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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뉴

last modified: 2015-02-06 15:44:09 Contributors


그는 완벽한 선수였다. 그는 미드필더에서도 공격 진영에서도 득점하고, 수비하였으며, 헤딩하고 크로스를 올렸다.
- 펠레

이름 토마스 소아레스 다 시우바
(Thomaz Soares da Silva)
생년월일 1921년 9월 14일
사망년월일 2002년 2월 8일
국적 브라질
출신지 니티로이
포지션 인사이드 포워드,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1]
신체조건 169cm / 63kg
등번호 8[2]
소속팀 CR 플라멩구(1939~1950)
AC 방구(1951~1957)
상파울루 FC(1957~1959)
우베라바 SC(1959~1960)
아우닥스 이탈리아노(1961~1962)
국가대표 53경기 / 30골(1942~1957)

Contents

1. 초기 선수 생활
2. 선수 생활
2.1. CR 플라멩구
2.2. 월드컵 그리고 비극
2.3. 그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어록
5. 뒷 이야기
6. 수상
6.1. 클럽
6.2. 국가대표
6.3. 개인

1. 초기 선수 생활

지지뉴는 우 지 자네이루 근처의 니티로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축구에 꽂혀서 본격적으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여러 클럽들을 돌아다녔지만 몸이 약했던 지지뉴는 하나같이 딱지만 맞았고, 심지어는 축구 선수 대신 자기 팀에서 잡일이나 하라는 모욕적인 제안까지 들었다.

결국 CR 플라멩구에 입단 테스트를 신청해서 플라멩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테스트에서 당시 브라질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대신 연습 경기를 뛰어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테스트에서 지지뉴는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 특히 한 골은 40야드를 드리블해 들어와서 팀의 수비수 3명을 벗겨내고 골을 넣었으니 플라멩구는 당장 지지뉴에게 계약을 제시하였다.

플라멩구에 들어온 지지뉴는 아르헨티나의 인디펜디엔테를 상대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데뷔전을 치렀고 2년간 그의 기량은 급성장하여 브라질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자리매김하였다.

2. 선수 생활

2.1. CR 플라멩구

그렇게 성장한 지지뉴는 곧 국가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고 1942년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였다. 그 대회에서 2골을 넣는 활약을 했지만 브라질은 3위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소속팀에서는 커리어 처음으로 주 챔피언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 후로 3연패를 차지하는 등 클럽 축구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1946년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시련을 겪었다. 그렇게 그 해에 우승을 놓쳤고 지지뉴는 다시는 플라멩구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1949년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지지뉴는 초반 3경기에서 4골을 넣으며 활약하였다. 하지만 페루와의 경기에서 루이스 칼데론과 먹다짐을 벌이다 그 시합에서 퇴장을 당하였다. 다음 경기에 바로 복귀하였고 결국 대회에서 5골을 넣고 대표팀을 우승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지지뉴의 다음 목표는 다음 해에 열리는 월드컵이었다.

2.2. 월드컵 그리고 비극

홈에서 열렸던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한 브라질은 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지뉴는 그 대회에서 자신이 출전하는 모든 경기에서 영향력을 과시하며 브라질을 결승 리그에까지 올려놓았고 남은 것은 우루과이와의 마지막 승부였다.

비기기만 해도 우승하는 시합에서 브라질은 지지뉴를 필두로 하여 우루과이의 골문을 말 그대로 사정없이 폭격했지만 우루과이의 골키퍼 로케 마스폴리에게 걸리거나 수비에게 막히면서 가장 중요한 골이 1골 밖에 들어가지 않았고, 결국 우루과이의 카운터 어택 2방에 무너지고 말았다.[3]

그의 활약을 인정하는 뜻에서 FIFA는 그를 MVP로 선정하였지만, 그것은 그에게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2.3. 그 이후

마라카낭의 비극은 브라질 축구팬들도 그랬지만 당사자 중 한명인 그에겐 정말로 큰 충격이었다.

그로 인해 큰 심리적인 충격을 받은 그는 대표팀에서 3년간을 뛰지 못했고, 소속팀 CR 플라멩구에서도 나와 방황하다가 플라멩구의 라이벌 AC 방구로 이적하였다. 방구에서 주 리그 득점왕에도 오르는 등 예전의 실력은 회복하였지만 방구를 우승으로까지 이끌지는 못하였다. 1953년 코파 아메리카에 복귀하여 경기를 펼쳤지만 브라질은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그 이후에 잠시 대표팀을 나갔다가 1955년부터 다시 대표팀에서 뛰기 시작하였고 1957년 코파 아메리카 대회가 그의 대표팀 은퇴 무대가 되었다.

나름 코파 아메리카에서 자신의 몫을 해준터라 브라질 각지에서 그에게 코파 아메리카만 나가지 말고 FIFA 월드컵에도 다시 나가서 명예회복을 하라는 권유를 종종 받았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대표팀에 나가면 누군가 한 명이 손해를 봐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4]

방구에서도 떠난 그는 상파울루와 우베라바에서 몇년 더 활약하다가 칠레의 아우닥스 이탈리아노에서 40살의 나이로 은퇴하게 된다. 축구계에서 은퇴한 후에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대중들의 눈을 피하며 살았고, 8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시야도 넓고 그에 따른 패싱 능력, 골결정력도 일품이지만 특히 드리블 실력은 자타공인 당대 최고였다. 비록 가장 큰 왕관을 얻는데는 실패하였지만 축구 황제 펠레와 브라질 역대 최고의 롱패서로 손꼽히는 르송이 어린 시절 가장 존경하던 선수였다.

그의 축구를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희귀한 그림들이 떠오른다.
- 지오다노 파토리(가제타 델로 스포츠의 기자)

지지뉴에게 무관심할 수 있는 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넬슨 로드리게스

나는 마라카낭에서 매주 지지뉴를 읽는다.
- 아르만도 노게이라

어린 시절 나는 두 명의 선수들을 본받으려 노력했다. 하나는 나의 아버지 돈지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지뉴였다. 내가 커리어를 시작할 무렵, 그는 상파울루에 있었는데 1957년에 그의 상파울루가 우승했고 그가 최고임을 증명해 보였다. 지지뉴는 완벽한 선수였다. 중앙에서 공격을 하고 수비도 잘했으며, 누구보다 뛰어난 헤더였고, 드리블러였다...
- 펠레

4. 어록

  • 이 '숙녀분'들께서는 우리 시대에 뛰어봤어야 됐어(1970년대 선수들이 자기들이 축구하는 환경이 거칠다고 불평하자)
  • 공에도 생명이 있어. 잘 다뤄주는걸 좋아한다고

5. 뒷 이야기

  • 지지뉴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때 쯤 웬 깡마른 소년이 갑툭튀하여 상파울루 리그를 씹어먹더니 지지뉴가 은퇴한지 6개월 후에는 대표팀에도 선발되어 대표팀에서도 날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 소년은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아예 브라질을 우승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소년이 누구인지 설명이 必要韓紙?? 지지뉴는 이 소년국가대표팀에서 같이 뛰어보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했다고 한다.
  • 지지뉴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마라카낭의 비극. 비록 지지뉴가 골키퍼 바르보사나 수비수들처럼 직격탄을 맞지는 않았지만 지지뉴라고 편할리가 없었다. 지지뉴는 그 일이 일어난 7월 16일만 되면 집의 전화선을 끊어놓았는데 죽기 직전까지 50여년을 그리 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브라질 전국에서 왜 그 때 브라질의 패배를 막지 못했냐는 전화가 하루종일 울렸기 때문이라고.. 지지뉴는 선수 생활의 수많은 영광보다 그 날의 상처를 평생 가슴 아파했다.

어째 뒷 이야기들이 씁쓸하구만

6. 수상

6.1. 클럽

캄페오나투 카리오카[5] 우승 4회: 1939, 1932, 1943, 1944(이상 플라멩구)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6] 우승 1회: 1957(이상 상파울루 FC)

6.2. 국가대표

월드컵 준우승 1회: 1950
코파 아메리카 우승 1회: 1949

6.3. 개인

월드컵 골든볼 1회: 1950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50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1회: 1952(이상 방구)
브라질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통산 코파 아메리카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17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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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스트라이커를 제외한 공격 전 포지션을 소화 가능했다
  • [2] 1950년 월드컵 당시의 등번호. 하지만 이것은 포지션 개념의 등번호이다. 현재라면 아마 10번을 썼을듯..
  • [3] 브라질은 앞선 5경기에서 21골을 넣는 화력쇼를 펼쳤고 그 중심에는 지지뉴가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골이 들어가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스웨덴스페인을 상대로 골을 두 골씩들 덜 넣고 이기고 우루과이에게 두 골이라도 넣고 싶었을 것이다
  • [4] 어쩌면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월드컵 무대를 밟고 싶지 않은 것도 이유일수도 있다
  • [5] 히우 지 자네이루 주 리그
  • [6] 상파울루 주 리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