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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last modified: 2014-12-14 09:16:24 Contributors

종교 개혁(宗敎改革) The Reformation,Protestant Reformation

Contents

1. 개요
2. 용어에 대해
3. 기원
4. 전개
4.1. 루터와 95개조 반박문
4.2. 신성로마제국의 혼란
4.3. 스위스의 개혁가들
4.4. 개판이 된 제국
5. 종교개혁이 남긴 것들
6. 기타

1. 개요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의 개혁운동. 그리스도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중세를 끝장내고 근대 유럽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2. 용어에 대해

흔히 "종교개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처음에는 유럽사에서 워낙에 큰 사건이라 the Reformation 으로 고유명사로 쓰였다. 다른 종교의 개혁에 대해서는 정관사 the가 빠지고 소문자로 reformation으로 쓰였는데 현대에 와서 왜 기독교종교 개혁만 유독 고유명사나 라는 비판 덕에 Protestant Reformation으로 용어가 생겨났다. 그렇다고 기존용어가 완전히 폐기 된 것은 아니다. 워낙 오래 관습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병용하고 있다. '영어'를 쓰는 영어권국가 영국 미국 등이 개신교 국가인걸 감안하면 오랜동안 그들 입장에서 쓴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개신교도 개혁 정도로 번역해야겠지만, 그러면 또 번역상의 난제가 생기는 탓에 굳어진 종교 개혁으로 사용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종교 개혁이란 표현을 그대로 써주는 편인데(!), 그 갈라진 양상을 강조할 때는 교회 분열 또는 종교 분열이라고도 한다. 즉 소위 "종교개혁"이라고 일컫고 상세한 내용은 분열이라고 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하도 교회 역사상 종교 개혁 말고도 각종 분열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대표적으로 정교회와의 동서 분열(The Grand Schism이라고 한다)이 있고, 그 다음에야 서구대이교(아비뇽 유수), 그리고 종교 개혁이 있다.

3. 기원

흔히 종교개혁의 시작을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면벌부 판매에 반대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을때로 보는게 일반인들의 시각이지만 역사나 교회사에서 학자들은 개신교의 종교 개혁, 그에 맞선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 개혁 모두 시대적 산물이고 내적인 변혁이라는데 견해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무슨 소리냐면 뜬금없이 마르틴 루터라는 인물 하나가 튀어나와서 종교개혁을 일으킨것이 아니고 그가 없었더라도 그 시기에 터질 사건 이라는것. 19세기 토머스 칼라일마르틴 루터가 없었더라면 하는 if 떡밥으로 루터가 없었으면 개신교도 없고 독일의 분열도 없고 프랑스 혁명도 없고 미국의 독립도 없었다는 이런식의 책을 써서 유명해지긴 했지만 현재에 와선 교회사나 일반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영웅주의 사관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추세다.

종교개혁 시기 수백년 전 중세 가톨릭 교회 자체는 물론이고 유럽 각지에서 개혁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루터도 이전의 개혁적 분위기나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일으킬수 있었다는 것.

사실 언제부터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봐야되는지는 논란이 있긴 하다. 중세 가톨릭 교회가 후기에 부패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부패상을 다들 손놓고 바라본건 아니기 때문. 중세 가톨릭 교회가 부패와 매너리즘에 빠질때마다 그런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수도원 운동이 개혁의 모습으로 볼수 있다. 가톨릭 교회가 성장하면서 조직화 되고 경직화 되어가자 이런 모습을 타파하기 위해 참신한 수도원 운동이 나타난 것.

그러나 중세 후기로 가게 되면 개혁을 위해 나타난 수도원들도 조직화되어 가면서 부패의 늪으로 빠져들고 만다. 거기에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라고 할수 있는 교황과 교황청도 교황의 권위가 추락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갔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교황의 권위를 높이려고 호화로운 의장과 건축물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고, 교회 조직이 관료화되면서 경직성이 더해져 갔다.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것이 크게 세가지 흐름인데, 첫번째는 신비주의 운동이라고 볼수 있다. 중세 3대 신비주의자로 불리는 이스터 에크하르트, 레르보의 성 버나드, 한 타울러 등은 영성을 갗춘 신비주의자들로 이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직접적으로 비난한것은 아니었지만 개혁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

두번째는 보티오 모데르나라 불리는 일종의 신도 경건운동으로 수도원적인 경건을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렸다. 이는 마르틴 루터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세번째는 위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발도파 등의 사상적/윤리적 개혁가,개혁 공동체들이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다. 사보나롤라의 경우는 피렌체에서 활동하면서 메디치 가문을 쳐바르고(...) 피렌체의 개혁을 이끌다가 화형당한바 있다. 발도파는 청빈을 강조하여 당시 비대해진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부의 축적을 비판했다.[1]

또 한편으로, 가톨릭 교회 내를 개혁하자는 목소리의 일환에서 나왔던 것이 바로 "공의회 주의"였다.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보다 공의회의 권위를 더 우위에 두자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었고 이에 따라 열린 공의회들은 난립하던 교황권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공을 세우긴 했다. 하지만 대립교황 문제가 해결되면서 공의회주의는 밟히고 말았는데, 교황의 입장에선 당연히 공의회를 더 우위에 두게 되면 교황권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공의회주의가 득세해서 교황권을 제어하고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주도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2]

4. 전개

4.1. 루터와 95개조 반박문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이었던 루터는 스승인 요한 스타우피츠의 권유를 받아들여 중세 가톨릭의 스콜라 철학 최신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자체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때 루터는 사도 바오로의 발언으로부터 이신칭의, 즉 하느님을 믿음으로서 의롭게 된다는 사상의 단초를 발견하고 정립하기 시작한다.

이미 루터가 이런 결론에 도달한지 오래된 가운데 1517년, 한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인 마인츠 대주교 알브레히트가 면벌부를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알브레히트가 면죄부 판매에 나선 이유는 마인츠 대주교직에 오르려고 많은 돈을 쳐발라서 본전 이상을 빼내려는 것 때문이었다. 여기에 당시 교황청에서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느라 재정이 궁해서 수익을 나누기로 하고 이를 허가했다.

이신칭의의 결론에 도달했던 루터가 보기에 면벌부는 아무 의미가 없어보였고, 이에 루터는 면벌부에 대한 학문적 토론의 차원에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3]

사실 루터는 이 시점에서 가톨릭 교회와 아예 등지려는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면벌부에 대해서 언제까지 이따위로 살텐가 토론 좀 해봅시다의 수준이었고 95개조 반박문 어디에서도 '교황권 자체에 반대하는 내용'은 없었다. 단지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면벌부의 원리로 내세운 수많은 성인들의 공덕이 쌓여서 그것으로 죄인들의 죄를 사면해줄 수 있고, 그 공덕의 관리는 교황이 담당하며 이 공덕을 면벌부로 판매한다는 이론을 반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중세 대학 등 학문세계의 토론문화에서 이 정도의 도전은 정당하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의 돈줄이 걸린 문제를 건드린 이상 이와 관련된 논의는 순수 학문적으로 진행되기는 틀린 운명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면벌부를 둘러싼 신학적 논쟁이 가열되었고, 내부자로서 교회의 비리와 부패를 비판하던 루터는 점점 교황청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당시 교계에서는 루터의 주장을 억누르려는 입장이었고, 루터는 자신의 소신을 굽힐 마음이 없었다. 교황청에서는 처음에는 루터의 사상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반박하고자 151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투스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발언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는 루터의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 데에 일조하였고, 교황청은 이제 루터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에 되었다.

4.2. 신성로마제국의 혼란

결국 1521년에 루터는 교회로부터 파문당했다. 이와 더불어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루터를 불러 신앙 검증을 요구한다. 그 곳에서도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의회는 루터를 제국 밖으로 쫓아내도록 결의한다. 이는 당시의 황제였던 카를 5세가 가톨릭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과 관련이 깊다. 비록 카를 5세의 시대에는 제국의 황제의 권위가 교황의 권위를 초월한 지 오래였지만,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명목상의 정통성은 당시의 시점에서도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4] 이후 루터는 몰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에게 몰래 몸을 의탁하고,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이는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교를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 바로 다음 가는 권력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선제후가 루터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제국의 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의 카를 5세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빴다는 것(...) 이 무렵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고[5] 카를 5세는 이를 진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하필이면 이 무렵부터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프랑스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524년에 제국 전역에서 중세 봉건 질서에 반발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이는 후에 '농민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규모가 거대하여 독일 중, 남부 전역을 휩쓸었다.

단, 루터는 여기에서 민중이 아닌 황제를 지지하였고, 이는 후에 루터가 몇몇 역사가들에게 영원히 까이는 계기 중 하나가 된다.[6] 이후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에 귀환하여 이러한 민중 운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기존 가톨릭 질서에 반발하는 의미로 루터교를 수용했던 농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7] 결국 지금까지 거의 루터 본인의 힘만으로 진행되던 개혁은 이 시점부터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기 시작한다.

결국 이 무렵에 들어 종교개혁은 루터의 손을 떠나고, 이 바톤은 스위스로 넘어가게 된다.

4.3. 스위스의 개혁가들

루터가 열심히 활동하던 무렵, 스위스는 당대 최고의 병사들인 스위스 용병들의 나라였다.[8] 이들은 여러 곳에서 용병으로 근무하면서 수입을 냈고, 이는 스위스 지역의 경제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당시의 스위스는 아직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의 주도권 다툼에 계속 희생되고 있었고, 스위스의 자주적인 독립을 원하는 목소리는 갈수록 커져만 갔다.[9]

이러한 시대에 취리히에는 울리히 츠빙글리라는 또 다른 개혁가가 있었다. 그도 동시대의 루터처럼 면벌부와 가톨릭의 부패를 비판하였으며, 성경에 종교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루터와 그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는 실제로 그가 머물던 취리히를 본인의 손으로 개혁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취리히는 그의 손에 의해 성공적으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츠빙글리는 이러한 개혁을 스위스의 다른 곳에도 전파시키려 노력했으나, 가톨릭 도시들, 그리고 신학적인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던 루터교를 믿는 도시들과 반목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은 결국 내전으로 확산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스위스에서의 영향력을 잃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카를 5세는 스위스의 가톨릭파를 도와 진압군을 보내고, 이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자세한 전개 과정은 울리히 츠빙글리 항목을 참조할 것. 그리고 이러한 내전은 스위스 용병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하게 된다.

한편, 제네바에는 종교적 탄압을 피해 프랑스에서 망명 온 루터와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아래의 법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종교개혁의 2번째 불씨를 당긴 장 칼뱅이다. 그의 사상[10]은 신학 외적인 부분에서는 철저히 보수적이던 루터교보다도 진보적이었고, 그 덕에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이 주로 채택한 루터교[11]와 달리 일반 민중들이나 상공업자들에게 그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루터보다 능력있는 개혁가여서 츠빙글리처럼 제네바를 자신의 손으로 탈바꿈시켰으며[12], 법학과 고전 문학을 전공한 그의 경력을 바탕으로 '기독교 강요'라는 자신의 사상을 정리한 책을 펴냈으며, 대중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도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칼뱅의 교리는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가 없었고, 1530년대에 이르면 칼뱅의 교리를 신봉하는 세력도 상당히 커지게 되어 단순한 탄압만으로는 이들을 누를 수 없게 되었으며, 루터교와는 달리 독일을 넘어서 프랑스와 영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출발점이 바로 칼뱅이며, 1534년에는 영국의 헨리 8세성공회를 만들어 아예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나가기까지 한다.[13] 그리고 결국 칼뱅 파는 1550년대 무렵에 스위스 전역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결국 가톨릭의 순수성을 부르짖으며 처음 등장했던 종교개혁은 이 시대에 들어서면 전 유렵을 개판 5분 전으로 만들고 있었다.

4.4. 개판이 된 제국

사태가 이쯤 되자 카를 5세는 대립을 중재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본인이 전 유럽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루터교로 무장한 선제후들이 뭉쳐서 달려들면 본인도 이를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에 그는 평화적으로 대립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래서 1530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이를 중재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1531년이 되면 신교를 믿는 제후들이 아예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구교와 대판 싸우기까지 한다. 아마 이 무렵의 카를 5세는 스페인 반란 진압, 프랑스 견제, 오스만 견제만 해도 정신없는데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는 도시들 때려잡으랴, 제후들 때려잡으랴 노이로제에 걸려 스트레스를 죽어라 받았을 것이다.

결국 점점 힘이 빠져가던 황제는 1555년에 다시 중재를 시도한다. 이 무렵이면 황제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를 내려주었던 교황 레멘스 7세도, 종교개혁의 불씨를 처음 당긴 루터도 죽은 뒤였고, 종교개혁은 종교젹 이해를 떠난 지 오래였다. 결국 1548년의 아우부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황제는 일시적으로나마 분쟁을 봉합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화의를 통해 루터파는 공식적으로 공인받았고, 루터교를 믿는 대부분이 제국의 제후들이었던 만큼 내전 수준으로 치닫던 내부의 분쟁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 화의에는 2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하나는 신앙을 결정하는 주체가 일반 민중이 아닌 그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라는 것. 따라서 자기가 사는 땅의 제후가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를 믿는 신도들은 계속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화의가 루터파와 가톨릭만의 화의였으므로 이미 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던 칼뱅 파에 대한 논의가 아예 없었다는 것. 그 덕분에 칼뱅 파들은 신나게(...) 반발하여 황제나 제후들 입장에서는 한층 더 깽판(...)을 치고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교황청에서도 드디어 반격을 하기 시작한다. '반종교개혁'이라고도 불리는 예수회의 가톨릭 내부 자정 운동이 그것. 결과적으로 당시의 사회상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고, 내부의 부패를 완전히 뿌리뽑지도 못했지만 이는 일부 제후들을 다시 가톨릭으로 돌리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이상 신성로마제국은 하나의 제국으로 묶일 수 없게 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추락하기 시작하고 제후 각각의 힘이 점차 강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강해진 제후들은 신나게 자기들끼리 계속 치고받게 되었고, 이는 결국 1618년에 30년 전쟁으로 대폭발하게 된다.

30년 전쟁이 끝난 뒤에야 유럽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마무리짓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서 비로소 개인의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칼뱅 파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썼던 시기에서 100년이 더 지난 뒤였다.

5. 종교개혁이 남긴 것들

종교개혁이라는 큰 폭풍이 지나간 100년 사이에 유럽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개혁이 시작되었던 신성로마제국은 폭풍이 지나간 뒤 후대의 볼테르의 말마따나 더 이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게 되었다. 황제와 교황의 힘이 세트로 약해지면서 교황이 주는 권위라는 것 자체가 무색하게 되었고,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종교의 자치권을 얻은 것을 시작으로 점차 거의 완전한 자치권을 얻어 더 이상 하나의 제국이 아닌 일종의 연방과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여기에 30년 전쟁의 폭풍이 지나가면서 독일 인구의 상당수가 죽었고, 결국 독일은 이후 프로이센이 부상할 때까지 유럽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게 되고, 제국을 다스리던 힙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가 되어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프로이센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이 신성로마제국의 몰락에 있었다는 것.

종교개혁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독일 지역이었지만, 다른 나라에도 종교개혁은 큰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영국은 루터교의 교리를 일부 빌려 성공회를 만들어 독립하였고[14], 프랑스도 위그노가 중요한 사회 세력으로 떠올라 위그노 전쟁이라는 홍역을 앓게 되고, 결과적으로 발루아 왕조가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등장하게 되는 기원이 되었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는 직접적으로는 큰 30년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기에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서 중흥을 맞았고, 프랑스는 한 세대 일찍 국내의 갈등을 봉합한 뒤, 30년 전쟁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 루이 13세리슐리외를 통해 절대왕정을 완성하고 한동안 유럽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종교개혁을 통해 비로소 유럽 역사에서 종교와 정치가 완전히 분리되게 된다. 위 글을 읽어봐도 알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교황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들이 점차 쩌리(...)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종교개혁 이전에도 교황의 권위는 추락하고 있었고 사코 디 로마와 같은 막장사태까지 일어나는 상황이었지만, 그 사건을 직접 일으킨 카를 5세조차도 권위를 위해 교황이 내려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가 필요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신교는 이러한 권위에서 자유로웠고, 제국의 제후들은 이를 잘 이용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는 더 이상 교황의 권위를 필요로 하는 군주는 아무도 없었고, 교황의 정치적 권위 자체도 제로에 수렴하게 된다. 다만 권위를 뺏기지 않고자 시작되었던 예수회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내부의 자정 노력은 아이러니하게도 교황이 정치에서 멀어진 덕에 오히려 가속되어 이후 그럭저럭 성과를 거두게 된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은 근대 독일어를 만들었다시피 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에는 마르틴 루터의 공헌이 컸는데, 루터 본인이 번역한 성경은[15] 독일 전역에 퍼지면서 그 자체로 근대 독일어의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한 인쇄술에 힘입어 막대한 파급력을 갖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루터라는 한 사람에 의해 근대 독일어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6. 기타

이처럼 종교개혁은 순수한 종교적인 개혁이라고만 보기에는 어려운 사건이다. 이는 사코 디 로마가 일어났을 때 루터가 환호했다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순수한 종교적인 개혁으로 출발한 사건이였던 종교개혁은 제후와 도시들의 힘을 통해서야 겨우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패권 싸움으로 발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마녀사냥이 중세에 많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하게 일어났던 것은 이 시대였다. 각 세력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들이나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거리낌없이 이교도로 몰아 마구잡이로 죽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신교라고 해서 마녀사냥을 안한 것이 아니다! 초기에는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자행했지만, 가톨릭이고 신교고 세력이 비등비등해지는 17세기가 되면 양쪽 다 비슷한 빈도로 마녀사냥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 무렵에 들면 종교적인 의미 따위는 내던진지 오래이고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목적에서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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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이들이 번역이 금지되었던 라틴어 성경을 번역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번역한 것은 사실이지만 라틴어 성경의 번역은 그 이전에도 행해지던 일이며 금지된 것도 아니다. 단지 인쇄술의 발달로 후대에 갈수록 번역이 활발해진 것 뿐이다.
  • [2]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의회주의도 그다지 큰 도움은 안되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긴 하다. 얀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석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청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신변보장까지 받아내서 공의회에 출석했음에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서 화형을 당했다!
  • [3] 이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사가들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게 아니라 교구 주교들에게 면벌부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학문적 토론의 방식은 잘 보이는 곳에 자신의 의견을 붙여놓는 것이었기 때문에, 딱히 루터가 안 붙였다고 단정짓기도 힘들다. 정확한 진상이 어찌되었건 95개조 반박문은 루터의 작품이며 루터의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고, 이 주장이 가톨릭 내부적으로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 [4] 단 황제는 루터의 신변만은 약속대로 보장해 주었다. 실제로 루터는 목숨을 걸고 의회에 출두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당당함이 오히려 루터교의 세력을 불리는 데 일조했다는 것....
  • [5] 카를 5세는 스페인의 초대 국왕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의 이름은 카를로스 1세.
  • [6] 루터 본인은 이에 대해 자신은 신분 사회에 대한 개혁은 의도한 적이 없고, 당시의 농민 공동체가 강제적이었기에 지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7] 루터는 항상 본인을 신학자로 생각했으며, 신학 외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마르틴 루터 항목을 참고할 것.
  • [8] 다만 절정기는 아니었다. 이 무렵부터 총기가 본격적으로 전쟁에 등장하여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중이었기 때문. 실제로 이들은 당시 시점에서 얼마 못 가 몰락하고 최강의 병사라는 타이틀은 스페인의 테르시오가 이어받게 된다.
  • [9] 결국 스위스는 종교개혁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는 30년 전쟁이 끝난 뒤 독립을 이루게 된다.
  • [10] 자세한 내용은 장 칼뱅을 참조할 것.
  • [11] 이는 신학적으로 가톨릭에서 벗어나 황제의 권위와 멀어지는 대신, 민중 반란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서는 보수적이여야 하는 그들의 입장과 루터교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 [12] 다만 극도로 금욕적인 칼뱅의 교리 때문에 이는 반발도 심했으며, 실제로 칼뱅은 이 과정에서 제네바에서 잠시 추방당하기도 했다.
  • [13] 이게 영국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의 신의 한 수가 되었는데, 구교도 신교도 아닌 본인들만의 종교로 독립한 덕에 영국은 한동안 이후의 종교 전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성공회 자체는 개신교 계열로 분류된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청교도들이 큰 사고를 치고야 만다.
  • [14] 다만 이 과정에서 여전히 청교도들은 탄압받았고, 그러다 일부 청교도들이 1620년대에 신대륙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미국의 기원이 된다!
  • [15] 이 과정에서 루터는 상당수의 단어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