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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last modified: 2015-10-07 23:06:38 Contributors

"사변이 해결되지 않는 근본원인은 일본인이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탈폭행을 저지르면서 무슨 황군이냐. 현지의 일반 민중을 괴롭히면서 성전이란 또 뭐냐. 대륙에서 일본관민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폐하의 마음에 합치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참모대위시절 장성 영관급이 참석한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검토회를 열었을 당시 했던 말.[1]

Contents

1. 개요
2. 일본의 기습 및 개전
2.1. 노구교 사건
2.2. 일본의 확전 음모
3. 초반의 패배, 그러나 고착화되는 전선
3.1. 베이핑과 톈진의 함락
3.2. 제 2차 국공합작과 중국의 전쟁 태세
3.3. 베이핑 탈환전
3.4. 2차 상하이 사변
3.5. 항저우 만 상륙작전
3.6. 일본의 강화 제의
3.7. 난징 함락
3.8. 난징 대학살
4. 전쟁의 확대와 교착
5. 일본군의 발악 및 종전
5.1. 만성적인 물자부족
5.2. 군벌 간 내분과 통제, 행정력의 부재
5.3. 덜떨어진 군대
6. 중국과 일본의 피해
7. 역사에서의 비중
8. 여담
9. 중일전쟁 관련 항목

1. 개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중화민국(이하 중국)[2]일본 제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1931년 일본의 만주침략(만주사변)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쟁이며,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역 중 하나이다. 영어로는 Sino-Japanese War.[3]

흔히 겁나게 무능한 중국군을 일본군이 신나게 털었지만 그냥 자신들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전진못하는 것을 미국이 원자탄 떨어뜨려 조지면서 끝난 전쟁 정도로 인식되지만 이는 매우 중화민국의 분투를 폄하하는 잘못된 사실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을 읽으면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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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안개 속을 통과하는 중화민국군, 1943년 상덕(常德)

2. 일본의 기습 및 개전

2.1. 노구교 사건


만주국 건국으로 제대로 재미를 봤던 일본군 내부에서는 신나게 한탕을 저질러 전공을 세워보자는 공명심에 눈이 먼 장교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푸젠성에서 타이완 주둔 일본군 장교들이 도발을 감행하기도 했고 몽골 쪽에서도 도발이 벌어졌다. 이시와라 간지 소장 등이 이러한 분위기를 제어하려 했지만 바이링먀오 전투를 일으켜 내몽골 병탄을 획책했던 무토 아키라 대좌는 "각하께서 하신 일을 따라했을 뿐입니다."라고 이시와라를 비웃었고 그 말고도 수많은 장교들이 상급부대와 내각의 명령도 듣지 않고 우국충정 운운하면서 상명하복을 씹어먹었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7일, 베이핑(현 베이징) 근교 루거우차오(노구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지나주둔군 제1보병연대 3대대 소속 5백명의 장병이 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의 지휘 아에 사전 협의도 없이 실탄을 쓰는 야간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에 긴장한 중국군도 만약 일본군이 중국군 진지 100미터 안에 접근하면 반격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밤 10시 40분 쯤 훈련을 끝내고 철수하려는 순간 수발의 총성과 함께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 8중대장 시미즈 세쓰오 대위가 급히 점검을 실시하자 이등병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미즈 대위는 즉각 이것이 중국군의 소행이라 판단하고 대대장인 이치키 소좌에게 중국군이 공격해서 아군이 실종되었단 보고를 했다. 7월 8일 0시, 미래의 임팔의 영웅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에게 보고가 올라갔고 무타구치는 병력을 출동시키는 한편 중국군과 교섭을 실시했다. 완핑의 현장인 왕렁자이(왕랭제)는 일본군 마쓰이 다쿠로 대좌의 요구를 받아들여 성 수색에 협조했다.

그런데 실종된 병사는 똥 싸느라 늦어서 20분 뒤에 무사히 귀대했다. 갑작스러운 설사로 상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자리를 비운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무도 그가 자기 자리에 돌아온 것을 모르고 중국군과 일본군은 2시간이나 루거우차우 일대를 뒤지고 있었는데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실종되었다고 보고가 된 해당 병사까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어둠을 뒤지고 있었다. 시미즈 대위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지만 추궁이 두려워 그걸 늦게 보고했는데 이미 중국군의 공격에 병사가 실종되었단 보고가 본국까지 올라가버렸다. 한 병사의 설사가 국제문제로 번진 것이다. 그날 새벽 4시에 베이핑에서 일본과 중국 대표들이 모였다. 일본군 대표 마쓰이 다쿠로 대좌와 사쿠라이 도쿠타로 중좌는 사격에 대해 항의했고 중국군 대표 펑즈안과 베이징 시장 친더춘은 사건 현장 주변엔 중국군이 있지도 않았는데 황당한 트집을 잡지 말라고 항의했다. 일본군 대표들은 이런 말을 했다.

"실종된 병사가 돌아왔지만 왜 실종됐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왕렁자이는 실종된 병사가 돌아왔다면 실종된 병사에게 물어보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대응을 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했는데... 무타구치 렌야가 사고를 쳤다! 무타구치는 새벽 4시 20분, 이치키 소좌의 3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당황한 이치키 소좌가 교섭 중인데 공격해도 괜찮겠냐고 반문하자 무타구치는 괜찮다고 소리를 질렀다. 뒤늦게 이를 안 여단장 가와베 마사카즈 소장은 크게 노하여 현장으로 달려왔지만 무타구치를 질책하긴 커녕 그의 공격을 구경만 하다가 돌아갔다.(...) 나중에 무타구치는 가와베 여단장이 자신의 행동을 허락했다고 주장했고 가와베는 이를 부인했다. 각설하고 4시 50분부터 일본군이 중국군 초소를 공격했고 중국군은 80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 황당한 상황에 사쿠라이 중좌가 공격을 중지시키고 직접 완핑 현성으로 가서 왕렁자이와 담판을 지으려 했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사쿠라이 중좌를 돌려보내고 모든 중국군과 중국인들은 융딩 강 서쪽으로 떠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 말같지도 않은 요구를 당연히 중국에선 거부했고 무타구치는 황군의 사무라이 정신을 보여주자고 외치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피묻은 붕대를 감고 중국군의 도발을 격퇴했다고 자랑하는 생쑈까지 벌였다. 여담으로 이 싸움의 발단이 된 똥싸느라 늦은 병사는 시미즈 대위가 7월 8일의 전투에서 용감히 싸웠다는 이유로 용서해줬다.

2.2. 일본의 확전 음모


이 보고를 받은 29군 사령관 쑹저위안은 단호하게 일본군을 섬멸할 것을 지시하면서도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일본에게 양보를 해도 된다는 지시도 내렸다. 7월 8일 오후 친더춘과 하시모토 소장이 전전 교섭을 실시했다. 7월 9일 오후 3시, 친더춘은 일본군의 요구를 모두 수락했고 하시모토 소장도 확전을 피하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정전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중국군은 일본군에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며 융딩 강 동쪽에서 완전히 철수하며 배일 운동을 단속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쑹저위안은 베이핑을 통과하는 열차의 운행의 정상화와 계엄령 해제, 전투태세 완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장제스는 생각이 달랐다. 이미 만주와 상하이에서 일본군에게 굴욕을 맛본 그는 순순히 일본에게 영토를 떼줄 생각이 없었다. 장제스는 쑹저위안에게 일본군을 격퇴하고 빼앗긴 땅을 탈환하란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허난성의 중앙군 4개 사단을 베이핑으로 출전시켰다. 마침 조선군 20사단과 본토의 3개 사단이 중국에 증파된단 소식은 장제스에게 일본의 침략 의도에 대해 확신하게 했다. 장제스는 일본을 전혀 믿지 않았다. 1차 상하이 사변 때 평화 조약을 체결해놓고도 상하이를 습격한 일본의 비겁함에 대해 장제스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바오딩에 30만 대군이 집결했다.

하지만 쑹저위안은 일본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까 두려워 하여 장제스의 지시를 무시했다. 러허 사변 때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둔 적도 있는 그였지만 허베이 성의 사실상의 지배자가 된 그는 허베이의 지배권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였다. 특히 중앙군의 개입은 난징 정부가 허베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장쉐량도 만주 사변 때 비슷한 짓을 하다가 만주를 잃고 개털이 됐거늘 그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쑹저위안의 저자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그 중에서도 관동군은 오히려 화북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는 즉각 2개 혼성여단을 출동시켰고 관동군 참모 츠지 마사노부가 무타구치 렌야에게 달려가 관동군이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니 마음껏 저지르라고 부추겼다. 오히려 지나주둔군보다 관동군이 너무 날뛰어서 지나주둔군 참모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7월 8일 오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노구교 사건을 보고받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무타구치의 만행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오후 6시에 각의를 열어 확전을 막기로 했다. 하지만 3대 오물 중 하나인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의 반발로 뒤집혔다. 스기야마는 이번 사건은 중국의 계획적인 도발이며 이게 다 중국의 반일 성향 때문이다! 라고 주장했다. 스기야마는 히로히토를 알현하여 3개월이면 중국을 병탄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스기야마는 3개 사단을 증파하려 했지만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반대했다. 참모본부는 주전파와 신중파로 갈려서 치열하게 대립했다. 처음엔 신중파가 우세했지만 중국군이 북상중이란 소식에 전세가 뒤집혀 중국을 침략할 절호의 기회란 분위기가 자리잡혔다. 7월 11일 오후 2시의 각료회의는 재가 없이 멋대로 출동한 관동군 2개 여단과 조선군 20사단에 대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고(...)'중국의 반성을 위해 부득이하게 출병한다'는 정신승리로 점철된 궤변이 발표되었다. 이에 일본의 우익 언론들이 적극 호응했다. 지나주둔군은 정전 협정도 체결됐고 중국군의 반격 가능성도 낮다고 보고했지만 곧 대세에 따랐다.

정전협정에 만족 못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장제스는 쑹저위안이 일본과 맺은 모든 조약이 무효이며 교섭권은 난징 정부에게만 있음을 천명했다. 7월 12일 장제스는 화중에 배치된 모든 부대에 정저우에 집결하란 명령을 내렸다. 장제스는 방어선을 꾸리고 철도를 정비하며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베이핑과 톈진을 지킬 수 없음을 장제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처음부터 도시를 내주고 지연전을 펼칠 계획을 짜고 있었다. 7월 15일 장시성 루산에서 루산 국방회의가 열려 중국 전역에서 주요 인사 150여명이 참석했다. 장제스는 5일간의 회의 끝에 중국은 평화를 원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고도 싸울 것임을 천명하는 루산 담화를 선언했다.

1. 그 어떤 것도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할 수 없다.

2. 기찰위원회의 행정조직에 대해 비합법적인 어떤 변경도 용납할 수 없다.

3. 난징 정부가 기찰위원회에 파견한 관리를 파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한다.

4. 제 29군은 일본으로부터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다.

일본은 뻔뻔하게도 오만한 중국에게 황국의 위력을 보여주자고 날뛰었다. 7월 20일 참모보부는 무력 사용을 결의했고 7월 27일에 고노에 내각이 3개 사단의 중국 파병을 승인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이렇게 전면전이 발생했다. 임진왜란 때부터 일본의 입장에서는 꿈에도 그리던 대륙으로의 침략이 시작된 것.

3. 초반의 패배, 그러나 고착화되는 전선

1937년, 난징 전투의 경로를 나타내는 지도

3.1. 베이핑과 톈진의 함락


전쟁을 작정한 일본군은 계속 도발을 감행하여 긴장 상태를 야기했다. 일부 부대는 포격을 개시했다. 이런 와중에도 쑹저위안은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계속 침묵했다. 7월 26일 일본군 1개 대대가 베이핑의 광안먼으로 멋대로 진입하다가 중국군 경비대의 포위 공격에 전멸 직전에 이르자 쑹저위안은 급히 공격을 중지하여 이들을 살려주었다. 부하들이 반발하기 시작했지만 쑹저위안은 일본에 계속 양보했다. 하지만 일본은 7월 26일 베이징 교외의 모든 중국군을 융딩강 서쪽으로 철수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28일 정오로 내건 시한도 지키지 않고 1937년 7월 28일 오전 8시에 대대적인 공격에 착수했다. 3만명의 일본군이 몰려오자 쑹저위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허겁지겁 방어태세를 갖추는 한편 바오딩의 쑨롄중, 완푸린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이미 늦었다.

7월 28일 오전 8시, 베이핑, 톈진, 탕구에 걸친 저역에서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난위안, 펑타이, 시위안이 잇달아 함락됐고 펑즈안의 중국군 37사단과 장쯔중의 38사단은 개박살이 났다. 톈진과 다구에서 중국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에 의해 모두 제압되었다. 결국 7월 30일 밤에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되었다. 1만 6천명의 피해를 낸 중국군은 철도를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6백명에 불과했다. 황푸군관학교 베이핑 분교의 교관과 학생들의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대부분 장렬히 전사했다. 후퇴한 중국군은 허난, 쑤이위안, 차하얼 등으로 후퇴하여 중앙군과 합류했다.

3.2. 제 2차 국공합작과 중국의 전쟁 태세


마침내 일본군이 전면전에 돌입하자 중화민국 주석 린썬이 8월 2일 대국민 성명을 통해 대일 항전을 선포했다. 8월 7일 국민당 전당대회는 항일 전쟁을 결의했다. 장제스는 서안 사건으로 교전을 중단한 공산당과 본격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루산 회의에 참석한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이 난징 정부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소비에트 정권과 적화 통일을 포기하며 난징 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8월 19일 공산군은 국민혁명군에 편입되어 제8로군으로 편성되었고 주더가 총사령관에 펑더화이가 부사령관에 예젠잉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옌시산의 제2전구에 배속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그 외에 화중, 화남의 공산군 게릴라 1만 3천명도 공산당 중앙의 설득으로 신4군으로 개편되어 유격 활동을 맡았다.

8월 11일 국방최고회의가 설치되어 군사위원장 장제스가 주석이 되었고 왕징웨이가 부주석이 되었다. 8월 15일 국가총동원령이 선포되었고 8월 20일 중국 동부 최전선을 5개 전구로 구분했다. 제1전구와 5전구는 장제스가 맡았고 2전구는 옌시산, 3전구는 펑위샹이 맡았다. 이후 전구는 전선이 확대되면서 12개로 늘게 된다.

3.3. 베이핑 탈환전


일본군은 이렇게나 중국군 엿을 먹여놓고도 이게 전면전으로 확대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주국을 만들었을 때처럼 화북 지역 5개성 정도를 점령해서 새로운 괴뢰국을 세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의 그런 악랄한 요구에 두 손 놓고 항복할만큼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쑹저위안의 패잔병들과 바오딩의 중국군이 베이핑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탕언보가 지휘하는 제13군을 박살내고 만리장성을 돌파했다. 웨이리황, 류즈, 옌시산이 탕언보를 구하기 위해 북상했지만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결국 탕언보는 2만 6천명의 병력을 잃고 패주했고 겁을 먹은 군벌군들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차하얼 성에 진입했고 8월 27일에 차하얼의 성도 장자커우를 점령했다. 탕언보는 맹렬히 저항했지만 군벌들의 비겁한 적전도주로 인해 결국 측면을 내주어 패퇴했다.

3.4. 2차 상하이 사변


화북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중국군이 일본군 조계지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고노에 내각은 8월 19일까지 중국내 일본인들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런데 1937년 8월 9일 상하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 소속 오오야마 중위가 중국군 경비병의 제지를 무시하고 훙챠오 공항에 들어가려고 권총을 발사하며 난동을 부리다가 사살되었다. 일본군은 이것이 상하이 정전협정 위반이라면서 사건의 공동조사와 중국군 보안대 철수를 요구했다. 상하이 경비사령관 장즈중은 상하이의 일본군이 1만명으로 증강되었고 일본군 제3함대도 증강되었으며 사세보의 2함대도 상하이로 오는 중이란 잘못된 보고를 올려 장제스를 경악하게 했다. 상하이는 중국 금융, 자본, 산업의 중심지로 잃어서 안되는 요충지였다. 장제스는 상하이의 방어진지를 보강하고 병력을 증원했다. 상하이 공동 조계 20킬로미터 이내를 비무장 지대로 정한 정전협정 위반이었으나 이미 일본이 정전협정을 깬 판에 그걸 지킬 이유는 없었다.

일본이 상하이에 2개 사단을 증파했단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자신의 독일식 정예 87사단과 88사단, 2개 포병 연대 등을 상하이에 배치하여 수비군을 5만명으로 증강하고 방어선을 꾸렸다. 일본군의 우회상륙에 대비해 위산과 우쑹에도 병력을 배치했다. 긴장한 상하이 조계지 대표들은 평화를 호소했지만 상하이 시장 대리 우톄청은 이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은 중국군에게 방어시설을 철거하고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연히 중국은 그 요청을 씹었다. 8월 13일 오전, 일본 해군 육전대 1개 분대가 도발했고 2시부터 대대적인 공격이 감행되었다. 일본군은 5천명이고 중국군은 5만명으로 수적으로 중국이 압도적인 우세였다. 장제스는 이런 수적 우세와 전 군사고문인 한스 폰 젝트 장군이 건설한 젝트 라인을 믿고 일본군의 증원군이 오기 전에 일본군을 섬멸하려 했다. 새로운 고문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젝트 라인이 너무 구식인데다가 미완성이라 역포위의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장제스는 마음을 굳힌 후였다. 장제스는 해공군을 총동원하고 어선과 상선을 자침시켜 양쯔강 입구를 봉쇄하여 일본군에 대비했다.

8월 14일 오전 7시 중국 공군이 일본 해군 육상 기지와 물자 직접장을 폭격했지만 악천후와 기술 미숙으로 큰 효과는 보지 못했고 민간인 피해도 발생했다. 중국 해군 군함들도 포격을 가했지만 성과는 신통찮았다. 어쨌거나 중국의 반격에 놀란 일본도 공격을 준비했다. 타이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출격하여 난징, 항저우, 광더, 난창, 우한을 폭격했다. 거기에 일본 해군 함공모함 3척이 도착하여 가세함으로 많은 중국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공군도 반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타이완까지 날아가 폭격을 가행했다. 8월 15일에 중국군의 독일식 정예사단들이 반격에 돌입했다. 거기에 3개 사단이 증원되어 7만명의 중국군은 바쯔차오를 점령한 일본군을 축출하고 거세게 밀어붙였다. 격화되는 전황에 8월 18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대표단이 전투 중지를 요청했지만 중일 양국이 거부했다. 중국은 만약 조계지에 일본군 고사포가 설최면 묵과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같은 날 장즈중이 직접 반격에 나서 일본군을 좁은 구역에 몰아넣었지만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과 화력 부족으로 결정적 승리는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해군과 항공대의 지원으로 화력면에서 매우 우세했다. 덕분에 전세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장시 성 주석 슝스후이는 난징을 시찰하고 병력 부족과 화력 열세로 공세를 지속하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군정부장 천청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상하이에서 지면 화북을 뺏기고 화북을 뺏기면 화중을 뺏긴다면서 상하이에서 적의 전력을 양분하여 맞서야 한다고 했다. 장제스는 흥분하여 반드시 공격해야 한다고 연거푸 외치곤 화북으로 가야 할 주력부대들을 상하이로 보냈다. 상하이엔 무려 쌍방을 합쳐 1백만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하게 되었다. 한편 8월 21일 중국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3백명의 군사 고문단을 받아들였다. 또한 1억 달러의 차관과 1억 5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무기들도 지원되었다.

8월 23일 우쑹 해안가에 일본군 2개 사단을 태운 일본군 대함대가 나타났다. 일본군 3사단은 우쑹만에 11사단은 촨사전에 상륙했다. 하지만 그들이 몰랐던 사실이 있었으니 장제스가 1935년부터 콘크리트 크리크와 기관총 진지로 이루어진 매우 촘촘한 방어선을 꾸려놓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지뢰밭, 철조망이 해변을 매우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들답게도 중국군을 매우 얕잡아보고 자신들의 상륙 지점에 대해 잘 알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상륙했다. 심지어 탄약도 제대로 주지 않아 이들 대부분이 총검으로 싸워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해변에 내린 일본군 3사단 병사들은 중국군의 집중 사격에 다진 고기가 되어 삽시간에 학살당했다. 탄약은 금방 떨어졌고 일본군은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격퇴당했다. 경악한 3사단장 후지타 스스무 중장이 후퇴를 고려할 정도였다. 후퇴에 경기를 하는 일본군 특성상 이는 대단한 생각이었고 그만큼 중국군의 저항은 격렬했다. 8월 31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겨우 우쑹 포대를 점령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내고 겨우 3킬로미터 전진했다.

11사단 역시 고생하긴 마찬가지였다. 6일 동안 겨우 5킬로 전진한 그들은 교두보를 마련했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곧 공세종말점에 도달했다. 절망적인 자살 돌격이 이어져 한달 만에야 겨우 상하이 남쪽의 뤄뎬전까지 전진했지만 거기에도 강력한 중국군 방어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닛뽄군:아 젭라... 9월 28일이 되어서야 뤄뎬전이 함락되었다. 중국군의 피해도 50%에 달했지만 이들은 질서정연하게 상하이로 퇴각하는 규율을 보여주었다. 최정예라 자랑하던 3사단과 11사단은 1주일만에 도합 4천명의 사상자를 냈고 한달이 지난 시점에서 1만명을 잃으면서 병력의 삼분의 일을 잃었다. 이런 분전을 참관한 팔켄하우젠은 적을 섬멸할 순 어려워도 적을 저지할 순 있을 것이라 평가했다.테란 사기네요. 벙커 + 탱크 + 마인 안 뚫리는 것 좀 보세요!

이렇게 성공적인 방어전을 기획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 군사고문으로 근무하면서 최고무공훈장인 푸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은 인물로, 이후 1927년까지 드레스덴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있었다. 즉 이론가임과 동시에 경험이 부족한 군대를 그럭저럭 싸울 줄 아는 군대로 바꿔본 경험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때의 공적 덕분에 장개석은 1950년 팔켄하우젠의 72회 생일때 친전을 보내 팔켄하우젠을 중국의 친구라고 일컬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진짜 제대로 된 고문관(1번 항목)이었다.

각설하고 3만의 일본군은 자신들이 20만이 넘는 중국 수비대를 개발살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지만 중국군이 지금껏 그들이 상대해온 병신이 아니란 사실에 당황했다. 마쓰이 장군은 허겁지겁 본국에 증원요청을 보냈다. 1937년 9월 7일 일본은 3개 사단을 추가 파병했다. 타이완에서 시게후지 지대 1개 연대가 차출되었고 9사단, 13사단, 101사단, 야전중포병 5여단도 증파되었다. 이중 13사단과 101사단은 예비군들과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로 경험이 부족했고 무기도 빈약했다. 하지만 주력 부대가 소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 이 정도 부대밖에 보낼 수 없었다. 이들은 9월말 뤄뎬전에 배치되었다. 마쓰이 대장은 이들을 인솔하여 중국군 방어선의 중핵인 다창전을 공격했다. 다창전만 점령하면 상하이에서 포위된 해군 육전대를 구출할 수 있음은 물론 쑤저우강까지 남하해 중국군 주력을 포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뤄뎬전에서 다창전 사이에는 역시 매우 견고한 중국군 방어선이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군은 우쑹과 뤄뎬전을 점령하면서 치러야 했던 혈투를 또 치러야 했다. 닛뽄군:날 죽여라... 중국군은 기관총과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를 운용하면서 일본군에 출혈을 강요했고 잘 짜여진 방어선을 통해 일본군에게 일부 구간을 뺏겨도 순식간에 그들을 섬멸할 수 있었다. 방어선이 뚫려도 신속한 후퇴를 통한 전선의 재정비가 가능하여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진 일본군이 화력면에서 우세하여 일본군은 느리지만 전진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이 10만명으로 늘자 장제스는 전병력을 상하이에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화중, 화남의 모든 군대들이 상하이로 기차를 탈고 달려왔다. 10월 말에 7개 집단군 85개 사단, 80만 대군이 집결했다. 장제스가 정성껏 가꾸어 온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국군 전체의 4할에 가까운 병력이 투입된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 엄청난 부대들을 무계획적으로 상하이에 투입했다.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병사들이 너무 좁은 공간에 몰려서 연락, 보급, 지휘에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전투 효율이 떨어졌다. 일본군 전함의 함포 사격 한방에 일개 대대가 전멸하는 일도 발생했다. 뭣보다도 중국군 지휘관 어느 누고도 70만 대군을 한꺼번에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10월 20일까지 중국군은 13만명의 사상자를 냈다. 공군도 일본군의 함공모함이 속속 도착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보잘것없었던 해군은 양쯔강 하류에 일본 해군이 진입하는 것만 겨우 저지하고 있었다. 결국 9월 20일 양쯔강 입구의 장인에서 중국 해군은 일본 항공대의 공격으로 사실상 전멸했고 극소수의 전함만이 살아 난징과 우한으로 퇴각했다.

상하이에 병력이 몰리면서 화북전선도 위험에 빠졌다. 원래 보조 전선에 불과한 상하이가 주객전도로 전황을 판가름하는 최고 결전지로 바뀌면서 화북에 쓸 여력이 없어졌고 결과 일본군은 차하얼 성과 쑤이위안 성을 점령했다. 상하이 방면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일본군 3개 사단이 더 증강되면서 중국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10월 8일부터 공세를 시작했다. 다창전의 견고한 방어막이 뚫리지 않자 일본군은 중포 120문을 집결해 엄청난 포화를 끼얹었고 다시 4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했다. 그래도 방어선이 뚫리지 않자 그동안 재미를 많이 본 무기인 독가스를 뿌렸다. 결국 다창전 방어선은 독가스에 무너졌다. 10월 25일 일본군으 다창전을 함락했고 중국군은 쑤저우 강 남쪽으로 퇴각했다. 다창전이 함락되었단 소식에 상하이의 육전대도 반격에 나섰다. 결국 장제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주력 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10월 26일 전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들의 철수를 위해 88사단 소속 4백명의 결사대가 일본군을 상대로 지연전을 펼쳤다. 이들은 4일이나 일본군을 저지한 후 11월 1일 영국 조계지로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5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일본군 장갑차 수대를 격파하고 200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기염을 토했다.

어쨌거나 상하이 북정거장과 자베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11월 6일 바쯔차오를 점령함으로 상하이를 거의 손에 넣었고 전 중국군은 상하이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10월 31일 일본군은 쑤저우 강을 도하해 중국군을 쳤지만 수십만의 중국군을 쉽게 이길 순 없었다. 하지만 중국군도 상하이 공방전에서 그러했듯이 지나치게 밀집된 진형을 취하다가 일본군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3.5. 항저우 만 상륙작전


한편 일본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10월 20일 또 병력 지원을 승인했다. 화북의 6사단, 본토의 18사단, 114사단, 야전 중포병 6연대, 독립 산포병 2연대, 예비 보병 2개 연대 8만명이 모여 10군을 편성했다. 2.26사건으로 예편했던 야나가와 헤이스케 중장이 복귀하여 사령관을 맡았다. 한편 일본군은 상하이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으며 방어선이 미약한 항저우를 치기로 결정했다. 화북 전선의 16사단이 차출되어 바이마오커우에 상륙했다. 중국군을 모조리 포위섬멸하겠다는 거창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일본군은 상하이에 상륙한 모든 부대를 통합하여 중지나방면군을 편성했고 사령관으로 마쓰이 대장을 임명했다.

1937년 11월 5일 새벽, 일본군 10군이 진산웨이에 상륙했다. 없다고 봐도 무방할 중국군의 방어시설 덕에 일본군은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했다. 그들은 일본군 백만 항저우 만 상륙이란 애드벌룬까지 크게 띄우고 전차를 앞세워 진격했다. 장제스는 경악했다. 일찍이 바이충시가 상하이를 포기하고 젝트 라인으로 철수하여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것을 건의한 바가 있으나 장제스는 일본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일본군이 상하이만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는 대실수를 저질렀다. 중국군은 허겁지겁 항저우만의 일본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11월 8일 67군의 군장 우커런 중장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남쪽에서 일본군 10군이 북상하고 북쪽에서 상하이 파견군이 몰려오자 중국군은 완전히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한편 산시성도 무너지면서 화북 전선도 파탄 지경에 몰렸다. 장제스는 자신의 방어전략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는 11월 8일 전군 퇴각 명령을 내리고 푸산-쑤저우-자싱을 잇는 우푸 바어선을 설정했다. 하지만 수십만명이 밀집된 중국군은 제대로 된 철수계획도 없이 걸어서 탈출해야 했는데 일본군 항공기들이 폭격을 가하고 일본군이 접근한단 소식에 사실상 와해되어버렸다. 중국군은 소부대 단위로 달아나야 했다. 당연히 일본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중국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1월 10일 상하이는 완전히 포위되었고 11월 12일에 일본군이 시가지 전지역을 장악했다. 11월 13일 16사단이 바이마오커우에 상륙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이 버린 엄청난 숫자의 장비를 노획했다. 중국 해군의 주요 함정들도 침몰하거나 노획당했다. 공군도 50%의 전력을 잃었다. 하지만 장제스가 재빨리 정신을 차려 신속한 후퇴명령을 내린 덕에 주력부대가 포위섬멸되는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3.6. 일본의 강화 제의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이어지는 가도에는 수십만 중국군 패잔병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군대가 아니라 폭도로 전락한 이들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고 이에 중국군 수뇌부는 독전대를 투입해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 패잔병 무리에 기관총을 난사했다. 하지만 패잔병 무리는 중국군의 손에 벗어난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이제 중국군은 모든 전력을 소진해버렸고 병력도 자원도 없었다. 즉 수도 난징을 지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중국 국제연맹 대표 구웨이쥔은 일찍이 8월 30일에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지만 이탈리아의 반대로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가 부결되었고 미국의 반대로 석유 금수조치도 부결되었다. 한편 일본의 목표는 상하이가 아니라 화북이었고 화북이 손아귀에 들어오자 고노에 내각은 삼국방공협정 때문에 악화된 소련과의 관계와 히로히토의 조속한 종전 요구를 의식하여 중국에 정전협정을 제안했다. 이는 육군의 반대를 의식한 비밀 회담이었고 독일의 중재에 나섰다.[4]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은 일본의 타협안을 장제스에 전달했는데 이 내용은 무척이나 터무니없었다.


2. 만주국 국경으로부터 텐진, 베이핑 남방까지 비무장 지대 확대.

3. 상하이의 비무장 지대 확대.

4. 항일정책 중단.

5. 일본에 대한 관세 인하.

사실상 화북을 그냥 다 내놓으라 이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 관계로 주화파인 왕징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바이충시, 구주퉁, 허잉친조차도 받아들이자고 했지만 장제스는 여기서 일본에 굴복한다면 중국인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전까진 어떤 타협도 없다고 천명했다. 이에 일본 외상 히로타는 우리의 요구는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했다. 한편 평화협상에 대해 뒤늦게 안 육군 강경파는 이러한 조건조차도 너무 관대하다고 난리를 쳤다. 이들은 장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난징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본영은 전선을 확대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상하이 파견군과 10군은 일본군 종특대로 본국의 명령을 씹고 난징을 향해 몰려들었다.

3.7. 난징 함락


일본군이 난징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하자 중국군은 난징을 사수하기 위해 타이후 호를 기점으로 15군, 19군, 21군으로 구성된 좌익군과 8군, 10군, 23군으로 구성된 우익군을 조직하여 젝트 라인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들은 신병과 패잔병으로 구성되어 사기도 질도 형편없었다. 일본군은 푸산-쑤저우=우장-자싱을 연결하는 중국군 제1방어선에서 중국군 토치카에 막혀 다시 고전해야 했지만 11월 18일 창수를 점령했고 19일 쑤저우, 자싱을 돌파했다. 타이후 호 북방 방어선이 뚫리면서 11월 27일 우시, 11월 28일에 창저우가 함락되었다. 남방 방어선도 뚫려 11월 24일 후저우, 11월 30일 안후이 성의 광더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군이 수송수단을 인간의 발에 의존했기 때문에 진격속도가 느렸다는 것이다. 그나마도 보급능력이 형편없어서 일본군은 탄약 부족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에 일본군은 보급문제도 해결할겸 중국인들을 공격해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했다. 11월 19일 쑤저우에선 35만 쑤저우 시민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장제스는 난징이 위태로워지자 군사위원회와 참모회의를 열었다. 결국 난징을 지키기도 어렵고 지킬 가치도 없단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후난 군벌이자 군사참의원장인 탕성즈가 싸우지도 않고 수도와 쑨원의 묘를 버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장제스도 이에 동의했다. 하지만 모두가 반대하니 수도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와 주력부대는 우한으로 옮기기로 했다. 탕성즈가 남아 난징 방어를 준비했다. 하지만 난징은 이미 일본군이 온단 소식에 쿠데타설까지 떠도는 등 아비규환이었다. 장제스는 트라우트만 대사를 통해 12월 2일 만약 일본이 중국의 화북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인정해준다면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일본군은 이미 평화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참모본부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청했지만 고노에 수상과 히로타 외상은 패배자 주제에 조건을 붙이는 것은 주제넘다고 반대했다. 고노에는 강화를 받아들이면 중국과 열강이 일본을 우습게 알 것이라면서 군부를 질타했다.(...) 군부의 강경파인 타다 하야오 중장은 참모본부와 내각의 입장이 바뀌었다. 내각이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탕성즈는 13개 사단 15만명의 수비군을 집결했고 두위밍의 장갑병단 소속의 경전차들도 확보했다. 여기에 상하이 방면에서 후퇴해오는 병사들이 계속 합류했다. 하지만 장비도 지휘계통도 빈약한 이 군대는 숫자만 많았지 오합지졸이었다. 탕성즈는 난징 교외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난징성에 병력을 모았는데 성곽은 항공기와 야포를 막기엔 너무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탕성즈는 교량과 배를 모두 없애는 등 배수진을 쳤지만 덕분에 50만에 달하는 난징 시민들의 피난길도 막아버렸다. 12월 6일 일본군이 난징에 도달했다. 일본 해군과 폭격기들이 난징을 강타했고 중국 공군이 맞섰다. 이때 미 해군 함선 파나이호와 파나이호를 구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호가 일본군의 공격에 침몰하여 50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국은 영미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미국과 영국 모두 배상금만 받고 물러났다.

일본군은 탕성즈가 배치한 중국군 2개군,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최외곽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난징을 포위했다. 마쓰이 대장은 12월 10일 오전까지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탕성즈는 거부하고 성문을 모두 막았다. 장제스는 이 순간까지 난징에 남아있다가 이날 비행기를 타고 루산으로 떠났다. 12월 10일 오후 1시가 되자 4개 사단, 10만명의 일본군이 공격해왔다. 중국군은 기량은 엉망이었지만 수도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에 용맹히 싸웠다. 일본군 전차들은 독일제 대전차포에 잇달아 격퇴되었다. 12월 12일까지 전선은 교착 상태였지만 12월 12일 오후에 일본군 9사단 36연대 공병대가 광화문을 폭파시키면서 일본군은 난징 시내로 몰려들었다. 일본 언론들은 난징을 점령했다고 난리를 쳤고 일본 전체가 좋아 날뛰었지만 사실 일본군은 난징 시내에서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성문을 폭파시킨 데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일본은 상하이에서 썼던 독가스를 다시 뿌렸다. 결국 모든 방어선이 무너졌고 중국군은 시내로 철수하면서 시가전을 벌였다. 한편 일본군이 중국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파견했던 구나사키 지대가 중국군이 양쯔강 너머로 철수할 거점인 푸커우를 함락하면서 중국군의 퇴로는 완전히 막혔다.

오후 8시, 탕성즈는 다 끝났음을 알고 후퇴 명령을 내렸다. 통신선이 끝어진 관계로 후퇴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음에도 탕성즈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탕성즈가 달아났단 소식에 중국군은 동요하여 무너져 내렸다. 12월 13일 일본군은 총공세를 취했고 오후 4시에 난징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와해되버린 중국군은 난징 밖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외국인 조계로 달아났지만 대다수는 메이탄 항구로 달아났는데 피난길에 오른 수십만 민간인과 패잔병들이 뒤엉켰다. 탕성즈가 후퇴명령이 내린 사실을 모르던 독전대가 그들을 막아섰고 결국 중국군은 살아남기 위해서 전우들을 죽여야 했다.[5] 수십만명이 아우성 치는 아비규환 속으로 일본군 기관총, 대포, 전투기들이 폭탄과 총탄을 쏟아부었다. 엄청난 사람들이 양쯔강에 빠져 죽었고 겨우 강을 건넌 사람들 앞엔 일본군 구니사키 지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쯔강 양안은 모두 피로 물들었다. 싸우지도 달아나지도 못하게 된 대부분의 살아남은 중국군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하지만 일부는 시가지에 숨어 항전을 지속했다.

한편 우한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는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다시 실권을 쥐지 못했고 국공내전 중에 공산당에 전향해서 후난성 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나 문화대혁명 중에 숙청되어 류사오치처럼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해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3.8. 난징 대학살


일본군이 난징 외곽 양쯔강에서 자행한 대규모 학살

해당 항목 참조.

4. 전쟁의 확대와 교착

1940년일본 제국의 확장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본 미국 등은 일본을 제재하기로 결정하고, 전략물자의 대일수출을 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곤란해진 일본은 제재를 가한 미국, 영국[6], 네덜란드[7]와 중국을 묶어 ABCD(American+British+Chinese+Dutch) 포위망이라고 가칭하며 일종의 배후처럼 선전해댔으며, 말이 씨가 되듯이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이들 국가들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초반 장개석의 삽질과 형편없는 중국군의 기량 덕분에 어느 정도 신나게 전진했지만 험준한 중국 서부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중국군이 지형을 바탕으로 유격전과 소모전을 강요하자 즉각 진격이 주춤해진다. 중국 서부에 대한 무리한 공략은 일본군이 반자이 어택을 감행하다가 매복 작전과 엿만 먹고 돌아오고 거기에 중국군이 꽁무니를 쫓아가 뒤통수를 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까진 도무지 진군할 수 없었고 진군해도 더 진격하기 어려운 더 깊숙한 곳에 들어갈 것이 뻔하니 일본은 중국을 항복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중국 대륙의 엄청난 크기로 인해 백만명이 넘는 병력을 뿌려놔도 주요 거점과 이들을 잇는 철도 정도만 간신히 지켰다는 점에서 '점과 선의 지배'만 간신히 유지한다는 표현도 있는데 이것도 후한 표현이고 당시 일본 기자 하나는 일본군은 자신들의 신발 밑창만 지배한다고 비꼬기도 했다. 점령 도시 안이라도 병영만 나가면 뭔 꼴이 날지 몰랐다. 게다가 중국 대륙 특유의 풍토병에 걸려서 연대단위로 병자가 발생하거나, 황하둑이 터지면서 대홍수가 발생한 것에 휩쓸려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사단이 구원을 요청하고, 결정적으로 황사 때문에 상당수의 일본군 병기가 잦은 고장과 작동불량에 시달려서 안 그래도 안 좋은 보급상황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큰 전투때마다 중국군 10만, 20만을 아무리 섬멸해도 중국의 무한에 가까운 인력은 그 손해를 금방 메워버렸다. 일본으로썬 중국군의 주력군을 일거에 분쇄하여 국민당을 붕괴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지만 장제스는 이미 1937년 12월 충칭(중경)으로 천도하면서 깊숙한 내륙인 사천성까지 정부를 이동한 후 농성전에 들어가 일본과의 결전을 회피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1938년 10월 우한과 광저우를 점령한 즈음부터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독소전 예고편

애초에 장제스는 '공간으로 시간을 버는 것'을 항일전략의 기본으로 삼았고, 이는 아직 중국의 경제와 사회가 전근대적이고 공업단계에 들어가지 않았기에 충분히 가능한 전략이었다.[8] 게다가 장제스는 전쟁 초반부터 "남경이 함락되면 수도를 중경으로 옮기겠다. 만약 중경이 함락되면 티베트의 라싸로 수도를 옮기고, 라싸마저 함락당하면 해외에 망명정부를 조직해 계속 싸울 것이다." 라는 훈령을 발표할 정도로 항전 의지가 굳었기에, 중국 정부 쪽에서 스스로 손을 들고 굴복하리라 기대할 수도 없었다.

1941년 6월 5일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에 희생당한 시민들[9]

그래서 일본은 해결책이랍시고 소위 신멸작전을 펼쳐 가는 곳마다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다. 8년에 걸쳐 무려 1200만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학살당했으나,[10] 30개 사단을 동원하여 일본군에게 어설픈 반격을 가해보려다가 처참히 궤멸된 국민당군은 이후 일본군과의 교전을 회피하며 방어로 일관하였으며 이로 인해 전선의 교착이 유발되었다. 동시에 공산당의 게릴라들이 일본의 점령지에 출몰하며 수많은 해방구를 만들어서 일본은 앞서 말했듯 점령도시들을 잇는 선만을 겨우 유지할 수준이 되었다.

중국 전선에서의 이러한 상태는 결국 일본 패망의 한 요인으로 크게 작용했다. 중국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더 전쟁을 확대시켰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중일전쟁을 유지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일본이 영미와의 전쟁을 개시한 것이었고, 중국은 이제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 내내 중국 대륙에는 무려 105만명의 일본군이 묶여 있었지만 딱히 이들이 뭔가를 하지는 못했다.

일례로 일본군이 작전성공이라고 자화자찬하는 1943년 후반의 상덕 전투의 경우, 원래 이 전투에 참가했던 일본군 7개 사단 중 3개 사단은 상덕 전투가 끝나면 마리아나 제도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헌데 상덕 전투가 시원찮게 끝나버리면서 대본영이 아예 중국군의 교전능력을 말살한다고 대륙타통작전을 수립하면서 사단 전용을 취소해버렸다. 만약 이들 사단이 마리아나 제도로 갔더라도 일본군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겠지만, 적어도 수비지역의 크기에 비해서 병력이 태부족이었던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에게는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군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서 장제스는 서방 연합군이 일본을 패망시킬 때까지 대륙의 일본군들의 발을 잡아놓는 농성전이라고 읽고, 신나게 얻어터지며 샌드백 신세가 되면서도 일본군의 가랑이를 붙잡는 작전에 돌입했다. 결국 이들은 일본 패망 후 국민당 정부에 항복하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여담으로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는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감행한 적이 있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2 폭격기 2대가 일본 큐슈구마모토 상공까지 온 것.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엉망이라는 것이었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던 것. 그리고는 나중에 천조국한테 신나게 얻어터졌지

5. 일본군의 발악 및 종전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치고 작전) 지도

이러한 상황에 1944년 4월, 일본군이 전황을 타개하고자 북부 점령지와 남부 하이난섬 일대의 상륙 지점을 연결하는 대륙타통작전 '1호 작전 (이치고 작전)'을 개시하자 어김없이 개박살이 난 중국군은 30만에 달하는 병력을 몽땅 날려먹었다.(이 책임은 미국에게도 있다. 장개석에게 버마에 중앙군을 투입하라고 윽박질러서 결국 없는 병력을 빼서 줬었는데, 바로 일본군이 공세를 한것. 두 달 후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며 유럽 공략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뭔가 연합군과 추축군의 입장이 뒤바뀐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투에서 대승했음에도 원래의 목표였던 동남아시아와의 철도 연결을 전혀 성공시키지 못했고, 비록 타격을 주긴 했으나 국민당을 끝내 붕괴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달라질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이미 이 시기의 일본은 미군에게 짓눌려 승리의 가망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이어서 중국에서의 국지적 승리로 뭘 어떻게 해볼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이 작전이 전황 타개는 몰라도 태평양 전쟁의 후반기 진행 상황에는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작전에 의한 중국 일대의 전략적 상황 변화로 인해 미군 수뇌부(특히 해군 쪽)의 대일본전 전략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그 결과물이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였다. 상세는 대륙타통작전항목 참고.

1945년에 들어서자 태평양 군도에서 미국에 연전연패하여 패전이 기정사실화된 일본군은 중국 전선에서도 역시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 당시 일본 육군 지휘관이 국민당과 협상(!)하고 중국전선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제출했을 정도로 일본의 패색은 짙었다. 때마침 임팔 작전의 결과로 버마에서 중경 국민당 정부로 직접 연결되는 육상 보급로인 버마 로드가 확보되어서 중국으로 군수품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4월부터 개시된 남중국에서의 반격작전은 누가 보더라도 일본의 패배가 확실했으므로 장제스가 막판에 공적을 세울 목적으로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이 알고 있던 허접한 잡병들이 아닌 미제 병기로 무장한 정예 중국군은 일본군 3만여명을 쓸어버리는데 성공했다. 8월에 들어서 일본군은 광시성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소련이 참전하여 만주의 관동군이 괴멸되면서 중국 전선의 일본군은 본토와도 고립될 상황이었다. 국민당은 종전 직전 상하이와 남중국 전체를 탈환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지만, 일본이 먼저 항복하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것만 본다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본군이 이미 포기하기로 한 지역을 점령한 것에 불과하며 그나마 퇴각하는 일본군의 후미를 잡았지만 오히려 대타격을 입는 경우도 많아서 승리라고 보기에는 뒷맛이 매우 쓴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은 중국전선에서의 상황과는 관계없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덕분에 중국전선의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항복 당시 중국뿐만 아니라 태평양 섬들과 인도차이나에 잔존해있던 일본군 사령관 대부분이 항복에 반대했다는걸 유념해야한다.

물론 이 무렵 중국주둔 일본군의 무장상태는 심히 개판이어서 소총조차 사단배치정수를 다 채운 경우가 드물었다. 게다가 일본군의 정예 병력은 이미 남방으로 돌려져 미군에 전멸되었거나 그나마 남아있던 병력도 본토 결전 대비한답시고 본토로 빠져나가던 상황이었다. 즉, 계속 싸웠으면 이번에 일본군이 중국군에게 발릴 차례였던게 1945년 8월의 중국주둔 일본군의 실상이었다. 중국의 자체 역량만으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려면 얼마가 걸릴지 의심스러워도 대세가 바뀔 일은 결코 없었다. 결국 중국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오카무라는 휘하 전군에게 반드시 장개석의 국민당군에게 항복해야 하며, 공산군에게 항복하지 말 것을 명령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결과적으로 전쟁을 오래 끌기 위해 국토를 내어주고 자국 병사들을 엄청나게 희생시킨데다 일본군 점령지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던 민간인들을 외면했던 비인도적인 면이 있었으나, 어쨌던 장제스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8년의 전쟁은 중국의 승리로 끝났고,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까지 불사할 정도로 집착했던 만주와 화북 지역, 그리고 대만은 부질없이 도로 중국에게 반환되었다.

5.1. 만성적인 물자부족

중국군은 중일전쟁 초기에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왜냐? 중국의 대부분의 산업지대가 일본군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상하이, 난징, 우한 등이 함락되면서 중국은 공장을 죄다 우랄 산맥 너머로 뜯어서 옮겨버린 소련관 대조적으로 자본가들의 비협조로 인해 상하이에 배치했던 공업력의 2.75%만을 건졌는데 그나마도 핵심 공업력은 다 날아간 상태였다. 중국은 1938년 10월 우한 점령의 시점에서 관세수입의 91%, 공업의 94%, 전력의 96%, 방직공업의 75%를 상실했다. 그리고 주요 항구들이 다 점령당하면서 물자 수입의 길까지 거의 끊겼고 얼마 후에 수입의 80%를 담당하던 광저우까지 함락되면서 물자 수입은 오로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는 하노이 루트와 영국령 버마를 통한 버마 루트 뿐이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일본이 열강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계지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하이의 조계지를 통해서 군수물자가 계속 수입되었다.[11] 이 상황에서 물자를 제공하는 것은 소련, 독일과 유럽 식민지들 뿐이었다. 일본은 하이난 섬을 점령하고 영불을 압박하여 하노이 루트와 버마 루트를 끊으려 했지만 일본의 무리한 확장에 열받은 영불은 오히려 일본의 눈치를 봐서 두었던 무기 거래 제한을 풀어버렸다. 하지만 중국에게 남은 영토는 서쪽의 황량하고 척박한 땅들뿐이었고 충칭도 기껏해야 2선급 도시였기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거기에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충칭의 인구만 다섯배로 늘어난 시점이라 기근까지 겹쳤다.

일본군이 인도차이나까지 진주하면서 중국에게 남겨진 최후의 대외 육상 교통로인 중국-버마 도로가 1942년 이후 일본군에게 폐쇄된 이후에는 항공기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며 운남성 곤명의 공항으로 물자를 옮겼다. 이미 예상했다시피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일부 항공기의 경우에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추락한 비행기들의 잔해를 따라서 항로를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운반할 수 있는 물자의 양도 적은 데다가 항공기용 연료의 경우 운반하는 수송기가 운반 중 사용하는 양이 심하면 50%에 육박하는 등 낭비도 심했다. 물론 종전 때까지 항공기로만 나른 건 아니고 1944년에 인도의 레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레도 공로'를 건설해서 이용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들이 장제스에게 군수품들을 별로 안줬단 사실을 부정할 순 없다. 당시 미국이 중국에 준 물자는 이 정도다.

M3 경전차 100대
트럭 2만 5천대
야포 2053문
소총 30만 5천정
기관총 10만정
철모 14만 6천개
폭격기 151대
전투기 679대
수송기 120대
훈견기 43대
식량 3만 3천톤

기타 지원금액 8억 4500만 달러

동시대 영국은 310억 달러, 소련은 110억 달러 받았다. 이걸 보면 장제스가 뭘 얼마나 많이 받았다고 무기를 쟁여놓고 안 싸웠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오히려 국공내전 직전에 미국에게 받은 게 60억 달러 어치였으니 중일전쟁관 넘사벽의 차이다. 흔히 이 무기들이 장제스 직계군에게 흘러갔니 장제스가 그걸 안줬니 하는데 이런 무기들은 스틸웰이 지휘하는 중국군과 미 14공군에게 흘러갔다. 장제스가 굴릴 무기가 없는데 무기를 군벌들에게 줄 수가 있나. 이 중에서 장제스가 받은 무기는 곡사포 60문과 바주카포 506문, 대공포 몇대가 고작으로 그나마도 이치고 작전으로 난리가 난 상황에서 스틸웰이 마지못해 양도한 것이다. 그 전엔 스틸웰은 중국군에 총 한자루 주지 않았다. 중국에 공여된 물자의 질과 양도 다른 전선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고 그마저도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적 편견으로 인해 브라질에도 전달되던 셔먼 전차가 중국에는 버마전선에서나 공여되는 지경이었다. 중국으로 지원되었다는 물자의 대부분은 중국 주둔 미 공군용 물자이며 나머지 물량조차 인도로 파견된 중국군에게 거의 다 전용되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국민당군을 탈탈 터는 동안에도 장개석은 스틸웰의 무리한 요구로 인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버마에서 X군과 Y군을 돌리고 있었다. 버마전선에서 통제권은 연합군 장성에게 있었고, 열심히 싸웠다 한들 연합군은 그들을 소모품 취급만 할뿐이었다. 장제스 군대에게 스튜어트가 충분했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장제스가 2차 대전때 받은 전차는 기껏해야 경전차 100대 정도였고 그나마도 위에도 적혀 있듯이 미공군에게 다 몰려 있었다.

장제스, 플라잉 타이거스 지휘관 셔놀트 준장 등의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지프 스틸웰 때문에 지원이 형편없었다는 증언에 대해 국공내전의 사례를 들면서 어설프게 부정하려는 논리도 보이는데 스틸웰의 성향이 어쨌거니를 떠나서 중국은 연합국에서 찬밥 대우였고 위에 수치로 나와있지만 미국은 중일 전쟁 때 중국에게 정말로 물자를 얼마 안줬다. 랜드리스에 중국 몫으로 책정된 물자는 고작 2%였고 그나마도 스틸웰이 쟁여놓질 않나 영국군이 중간에서 착복하질 않나[12] 오히려 중일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새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해줬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때의 국민당군의 상황은 전혀 다른데 이를 비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그리고 스틸웰의 성향 자체도 문제다. 스틸웰은 누가 뭐래도 지독한 혐중론자였다. 중국에서 무관으로 복무한 경험과 출중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중국통으로 알려져 장제스의 고문으로 결정되었는데 스틸웰은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을 뿐더러 중국 파견 소식에 "쿨리들과 어울리라니 날 뭐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짜증을 냈던 양반이다. 애초에 장제스는 소련에서 보내준 바실리 블류헤르나 독일이 보내준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같은 고문을 원했지 자기 자신이 직접 지휘하려드는 장군을 원한게 아니었다. 이러니 둘의 사이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그리고 스틸웰은 중국군이 일본군과의 오랜 전투를 통해 터득한 지구전과 소모전에 대해선 중국인들은 용병술도 모른다고 비웃곤 정작 자신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을 데리고 버마에서 일본군과 맞섰을 때는 장제스의 충고도 무시한 졸렬한 지휘 때문에 개발살났다. 이미 영국군은 버마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다 빠지고 있었고 철수하는 인도군과 영국군, 민간인을 보호한 건 스틸웰이 그렇게 폄하하던 중국군이었다. 그래놓고 이게 다 무능한 중국군 탓이다! 를 시전하면서 중국군들을 모두 총살해 마땅하다는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정작 중국군과 같이 싸운 영국군의 슬림 중장은 중국군이 노련한 베테랑으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자신의 최정예 부대를 말아먹은 스틸웰에 대해서 장제스는 엄청난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플라잉 타이거스의 셔놀트 준장은 만약 스틸웰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지휘관이며 만약 그가 미군이 아니라 중국군 소속이었다면 장제스에게 진작에 총살당했을 것이라 비웃었다.

그리고 주는 것은 없이 요구는 많아서 버마 전투에서 중국군 3개군 뺏아오질 않나 다시 30만 대군을 버마 탈환을 위해 뺏어오질 않나 그래놓고도 중국이 무능하다 만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스틸웰은 300개 사단, 400만에 달하는 중국군을 90개 사단으로 감축하고 소수 정예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그러기 위한 물자는 하나도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장제스가 이 상황에서 이 말을 들으면 그게 바보다. 미국은 장제스의 지상군 파병 요청도 지원 확대 요청도 다 씹었다. 애초에 미국은 태평양과는 달리 중국에선 그저 일본군을 묶어두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도 아예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바랬던 장제스는 속이 터졌다. 장제스는 미국이 주는 것도 없이 내정간섭에 월권을 하려 든다고 이를 갈았다. 특히 장제스는 여러번 반란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스틸웰이 자신의 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군대를 축소하려 드는 것을 아예 미국인들의 반란 음모 정도로 받아들였다. 오만한 스틸웰은 이런 중국인들의 분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고 중국인들이 하는 것도 없이 요구만 많다고 깠으며 국민당이 중일전쟁 개전 초기 수십만명의 피를 뿌려가며 처절히 맞선 사실도 다 국민당의 거짓말 정도로 치부했다.

스틸웰은 백숭희를 비롯한 일부를 빼곤 장개석 이하 대부분의 중국 장군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중일전쟁 당시 장개석은 상하이 전투에서 삽질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 이후엔 상하이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화북 등지에서 안정적인 철수와 유격전, 소모전을 병행했고 일본이 우한을 점령한 이후 공세종말점에 다다르자 난닝, 난창, 우한 등지에서 여러차례 반격을 감행해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특히 창사에선 일본군이 세차례나 무리한 공세를 펼치다가 작살나서 영국까지도 진주만 이후 연합국이 드디어 승리를 거뒀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지만 중일전쟁의 양상도 모르던 스틸웰은 장제스의 지구전을 비웃으며 화력을 모아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까는 행보를 보였고 나중엔 이게 다 중국군 때문이다 시전으로 일관했다. 스틸웰이 무능하다고 까댄 두율명 장군만 해도 일본군 상대로 여러번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스틸웰은 그를 매우 폄하하여 한국에도 그가 무능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이미 조금 설명한 바지만 버마 전투도 무능한 중국군 때문에 스틸웰이 졌다고 스틸웰의 일방적 주장만 알려져 있지만 실상을 까보면 버마를 포기하기로 한 영국군이 지독할 정도로 비협조적으로 굴며 중국군 뒤통수를 치고 달아나버린 것과 스틸웰 본인이 일본군이 전차도 대포도 없다고 무작정 깔보고 무장도 제대로 안된 중국군을 무리하게 내세우는 졸렬한 지휘를 한 탓이었다. 정작 손입인 장군이 지휘하던 중국군은 영국군 7천명과 500명의 민간인, 17 인도사단을 구출하는 성공적인 전과를 올렸고 스틸웰 본인도 손입인을 동양의 롬멜이라고 칭찬했다. 그러곤 동양의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는 상덕 전투 직전엔 무리한 버마 탈환을 위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 30만명을 빼돌려놓곤 병력 파견 조건으로 약속했던 물자도 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상덕 전투에서 중국군이 고전하자 중국군은 무능하다고 비웃었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한 건 둘째치고 상덕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긴 했지만 치열한 저항과 축차적인 소모전으로 일본군에 적잖은 타격을 줘서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중장이 작전을 조기 종결하고 퇴각했는데도 말이다.

이치고 작전이 벌어질 무렵에는 장제스가 조만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자 스틸웰은 형편없는 일본군 따위가 무슨 공세를 취하겠냐고 그의 말을 싹 다 무시하고 장제스의 유일한 전략예비대인 X군을 장제스를 협박하여 빼앗아 버마로 보냈는데[13] 아니나다를까 이치고 작전이 터져서 일본군 50만명이 뤄양, 난닝, 창사, 헝양을 잇달아 점령했다. 중국군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미친듯이 싸워서 일본군에게 무려 10만명의 피해를 안겨줘서 일본군이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중국군이 아니라 미군인가?하고 당황할 정도였지만 결국 중국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화중을 모두 잃고 중요한 곡창지대들을 상실했다. 스틸웰은 이런 상황에서도 장제스의 지원 요청을 모두 무시하고 건방진 장제스는 골탕을 좀 먹어야 한다고 고소해하는, 동맹국에서 보낸 고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정신나간 행태를 보였다. 결국 장제스는 폭발하여 루스벨트에게 스틸웰을 자를 것을 요구했고 마침내 스틸웰은 1944년 10월 19일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중국에 부임한 웨드마이어가 한 첫번째 일이 허물어지는 중국군 방어선을 보강하기위해 스틸웰이 머저리같이 살윈강에 묶어둔 중국군 2개 사단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낸 일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동맹인 중국을 깔보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군도 깔봤는데 상기했듯이 상덕 전투, 이치고 작전에서 일본군 따위가 무슨 반격을 하냐고 계속 방심하다가 중국군만 엿먹였으며 1942년 버마 방어전을 맡았을 때도 일본군을 얕보다가 개발살나서 1백명의 일행과 함께 걸어서 버마를 탈출했다. 그리고 1944년의 버마 탈환전 때도 장제스가 버마의 일본군이 아직 녹록치않다고 경고해줬음에도 장제스의 모든 조언을 간섭이자 멍청한 소리로 비난하며 씹고 X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다 자신이 주장한 것보다 세배나 되는 일본군과 맞닥뜨려 또 고생했다.[14] 애초에 그의 버마 탈환 계획만 해도 영국, 미국, 중국이 모두 불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 악을 써서 관철시킨 것이고 영국과 미국이 반대하자 스틸웰은 미국, 영국의 협조 없이 중국군만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한 장제스를 비난했고[15] 보다못한 셔놀트가 스틸웰이 설욕에 눈이 멀어 할짓 못할짓 못 가린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결국 그의 버마 탈환전은 무능한 하나야 타다시, 와베 마사카즈등의 자폭으로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무타구치 렌야전설적인 임팔 작전과 맞물렸고[16] 결국 버마 탈환에 관심이 없던 영국까지 가세하여 랑군까지 밀어버렸다.

참고로 스틸웰은 중국 전선에 쳐박혀 있어서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20년대 미국 육군에서 선두주자였으며, 유럽전역 사령관으로 아이젠하워와 함께 물망에 오르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능력은 어땠는지 몰라도 확실히 중국을 경멸하고 있었으며, 중국군의 속사정을 제대로 몰랐다.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거기에 정치적 능력은 매우 떨어졌다. 패튼과 비슷하거나 그 이하로 보통 취급되는데, 일례로 그는 중국에 부임한 이후 다짜고짜 장개석 휘하의 직계군의 지휘권을 요구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된다고 판단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버마 전선 이후에 장제스와 투닥대다가 미 정부에 칭얼대자, 미 정부에서 스틸웰에게만 비밀 전문으로 '당신이 중국군 통수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라는 내용을 전달했는데 경솔하게도 스틸웰은 그걸 갖다가 장제스 방으로 쳐들어가서 장제스 얼굴에 들이미는 짓을 했다. 결국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 정부는 이러다가 중국이 등돌릴까봐 스틸웰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스틸웰이 맥아더의 정치능력의 10분의 1만 발휘했어도 태평양 전체의 지휘권을 가졌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중론이다.

물론 미국이 중국 지원에 소홀한 것에 미국도 할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이 자선 단체도 아니고 무작정 장제스가 원하는대로 대규모 육군도 보내주고 최신식 무기도 펑펑 퍼주고 돈도 막 퍼줄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고 오로지 미국 정부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미국의 자원과 인력도 무한정인 것이 아니니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먼저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미국은 유럽에서 나치를 패배시키는 것을 더 중시했다. 이러니 중국 지원이 소홀한 것에 대해 미국을 깔 이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미국의 목적은 중국 곳곳에 깔려 있는 일본 육군의 제압과 중국 동부 탈환이 아닌 동남아와 태평양의 일본군 제압이었고 무리하게 중국 전선을 확대시킬 이유는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영국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만 기존에 떠도는 장제스는 미국 지원 받고도 안싸웠다 운운이 말이 안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5.2. 군벌 간 내분과 통제, 행정력의 부재

중일 전쟁 초기 중국군의 최대 문제는 군벌들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베이핑, 톈진의 중국군이 일본군에 압도적인데도 황당하게 패배한 것도 베이핑의 지배자였던 쑹저위안이 자신의 지배권이 약화될까봐 거의 직무태만에 가까운 행보를 일삼았고 장제스가 즉각적으로 지원해준 중앙군조차도 베이핑에 오지 못하게 막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닛뽄도 들고 몰려오는데도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고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쑹저위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세가 일본군 쪽으로 완전히 기운 후였다. 더 거슬러올라가면 1931년의 만주사변도 화북의 지배권을 놓고 집착한 장쉐량이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거의 앉아서 1만 5천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털린 탓이었다.

이후 화북 지역의 전투에서도 지역 군벌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탈영, 적전도주를 일삼았고 옌시산, 리쭝런 등은 꽤 그럴듯한 방어선을 갖추어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하다가 군벌들의 도주에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화북을 황당하게 다 내주어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평형관, 타이얼좡에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이후 광저우 전투에서도 광둥 군벌들이 직무유기를 일삼고 멋대로 철수해서 광저우가 날아갔고 결국 폭발한 장제스는 도주를 일삼던 군벌 30여명을 소환하여 모조리 총살했다. 하지만 광둥 군벌들의 위세는 너무 커서 화북 군벌들관 다르게 목을 따진 못했다. 이건 충칭으로 천도한 후에도 문제가 되어서 장제스는 전쟁 중에도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사천군벌들과 지역 행정권을 둘러싸고 쓸데없는 정치적 다툼이나 벌여야 했다. 원래 군벌 자체가 장제스와 심하면 적, 우호적이라도 동급 위치를 차지했던 사람들이라 서로 동지로 보는 의식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반장전쟁만 보더라도 유력한 군벌치고 장제스의 위치를 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영역에 틀어박혀 단독으로 베이핑의 일본군 사령부와 평화협상을 벌여 전쟁 내내 전투를 기피했고, 임시 수도인 충칭을 중심으로 쓰촨성과 윈난성 지역의 지방 군벌들과 장제스의 알력 다툼은 극심했다. 그래도 최소한 팀킬은 안했고[17] 대체적으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일선의 부대들이 장제스 명령은 들었다는 의의가 있달까.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 편이나 한국 웹상에서 떠도는 장개석이 직속군을 후방에 놀려두며 군벌군, 공산군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반대로 전쟁 초기에는 정예부대인 5군과 6군을 전선에 투입했고, 오송 크리크 공방전이나 타이얼짱 전투에서도 활약하였다. 장제스는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하지만 위의 단락에서 가루가 되도록 지탄받은 스틸웰이 장제스 직속군을 죄다 미얀마로 보내버리는 상병크를 터트리는 바람에 전쟁 후반에 상대적으로 활약을 못한 것 뿐이다. 장제스 직속군대 30만이 버마에서 전멸당하는 사건이나 전략 예비대인 X군, Y군이 버마 전선으로 보내지지만 않았으면 상덕 전투, 대륙타통작전의 향방이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장제스의 반격 작전은 빠르면 43년 말, 늦어도 44년 정도에는 실행될 예정이었는데 병력 여유만 생기면 스틸웰이 훼방을 놓는 통에 45년 말로 미뤄졌고 끝내 시행되지도 못했다. 21세기 들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도 기존의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 사관을 탈피하여 중일전쟁 중에 일본군에 맞선 장개석의 노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5.3. 덜떨어진 군대

전쟁중 중국군 장교단의 질은 군사교육의 열악함으로 인해 상당히 낮아서, 장개석이 대놓고 군단장급 장군들에게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지 너희들 능력이 그 자리에 어울려서 앉은 것이 아니다. 군단장이라는 네놈들의 실제 실력은 일본군의 대대장급도 과분하다!"고 까댈 정도였다. 중일전쟁 초기에 장제스 직계 중국군은 일본군보다 훨씬 좋은 독일제 자동화기로 완전무장하고 있었지만 덜떨어진 지휘부의 능력으로는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게다가 중국군 사단이라는게 일본군 완편사단에 비하면 병력수부터 크게 모자란데다가 사단 포병이라는 것도 1개 대대 규모고 사단 배속 전투지원부대도 없다시피한 실정이었다.
군의 기강도 엉망이어서 군대란 것이 주둔지역 민간인들의 식량이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는 등의 범죄가 들끓었다. 게다가 강제징병을 위해 마을을 공격(!)하는 사태도 종종 벌어졌다. 이러한 탓에 각 마을주민들은 국민당군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고 자경단을 결성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당연히 전투가 벌어지면 태반은 패전이었다.

그러나 중국측이 항상 일본군에 패배만 한 것은 아니다. 1938년의 산둥성의 타이얼좡 전투에서는 국민당군의 명장인 리중런,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국민당군이 일본군과 정면대결하여(그래도 중국군 10개 사단에 일본군 2개 사단이지만, 당시 일본군의 4단위 편제 사단은 중국군의 1개 군에 맞먹는 규모와 전투력을 보유했다) 승리하여 일본군 16,000명이 사상했다. 그 외에도 계남회전, 장사전투, 상덕전투, 형양전투, 상서회전 등에서 일본군은 매번 만 단위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한편 공산군의 린뱌오는 1937년 핑싱관에서 6천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1개 보급중대 100명을 매복 격멸하였다. 그리고 1940년 팔로군이 실행한 백단대전(단團은 연대를 뜻한다. 곧 100개 연대를 동원한 작전)에서 일본군은 최대 4000명이 사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나 평형관 이후 공산군은 세력확장에 골몰하여 전투를 매우 회피했고 백단대전의 경우에는 펑더화이의 독단에 가까운 일이라서 마오쩌둥의 큰 질책을 받았다. 결과 4만 5천명의 공산군은 전쟁 말기에 120만명으로 폭증한다.

6. 중국과 일본의 피해

영문 위키피디아의 자료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 중국: 군인 180만명 전사, 부상자 180만, 민간인 1700 ~ 2200만명 사망
  • 일본: 군인 100만명 전사, 부상자 110만. (단 일본의 주장에 따르면 48만명 전사. 중국의 주장에 따르면 170만명 전사)

7. 역사에서의 비중

비슷한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유럽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태평양에서도 전쟁이 크게 일어난 탓, 그리고 전쟁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탱커 샌드백 신세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중일전쟁은 상대적으로 역사에서 큰 비중을 갖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역사를 연구할 때도 잊혀질 수준인데, 1980년대에 나온 타임라이프사의 제2차 세계대전사의 경우는 중국 전선이 포함되어 있지만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을 다루고 있고 대륙타통 작전을 제외하고는 버마 전선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기본적인 사료가 그렇게 빈약하지는 않으나 객관성의 문제가 있어서 검증이 어려운 탓이 크다. 일단 일본군의 1차 자료는 부정확한데다가 자화자찬이 많고, 중국군의 경우에는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과장성으로 인해 사료에 기재된 전황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고 상당 부분 난징학살이나 기타 일본군의 만행 고발에 치중한다. 미국 등 기타 연합군의 자료는 당연한 일이지만 국민당 정권 비난 일색에다가 역시 제3자라 자료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외로 일본에서 전후에 발간된 자료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을 정도이다. 난징 부정론자들은 예외 게다가 전투가 크게 벌어지고 사상자도 많은데 실제 전쟁에 끼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엄청난 특징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고,[18] 그랬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달라졌을게 뻔하기에(특히 공산당은 국공합작으로 세력을 확보하여 중국 통일에 성공하였다) 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일단 중국은 1차 대전 때문에 일본을 엿먹이려고 독일이 보낸 주요 인물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던지라, 그냥 놔두면 친독이나 정치사상 문제로 내전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의 경과에도 아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 육군이 개입된 전장의 경우 알게 모르게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본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다. 당연히 일본 육군의 주 관심은 중국, 만주 일대였지, 듣도 보도 못한 저~어기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초, 중반에 지상군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 대해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중국과 만주에 투입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의 진행 경과만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병력이 연합군 지상병력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며[19],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연합군(사실상 미군) vs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의 패배는 그 일대의 제해권,제공권 영구 상실[20]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데 한몫 하였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들 중 일부는 중국 전역의 경과에 적게나마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을 폴란드 침공이 아닌 중일전쟁 발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2차 대전에서의 나치 독일의 지분을 망각한 주장으로서 주로 중국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내용인데, 단순히 전쟁의 규모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종청소, 산업화된 체계적인 살인행위홀로코스트 등을 볼때 이는 억지 주장이다.

전황의 변화를 보면 중국군이 거의 일방적으로 일본군에게 얻어터진 탓에 중국이 심각하게 폄하되곤 하는데, 당시 중국군의 사정을 생각하면 많이 선방한 것이다. 공업국가의 체계가 완전히 잡혀있고, 식민지까지 있는 열강에 1차대전 승전국과 열강의 침탈과 군벌간 전투에 통일된지도 얼마 안된 나라가 싸우면 대패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초반에는 의외로 꽤 괜찮았던 중국군의 무기 수준에 일본이 상당히 고전했고, 몇몇 전투(태아장 전투 등)에서는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참고로 이 중일전쟁 덕분에 일본은 1940년 동계(삿포로) 올림픽/ 1944년 하계(도쿄)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이지만. 두 곳 모두 나중에 다시 개최(1972 삿포로 동계 올림픽(32년 뒤), 1964 도쿄 올림픽(20년 뒤))하기는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국(당시 중화민국)은 UN 상임이사국중 하나가 되었다.

8. 여담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침공해왔는데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확대되어 교전이 발생했다는 일본측 시각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중사변' 또는 '지나사변'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21] 이렇게 명칭을 낮춘 이유는 꽤 여러가지 추론이 있다. 당시 1차대전 이후로 전쟁이 국제법상 금지되었기에 "나 전쟁 안했소" 하여 국제적 추궁과 국내의 국민의 신뢰추락을 피하고 싶었던 것 등이 있다. 결국엔 눈가리고 아웅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버릇은 계속 유지되어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했다.

여기서 일본이 나중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일단 선전포고 문제는 의외로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엮여들어간 문제였다. 전쟁내 중국은 선전포고를 안했다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기에는 일본이 하더라도 선전포고로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미국에 타진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게 미국의 중립법이었는데, 국내 기업이 전쟁을 벌이는 쌍방과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이었다. 따라서 선전포고가 공식으로 받아들여져 공식전쟁이 되면 중국은 미국에게 물자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몰래하려다가 일본에게 나포당할 수도 있으며 미국이 이 나포문제와 한창 노리고 있던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에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가 우려되어 껄끄러워 했고 일본도 당시 경제의 태반을 미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경제교류가 전쟁기간 동안 정지되던 상황이었다. 전후는 어쨌든 전쟁시작시에는 공식적 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침공군 중 고참급 인사들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부류가 꽤 많아 비선전포고파와 아웅다웅했는데, 경제문제 따위가 뭔 상관이냐며 경시하는 시각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는 편이 전후 패전국에게서 영토와 물자를 더 뜯어내고 점령시의 절차가 간단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선전포고파의 경우는 손해없이 이득을 끌어내자, 즉 어떤 방식으로 중국을 침략하는가에 대한 방법론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변명을 100% 인정해주더라도 엄연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개전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만행이다. 특히 이 변명에서 중국이 선전포고에 관련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랍시고 대는데, 범죄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중 하나다. 피해자가 이론을 제기하던 안하건 간에 범죄로 엄연하게 성립되는 내용을 가지고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니 감안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 덤으로 일본은 앞서 언급했듯이 선전포고 안하고 기습을 해서 개전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녀석들인데다가 그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는데 끝까지 안했으니... 당장 선전포고가 정당하게 전쟁하니 타국은 교전국의 뒤통수를 치지마시오에 가깝기 때문에 선전포고를 안하면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서 똑같이 교전국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기만 해도 일본의 변명이 말같지도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9. 중일전쟁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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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렇게 말하자 거기에 참석했던 장군이나 장교들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실전도 안 나간 주제에 소장 계급을 받은 사람보다 멍청한 일본군 장군 하긴 초등학생보다도 멍청한 군대인데... 말 다했지...
  • [2]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다. 가끔가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연도는 1949년이다.
  • [3] 청일전쟁도 Sino-Japanese War라고 부르기 때문에 앞에 First, Second를 붙이거나 뒤에 연도를 달아서 구분한다.
  • [4] 원래 상하이 전투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영국이 중재에 나섰는데 일본에서 영국의 중재를 거부했다.
  • [5] 이는 영화 난징! 난징! 삶과 죽음의 도시 초반에 묘사되어 있다.
  • [6] 영국령 말레이
  • [7]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 [8] 장제스는 이미 1935년 8월에 정치간부의 모임에서 "우리가 중국본부의 18성 중 15성을 빼앗기더라도 ... 사천, 귀주, 운남성만 우리가 장악하고 있으면 어떤 적이든 물리칠 수 있고 잃은 땅을 다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촉한이냐.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참고)
  • [9] 출처: 영문 위키백과
  • [10] 기록이 부실해서 그렇지 더 죽였다는 설도 충분히 많이 제기되고 있다.
  • [11]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당연히 중지되었다.
  • [12] 처칠은 중국에게 배정된 전투기들을 버마에서 그대로 빼돌려 이집트에 보내버리기도 했고 루스벨트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 [13] 말 그대로 루스벨트와 장제스 사이를 이간질하여 장제스가 공산당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내놓지 않는다고 모합했다. 루스벨트는 스틸웰의 말을 듣고 당연히 장제스에게 X군을 내놓지 않으면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했고 장제스는 피토하는 심정으로 최정예 예비대를 내놓아야 했다.
  • [14] 스틸웰은 버마 전체에 일본군 5개 사단 밖에 없으며 자신이 공격하는 버마 북부엔 1개 사단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버마 전역에만 8개 사단이 있었고 스틸웰이 버마 북부에서 맞닥뜨린 15군은 3개 사단 병력이었다. 거기에 2개 사단이 더 오는 중이었다. 이뭐병...
  • [15] 위에서 많이 봤듯이 이미 스틸웰은 장제스의 피같은 정예군을 엄청나게 낭비한 바가 있다.
  • [16] 이 과정에서 스틸웰은 다시 장제스를 협박해 이번엔 Y군을 뺏아왔다.(...)
  • [17] 여기서 공산당은 예외다.(...)
  • [18]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일본 제국의 주적은 명백히 소련과 미국이었고 그런 미국으로부터 석유와 고무 등 다른 자원줄이 말리는 것을 막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공했지만, 그것조차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에서 한순간 반짝했던 것 때문이었다. 도리어 태평양 전쟁의 발발을 찾으려면 나치 독일의 발호와 그 나치 독일이 대서양에서 미국을 견제해줄 것이라 믿었던 일제의 망상을 생각해야만 한다.
  • [19] 이는 지상병력의 신속한 기동이 불가능한 해상/섬 지역이라는 특성과, 요새화 된 곳은 가급적 건너뛰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만 골라서 찔러대는 미군의 전략에 의한 영향도 크다.
  • [20] 물론 전쟁 후반에 가면 압도적인 질적, 양적 차이에 의해 지상 점령 전부터 제해/제공권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지상에 안정된 기지를 확보한 상태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땅을 딛고 사는 존재이다.
  • [21] 오늘날, 나이드신 어르신들 (2~30년대生) 상당수가 중일전쟁을 '지나사변'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