촌마게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 측 등장인물이 촌마게를 틀고 있는데[1] 촌마게는 임진왜란과 동시대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아닌 그로부터 약 70년 뒤인 에도 시대 중기부터 틀기 시작했다. 당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앞머리를 밀고 드라마에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묶었던 센마게를 주로 틀었다.

하지만 위의 지적은 다소 잘못된 것이다. 전국시대 때부터 이미 많은 사무라이 사이에 촌마게가 성행했었다. 특히 자주 머리를 밀어야 하는 특성상 촌마게는 높은 지위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높은 신분일수록 촌마게를 한 사람들의 비율이 증가한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전체적으로는 챠센마게를 한 사람이 더 많았지만 고위층 인사들은 촌마게를 한 경우가 많았다. 징비록에 주요 일본인들의 촌마게 여부는 실제 일본에 남아있는 초상화 등과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촌마게가 엉성하다고 까는 지적도 있는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촌마게의 형태는 에도 시대의 것이지만, 전국시대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촌마게는 초기 형태로, 드라마에 나온 형태가 제대로 된 것이다.

2.3. 당대 기모노와 머리모양


네네, 요도도노를 포함한 시녀들이 입은 기모노의 오비의 폭이 넓은데 무로마치 시대에서 에도시대 초반의 오비는 폭이 좁고 가늘었다.[2][3]
NHK가 협찬을 제대로 해준게 맞긴 맞냐(...)[4]

또한 9화에서 히데요시의 직속 시녀 미츠키의 틀어올린 머리는 에도 시대의 양식으로, 아즈치 모모야마 때의 틀어올린 머리는 유녀들이 상투처럼 틀어올린 카라와마게(唐輪髷)라는 머리가 있었다.

2.4. 명나라 황제와 관료 복식

드라마 징비록에 나오는 명나라 관료(우측)과 태감(좌측)의 복식 중국 사극 홍루몽에 나오는 명나라 관료의 복식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국 사극에서는 고려 시대나 중국 왕조의 관료들의 머리 모양을 장발 상투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런 거 없다.[5] 명나라 관료들 초상화를 보면 관모를 썼을 때 머리카락이 모두 감춰지는 것을 알 수 있다. [6] 헌데 정도전에서도 이 문제는 고쳐지지 않더니, 징비록에서도 공개된 명나라 배역들의 사진을 보아 역시 고쳐지지 않은 듯하다. 아무래도 조선과 명나라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확실히 하기위해 무시한듯 하다. 또한 관료들의 사모에 달린 날개 모양의 뿔도 아래쪽으로 쳐져 있는데 실제론 당시의 명나라 사모뿔은 조선과 같이 옆으로 평평하게 펴져있었다. 역시 조선과 차이점을 보이기 위하여 일부러 그런 듯하다.

하지만 사실 많은 중국 사극에서 명나라 관료들을 장발 상투로 묘사하고 있다. 본국의 드라마가 그렇게 묘사하느 만큼 실제 명나라 관료들을 이러한 장발 상투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무협영화 신 용문객잔에 나오는 명나라 환관들의 복식


또한 드라마와 달리 실제 명나라 태감(환관들의 우두머리)은 머리에 강차모를 쓰고, 옷은 세 겹으로 입었다. 또한 태감들은 하얀 모시나 누런 비단으로 만든 행주같은 수건을 가지고 다녔는데, 길이 다섯 자 너비 세 치에 의복 안감의 오른쪽에 반 정도가 바깥으로 드러나도록 했다. 때문에 한눈으로 봐도 환관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드라마 징비록의 만력제썩소 중국 사극 여의명비전에 나오는 명나라 황제의 복식
[7]

황제의 복장은 정도전 보다는 고증이 잘되어 있다. 이전에 당나라 황제 복장을 재활용한 정도전과는 다르게 적어도 익선관은 흑색에 금실 장식이 되어있는 형태로 등장했으며 곤룡포 또한 명나라 후기에 면복의 12가지[8] 문양이 들어간 형태로 잘 고증되었다. 다만 기본 색감이 명나라 초기 황룡포와 비슷하다 초상화에 나온 명나라 후기 곤룡포는 색감은 황색이라기 보다는 주황색에 가깝다.

2.5. 명나라 후궁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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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에서는 정귀비를 포함한 만력제의 후궁들이 당나라스러운 옷을 입고 나오며 머리에는 여러가지 장신구들을 꽂고 나온다. 하지만 실제 당시의 명나라 황후와 후궁들은 평상시에 머리카락이나 실을 짜내어 고깔처럼 만든 적계(狄髻).특계(鬏髻)라는 모자를 머리를 올려 묶은 다음에 착용하였으며 징비록과는 달리 직령, 단령, 배자 같은 옷을 걸쳐 입었다. 아무래도 제작비 때문인지 징비록에서는 화려하게 보임으로서 중국인들이라는 느낌만 내주는 선에서 만족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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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궁중 여인 복식(황후)

2.6. 조선 저고리

여인들의 저고리가 가슴 아래까지 올 정도로만 긴데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까지도 여인들의 저고리는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상당히 길었다. 징비록에서 보이는 여인들의 저고리는 18세기 중엽의 저고리에 가깝다.[9]

16세기 저고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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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당의도 어깨와 가슴에 용보를 붙인 채로 나오는데 당의에 용보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18세기에 당의를 소례복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징비록의 배경이 되는 시기에는 왕비는 평상복으로서 저고리, 장저고리, 배자, 당의를 입었으며 소례복, 관복으로서는 단령삼을 입었다.

2.7. 류큐 복식


히데요시에게 군량 2만 석을 상납하라고 협박당하고, 명의 황제에게 히데요시의 협박을 일러바치는 류큐 왕자의 복식이 제법 그럴싸하게 재현되었다. 오른쪽이 오키나와 박물관에 전시된 류큐 전통 의상. 다만 쇼네이 왕항목에서 볼수 있듯이 당시 류큐또한 중국식 복제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왕자라는 위치라면 단령으로 표현하는 것이 좀더 옳았을 것이다.

3. 무기류

3.1. 함선


7화에 통신사 서장관 허성이 일본에 체류 중에 살펴본 남만(포르투갈)에 대한 묘사에서 당시에 사용된 카락선이 CG로 구현되었다. 당시 판옥선의 크기는 약 200톤 내외인데, 동시기 유럽에는 1500톤짜리 대형 카락도 있었고 500톤 규모의 카락은 비교적 흔한 편이었다. 드라마에서처럼 카락선이 좀 크게 묘사된 것 자체는 고증 오류가 아니지만, 화면에서 볼 때 CG의 거리 설정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참고로 콜럼버스가 활동하던 시기는 15~16세기인데 그 때로부터 왜란은 약 백년 뒤의 일이고, 그 사이의 기술 발전을 감안해본다면 크기 증가는 용납이 되는 수준.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토탈워 쇼군2에 나오는 서양함선은 안택선보다 거대하게 나온다.

안택선세키부네도 세트를 만들고 이를 CG로 합성하여서 함대규모로 완성하였다. 꽤 고증이 되었지만, 노가 없고 CG 티가 난다는 것이 단점. 일본군 함선 CG촬영에 관한 블로그 내용

3.2. 휴대 장비

조선군 병사들이 당파가 아닌 보통 창을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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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의 발사 장면 역시 도화선이나 반자동 소총으로 변해버린 예전 사극들과 달리 제대로 되어 있다. 사소한 문제이지만 조총 발사시 효과음도 불멸의 이순신 시절에는 근현대에 제작된 권총 같은 발사음이 났으나 이점도 개선되어 보인다. 하지만 흑색화약 사용 총기 특유의 뭉게뭉게한 연기는 재현되지 못했다. 더불어 걸어가며 쏘질 않나, 아무런 호위 부대도 없이 조총 부대만으로 조선군을 공격하질 않나, 칼이 닿을 정도의 근거리에서 그것도 민간인 학살용도로 조총을 쏘질 않나, 비록 반자동소총 마냥 연사는 안하지만 사용방법에 아직도 반자동소총의 흔적이 남아 있다.(...) [10]


그리고 탄금대 전투가 묘사된 15화에서 새로운 오류가 터졌는데, 방아쇠를 당기지도 않았는데 화승이 앞으로 나아가 타오르고 있고 몇 초가 지난 뒤에 방아쇠를 당겨 발사하는 황당한 장면이 나왔다. 군필자가 다수인 나라의 총기 고증 수준이 이렇다. 화승 내미는 걸 노리쇠 전진 같은 걸로 알았나?


또한 조선군이 쓰는 칼이 일본도 마냥 길고 허리에 칼 손잡이가 앞으로 가도록 차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고증이다. 당시 조선시대에선 활을 쏘기 쉽게 칼 손잡이가 뒤로 가도록 착용하였으며 칼도 일본도가 아닌 일본도에 비해 짧은 환도를 사용하였다. 품계가 높았던 무관은 장도를 사용하였을지도 모르나 일반 병사들이 장도를 썼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조선의 칼집에는 고리가 달려 있다. 칼집의 앞쪽에 보면 두 개의 고리가 있는데 그것을 벨트에 걸어 평소에는 뒤로 돌려 두거나 하여 활이나 장거리 무기를 사용함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가까이 오거나 하여 칼을 쓸 필요가 있을 때 다시 앞으로 돌려 칼을 뽑았다. 한마디로 손에 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극중에서 기마 장수 및 병사들이 일본 장병처럼 허리춤에 칼을 찔러넣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검은 칼집에 쿠리카타가 없으므로 이런 식으로 차고 다니면 칼코등이가 허리에 걸려 계속 쿡쿡 찌르게 된다. 여기에 더해 코등이에 칼날 양쪽으로 궤계혈이 나 있는 등, 임란 이후에나 일본도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장식이 붙어있고, 조선식 잠금장치도 없다. 계속 손으로 들고 다니고, 허리춤에 패용할때도 칼날 방향이 위, 아래 등 통일성마저 없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제작비일 것이다. 옛날 소품들은 고증따위 씹어먹어서 일본도 식으로 만들었을테고, 이제와서 제대로 만들려고 해도 띠돈이나 잠금장치를 칼집에 달려면 그냥 칼만 만드는것보다 당연히 훨씬 비싸진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선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에 비하면 시각적으로 달라지는게 크게 없으니... 조선 도검에 관련해서는 거의 고증을 포기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듯 하다.

그래도 동래성 장면에서, 잠깐이지만 송상현이 제대로 환도를 패용하였다.

부산진 전투 장면에서 처음으로 화포 사격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화포의 반동을 병졸 서너사람의 팔힘으로 받아낸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 조선병사들의 체구가 대단했다고 했으니 고증?

잠시 스치는 정도지만 일본군도 마냥 조총을 쓰지 않고 활을 쓰거나 궁병이 등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본군의 화살통과 활집은 조선군의 것을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군 궁병은 활과 화살통을 허리춤에 차야 맞지만 예전 사극들과 마찬가지로 등에 매고 다니고 있다.

부산진성의 무기창고에서 등패가 보관되어 있는 모습이 나온다. 방패+환도 조합의 팽배수 조선군도 나오고 방패로 비를 피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등 다양한 방패 운용법을 보여준다. 조총에 시원하게 관통되는 안습한 모습도 고증.

일본군이 쓰는 일본도도 특이하다. 소서행장과 가등청장등 일반대중이면 생각나는 이미지의 일본도를 지니고 있으나 일반 야시가루들은 칠이 되지 않은 목재칼집을 가진 단순화된 칼을 지니고 있다.

3.3. 갑옷

드라마 징비록에 나오는 류성룡의 갑옷(찰갑) 류성룡이 임진왜란 당시 입었던 갑옷(찰갑). 류성룡의 종가에 전해져오는 것이다. 철을 가죽끈으로 연결한 형태로, 투구는 앞면에 반월형 가림이 있고 네 쪽의 철조각을 연결하여 만들었으며 비교적 보존 상태가 좋다.

조선군의 갑주 고증 상태는 아직 미지수. 미리 공개된 몇몇 사진들을 통해서 신립이나 류성룡 등이 입은 찰갑의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었으나, 정작 이 부분이 작성된 시점까지는 흔히들 말하는 포졸복을 입은 조선군이 주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더불어 水자가 씌여진 포졸복을 입고 있던 불멸의 이순신의 수군 묘사도 다시 모습을 보이고 있다.[11] 이 포졸복은 방송 초반 예고편에서 뿐만 아니라 드라마 곳곳에 등장하며 아쉬움을 주고 있다. 물론 아직은 극히 초반부에 해당하지만 뭔가 불안하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나오는 편. 하지만 바로 전작인 정도전에서 여말선초 군대의 갑주로 찰갑두정갑, 경번갑을 사용하기도 했었고, 미리 공개된 스틸컷에서 포졸복이 아닌 제대로 된 갑주를 어느정도 찾아볼 수 있었던 만큼 조금은 더 지켜보자는 입장도 있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하면서 본격적인 임진왜란이 시작한 13화 부산진 전투동래성 전투장면을 보더라도 성벽위의 관군의 복장이 장수들을 제외하고 병졸들은 죄다 파란 포졸복에 水를 새긴 복장이나 검은색 포졸복장을 입고 있다. 아마도 제작비 문제로 불멸의 이순신에서 사용했던 복장을 재활용 하는 듯..

두정갑주 동래성에서 출토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첨주형 투구와 찰갑의 복원품.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 등은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사실 상식적으로 전투시에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이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갑옷을 착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선교사로 온 포르투갈 사제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라고 나와 있다.[12]

또한,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 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진왜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병사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난중일기 임진년 3월 6일자에서도 "맑았다. 아침을 먹은 뒤 출근해 군 기물을 점검했다. 활, 갑옷, 투구, 통아, 환도가 깨지고 헐은 것이 많고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색리, 궁장, 감고 등을 논죄했다."라는 일기를 볼 때, 각 진영에서 갑옷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전투 중에 갑옷을 입었다는 소리지 그저 창고에 보관만 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조선군 전원이 갑옷을 입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동시대 유럽 군대, 특히 쉴새없이 유럽에서 전투를 치러온 스페인군도 전원이 갑옷으로 중무장하지는 못했다. 또한 프로이스는 조선원정에 직접 참여한 이도 아니다. 갑옷을 보유했다는 기록만으로는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이 어느정도인지 증명해주지는 못한다는 뜻이다.[13]



쇼쿠호 일본군의 경우, 과거 한국의 사극에서 묘사되던 일본군에 비하면 고증이 꽤나 잘 된 편이다. 이전까지의 사극에서 심심찮게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 시절의 갑옷이 나오던 것과 달리, 나름대로 전국시대 양식의 도세이구소쿠(당세구족)를 표현하려 애 쓴 모습이 보이고, 아시가루들도 과거에는 진가사[14]만 우르르 쓰고 나오던 것이 이제는 가부토(일본식 투구를 지칭하는 말)를 쓰고[15] 중무장한 아시가루들도 종종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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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화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인데 실제 가토 기요마사가 착용했었던 갑옷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위 사진에서 좌측이 징비록의 가토, 우측이 실제 가토 기요마사의 갑옷이다.[16]

그러나 막상 극중 일본의 최고 지휘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갑옷은 태양광선을 형상화한 투구와 갑옷이 아닌 그의 라이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청년 시절에 착용했던 투구와 갑옷이 대신 사용되었다.


16화에서 실제 유물로 남아있는 류성룡 찰갑을 기반으로 복원된 가죽 찰갑이 등장했다.

4. 문화 및 제도

4.1. 외국어 대사

4.1.1. 일본어

극 초반부에는 간단한 대사를 제외하면 일본 측 인물들도 우리말 대사를 연기했다. 영화 명량이나 이전 대하사극 정도전같은 최근 사극에서 외국어 대사를 최대한 원어로 구사한 것을 생각하면 다소 올드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원어를 구사하려면 해당 배우들이 단순히 대본에 적혀있는 독음에만 의지하여 구사할 경우 오히려 어색함이 높아질 수 있으므로 충분한 외국어 지식을 갖추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우리말 대사가 의미전달과 감정전달에 적합하다.[17] 1~3화까지는 일본어 등장이 별로 없었으나 4화에서 조선통신사가 도요토미를 접견하는 장면에서 모든 일본 측 배우들이 일본어로 대사를 구사했다. 고니시의 계략으로 통역을 매수하여 조선의 국서내용을 도요토미에게 통역하는 과정에서 내용을 조작하여 전달하는 과정을 묘사하려는 의도와 국제적인 외교장면에서 고증을 살리기 위해 해당 장면에서만 일본어 대사를 진행한 것. 만약 종전처럼 한국어를 사용한 상태에서 통역하는 신을 찍었다면 모양이 더 웃기게 되었을 것이다.

외국어 대사는 아니지만 일본인 간의 호칭 체계가 엉망이다. 조선에서도 이름 외에 공적인 자리에서는 관직명, 비교적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 호 등으로 다양하게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성과 이름 외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관직명으로 부르고 좀 더 사적인 자리에서는 통칭을 부르는 등 호칭이 다양했는데 호칭이 거의 성으로 통일되어 있다. 예컨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수양아들인 우키타 히데이에를 성인 우키타로만 부르는 것은 어색하다.

4.1.2. 중국어

조선통신사와 도요토미의 접견장면을 생각해본다면, 차후 명나라의 원군으로 등장할 이여송 등 명나라 인물과 조선 인물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명측 인물들도 중국어로 대사를 진행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10화에서 나온 것을 보았을 때 한국어로 진행되는 듯. 다만, 이는 사신이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전제로 한국어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2. 형벌


형벌의 일종인 압슬이 기록에 가깝게 재현되어 있다. 압슬은 죄인을 눕히고 밑에 기와 파편 등의 사금파리를 깐 뒤 다리에 나무토막을 올려놓고 두 사람이 밟는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지만 그 과정을 묘사해놓았다.

4.3. 바둑

11회에 선조이산해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선시대의 바둑에 대해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여기서는 완전히 현대의 바둑처럼 묘사했기때문에 문제가 있다. 기본적으로 한반도에서 바둑은 가로 19줄 세로 19줄로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고, 여타의 룰도 광복후 고립을 피하기 위해 일본의 룰을 수용하면서 현대바둑의 규칙이 확정된 것이다. 조선시대 바둑형태의 가능성으로 순장바둑을 들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 16개의 화점이 있고(현대는 9개) 각 화점마다 대칭적으로 미리 돌을 배치하고 시작하며, 첫 수는 천원에 두는것이 일반적이다. 첫 수를 사방귀에 두는 기보법은 20세기에 보편화된 것이다. 징비록 11화에서는 완전히 빈 바둑판에서 시작하며, 선조이산해 모두 양하귀에 각자의 돌을 두었기 때문에 완전히 현대바둑을 기준으로 재현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회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마에다 토시이에가 바둑을 두는 장면이 나오는데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쓰는 듯 하다.

4.4. 지도


10화에서 조선침략에 대한 작전회의를 하는 장면과 12화에서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는 것을 상상하며 조선의 지도를 밟는 장면에서 조선의 지도가 현대 제작된 지도와 너무 비슷하게 만들어져서 까이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도 정확한 한국 지도를 수백년 전에 만든 일본.
동아시아권에서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근거하여 지리적 지식들이 구축되어왔으며, 보통 중국을 중심에 놓고 주변국들을 배치하되 중국과 가까운 나라일수록 크다고 믿었다. 일본도 이러한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조선을 침공하고 나서야 일본열도가 조선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16화에 히데요시가 마에다와 함께 보던 세계지도도 말이 많다. 해당 글 요약하자면 대략 200년쯤 후대의 지도를 적절히 편집해서 쓴 것 같다고. 그나마 불멸에서 호주가 그려진 지구본이 나온 것에 비해 호주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18]

4.5. 건축



히데요시의 거처로 천수각과 함께 교토 성이라 불리는데, 사실은 후시미 성으로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한 곳이다. 옆에는 역시 정체불명의 불교 목탑이 서있다. 사실 히데요시의 저택이자 정청으로 사용되기 위해 1587년 주라쿠다이(聚樂第)가 완공되어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것을 그대로 등장시켰다면 좋았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거처였던 주라쿠다이

4.6. 일본측 부장들에 대한 묘사

불멸의 이순신은 물론 명량에서도 일본의 주요무장들을 제외한 부장들은 거의 다 가상인물이었는데, 징비록에서도 가토의 부장으로 고이치가 나오는 등 가상인물이 나온다.

4.7. 조선 사회에 대한 묘사

극중에서의 조선 사회의 묘사는 16~17세기의 조선보다는 세도정치기 조선과 더 가깝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작가가 생각하는 현대사회가 투영된 가상의 조선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백성이 왕을 버릴수 있다느니 하는 백성들의 임금에 대한 불신인데 조선민주 의식수준은 철종기 임술민란때 나라님이 보낸 사람은 해칠수 없다면서 수령은 죽이지 않을 정도였다. 소위 나라님이 보낸 사람을 죽이자는 언급이 대놓고 나온게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 때였고 이때조차 근왕논리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양란후 조정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긴 하지만 백성이 지배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이전에 백성들이 왕을 버린다느니 조정을 못믿겠다느니 하는건 명백히 잘못된 연출.

재정이나 역 문제도 실제 당시 큰 문제는 없었다. 비록 양반들이 군역, 공납에서 벗어나 있긴 했지만, 본디 조선의 양반계층의 수는 적었고 무엇보다 조선의 세율 자체가 백성의 담세능력을 무너뜨릴 정도로 무겁지가 않았다. 조선의 재정이 진짜 문제가 된 건 임진왜란 당시 족보의 상실, 공명첩의 남발로 역을 피할려는 사이비 양반층이 급격히 늘어나고 농토의 파괴로 실 토지결수와 장부상 숫자의 괴리가 엄청나게 늘어난 때문이었다. 한동안 양전사업은 염두도 못냈으니 세금이 제대로 걷힐리도 없다. 즉 지금 보여주는 조선의 문제점도 사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이 맞닥들인 문제들이고 그 문제를 극복하고 민간의 담세능력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의 주장에 의하면 권리만 무한인)지배층이 100년 가까이 토론하고 고민해서 나온게 대동법이다.

4.8. 이순신 등장 관련

난중일기를 제외하고 이순신 개인에 대한 기록이 가장 풍부한 사료가 징비록[19]임을 감안할 때 이를 제목으로 내세운 드라마에서 이순신이 안 나올 수가 없는 노릇임에도 방영 개시 직전까지도 배역이 공개되지 않았다. 워낙 중요한 배역이라 공개를 최대한 미루거나 캐스팅을 하지 못한 것으로 관측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이순신이란 인물이 한국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다가 불멸의 이순신의 김명민과 명량의 최민식으로 인해 확립된 사극속 위상도 높아 이에만 관심이 쏠리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발표를 늦추는 게 아니냐는 설도 제기되었다.물론 아무 소용없이 이때부터 이미 누가 이순신이냐고 난리들이었다.

심지어는 이순신이 등장할 경우 불멸의 이순신이나 명량과 비교되어 논란이 일어날 것을 피하려고 실제로 등장하지 않고 다른 등장인물의 대화나 장계 등을 통해서만 언급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이야기도 나왔을 지경.[20] 특히 2월 5일에 열린 제작 발표회에서는 김상휘 PD와 김상중이 주인공은 나니까이순신 역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했다. 김PD 曰 "행주대첩이나 진주성 전투 같이 잘 안 알려진 전투를 다룰 것". 김상중 曰 "주된 이야기는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 관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큰 역할이 아니다."라며 "어떤 배우가 이순신을 연기할지에 대해선 큰 기대를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더불어 KBS 조대현 사장도 이순신이라는 한 인물보다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다. 징비록을 통해 역경을 극복한 선조들의 지혜를 배워 지금의 어려움을 뚫고 미래 30년의 희망을 바라보게 됐으면 좋겠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이순신 미등장설을 뒷받침하는 듯 했다.

이럴만도 한 것이 전작 정도전도 주인공 정도전보다 이인임이나 이성계가 더 주목받은 바 있는데다 이순신의 위상은 방영 전부터 이미 주인공 유성룡을 압도하는 수준이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 주목도를 낮출 필요는 꾸준히 제기되었기도 하다. 징비록이라는 드라마의 취지는 뼈아픈 역사를 고찰하고 반성하자는 것으로, 이순신이 임진왜란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다루기보다 좀 더 거시적인 측면에서 왜 전쟁이 발발했고 조정에서는 무엇을 했는지 다루는 것이 제작 방향이라면 이순신의 비중은 자연히, 인위적으로라도 줄일 수 밖에 없다. 다만 징비록 방영 특집으로 다룬 역사저널 그날에서 류성룡과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자세히 다루어 잘하면 비중 높은 주연으로 나올 가능성 정도는 대두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종국에는 절충안(?)으로 KBS에서 2004년에 불멸의 이순신을 방영한 것을 이용해서 이를 다시 써먹는 게 아니냐는 추측까지 돌았을 지경. 물론 불멸의 이순신의 완성도가 나름 괜찮고 시대적으로 겹치는 부분을 다시 만드는 것보다 제작이 더 쉬운 잇점도 있는데다 다시 전투 장면을 만들려면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들어가는 탓에 이미 KBS에서는 임진왜란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등에서 불멸의 이순신 해전장면을 수차례 써먹은 전적도 있기에 가능했던 추측이다.

이 설왕설래는 결국 징비록 본방 6화에서부터 이순신이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제작진 역시 캐스팅 중임을 확인해 주어 어떤 식으로든 등장하는 것만은 확정된 모양새로 마무리되었다. 애초에 임진왜란을 논한다면 도저히 빠질 수가 없는 인물이 본작의 주인공인 류성룡과 이순신이다.[21] 징비록에 가장 많이 서술되는 인물 중 하나가 이순신이고, 이순신이 치른 해전들이 하나같이 전쟁의 판도를 바꿔 놓은 것들이라는 점[22]을 감안하면...

허나 사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 드라마에 있어 이순신의 등장은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의 전공은 분명 엄청난 것이지만 문제는 스토리상 류성룡과 이순신을 연계시킬려면 작가가 상당한 골머리를 썩어야 한다. 이순신 함대의 공적에 류성룡이 관련된 적은 커녕 류성룡과 이순신은 전란 중에 대면한 적도 없으니까. 대면한 적이 없는 건 아니고 이순신이 풀려난 직후 류성룡의 집에 가서 날이 샐 동안 이야기를 하였다는 대목이 난중일기에 나온다. 이순신이 조정에 지원을 한 적은 있어도 조정이 이순신에게 지원을 해준 적은 없다시피 하다. 본디 류성룡의 주역할이 관군, 의병, 명군 지원인데 이순신이 조정의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시피 하니 류성룡은 이순신의 활약에 끼어 들 수가 없다. 류성룡이 이순신과 작전을 논의했다는 연출도 무리다. 즉 두 사람의 전란 중 활약한 영역 자체가 다르므로 이순신의 공적을 묘사하다보면 드라마의 초점이 자연스럽게 류성룡이 아닌 이순신에게로 옮겨가 버린다. 게다가 류성룡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적을 물리치는 장수가 아니라 이순신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더 눈에 띌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만약 이를 무시하고 그냥 징비록의 기록대로 드라마를 진행하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류성룡인지 이순신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갈 수도 있다.(...) 드라마가 처음부터 류성룡, 이순신 투 탑 체제로 나아갔다면 조금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드라마는 류성룡과 선조, 조정 대신들이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방향성이 결정되어 버렸기에 이조차도 무리다. 결국 류성룡의 이야기와 이순신의 활약의 매끄러운 조화는 작가의 필력과 제작진의 연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러모로 작가와 제작진이 빠진 진퇴양난이다. 이순신에 대한 묘사를 안 하자니 완성도가 떨어질 것 같고, 하자니 장르가 바뀔 거 같고(...) 게다가 갈수록 류성룡의 캐릭터가 시청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이런 상태에서 이순신을 내보냈다간 진짜 대참사가 벌어진다. 불멸의 이순신이나 명량 경우 고증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순신의 캐릭터 묘사를 잘 해서 시청자들도 어느정도 문제점을 눈감아주었다. 그런데 징비록의 주인공인 류성룡의 캐릭터가 외면받는 현 상황에서 드라마에서 이순신을 잘 묘사하면 류성룡은 당연히 페이크 주인공화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23]....나라의 성웅이 엉망으로 묘사되는 꼴을 과연 시청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말이 필요한가. 뭐 그땐 조기종결 각오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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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런데 사실 징비록의 머리는 촌마게라고 하기에도 뭔가가 엉성한 머리이다.
  • [2] 우리가 알고있는 오비의 큰 리본형 매듭은 에도 중기 가부키의 온나가타(여자역)들이 배역의 여성성을 어필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낸 것을 서민들을 포함한 막부 내의 시녀들까지 모방한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참고로 작중의 배경인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는 가부키라는 것이 아직 없었다.
  • [3] 문화로서의 가부키는 없었지만, 그 원형이 된 이즈모노 오쿠니가 활동한 것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가 맞다. 다만 그 당시의 가부키란 이름 그대로 저거 뭐야, 몰라, 무서워 (...) 정도의 이미지였다는 것이 함정.
  • [4] NHK는 후스마에 제공 같은 세트장 분야에만 협조한 듯 하다.
  • [5] 그나마 삼국시대에 인도를 방문한 신라 사신 그림 중 장발 모습을 한 그림이 있긴 하다.
  • [6] 명나라 황제들의 어진이나 장거정, 이여송 등의 항목 내 초상화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조선의 관복이 명나라를 따른 것이므로 조선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 [7] 용포에 붙어있는 보의 모양이 다른데 여의명비전 시기를 살았던 정통제경태제의 어진을 보면 정통제는 보의 용이 옆을 보고 있고 경태제는 앞을 보고 있다. 이후 홍치제까지 용이 정면을 보다가 정덕제 시기 용의 머리방향이 점점 옆으로 향하고 만력제쯤 되면 용머리크기도 작아진다. 두 드라마에 나온 보의 모양이 다르다고 한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기상에 따른 디자인 차이다.
  • [8] 황제는 12개 왕은 9개의 상징문양을 가지고 있다.
  • [9] 여담으로 묘하게 징비록에서 묘사하는 조선의 모습은 제도의 폐단으로 고생하는 18세기 중엽의 조선의 모습과 유사하다.(...)
  • [10] 불멸의 이순신 때 엑스트라 배우로 참여한 혹자의 증언에 따르면 소품과 배우의 문제가 크다. 옛날 리볼버 화약총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방아쇠를 당기는대로 화약이 터진다고 한다. 제작진 측에서는 가급적이면 그런 식으로 쓰지 말라고 하지만 막상 전투씬을 찍다보면 배우들이 군대에서 K-2들고 각개전투 하는 마냥 빵빵 쏴대는데 통제가 힘들다고.
  • [11] 심지어 실제 포졸복은 저고리 위에 포 종류(보통 철릭)를 입고 전복을 입는 형태였는데 드라마에서는 저고리 바로 위에 전복만 걸치니 이상하게 보인다.
  • [12] 근데 주의해야될 점은 루이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 당시 마카오에 거주중이었다(...). 탄금대 전투때 피해 규모를 설명하는 것도 그렇고 대부분 일본군 병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카더라를 모아놓은 책이기 때문에 교차검증을 통해 정확한 사실을 가려내 볼필요가 있다.
  • [13] 근대이전 국가의 군대는 입대할때 무장을 사비로 마련했다. 이는 서양의 민주주의가 무장 가능한 유산시민위주로 흘러가게한 원인이며 기사계급도 땅을 주고 갑옷과 말을 마련하게 한데서 유래되었다. 조선또한 마찬가지라서 입대할때 갑옷과 무기를 사비로 마련했으며 형편이 어려우면 갑옷을 못입은 병사또한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군역의 현실을 드라마에서 표현하였다.
  • [14] 불멸의 이순신 등에서 자주 보이던,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잡졸 하면 딱 떠오르는 그 검은색 삿갓모양의 투구를 지칭하는 말이다.
  • [15] 다만, 전국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즈나리카부토(頭形兜)라기보다는 그 이전 시대의 스지카부토(筋兜)에 더 가까운 모습의 가부토가 등장한다.
  • [16] 그러나 지금까지 공개된 촬영장 사진에 따르면 저 갑옷은 나중에 사용될 것으로 추정된다. 가토가 새로 착용하고 나온 갑옷은 저 고깔투구 갑옷과는 상당히 판이한 뿔투구 갑옷. 사진 링크
  • [17] 그리고 정도전은 명나라나 일본인 배역은 소수에다가 잠시만 등장하였고, 명량은 영화라 제작기간의 여유로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일본어 가능자에게는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 [18] 참고로 극중 지도에서 보이는 남극처럼 보이는 대륙은 남극이 아닌 옛 서양인들이 상상한 미지의 남방대륙을 묘사한 것이다. 남극은 호주 다음으로 발견되었다.
  • [19] 특히 이순신의 유년 시절, 젊은 날에 대한 서술은 양과 질 모두 독보적이다. 이전 대하 드라마 정도전에서 비중있게 다룬 정도전과 정몽주의 우정은 작가의 창작이 대폭 가미된 것이지만 이쪽은 실제로 죽마고우.
  • [20] 드라마에서 다루는 기간이 기축옥사에서 유성룡의 죽음까지이고 주된 장소를 궁이나 조정 주변으로만 제한할 경우 이순신이 실제로 등장하지 않아도 극의 진행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그 기간동안 이순신이 조정에 들어온 것은 원균의 모함으로 인해 국문을 받은 짧은 기간 뿐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면 극의 완성도를 담보하기 힘들다. 징비록에서 개인으로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 이순신이고 임진-정유재란 진행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어마어마하다. 애초에 이 드라마가 노량해전까지 다룬다고 했으니...
  • [21] 유성룡이 조선군의 판을 짜는 쪽으로 기여했다면, 이순신은 왜군의 판을 엎는(...) 쪽으로 기여한 바가 크다.
  • [22] 본격적으로 육상에서 나오지 않는 일본군에게 빡치기 시작한 웅포 해전이나 윤두수가 숟가락을 얹은 장문포 해전 등만 제외하면 정말 하나하나가 전설이며 전략적으로도 판을 바꾼 것들이다. 옥포 해전은 첫 해전 승전. 포 해전은 첫 거북선 실전 배치. 부산포 해전은 유유히 적의 제해권을 통과하여 빈집털이. 순천-왜교성 전투는 최초의 조명 연합 수군 작전...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노량 해전은 설명이 더 필요한지?
  • [23] 예를 들어 류성룡 띄우기에 희생양이 된다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