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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광

last modified: 2015-03-25 11:13:00 Contributors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11회말 3연속 삼진을 잡으며 경기를 끝내면서


롯데 자이언츠 No.76
주형광(朱炯光)
생년월일 1976년 3월 1일[1]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학력 수영초-부산중[2]-부산고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94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1994~2007)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불펜 투수코치 (2009~2010)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1~2012)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13)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2014)
롯데 자이언츠 육성군 투수코치 (2015~)

1995년 한국프로야구 플레이오프 MVP
주형광(롯데 자이언츠) 최창호(현대 유니콘스)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8번
김시진 (1989-1992) 주형광(1994-2006) 장원준 (2007~)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37번
조정훈 (2005-2006) 주형광(2007) 조정훈 (2008-2010)
주요 기록
1994년최연소 세이브(94.4.15 LG전/만 18세 1개월 14일)
최연소 승리투수(94.4.19 한화전/만 18세 1월 18일)
최연소 완투승(94.4.19 한화전/만 18세 1월 18일)
최연소 완봉승(94.6.8 삼성전/만 18세 3월 7일)
1995년플레이오프 MVP
1996년다승왕(18승) 탈삼진왕(221개)

Contents

1. 소개
2. 현역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롯데 자이언츠 소속이었던 前 프로야구 선수. 現 롯데 자이언츠 투수코치.

2. 현역 선수 시절


머리가 꽤 커보인다

최동원-윤학길의 뒤를 이어 롯데의 1990년대 중후반을 책임진 에이스.[3] 부산고 출신으로 3학년 염종석, 2학년 손민한, 1학년 주형광은 부산고 역대 최강의 트로이카로 꼽힌다. 손민한이 3학년 시절[4] 부상으로 인해서 실질적으로 2학년때부터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혹사 때문에 팔꿈치 이상이 빨리 온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고 재학 시절 당대 경북고 좌완 에이스였던 이승엽을 상대로 홈런을 치기도 하였다. 뛰어난 이닝이팅 능력을 자랑했다.

1994년에 데뷔했으며 고졸신인 역대 최초로 1억 이상의 몸값을 받고 입단했다. 정확히는 계약금이 9천 2백만원이었고 연봉 1,200만원을 합쳐 1억을 돌파한 것이긴 했지만 저 9천 2백만원의 계약금도 당시로서 고졸신인 역사상 최고액이었다. 데뷔전 선발 등판에서 3이닝을 버티지 못하고 5실점하면서 난타를 당해 역시 프로의 벽은 높은건가 라는 인식도 있었으나 다음 경기에서 구원등판해 깔끔하게 세이브를 따내며 우려를 불식. 뒤이은 세 번째 등판이자 프로 두 번째 선발등판인 한화전에서 9이닝 2피안타 9탈삼진 1실점(비자책)이라는 엄청난 피칭으로 완투승을 따내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인 시즌은 11승 5패 1세이브 3.04의 평균자책점으로 고졸 신인으로서는 엄청난 호성적을 올렸지만, 신인왕은 아쉽게도 유지현이 차지한다.[5]

2년차인 1995년에는 200이닝을 넘게 소화 하며 10승 7패 평균자책 3.05를 기록했으며, 특히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었다. 특히 시리즈를 끝낸 6차전의 1피안타 무사사구 1:0 완봉승은 그 백미.[6]

3년차인 1996년에는 18승 7패 1세이브 3.36의 성적을 올렸으며, 216.2이닝을 던지며(볼넷 38개/탈삼진 221개)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석권한다.[7] 그러나 MVP는 아쉽게도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구대성이 가져간다.[8][9]

3년차를 마치고 현역 입대를 해서 1997년은 전력 외 상태였으나 신장 이상으로 입대한 지 얼마 뒤에 의가사 제대 판정. 군입대 때문에 동계 훈련을 하지 못한데다가 아마 때의 혹사와 더불어 지난 3년간 600이닝을 넘게 했던 투구, 심지어 의가사 제대까지 받을 정도로 만신창이였던 몸상태임을 감안하면 지금같으면 당연히 쉬게 하며 선수를 보호했겠지만, 분업 야구가 조금씩 정착되어가던 1990년대 후반까지도 프로야구에 있어서 선수 보호에 관한 의식은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다. 주형광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시즌 초반부터 꼴찌인 팀을 구하기 위해 중반부터 투입되었고 면도삭발까지 하면서 투혼을 불살랐지만 131이닝 6승 13패 3세이브 5.8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으며 팀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시즌의 휴식 대신 무리한 출장은 결국 몇년 뒤에 탈이 나면서 커리어를 좀먹게 된다.

이듬해 절치부심하며 1998년과 1999년 2년 연속으로 200이닝 가까운 투구에 두자리 승수를 올렸고, 특히 1999년 플레이오프와 한국시리즈에서 고군분투하며 맹활약을 펼쳤다. 2000시즌에는 10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 때가 고작 만 24세. 그때까지 그가 쌓아놓은 누적스탯은 77승에 1200이닝 1천탈삼진 돌파. 2000시즌 종료 후 일본진출을 꾀했으며 구단에서도 적극적으로 밀어줬고 자매구단인 치바 롯데 마린스로 2년 임대료 1억엔에 연봉 7천만엔의 구체적인 조건 이야기까지 나오며 이적이 확정되나 싶었으나 막판에 협상이 틀어지는 바람에 일본 진출에 실패했다.

결국 2001년에 팔꿈치가 탈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시즌 개막하고 열흘도 안된 시점에서 2경기 등판하고 팔꿈치 통증으로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휴식과 재활을 병행하며 8월부터 다시 공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복귀를 타진했으나 이 과정에서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어 결국 시즌 아웃. 시즌 후 토미 존 서저리를 받게 된다. 안타깝게도 수술은 결과적으로 실패였고 이는 최악의 토미 존 서저리 실패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시기부터 주형광은 길고긴 내리막길을 타게된다.

1년 가까운 재활 끝에 2002년 시즌 막바지에 한타자씩만 상대하는 원포인트 릴리프로 7경기를 시범 등판했지만 이미 그는 예전의 주형광이 아니었다. 2003년부터는 다시 풀시즌을 소화하게 되었지만 그는 더이상 선발투수가 아닌 짧은 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가 되어있었다. 62경기에 등판해 74와 2/3이닝을 소화하며 13홀드를 기록했지만 승리없이 9패만 떠안으며 결국 3년 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했다.

2004년은 주형광이 마지막으로 불꽃을 태웠던 시기. 겨울동안 착실히 준비해 4년만에 다시 선발로테이션에 복귀했으며 전성기 못지 않은 활약으로 시즌 초 마무리를 맡았던 손민한을 대신해 팀의 선발 에이스로 활약했다. 무엇보다 구위가 다시 전성기 시절과 비슷한 수준으로 돌아왔으며 신임 양상문 감독도 주형광의 부상 전력을 고려해 등판간격과 투구수를 철저하게 관리해주면서 재기에 성공하나 싶었지만... 6월 1일 대구구장에서 배영수와 맞대결에서 7과 2/3이닝동안 6안타 2실점(1자책)으로 호투하던 와중 다시 팔꿈치 부상을 입게 되고 그렇게 선발 투수로서의 주형광은 끝이 나고 말았다. 주형광 본인도 훗날 회고하길 "내 공은 그 때 죽었다" 라고 했을 정도. 바로 시즌아웃되어 잔여시즌을 출장하지 못했으며, 토미 존 서저리를 다시 한 번 받는게 좋겠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결국 주형광은 수술 대신 재활을 택했다. [10]

이듬해인 2005년 6경기에 선발등판하며 마지막 몸부림을 쳤지만 전술했듯이 이후 다시는 선발로 재기하지 못했다. 재부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흔히 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힘줄을 쇠못으로 고정하는 형태의 수술을 받은 것도 큰 원인으로 꼽는다. 재활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복귀한 것도 부상 재발의 큰 원인.[11] 그뒤로 3년간 좌완 계투 및 원포인트 릴리프 등으로만 활약하다가, 2007년을 끝으로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시점의 나이는 불과 32세.
아이고 롯데가 얼마나 했으면 32세에 은퇴하냐

롯데 자이언츠가 얼마나 에이스를 굴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 2014년인 현 시점까지도 현역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는 손민한보다 1살 적고, 이승엽, 애니콜임창용과 동갑이다. [12][13] 24세 시즌(2000년)까지 거둔 승수는 77승.[14] 만약 제대로 된 팀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았다면 지금쯤 현역으로(기복 등을 고려해도) 140-150승쯤 을 달성하거나 더 나아가서 정민철을 넘어섰을지도 모른다고 아쉬워 할 정도.[15] 이 나이면 은퇴한 지 7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현역으로 나올 수 있을 나이인데..[16][17]

투구 스타일은 정교한 제구력을 가지고 승부하는 피네스 피처에 가까웠다.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 두 구종만을 주로 던졌으며,[18] 특히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는데 직구와 슬라이더의 구속차가 크지 않았고, 우타자를 상대한 프론트도어 슬라이더가 절묘했다.

공이 가벼워서 홈런수가 많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그걸 충분히 메꾸고 남을정도의 제구력과 볼끝을 자랑했는데 만화에나 나올법한 3분할 투구를 했던 투수였다. 이 투구스타일 때문에 삼진을 굉장히 잘 잡아내는 타입. 신인 첫 해부터 7년차까지 정상적으로 시즌을 소화했을 때 늘 탈삼진 부문 순위권에 있었으며 특히 1996년에는 221개의 탈삼진으로 현재까지도 최동원의 223개에 이은 역대 단일시즌 탈삼진 랭킹 2위 기록을 보유중.(1, 2위가 모두 롯데 선수들)

1990년대 롯데 자이언츠의 명승부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투수이며[19] 걸출한 좌완 투수가 많이 없는 롯데 팬들에게는 아직도 안타깝게 단명한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3월 1일생이지만 1년 일찍 학교를 다닌 덕에 대부분의 투수 부문 최연소 기록을 들고 있다. 최연소 승리투수, 최연소 완투승[20], 최연소 완봉승, 최연소 세이브.

그가 쓰던 등번호 28번은 현역 마지막 해였던 2007년 부산고 후배 좌완 투수 장원준에게 물려 주었다.(그 해 주형광은 37번을 달았다.)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윤성환이 가장 좋아했던 롯데 선수였다고 한다.

3. 지도자 시절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와 롯데 자이언츠 재활코치를 하다가 2011년에 롯데의 감독진과 코치진이 전부 물갈이 되면서 투수코치가 되었다.[21][22] 초기에는 일단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들었는데, 부상 이후 재활훈련에 매진하지 않았고 선수 말년에 미니홈피 관리에 매진하며 상당히 게을렀던데다 코치 선임도 겨우 9개월 연수를 받고 바로 시행된 것이라 믿음직한 인상이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와 가득염이 투수코치로 부임한 이후 투수진이 점차 안정세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평가는 나아지고 있는 편. 주형광이 투수코치를 맡게 된 이후로 금지어가 박살 내놓은 불펜은 투수영입 등을 감안하더라도 정상 수준을 넘어 리그 탑급이 되었으며, 특히 12년 포스트시즌에서는 (포시한정)원수같았던 두산을 불펜의 힘으로 꺾자 팬덤 내에서 지지여론은 더더욱 굳건해졌다. 2012시즌 이후 김시진 감독이 부임하면서 정민태 때문에 2군 투수코치로 보직 이동되자 팬들이 난리쳤을 정도.

게다가 그렇게 할 수 없이 2군으로 밀려 처음 맞이하게 된 첫 시즌인 13년에는 남부리그 팀자책 1위를 만드는 등, 뚜렷한 성과를 하나 둘 계속해서 만들어내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23]

근데 희한한것은 주형광 코치의 성과, 능력에 대해 자세하게 취재해 놓은 기사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팬들 사이에선 '도대체 뭘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지만 능력은 확실히 있는 코치'(...) 의 이미지이다.

김시진 2년차부터는 1군 불펜투수코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 8월 21일 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육성군으로 내려간 정민태의 후임으로 1군 메인투수코치가 되었다. 그리고 이종운이 감독이 되자, 육성군 투코로 내려갔다. 새 1군투코인 염종석이 철밥통 소리를 듣는반면 주형광의 능력이 좋은편이라 팬의 반발이 어느정도 있는편.

4. 연도별 주요 성적

  • 투수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1994 롯데 자이언츠 28 186⅔
(7위)
11 5 1 0 3.04
(10위)
147 66 142
(4위)
75 63
1995 30 200⅓
(3위)
10 7 0 0 3.05
(10위)
170 56 152
(4위)
73 68
1996 30 216⅔
(2위)
18
(1위)
7 1 0 3.36 196 47 221
(1위)[24]
86 81
1997 32 131⅔ 6 13 3 0 5.88 138 63 84 91 86
1998 31 183⅓
(4위)
11 7 1 0 3.63 179 50 148
(6위)
90 74
1999 31 190
(3위)
13
(8위)
12 1 0 3.98
(7위)
190 47 177
(3위)
88 84
2000 26 149⅔ 8 6 0 0 3.49
(8위)
136 52 127 60 58
2001 2 3 0 1 0 0 15.00 6 4 2 6 5
2002 7 1⅔ 0 1 0 1 16.20 3 0 1 3 3
2003 62 74⅔ 0 9 1 13
(4위)
4.58 85 29 49 42 38
2004 11 63⅓ 4 4 0 0 3.41 53 23 45 26 24
2005 11 34⅓ 3 2 0 0 6.03 39 15 23 24 23
2006 52 67⅓ 3 6 1 7 4.14 82 18 26 38 31
2007 33 21⅔ 0 2 0 1 4.15 24 6 12 10 10
한국 통산
(14시즌)
386 1524⅓
(20위)
87 82
(20위)
9 22 3.83 1448 476 1209
(13위)
712 648

완투, 완봉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94 4완투 1완봉
1995 5완투 0완봉
1996 10완투
(2위)
1완봉
1997 3완투 0완봉
1998 6완투
(1위)
1완봉
1999 4완투 0완봉
2000 0완투 0완봉
2001 0완투 0완봉
2002 0완투 0완봉
2003 0완투 0완봉
2004 0완투 0완봉
2005 0완투 0완봉
2006 0완투 0완봉
2007 0완투 0완봉
통산 33완투 3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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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빠른생일인지라 19세인 1994년에 프로입단했다. 그 해 해태에 입단한 이호준도 이런 케이스이다.
  • [2] 옛 초량중학교
  • [3] 나이는 손민한이 한살 위지만 부상때문에 2000년대 들어서야 만개했다.
  • [4] 그 당시 손민한은 몸쪽 볼을 잘 못던져서 주형광을 실질적인 에이스로 보는 시각이 꽤 있었다.
  • [5] 신인최초 20-20을 했던 김재현이 묻힐 정도였으니.....(김재현은 0.289-21HR-21SB 이었지만 유지현은 0.305-15HR-51SB을 찍으며 확실히 신인왕에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보였다)
  • [6] 그 안타도 빚맞은 안타였고, 바로 다음타자를 병살로 잡아내며 정확히 27타자를 상대했다.
  • [7] 한 시즌 221 탈삼진은 대선배 최동원에 이은 역대 2위 기록이다.
  • [8] 이해 구대성 말고도 최초의 30-30인 박재홍도 MVP후보에 올랐으나, 당시 분위기는 "신인왕,MVP 동시석권은 안된다" 였던지라 MVP는 구대성이 받는다.
  • [9] 주형광이 이 시기에 순수 선발로 뛰었다면, 구대성은 강병철에게 선발,구원 안가리고 굴려졌다.
  • [10] 토미 존 서저리를 3번씩이나 받은 권오준이 여러번 재기하는데 성공하는걸 생각하면 수술을 하는게 나았을 것이다. 다만 말년에 자포자기하고 재활을 포기한걸보면 또 모르겠다.
  • [11] 본인은 이 점을 가장 아쉬워한다고.
  • [12] 다만 주형광의 경우는 빠른생일이라 학번으로 따지면 94학번이다. 그걸 감안해 한 살 올려 33세라고 쳐도 너무 일찍 은퇴한건 확실하다.
  • [13] 동기인 박지철이 그보다 롱런했으며, 또다른 동기인 임경완이 40세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하는걸 생각해보면 아쉬울따름.
  • [14] 류현진이 2012년 25세 시즌까지 달성한 승수가 98승이다.
  • [15] 사실 몸이 안 좋을 시기에 군에 입대를 했는데 하필 군에서도 면제 판정이 나와서 휴식 기간이 없이 바로 투구를 시작했다. 투수에 따라 군 복무 기간은 휴식, 재활 기간(예로 SK의 채병용)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정말 안 될 놈은 뭘해도 안 된다.
  • [16] 손민한은 물론이고 가득염보다도 빨리 은퇴할 줄 아무도 몰랐으니.
  • [17] 거기에 혹사로 인해 주형광보다도 더 많은 재활,수술을 거친 염종석마저도 주형광 보다 롱런했다.
  • [18] 커브나 포크같은 종방향 변화구가 없었다. 그런데도 탈삼진 개수가 무시무시하다.
  • [19] 1995년 플레이오프 6차전 1피안타 완봉승, 1999년 플레이오프 마지막 3타자 연속삼진 등등. 사실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주형광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제일 잘막은게 저 플레이오프 7차전.
  • [20] 첫 승리가 완투승이었다.
  • [21] 이스터 감독이 잘리면서 박영태,양상문,한문연 같은 무능한 코치들이 이 때 다 잘린다. 야! 신난다! 이제 공필성만 잘리면 된다, 아니 2014시즌끝나고 불명예스럽게 나갔다.
  • [22] 전 버전에는 이강돈,양용모도 해임됬다 기술했으나, 정작 이 둘은 2012시즌 끝나고 윤학길,조원우 등과 같이 손잡고 나갔다.
  • [23] 뭐 진지하게 따지자면 2군 방어율은 큰 의미는 없다. 삼성같은 구단이 매년 1군감 투수가 한두명이라도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2군에서도 팀 방어율이 좋기 때문은 아니다.
  • [24] 2013년 현재까지 단일시즌 탈삼진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