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조지 스타인브레너

last modified: 2014-08-09 14:18:12 Contributors


이름 George Michael Steinbrenner Ⅲ
출생 ~ 사망 1930년 7월 4일 ~ 2010년 7월 13일
출신 오하이오

Contents

1. 소개
2. 양키스 인수 초창기부터 암흑기까지
3. 영구제명에 이은 복귀 : 그 후
4. 불안한 시기, 그리고 은퇴 후의 양키스 우승
5. YES 네트워크
6. 요약

1. 소개

보스라 불린 사나이.
내게 승리는 숨 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하다. 숨 쉬고 있다면 승리해야 한다(Winning i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my life, after breathing. Breathing first, winning next)

뉴욕 양키스, 나아가 메이저리그와 미국 프로 스포츠의 역사에 길이 남을 구단주로서 오늘날의 악의 제국 양키스를 만들어낸 주역이자, 승리를 위해서는 뭐든지 아끼지 않는 공격적인 투자와 경영, 그리고 괴팍한 성질머리(...)로 이름이 높았던 인물이다. 위의 영결식 때 사진은 그나마 젊은 사진이고...

2. 양키스 인수 초창기부터 암흑기까지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구단 소유를 갈망해온 스타인브레너는 풋볼 코치, 아버지가 크게 성공한 사업인 선박 사업, 농구단 운영[1]을 거쳐[2] 1973년, 뉴욕 양키스의 악덕 구단주 CBS와 1000만 달러의 매각 가격에 합의, 양키스의 구단주가 되었다. CBS가 뉴욕 시에서 구입했다가 스타인브레너 그룹에게 같이 넘긴 주차장 권리를 CBS에게 되팔아 120만 달러의 이득을 챙겼기 때문에 사실상 880만 달러로 구입한 셈이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리처드 닉슨에게 불법 선거자금을 융통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구단주 자격이 정지되는 홍역을 치렀지만, 때마침 시행된 FA 제도를 잘 이용했다. 1975년 캣피쉬 헌터를 5년 375만불 계약으로 영입한 것.[3] 이후 레지 잭슨을 영입하며 FA 시장에서 큰손으로 군림했다. 또한 빌리 마틴 감독과 요기 베라[4] 코치를 영입하였고, 1976년 월드시리즈 진출[5]에 이어 1977~78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제패하게 된다.

하지만 스타인브레너는 이들과 절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사실 폭군과도 같은 그 성격에 사이가 좋은 사람이 있었겠냐마는...), 특히 감독과 단장들을 절대적으로 불신했다. 빌리 마틴은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던 1978년 중반에 비록 전보다는 부진하지만 5할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음에도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고[6], 단 1경기만 맡은 하우저 감독을 거쳐 밥 레몬 감독이 1년간 맡았다가 다시 빌리 마틴 감독의 복귀→딕 하우저→진 마이클→밥 레몬→진 마이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자세한 감독 변천사는 베이스볼 레퍼런스 참조.[7]

요약하자면, 구단주로서 첫 17년간 17번 감독을 교체했으며, 재임 기간 내내 11번이나 단장을 교체했다. 결국 1982년부터 1994년까지 양키스는 비밀번호를 찍게 된다. 절대 성적이 잘 나올 수가 없는 체제였다.

또한 그의 괴팍한 성품은 선수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레지 잭슨이 그와 척을 지고 캘리포니아 에인절스로 떠났으며, 10년간 연평균 140만불의 특급 대우로 영입한 데이브 윈필드(자세한 사항은 윈필드 항목 참조)에게는 최고 연봉자로서 다른 최고액 연봉자가 나타날 경우 연봉 차액을 보전하겠다는 조항을 달아놨다가 최종적으로 연봉 총액이 2300만불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자선단체 운영에 대해 꼬투리를 잡아 뒷조사를 시켰다가 1990년 페이 빈센트 커미셔너에게 걸리며 영구제명을 당하기에 이른다. 결국 빈센트 커미셔너가 물러난 뒤인 1993년 복권되었다. 이 시기 켄 그리피 주니어는 공개적으로 양키스를 디스하기도 했다. 그리피 曰, "난 절대 저런 팀에서 안 뛰겠다."(...)

3. 영구제명에 이은 복귀 : 그 후

선수의 자선활동에 보태주는 돈 몇푼 아끼자고 데이브 윈필드의 뒷조사를 시켰다가 쫄딱 망할 뻔 했던 3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감독들을 교체하던 그 시기는 그야말로 양키스의 흑역사였다. 오죽하면 돈 매팅리가 역대 양키 주장 중 유일하게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는커녕 월드시리즈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은퇴했을 정도. 하지만 그런 인고의 세월을 보낸 양키스는 199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6순위로 데릭 지터를 뽑고 드래프트와 국제 아마추어 자유계약을 통해 마리아노 리베라, 호르헤 포사다, 버니 윌리엄스, 앤디 페티트를 얻는 등 팜을 정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웨이드 보그스를 영입하면서 중흥기를 열기 시작했다. 비록 1995년에는 랜디 존슨을 앞세운 시애틀 매리너스에게 패하지만 물론 이때도 쇼월터 감독의 모가지가..., 이후 1996년부터 조 토레의 지휘 하에 양키스는 제국의 면모를 되찾기 시작했다. 스타인브레너는 또한 1998년부터 취임한 현찰맨 단장을 신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1998년~2000년 월드시리즈 3연패, 2001 월드 시리즈 진출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수십년간 양키스를 달달 볶아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자씨가 달달 볶는다고 성과가 좋은 적이 있기나 했냐

그런데...

4. 불안한 시기, 그리고 은퇴 후의 양키스 우승

사실, 이 시기에도 성적은 좋았다. 그저 우승을 못했을 뿐. 조시 베켓플로리다 말린스에게 2003 월드시리즈를 내준걸로 모자라 2004 ALCS에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면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두 차례 우승을 바라봐야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스타인브레너는 그에 굴하지 않았다. 2004년 초, MLB를 뒤흔든 알렉스 로드리게스 트레이드를 성사시켜 A-ROD를 3루수로 변신시켰고, 케빈 브라운, 칼 파바노, 하비에르 바스케스, 랜디 존슨 등을 영입했다. 그런데 망했다 투수 먹튀들이 대거 출현하고, 더욱이 2007년 큰아들 행크가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10년 $275M의 계약을 안겨준 것 때문에 양키스는 더욱 꼬여만 갔다. 결국 행크는 후계자 경쟁에서 탈락한다.

결국 2007년을 끝으로 조 토레와 결별하고 지라디 감독을 영입한 2008년, 탬파베이 레이스가 갑툭튀했고 양키스는 지구 3위로 떨어졌다(...) 결국 이 해를 끝으로 공식적으로는 구단주 자리에서 물러나 막후 실권자로 올랐다. 사실 2000년대 중반부터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 휠체어 신세를 질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브라이언 캐시맨 단장의 권리가 확대되었고, 양키스는 팜을 재정비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스타인브레너가 아들 할에게 자리를 물려준 뒤인 2009년, 야심차게 영입한 CC 사바시아, 마크 테셰이라를 앞세워 양키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고 통산 27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 지라디 감독과 양키의 캡틴 지터는 우승 반지를 들고 보스를 찾아갔고, 보스는 우승반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010년 올스타전이 열리던 7월 13일, 자택이 있는 플로리다 탬파에서 그는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양키스는 2010년 후반기 동안 보스를 기리는 마크를 달며 뛰었고 ALCS에 진출하여 보스의 영전에 우승컵을 바치는...가 했지만 아쉽게도 클리프 리가 양키스타디움을 침묵으로 몰아넣으며 텍사스 레인저스에 패배.

5. YES 네트워크

2002년 스타인브레너가 발주시킨 YES 네트워크는 뉴욕 양키스브루클린 네츠의 경기를 중계하며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으며, 프랜차이즈 방송국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이 방송국은 현재 양키스의 경기를 독점 중계하고 있으며, 경제계의 평가에 따르면 양키스 구단의 가치보다도 더 높은 자산가치가 있다 평가받는다. 정확히 말하면 양키스의 가치는 2010년 기준으로 16억 달러이며, YES 네트워크는 12억 달러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2010년 기준이니 이후 달라진 것에 대해서는....


6. 요약

제국을 만든 사나이로서, 70년대 이후의 양키스의 역사를 논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메이저리그, 나아가 미국 프로 스포츠와 경제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리더였다. 사실 인성면에서는 막장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절대 내 주변에 있지 않았으면 싶은 사람이다. 단지 성질 더러운게 문제가 아니다. 알렉스 퍼거슨은 성질 더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편이 되기로 마음먹으면 모든것을 걸고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이사람은 그런거 없다. 제멋대로에 변덕은 심하고 자기말 안들으면 짤라버리고 뒤통수스킬까지 보유했고 공은 내꺼로 과오는 남에게 뒤집어씌우기. (하단 링크기사에 버라이어티한 사례들이 있다)

하지만 제일 상단 사진처럼 양키스 팬들이 스타인브레너를 사랑했고 추모하는 이유는 그가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아끼지 않는 구단주였기 때문이다.[8] 2000년대 후반 다저스의 구단주였던 프랭크 맥코트처럼(이 사람은 아예 구단을 말아드셨다.) 구단을 통해서 이익을 창출하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승리를 창출하고 팬과 공유하려고 하였기에 팬 입장에서는 미워할 수 없는 구단주였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트레이드로 데려온 2004 시즌의 홈 개막전에서 팬들이 "Thank you Boss", "We Love Geroge" 등의 피켓을 흔드는 장면이 전광판 화면에 잡히자 눈물을 펑펑 흘리기도 했다. 2009년 개장한 양키 스타디움의 별명이 바로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지은 집(The House that George Built)"이라는 것만 봐도 그를 향한 팬들의 애정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예.[9]

선수들에게도 잘해줬다고 한다. 장발 금지, 콧수염 외의 다른 수염은 금지라고 하는 팍팍한 규율을 강요하기도 하지만(지금에야 이 규율은 양키즈의 일종의 전통처럼 이어져서 존중받지만, 세상에 선수들 두발 단속하는 구단주가 어딨는가)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는 행보를 보여줬고 선수들이 최상의 컨디션에서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까지 했다고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체제 하의 선수들은 증언한다. 다 거짓말이야 일단 돈다발 안겨주니까 립서비스 해주는거지 다만 코칭스탭과는 앞통수 뒷통수 옆구리통수 등등 버라이어티한 방법으로 대립했고 싸웠다.[10]

그리고 계산기 튕기지 않고 우승을 위해 모든 돈을 퍼붓는듯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스타인브레너가 천만달러에 인수한 양키즈는 현재 최소 40억달러 이상의 자산가치가 있는 구단으로 평가받는다. 꼴리는데로 돈 쓰는 졸부가 아니다. 이른바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더 큰 수익을 창출한다는 경영 철학의 매우 훌륭한 표본을 보여준다.



----
  • [1]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ABL의 팀이었다. NBA 진출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
  • [2] 한 때 고향팀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인수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 [3] 하지만 그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에서부터 이어진 혹사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먹튀
  • [4] 해당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이후 대판 싸우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베라가 양키스와 떨어져 있는 기간마다 양키스는 암흑기를 맞게 된다.
  • [5] 이 때는 '빅 레드 머신' 신시내티 레즈에 4-0 스윕을 당했다.
  • [6] 빌리 마틴이 이 엿 같은 팀에는 타고난 사기꾼(레지 잭슨) 하나와 범죄자(스타인브레너) 하나가 있다고 한 인터뷰가 결정적이었다. 범죄자라 한 것은 스타인브레너가 몇년 전 리처드 닉슨에게 불법 정치자금 제공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걸 비꼰 것이었다. 레지 잭슨과도 경기 도중 덕아웃에서 주먹다짐까지 한 사이였고
  • [7] 이 혼란은 빌리 마틴이 무려 5번이나 감독 선임/해고를 반복하고 요기 베라가 치를 떨면서 14년간 양키스와 의절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쇼월터 감독이 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 [8] 까놓고 이야기하면 본인이 지는 걸 못 참았다.
  • [9] 참고로 구 양키 스타디움의 별칭이 "베이브 루스가 지어준 집"이었다는걸 본다면, 이는 양키즈 팬들이 보낼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셈이다.
  • [10] 그래도 자신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은 잘 챙겨주었다. 스타인브레너가 진정한 남자라고 인정한 그러면서도 5번이나 잘랐다 빌리 마틴이 교통사고로 죽자 자비로 베이브 루스의 묘소 근처에 묫자리까지 마련해줬다. 스타인브레너 밑에서 선수와 감독을 했던 루 피넬라도 야구와 얽히지만 않으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