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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last modified: 2015-04-13 10:43:43 Contributors

역대 미국 대통령
38대 39대 40대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풀네임 James Earl Carter Jr.
출신 정당 민주당
생몰년 1924년 10월 1일~현재
재임기간 1977년 1월 20일~1981년 1월 20일
서명

< 1976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time_1976.jpg
[JPG image (Unknown)]
1975 - 미국의 여성 지미 카터 1977 - 안와르 사다트[1]

<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2001 - 국제연합, 코피 아난 지미 카터 2003 - 시린 에바디[2]

풀네임은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인데 일반 대중들에게는 제임스의 애칭인 지미(Jimmy)라는 이름을 써서 '지미 카터' 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서명을 할 때도 '지미 카터' 라고 서명했다.[3]

명실상부한 독재자 킬러. 이젠 원격 능력에 대리인도 겸비했다
사실 미국에 사는 불효자라 카더라

Contents

1. 대통령이 되기 전
2. 1976년 대통령 선거
3. 그럭저럭 힘들었던 대통령 시절
3.1. 일반적인 평 - 도덕주의로 실패한 외교, 하지만 성공한 내치?
3.2. 반론 1 -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 폴 볼커 FRB 의장
3.3. 반론 2 - 단순한 도덕 외교가 아닌 당근과 채찍의 외교 - 브레진스키
4. 세계평화의 사도로 거듭니다
5. 독재자 킬러
6. 대중매체에서의 지미 카터
7. 기타


1. 대통령이 되기 전

엄청난 미남이다! 스칼렛 요한슨 닮았다
조지아 주 플레인스(Plains) 시 출생. 증조부가 남군 장교였다. 1946년 미국해군사관학교를 59등으로 졸업[4]한 뒤 잠수함에서 근무하다가[5]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가족의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해군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음에도 제대를 선택하여 땅콩 농장과 함께 각종 농기구를 취급하는 카터상회를 운영했다. 이 땅공 농장주 경력은 유명해서 이후에도 카터에겐 '땅콩 장수'라는 별명이 붙어 다닌다. 이후 조지아 주 상원 선거에 나서서 낙선했지만 당선한 후보의 부정선거가 드러나 그가 당선되었고 이후 조지아주지사까지 역임했다. 이 기간에 그는 흑인 등용법을 제정하는 등 인종차별 폐지와 도덕주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인종차별이 쩌는 조지아 주에서 태어나서 인종차별을 가장 싫어한 사람 중의 한 명. 그 본인은 백인이지만 어렸을 때 흑인들이랑 같이 놀다보니 저절로 편견이 없어졌다고.

오해가 있는데 조지아 주는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반(反) 북부 정서로 인해 미국 민주당의 텃밭이던 조지아는 이후 공화당의 보수 전략에 따라 "빨간 주"로 넘어갔지만, 주지사는 2003년까지 민주당에서 나왔다. 1868년~1872년의 4년을 빼고는 무려 #[6] 150년간 민주당 독주. 민주당 텃밭인데 주지사는 공화당 출신이 줄줄이 당선되던 캘리포니아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여하간 카터는 76대 조지아주 주지사(1971년~1975년). 12년 뒤 클린턴 역시 남부 출신 주지사인지라 주목을 받았는데 오바마가 기록을 깰 때까지는 "당분간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보수 성향이 강한 남부의 표를 끌어올 수 있는) 남부 출신 주지사들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하는 푸념도 나왔다고 한다.[7] "남부전략" 이후 공화당의 우세가 강했던 시절의 반영.

그리고 해군 복무 시절이 워낙 짧게 끝나서 잘 인식되지 않는 사실이지만, 카터는 1950년대 전후 미 해군에서 차세대 브레인으로 촉망받았던 인물이다. 카터가 복무하던 시기인 1946년부터 1953년까지의 시기는, 하이먼 리코버라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원자력 잠수함을 처음 만들어내던 시절이었다. 이 당시부터 로널드 레이건 시절(...)까지 이 원자로 깎던 노친네는 막무가내로 인재를 갈구고 시험에 들게 하며 머리 깨나 한다는 인재들에게 엄청난 좌절과 환희를 안겨줬다.[8] 카터는 이런 리코버의 시험을 통과하고 초창기 원자력 잠수함 개발팀에 들어갔던 용자였다. 리코버가 허구헌날 욕먹던 시절에는 별로 감이 안 잡혔을지 모르나 훗날 1980년대부터 리코버의 제자들이 해군참모총장을 독점하는 시대가 온 것을 보면 카터 또한 미 원자력 해군의 역사에 크게 기여했을 수재였다 할 수 있다. 아버지가 남긴 가업을 잇는다고 촉망받는 미래를 포기했던 효자는 훗날 제독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다. 대위 시절에 군복 벗는다 만다 하던 선생님이 내가 대통령 그만둘 때도 현역...

한편으로는 리코버와의 일화가 있다.
리코버 : 자네 해사 몇등으로 나왔나?
카터 : 59등입니다.
리코버 : 열심히 한 건가?
카터 : 열심히...는 아니고 좀 설렁설렁 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리코버 : WHY NOT THE BEST?
카터 : ...!

이 WHY NOT THE BEST는 카터가 자주 입에 담는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고 대통령 취임 후 낸 자서전 제목으로도 쓰였다.

2. 1976년 대통령 선거


197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도덕주의 정책과 인권 외교를 공약으로 해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제럴드 포드를 이기고 대통령에 올랐다. (297:240, 50.1% 대 48%.) 당시 카터는 서부 전역을 포드에게 내주었지만 1960년대 이래 흔들렸던 남부의 옛 민주당 텃밭을 온전히 되찾으면서도 북부(미네소타, 위스콘신)와 동부에서도 승기를 거두면서 대통령을 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존 F. 케네디가 승리했던 전략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예로, 미국 지도가 동서로 딱 갈라지는 결과를 보인다. 불행히도 이때 딱 1번만 성공했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텍사스플로리다를 뺀 남부의 지지를 상당부분 이끌어냈지만, 무소속 후보인 존 B. 앤더슨의 독자출마로 남부에서 석패하고 북부에서 표가 크게 나뉘면서 재선에 실패했다. 앤더슨은 공화당 출신이었고, 홀로 고작 6.6%만을 득표했지만 그 득표 대부분이 동부에 집중해 카터의 전략에 큰 악영향을 미친 것이다. 뒤에 설명하는 이란 대사관 인질사건도 한몫한다.

앤더슨의 당시 선거 뱃지#. Anderson BeCause Anybody But Carter(앤더슨인 이유는 카터가 아니니까) 그렇게 레이건 당선?

3. 그럭저럭 힘들었던 대통령 시절

3.1. 일반적인 평 - 도덕주의로 실패한 외교, 하지만 성공한 내치?

카터의 도덕주의적 외교정책은 보수주의적 측면에선 도리어 이것이 우방 독재 국가들의 정권 붕괴를 불러오면서 미국의 힘을 약화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이란의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등을 제대로 못 푸는 등의 실패 때문에 미국의 위상이 추락했다는 평가를 받아 재임 시기에는 인기가 나빴다. 이는 강한 미국을 내세우는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는데 큰 요인이었다. 특히 이란의 호메이니는 인질을 레이건 취임식 직후에야 이들을 풀어줌으로서 끝까지 카터를 엿먹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실 레이건이 아닌 카터가 풀었는데 안습. 그리고 호메이니는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더 큰 엿을 먹고 말았다.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와 제2 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등을 성공시켰지만 역시 두드러지지 못했다.

이 인권 외교는 한국에도 적용했고, 특히 인권을 문제삼아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여 당시 박정희 정부와 마찰을 빚은 적이 있다. 부마항쟁10.26 사건으로 이루어지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는 사실상 "방조했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사가 12.12 사태를 하루만에 쿠데타가 아니라고 결론 짓는 실책으로 전두환의 정권 장악은 막을 수 없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임기 말이었기에 거의 방조하는 상황이었다. 단지 취임식 직전에 레이건에게 정권은 바뀌어도 김대중사형만은 막아야 한다는 부탁을 하는 정도였고, 끝내 이 약속은 나타났다.

외교 문제에서 난관에 시달린 것을 빼고는 국내 문제는 나름 잘 했다. 항공산업과 화물운송의 규제를 풀고 국립공원 체계를 정비하며 최초로 히스패닉계도 등용했다.

그러나 경제 부문에서는 임기 후기에 제2차 오일쇼크가 발생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당시 오일쇼크로 인해 미국이 경제적으로 받은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가파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동시에 실업자가 급증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난 시기였다. 제2차 오일쇼크는 대외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에 카터 정권의 실정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카터가 재선에 실패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레이건 정권 때 안정화되었다. 다만 레이건 정권에서 인플레이션을 잡는데 성공한 폴 볼커 FRB의장이 카터 정권 임기말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민주장 측에서는 이를 들어 카터 정권의 경제정책이 그렇게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자평하고 있다.

임기 동안 50%를 상회하는 지지율을 보여줬지만 막판에 이란 대사관 사건이 터지면서 급하락. 웬만하면 재선 뜨는 미국 치고는 안습한 대통령. 호메이니 개객끼 이게 얼마나 안습한 것인지를 강조하면 이렇다. 미국 역사상 8명의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했는데(클리블랜드를 더하면 9명), 정권 교체를 이룩한 뒤 재선에 패배, 그것도 참패한 대통령은 오직 카터 뿐이다.[9] 물론 반대로 닉슨 이후 조지 부시까지 이어지는 24년간의 공화당 대통령 집권 기간 중 한번이라도 집권에 성공한 카터가 용한 것이다(...)란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3.2. 반론 1 -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 - 폴 볼커 FRB 의장

"민간 기업들이 고금리정책의 여파로 파산하고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이제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폴 볼커, FRB(연방준비은행) 의장.

"볼커는 인플레이션의 숨통을 끊었지만 카터 정권의 숨통도 함께 끊었다." (어느 민주당 인사)

다만 민주당의 시각에선 이미 이 때부터 막장 경제를 시작했다라고도 본다. 특히 임기 말에 윌리엄 밀러 FRB 의장의 오락가락 정책이 실패로 끝난 뒤 취임한 폴 볼커 FRB 의장이 대표적이었는데 연 13%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닥치고 고금리[10]를 하면서 버블을 깨는 대신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기가 침체되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버렸다.(그가 주도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실업자가 넘쳐나고 일본 경제에 따라 잡히는 상황이 벌어진 것.[11] 이런 해석에 따르면 카터는 끝내 말기의 경제악화 때문에 재선에 실패했으며[12] 이 때문에 볼커는 '대공황과 버블 위험을 넘긴 카터 최고의 인사 정책' 이란 칭찬과 '카터 재선 실패의 원흉' 혹은 '정리해고로 점철된 신자유주의의 대문을 열은 인물' 이란 비판을 함께 받는다.[13]

하지만 볼커는 악명을 감수한 깨끗한 원칙주의자라는 게 정평.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대문은 열었다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월가의 유태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그는 독일인이다) 투자와 상업, 회계와 컨설팅은 나눠야 한다 라고 외친 개념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선 감세정책으로 고성장 저물가를 기록하면서 임기중엔 칭찬 일색이었으나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욕을 먹는 앨런 그린스펀과 대비된다고. #[14] 다행히 레이건 역시 커다란 반발과 농민들의 파업 속에서도 그를 계속 1987년까지 중임하면서 미국 경제의 내실은 안정했다.[15] 1927년생으로 82세의 노령에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재직했다.

3.3. 반론 2 - 단순한 도덕 외교가 아닌 당근과 채찍의 외교 - 브레진스키

사실 내치는 잘하고 외교문제에 난관이었음은 린든 B. 존슨 이후 민주당 대통령의 공통적 현상이기도 하지만(클린턴을 빼면) 그 역시 인재복은 있었다. 공화당에 헨리 키신저가 있다면 카터에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젊은 인재[16] 즈비그뉴 브레진스키[17]가 있었던 것.

이른바 '카터의 제갈공명'이었던 브레진스키는 평화적 수단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정책, 즉 온건해보이지만 현실주의적인 전략가로 유명한데 이렇듯 카터 정권을 단순히 지미 카터라는 개인의 성격으로만 해석하려면 상당한 무리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카터 정권의 이미지는 온건해보이지만 임기 말에 터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해 나중에 먼 뒷날 미국과 앙숙이 되는 오사마 빈 라덴 등의 반소 게릴라를 지원한 것도 브레진스키의 조언에 따른[18] 카터의 정책이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보이콧한 것도 그때.

다만 반론도 있다. 브레진스키는 미·중국교에 집착하고 밴스 국무장관을 무시하고 외교라인을 장악했다가 기어이는 밴스는 사임하고 무장 헬기를 이란 대사관에 들였다가 패망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뒤에 보듯 브레진스키 선에서 수습하긴 했지만 국민들이 그걸 아나. # 사실 진보 측에서는 카터가 애초에 지론인 "인권외교" 에서 벗어나 친라비 행보를 보인 것이 대선의 향방을 바꾼 외교적 실수라는 평도 있으며, 브레진스키를 "냉전 진영주의자" 라고 보기도 한다. 아프간 전쟁에 따른 소련의 몰락도 끝내 공화당 시대에나 드러나니...

여하간 카터의 임기는 이 볼커, 브레진스키라는 두 관료가 주도했고 성과도 있었지만 거꾸로 카터의 인기는 급전직하, 재선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밖에 F-20 항목에 보다시피 한국이 F-20을 도입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입은 취소했지만.

4. 세계평화의 사도로 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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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대통령 자리에 물러난 뒤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수많은 활동을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해비타트 운동이다. 사랑의 집짓기라고도 부르는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인 해비타트 운동에 참여[19]해 봉사활동에 앞장섰으며 그의 활동은 해비타트와 별도로 자연재해에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위한 단기간 집짓기 봉사 프로젝트인 지미 카터 프로젝트를 만들어 동남아시아 쓰나미 사태나 카트리나 사태, 아이티 지진 등 굵직한 사건 때마다 봉사단을 조직해 전세계를 돌았으며 2001년 한국 아산에서 열린 지미 카터 프로젝트에도 직점 참여해 봉사했다. 여담으로 2002년 수능 외국어 영역에 지미 카터의 해비타트 운동이 문법 관련 지문으로 나온 적이 있다. 그 지문은 대부분의 문제집에서 과거와 현재 완료의 시제를 비교하면서 예제로도 많이 나온다.

정치, 외교적으로도 전 대통령의 위치를 살려 1994년에는 북한을 전격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나고 북핵 문제 해결과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도 했다. 당시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 상태[20]였으나 북한과 미국 모두 실상은 사태의 해결을 바라던 참이라서 카터의 방문이 계기로 관계는 급 호전되었으나 그 직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이런 업적에 힘입어 2002년, 인권과 중재 역할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수상.

2011년. 역시 많이 늙었다.
덕분에 대통령으로 있을 때보다 전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가장 훌륭한 전 대통령" 이라는 말도 있고, 여기서 더 나아가 "처음부터 전 대통령이었다면 더 좋았다" 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일단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선한 이미지를 쌓았고 정치적 이미지도 옅다보니 미국 안보상 중요한 문제에 국가원수급을 상대하는 역할인 비공식 특사로 여러번 가게 되었다. 1994년 북한 방문 역시 김대중 당시 민주당 총재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비공식적으로 지미 카터를 특사로 보낼 것을 제안했고 클린턴이 받아들여 성사했다.

이후로도 여러번 방북했는데 2011년 4월에 마르티 아티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그로 부룬드란트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 전직 지도자들과 같이 방북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은 북한의 내부 사정이니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 안 되며, 북의 기아와 핵개발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과 남한에 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가 북한 대변인 노릇하러 갔냐는 비아냥에 시달렸고, 힐러리 클린턴은 지미 카터가 자신이 북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 국무부에서의 브리핑을 요청하자 "hell no"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주일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하는 독실한 남침례교(남부 침례회)인이시지만, 종교적인 근본주의가 미국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발언하거나 여성을 목사로 임명하는 걸 반대해선 안 된다, 동성결혼은 반대하지만 동성애자에의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면 안 된다는 주장을 해 예수쟁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했다.[21] 게다가 미국 정치인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권 탄압에 문제제기를 했는데 미국의 민주당을 지배하는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여 주장을 철회했다. 미국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현직 정치인이나 전직 대통령에게도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5. 독재자 킬러


여담으로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도 가지고 계신다. 공인된 사신 카터가 만난 독재자들은 죄다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탑승했기 때문이다. 처음은 1977년 파나마의 독재자 오마르 토리호스로 1981년 비행기 추락사로 4년만에 사망했다. 1978년 이집트-이스라엘 간 캠프 데이비드 협정 때 미국을 방문해 카터를 만났던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은 땄지만 1981년에 과격파의 총격으로 사망했다.[22] 같은 해 만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도 다음해인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에 당해 쫓겨나 망명지에서 1980년 사망. 1978년 만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989년 동유럽 민주화 혁명 와중에 다른 동유럽 공산권 지도자들처럼 퇴진을 거부하다 유혈혁명으로 총살, 그 다음 희생자는 1979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을 맺기 위해 만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으로 1982년 사망.

더 심한 케이스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한반도의 지도자들이다. 1979년 방한해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던 박정희 대통령은 4개월만인 그 해 10월 부하였던 김재규에 총탄을 맞고 사망했고 1994년 6월 미국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만난 김일성보름도 안 지나서 뒈졌다.[23] 주로 전반기엔 미국의 맹방부터, 후반기엔 미국의 적대국들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2010년 8월 25일 북한을 방문했으나 이를 어째, 김정일김정은을 데리고 중국으로 대피/몽진을 방문했다. 그러나 카터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해 오는 26~28일을 기해 북한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다음해인 2011년 4월 28일에도 김정일을 만날 수는 없었으나 암살 능력이 너무 강해진 나머지 만나지도 않았는데 2010년 첫 방문으로부터 1년 4개월 만인 12월 21일 드디어 김정일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1년 4개월은 16개월이니 그걸 풀어보면 4 곱하기 4 흠좀무[24] 기사.

2004년 8월 베네수엘라의 선거를 감시하고자 14개국 참관인 수백명과 함께 방문하여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만났으나 차베스는 갑자기 암에 걸려 오랜 기간 투병을 하다가 2013년 3월에 사망했다. 카터와 만난 지 9년 뒤의 일이다. 참고 링크. 그런데 2009년에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참고

2012년 6월 이집트의 前 독재자였던 호스니 무바라크가 혼수상태에 빠졌고 사실상 사망 취급 받고 있는데 2012년은 2008년 카이로에서 지미 카터와 무바라크가 회담을 가진 뒤 4년 뒤이다.

그가 은퇴한 뒤에 쓴 에세이 제목이 진정한 리더는 떠난 후에 아름답다 이다. 혹자는 위의 일화를 읽고 나면 진정한 독재자는 (세상을) 떠난 후에 아름답다 로 들린다고 평하기도.

여하간 그를 만나지 않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그래도 40년을 잘 살았다. 근데 미군 아프리카 사령부 사령관 이름이 카터 햄이라더라 그리고 카다피는 김정일보다 두 달 일찍 죽었다.

단, 이 독재자 킬러도 죽이지(?) 못한 독재자가 있다. 바로 불사신피델 카스트로. 카터vs카스트로, 사신vs불사신.[25] 참고로 이 매치는 김정일 원격 방문보다 한 달이나 먼저 있었다.

웃기게도 독재자들이 굳이 과도한 업무로 살기가 싫어져서 카터를 만나거나 방문을 허락한다. 아닌 게 아니라 카터가 현직 대통령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퇴임한 대통령[26]인데 독재자 입장에서 굳이 만나줄 필요는 없다. 더욱이 이들의 국가는 독재 국가이므로 이런 외지인의 자국의 입국을 막기는 더 쉽다. 그런데도 카터가 잘만 방문하고 다닌다니, 독재자 당사자가 허락해주었다는 뜻이다.

더 재미있게도 카터가 만나려 하는 독재자들은 애초에 주위의 어그로를 지나치게 끌거나 독재가 장기화되어 문제를 노출한 독재자이거나 딱 봐도 늙어서 오늘 내일하는 독재자이다. 영리한 암살자 지미 카터 옹 이는 위에 나오지만 전 대통령이라는 높은 지위이면서도 이미지가 매우 좋다보니 미국 대통령이 직접 현지에 날아가 못 푸는 적성국과의 비밀 회담에 대리로 내세울 자격인 유일한 인물이라서다. 그런 이유로 1994년 김일성 사망직전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지미 카터를 클린턴에게 특사로 추천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그냥 우연과 끼워맞추기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진지하게 믿으면 골룸... 근데 너무 많잖아 그리고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4와 의외로 관련이 많다.

손자인 제임스 카터는 45대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문제의 47% 동영상을 당시 자리에 있었던 바텐더에게 얻어서 퍼트려 밋 롬니를 떨어뜨리는 데 한 몫 했다.

2013년 5월 초 한국계 미국인 배씨의 석방을 위해 방북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내가 직접 나서겠다 카터 측에서는 대변인을 거쳐서 초청을 못 받아 방북 계획을 안 세웠으나 방북 의사는 확고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불쌍한 뚜뚱땡이우스

그리고 2014년 9월 김정은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태.# 3대 멸족 가나여

6. 대중매체에서의 지미 카터

남북전쟁을 모토로 한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젊은 나이에 남부연합[27] 해군육전대로 휴가중 집을 지키다가 흑인 게릴라 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한다. 왜!

워게임: 유러피안 에스컬레이션의 DLC 캠페인 "중대한 오류(Fatal error)"[28] 에서는 자던 와중에 페탈 에러 사건이 벌어졌고(...) 졸지에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모든 전쟁 권한을 떠안아 보복 핵공격과 전면전을 지시한다.[29] 이후 소련의 핵공격이 없었음을 알자 발사한 핵미사일을 다 자폭시켰지만 NATO군은 매우 뜬금없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패퇴시켜 동서독을 무력통일하였고(...) 이는 구소련 영향권의 몰락을 불러와 졸지에 "번개와 같은 신속한 행동으로 소련을 무릎꿇린" 위대한 군사지도자에 올랐다.(...) 이제는 자다가 너 독재 시전.

7. 기타

한국어 위키백과의 첫 번째 문서의 표제어이기도 하다. 왜 지미 카터인지는 불명.[30]덜렁 이 두 줄로 시작한 한국어 위키백과가 지금은 30만개가 되가는 대규모로 컸다. 오오 위키 오오...[31]

존 F. 케네디 이후로 계속 이어지던 해군 출신 대통령의 기록을 그가 마감했다. 이후, 후임 로널드 레이건을 건너 뛰어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현재로서는 마지막 해군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웹툰 이말년 서유기에 드립으로 등장했다.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석기 전 의원의 유죄판결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한국 대법원에 발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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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집트의 대통령. 4차 중동전쟁의 주역. 그러나 77년에 유화노선으로 전향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 하단 상술된 내용 참조.
  • [2] 이란의 번호사로서, 이란의 첫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첫 무슬림 여성 수상자
  • [3] 비슷한 예로 후에 빌 클린턴이 있다.
  • [4] 입학은 1943년에 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교육기간이 단축되었다.
  • [5] 요즘 대통령의 이름은 웬만하면 항공모함에 붙지만 잠수함에 근무했다는 인연으로 세계 최강-그리고 세계 최고가-의 원자력 잠수함 시울프급의 3번함이 그의 이름을 따서 '지미 카터'로 이름지었다.
  • [6] 주지사 명단. 1847년부터 파랑의 압박에 주의하라.
  • [7] 한국으로 치면 "민주당 출신 대통령은 영남 출신 후보만 가능한 직종은 아닐까" 정도다. 매우 잘 들어맞는다
  • [8] 심지어 2차대전 이후 미 해군 최고의 명장에 꼽히는 엘모 줌왈트도 깨갱했을 정도.
  • [9] 존 애덤스는 연방주의자로 집권했으나 정당의 개념이 처음 생긴 시대였으니 논외. 그로버 클리블랜드도 사실 위 기준에 들어가긴 하는데, 그는 낙선 4년 뒤 재기했다. 애덤스vs제퍼슨, 퀸시 애덤스vs존슨, 밴 뷰런vs해리슨, 클리블랜드vs해리슨 대결의 경우는 2번 맞부딪쳐 각각 1승 1패를 한 케이스.
  • [10] 1979년에 1차로 14%로 올리고 1981년엔 21%나 되었다. ㅎㄷㄷ.
  • [11] 인플레를 잡으면 실업이 증가한다는 것은 '필립스 곡선'으로 유명한 이야기다. #
  • [12] 경우에 따라 이 항목의 주된 평가와 달리 '외치에 성공했으나 내치엔 실패했다' 는 평가도 있다. #
  • [13] 그는 통화주의자로 케인스 주의와 대립한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즉, 그의 통화주의가 이른바 케인스주의의 조종을 알렸다는 해석이 많다. 아예 케인스 경제학보다도 좌파적인 해석에선 포드주의 이래 뉴딜 호황으로 잠시 화해를 맞았던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필연적인 인플레로 파국을 맞았으며 결국 자본가와 통화의 승리로 끝났다고도 해석한다.
  • [14] 만년 공화당인 그린스펀은 통화정책주의자로 민주당 빌 클린턴 정부에서 중용했고 볼커는 만년 민주당으로 반통화정책으로 공화당 레이건 정부에서 중용한 것이 재미있다.
  • [15] 볼커는 "은행권에서 혁신이라고 하는 것 중 쓸 만한 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하나뿐" 이라면서 글래스-스티걸법 금융규제법 폐지를 끝까지 반대한 이유로 사임했고 지금 시점에선 그가 옳았다. 볼커식으로 말하면 간신히 욕 먹어가면서 버블 꺼뜨려놨더니 그린스펀이 기어이 다 버블 올려서 칭찬만 먹다가 이 사단을 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 [16] 1928년생으로 겨우 만 49세에 발탁되었다.
  • [17] 폴란드계로 망명한 외교관의 아들. 그래서 더 반공적이고 러시아에 원한이 있었다고.
  • [18] 브레진스키는 그때 '요시 그란도 시즌! 이제 소련은 놈들의 베트남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 [19] 그가 설립한 단체는 아니다. 지미 카터는 해비타트 운동을 세계로 알린 역할로 해비타트 본부에서 '수석 자원봉사자' 라는 명예직을 주었고 지미 카터가 중심이 되어 참여하는 건축봉사활동을 지미 카터 프로젝트로 독립시켜주었다. 이 해비타트 수석 봉사자 명예직은 건강상의 이유로 2009년에 반납했다고.
  • [20]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 체제의 동요를 전쟁 가능성으로 봤지만 김대중은 (당시 영국 유학 중) 북한 체제를 더 잘 알았기에 당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의 회동을 통해 미국과 북한의 정상급 회담을 주선했고 미국의 대표로 지미 카터를 추천했다. 이 사건은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는 계기가 된다.
  • [21] 이건 사실 가톨릭을 포함해 개념적인 기독교도로선 평범할 정도의 상식이다. 다만 카터가 속한 미국의 침례교는 대표적인 보수 교단이다. 교단 차원에서 동성 결혼을 반대하며 더불어 장로교나 감리교 등에서 허용하고 있는 여성 목사 임직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 중에서도 보수의 극치를 달리는 남침례회면 답이 없다. 그러니 카터가 엄청 특이한 경우이다.
  • [22] 그리고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된다.
  • [23]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엔 정말로 카터 때문에 죽었다는 진지한 분석들이 있다. 카터가 주선한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김일성의 건강이 크게 악화했다는 의견이 나와서다. 자세한 것은 김일성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 [24] 북한은 지미 카터가 조문사절로 올까봐 외국인들의 조문을 안 받겠다고 발표했다. 기사. 참고로 김정일의 공식 사망일은 12월 17일.
  • [25] 그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2002년은 그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 해였기 때문이라는 농담도 있다.
  • [26] 위의 내용을 보더라도 공식적인 활동이 아닌 비공식적인 활동이니 중요하지 않은 만남으로 간주하고 막으면 그만이다.
  • [27] 이쪽 월드는 남부연합이 1944년까지 존속한다.
  • [28] NORAD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가 훈련 모드로 돌렸음을 잊고 테스트를 하려고 소련이 일제히 전면 핵공격을 한다는 시나리오 디스크를 삽입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천개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경보가 발령되었다.당직자에게 일단 묵념
  • [29] 실제 역사에서는 NORAD에서 2200여개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단 경보가 울렸지만 다른 기관에서 이런 경보가 없어서 허위경보임을 안다.
  • [30] 한국어 위키백과 같은 경우 2002년 10월에 서비스를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지미 카터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서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 [31] 참고로 리그베다 위키의 첫 번째 문서는 FrontPage를 빼면 재야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