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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습

last modified: 2015-08-17 21:30:16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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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
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


영상 후반부를 보면 알겠지만, 진주만 공습이 아닌, 미국의 참전이 사상 최악의 참사라고 말하는 것 같다[1][2]


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NHK라디오 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대본영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육해군은 본 8일 미명[3]에 서태평양에서 아메리카, 이기리스[4]군이랑 전투상태에 들어감. x2

제국 해군은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한 한편, 싱가폴 ***도 대폭격하였습니다.

대본영해군부 금일 오후 1시 발표・하나.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미명,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함. 둘,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미명, 상하이에서 영국 포함(砲艦) '페트렐'호를 격침하였으며, 미국 포함 '웨이크'호는 동시각 우리에게 항복함. 셋,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미명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거둠. 넷,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이른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에 있는 적 군사시설을 폭격함" 그리고 4년 후 같은 방송국에서는…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른다."
ㅡ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한 독백.

"Don't forget Pearl harbor."
"진주만을 잊지 말라."
ㅡ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쓰이는 관용구.

Contents

1. 개요
2. 원인
3. 전개
3.1. 일본의 준비
3.2. 미국의 준비
4. 불타오르는 진주만
5. 뒷이야기
5.1. 무사했던 유류저장시설
5.2. 선전포고 없는 전쟁
5.3. 추축국(樞軸國)의 대미 선전포고
5.4. 일본측 인물들의 후일담
5.5. 미국의 분노
5.5.1. 음모론
5.6. 소련


1. 개요

1941년 12월 7일, 항공모함 중심의 일본군 해군 연합함대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 진주만에 공습을 가한 사건. 이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5] 일본에서는 위키페디아에서 진주만공격이라고 쓰여져 있으며,전투를 그냥 '사건'이라고 부르는 놈인데 기습을 공격이라고 하는 것쯤이야[6] 전쟁 당시에는 하와이 해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타란토 공습 당시 이탈리아의 실수를 비웃던 미국의 뒤통수를 대차게 갈겨준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미래의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의 원거리 타격력이 주를 이루게 될 것이란 사실을 증명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2. 원인

Dcinside 2차세계대전 갤러리에서는 이 공습의 원인을 내가 저 새끼 귀싸대기를 존내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 먹어서 나랑 협상하겠지?"라고 해석했다. 좀 어이없어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진주만 공습/원인 항목 참조.

일본군 수뇌부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켜버리면, 미국은 일본을 상대할 수단이 없어지므로, 결국 전쟁을 택하기보다는 일본의 팽창을 인정하고 일본과 협상을 택할 것이라 판단했다. "덩치만 큰 미국인들은 곤조가 없기 때문에 조금만 위협해도 곧 순해질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이 진주만 공습의 배경이었던 셈.

여담으로 Jap하와이를 점령 안 했나요?라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데, 하와이는 미국이 전력을 기울여 요새화한 철벽요새다. 2차대전 당시 일본 해군이 전력을 기울여도 점령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설령 점령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7]

3. 전개

3.1. 일본의 준비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일본군 수뇌부는 남방작전을 수립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였다. 하지만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남방작전 이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공격해두지 않으면, 남방작전 내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은 일본군 수뇌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일본해군의 기본적인 대미작전 개념은 점감(漸減)전법으로서, 개전 후 서진(西進)하는 미군 함대를 잠수함과 항공기로 위치를 파악하고, 잠수함과 항공기로 이들에게 1차 손해를 준 후에, 이어서 순양함구축함 전대를 동원하는 야간전투에서 2차 손해를 준 후, 전함간 포격전으로 미군 함대를 최종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전안의 문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해군도 일본 해군과 유사한 작전개념안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선전포고를 먼저 하고 실제 전투는 나중에 진행할 경우, 미군도 일본군과 비슷하게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군이 일본이 예상한 경로 그대로 진격하지 않고, 남방작전을 하러 떠나는 일본군을 측면에서 때린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머리가 굳으신 분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어디까지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해군의 주력이라는 사상을 지녔던 다른 제독들도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무엇보다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을 사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수뇌부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남방작전과 동시에 진주만 공습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에 앞서 연구한 것은, 바로 영국군이 실시한 이탈리아타란토 공습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과 타란토의 조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어뢰를 통한 공격이 가능하며 400기 정도의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만 동원한다면, 진주만 공습도 성공할 것이란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일본해군의 조종사들은 여름부터 철갑탄을 이용한 폭격과 뇌격훈련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진주만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모형을 보여주면서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정확하게 미국의 전함항공모함을 식별할 수 있는 훈련도 병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정보계통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태평양 함대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하와이에는 첩보원이 상주하여, 어디에 항공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어느 군함이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전달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장 최적의 공격시간이 일요일 새벽이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 이상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 수뇌부는 1941년 11월 17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몇 가지 사정이 겹쳐서 결국 12월 7일이 최종적인 공격일로 확정되었다.

작전일이 확정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조직하였다. 무엇보다 작전이 노출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11월 22일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쿠릴 열도 부근의 히도카푸 만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항해 중에는 절대 무선교신을 해선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 게다가 승무원들에게는 어디로 가기 위해 모인다는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더불어 집결지인 히도카푸는 미국 첩보원들이 전혀 파악하지 못한 조그만 항구였다.

11월 26일, 군함들이 한 척씩 빠져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여 진주만을 향해 닻을 올렸다. 더불어 항로 역시 민간상선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 미국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 위주로 선정하여 항해했으며, 선박이 배출하는 배기가스로 인해 발각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군함의 연료로 경유를 사용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8]

더 이상 미국과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본군 수뇌부는 작전시작을 결정하였고, 12월 2일 나구모 제독에게 '니타카 산(타이완 섬의 최고봉 : 현재의 옥산)에 등반하라 1208(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암호문이 전달되었다.

3.2. 미국의 준비

미국은 비록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시켰지만, 이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을 뿐 전쟁을 하기 위한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태평양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고,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비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특히 필리핀에 주둔 중인 연합군과 일본 본토와 근접한 주요 섬들이 공격대상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작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는 개전되기 직전에 가까웠던 터라, 긴급히 작업을 시작했어도, 공사기간 등의 문제로 개전 당시 제대로 된 준비가 된 지역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대서양에서 독일군유보트가 악명을 날리자,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일부 전력을 차출하여 대서양 함대에 편입시켰다. 태평양 방면의 전력 강화도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현재 보유한 전력과 무기만 있어도 일본군 따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곤조가 없어서' 금방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일본이나, '쬐끄만 뻐드렁니쟁이들이 뭐 대단하겠어?'라고 일본을 얕잡아 본 미국이나…. 어차피 전쟁은 잘 싸우는 쪽과 못 싸우는 쪽의 대결이 아니라, 삽질하는 쪽과 더 많이 삽질하는 쪽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으니.

특히 일본 해군의 목표인 진주만의 미군은, "어차피 걔네들 여기까지는 공격하러 못 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들 퍼져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면 필리핀이나 태평양 섬에 있는 아군들이 좀 고생할 거고, 거기서 지원 좀 해달라고 무전 때리면, 그때 가서 일본군과 좀 놀아주다가 오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일본에서 보낸 첩보원이나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 특히 당시 하와이 인구의 30%가 일본계였으므로, 이들이 벌이는 사보타주가 문제였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조치를 강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병크.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러 매체에서 사골로 등장하는, 항공기들을 특정 장소에 빽빽하게 배치하고 감시병을 둔 사례가 있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미국도 슬슬 붙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주력이 서서히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집결하자, 미군은 일본군이 그들의 예상대로 남방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소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인도네시아 방면 지원을 위해 출정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소수 관계자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완전히 묵살되었다. 어쨌든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했기에, 전방기지에 항공기와 병력, 물자를 배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여러 차례 포착되었지만, 태평양 함대에서는 인도네시아 방면 작전에 앞서 태평양 함대의 동향을 정찰하는 것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12월 7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4. 불타오르는 진주만

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에서 북서쪽 370km 해상에 도착하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받고, 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 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가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깔짝대는 유보트 잡으러 대서양에 가 있었고,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공중급유 기술이 없던 이 시절에는 항공모함이 전투기를 타 지역으로 실어 나르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므로, 각 섬의 방어조치 강화의 일환으로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전투기 셔틀하러 간 상황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서 전투기 셔틀을 하고 막 돌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엔터프라이즈는 원래 진주만 공습이 발생하기 하루 전날인 12월 6일 입항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열대폭풍을 만나서 우회하는 바람에 입항이 하루 늦어졌다. 실로 천우신조. 2차대전 최고의 강운함(强運艦)답다.

나구모 제독은 미국 항공모함의 정보를 확인한 후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차 공격대가 이륙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 후 2차 공격대가 준비를 마치고 이륙하였다.

사실 당시 미군 태평양 함대는 일본군의 이상징후를 두 차례 감지했으나, 이것을 진주만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우선 일본군은 갑표적을 파견하여 항공대의 공습작전에 호응하여 어뢰 몇 발 쏘고 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척은 좌초했고, 최소 2척이 공습이 시작되기 전 진주만에 접근하다가 초계(哨戒)중이던 구축함에 걸려서 꼬르륵. 하지만 사령부에서 그 보고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는 바람에 1차 기회를 날려먹었다. 당시 보고를 들은 사령관의 명령은, "그 풋내기 함장한테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다음에 다시 보고하게."

당시엔 어느 나라건 자국 해군 기지에 접근하는 미확인 잠수함은 무경고 공격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외국 영해 내에서의 잠수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 진짜 공격을 받았어도 일본은 할 말이 없었다.[9] 여기에 전장에 대한 예측이 안 되어 있을 뿐 개전 자체는 머지않았음은 확실했으므로, 일본 잠수함의 접근을 발견했다 해도, 그것이 진주만을 목표로 한 대규모 기습에 대한 경고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두 번째는 당시 진주만에 갓 설치한 육군의 방공용 레이더였다. 당시 전탐병들은 무수히 많은 점이 북서쪽에서 다가오는 장면이 포착된 것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보고를 하였지만, 때마침 미 본토에서 B-17 폭격기 편대가 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예정보다 빨리 날아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는 무시되었다. 이때 남은 명대사가, 통제실 당직 장교의 "별거 아냐, 신경 꺼(Well, Don't worry)." 얼핏 보면 미국이 안이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당시의 담당자의 해당 상황에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게 합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서, 후일에도 문책을 받지는 않았다. 이런 결론이 나온 이유는 진주만 공습이 그만큼 의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전략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완벽한 기습이라는 평을 듣는 게 아니다. 목적부터가 기괴하기 짝이 없으니 예측이 가능한 게 이상한 거다.[10]

덕분에 일본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진주만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예정된 계획에 따라 비행 방향을 크게 우회하여, 섬의 남서쪽에서 진주만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명 "토라 토라 토라"를 사령부에 발송하였다. 해당 암호는 호랑이란 뜻도 있지만, 사실은 돌격을 뜻하는 '토츠게키(突撃)'와 뇌격을 뜻하는 '라이게키(雷撃)'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 및 묘사들

"진주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 후방사수한테 말했죠. '육군 색히들은 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뭔 짓을 하는 거야?' "
ㅡ 2차대전 다큐멘터리 『배틀360』 중에서.

"기체번호 적어놔! 나중에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되니까."
ㅡ 영화 도라 도라 도라 중에서.

"야, 이게 뭔 소리냐?
"몰라. 오늘 일요일이야…"
ㅡ 영화 진주만 중에서.

"저런 미친놈이! 훈련하다가 폭탄을 어디에 떨구고 X랄이야?
ㅡ 게임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 중에서.

당시 미국 수병들은 일본 전투기가 진입하고 있음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는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도 나오는 거지만, 상당수 수병들은 일본 항공기의 기습을 하와이 주둔 육군항공대가 훈련비행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폭격이 일어났을 때도 어떤 수병은 "와!! 존내 맛깔나게 훈련하네!!" 라고 했다가, 폭탄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자, 그제야 일본군의 공격을 인지하고 반격에 나섰다.

포드 섬 항공기지가 제일 먼저 폭탄에 얻어맞았으며, 곧 포드 섬 인근에 정박 중인 전함—이것이 일명 전함 열(Battleship's row)—들이 폭탄과 어뢰를 얻어맞았다. 폭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뢰의 경우, 평상시의 군항(軍港)에는 주요 함선 주변에 어뢰 방지용 그물이 설치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진주만의 군함에는 어뢰 그물이 없었다. 어차피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서, 어뢰를 쏴도 어뢰가 자세를 잡기 전에 진흙에 처박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달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걸 알고 어뢰에 나무 날개를 달아서, 어뢰가 중간에 진흙에 처박히는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해군 항공대 참모 램지 중령은 방송실로 뛰어 들어가 총원전투배치(General quarters) 신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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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drill."
"진주만 공습, 이건 훈련이 아니다."
훗날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위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내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문이 그대로 전달된다.

제일 먼저 5발의 어뢰를 얻어맞은 BB-37 오클라호마는 20분 만에 전복됐으며, 비슷한 시각 BB-48 웨스트 버지니아도 여러 발의 폭탄과 어뢰를 맞아 필사의 데미지컨트롤로 전복은 면했지만, 침수가 심하여 착저(着底) 중이었다. 그나마 BB-38 펜실베니아, BB-43 테네시, BB-46 메릴랜드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메릴랜드의 경우 공격당한 미전함들 중에서 가장 먼저 복귀하였다.

BB-36 네바다의 경우 어뢰 한 발을 맞았지만, 신속한 조치로 피해확산을 막았으며, 필사적으로 응전하면서 어떻게든 진주만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지켜보던 태평양함대 기뢰부대 사령관인 윌리엄 펄롱 소장은, 네바다가 탈출하다가 수로상에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기뢰나 항공기의 공격에 격침될 경우, 오히려 진주만으로 드나드는 진입로를 봉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좌초를 지시했으며, 네바다는 이 지시에 따라 폭탄을 얻어맞으며 자력으로 좌초했다가, 바닥이 단단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2척의 예인선이 다가가 네바다를 끌어내어 바닥이 단단한 곳에 재좌초 시켰다. 어쨌거나 항구가 봉쇄당하는 상황은 면했다. 실제로 일본군은 항구의 봉쇄를 노리고 진주만을 탈출하려는 네바다에게 급강하폭격기를 집중시켰으므로, 당시 펄롱 소장의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전함 네바다와 예인함 호가

더불어 진주만 공습의 상징이 되어버린 BB-39 애리조나도 이 무렵 여러 발의 폭탄을 맞고 있었는데, 철갑탄이 하필이면 영 좋지 못한 곳인 탄약고에서 폭발해버리는 바람에, 유폭으로 아예 배가 두 조각이 났고, 2번 포탑과 함교 사이 구간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내부의 모든 기자재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폭발은 근처에 있던 BB-44 캘리포니아에도 영향을 주어, 복구 작업에 방해가 되어 침몰하고 말았다.

전함 이외에도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선 등 여러 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주요 항공기지들도 공습을 당해서 많은 비행기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상태가 좀 멀쩡했던 몇몇 지상 기지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기는 했지만, 미군 전투기들은 수적 열세로 인해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격추당했으며, 이미 정신줄을 놔버린 대공포들이 마구잡이로 쏴대면서 오히려 팀킬도 벌어졌다.(…) 게다가 다른 곳은 공격을 받고 있는데,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비행장은 늦게야 상황을 알아차리는 등 이래저래 막장행보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두 명의 육군 중위가 조종하는 P-40 전투기 두 대가 일본 해군 폭격기 몇 대를 격추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기타 육상의 육해군 및 민간 시설, 차량 등도 공격받았고[11],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도, 사령부 건물에 날아온 딱 한 발의 기관총탄에 죽을 뻔 했다.[12]

1차 공격대가 철수하고 약 30분 만에 2차 공격대가 진주만 상공에 돌입하였다. 원래 항공모함을 처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군으로서는 미 항모들이 죄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던 관계로, 1차 공격대가 처리하지 못한 잔여 함선과 비행장을 공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무렵 미군은 이미 한 차례 공격을 받았으므로, 운용 가능한 얼마 안 되는 전투기도 이륙시키고 대공포도 쏴대면서 맹렬히 대응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은 예정된 목표물들은 공격하지 못하고, 공격 가능한 임의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여담으로, 당시 서쪽에서 진주만으로 오던 엔터프라이즈는 남쪽을 수색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일본 항공기가 남서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이었지만, 정작 일본 해군은 북서쪽에 있었던 관계로 실패.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기들의 엄청난 항속(航續)능력 때문이었다. 제로센의 경우 7시간의 비행이 가능했을 정도였는데, 이 장거리 비행능력을 이용하여, 일본군은 일부러 항모의 위치를 숨기기 위하여, 전투기들이 빙 둘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였다. 이러한 장거리 비행능력은 전쟁 후기까지 일본기들이 가진 유일한 이점이었지만, 대신 저속으로 장시간 비행해야만 하므로, 조종사가 피로로 인해 전투력 자체가 떨어지게 하는 문제점이기도 했다.[13]

한편 일본 함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것에 기뻐하고 있었으며, 3차 공격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2항공전대를 이끌던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몇몇 참모, 조종사들은 3차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나구모 제독은 미군들이 정신 차리고 대비를 하고 있으므로, 기습의 효과가 줄어들어 오히려 피해가 증가할 것이란 점과, 미국 항공모함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공격 중지를 결정하였다.

모든 항모가 출항해 있다는 점으로 보건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가 된다. 나구모로서는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함대에도 반수의 피해가 나올 거라는 결과도 있었고, 야마모토 이외의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반대하는 작전을 수행했지만, 운이 좋게도 함선의 피해가 없는 이 정도의 전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상술(上述)했듯이, 해군 군령부에서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계속 반려하자, 야마모토는 총사령관직을 사퇴하겠다며 반협박을 한 끝에 겨우 승인을 얻어냈었다. 사실 항공부대 지휘 경험이 전무한 나구모가 기습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가 수뢰전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해군에서 손꼽히는 조함 전문가라는 이유였다. 요는 작전은 실패한다 해도, 배는 어떻게든 살려서 끌고 오라는 생각으로 그를 임명했던 것.

나구모의 이런 결정은 전후에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나구모는 현재 일본에서는 전범 혹은 역적과 비슷한 위치다. 당장 일본의 태평양 전쟁 관련 서적에서 나구모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겁쟁이 혹은 새가슴 정도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당시 월등한 생산력을 가진 미국과 대결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항모(航母)를 한 대라도 잃으면 큰 타격을 입는 데다가[14], 원래부터가 일본군은 강화를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는 몰라도 당시의 판단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레이테 해전과 같은 이후의 일본군의 작전을 봐도, 이 판단은 나구모의 오판이 아니라 일본군이 가진 단기결전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나구모 제독의 지시에 따라 일본 함대가 신속하게 퇴각하면서 진주만 공습은 종료되었고, 이 결정이 알려지자 일본 연합함대 사령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참에 태평양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야마모토 제독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진언했지만, 야마모토 제독은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는 나구모 제독의 결정이니, 그게 최선일 것이란 이유로 묵살해버렸다.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장병들이 불타는 BB-48 웨스트 버지니아에 접근하고 있다.

한편 진주만에서는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군들이 잔뜩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활동가능한 군함들을 바다로 내보내서 일본함대에 대한 수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공습에 대한 노이로제가 생겨서, 비행기만 지나가면 피아식별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대공사격부터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아군의 대공포에 파손되거나 격추된 전투기도 여럿 있었다.(…)

미국이 조금만 생각했다면, 그렇게 철벽같이 요새화된 섬에 일본군이 제정신이면 상륙할 리가 없다는 걸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일본군은 제정신이 아니잖아! 결과는 상륙이 아니라 공습이었다. 당시 기습을 당한 미국의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5. 뒷이야기

5.1. 무사했던 유류저장시설

일본 해군은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전함 전력을 굴리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정작 뻔히 보이는 데 있는 태평양 함대의 유류저장시설은 멀쩡했다. 사실 당시 이 시설에는 고작 두 달 치 분량의 연료만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이건 전시에 미국 태평양 함대 전체 필요 연료량의 두 달 치가 어느 정도 양인지 모를 때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리고 설령 아주 적은 양의 연료가 있었더라도, 이거 날리면 그 순간 잔존한 태평양 함대 군함들은 연료가 없어서 항구에 주저앉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 군함들은 공격은 고사하고, 다시 공습이 날아와도 탈출도 못하고 항구에서 그대로 고철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연료도 미국 본토에서 느린 수송선으로, 호위도 별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하게 운송해야 한다.

이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지도가 낡은 것이라서 유류탱크가 표시되지 않았다는 점도 있고,[15] 폭격대가 철저하게 미군 전투함만을 목표로 했다는 것도 있다. 실제로 오클라호마 옆에는 항공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 네오쇼가 있었지만, 기총 사격 한 번 안 당하고 무사했다. 이건 전투함에 우선순위를 두다보니, 순위가 낮은 지원함 등은 무시한 결과다. 참고로 해당 유류저장시설 근처에 지하화된 유류저장시설이 완공 직전이었고, 진주만 공습으로 크게 데인 미군에 의해, 1주일 이내에 지상에 있는 유류저장시설에 있는 모든 기름이 지하로 이동했다.

게다가 해군 공창과 잠수함 기지도 아주 멀쩡했다. 사실 일부 드라이 독에 들어가 있던 배들은 폭격을 받았으나 독 자체는 무사했다. 게다가 잠수함 기지는 처음부터 폭격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서, 공격 받아도 별 타격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 점도 치명적이었는데, 격침된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제외한 모든 전함들은 인양되어 수리를 마치고 다시 전열에 복귀했기 때문에, 사실상 진주만에서 격침당한 전함은 10척이 아니라 2척이 된다. 격침된 전함인 애리조나는 완전히 아작나서 21세기인 지금까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고, 오클라호마는 전복되면서 상부 구조물이 완전히 아작나서, 인양된 후 해체를 위해 본토로 이송되다가 풍랑에 침몰되었다.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대파당한 미 항모 요크타운이 신속하게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살아남은 드라이 독 덕분. 한편 이때 살아남은 미 해군의 잠수함들은 이후 사방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요크타운과 잠수함 함대가 일본 해군에 엄청난 손실을 입힌 걸 생각해보면….

물론 미드웨이 해전에서 70기가 넘는 함재기들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급조된 비행장이었던 핸더슨 비행장이 마비되지 않았고 B-17이 이륙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보다 더 본격적으로 지어진 해군 공창을 일본항공기들이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도 있다.

중유 또한 끓는점이 높은 관계로 불이 붙기 어려워서 연쇄적인 유폭을 기대할 수가 없으며, 미군의 대공포화와 남아있는 전투기들의 요격을 감안하면, 충분한 타격을 주기란 무척 힘들다. 또한 3차 공격을 감행하고 나면, 겨울인지라 해가 빨리 지는 관계로 야간 착함을 해야 하는데, 필리핀해 해전에서 미군이 등화관제까지 무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야간 착함 과정에서 80기가 넘는 함재기 손실이 난 것을 보면, 3차 공격을 감행할 경우 일본군의 함재기 손실이 엄청날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전부 종합해서 정리해서 보면, 분명히 전술적으로는 매우 완벽했다. 괜히 완벽한 기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태평양 함대의 전함을 불구로 만든 것은 좋았으나, 운이 나쁘게도 항공모함이 거기에 없었는데, 당시엔 몰랐으나 나중엔 이게 거대한 실책으로 돌아왔다. 더불어 미국에게 반격의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는 나중에 미드웨이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고,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초래함으로써, 전략적으로는 대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16]

5.2. 선전포고 없는 전쟁

선전포고 없이 벌인 공격이긴 한데, 그래도 일본군이 이 당시에는 아주 맛이 간 건 아닌지, 야마모토 제독은 선전포고를 한 후에 진주만 공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그렇게 계획했으며, 공격 당시에도 실제로 그렇게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전포고문을 보낸 암호 해독이 늦어져서, 공습 뒤에 미국 측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암호해독도 늦어졌을 뿐만 아니라, 보안인가를 받은 타자기를 다룰 인원이 없어서, 보안인가가 있는 고위 관료가 직접 독수리 타법으로 방금 해독한 선전 포고문을 느리게 타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무라 주미 일본 대사가 헐 미 국무장관을 방문했을 때에는, 이미 헐 장관이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뒤였다. 그런데 이 선전포고문이라는 것도 대단히 엉망진창이라서(문맥이 안 맞는다든가, 이리저리 헛소리만 잔뜩 들어있다든가…) 헐 장관은 노무라 앞에서, "내가 공직생활을 50년 동안 해 왔지만 이런 문서는 처음 봅니다. 기만과 가식으로 가득 찬, 그 수준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이 지구상에 이런 정부가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입니다"라고 질러버린다. 그리고 객령.

그런데 이전에 벌인 청일전쟁러일전쟁도 선전포고하기 전에 일본이 선빵 날리면서 시작한 걸 보면, 그냥 일본군의 전통 아닐까? 게다가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이 날린 선전포고문은 전쟁을 개시한다는 직접적인 문구가 없는 등 국제법상 선전포고문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설령 시간에 맞추었다고 해도 국제법상 선전포고를 한 셈이 아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한편, 독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힛총통"이런 게 바로 전쟁이다. 우선 공격부터 하고, 선전포고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크게 기뻐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5.3. 추축국(樞軸國)의 대미 선전포고

일본과 동맹관계이던 독일이탈리아는 4일 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 사태는 추축국 최대이자 최후의 병크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이 선전포고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은 참전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적어도 수개월은 지연되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이른 선전포고가 오히려 미국의 대(對)일전 수행노력을 방해하고, 대(對)독전 수행에서도 제한적인 혼선을 빚었다는 견해 역시 있다.

어찌되었건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아돌프 히틀러환호작약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곧바로 카이텔과 요들에게 달려가서 환호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신난당♪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17] 동맹국이 생겼다."[18]
-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360P

독일은 이 선전포고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주길 바랐지만, 일본은 소련이 1945년 8월에 공격해 올 때까지 계속 평화를 유지했다. 웃긴 건 독일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무기를 팔아 일본군을 골탕 먹였다는 것. 아예 장제스 휘하 부대는 중일전쟁 전부터 독일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군사고문관으로 한스 폰 젝트 장군까지 파견된 판이었다. 팀킬 돋네.[19][20]

물론 동맹을 맺고 일본의 요청에 따라, 위의 조치는 동맹을 맺은 1936년을 전후하여 거의 시정되었지만, 일본과 독일이 같은 '추축국'임에도, 연합군과는 달리 사실상 '상호 불가침' 수준이라 이런 꼴이 벌어진 것. 니네가 정말 동맹국인 거 맞냐?? [21] 그리고 독일이 일본과 동맹을 맺은 이후에 일본을 골탕 먹인 건 아니긴 하다.

5.4. 일본측 인물들의 후일담

나구모 사령관의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와, 진주만 공격을 공중에서 실질적으로 지휘한 후치다 미쓰오 중좌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다.[22] 이들은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가, 아카기가 격침될 때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겐다는 항공자위대의 막료장(참모총장)까지 지냈고, 후에 자유민주당 소속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록히드 스캔들로 수뢰혐의로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후치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다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로 변신해서, 간증하러 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편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연합함대 참모장 쿠로지마 카메오 대좌는 소장으로 전쟁을 마쳤고, 전후 기업가로 변신했다.

지금도 정신 나간 극우꼴통이나 역사의식이 부족한 일본인들은 이 공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2ch 등에선 혐한초딩들이 "우린 전함과 전투기를 가지고 세계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른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라고 자위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패를 당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구먼[23]

5.5. 미국의 분노

U.S.A.jpg
[JPG image (Unknown)]

일본 만화로 일본군의 멍청함을 디스하는 패기[24]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on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 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 미합중국은 일본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루스벨트 항목 참조. 참고로 이 부분은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인트로 영상에도 나온다.물론 스킵해서 모르겠지 유튜브 자동재생

공습 전, 미국도 참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 내부에도 있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전쟁은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고, 미국 국민들도 고립주의자들에게 조금 더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선빵을 날리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사… 아니,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빡돌게 만든 셈. 그러게 왜 건드려?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을 했고, 연설 직후 '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25][26][27]로 가결되며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분노한 미국 국민들은 계층을 총망라해서 앞 다투어 입대하였고[28] 거기에 쇼미더머니와 물량공세가 더해졌다.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체스터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 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짓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모와 함재기들과 숙련병들이 다 수장되는 바람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분노는 부정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일본계 미국인을 죄다 수용소로 끌고 가버린 것이다! 그래도 소련의 굴라그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보다는 나았다!

여담으로 고(故) 이승만 전(前) 대통령은,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지만(《대지》의 작가 펄 벅 등 아시아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극찬한 것 이외에는, 대부분 '우리 일본 쨔응이 그럴 리 없다능'식의 반응이었다), 일본이 진주만에서 화려한 자폭의 서막을 올리면서, 이 책은 예언서이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인지도를 쌓는 데 매우 큰 계기가 되었다.

5.5.1. 음모론

그 외에도 진주만 공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에, 이것은 루즈벨트가 일본군의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29], 2차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생겨났다. 이 음모론은 루즈벨트의 4선 저지를 위해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 후보 진영에서 주장한 것이었는데, 정작 이 주장을 들은 미국민들의 반응은 이뭐병. 당연히 선거도 관광당했고, 다음 선거에서도 해리 S. 트루먼에게 또 발렸다.

데즈카 오사무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정설로 등장해서 엄청나게 까였다. 여전히 이 음모론을 믿거나 신빙성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극단적인 결과론으로, 진주만 이후 미국의 쇼미더머니가 빛을 발한 게 2년 후였고, 앞서 말한 진주만의 미군 유류저장고 등이 폭격당했을 경우, 3~4년 동안 미국은 태평양에서 손 빨고 있어야만 할 가능성도 있었다. 게다가 그동안 미군은 일방적으로 패배하면서, 그 동안 필리핀 등지에 지어놓았던 요새, 장비, 병력을 신나게 날려먹고 엄청나게 후퇴하게 된다.

항공모함이 주력이 된 건 진주만에서 전함들이 다 털려서였다. 즉 항모가 중요하니까 빼놓은 게 아니라, 어쩌다보니 당시 진주만에 항모가 없었고, 굴릴 수 있는 게 항모뿐이라 항모만 굴렸는데, 의외로 항모가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전력이었던 것. 천대받던 항모들이 항공기의 발전으로 성능이 올라갔고, 실전을 치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앞뒤가 바뀐 셈.[30] 그리고 아무리 경고가 많더라도, 이런 극단적인 작전이 실시될 거라 예측하기는 쉽지 않은 것. 다른 걸 젖혀두고라도, 명분이 필요했다면, 진주만 털리는 것보단 차라리 태평양에서 대기하다 일본 함대 수장시키고 안전하게 일본 밟으러 가는 게 더 상식적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리고 후일 미 해군은 강제항모교리에 대한 보답으로, 일본 해군의 항모전력을 모조리 털어먹어 강제전함교리에 태워준다[31][32].

한편 눈 뜨고 당한 허즈밴드 킴멜 대장은 별 두 개 떼고 소장으로,[33] 월터 쇼트 육군 중장도 별 하나 떼고 둘 다 불명예 전역당했다. 그래도 소련 같았으면 형벌 부대감인데 이후 이들은 자신들을 변호했고, 본인들뿐만 아니라 그들 사후에 유족들도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계속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면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둘은 회고록을 펴내서 자신들을 스스로 변호했고, 이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르포작가들의 책도 자주 나왔다. 그래서 1999년 미국 상원은 이를 받아들여 투표에 부쳤는데, 찬성 52, 반대 47이라는 아슬아슬한 결과가 나와 이들의 계급을 회복시켜주도록 대통령에 권고했으나, 당시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물론 후임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도 이를 간단히 씹어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직 예비역 소장 신분으로 제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5.6. 소련

흥미로운 점으로는,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가 소련으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이 있다.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를 알아내 소련에 보냈기 때문.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진주만 공습에 대해 보고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명이다. 당시 미국이 유럽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진격하는 등, 제 코가 석자라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연합군의 영원한 물주의 참전소식을 듣고 환희의 비명을 질렀거나… 그러나 조르게가 빼낸 일본군 남방작전은 소련에 큰 도움이 됐다. 조르게는 "모스크바가 함락되지 않는 한은 일본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타전했다. 소련은 그 정보를 접하고,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정예사단들을 모조리 열차로 실어 와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였고,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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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닌 게 아니라 시작부터 The raid was a total disaster… for Japan이라고 말하고 있다(…)
  • [2] 뿐만 아니라 후반부 구성이 '왜 일본이 진주만에서 전략적으로 패배했는가'를 중심으로 원인을 파악한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보기 드물게 피해자가 피해를 덜 본 이유를 찾는 구성
  • [3] 날이 채 밝지 않아 어두운 상태를 말함.
  • [4] 영국을 뜻하는 Inglez(포르투갈어)에서 온 말.
  • [5] 다만 시간상으로 볼 때,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일본군 육군의 말레이 반도 코타발루 상륙이 맞다. 여기서 영국군과 교전한 게 진주만보다 몇 시간 일찍 일어났으며, 따라서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려면 미국이 아닌 영국에 했어야 했다. 개중에는 '그 늦게 보낸 선전포고조차도 영국이 아닌 미국에 보냈다'라며 진주만을 개전 타이밍으로 잡는 것에 대해, '일본의 선전포고 없는 선제공격에 대한 책임회피 언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모양. 어쨌건 일본에서는 동시다발적인 침공을 계획했고, 그 중에 가장 임팩트가 큰 전투가 진주만이어서 대부분 진주만을 태평양 전쟁의 개전으로 보고 있다.
  • [6] 그런데 영문판 위키피디아도 Attack on Pearl Harbor이라고 표기했다.
  • [7] 미드웨이 해전 항목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하와이가 함락당하면 미국 서해안행 고속도로가 개통되는 것과 마찬가지고, 이는 곧 미국 본토가 사정권으로 들어온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미국으로서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이므로, 당연히 하와이를 요새화 할 수밖에 없었던 것.
  • [8]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활동한 군함들의 연료는 중유를 많이 사용했다. 이는 당시 군함의 주기관이던 증기터빈에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가 중유 사용을 전제로 설계된 데서 연유한다. 무엇보다도 중유는 경유에 비해서 불순물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가격도 저렴했기에, 디젤기관에 비해서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증기터빈기관에 안성맞춤이었다. 덤으로 보일러와 경유는 상성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아서, 2차대전 후 세계 각국의 해군이 중유 대신 경유를 연료로 사용할 때, 보일러 사고가 빈발하여 상당히 골치를 앓았다. 당시 해군에서 경유는 디젤-전기추진을 채용한 잠수함에서나 사용했다.
  • [9] 동맹국 잠수함이라도, 훈련 등의 이유로 사전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면, 영해에 들어온 순간부터 부상하여 수상 항해를 해야 한다.
  • [10] 기괴하기 짝이 없는 원인을 가진 기습이 전략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완벽한 기습이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대 "기습"으로서만 완벽했을 뿐, 정작 중요한 목표물을 박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게 또 함정….
  • [11] 사상자 명단에는 민간인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 [12] 7.7mm 총탄 한 발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는데, 그게 킴멜 제독의 가슴을 툭 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말 그대로 툭 하는, 지나가던 사람과 살짝 부딪힌 정도의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후임 사령관인 니미츠와 대화하다가 이때를 회상하면서, "차라리 그 때 총탄 맞고 죽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함대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금쪽같은 전력을 날려먹은 책임감에서 나온 말로 추정된다.
  • [13] 일본군의 대표적인 에이스사카이 사부로조차 이런 장기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적 전투기의 종류를 잘못 파악하여 죽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다.
  • [14] 고대이건 현대이건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미국의 생산능력은 당시에도 넘사벽이었다. 무기 자체의 기술력만 놓고 보면, 당시 세계 최고였다는 독일의 패전 원인들 중 하나가 미국의 압도적인 생산능력에 기반한 물량공세라고 하는 의견도 있는 판이니.
  • [15] 일본 정보부가 파악은 했는데 일선 함대에게는 이야기를 안 해줬다고… 그야말로 전쟁 지려고 발악을 했다
  • [16] 같은 섬나라임에도, "전투에선 자주 패배하지만, 전쟁에선 이긴다"는 영국과 비교되는 일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 [17] 하긴 역사상으로 보면, 그 무서운 몽골 제국도 어쩌지 못한 일본이었고, 러일전쟁도 뒤가 어찌되었든 일단 이겼으니, 당시로서는 얼씨구나, 불패국 일본이구나, 라고 판단해도 당장 크게 이상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은 거의 운빨로 이긴 것에다가, 임진왜란 역시 엄밀하게 따지면 일본의 패전이다.
  • [18] 처칠은 동일한 소식을 듣고서도 상반된 결론에 도달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이겼군" 이라고 말했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어떻게 해서든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 [19] 심지어 중국군이 슈탈헬름(흔히들 나치독일 철모 하면 떠올릴 그 철모)까지 착용한 사진까지 있다!
  • [20] 거기에다 후에 중국군이 한국 광복군을 원조하면서, 광복군이 독일군의 장비를 들고 나오는 해프닝까지….
  • [21] 일반적으로 군사 동맹은 동맹국이 3자로부터 공격받았을 경우 원조의 의무가 부여되지만, 동맹국이 3자를 공격했을 때 원조의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각자 선제공격했기 때문이지, 주축의 동맹이 연합에 비해 특별히 약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련의 경우에는 폴란드 분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독일의 우호국이었으니…. 즉 '동맹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외교가 따로 놀았다는 것이 문제.
  • [22] 둘은 해군병학교 동기였고 매우 친한 친구였다.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 [23] 당장 그네들이 자랑하는 전함대와 전투기는 그다지 높은 신뢰성을 자랑했던 것도 아니다(제로센야마토 항목을 참고할 것). 그렇다고 전술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채택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혐한빠돌이들이 자랑하는 것 같이 무기라도 좋든지, 전술이라도 좋든지 두 가지 중 하나였어야 했지만, 당시 이 양반들은 둘 다 개판이었다.
  • [24] 미국은 일본을 박살내는 데는 그다지 국력을 쏟아 붓지 않았고, 대부분의 미군 부대와 물자를 독일을 때려잡는 데 우선적으로 투입시켰다. 그리고 독일을 때려잡는 데 투입된 물자와 병력, 피해도 훨씬 많았다. 독일은 소련군이라는 막강한 동맹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즉 인터넷에서 떠도는 국력 10%설은 거짓이다. 태평양 방면 미군이 "유럽으로 보내지만 말고 우리한테도 보내주세요, 징징"거리는 근거로 댔던 게 15%의 지원만 받는다는 거였는데, 이것도 정확한 산출이 아닌 왜곡이 살짝 들어간 수치였다. 그런데 그것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10%로 변질되어서 사실인 양 통용되고 있으니…, 그러나 왜곡이나 진실이나 전력을 다하지 않은 미국에게 일본군이 쩔쩔 매다가 짜부라졌다는 결과는 매한가지라는 게 함정.(…)
  • [25] 유일한 반대표는 공화당 여성의원 지넷 P. 랜킨이 던졌다. 반전주의자이자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이기도 했던 랜킨은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당시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 한국 전쟁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랜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 [26]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반대를 위한 반대나, 옳건 그르건 일단 무조건 반대한다는 식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 이 의원을 겨냥해서 한 말은 아니지만, 미국의 희극배우, 영화배우였던 Groucho Marx는 정치현실을 비꼬며, "그게 뭐든지 간에 난 그것에 반대한다(Whatever it is, I'm against it.)"는 풍자를 남긴 바 있다.
  • [27] 여담으로 이 사람은 의회에 2번 진출했는데, 진출할 때마다 이런 대형사고를 쳤다. 특히 이때 반대표를 던진 시기는, 국민적인 분노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 생명의 위협까지 받아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 [28]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자진입대율은 90%에 이르렀는데, 아무나 입대 못 하는 특수병과를 제외한 전투병과는 100%에 육박했다.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영화배우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 야구선수 테드 윌리엄스, 조 디마지오, 밥 펠러,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선에 투입되어 생사를 넘나들었다. 게이블은 그 악명 높은 폭격기 부대에서 복무하면서 기록영화도 촬영했으며, 제임스 스튜어트는 24회나 폭격작전에 출격해 대령까지 진급했고, 밥 펠러는 전함 USS 앨라베마 함의 대공포 사수로 복무하며 무려 8개의 훈장을 받았다. 상당수는 그냥 상징적인 퍼포먼스였겠지만 금배지 몇 명이 항해국(당시 미 해군의 인사사령부 역할도 맡는 부서였다.)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정중하게 "바빠 죽겠는데 민폐 끼치지 마시고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거절했다.
  • [29] 루즈벨트 대통령이 알았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앞서 말했듯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것이라는 첩보 등은 있었다.
  • [30] 사실상 미 해군이 현재 보유한 이지스 함이나 니미츠급 항공모함의 시초가 바로 이때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
  • [31]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항공모함은 해상작전의 보조격으로만 활동했다. 해군전력에서 항공모함이 주요전력으로 등장한 것은 산호해 해전이었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그 정점을 찍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함의 중요성은 이때까지만 해도 유효했다.
  • [32] 이것은 1944년 6월에 벌어진 필리핀해 해전의 결과로 일본 해군의 함대항공력은 사실상 소멸했고, 다시 재건할 수가 없었다. 몇 달 후 벌어진 레이테만 해전에 참가한 일본항모부대는 주역이 아닌 보조역할(미끼)로만 제한된다.
  • [33] 킴멜 제독은 본래 소장 계급이었고, 대장이 부임하는 자리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부임시키기 위해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시킨 것이었다. 어차피 사령관에서 다른 직책으로 이동하면 다시 소장으로 환원될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의미의 강등과는 다르다. 후임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 역시 소장 계급에서 임시 진급해 부임했다가, 이후 정식 대장 계급이 되고 원수까지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