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조조

last modified: 2018-12-29 16:24:21 Contributors

위의 역대 왕사
위 건국 태조 무황제 조조 1대 세조 문황제 조비[1]

조조서기
생몰년도 155년 ~ 220년 1월 23일
시호 무황제(武皇帝)[2]
묘호 태조(太祖)
조조(曹操)
맹덕(孟德)

Contents

1. 개요
2. 이름과 칭호
3. 생애
3.1. 청년 시절
3.2. 영제 사후
3.3. 반동탁연합
3.4. 연주목 시절
3.5. 장막과의 대결
3.6. 천자 옹립
3.7. 원술,유표와의 대결
3.8. 여포와의 대결
3.9. 원소와의 대결
3.10. 하북 평정
3.11. 적벽의 대전
3.12. 마초와의 대결
3.13. 유수의 싸움
3.14. 장로 공격
3.15. 한중 공방전
3.16. 번성 공방전
4. 조조의 능력
4.1. 군사적 능력
4.1.1. 병법
4.1.2. 친정중시
4.1.3. 친족중시
4.1.4. 과감성
4.2. 제도 정비
4.2.1. 둔전제
4.2.2. 호조법
4.2.3. 구현령과 한계
4.2.4. 원호법
4.2.5. 그 외
4.3. 문학
4.4. 도교
5. 외양
6. 성격
7. 여자 관계
8. 조조의 무덤
8.1. 발굴 내용
8.2. 의문점
8.3. 진행 상황
9. 연의와 그 이후 창작물에서의 평가
10. 정사의 평가
11. 그 외
12. 기타 매체에서의 조조

1. 개요

후한말 패국 초현 사람으로 후한의 마지막 승상이자 삼국시대 태조. 망탁조의의 멤버. 당대에 인물평론으로 유명했던 허소가 조조를 보고 평가한 말은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날강도"[3][4]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는 차오 차오(cáo cāo). 고전 영문판 삼국지를 플레이한 사람이라면 'cao cao'라는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걸 카오카오로 읽었다. 조죠, 죠조, 죠죠, [5] 등으로 잘못 쓰이는 경우도 있다. 시호는 무제(武帝)지만 사후에 올려진 시호로 본인은 황제에 오르지 않고, 명목상으로는 한나라의 신하로서 죽었다. 참고로 일본식 독음은 そうそう(소-소-)로 특이하게도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이름이 같은 음절 두 번 반복으로 읽힌다. 단 중국어 발음으로는 성조의 차이는 있다. 참고로 베트남식으로는 Tào Tháo(따오타오)라고 읽어 같은 음절 반복은 아니다.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요인물 중 하나. 아명은 아만(阿瞞)인데, 만(瞞)과 조(操)는 비슷하게 조작하다, 속이다라는 뜻이 있다. 이름대로 조조는 교묘한 간웅(奸雄)의 이미지로 잘 알려졌으며, 실제로도 교묘한 인물이었다. 또 다른 이름은 길리(吉利). 리(利)라는 글자도 교묘한 느낌을 풍기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천하를 배반할지언정, 천하가 날 배반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이 있다.[6] 간웅의 이미지에 매우 적합하여서 널리 알려졌다.[7]

2. 이름과 칭호

  • 조조 맹덕 : 일본에서 사용하기 시작해 한국도 그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이는 일반적으로 4자나 5자 이름이 대부분인 일본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쉽게 하려고(중국은 대부분 외자 이름이 많다) 이름과 자, 또는 이름과 호를 함께 붙이던 것이 관례가 된 것. 다른 사례로 '제갈량 공명' 등의 호칭이 있는데, 엄밀히 말해 잘못된 호칭이다. 굳이 자를 함께 불러주고 싶으면 맹덕 조조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언제나 자나 호는 이름 앞에 붙기 때문이다.
  • 조조 : 이 본명은 대개 적이 부른다. 그 일례가 조조놈. 아예 멸칭으로 조적(曹賊)이라 불리우기까지 한다.
  • 조맹덕 : 가장 흔히 불리우는 이름이다.
  • 조교위 : 조조가 초기에 교위 직책에 있었기에 이 호칭으로 불리웠다.
  • 조승상 : 승상이 된 이후의 호칭이다.
  • 위왕 : 216년 위왕이 된 이후의 호칭이다.
  • 태조 무덕황제 : 시호.

3. 생애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자식이 없던 중상시 조등[8]의 양자로 들어갔다.[9] 조등은 환관이었고 결국 조조는 환관고자의 손자가 되는 셈.

십상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환관들의 세력은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이었고 조등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그중에서도 엄청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재산이며 권력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조숭 역시 그 덕으로 관직을 살 수 있었다. 조조 역시 그 덕을 본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집안 때문에 이미지 손상도 보았다. 어쨌든 당시 환관들의 횡포가 심했고 같은 출신에 해당하는 조조의 뒷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왕윤이 자신의 잔치에서 조정대신 중 조조만 빼놓고 초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무튼, 집안이 부유하고 조등의 권력 때문에 조조는 상당한 이득을 보았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당장 조정의 최고위 대신인 삼공 중 한명이었던 사도 왕윤이 자신을 초대하지 않았다는 것에 젊디젊었던 조조가 대놓고 불만을 표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 조조가 가진 뒷배경과 이 젊은 신하가 가진 위세를 짐작케 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청년 시절에 이미 최고위 노대신들과 어깨를 마주하고 있었단 이야기이다.

아래에 설명된 내용인 십상시 건석의 숙부를 혼내주고도 별다른 화를 겪지 않은 것이 그 예시인데 조등의 실드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하게 십상시의 친족을 엄격하게 벌주었던 왕윤은 나중에 십상시에게 보복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십상시 장양이 정말 조조를 죽이려고 하자 조등이 직접 나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래도 조등이 손자를 위해 여러모로 움직이기는 했을 것이다.[10]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뒷배경으로 출세한 자라고 하면 대부분 원소를 떠올리지만, 원소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사실 뒷배경은 조조가 더 강했다. 원소는 비록 명문 원가 출신이긴 하지만 정실이 아닌 첩[11]의 배에서 나온 천출이었고 이 때문에 원술 등의 적통들에 밀리지 않기 위해 십대때부터 자신의 커리어에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했지만, 반면에 조조는 진수 공인으로 젊은 시절 (총명하긴 하나) 방탕한 생활을 하며 학업을 게을리했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무난히 청년이 되자마자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덕에 반동탁연합 이후 중원에서 떨어져 남쪽 변경 오월 땅에서 이리저리 부대꼈던 손씨 집안이나 촌구석 출신으로 다른 군주 식객 역할이나 하러 돌아다녔던 유비와는 달리, 초반부터 원소와 함께 중원 하북지방의 알토란 땅에 큰 세력을 형성한 군웅이 될 수 있었다.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인맥이다. 원래 양할아버지의 후광을 받은 조씨 문중뿐만 아니라 원래 성씨인 하후씨까지 아우르는, 그야말로 벌족에 필적하는 인적 인프라야말로 조조의 최대 강점이었다. 유비에게 초 일류 인재풀이 있었다하나 숫적으로는 겨우 한 손에 잡을 일이었지만 조조에게는 그 바로 밑의 일류급이 거의 군단급으로 우글거렸다.[12] 손권도 선대로부터 받은 인재가 넘쳤다지만 조조 진영에 비하면 다소 격이 낮은 지역 명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조조는 이 인재들을 적당히 견제하고 또 중용하면서 언제나 경쟁자인 손권이나 유비보다 여유롭게 정국운영을 꾀할 수 있었다. 이는 인재가 곧 힘이 되는 난세에는 비할바 없는 메리트였다. 기실 조조는 이 인적자원에 취해서 인재를 귀하게 여기다가도 함부로 다루고 상대를 깔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조는 인재가 좋긴 하지만 아쉬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유비가 인덕을 갈아 넣고 손권이 재물을 갈아 넣을 때 조조는 사람을 갈아 넣었다(...) 인밀레 다만 이를 제대로 활용했던 조조의 능력 또한 범상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3.1. 청년 시절

20세에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그 뒤 곧 낙양북부위(落陽北部尉, 수도 북문의 경비대장)에 봉직하며 십상시의 한 명인 건석(蹇碩, ?~189)의 숙부가 통금을 어긴 것을 엄정하게 다스려[13] 명성을 얻었다. 사실 이런 짓을 하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벼슬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조의 뒷 배경이 만만치 않았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북부위의 사건 이후 곧 승진하여 동구 지역의 현령으로 임관되었고 그 뒤 승진하여 의랑이 되어 낙양으로 되돌아간다.

조조는 의랑시절 영제에게 여러 일을 상소하였는데 이는 전부 부정부패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제는 조조를 기특하게 여긴 듯하였고 그의 청을 들어주는 듯하였으나 곧 원래대로 돌아갔고 이에 낙담한 조조는 상소를 그만둔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로 임명되어 싸움에 참여하였고 그 공으로 그는 제남상이 된다. 그곳에서 조조는 부패한 관리를 면직시키고 사당을 때려 부숴 재물을 갈취하는 일을 막는 등의 선정을 베푼다.

그 뒤 동군태수로 전임되나 그동안 황제 측근의 권신들에게 여러차례 밉보였기에 집안이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해 질병을 칭탁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간다. 낙향한 뒤에는 성 밖에 별장을 짓고 독서와 사냥에 매진하며 지냈다. 이 무렵 허유 등이 영제 폐위 계획에 조조를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거부한다.

이후 한수의 반란이 일어나자 영제는 중앙군 강화를 위해 서원팔교위를 창설했는데 이 무렵 조조는 다시 수도로 돌아가 의랑으로 복직되었다가 서원팔교위의 창설에 맞춰 전군교위의 직책을 받는다.

3.2. 영제 사후

서원팔교위 창설 이후 동탁이 집권하기까지 정치적 격변의 시기였으나 당시 조조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영제 사후 건석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하진이 환관들을 폐하기 위해 원소의 계책에 따라 동탁을 불러들인 것을 비웃으며 하진의 패망을 예견했다는 위서의 기록이 유일한 행적인데, 조조가 신이 아닌 이상 급변하는 정세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세세한 변수까지 예측하며 하진의 패망을 알기란 불가능하므로, 위서에서 조조를 미화하기 위해 결과에 끼워맞췄다고 보는 설이 우세하다.

위서의 과장을 제하고 본다면 조조 자신부터가 조등의 손자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십상시처럼 영제의 측근 노릇을 하며 전횡을 휘둘렀던 일부 환관들에게는 비판적이었으나, 환관세력 전체를 극단적으로 약화시키려던 원소 등 급진파의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었으며, 동탁,정원 등 외부의 장군들이 중앙정계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파벌 대립이 시작될 것을 우려했던 것으로 의견이 모이는 편.

아직까지 크게 두드러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나름대로 입지가 있긴 있었는지 동탁은 정권을 장악하자 조조를 효기교위[14]로 임명했으나 조조는 임관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달아났다.

한편 당시 중앙에서 입지가 전무했던 동탁은 지지도 확보를 위해 소제 폐위를 두고 자신과 격렬히 대립하다 낙양에서 도망친 원소를 사면하고 발해태수로 임명하는 것을 비롯해 명망높은 인물들을 각지의 자사,태수로 임명했다.

물론 발언력이 높은 원소가 반기를 들 것을 경계해 어사중승 한복을 기주목으로 삼아 감시하게 하는 등 나름대로의 견제책을 세워두긴 했으나, 동군태수로 있던 교모가 동탁을 칠 것을 촉구하는 삼공부의 격문을 날조해 전국에 배포하자 조야가 들끓었고, 이에 기주목 한복은 여론이 동탁을 떠났으며 원소에게 있다고 판단하여 원소의 거병을 추인하며 원소에게 붙어버려 각군의 무력봉기가 현실화된다. 동탁에게 반기를 각 주군의 자사,태수들은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며 연합해 하내,산조에 제각기 모여든다.

당시 조조는 동탁에게서 막 벗어났고, 최종적인 관위가 중앙직인 효기교위였기에 비록 고향에 돌아왔어도 일대에서 아무런 공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으나 가재를 털어 5천의 사병을 모았고 분무장군을 자칭하며 연합에 가담해 장막,장초,유대,교모 등 연주 지역의 관리들이 집결해 있던 산조에 도착한다. (190년 1월)

3.3. 반동탁연합

제후국도 아니고 훗날의 절도사마냥 사실상의 군벌 케이스도 아니라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파견나간 관리들(삼호법에 따라 모두 현지 출신이 아니다.)이 서로 연합하고 군대를 조직해 중앙정부를 공격한 일은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이는 동탁 정권이 기존의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하고 겨우 9살이었던 유협을 사실상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웠던 만큼 그 정통성이 바닥을 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탁은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경악하였고 이에 곧바로 소제를 살해했는데 이는 소제가 연합군의 구심점이 되어 복위 운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제를 죽인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했으며, 기존의 수도인 낙양은 불태운 뒤 군사기지화 시키고 자신도 낙양에 주둔하며 하내,산조에 집결한 연합군과 대치한다.

하지만 정작 동탁과 연합군의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엄밀히 따지고보면 반 동탁 연합군은 반란군에 지나지 않았으나 원소가 연합군의 맹주가 되면서 낙양에 남아있던 원씨 일족 60명은 동탁에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살되었는데, 가뜩이나 명분이 딸리는 동탁이 원씨 일족을 지나치게 잔인하게 죽이다 보니 오히려 억울하게 해를 입었다는 동정론으로 널리 퍼지면서(..) 원소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벌어지는데, 이걸 보고 있던 기주목 한복은 원소의 위상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군량 수송을 차단해 원소의 군대를 와해시키고자 했고, 이에 원소 등 하내에 집결한 연합군은 공세는커녕 고사직전에 놓인다.

조조가 주둔하고 있던 산조의 연합군도 서로 눈치를 보며 나서지 않았는데 조조는 교전을 적극적으로 촉구했으나 장막 등 산조지역의 관리들은 이를 거부했다. [15]

조조는 자신의 병력만을 이끌고 독단으로 공격해 들어갔으나 변수에서 서영의 반격을 받아 군이 와해되었다.

군대를 잃은 조조는 양주자사 진온의 협조를 받아 양주로 가서 4천의 병력을 징병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병사들의 반란을 겪어 500여 명을 제외하곤 모두 흩어지게 된다. 이에 패국으로 가서 다시 1천의 병사를 모아 합친 뒤 천오백의 군사를 이끌고 원소가 있는 하내로 간다.

조조는 산조 연합군의 행태에 질린 것으로 보이나, 상술한 상황때문에 하내에 모인 연합군도 개판이긴 마찬가지였고 원소는 한복과 타협해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려 했지만 조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고 한다. 원소는 끝내 유우 추대를 감행했지만 유우의 완강한 거절로 실패한다.

반동탁 연합군은 초반에는 엄청난 위세를 보였지만 내부의 반목으로 동탁과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시간을 끌었고, 유우 추대로 구심점을 만드는 것에도 실패하면서 지리멸렬하게 해산되고 만다.(191년 1월.)

3.4. 연주목 시절

반동탁연합이 해산한 뒤 조조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계속 하내에 머물면서 원소와 행동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1년 7월. 원소가 한복을 협박해 기주목의 지위를 강탈한다. 당시 원소와 대립하고 있던 흑산적의 두령 수고, 우독,백요 등은 연주의 동군과 원소가 다스리는 기주 위군을 침입했는데, 동군태수 왕굉[16]이를 막지 못하고 패하자 원소는 조조에게 동군에 있는 흑산적을 치게 했고[17] 조조가 백요를 격파하고 승리하자 조조를 동군태수로 만든다.

조조는 동군을 근거로 흑산적과 황건적의 잔당을 계속 격파하며 기반을 닦을 무렵, 연주는 황건적 잔당의 공격을 대규모로 받는다. 무리는 백만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고 이를 격퇴하고자 하였던 연주자사 유대는 전사한다. 이때 조조의 부하였던 진궁[18]은 유대의 부하들을 설득해 조조를 후임자로 추대해 황건적과 싸우게 해야 한다고 했고, 제북상 포신[19]이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서면서 조조는 유대의 세력을 흡수하게 되었다.

이를 본 원소는 조조를 연주목으로 삼고[20] 조조는 황건적과의 싸움에서 포신이 죽는 등 상당히 고전했지만 결국 여러차례 승리하면서 그들의 항복을 받고 100만에 이르는 인구를 흡수하여 막대한 자산을 갖게 되었고 연주의 최강 세력으로 부상한다.[21]

한편 원소는 공손찬을 계교전투에서 대파했으나, 공손찬이 거마수에서 최거업을 격파하면서 전세가 장기화되고 있었다. 공손찬은 평원상 유비, 연주자사 선경[22], 서주목 도겸[23]과 함께 원소를 사방에서 협공한다.

위치상으로 봤을때 조조는 원소가 공손찬,유비와 상대하는 사이 선경과 도겸을 정리하고 원술을 막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이며, 공손찬 진영은 모두 격파된다.

이듬해인 193년, 유표와 싸우던 원술은 잘 풀리지 않는 남쪽 전선에 질린 것인지, 조조의 성장세에 남북으로 협공당할 위협을 느꼈는지[24]방향을 돌려 연주를 침입한다.[25] 당시 조조는 도겸을 견제하기 위해 견성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곧바로 반격에 나서 원술을 격파한다.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나 꽤 큰 규모의 전쟁이었는지 원술은 흑산의 맹주 장연과 연합하고, 흉노선우 어부라를 끌어들여 조조를 남북으로 압박했다. 조조 또한 원술을 막기 위해 원소와 공동전선을 펼쳤고 유표는 원술의 후방을 공략한 것으로 보인다.

원술이 진류군 봉구현에 주둔하며 부하장수 유상을 광정에 주둔시켰으나 조조가 반격에 나서 유상을 공격하자 원술이 친히 이를 구원하러 나서 일대 접전이 벌어졌고 여기서 원술이 참패하면서 전세가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조는 퇴각을 거듭하는 원술을 계속 쫓아 예주까지 들어갔으며 원술은 아예 예주에서의 영향력을 포기하고 양주로 달아났으며 그곳에서 재차 기반을 잡는다. (193년 3월.) 조조가 매우 승승장구하며 잘 나갔던 시기.

3.5. 장막과의 대결

한편 조조가 원술과 싸우는 사이 도겸은 천자를 자칭하는 도적 궐선과 연합하며 태산군 등 연주와 서주의 경계지역을 약탈하고 있었다. 이 무렵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도겸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원술을 격파하고 돌아온 조조는 가을부터 반격에 나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도겸을 격파하고 10여 개 성을 점령한다. 도겸은 담성을 지키며 농성하는데, 조조는 공성에 실패하자 분풀이로 시체가 강을 메울 정도로 서주민들을 학살하여 사방의 비난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서주대학살 참조.

서주대학살을 단순한 약탈로 치부하기도 하는데, 일단 규모부터가 차이가 너무 크다. 일반적인 군웅들의 약탈 기록은 대개 전쟁 중 필요에 따라 몇개 고을 정도를 약탈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서주 대학살의 경우는 후한 13개주 중 하나인 서주 전체가 초토화된 학살이었다. 이 당시 서주의 크기는 우리나라 남한보다 넓었고 기록에 따르면 '인구가 100만이 넘고 물산과 인재가 풍부한 곳'이라 되어 있었다. 거기 전체에 걸쳐 씨가 말랐다고 표현될 정도로 싹쓸이해버린 것을 일반적인 약탈이라 표현하는 것은 좀 거시기하다. 이때 죽은 사람이 기록으로만 수십만이다. 거기다 어린이, 노약자, 심지어 닭이나 개와 같은 가축까지 모두 잔멸시켜버린 것[26][27]은 분명 일반 약탈 행위는 아니다. 일반 약탈이면 가축들을 취하려 노력하지 모조리 사람이랑 같이 죽여서 강물을 막게 하진 않는다.

한편 조조가 서주 원정을 떠난 사이에, 진류태수로 조조와 연합하고 있던 장막여포를 보내 연주를 공격하자 연주는 모두 장막의 편으로 돌아선다.[28](194년)

장막의 공작에 말려들지 않고 여전히 조조의 영향권 아래 있던 곳은 동군의 범현과 동아현으로 2군도 아닌 단 2현뿐이었다. 당시 연주는 9개군 80현으로 이루어졌으니 단순하게 계산할 경우 조조는 대략 97.5%의 영향력을 상실한 것이다. [29]

조조는 황급히 철수하면서 여포가 서주와 연주 사이에 있는 태산 길목을 봉쇄한 뒤 장기전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하였으나 조조의 귀환 소식을 들은 여포는 복양에 돌아가 주둔하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해 이런 기회를 놓쳤고[30] 조조는 여포를 비웃으며 그대로 복양을 쳐서 승기를 잡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했던 것과 반대로 조조는 복양에서 여포에게 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군을 수습한 조조는 재차 공세에 나서 농성하는 여포를 100일동안 포위하다가 또다시 패배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으나 원소의 지원으로 간신히 연명하는데 성공한다.[31]

원소의 구원으로 연명에 성공했다고는 해도 여전히 조조에게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때마침 메뚜기떼가 창궐해 군량 조달이 어려워지자 조조와 여포는 서로 군대를 물린다.(194년 9월.)

한편 원소는 사람을 보내 조조를 업으로 소환했고(혹은 처자식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 조조는 이를 승낙했지만 정욱의 필사적인 반대로 태도를 고쳐 원소의 요구를 거절한다.[32]

이에 대한 원소의 반응은 기록되어있지 않으나, 이후로도 우호관계를 쭉 유지한 것으로 봤을때 조조의 연주 상실 직전까지 다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던 상하관계를 확실히 하는[33] 선에서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막 진영은 여포가 승씨현에서 반기를 든 호족 이진에게 격파당하는 등 초반의 기세를 놓치자 내분으로 지리멸렬해지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이듬해부터 반격에 나선 조조는 제음, 거야 등에서 여포를 연패시켰고, 여포는 진궁과 합류해 동민이라는 곳에서 만 명을 이끌고 조조와 결전을 벌였는데 이때 조조는 참호를 파서 병사를 숨긴 뒤 급습하여 여포군을 대파한다.

여기서 패배하자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한 여포는 서주의 유비[34]에게로 달아났고, 장막은 원술에게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양주로 가는 도중 부하에게 살해당했으며, 옹구에서 장막의 합류를 기다리다가 고립된 장초는 조조에게 포위당해 3개월동안 항전하다가 성이 함락되자 자살하면서 조조는 연주를 완전히 차지하는데 성공한다.(195년 12월.)

연주를 평정한 조조는 장막의 일족을 멸족시켰다.(195년 12월.) 장안에 있던 이각, 곽사에게 사신을 보내 정식 연주목으로 인정받은 것도 195년의 일이다.

3.6. 천자 옹립

장안 조정에서 정식 연주목으로 인정받은 조조가 여포,장막과 싸우고 있던 195년 7월에 헌제는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향했고 동승, 양봉등이 이를 호위했다.

옹구를 함락시킨 직후인 196년 1월, 조조는 예주 진국을 공격해 원술이 임명한 진국상 원사의 항복을 받았으며 조홍을 보내 헌제를 맞이하려 했으나 동승은 원술과 연합해 조홍의 군대를 저지하였다.

조홍이 실패하자 조조는 유벽,하의,황소,하만 등 원술과 연계하고 있던 예주의 황건적 잔당들을 격파하여 예주에 남아있던 원술의 영향력을 일소했으며 그 뒤에는 조조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해 한섬을 내쫓고 헌제를 영접한다. (196년 7월.)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허현으로 천도한다. 헌제가 허창으로 향하자 한섬과 양봉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요격했지만 조조에게 격파당하자 원술에게로 달아났는데, 이토록 원술이 적지 않게 헌제의 측근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정황을 보았을 때 원술 또한 천자의 옹립을 목표로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나 이때 원술은 서주를 두고 유비와의 싸움이 길어지고 있었기에 조조처럼 직접 개입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헌제를 옹립한 조조는 유비의 서주목 지위를 공인하고 진동장군,의성정후로 삼는다.

또한 조조는 황제를 통해 원소를 하는 조서를 보낸다. 원소는 장문의 상소를 써서 이를 반박하는 등 격렬하게 반발했지만 헌제에게 직접적인 반기를 들지는 않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에 조조는 대장군,녹상서사,사례교위의 직위를 차지하고, 원소에게는 태위의 직위를 내렸으나[35], 원소가 분노하며 이를 받지 않자 기세가 꺾였는지 원소에게 대장군을 양보하고 자신은 사공 겸 거기장군을 역임한다.

현대의 창작물에서는 실리적인 조조가 허울뿐인 관직에 집착하는 원소를 가지고 놀았다는 해석이 많지만, 그랬다면 조조가 관직을 독식하는 것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군벌 시대였다지만 군사력만으론 권력을 유지할 수 없고 후한의 사회체계 전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관직=권한=정치적 명분이기에 합법적인 지배체계를 통해 효율적으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관직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이며 실제로 군벌들은 대부분 관직에 집착했다.

후한서에 따르면 조조가 '크게 두려워하며' 원소에게 대장군을 양도했다고 서술하고 있고 아예 구석 특진[36]의 일부를 내리기까지 했다. 협천자 카드만 믿고 들이대던 조조가 밀당에서 원소한테 발렸다는 의견이 지배적.

하지만 천자를 옹립하기 전까지 조조는 원소에게 종속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조조를 동군에 자리 잡게 해준 것도 원소였으며, 연주목으로 승인해준 것도 원소였고, 원소가 공손찬과 싸울 때 조조는 원소에 의해 동원되어 원술을 막았다. 원술을 막을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으며, 도겸을 칠때도 원소의 지원을 받았다. 여포에게 연주를 뺏긴 것도 장막이 조조가 원소의 지시를 받아 그를 해칠까봐 두려워 선수를 친 것이었고,[37] 장막과의 싸움에서는 원소의 원군이 아니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원소가 조조에게 업에 있는 자신에게 합류할 것을 권하자 조조는 이에 응하려다 정욱의 말을 듣고 취소하는 등 종속 세력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다 천자를 손에 넣고 조정을 주무르는 권신의 직위를 획득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원소와 완전히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대장군이 된 원소는 중앙정부를 조조가 독점하는 것이 여전히 고까웠는지 허창이 습하고 지반이 낮아 침수의 위험이 높다는 이유를 들며 업과 가까운 견성에 천도하도록 권하였으나 당연히 조조도 여기까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다. 이에 전풍은 그대로 조조를 칠 것을 권하였으나 원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38]

한편 이 무렵 유비는 여포에게 배신당해 조조에게 오게 된다.

3.7. 원술,유표와의 대결

천자 봉대를 통해 더 이상 원소의 그늘 아래 있지 않음을 확실히 했으나 산재해 있는 문제는 여전히 많았다.

천자 봉대에 실패한 원술은 황제를 자칭했는데 원술의 칭제는 그저 고립을 자초할 뿐이었지만[39], 헌제를 옹립하고 있던 조조로서는 원술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허창의 지근거리에 강대한 유표가 버티고 있었고, 유표는 조조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원소 또한 북방의 공손찬을 정리하는 것에 전념하면서 조조와의 대립을 잠시 유보했지만 조만간 불화가 표면화될 것은 시간 문제가 되어 있었고, 조조가 오랫동안 빈틈을 보인다면 언제 쳐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조조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여포가 중앙정부를 장악한 조조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는 것으로, 여포는 조조와 원술 사이에서 갈등했지만 예전에 원술이 자신의 망명을 받아주지 않았던 일로 개인적인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40], 여포 자신으로서도 유비를 몰아내고 서주목을 자칭한 입장이었기에 조정에서 정식으로 서주목의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자신의 세력 내 입지를 확고히 하고 싶어했다.

여포는 원술이 사신으로 보낸 한윤을 체포해 조조에게 보냈으며 한윤이 허도의 저자에서 처형되면서 원술과 여포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 이전 조조는 먼저 유표에게 선공을 개시, 유표의 지원을 받으며 남양에 주둔하고 있던 장수를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낸다. 하지만 죽은 장제추씨를 취한 일로, 장제조카로서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낀 장수가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습격하였다. 아들 조앙, 장수 전위 등의 희생 끝에 간신히 탈출한다.(197년 1월.)

한편 원술은 여포에게 참패한 상태였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예주의 진국을 침공해 진왕 유총을 죽이지만, 그 사이에 조조가 근거지인 수춘을 함락시키면서 치명타를 입게 된다.(197년 9월.)

원술을 치는 동안 조조는 좌절감이 키운조홍을 남겨 장수와 맞서게 했지만 유표와 장수는 여러차례 후방을 교란했으며 조홍은 이를 막지 못한다. 수춘을 함락시킨 조조는 직접 남하하여 남양으로 향한다.(197년 11월.)

이듬해인 198년 5월. 조조는 장수를 양성에서 포위하였으나 유표가 배후를 끊으려 하자 철수한다. 무제기에서 인용한 헌제춘추에 따르면 전투가 길어지면서 원소가 배후를 노린다는 첩보를 들은 조조가 스스로 군대를 물린 것으로 나온다.

철수 도중 안중에서 조조는 험지에 가로막히게 되었는데 이통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조조군에 합류하였고 그 뒤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병사를 매복시킨 뒤 이통을 선봉으로 삼아 급습하여 유표의 추격군을 격파하면서 여 위기를 벗어났다.

조조는 이때 자신이 뛰어난 계책을 발휘했다고 자화자찬하였으나 허도와 맞닿아 있는 요충지 남양을 점령해 장강 이북의 유표세력을 정리하고 유표의 배후 공략 위협을 차단하는 것이 원정의 목표였던 이상 조조의 패배였고, 유표의 승리였다.

3.8. 여포와의 대결

198년 7월. 허창에 돌아온 뒤 조조는 예주목으로 소패에 주둔하던 유비와 여포의 불화를 트집잡아 유비를 도우며 이용가치가 없어진 여포를 친다. 선발대로 하후돈을 보내 유비를 구원하게 했으나 하후돈은 고순에게 패하고 유비는 조조에게로 도망친다.

198년 9월. 조조가 직접 서주로 가서 여포를 치자 그제서야 여포는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며 손을 내밀었는데, 그 유명한 여포의 배신행각을 몸소 겪은 원술로서는 충분히 질릴 법도 하건만 직접 군을 이끌고 여포를 구원하러 나선다. 오오 대인배 원술 여포는 본인이 직접 성밖에 나와 기병으로 요격하나 패배했고 원술 또한 원군을 보내기 위해 직접 출전했다가 패하면서 여포는 하비성에 포위된다.

198년 11월. 기수의 물길을 바꿔 수공을 벌이자 하비성은 침수되었고 한달이 지나 후성,송헌,위속 등이 성문을 열고 투항하면서 여포도 붙잡혀 교수된다. 이로써 조조는 서주를 평정한다. (198년)

3.9. 원소와의 대결

199년 2월, 하내태수 장양이 부하 양추에게 살해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양추는 조조에게 투항하려고 했으나 장양의 부장인 수고에게 살해당했고 수고는 원소에게 투항했다.

이때 원소는 한창 공손찬과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조조는 조인과 사환을 보내 수고를 공격하였다. 수고는 원소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조조는 원소가 대응을 하기 전에 수고를 격파하고 하내를 점령한다. 하내태수로는 그의 부하 위종을 임명한다. 원소가 역경에서 공손찬을 멸망시킨 때는 199년 3월이고, 조조가 하내를 점령하고 수고를 참수한 시기는 같은 해 4월이다.

이후 원소 남하할 때 작성한 격문에서 원소가 역경에서 공손찬을 칠 때 조조와 공손찬이 은밀히 연합하며 배후를 치려 했으나 전령이 붙잡혀 그 전모가 드러난 데다 마침 공손찬도 죽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당시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후한서에 주석으로 인용된 헌제춘추에 따르면 조조는 업을 쳐서 공손찬을 구원하려 했으나 공손찬이 예상보다 일찍 격파되었고, 원소도 조조의 의도를 파악했기에 황하를 건너 철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격주군문과 비슷하다.

이로서 원소와 조조의 대립은 노골적으로 표면화하는데 조조는 우금 등을 보내 청주의 일부인 제, 북해 등을 격파한다.

조조가 제, 북해 등을 점령한 것인지 타격을 준 뒤 철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 도시들을 공격한 이유는 태산과 황하의 좁은 길목에 있었으므로 이곳을 제압해 두면 원소군이 동쪽으로 우회해서 남하하는 것을 봉쇄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조는 관도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허도로 돌아왔으며, 이 무렵 장수가후의 조언을 듣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한편 원술은 재정적자에 시달리며 세력이 쇠퇴하자 원담이 있는 청주로 가기 위해 북상하나 서주에서 유비에게 저지당하고 병이 들어 꿀물을 찾으며죽는다.(199년 여름)

유비는 조조가 맡긴 토벌군을 이끌고 원술을 공격하러 가다 이미 원술이 죽었음을 알고 그대로 서주를 공격,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점거했으며 원소와 연합한다.

200년 1월. 동승의 조조 암살 시도가 실패한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원소에게 원군을 청했으나 원소는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는 유대, 왕충군은 격파하나 조조의 본대가 도착하자 싸우지 않고 달아난다.[41]

원소안량, 곽도를 보내 백마를 공격하였고 그 자신은 여양에 주둔하여 황하를 건너려고 하였다. (200년 2월)

여타 전들에서는 백마가 포위당했다는 서술 이후로 곧바로 조조 측이 안량을 공격한 이야기가 나와서 종종 조조가 "신속한 대응"을 통해 백마를 구원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안량, 곽도가 형성한 백마포위망은 군세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였고[42]따라서 포위망을 성급히 공격하면 안량의 군세와 더불어 원소의 주력까지 한번에 상대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조 측은 이 포위망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고 2개월 동안 이 포위망을 방관하게 된다.[43]

4월이 돼서야,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따라 군사를 나누어 원소가 머무는 여양의 배후로 기동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원소가 이에 대응하자 주력군을 직접 이끌고 백마에 주둔하고 있었던 안량을 기습하였다.

이 기습은 성공하여 안량은 관우에 의해 참수된다. 이때 관우가 안량의 목을 벤 상황에 대해 무제기에 의하면 조조가 원소군 몰래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마로 접근하였으며 안량은 조조군이 10리까지 접근하자 매우 놀라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우전에는 관우가 적진에 돌진하여 진의 가운데에 있는 안량을 참수하였다고 하는데 이 공적은 이 교전 중에 나온 상황으로 보인다.[44]

조조가 안량의 포위망을 격파하였지만, 원소군의 본대는 황하를 성공적으로 도하하여 연진 일대를 장악[45]하였다. 조조는 백마를 지키는 것을 사실상 포기하고 백마의 백성을 이주시키고 서쪽으로 향했는데, 연진의 남부에서 선봉대인 문추군과 전투를 벌였다. 5~6천의 기병으로 구성된 문추군을 상대로 조조군은 말을 풀어놓아 혼란에 빠진 듯 위장하여 문추군을 유인한 뒤 격파한다. 문추는 전사한다.

두 차례의 승리가 있었으나 상황은 그다지 조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조조는 연이은 승리에도 원소의 본대와 맞붙는 것을 회피하고 관도로 돌아갔으며, 원소군은 또다시 진군하여 양무에 주둔했다.

8월, 원소가 진영을 연결하여 차츰 전진하여 사산(沙山)에 의지하여 둔영을 삼으니, 동서로 수십리였다. 공 또한 진영을 나눠 서로 당해내게 하였는데, 합전(合戰)하니 불리하였다.[46]

"합전하였는데 불리했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대전의 초반부 어느정도의 승리를 거둔 조조가 원소와의 정면승부(회전)에서 패배하였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의 여백이 생긴 이유는 진수가 양측이 둔영을 설치한 뒤 벌인 교전에서 조조가 패배한 상황을 누락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진수가 조조가 패배한 전투를 누락하고 철수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은 무제기에서 일관적으로 보인 모습이다. 가령 진수는 여양전투, 적벽대전의 전투를 생략하고 조조가 철수한 사실만을 기록한 바 있다. 거기다가 "불리하였다"는 적벽대전에서도 마찬가지의 용도로 쓰인 바가 있으며, 이어지는 서술은 "조조군의 극심한 부상병 비율"과 관도에서의 농성전이다.[47]

'동서로 수십 리에 이르는' 원소군의 진영에 대항하여 마찬가지로 진을 펼칠 수 있었던 조조[48]는 이 '불리하여 관도로 퇴각'한 사건 이후로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 당시의 상황은 무제기의 다음 묘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때 공의 병력이 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부상당한 자는 열에 두셋이었다."[49]

이렇게 조조는 당시 세력범위의 절반에 해당하는 예주 전역의 지배권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는데, 예주는 황제가 있는 허도가 위치한 지역임을 고려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예주에서는 오로지 양안군만이 여전히 조조를 지지할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군 내에서 원소에 호응하는 인물들(구공, 강궁, 심성)이 나타남으로써 불안정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이통전, 조엄전).

예주 전체에서 일어난 반란과 지배권 상실로 조조군은 이후 군량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원소군의 보급선에 대한 공격으로 남은 보급라인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임준전). 또한, 원소의 본적이 있는 여남군에서는 선비와 문객들이 들고일어나 원소의 편에 붙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원소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중랑장 공손독을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원소는 계속 진군하여 관도에서 버티는 조조와 공성전을 벌였다. 원소는 토산(土山)을 세우고 땅굴을 팠고, 조조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둔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이때 조조 측에서 투석기를 만들어 반격하니 그 이름을 벽력거라 했다.

세력 내부에서의 반란이 가속화되고, 조조의 본대가 급격히 피폐해져 공성전에서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조조군의 내부에는 원소와 밀통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조 암살 미수사건까지 발생했다.

  • 조조의 호사 중 하나인 서타가 조조의 암살을 시도하나 허저에 의해 좌절된다. - 허저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조조는 순욱에게 천도를 고심하며 의견을 묻는다. 순욱은 조조에게 버틸 것을 간언[50]했고 조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계속해서 관도에서 버티게 된다. 사실 이제 와서 천도를 한다고 한들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조조는 이미 친원소 세력에게 포위되어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받아들여 서황, 우금, 사환 등을 투입해 원소군의 군량 수송을 공격하여 수천 수레를 불사르는 데 성공한다.

이후 우금은 두지진에 단독 주둔하며 연진 남쪽에 있는 원소군의 별영을 공격하는데, 수천 명의 병사를 죽이고 스무 명이 넘는 장수들을 항목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조조군의 숨통은 조여진 상태 그대로였다. 이러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원소 측의 군량이 부족하다는 묘사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조조 측이 군량 부족으로 오늘내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황이 본격적으로 호전된 것은 허유가 갑작스레 항복해 오소에 군량이 집결해 있다는 발언을 한 뒤인데, 조조는 허유의 귀순이 너무나 반가웠기 때문에 맨발로 허유를 맞았다고 한다.[51] 여기서 허유는 조조와 만나 조조에게 오소의 위치와 병력을 알려주었는데[52] 이것은 중대한 군사 기밀이었다.

guan1.jpg
[JPG image (Unknown)]


10월. 조조는 원소로부터 투항한 허유에게서 정보를 얻어 보기 5천과 함께 오소를 기습하였다. 이때 배송지가 인용한 주석인 조만전[53]에 따르면 조조군은 원소군으로 군기를 사용하는 등 원소군으로 위장해서 원소군의 진영을 그대로 무사통과 했다고 한다.

원소는 군량 수송하는데 1만을 파견하였고 저수는 조조가 군량을 노릴 것으로 생각하여 원소에게 추가 병력을 따로 보내자고 말하지만, 원소는 이 조언을 물리친다.[54] 조조는 직접 보기 5천을 이끌고 오소에 숙영하는 오소를 급습하였고, 허를 찔린 순우경은 우세한 병력으로 맞섰으나 패배하였고 그는 조조에 생포되어 코가 잘리는 신세가 된다. 조조는 오소의 군량을 불태운다.

오소가 공격받는 첩보는 원소에게 도착하였고 원소는 기병을 구원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이르기 전에 오소는 이미 함락되었다.

원소는 오소를 구원과 동시에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기 위해 장합과 고람을 보냈는데 이들은 순우경의 패배를 알고 조조 측에 항복해 버린다.

그 뒤로 원소군이 갑자기 붕괴해버리고 달아나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오소가 불탔다는 사실만으로 원소군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소와 원소의 총 패배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무제기, 원소전이 아닌 다른 기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순유전에서 장합과 고람이 아군 측 진영을 공격하여 불지르고는 조조군에 투항해 버린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장합과 고람은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의사 표시로 원소군에 불질러버리고 원소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55][56]

결국 오소의 함락과 장합, 고람의 이탈 등의 일련의 사건으로 그날 밤 안으로 원소의 군대는 완전히 붕괴하고, 조조는 7만에 달하는 포로를 잡아 그대로 파묻고 소와 말까지 다 죽여 보냈는데, 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 악행 중 하나로 손꼽힌다. 물론 그 상황에서 조조가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200년, 8월)

3.10. 하북 평정

201년 4월, 조조는 창정에서 원소군을 또다시 격파해 관도에서 패한 원소의 잔류세력을 완전히 연주에서 몰아내고 황하 일대에서 군사 시위를 벌인다[57] 다만 창정의 전투에 대해서는 무제기에서만 간략히 언급되고 있고 다른 기전엔 전혀 기록이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조는 연주에서 원소군을 완전히 쫓아냈고 관도전투의 여파로 기주의 여러 군현에서 원소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조조에게 투항하는 곳도 다수 있었으나 조조는 황하를 건너 원소와 정면으로 싸우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여겼으므로 순욱의 진언에 따라 황하 강변에 따로 군대를 주둔시켜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허도로 돌아온다. 한편 원소는 남은 군을 수습한 뒤 반란이 일어난 군을 모두 평정한다.

이렇게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두 세력간의 영토 변동이 거의 없었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해 그를 격파한다. (201년)

원소가 사망하고 원상이 그 뒤를 잇는다. 원담은 관도대전의 전초기지였었던 여양에 머무르며 거기장군을 자처한다. (202년)

조조가 황하를 넘어 북상하자 원상과 원담은 협력해서 싸우고 203년까지 봄까지 계속된 싸움에서 조조는 우세함을 점하여 업성까지 전진한다. (203년, 3월)

하지만 갑자기 조조가 군을 이끌고 허도로 돌아오는데 정황상 조조가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조는 허도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여태껏 패배한 장수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앞으론 책임을 묻겠다"는 명을 포고했기 때문이다.[58] 또한 장료전에서는 업까지 진군했으나 원상이 굳게 지켰으므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기술이 있어 조조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는 데다, 제갈량의 후출사표에서도 여양 전투는 조조군의 대표적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후한서에서는 조조가 업까지 계속 진군했으나 원상이 이를 역격해 깨뜨리자 허도로 퇴각했다는 기술이 있다. (203년, 5월)

조조는 유표를 공격하였다. 조조가 떠나자마자 원담원상이 내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59]

원상에게 연패한 원담은 평원성에서 포위되었고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하였고[60] 이것을 핑계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한다. (203년, 10월)

조조는 업을 포위했고 심배는 업에서 6개월에 걸쳐 버티며 원상의 원군을 기다린다. 조조는 심배를 회유하고자 회담을 열었으나, 심배는 회담지역에 몰래 다수의 노병을 배치함으로써 조조를 저격한다. 조조는 낙마하여 다쳤으나 이후의 행보를 볼 때 큰 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61]

원상은 원군을 이끌고 도착했고 조조은 원상이 조조의 포위망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성내와 호응되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원상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전장 외각의 산으로 올라가 포진한다. (204년, 4월)

이 때문에 조조는 주력을 원상에게 보내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격파당한 원상은 진영이 포위된 상태에서 몸만 탈출하여 달아나고 원상의 군은 괴멸된다. 뒤이어 업성은 결국 함락된다.[62] (204년, 8월)

조조는, 그 뒤 북상하여 원담을 공격하였고 원담은 남피로 달아난다. 남피에서 원담좌절감으로 성장한 사나이에게 생포되어 참수되고 원상, 원희는 오환족에게 달아난다.

그 해 8월 오환족이 지금의 북경 인근까지 침입하자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해 격파한다. 그때 병주자사로 있던 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한 상태였는데 조조가 오환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반기를 든다. (205년)

조조는 군을 이끌고 병주에 도착하여 고간을 석 달에 걸친 싸움 끝에 격파한다. 그 뒤 군을 이끌고 지금의 산둥 반둥 인근으로 이동하여 해적 관승을 격파한다. 그 뒤 그 인근에서 운하 건설에 착수한 뒤 자신은 업으로 돌아온다. (206년)

조조는 군을 이끌고 유주로 이동하여 오환을 정벌하려고 하였다. 200리 정도 북상하여 백랑산에서 오환족과 결전을 벌여 승리한다.(곽가전주의 계책) 원상, 원희는 공손강에게 달아났고 조조는 유성에서 머물렀는데 공손강이 이 형제를 참수한 뒤 머리를 보냈다.[63] 조조는 이곳에서 11월까지 머문다. (207년)

3.11. 적벽의 대전

조조는 업에 도착하여 현무지를 파서 군대를 조련한 뒤 유표를 공격하러 떠난다. 유표는 공교롭게도 조조가 이동할 때 타이밍 맞춰 죽는다. (208년 7월)

조조가 신야에 도착하자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하구로 달아나 손권과 동맹을 맺는다. (208년, 9월)

조조는 그대로 남하하여 적벽에서 손유 연합군과 싸운다. 조조는 애초에 형주를 공격할 생각이었고 또 유표가 조조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으므로 항복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었으므로 손권과의 전쟁은 계획에 없었던 일임이 분명하다.

아마도 조조는 생각보다 쉽게 형주가 점령되자 내친김에 손권도 항복시키자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때문에 적벽에서 맞붙었는데 겨울에는 전투를 벌이는 것은 드문 일일뿐더러 조조군은 먼 거리를 행군하여 지쳤고 수전에 익숙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전투는 조조가 직접 지휘하긴 했으나 수군을 지휘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한 주유와 유비는 뛰어난 군략가였다. 주유는 양자 간의 압도적인 전력 차를 화공으로 역전시켰으며, 유비와 연합해 조조군을 무찌른다.(적벽대전)

조조는 적벽에서 상당한 손실을 보았는지 점령한 형주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대로 철수한다. 장병의 희생을 무릅쓰고 화용도를 황급히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위급했던 것으로 보인다.[64]

조조는 남군에 조인을 남겼는데, 적벽의 손실로 조인은 소수 병력만 가지고 주유와 유비에게 맞서야 했다. 조인은 일년을 버티나, 마침내 남군을 버리고 달아난다. (208년, 12월)

조조는 적벽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은 후유증 때문에 내정에 전념하며 군사 행동을 중지한다. (209년, 210년)

3.12. 마초와의 대결

211년 조조는 종요를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조조가 관중을 노린다고 판단한 지역 제후들이 연합하여 반기를 든다. 마초한수가 이들을 이끌었다.

7월,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 이들과 싸운다. 이때도 조조는 자신의 장기인 허허실실의 계략을 써 주력이 동관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눈속임 한 뒤 위수를 건넜고, 그 뒤 결전을 앞두고는 최대한 허약한 것으로 위장하여 그들을 방심하게 한 뒤 결정적일 때 전력을 쏟아 이들을 격파한다.

이때, 조조는 수레와 목책으로 진영을 쌓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등 군세를 약하게 보이고 적이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는 등, 군세를 일부러 약한 것처럼 눈속임한 뒤에 전투를 벌여 일시에 힘을 집중시켜 승리하였다.

또한 이때 모래를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엘사?![65]

마초가 격파된 뒤 안정까지 군을 이끌고 이동하여 양추의 항복을 받아낸다.

3.13. 유수의 싸움

조조는 봄에 업으로 돌아간 뒤 그해 가을에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한다. (212년)

조조는 손권을 유수구에서 격파한 뒤에 조공을 받기로 약속받는 선에서 철수한다. 그 뒤 그 해 자신의 세 딸을 헌제에게 시집보낸다.

한편, 서량에서 패퇴했던 마초는 강족을 데리고 양주를 침입한다. (213년)

그러나 마초는 금방 패배하고 한중으로 달아난다. 한편, 그 틈을 타 한수도 저왕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나 하후연이 이를 제압하고 한수는 서평으로 달아난다.

7월, 조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손권과 싸우기 위해 남하한다. 1년 전의 싸움과는 달리 이 싸움에서는 조조군이 패퇴한다.

그 해 말, 조조가 업으로 돌아왔을 때 복 황후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사로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어 복 황후와 그 일족(복완 및 목순)이 몰살당하는 일이 생긴다.[66](214년)

3.14. 장로 공격

헌제는 조조의 딸 조절을 새 황후로 삼는다.[67]

조조는 장로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때 장로뿐 아니라 저족과 한수도 조조에게 맞섰는데 두 달에 걸친 싸움에서 이들은 패배하고 한수는 참수된다.[68] (215년, 3월)

장로는 격파된다. 이때를 틈타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하는데[69] 장료는 소수로 맞서 이를 격파한다. (215년, 7월)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다. 때를 마쳐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다.[70] 사마의유엽이 조조에게 그대로 촉을 공격하라고 권하나 조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업으로 돌아간다.[71][72] (215년, 10월)

조조는 한중에 하후연을 남기고 자신은 업으로 돌아와 위왕이 된다. 당시 흉노와 오환족의 고위 관리들이 조조와 헌제를 만나고 우호 관계를 다진다. 그리고 그 해 말 조조는 다시 군대를 출병하여 손권을 공격한다. 조조는 종요를 상으로 삼는다.[73] (216년)

3.15. 한중 공방전

조조와 손권은 유수구에서 맞붙어 손권군을 격파한다. 손권은 조조에게 조공을 보내기로 하며 화해를 청했고 조조는 이에 응하여 군을 물린다. 조조는 화흠을 어사대부로 삼는다.

그 해 말, 유비가 장비, 마초, 오란을 보내 한중을 침공한다. (217년)

1월, 경기와 위황 등이 허도에서 반란을 일으키나 조조에 의해 진압된다. 이때 이들은 헌제를 장악한 뒤 조조가 역적이라는 조칙을 내리게 한 뒤 유비를 불러들이자 하였다.[74][75]

이때 실질적인 군사력은 조조가 장악하고 있었고 조정의 주요 요직도 조조의 친위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계획이 설령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조조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당시에 살았던 관료들이 이러한 계획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을 보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가 알려진 것 정도까지 튼튼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76]
덧붙이자면, 조조는 이 사건을 빌미로 문무백관의 절반 이상(수정바람)을 숙청한다. "불을 끈 자는 붉은 깃발 아래로, 집에 있었던 자는 하얀 깃발 아래로 가라."라고 한 뒤, 붉은 깃발 아래에 있던 사람을 모조리 참살하라고 시킨 것(연의 한정인지 수정바람). 이후 허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진짜 정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한중에서 조홍이 오란을 격파하고 참수하는 데 성공하나 장비가 장합을 격파하고 유비가 직접 북진하여 하후연과 싸운다.

10월,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한중을 향해 이동한다. 이때를 틈타 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켜 완성을 점령하고 관우와 내통한다. 이러자 남군에 머물던 관우는 이에 호응하여 북진한다. 조인은 이때 번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완을 포위 점령하고 후음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 뒤 북상한 관우와 조인은 한수를 가로질러 서로 대치한다. (218년)

하후연이 한중에서 황충에게 전사한다. 조조는 뒤이어 한중으로 이동하였으나 하후연의 죽음으로 요충지는 유비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때문에 불리한 형세였다. 조조는 다섯 달에 걸쳐 유비군과 싸우나 이기지 못했고 결국 한중을 내주고 철수한다. (219년, 1월)

3.16. 번성 공방전

장안에 도착한 조조는 우금에게 원군을 주어 조인군에 합류시킨다.

그러나 우금의 지원군과 조인군은 한수가 범람하여 수몰된다. 결국, 우금은 포로로 잡히고 조인은 번성으로 탈출하다 관우에게 포위당한다. 조조는 곧바로 서황에게 군대를 주어 원군으로 보낸다.[77] (219년, 7월)

업에서 상국으로 있었던 종요위풍을 고용하였는데 위풍은 몰래 사람들을 모아 업을 점령할 것을 모의한다. 하지만 이에 가담한 사람 중 하나가 조비에게 밀고하여 이 반란은 진압되고 종요는 면직된다. (219년, 9월)

조조는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손권이 밀서를 보내 관우를 기습할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는 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는데[78] 그가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미리 관우를 격파하였고 번성의 포위가 풀리게 되었다. (219년, 10월)

손권이 관우의 머리를 보낸다. 얼마 안 있어 조조는 낙양에서 죽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220년, 1월)

사후 아들 조비에 의해 무왕(武王)으로 추존되었으나 얼마 후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태조가 보통 나라를 세운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인데 반해 조조가 받은 것을 보면 그 인간성 개차반인 조비도 아버지의 업적은 인정했던 듯.

4. 조조의 능력

4.1. 군사적 능력


(관도에 있는 조조의 기마상)

조조의 군사적 업적에서 한 가지 결점은, 통일 왕조를 건설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후한 말과 그 후를 묶어 흔히들 위진남북조 시대라고는 하지만, 당연히 나라는 중국사에서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다만 진의 전신인 만큼 삼국을 대표해 쓰는 것일 뿐. 중국 역사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남북조시대의 북조 국가 중이나, 오대십국시대의 5대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이 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북조 국가들이나 오대 왕조들이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위는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는다.

중국사 전체를 볼 때 최고의 군사 군주로 꼽히는 것은 항우, 한고조, 후한 광무제, 당고조/당태종, 송태조/송태종, 태조 주원장 등 당대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군주들이다. 이들은 당대에 거의 자력으로써 전 국토를 통일하고 완벽한 통일 왕조를 건설했기 때문에 최고의 평가를 받지만, 조조는 이들과 비슷한 종류의 군사 창업 군주이나 통일 군주가 아니라는 결점 때문에 평가가 다소 깎인다. 대표적인 것이 당 태종 이세민과 명장 이정의 병법, 군략부분 문답인 '이위공문대'다. 여기서 조조의 군사적 역량을 따지고 보면 별로 뛰어나지 않다고 평했다.

물론 이는 통일 군주들과 비교해 볼 때 결과적으로 따지면 그렇다는 것이다. 유비조차 정사삼국지에서 "임기응변과 재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조조의 군사적 능력은 이 시대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4.1.1. 병법

조조의 군사적 식견은 높은 수준이었다.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

그가 손자병법에 한 일은 내용을 고치는 것보다는 당시까지 있었던 일화들과 보충 설명들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문장만으로도 격조 높으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주석들은 손무라는 걸출한 병법가의 기본 틀과 함께 손자병법을 병법서 이상의 책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반면 조조의 행적이 손자병법의 주요 사상인 총력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전략가로서의 조조를 그리 높게 보지 않는 관점도 있다.

이문열은 '구체적으로 이런 평을 했는지 언급한 바는 없으나 조조가 쓴 계략의 요체를 허허실실(虛虛實實)로 보는 사람이 많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조조는 자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주로 기습적인 전략과 기만책을 통해 전황을 타개해 승리한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 다만 이러한 경향 때문에 조조 측에 우위가 있을 때는 상대방을 확실히 밟아버리지만 상대쪽에 조조만한 전략가나 저력이 있을 경우 거꾸로 조조가 한심하게 탈탈 털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즉, 병법의 3대요소인 천시(天時) - 지리(地利) - 인화(人和) 중 천시, 그러니까 하늘로 대표되는 운에 크게 기대는 기병책(奇兵策)에 기운 부분이 많았다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연주에서 여포를 상대로 한 결전에서 둑 안에 절반의 병력을 숨겼다가 전투가 무르익자 이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승부를 결정지었다.
  • 무제기 배송지주 위서 - 다음 날 여포가 다시 오자 태조는 둑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군사는 둑 밖에 두었다. 여포가 점차 진격하자 영을 내려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싸움을 걸게 했다. 서로 맞부딪치자 복병들이 일제히 둑 위로 오르며 보기(步騎-보병과 기병)가 함께 진격하여 여포군을 대파하고 북과 수레를 노획했다.

유표장수의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는 땅굴을 판 뒤 복병을 두어 이미 군이 달아난 것처럼 속인 뒤 급습해 추격을 물리쳤다.
  • 무제기 -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안량을 상대로 했을 때는 의 배후를 향하는 시늉을 하다 불시에 급습하였고,(순유의 계책)
  • 무제기 -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공이 이 말에 따랐다.
문추를 상대론 짐수레를 풀어놓아 문추군이 이것을 포획할 때를 기다려 급습하면서 패배시켰다.
  • 무제기 -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또한, 마초와 싸울 때도 평상시에는 병력을 허약하게 보인 뒤,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전력을 쏟아 그를 격파시켰다.

여담이지만 마초와의 전쟁은 기일을 정해놓고 평지에서 양측의 군대가 대결해서 결판냈는데 이것은 중국사에 몇 안 되는 회전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

아쉽게도 연의에서는 회전 사실을 아예 누락시켰고, 정사에서는 매우 간략한 나머지 어떤 전술을 썼고 어떤 식으로 포진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는다. 다만 '먼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호기(虎騎)를 풀어 협격(夾擊)하여 대파했다.'라고 당시에 활용된 전술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게 남겨져 있다.

이 협격이 어떤 식으로 이루었는지는 설명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만약 기병이 배후로 움직여 아군과 싸우는 적군의 보병 라인을 향해 돌진한 것이 맞았다면 이것은 망치와 모루 전술을 구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사서의 전투 기록은 서양과 달리 대단히 간략한 편이지만 중국인들도 망치와 모루 전술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거나,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가령 오기병법에서 응변 편을 보면 '1개 군은 정면에서 적을 고착시키고, 1개 군은 적의 배후로 우회시켜 퇴로를 차단하며, 또 2개 군은 은밀히 적의 좌우를 습격한다.'라고 망치와 모루 전술의 유사 개념을 말해 놓은 부분이 있다. 물론 조조군의 기병이 어떤 식으로 협격했는지에 대한 사서의 기록이 너무나 간략하여서 정확한 판단은 어렵다.

4.1.2. 친정중시

조조의 군사 전략에서 문제점은 두가지를 들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 친정 중시이며 다른 하나는 친족 중시이다. 다만 이는 순수하게 군사적인 결점이라기보다는, 조조 세력이 가진 정치적 문제로 인한 한계가 군사적 측면에서도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조는 다른 지역을 침공할 때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하북 정벌, 오환 정벌, 형주 정벌, 강동 정벌, 한중 정벌이 모두 조조의 친정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비가 관우장비 등의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점령하게 하고 관우가 독자적으로 형주 북쪽 지역을 침공한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조조 자신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신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친정의 결과도 악화되는데, 형주 정벌을 마지막으로 적벽대전한중공방전이라는 두 결점을 남기면서 영토 확장이 좌절되게 된다.

이는 조조가 스스로 한 왕조의 군주로서 과업을 수행한 다른 통일 군주들과는 달리 한 황실을 등에 업는 '협천자'라는 정치적 입장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통일 군주들은 그 자신이 '천자'이기 때문에 유능한 군사 인재들을 마음껏 기용할 수 있었으나, 조조는 자신의 휘하에 포용할 수 있는 인재에 한계가 있었으며 재능은 둘째쳐도 '군공'을 나눠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곤란했다. 만일 한 지역을 정복하는 거대한 정벌 계획을 조조 이외의 인물이 나서서 수행하고, 그 인물이 성공을 이룩하게 된다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조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권을 손에 놓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전쟁에 나서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정치적 입지가 손상되었다. 후한과 공존하는 막부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상, '조조의 대안'이 될 만한 장수가 나타나면 그는 후한 조정을 등에 엎고 또 다른 '협천자'를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했다. 따라서 노년의 나이에도 친정을 하고, 항상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측면이 그 유명한 영웅문답에서 조조가 유비를 자신과 같은 '영웅'으로 평가한 이유일 수도 있는데, 이 당시 후한에서 관위 최고위는 원소로서 대장군으로서 관부를 열고 하북 4주를 모두 통치할 권한을 가졌으며, 조조는 사공(司空), 행(行)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서 독자적인 막부(幕府)를 열 수 있었다. 그런데 유비는 비록 객장 신분이었지만 좌장군으로서 역시 막부(幕府)를 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3품 좌장군은 2품 거기장군보다 낮은 지위이지만, 상하관계가 아니라 헌제에게 정식으로 받은 고위급 장성인 '사방장군'의 일원이라는 점에서 정통성이 매우 높은 지위이다. 유비는 협천자 노선 진영임에도 조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독자적으로 '군벌'을 갖출 수 있는 지위와 세력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세력 규모나 정치력이 조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런 점에서 유비는 헌제 진영에서 여차하면 조조를 제치고 '조조의 대안'으로 올라설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조조로서는 ''으로서 어차피 물리치고 배제해야 할 원소, 원술, 유표, 유장 등보다 오히려 현 시점에서는 '아군'인 유비가 자신의 '라이벌'이 될 수 있다는 견제 심리를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여기서 유비와 조조가 다른 점이 드러나는데, 같은 협천자 지향임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정치적인 부분 외에 임협집단 특유의 인화(人和)로 휘하 장수들을 묶어놓고 있었기에 조조와는 달리 인재를 적극적으로 쓰는 데에 부담이 없었고, 이는 조조보다 상대적으로 미약한 세력임에도 그가 조조에게 있어서 성가시거나 혹은 대등한 상대로 자리잡는 한 원동력이 되었다.

4.1.3. 친족중시

조조는 군사 분야에서는 조씨, 하후씨 친족을 매우 중시했다. 항장이나 이성의 숙장들을 대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족 장수들을 우위에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항장들을 감독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역시 다소 불안정한 정치적 입지에서 만에 하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군을 장악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씨, 하후씨 일족에는 그 지위에 걸맞는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도 많았지만, 상당히 역량이 부족한 인물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봐도 정사에서 그 지위에 걸맞는 수준의 '군공'은 찾기 어려운 조홍하후돈이 대표적인 사례이며,[79] 비교적 명장으로 꼽히는 하후연 역시 한중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직후 조조 자신이 하후연의 사령관으로서의 역량 부족을 한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후연은 야전사령관으로서는 훌륭했지만 전선사령관으로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문제점이 조조의 군사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기는 하다. 조조는 상당히 자주 내부 반란에 시달렸는데 서주 공방전 와중에는 여포를 앞세운 진궁, 장막이 일으킨 본거지 연주에서의 반란으로 거의 죽을 뻔 했고, 협천자 이후에는 후한 황제와의 마찰로 인해 여러 차례의 반란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동승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후한 내에서의 반 조조 반란은 조조가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군권을 꽉 집기 위하여 친족을 중용하는 정실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는 황제의 권력 강화를 위해 친족들을 의도적으로 핍박하고 권한을 깎아내렸으나 이는 조조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러한 문제점을 간과한 행동이었고, 이로 인해 조비와 조예가 세상을 떠난 뒤 조위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사마씨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만다. 또한 사마씨의 서진 정권은 위의 몰락을 단순히 친족들의 권한 약화 부분에만 주목한 나머지 자신들은 반대로 친족들에게 지나친 군사력과 정치적 권한을 나눠주었다가 팔왕의 난을 초래하고 말았으니, 둘 다 피상적인 판단으로 인해 정치를 그르쳤다고 볼 수 있다.

4.1.4. 과감성

장단점이 있는 것은 과감성이다. 조조는 일견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과감한 공격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도대전, 오환정벌 등에서는 이러한 과감한 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위기를 자주 겪기도 했는데 동탁을 추적하다가 서영에게 대패를 당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 그 사례이다. 역시 과감하게 나섯던 적벽대전에서는 보급 문제, 질병 문제가 겹치면서 무너지게 된다.

원소를 쓰러뜨린 이후에는 그전의 조심성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만해져서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원가의 잔당을 토벌할 때는 필사적으로 원담과 원상의 사이를 가르는 이간계를 쓰고 조심하면서 과감하게 싸웠던 조조가 손유동맹과 싸울때는 괜시리 손권에게 허세를 떨지 않나, 패배 이후 형주를 떠날때 병사를 충분히 남겨놓지 않고 떠나자 유비가 오면 어쩌냐는 유파의 말에 '''그럼 내가 친히 육군[80]을 몰고 와서 막겠다는 말을 해서 유파를 벙찌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조에게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원가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하고, 상당히 강력했던 유표의 잔당마저 흡수한 뒤라서, 남아있는 손권과 유비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4.2. 제도 정비


(하남성 허창시 '위무제광장'에 세워진 조조의 석상)

4.2.1. 둔전제

조조의 제도 정비 능력은 중국 전체의 경제적 체질의 강화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둔전법(屯田法)으로서 전한 시절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법을 모개(毛玠, ?~?) 등이 새로 정비한 것이다.

종전의 둔전은 국가 주도로 변방 등에 신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뿐이었으며 주로 병사들의 군량 자급자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반면에 조조는 민둔(民屯)이란 것을 두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배치해 전쟁 직후 황폐한 땅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 세율은 개인 소유의 소를 사용한 자는 수확량의 50%, 관의 소를 사용할 땐 60%라는 가혹해 보이는 것이었으나 생산량 자체의 증대와 전관(田官)을 통한 중앙정부의 직접적 통솔로 중간과정을 생략하여 그 이상의 수취가 없도록 하였다.[81]

이는 풍족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백성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이후 마련된 막대한 양의 물자는 위의 전략적 우위를 늘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시절에 완성된 둔전제는 이후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의 각종 토지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고려 시대의 토지 제도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4.2.2. 호조법

조조는 200년 전후로 호조법을 시행한다. 그전까지 중국은 개별 단위로 인두세를 부과해 한 명마다 세금을 적용했으나, 조조는 개별 수취에서 호(戶)단위의 가족 집단 하나로 치환해 세금을 부과해서 과세 부담을 줄였다.

호 단위로 부과하는 전통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다만 이건 족징이나 인징 등이 가미되어서 좋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전쟁을 치르며 내지(內地)의 양곡으로 외지(外地)의 군사와 국민을 부양하는 데는 조조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수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공헌도 컸다.

4.2.3. 구현령과 한계

'구현령'을 내려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시행한 것은 널리 알려 있다. '덕행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겠다.'라는 선언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한 시절에는 관직을 뽑는 절차를 "효렴"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의 덕행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 덕행이란 게 결국 사대 호족 내에서 나눠 먹기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구현령을 '유교 도덕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의 선발'이라고까지 하는 등의 입발린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떤 시대에나 그렇듯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재능보다 덕이 부족한 인재가 더 널렸고, 바보가 아닌 이상은 '유력가의 추천'을 받는 인재가 발탁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조조마저도 그러한 시스템의 한계에서 벗어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현령은 실제로 이루어진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실질보다는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위의 현실 정치에서 구현령은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였다. 어차피 관리 선발 기준은 한 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며, 후대의 과거 제도나 시험 선발 같은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선포되었음에도 구현령이 현실 정치에 미친 적은 편이다. 사실 조조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보면 어디 유명한 가문의 누구라는 경우가 꽤 많으며 인물을 추천하여 등용한 인물이 지인을 추천하여 등용시키는 다단계 피라미드비제도적 등용체계였다.

그나마 조조 생전에는 창업 군주만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전권과 실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난세의 현실 때문에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인재나, 예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인재들이 적지 않아 광폭한 인재풀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의 지위를 얻으면서 점차 인재풀이 고착화 되는 과정이 나타나게 된다.

결국 조조 사후의 조비 시대에 이미 기존의 호족 집단에서 공신 계층을 이루면서 성장한 문벌 귀족들이 고위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위나라의 성립 이후에는 더욱 더 명문가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게 되고, 예외적인 사례는 등애 정도만 남게 된다. 이런 풍조는 위진남북조 시대 중국 정치계를 대표하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 계급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문벌'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계통부터 청류와는 거리가 멀어 미묘한 측면이 있었던 조씨의 세력은 흔들리게 된다. 조예 이후의 조상 정권에서는 조씨, 하후씨와 인척들이 모여서 정권을 형성하고 귀족들과 대항하게 되지만, 결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마씨에게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소를 따라 위를 뒤집어엎은 자들은 순욱, 종요, 신비, 화흠, 왕랑, 가규 등의 후손이었다.

혹독한 법치를 수행한 까닭에 성질이 가혹했던 조비의 밑에서는 법률의 가혹함으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82] 하임없이 백성을 이주시켜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83]

재밌는 건 조위의 이런 체제 특성이 공산주의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 무엇보다 오래 못 갔고, 인민들을 마구 강제노역, 강제이주 등으로 굴리기 일쑤였으며, 문벌귀족/공산당 등 소수의 파벌이 권력을 독점해서 체제가 경직됐고, 생각보다 삶의 질 자체는 좋았는데 자유가 없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컸다. 게다가 구체제(유가사상 및 한왕조/제국주의, 로마노프 왕조)를 엎고 이런저런 신 정책과 사상(구현령, 공산주의)을 내세워서 신체제, 혁명적 체제임을 강조했는데 실상은 별로 그렇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사람을 엄청나게 살상해서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위 치하에서 편하게 사는 길은 진등 같이 애민적인 정치가를 만나는 일인데 이건 운에 달린 일이다. 덕분에 진등이 다른 영지로 가게 되자 노인들까지 진등을 따라가려고 했다고 한다.

4.2.4. 원호법

조조는 관도대전, 적벽대전 등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영을 내려 자신을 위해 죽은 장병들의 자손이 없으면 친척으로 대를 잇게 하였으며 가족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 주고 밭갈이 소를 공급해 주며 학교와 선생을 둬서 죽은 사람들의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묘당을 지어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하여 전사자의 가족 중에서 살림이 궁핍한 이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것을 명하여 체계적인 원호법을 사실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4.2.5. 그 외

  • 개인적 무예와 용력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젊은 시절 십상시 장양의 집에 난입해 칼부림을 마구 벌였는데 검술 솜씨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절륜하여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다는 기록이나, 반동탁 연맹에 참가했을 때 병사들이 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머물던 장막을 불태우자 조조는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던가 하는 기록이 위서에 남아있다. 그 외에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도 있고 남피에서 사냥할 때 꿩을 63마리나 잡았다는 기록도 있다. 전쟁터에서 오래 굴렀지만 무예에는 소질이 적었던 유비와는 제법 대조되는 부분이다. 물론 조조, 유비 둘 다 수레에 탄 채로 다른 보호장치 없이 사자 같은 맹수를 사냥하는 일을 즐기던 전사 일족 손가에 비하면 살짝 딸리긴 한다(…).
  •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격무 중에 크게 아프거나 병치레를 한 기록이 없다. 조조닭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챙겨먹으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그 시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고 의학수준도 매우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60대 중후반까지 살았던 조조는 고대인으로서 상당히 장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위무제 주석 손자병법 등을 볼 때 잘 나간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오만하고 자뻑기질이 있었던 듯하다(…). 손자병법 주석 중에 "병사가 10배가 있어야 능히 이길 수 있다는 건 적군의 능력이 나와 비슷할 때 얘기다. 나는 두 배의 병사만 가지고 하비성에 틀어박힌 여포를 잡았다"라고 적어놓았다(…). 동작대 건설 때에도 자신이 열심히 한 덕분에 천하가 안정되었다고 자랑한 바 있다.
  • 문화적으로 참으로 다양한 취미와 재능이 있었던 듯하다. 여자와 노래, 시 읆기를 좋아하는 문화인답게 술도 좋아했는지 술의 레시피를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이것이 구온춘주. 후일까지 황실에 진상하는 명품이 됐다.
  • 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쓰던 갈관(葛冠)이라는 모자 대신에 백갑이라는 모자를 만들어 위진 시대에 백갑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외모가 뛰어났다는 기록은 미화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찾아내 마구 부풀리는 왕조의 개창자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없으나, 붉은 옷으로도 유명하다. 즉 당대의 패셔니스타.하지만 전장에서는 미친짓
  • 박물지에 따르면 한말에 금석金石 음악이 실전되었으나, 한중에서 두기(杜夔)라는 인물을 얻어, 헌현종경(軒懸鐘磬)을 설치하고 음악 연주법을 다시 보급했다고 한다.

4.3. 문학

조조는 시와 서화에도 매우 뛰어났고, 이러한 재능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흔히 조조, 조비, 조식 세 사람을 통틀어 삼조(三曹)라 부른다. 이 중 조식은 이백이 출연하기 전까지 중국 문학의 일인자로 손에 꼽혔다. 조조가 중국 문학에 완전히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시인으로만 평가해도 위인이라 하는데 실제로도 그러하다.

조조 시절의 문학을 건안 문학이라 한다. 특징으로는 지금까지 있었던 문학들과 달리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였으며 화자의 개인적 감상을 적극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있다.

그전의 시들은 유가적 취향이 강하여 현실을 도외시하였으며 부(賦)라는 형태의 매우 긴 문학이라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조조는 수도에 문인을 모으고 자신도 오언시[84]를 많이 지었다. 대표적으로 보출하문행, 단가행 등이 있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개성을 부여한 건안 문학의 풍토는 이후의 중국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 필두에 서 있던 사람이 당시의 위정자였던 조조였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한편, 마오쩌둥이 조조의 시가를 좋아했다고 알려졌다. 마오쩌둥이 조씨 삼부자의 시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조조의 시이다. 조조의 시는 대인배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한다.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던 편으로 글씨가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평가받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직 존재하는 유일한 글씨가 있는데 석문잔도의 곤설(袞雪)이 그것이다. 소용돌이치며 튀는 물방울이 마치 눈과 같다 하여 쓴 것으로 필체에 호방할 뿐 아니라 재치가 들어간 글씨로 평가받는다. 袞 자는 본래 滾으로 쓰여야 하지만 이에 대해 누가 물으니 바로 옆에 물이 흐르니 삼수변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더불어 滾과 袞은 통가자[85]로 袞을 사용해 재치를 더하고 雪과의 균형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는 댐 건설로 본래 글씨가 있던 곳은 물에 잠겼고 글은 그 이전에 떼어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석문잔도에는 복사본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삼수변이 사라진 셈.

이런 조조의 예술가 자질은 군주로서는 실로 돌연변이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중국사에서 군주가 천재적인 예술가 자질이 있던 케이스는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암군, 폭군 테크를 타 나라를 말아먹었다. 물론 조조도 폭군 소리를 들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라를 망치긴 커녕 창업군주 수준의 업적을 쌓았는데, 조조만큼 천재 예술가로서의 자질이 있으면서 정치와 행정일도 잘본 인물은 거의 없다. 예술가 기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거덜나게 만든 (휘종), 스스로 예술가로서 한 가닥 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별거 아닌 수준(건륭제)이었던 케이스나 여럿 존재할 뿐. 중국사의 군주중 조조만큼 예술가로서도 뛰어난 인물을 굳이 찾아본다면 선덕제 정도?

여담이지만 시청자들로부터 역대 조조 중 최고의 조조라거나, "내가 이 아저씨 때문에 이거 다 봤음. 진심 연기력 쩜..."이라는 식의 호평을 받은 드라마 삼국의 배우 진건빈 씨는 조조를 연기하게 되었을 때 처음엔 조조에 관한 여러 가지 책도 읽고 평가도 읽었다가 전부 때려치웠다고 한다. 이유는 글쓴이의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에 조조의 시를 여러 번 읽고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원래부터 조조의 시를 좋아했을뿐더러 다른 이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정확히 조조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란다.

4.4. 도교

조조는 원시 도교에 상당히 심취해 방술(方術), 즉, 도교의 영향을 받은 연단법이나 방중술을 좋아하여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박물지에는 조조가 끌어모은 방사의 이름이 16명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좌자, 화타의 이름도 끼어 있다. 조식의 글에도 천하의 방사들을 위왕이 모두 불러 모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일설로는 같은 활동을 태평도, 오두미도와 같은 민간 도교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하여, 유교와 병행되는 국가 종교로서 도교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관에서 주도하는 일종의 '관방도교'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으로, 민간에서 영향력이 많은 '방사'를 위나라 조정으로 끌어들여서 후한 말기처럼 도교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대신 국가와 협력하도록 만들어 사회 안정을 꾀했다는 것이다.

조조의 조치는 후세의 관방도교 같은 체계적인 형식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는 황실이나 귀족들 가운데서도 도가 사상, 연단술, 방중술에 심취한 인물이 많이 나타났다. 조식은 도교를 옹호하는 "변도론"을 저술하였으며, 조조의 양자인 하안은 연단술을 활용하여 오석산을 만들었다. 세설신어에는 귀족들 가운데서도 태평도 식 부수(부적을 태운 물) 수행을 하는 사람들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서 도가 사상과 도교 수행이 더 이상 민간의 반체제적 문화서브컬쳐에 머물지 않고, '상류 계층'의 고상한 문화로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육조 시대로 이어지는 국가 주도의 관방도교-귀족들의 노장사상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5. 외양

후대의 이야기책에 조조가 작고 왜소했다는 식의 기록이 종종 있기 때문에 조조의 풍채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이 떄문에 오덕물에서는 간사하게 생긴 미소년 풍으로 그려지거나 모에화하여 로리로 표현된다 보통 창업군주를 묘사할 때 외양을 실제보다 높게 기술해주는 편인데, 조조의 경우 그런 묘사가 없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신하로 위장하고 최염을 왕좌에 세워서 왕 노릇을 하게 한 후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는데, 그 사신에게 나중에 위왕의 풍채가 어떠냐고 묻자, 그 사신이 "위왕은 대단히 위엄이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칼을 들고 시립하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조조가 그 사신을 위험하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외교절차에서 저런 장난을 친다는 것부터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당대에 외모의 가치가 크게 평가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는 별개로 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86]

6. 성격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며 기지가 뛰어났으나 소위 양아치 짓을 많이 해서 주위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조조가 젊었을 때 의협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건석의 숙부를 때려죽인 일, 제남의 상으로 부임하자마자 사당을 모두 때려 부순 일, 십상시가 권력을 농단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버린 뒤 계속 임관을 거절한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이 당시에는 조조도 후한 말기의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영제에게 당시의 폐단들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십상시들이 득세하던 조정에서 그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고, 왕분이 영제 폐위를 권유했을 때도 가담하지 않았다. 왕분은 계획이 실패하자 자살했다.

영제 사후, 하진이 부르자 임관하였고 동탁이 권력을 장악하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또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할 때 조조만이 홀로 추격하다 격파당했고[87], 훗날 원소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을 때도 조조는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한다.

다만 이는 헌제 자신이 "순전히 군벌인 동탁의 의지만으로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조조와 원소의 황제에 대한 시각차를 보여주는 것이지, 조조의 한 왕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보긴 어렵다. 원소는 군벌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헌제는 정통성이 없는 괴뢰정권에 불과하므로, 인망이 있고 자타공인의 신망이 있던 황족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한 것이며, 조조는 과정이 어떠하건 황제는 황제이니(황제가 두 명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현재의 황제를 인정하자는 쪽이었다. 순전히 정략적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까지 아무래도 원소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조조가 독자노선을 걸으려면 이에서 벗어날 만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일화는 연의에서 상당수가 누락되었는데 이문열은 본인의 삼국지에 조조에 대한 호감 때문인지 상당량을 지면에 소개한다.

계속 말하지만, 관우가 자신을 떠나갈 당시 추격하려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는 것이니 쫓지말라.'라고 하는 모습 역시 조조의 도량과 배포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반대로 한중 정벌전에서 자신을 도와준 양송을 처형한 것 역시 같은 맥락.

인명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는지 학살과 대규모 처형은 거리낌 없이 하였다.[88]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서주대학살. 그 외에 항복한 원소군 8만을 생매장한 일,[89] 마등과 동승, 복왕후의 일족 등 반란이 일어나면 구족을 멸하는 등 꽤나 대규모의 학살을 지시했다. 학살이 아니더라도 손권이 쳐들어온 것을 막는다고 강제 이주를 명령했다가 오히려 백성들이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90]

능력이 있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서 자신과 악연이 있었던 인물이라도 과감하게 기용하는 면이 있었다.

진림 같은 경우는 조조의 3대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는 글을 썼는데도 살아남아 순조롭게 출세한다. 일단 시위를 떠나면 화살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며 대답하자, 조조는 자신을 위한 화살이 되라며 설득한다.
조조는 자신이 죽을 당시에 시녀들로 하여금 재봉하며 스스로 먹고살라고 했다. 당시에 왕이 죽으면 시녀들에게 자구책을 마련해 주기는커녕 쫓아내기만 해도 양반이고, 심지어는 왕이랑 같이 묻어버리는 극단적인 일도 존재했다.(…) 훗날 에서도 황제가 죽고 나자 조선 출신의 여인에게 순장을 요구했고, 그래서 그 여인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반면에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들에게는 냉혹한 일면이 있었다. 당대에 기재로 칭찬받던 양수공융을 죽인 걸 시작으로[91] 모함을 받은 최염이 노비 신세가 되었는데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하고 사람을 보내 때려죽이게 했다. 예형은 명성 때문에 죽이기 껄끄럽자 유표에게 보냈고,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허유나 누규 또한 불손하게 굴었다가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92][93] 그의 이러한 냉혹한 일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순욱에게 빈 도시락을 보낸 일화[94]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 말년에 들어서는 약간 까칠해져서 모함으로 인해 감옥에 갇힌 최염의 태도가 뻣뻣하다하여 별다른 이유 없이 죽이기도 하였고 장송에 대해서는 그에게 필요없이 교만하게 굴었다가 촉을 자신에게 복속하게 만들 기회를 놓치기도 하였다. 거기다가 최염의 동료였던 모개 또한 밀고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다른 동료들의 변호로 관직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이후 모개는 병을 얻어 죽게된다.

사실 조조의 대인배적인 모습은 적벽에서의 패배 이후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그 빈도가 줄어드는 모습이 보이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순욱, 최염 등이 석연찮은 죽음을 당했고 장송에게 소홀한 대접을 하는 등의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이를 적벽에서의 패배로 천하통일의 기회를 놓친 뒤, 권력에 더더욱 집착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황제와 비슷한 특전을 누리는 구석을 받으려 하거나, 위왕(魏王)이 되려고 하는 등 권력에 집착하긴 했다. 그런데 그건 아들내미가 황제가 되게끔 멍석을 깔아준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면 복잡하고 이중적인 면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 그릇은 크다고 평할 수 있다.

7. 여자 관계

유부녀 너무 좋아

처녀 상태로 조조에게 시집을 왔던 정씨는 조앙이 죽었을 때 그와 이혼하고 고향에 내려갔다.[95] 조비의 모친이자 훗날 왕후가 되는 변씨는 가기 출신이다.

세어에 이르면 조조와 원소는 고을에 시집가는 아가씨를 몰래 보쌈해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 때 원소가 다리를 다치자 조조는 "신부 도둑놈이 여기 있다!"라고 외치고 자신은 내뺐다고 한다. 이에 원소는 뒤쫓아오는 사람들을 보고 다리 아픈 것도 잊고 달렸다고 한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조는 첩들이 무척 많았다. 이 때문에 자식들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환갑을 넘어서 본 막내인 조간은 조비를 보고 이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이상하리만큼 유부녀와 관련이 깊다. 이 탓인지 2차 매체에서의 조조는 인처 모에(…)로 그려지는 일이 잦다.그 젖절한 예시(...) 당연히(?) 아버지만큼이나 유부녀에 하악하악한 아들 조비도 함께. 부자가 쌍으로 인처모에

장수를 토벌할 때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건드려서 조앙과 전위, 조안민이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여포를 토벌할 때 관우가 여포의 수하인 진의록의 처 두씨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보니 미인인지라 조조 자신이 취했다.[96]

원희의 처 진씨를 아들인 조비가 취하자 이를 부러워했다고 한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개혁가 조조' 등의 긍정적 영웅 이미지답게 '그 아버지에 그 아들' 하고 피식 웃는다.

조비 등과 형제처럼 자라난 하안의 어머니는 하진의 며느리인데 조조의 첩이 되었다.

연의에서는 과부가 된 대교주유의 아내인 소교를 탐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건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주유를 격동시켜 주전론을 펴기 위해 애꿏은(…) 조식의 동작대부를 바꿔서[97] 부른 것이기 때문에 실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드라마 삼국에서는 제갈량이 '조조는 인처 모에니까 마누라 조심하세요' 라는 드립까지 덧붙인다.(…)

다만 당시는 난세였기 때문에 남편이 일찍 죽은 아내&적 측에 약탈당한 아내도 많았으며, 결혼 연령도 현대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았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워낙 난세다보니 온 나라에 과부가 넘쳐났고(…) 크게는 호족들 간의 정략결혼, 작게는 국력을 위해서 과부들이 수절하기보다는 개가해서 애를 낳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만연했기 때문에 개가하는 사례는 많았다. 예를 들어, 당대의 유명한 여류 문학가 채염은 여러 사유 때문에 무려 4번이나 결혼을 했다.근데 조조가 채염은 왜 안 데려간 건지 의문을 품는 견해도 있다. 물론, 이런 이유가 있다고 해도 당대 조조 정도의 위치나, 조조가 맞이한 과부들에게 정략적 이유도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의 취향 외에 굳이 과부를 취할 이유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 또한 분명하다.

여성이 많다보니 자식이 꽤 많은데#, 리그베다 위키에 등록된 자식은 조앙, 조삭, 조비, 조창, 조식, 조웅, 조충, 조우, 조간 (나이순)[98]

8. 조조의 무덤

조조가 72개의 무덤을 만들어 자신의 사후 무덤이 파헤쳐지는 걸 막았다는 건 연의의 순수한 허구. 정사에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파헤쳐지는 부장품 따위 묻지 말고 서문표(西門豹, ?~?, 신사를 때려 부수고 착취를 막은 전국시대 위나라의 관리)의 사당 곁에나 묻어달라고 말하곤 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업중가(業中歌) 마지막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글줄 깨나 하는 자들아, 가볍게 무덤 속의 사람을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무덤 속의 그가 되려 그대들을 같잖다 비웃으리라

연암 박지원의 저서 "구외이문(口外異聞)"이런 기록이 있다.

"1748년에 청(淸) 황제(=건륭제)가 장하(張河)에서 고기잡이를 하는데, 헤엄치는 자가 별안간 허리가 끊어져 물 위에 떠오른다.
황제가 군졸 수만 명을 풀어 그 냇물 옆을 파서 물을 돌리고 살펴보니, 물 속에는 수많은 쇠뇌에 살이 메워져 있고 그 밑에는 무덤이 있었다.
드디어 발굴하여 한 관(棺)을 얻었는데,
은해(銀海)와 금부(金鳧) 등의 부장품(副葬品)도 있거니와
황제의 면류관(冕旒冠)과 옷차림을 갖추었으니, 곧 조조(曹操)의 시신이었다.
황제가 친히 관묘(關廟, 관우묘) 소열(昭烈, 유비)의 소상(塑像) 앞에 나아가 그 시신을 꿇리고 목을 잘랐었다."

이는 비단 천고 신인(神人)의 분통을 씻은 것뿐만이 아니라, 쾌히 70총(塚)의 의안(疑案)을 깨쳤다"[99]

하지만 이런 기록은 거기에만 있을 뿐이지.. 청사(淸史)나 청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모든 사서에도 그런 기록이 없다. 설사 그런 일이 있다면 기록을 왜 생략(生略)시켰을까?

2009년 12월 말에 허난성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8.1. 발굴 내용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
http://jayb4show.egloos.com/2285821

위 내용을 요약하면, 조조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무덤규모가 왕후의 것이라는 점
2. 유물의 연대가 후한~북위 시대라는 점
3. 고분의 위치가 문헌과 일치함
4. 조조의 유언대로 부장품이 대체로 소박하다는 점
어떤 사람은 "보물 몇백 개가 발견되었으니 장례를 소박하게 하라는 유언은 구라아님?"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보물 몇백 개'라는 표현은 한국의 언론이 과장한 것으로, 정확히는 '유물 200여 점'이다. 착한 위키니트라면 '보물 몇백 개' 같은 과장된 표현에 속지말자(…).
5.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 주인의 연령이 60대 전후로, 사망 당시 조조의 나이(66세)와 거의 일치한다
6. 결정적으로, 무덤에서 '조조꺼라능' '위무왕상소용OOO(위무왕이 평소에 쓰던 OOO)'라고 새겨진 명문이 발견됐다!

이 정도면 충분히 조조의 무덤이 맞는 듯하다.고 하면 좋겠지만, 아래와 같이 의문점들이 나오고 있다.

8.2. 의문점

워낙 무덤 주인이 유명한 사람이고, 1,800년 만에 발견된 탓인지 꽤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미 돚거도굴꾼이 다녀갔다는 점, "72개의 가짜 무덤설"이 널리 알려진 탓에 가짜가 아닌지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 학계에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72개 가짜 무덤설은 후대의 창작임이 명백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도굴을 막겠다고 가짜 무덤을 72개나 짓는다는 건 무척 어리석은 짓이다(…). 그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참고)

첫째, 아내인 변씨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변씨는 태황태후가 된 후 사망하여 조조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따라서 조조의 무덤에서는 변씨의 유해와, 태황태후의 무덤에 당연히 들어갈 태황태후의 인새가 발견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조조의 무덤에서는 변씨의 유해도 태황태후의 인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인새는 도굴당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해가 발견되지 않는 점은 치명적이다. 조조의 무덤에서는 조조 이외에 40대 여자와 20대 여자가 발견되었는데, 이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맞는다는 쪽에서는 40대 여자가 바로 변씨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변씨는 사망 당시 70세였으므로 어불성설이다. 또한, 조조의 무덤에 다른 여성들이 합장되었다는 기록도 없으므로 40대 여자와 20대 여자의 정체도 알 수 없다.

둘째, 조조의 위무제로서의 인새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조비가 황제가 되고 조조를 위무제로 추존한 후, 조조의 무덤은 조조의 유언에 따라서 검소하게 만든 것이므로 조조의 무덤 자체를 다시 화려하게 꾸미거나 하지는 않고 다만 그 앞에 석실을 추가로 만들어 금으로 만든 인새를 보관했다고 한다. 금새 자체는 도굴되어 없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금새가 보관되어 있었을 석실조차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문제이다.

셋째, 조조는 공경과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는 포상의 의미로 자신의 무덤에 배장하도록 했다. 따라서 조조의 무덤 주변에는 공신들의 무덤 여러 기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무덤은 단일묘이며 주변에서 다른 공신들의 무덤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넷째, 조조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진주와 마노 등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조조의 무덤이 맞는다는 쪽에서는 그 정도의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충분히 검소한 무덤이라고 주장하지만, 기록에는 단순히 검소하게 장례를 지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조조의 유언에 따라 구슬 종류는 전혀 넣지 않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섯째, 조조의 무덤은 구조 자체가 후한시대의 천자나 왕의 무덤 양식과 맞지 않는다.(#) 이 점이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조조의 무덤이 진짜라고 주장한 쪽에서 조조가 천자의 예우로 안장되었다는 점에서, 조조의 무덤 양식이 후한말의 고등급의 묘장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조의 무덤이라고 하는 벽돌무덤은 어디까지나 후한시대의 '고등급'의 묘장 형태이지 왕후에게 걸맞는 '최고등급'이 아니다. 무덤이나 그 부장품은 간소하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덤의 구조를 낮은 등급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조조를 격하했다는 의미가 되므로 이해하기 어렵다.

여섯째, 조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석패 전부가 실제로 학자들이 조조의 무덤에서 발굴한 것은 아니다. 도굴범들에게서 이러한 석패를 압수하고 해당 무덤에서 도굴했다는 진술을 받았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들이 사실은 그들의 '영업 기밀'에 해당하는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거나 위조된 것이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조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위무왕"이라는 말이 새겨진 석비는 위조된 것이 분명하며 진품일 수 없다는 주장이 대두하여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조조의 무덤에서 위무왕이라는 이름의 석비가 출토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이는 조조가 위무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조조의 시호는 어디까지나 무왕이지 위무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조조는 살아생전에 위왕이었지만 사후에는 무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므로 위왕에서 무왕으로 호칭이 변한 것이며, 더 이상 위왕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위왕이라는 작위는 엄연히 조비가 계승했으며,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 시호가 아닌 살아있을 때의 명칭으로 호칭하는 것은 결례에 해당한다. 따라서 무덤의 석비에서 위왕이라고 칭할 이유가 없다는 것.

더구나 조조를 위왕도 아닌 위무왕이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조조가 위왕이었다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한나라에서 위왕의 작위를 받은 것이지 위나라라는 독립된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므로, 그가 받은 시호도 말하자면 한의 무왕이지 위의 무왕이 아니다. 즉 살아생전에는 한의 위왕이었다가 죽으면서 한의 위왕 자리는 조비에게 물려주고 한의 무왕으로 바뀐 것.

후대에는 그를 위무제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이는 조비가 위나라를 세운 후 조조를 태조무황제로 추존했기 때문이며, 무제가 아닌 위무제라고 부르는 것은 위나라가 멸망한 후에나 쓰이는 명칭이고 위나라 당시에는 그냥 무제라고만 호칭했다. 즉 한나라가 남아있을 때는 그는 무왕이며, 위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무제이고, 위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위무제가 된다는 것. 위무왕이라는 칭호는 어느 시대에도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위무왕이라는 명칭이 새겨진 석비는 후대의 조작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물론 이 설명만으로는 조조의 무덤이 아닌 다른 '위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은 있지만, 시대가 맞는 적당한 후보가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학문상 충분히 제기될 만한 의문점으로 보인다. 어쨌든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명확하게 밝혀질 듯하다. 하남에서 발견되었다는 무덤은 2기의 한묘이며, 그중에서 2호 묘만을 발굴한 상태이고 1호 묘는 열어보지 않은 상태이다. 논란이 종식되려면 1호 묘의 발굴 결과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 같다.

8.3. 진행 상황

여러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지만 결국 2010년 1월 29일, 중국 국가 문물국에서 조조의 무덤임을 공식 인정했다.(#) 전세계 조조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우왕ㅋ굳ㅋ 했으면 좋겠지만, 이 발표를 수긍하는 고고학자는 정말 드물다.[100] 위와 같은 의문점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국가 문물국에서 서둘러 발표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까이고 있다. 틀림없이 이권이나 인맥 때문에 억지로 저렇게 우기고 있다는 것.

중국에서는 역사적인 이름이 있는 곳이 관광지로 큰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는 벌써 관광자원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면 청두에 있는 소열제릉이 유비의 무덤이 거의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동시에 사천성에서 여러 곳에서 자기네 땅에 유비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도 유비의 이름을 팔아 관광지로 뭔가 이득을 좀 보자는 것.

2010년 6월 14일의 뉴스에 보면 조조의 시신이 훼손된 걸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정적중 일부가 조조의 시신에 해코지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부분도 오히려 부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위나라 당시에는 조조묘를 엄중하게 경비했고 위가 망한 이후에는 72 허묘 전설이 생겨났을 정도로 조조묘의 위치는 금세 망각되었다. 누가 언제 조조의 시신을 훼손할 수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이 허묘전설도 실은 조조 생전에 이미 기획된 일일 가능성이 있다. 만약 정말로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묘를 지키고자 한다면 허묘를 만들기보다는 허묘가 있고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풍문을 만들어내는 쪽이 훨씬 더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집트의 경우만 봐도 피라미드에서 왕가의 계곡으로 매장 방식을 바꾸었건만 끝내 도굴을 막지는 못했고, 반대로 칭기즈 칸의 묘는 아예 묘를 만든 병사들을 모조리 도륙했다는 프로파간다[101]를 퍼뜨림으로서 오히려 칭기즈 칸의 무덤에 대한 터부를 일으켜 무덤의 위치를 알 수 없게 했다는 것.

9. 연의와 그 이후 창작물에서의 평가

嶪中柯

城則鄴城水彰水,定有異人從此起。
雄謀韻事與文心,君臣兄弟而父子。
英雄未有俗胸中,出沒豈隨人眼底?
功首罪魁非兩人,遺臭流芳本一身。
文章有神霸有氣,豈能苟爾化為群?
橫流築臺距太行,氣與理勢相低昂。
安有斯人不作逆,小不為霸大不王?
霸王降作兒女鳴,無可奈何中不平。
向帳明知非有益,分香未可謂無情。
嗚呼!
古人作事無鉅細,寂寞豪華皆有意。
書生輕議塚中人,塚中笑爾書生氣!

업중가

그곳의 성은 업성(鄴城) 그곳의 물은 창수(彰水),
남다른 사람이 그곳을 따라 일어나니
웅대한 지략으로 멋진 일을 하며 문장도 뛰어나고
주군과 그 신하들은 마치 형제와 부자 같았구나
영웅은 가슴속에 속된 것이 없으니
그 출몰을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따르랴
공로도 으뜸 죄악도 으뜸 따로 두 사람이 아니라
악취나 향기나 본래 한 몸에서 다 나왔네
그의 문장은 신묘하고 패기가 있었으니
어찌 구차하게 다른 인재들과 섞이랴
흐르는 물을 가로막고 동작대를 쌓아 태행산과 겨루고
기(氣)와 이(理) 형세 따라서 때때로 낮아지고 높아졌네
어찌 이런 사람이 반역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작게는 패자(覇者), 크게는 왕이 되지 않았으랴!
그러나 패왕도 죽게 되니 아녀자처럼 울며
어쩔 도리 없이 마음속으로 불평했네
제를 올려도 부질없음을 잘 알고
향수를 나눠줬으니 무정하다고 말할 수 없네[102]
오호라!
고인이 일을 할 때 크고 작음에 구애 없었고
적막하거나 호화롭거나 모두 의미 있었는데
서생들은 무덤 속 사람을 함부로 의논하지만
무덤 속 사람은 이런 서생을 비웃을 것이네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웅이라고 조조를 극찬하고 있다. 소설 연의에서는 한쪽 측면으로만 평가하기 어려운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연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대체로 악역으로 묘사된다고 해도 멋없게 묘사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관우와의 관계도 연의에서 더 자세히 발달하였다. 기존의 삼국지 평화에서는 화북으로 가는 관우를 괘씸히 여겨 옷을 내리는 척하고 붙잡으려 했지만, 관우가 언월도로 옷을 받아 벙찌거나, 화용도에서도 갑자기 안개가 껴서 조조가 돌파하는 등 관우와의 관계는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관우의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고, 화북으로 가는 관우를 송별하고[103], 화용도에선 루쉰에 의하면 대문학자가 아니고선 쓸 수 없다고 극찬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조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탄생된 순간.

그덕에 그전까지는 평면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나왔으나, 연의에서는 선과 악, 인정과 비정이 섞인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완에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전위를 위해 눈물을 흐르는 선한 모습과 이에 반면에 수춘에서 군량이 부족하자 군량 배급 담당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는 간사한 모습이 있다.[104] 어찌 보면 사실 연의가 정사에 기록된 조조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105]

현재와 같은 입체적인 조조의 인물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에는, 아마 배송지가 주석을 다는 데 쓴 사료인 조만전(曹瞞傳)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이 된다.

조만전에서 담고 있는 조조의 캐릭터가 이상적인 창업군주로서 윤색된 모습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에 충실하고 경박해 보이는, 동시에 냉혹한 면도 있는 입체적인 조조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정사의 조조에 호감을 느끼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아무튼 혇내의 인식과는 다르게, 조조는 연의가 나오기 전부터 악역으로 유명했으며, 청대에 출간된《요재지이》에선 죽은 뒤에 개가 되어 나타나거나, 1000여 년이 지나도록 지옥에서 (죄상에 걸맞은) 형벌을 못 정하는 통에 애꿎은 볼기짝만 계속 맞으며, 심지어는 홍수에 무덤이 박살 나서 유골이 산산조각이 나는 등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새로운 해석을 해야 하는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기존의 주인공인 유비보다 더 멋있는 캐릭터로 묘사될 때가 잦다. 다만, 유비도 과거의 유교 배경이 아니라 몸으로 뛰는 군주로서 지배자로서의 입지가 많은 조조와는 서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함께 수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유교(유가)를 배척한 것으로 묘사될 때가 잦지만, 사실 유교는 중국문명의 근간이기 때문에 간단히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유가)와 법가를 병용하는 것은 한나라 이후 중국정치의 기본이었고, 조조 자신도 지식인인 이상 유교의 주요 경전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유교사상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측면도 있다. 공융을 죽일 때는 불효했다는 죄목도 포함해서 죽이기도 했다.

조조를 한나라를 부정한 혁명가, 개혁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대표적으로 이문열 삼국지), 기본적으로 조조는 한나라 황제를 극진하게 모시는 입장에서 정치를 했다. 헌제를 끼고 한나라의 승상이라는 명분을 십분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끝까지 한나라의 신하로서 살다가 죽었다. 이렇다 보니, 조조의 정치성향은 집단주의가 상했던 조위의 성향을 제외한다면, 말 그대로 한의 제도를 물려받아서 조금씩 고쳐 쓴 정도에 가깝다. 이렇게 조조를 개혁자로 추켜올리는 주장에서는 유비를 상대적인 보수주의자로 보는 의견도 있는데, 유비도 그 사람의 배경보다는 능력을 중시했고, 변방이었던 촉에다 상당한 개혁조치와 안정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괜히 서로 라이벌로 취급한 게 아니다. 다르면서도 의외로 닮았으니.

사실 조조의 행적을 보면 처음에는 주인공 같을진 몰라도[106] 천자 끼고 원소 박살 낸 시점에서 최종보스가 되기 때문에(…) 조조가 주인공인 작품은 필연적으로 픽션으로 후반부를 꾸미거나(삼국지 조조전) 후반부에 방향이 엇나가게 된다(창천항로).

요시카와 에이지의 판본을 토대로 삼아 신동우 화백이 삽화를 그린 16권짜리 삼국지(박홍근 감수)에선 역시 후반부 조조의 꼴사나운 모습에도 카리스마 넘치는 삽화와 화려한 붉은 옷[107]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여기서도 후반부에는 인상이 험상궂게 변하고 살이 찌는 등 망가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인간을 초월한 듯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근데 만화가 워낙 조조빠라서 그냥 개그로 보이기도 한다.

10. 정사의 평가

"임기응변과 적을 헤아린 기모(奇謀)는 일개 장수로의 지혜로는 남음이 있었지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재주에는 모자랐구나!" -당태종 이세민. 고구려 원정 직전 업성에서 조조에게 제를 올리며.[108]

훗날 중국에서는 '조조=역적, 변절자, 악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그 인식이 점점 짙어졌다. 민중들은 조조를 싫어했기 때문에 연극에서 조조가 패배하는 장면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조조를 연기했던 연극인이 관객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있었다. 연의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역사가들로부터 나쁜 놈 소리를 듣고 있었고, 세월이 흘러 청나라 건륭제가 조조는 역적이라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했다.

사실 서주대학살을 보면 당대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당연한 거다"라고 하는 조조 빠 또는 위빠들도 간혹 있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간인들을 강이 막힐 정도로 죽이는게 당연한 거란 말인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저질렀는데도 말이다.[109] 현대인이 과거의 이런 대학살에 얼마나 무심한지 보여주는 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진수마저도 이 부분에선 살육이란 단어를 쓰기까지 했으며, 형주의 10만 백성이 유비를 따라간 건 조조의 이때의 악명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관도대전 때에도 원소군 8만 명을 그대로 생매장했다고 한다. 진순신의〈소설 제갈공명〉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는 이유를 어릴 때 겪은 서주대학살로 풀이하기도 한다. 하여튼, 조조가 많은 인명을 뺏었다는 것 때문에 원혼들의 원성을 사 후손들이 요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니 그 악명은 자자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첫째인 조앙은 아버지를 대신해 죽었고 조비는 뒤를 이은 지 6년, 그리고 40세도 안 돼 죽었고 그 손자인 조예도 35세로 요절했는데, 지금보다 훨씬 비과학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던 당시 사람들은 당연히 조상이란 놈이 그 모양이니 자식들이 천벌을 받았다는 식의 미신적인 해석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거기다가 반평생을 함께 일한 순욱이나 모개, 명사로 이름 높았던 최염등을 납득하기 힘든 방식으로 죽이거나 숙청했기에 사대부들 입장에서도 편하게 보긴 힘들었을 것이다.

덧붙여 조조가 모금교위와 발구중랑장이라는 관직까지 만들어 도굴을 했다는 이야기가[110] 진림의 격서에 나오며, 이 역시도 당대에 비난받은 이유 중 하나. 문화재 도굴꾼을 국가단위로 운영해서 부장품을 팔아치우는 일을 했다고 받아들이면 조조가 대충 어떤 일을 한 건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조조를 좋아했던 탓인지, 현대 중국을 중심으로 조조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현대에는 이러한 조조 악당론에 대립하는 영웅성을 강조하는 조조론이 인기를 얻고 있다. 마오쩌둥 자체가 조조에 비교되기도 한다. 문필가이자 군략가, 그리고 때로는 매우 비정하다는 점에서. 조위 시대의 집단주의적인 정치 공사도 그를 연상하게 만드는 바가 있다.

11. 그 외

조조에게 유비는 경계대상이 아니었다며 유비를 까는 조조 빠들도 간혹 보이는데, 정작 정사에는 조조가 유비는 인걸이니 없애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제장들의 반대에도 직접 서주로 가서 유비와 싸웠으며, 무제기에는 유비를 영웅으로 여기고 걱정하는 조조의 모습이 몇 번이나 나온다. 게다가 원소가 하북을 평정한 당시 여포한테 쫓겨나 자기 신세를 지고 있는 유비에게 세상의 영웅은 너와 나뿐, 원소는 여기에 끼지도 못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라이벌 의식도 확실히 느낀 모양. 물론 이 항목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원소(120여 회)고, 그 다음이 유비(65회)다(손권은 20여 회). 유비의 경우는 더욱 극명한데 관우, 제갈량, 장비가 30여 회 나올 때 조조가 무려 220 회 등장한다(…). 참고로 손권은 60여 회.

조조는 중요한 싸움에는 손수 지휘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유비가 이릉을 제외하고 큰 패배를 당했을 때는 거의 항상 조조가 상대였다[111]

중국에서의 평가는 위에 적었듯이 대대로 간웅, 역적 등에 가까웠지만, 현대에 들어서 그 평가가 바뀌고 있다. 곽말약이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라고 평하며 복권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평가라고 해도 한동안 악당의 이미지가 이어졌지만[112] 이후에는 그것도 조금 줄었다. 하지만 백성을 학살한 인물이 민중적 혁명아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이러니하기 때문에, 여전히 마오쩌둥 같은 냉혹한 지배자로서의 면모가 강한 편이다. 강제사역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심지어 조조가 여자란 설도 있다(…). 조조 TS 모에화 다만 공자식인설 제갈량 위선자설 등처럼 망상 수준이다.

실사 매체를 보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드라마 삼국의 조조는 인재를 아끼는 등의 특유의 큰 그릇과 감정이 풍부한 모습, 재치를 발휘하는 모습 등이 크게 부각되었고 영화 삼국지 명장 관우(원제 관운장)에서는 상당한 대인배로 묘사된다. 장문강이나 맥조휘 감독들은 인터뷰에서 "삼국연의에서 가장 폄하된 인물을 뽑으라면 조조를 빼놓을 수 없다."라고 했다.

배우를 봐도 이런 이미지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이전의 조조는 위의 동상들에서 볼 수 있듯이 84부작 삼국지삼국의 진건빈에 가까운 외모로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장풍의(적벽대전), 강문(삼국지 명장 관우), 곽부성(무신전)[113] 등 이미지가 다양화되고 있다. 진건빈과 강문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이미지가 다르다.

중국 요리 중에는 조조닭이라는 음식이 있다.갈비만 남은 닭이 아니다 일화는 하비에서 주둔하던 조조가 너무 바쁘다 보니 몸져누웠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요리사들은 의원의 말대로 조조가 먹는 닭에 한방재료들을 넣었고 이를 먹은 조조는 서서히 기운을 차렸고 후에도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돼서 조조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즉 삼계탕 같은 음식과 비슷한 것. 이런 일화가 있었을 만큼 조조도 꽤 바쁘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왼쪽은 코에이 삼국지 12의 조조, 오른쪽은 노부나가의 야망 천도의 노부나가. 복사 붙여넣기

위에서 보듯이 일본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의 조조의 모습은 비슷한 시기의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모습과 거의 같다. 코에이 사의 역사시뮬레이션이 인물 개개인의 매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큰 만큼, 여러 인물들의 특징적인 면들을 강조하다 보니 이런 일이 왕왕 발생하는 것. 고에이를 비롯한 일본에서 씌여진 2차창작에서 조조와 오다 노부나가를 등치시키는 면이 상당히 강하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 삼국지 콘텐츠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일본 콘텐츠의 비중이 줄어들고, 중국 드라마 삼국 등을 통해 다른 이미지들도 접하기 쉬워진 편이다.

사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조조를 '냉혹한 초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쁠 것 없는 '캐릭터' 해석이었다. 중화권의 삼국지 컨텐츠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코에이 게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국내 삼국지 팬덤의 현실상, 코에이 게임의 이미지 메이킹, 특히나 그 정점에 선 캐릭터인 조조의 이미지는 국내 삼국지 팬덤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는 창천항로로 인해 인기가 급상승한 장료가 있다.

12. 기타 매체에서의 조조

삼국지삼국지연의를 제외한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조조에 관해서는 항목이 길어지는 이유 때문에 조조/기타 창작물 항목에서 따로 적는다.

맨 위에도 나와있듯 발음의 유사성 때문에 죠죠와 엮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
  • [1] 막 후계자가 됐을 무렵에는 황제가 아니라 위왕. 조비가 위왕에 오른 후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했다가,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 [2] 위무제(魏武帝)
  • [3] 치세엔 훌륭한 신하, 난세엔 간악한 영웅(子治世之能臣亂世之奸雄) 정사 삼국지 무제기의 기록. 후한서에서의 기록은 청평의 간적, 난세의 영웅(평화로운 시기엔 간사한 도적, 난세엔 영웅 君清平之奸賊亂世之英雄). 당시는 과거제 같은게 없고 이런 주변 평가 같은걸로 관직에 오르던 시절이라, 평가를 받는게 매우 중요했다 한다. 그런데 조조가 성질이 더럽고 난폭하다는 소문이 있어 허소가 평해주기를 주저해서 조조가 조르고 졸라 이 평을 받았다고 한다.
  • [4] 여담으로 이 말은 "치세의 등신 난세의 간첩"이라는 말로 자주 패러디 된다(...).
  • [5] 실제로 백괴사전에는 조조 항목이 '쬬'로 등록되어있다('쬬'의 정가운데 부분을 세로로 자르면 '조조'가 된다). 그 외에 영어표기를 카카오(CaCao)로 표기하는등 해당 항목을 보면 백괴사전이 그렇듯이 완전 판타지를 써놨다(...). 보러가기
  • [6] 재미있게도 홍길동전의 판본 중에서는 "천하가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천하를 저버리지 않겠다" 라는 명대사가 있다.
  • [7] 그러나 샤먼대 이중톈 교수에 의하면 그 말에서 '천하'대신 '다른 사람'이 원문이었는데 삼국지연의에서 임의로 넣었다고.
  • [8] 삼국지 관련 2차 창작 매체에서 '환관이지만 공정한 사람' 같은 식으로 대충 서술하는데, 실은 엄청난 거물이었다.거기말고 해당 항목 참조. 사실 조등은 깨끗하다고 하긴 힘들어도 비교적 공정하고 정치적 균형감각이 있는 인물이긴 했고, 이 때문에 청류와 탁류를 가리지 않고 존중 받은 거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9] 위에서 언급했듯이 원래 환관은 양자 갖는 거 아니다. 순제 때나 환제 때와 마찬가지로 황제를 옹립했거나 하는 등 공이 크거나 또는 황제의 총애가 깊은 인물들에게만 특별히 내리는 상이었다.
  • [10] 여담으로, 여기선 조등과 장양이 제법 대등하게 나오지만, 정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역이 아니라고 해도 장양은 조등에게 고개 빳빳이 들 처지가 아니었다. 조등의 실제 위세를 실었다간, 조조의 이미지가 '실력으로 올라간 개혁군주'가 아닌 금수저 전혀 다른 게 되어버리는 것을 직감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타 연의 관련 2차 창작물에서도 많이 보이는 부분이다.)
  • [11] 노비, 즉 '천첩'이었다. 전근대 시절에는 같은 첩이라도 신분이 어엿한 가문 출신의 '양첩'과 미천한 출신인 '천첩' 및 그 소생 사이에는 많은 차별을 두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 [12] 물론, 처음부터 지체높은 출신인 조조와 황족이라 하나 밑바닥 유협집단으로 시작한 유비는 그 출발점이 달랐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 [13] 건석의 숙부가 조카의 권세를 내세우며 통금시간 이후에 지나가려 하자 "이곳은 천자가 계신 도성의 관문이고 사사로이 열어주었다간 도적들도 쉽게 드나든다"며 기어이 곤장을 때렸다.
  • [14] 수도를 지키는 오교위의 하나로 관품 자체는 지방의 듣보잡 교위보다는 넘사벽으로 높지만 태수에 비하면 살짝 떨어진다. 동탁전에 따르면 동탁은 수도에서 실병력을 거느리는 교위의 임명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조조를 꽤 믿을만한 인물로 여기며 좋게 평가했다는 얘기.
  • [15]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연합군이 산조와 하내에 따로 모인 정황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원소는 동탁을 두려워해 싸우지 못했다는 식으로 나온 뒤 조조가 전투를 촉구하는 일장연설을 해서 연합군이 모두 산조에 모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정작 이때 원소는 산조에 있지도 않았다(...) '위태조 폐하 빼고는 모두 겁쟁이였다'는 식으로 막 띄워주려다 보니까 생긴 오류(...) 물론 하내에 집결한 연합군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전혀 언급이 없으며, 원소와 한복의 불화는 후한서에서 언급된다.
  • [16] 연주자사 유대가 동군태수 교모를 죽이고 개인적으로 임명한 인물이다.
  • [17] 흑산적의 세력 확대를 견제하고 연주에 거점을 만들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 [18] 동군 무양현 사람으로 유대를 섬겼다는 서술은 없고 처음부터 조조를 따랐다. 조조가 동군태수로 임명되면서 기용한 것으로 보인다.
  • [19] 유대의 부하로 보긴 어려운 것이 관품상으로는 자사와 태수가 동렬이고, 더군다나 제북국은 연주가 아니라 청주 소속이기에 유대의 지시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유대가 연주자사로 임명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제북상이 되었으니 실력자 유대가 개인적으로 포신을 임명한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유대에게 간언했던 것은 황건적 토벌을 둔 협력체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 물론 포신이 황건적에게 패하고 임지에서 쫓겨나 유대의 보호를 받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
  • [20] 진수는 조조가 유대의 후임으로 추대된 합법적인 연주목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유대는 연주목이 아닌 연주자사였고 관직의 사적인 양도,증여는 당연히 불법이다. 조조가 연주를 무력점거하자 그 배후에 있던 원소가 조조를 연주목이라고 인정해준 것이고, 조조는 중앙정부에서 유대의 후임으로 파견한 연주자사 금상을 공격해 쫓아냈다(...) 후한서 원소전과 배송지주로 달린 삼보결록에 자세한 얘기가 나온다.
  • [21] 유대가 연주자사였지만 연주 전역을 다스렸다고 보긴 어렵고, 실제로는 각 군국의 태수들마다 비슷비슷한 지분을 가졌다고 봄이 옳다. 하지만 조조는 동군태수로서의 지분에 더해 원소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유대의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했고, 황건적 잔당들의 항복을 받으면서 상당한 이르는 인력을 얻었기에, 왠만한 태수 레벨을 초월하게 된다.
  • [22] 원소와 마찬가지로 공손찬도 연주에 자사를 파견하고 있었으나 세력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불명.
  • [23] 공손찬이 사적으로 임명한 유비,선경과 달리 도겸은 정식 서주목으로 독자적인 기반을 꽤 다진 상태라 공손찬과는 전략적인 제휴관계에 가깝다.
  • [24] 원술은 원소를 최대의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유표는 원소와 제휴하고 있었고, 조조 또한 원소의 종속적인 위치에 속해 있었다.
  • [25] 원술 입장에서는 상당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이는 원술 항목을 참조할 것.
  • [26] 동탁의 난을 만나서 백성들이 떠돌아다니다가 동쪽으로 빠져나가 많은 사람이 서주 땅에 의지하였는데, 조조가 부임하여 남녀 수십만 명을 사수에서 파묻어 죽이니 물이 흐르지 않았다. 조조가 담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가 없자 마침내 떠났으며, 여, 수능, 하구를 공격하여 빼앗고 모두 도륙하였는데, 닭과 개 역시 다 없애니 텅 빈 읍에는 다니는 사람이 다시없게 되었다. - 자치통감
  • [27] 조조는 지나는 길에 있던 취려(取慮), 저릉(雎陵), 하구(夏丘)를 함락시키고, 모조리 도륙(屠戮)하였다. 무릇 남녀 수십 만 명이 살육(殺戮) 당했고, 닭이나 개도 살아남은 것이 없었으며, 사수(泗水)는 이들의 (시체) 때문에 (막혀) 흐르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섯 현의 성읍에는 사람의 종적이 다시는 없었다. - 후한서
  • [28] 흔히 여포와 조조와의 싸움으로 알려졌으나 실질적인 수장은 장막으로 여포는 장안에서 지낸 높은 관직, 장막에게 오기 전 원소 휘하에서 군공을 쌓으며 널리 알려진 무용 등을 고려해 장막이 월급사장으로 고용한 것에 가깝고, 장막은 연주를 점거한 뒤에는 여포에게 약간의 지분을 주며 떼어낼 생각이었다. 주가 조조를 배신하고 일제히 여포로 돌아선 것도 장막의 인망이 그 당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고, 기록상 이때부터 벌써 여포가 주체로 묘사되는 것은 여포가 '장막에게 옹립된' 연주목인 이상 수장 중심으로 서술되는 기전체의 특성으로 봐야 할 것. 전쟁이 진행되면서 야전지휘관으로 비중이 높은 여포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도 고려해야겠지만,
  • [29] 물론 장홍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연주 전국이 모두 조조의 영향력에 닿고 있었다고 보긴 어려울 듯.
  • [30]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포가 하루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
  • [31]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이 무렵의 기록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지만, 집해에 주석으로 인용된 사승후한서에 따르면 조조가 복양에서 여포를 포위하다가 패하고 원소에게 항복을 구걸하자 원소가 불쌍히 여겨며 5천의 병사를 지원해줘서 조조가 연주를 취했다고 한다. 장막이 궐기한 동기로는 하나같이 원소와의 대립 때문이라 언급되고 있으니, 원소로서도 이를 무시하긴 어려웠을 것.
  • [32] 진수는 원소가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했고, 조조가 이를 받아들였으나 정욱이 제지하자 정욱의 말을 따랐다고 적고 있으며, 집해에서는 원소와 조조가 연합관계라는 것은 이미 너무나 새삼스러운 일이라 원소가 조조를 업으로 소환해 직속 부하로 삼으려 한 것을 진수나 위나라 사람들이 흑역사로 간주해 숨긴 것으로 보는 쪽이 유력하다.
  • [33] 조조가 원술을 격파하면서 위상이 엄청나게 높아진 반면, 원소는 조조를 지원해 원술의 북상 야욕을 저지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딱 원술이 격파될때쯤 흑산적의 기습을 받아 근거지인 업이 함락되었고 이를 틈탄 공손찬의 재침공을 받으면서 큰 위기를 겪었다.
  • [34] 마침 도겸이 병으로 죽으면서 유비에게 서주목의 지위를 양도한 상태였다.
  • [35] 원소는 명예직으로 올려버리고 자신이 실세임을 천명한 것이다. 고로 이제 여유가 생겼다는 속마음
  • [36] 이렇게 받게 된 원소의 권위가 그야말로 ㅎㄷㄷ한데 군부 최고위직인 대장군+기주목+유,병,청주 도독으로 여기에 지절을 더하였기에 관할 구역내 민간인과 2천석 이하의 관리를 법에 따라 처결할 수 있으며, 부월의 특진을 받아 자의적인 사법적 재량권을 행사해도 면책받는다. 호분의 특진을 받았으니 자체적으로 군을 편성할 수 있으며, 궁시를 받았으니 역적으로 간주된 인물을 토벌할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자기 관할구역 내에서 무슨 짓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몰라 뭐야 이거 무서워
  • [37] 엄연히 말하자면 조조는 장막을 변호했지만, 조조의 세력이 장막의 세력을 능가하다 못해 흡수할 지경까지 이르게 되자 둘의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한다.결국 진궁과 상의해서 여포를 불러 조조의 뒷통수를 쳤다
  • [38] 전풍의 진언은 천자를 옹립하고 있는 조조와 전쟁을 개시하면서 전선을 둘로 늘리자는 얘기다. 명분,실리 양쪽에서 모험을 벌이자는 얘기니 당연히 쉽지 않았을 것. 더욱이 북쪽에서 공손찬을 몰아붙이고 있던 국의쿠키가 크게 패한 것이 이 무렵임을 감안하면 악수에 가깝다.
  • [39] 주위에 적이 많았고 유협의 정통성을 옹위한다는 대의명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원술의 입지상 적대세력인 조조가 조정을 장악하자 자신의 지지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대외적 입지는 포기한 채 나름의 내부 결속을 시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 [40] 처음엔 원술도 여포를 후대했지만 여포가 방약무인으로 날뛰며 원술의 영내에서 노략질을 일삼다가 쫓겨난 것이라 원술에게도 타당한 이유는 있다.
  • [41] 이렇게 유비가 싸우지 않고 달아난 것은 성급한 판단일지 모른다. 원소는 유비가 서주를 버린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안량, 곽도를 보내 연주지역의 동군을 공격하였고, 자신은 황하를 건너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여양으로 왔기 때문이다.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러 떠났을 때는 12월이었고, 조조가 유비를 공격했을 때는 1월이었다. 원소와 조조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는 2월이었으므로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한 달 조금 되는 기간만 버텼어도 조조는 원소에게 배후를 급습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이는 원소에게만 좋은 결과일 뿐, 유비는 원소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조조와 대치하다 몸을 뺄 기회를 잃고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굳이 비판받을 부분은 아니다.
  • [42] "지금 (아군 측) 병사가 적어 (원소 측을) 대적할 수 없으니|- 무제기, 순유의 발언.
  • [43] 무제기의 서술은 2월에 백마가 포위된 사실을 서술한 이후 4월로 갑자기 널뛰기한다. 다른 어떤 기전에도 2월과 4월 사이의 백마포위망을 다룬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 [44] 무제기 -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매우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 [45] 후에 우금전 등에서 연진이 원소의 별영이 있는 것으로 기술됨.
  • [46] 김원중 번역을 따름. 다른 중국어 전문가의 상이한 해석이 있다면 추가바람. 중국 저자가 쓴 "삼국지 교양강의"에서도 조조군이 "패배"했다고 분명히 나온다.
  • [47] 악질적으로 조조가 원소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강조하면서 원소의 우수성을 강조하는데 애초에 원소가 동원가능한 병력 자체가 조조보다 훨씬 많았다. 합전을 했다는 것도 서구식으로 회전을 벌인 것인지 지속적인 교전 끝에 전선이 밀린 건지도 알 수 없다. 일단 조조가 관도까지 밀린 것은 확실하다.
  • [48] 이것이 원소와 조조의 병력이 대등하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밀도에 관계없이 병력을 진영을 세우면 되는 거니까..
  • [49] 다만 배송지는 자신의 주에서 이 만 명의 숫자의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조조군이 농성하면서 군량을 습격하는 별동대를 돌리고 또한 8만 명을 생포하여 매장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력이 축소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열의 두셋의 부상병이라는 비율은 전투의 패배와 같은 큰 타격을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수치다.
  • [50] 연의에서는 순욱이 조조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전략) 원소군 측에서도 큰 사건(=군량 수송)이 벌어지리라 예상합니다."라면서 복선을 뿌렸다. 여담이지만 조조가 순욱에게 보낸 서신은 허유가 갖고 있다가 조조에게 투항할 때 보여준다.
  • [51] 허유가 조조에게 절을 올리자 조조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친구 사이에 그런 예의를 보이다니 자네답지 않네."라고 하는 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52]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부풀려서 허유와 조조가 아웅다웅(…)하는 것으로 나온다. "군량 얼마나 있어?" "1년." "장난하냐?" "사실 반 년 있어." "나 안 믿지?" "…3달." "아, 끝까지 거짓말하네. 나 빈정 상해서 그냥 갈래." "사실은 1달 있어." 이런 식(…).
  • [53] 항목 참고, 조만전은 편찬자의 주관과 불확실한 정보가 많이 섞인 것으로 논란이 많은 사료이다.
  • [54] 원소전 - 원소가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량) 운반수레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저수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으면, 조공이 노략질하는 것을 끊으실 수 있습니다"라 했다. 원소가 다시 따르지 않았다.
  • [55]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부각시켜서, 곽도팀킬을 자행하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즉 장합&고람이 돌아와서 자신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추궁할까봐 오히려 원소에게 장합&고람이 배신자라고 거짓 밀고하는 장면을 넣었다.
  • [56] 이것은 원술 밑에 있었던 양봉과 한섬이 여포에게 항복하기 위해 아군을 공격하여 확실한 의사표시를 보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장합과 고람이 이끄는 병력은 조조군의 본대를 공격하기 위해 차출된 것이므로 주력에 가까운 병력이 분명이고 이러한 병력을 조조가 의심없이 자신의 진영 내로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따라서 장합과 고람은 원소 측 진영을 불태움으로써 분명히 조조 측에게 붙었다는 의사를 확실히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57] 창정의 전투에 대해 무제기에서는 揚兵河上, 擊紹倉亭軍라 적고 있고 이는 '황하 이북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에서 원소군을 격파했다'고 해석되는데 당시 창정은 연주에 있었고 훗날 황하의 대범람으로 물길이 바뀌어 하북에 속했다. 당시 사서상에 하상이란 표현이 몇 번 등장하는데 아마 지명으로 쓰였던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 [58]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마법에서 '장군이 퇴각하면 사형에 처한다'(將軍死綏)고 했으니 이 때문에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에 좌죄되지 않기를 빌었다. 이는 옛 장수들은 군이 밖에서 패하면 안에서 그 집안이 죄를 받았다는 말이다. 나는 장수들에게 정벌한 명한 이래 다만 공(功)에 대해 상을 내릴 뿐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국전(國典-나라의 전범)이 아니다. 출정을 명받은 제장들로, 패군(敗軍)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고 실리(失利)한 자는 관작(官爵)이 면탈될 것이다.
  • [59] 연의에서는 이 장면을 대부분의 모사가 반대했지만, 곽가가 계책을 내자 조조가 따르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사실 원담 정벌 후 유성을 정벌할 때(장수 이름 추가바람&수정바람) 곽가가 죽기 때문에 없는 공을 넣어준 듯.
  • [60] 즉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이자 호시탐탐 기주를 노리는 적세력의 힘을 빌려 자신의 동생을 도모하겠다는 말이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이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원담이 조조에게 파견한 신비도 이를 한심하다고 여겼는지 조조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붙는다.
  • [61] 후에 조조는 포로가 된 심배에게 "그때는 어찌 그리도 많은 노를 준비하셨소?"라고 물었다. 그러자 심배는 "다만 그 수가 부족하였음이 원통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 [62] 심배는 끝까지 버티고자 하였지만, 원상의 원군이 괴멸된 상태에서 업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이 공성전에서 조조는 하비에서 여포를 공략했을 때처럼 주위의 강물을 성에 흘려보내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이렇게 조조가 공성전 때 강물을 이용하는 것은 위의 두 번의 공성전 이외에도 유표에게 쫓겨난 원술이 예주로 침입했을 때 그를 상대로 한 적이 있었다.
  • [63] 앞에서 말한 대로, 연의에서는 이 부분 역시 곽가가 죽기 전에 냈던 계책이 이루어지는 식으로 묘사했다.
  • [64] 물론 유비군의 매복에 고생하는 연의에서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과는 다르다.
  • [65] 삼국지연의에서는 누규가 와서 얼음성을 쌓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사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도 이때가 8월이었음을 근거로 들며 이를 부정했다.
  • [66] 배송지의 주에서 복 황후가 벽사이에 숨어있었고 화흠이 벽을 부수고 끌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연의에선 이것을 각색하여 화흠이 손수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끄집어낸 것으로 묘사하여 위의 악역포스를 강화한다.
  • [67] 두 번(동귀인과 동승, 복 황후와 복완)씩이나 황후와 국구(황제의 장인)가 일을 꾸미자 자신이 직접 국구가 되어 그런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평가된다.
  • [68] 한수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 때부터 집요하게 조정에 반발하였다. 조조를 상대로도 계속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였는데 마침내 이때 죽은 것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한다.
  • [69] 합비는 손권 입장에서 엄청난 요충지였다. 수춘성 바로 코앞에 위치한 합비는 장강을 끼고 있는데 이곳은 건업과 유수구, 여강 일대를 한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손권이 합비를 점령한다면 이곳만 틀어막고 있어도 이들 지역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즉 입구나 다름없는 곳이었고 이것은 유비 입장에서 한중과 같은 전략적 중요성을 띄고 있었다. 따라서 손권은 이 합비를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정성을 들이나 계속 실패하였고 동오가 멸망할때까지 합비를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 [70] 조조와 유비는 각각 한중과 촉을 거의 동시에 점령하였다. 역시 둘의 인연은 보통이 아닌 듯.
  • [71] 조조는 적벽 이후 비교적 군사행동에 소극적이었다. 손권을 상대로 직접 군을 이끌고 세 차례나 공격했으나 적벽과 같은 대규모 군사행동이 아니었고 국지적인 싸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또한, 훗날 사마씨가 촉과 오를 멸망 시켰을 때처럼 대규모의 총력전을 통해 정벌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조가 소극적으로 변한 것은 아마 그의 나이가 이미 고령이었는데다(적벽 싸움 전, 야밤에 잔치를 벌일 때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기도 했다.) 유비나 손권의 세력이 강성하여 총력전을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고, 또 이러한 적대 세력들의 존재가 조씨의 입지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어서 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 [72] 한편으로는 지형적 요인을 드는 견해도 있다. 비록 1차 방어선을 뚫었다 해도 진령산맥의 오지 익주나 장강과 당시에는 습지 투성인 강남을 완전히 평정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보급로도 안정치 않으리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 [73] 상은 왕의 재상이었다. 조조가 과거 제남왕의 상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이것과 같은 직위이다. 물론 조조는 겉으로는 위왕이나 실제로는 최고 권력자였으므로 종요는 실질적으로 이인자의 직책에 있었던 것이었다.
  • [74] 소설가 이문열은 이들의 반란의 동기로 조조가 위왕이 되면서 업무를 그곳에서 보게 되자 허도에서는 정치에서 소외된 관료들만 남게 되었고 이들의 불만이 이 원인이 되었다고 추측한다. 대조적으로 연의에서는 이들의 동기를 순수한 한나라 황실의 애국충정 때문으로 묘사한다.
  • [75] 연의에서는 유명한 점술가 관로가 조조에게 이 일을 예견해 주자 미리 대비하였고, 그 덕분에 경기와 위황의 반란이 쉽게 진압되었다고 한다.
  • [76] 가령 이들은 헌제의 조칙으로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면 조조의 세력이 상당히 와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황제 아래의 이인자였으나, 실제로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제한의 힘을 휘두르는 권신이라 해석할 수 있는 면이 다분했기에, 당대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하자면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정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 [77] 당시 조인과 우금 군의 궤멸로 조조의 영토는 관우군에 잠시나마 노출된다. 조조가 천도를 논의한 것은 이때의 일이었는데 연의에서는 조조가 관우를 무서워하여 천도하고자 한 것으로 나오나 이때 조조는 장안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본부는 업에 있었으므로 관우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조조가 천도를 논의한 것은 헌제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여부였다. 위의 주석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직 한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들이나 조조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이 많았다면 헌제가 유비에게 넘어가는 순간 조조는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 [78] 죽기 불과 3개월 전이었는데도 조조는 군을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 [79] 위빠들이 흔히 조조가 능력있는 사람만 우대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위까들이 반박 사례로 들먹이는 것 중 하나가 인격자이지만 장수로서, 특히 대장군으로서 능력이 한참 미달인 하후돈을 사실상 낙하산 인사로 기용한 부분이다.
  • [80] 六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가리킨다
  • [81] 중앙 정부가 부패하지 않는 한은 더 이상의 수취는 없다는 뜻이다. 어떤 훌륭한 제도라도 운용이 방만하다면 결론은 국민에게 피해가 온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대 K 교수는 '사실 둔전제만으로도 제대로 운용된다면 고대 토지제로는 완성된 제도'라고 하였다.
  • [82]위략》에 의하면, 조비의 정책 중 하나가 병사들을 결혼시켜주는 것이었는데 두기과부만 모아서 보내느라고 일 처리가 늦었는데 조엄유부녀를 강제로 보냈다. 조비가 두기에게 왜 이렇게 일을 못하냐고 빈정대니 두기가 이에 대해 말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고 한다.
  • [83] 국경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이다.
  • [84] 五言詩, XXXXX XXXXX 식으로 끊는다. 兮 등의 불필요한 추임새 등이 사라져 있다.
  • [85] 동일한 글자로 간주하는 글자. 파자에 많이 사용된다.
  • [86]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는 평가기준은 당나라 때 등장한 표현이다. 신체, 언행, 글씨, 판단력 모두를 총괄하는 기준이므로 외모중시하고는 상관없다. 身이라는 게 단순히 핸섬한 얼굴을 말하는 게 아니다. 얼굴 형태는 못 생겨도 품격이 나타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 [87] 연의의 저자인 나관중도 조조의 이런 행동만큼은 감동했는지, 형양 전투의 장면을 넣었다.
  • [88] 학살은 피가 난무하는 중국사 기준으로 볼 때 굳이 조조만 욕을 먹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백성에 대한 약탈과 처형, 학살하지 않고 민심을 사려고 노력한 유비가 정말 특별한 케이스에 속한다. 다만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물이 막힐 정도로 백성을 죽여댄 서주대학살은 당대에도,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비판의 여지가 분명하다. 사실 아버지가 죽기 전에도 학살을 일으켰음을 감안하면 동정론도 힘을 잃는다.
  • [89] 사마소제갈탄의 난을 평정한 후에 동오의 지원군을 포로로 삼았을 때 여러 신하가 병사들을 갱살을 할 것을 건의한 것을 들어 당대에 갱살이 별로 심한 일이 아니었다고 규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오류. 당장 사마의가 공손연 세력을 학살한 일이나, 이보다 더 이전 시대인 춘추전국시대 백기의 일화만 들어도 이것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잘못'으로 받아들여졌음은 분명히 증명할 수 있다.
  • [90] 어이없는건 이때 조조는 설마 걔들이 다 도망갈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면서 오히려 크게 웃었다(...)
  • [91] 양수의 경우 후계자 결정 문제에 연루되어 있었고 공융은 사사건건 대놓고 태클건 걸 감안하긴 해야 한다.
  • [92] 예형과 허유도 그 태도를 감안해야 하며, 허유를 죽인 것은 허저였다.
  • [93] 물론 이후 허저에 대한 조치로 봐서 조조도 허유를 고깝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누규의 경우에는 취중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 물론 술에 깬 다음 날에 크게 후회하며 후히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점에서 우번을 귀양보낸 손권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 [94]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순욱이 반대하자,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한 번은 순욱을 전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려 했는데 순욱이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집에 있자 이제 그대에게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빈 도시락통을 보냈다. 이에 순욱은 그 뜻을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 [95] 이후 조조가 정씨의 집에 몇 차례 찾아와 함께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정씨는 결코 따라가지 않았다. 훗날, 조조가 죽기 전에 자신이 생애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이 정씨의 일이라며 조앙을 볼 면목이 없다 말한다.
  • [96] 다만 이 부분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해야할 듯 싶다. 관우까들이 관우를 까는 것에 악용할 때도 있다.
  • [97] '두 다리(橋)'를 이어 놓았다는 구절을 동남(오나라)에서 이교(二喬)를 데려와서 같이 즐긴다는 구절로 바꿔서 읊었다. 자기 마누라 내주고 항복해야 된다고 알아들은 주유가 빡치게 하려고 왜곡한 것. 참고로 동작대부는 적벽대전 이후에 쓰여졌다.
  • [98] 조충조우, 조간은 다른 네 명과는 이복형제이므로 나이 관계가 확실치 않다. 다만 조충이 조간보다 약 20년 정도 연배가 위이고, 조우와 조비의 아들 조예의 나이가 비슷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간이 조예보다도 어렸다는 기록에 따르면 위와 같은 순이 합당해보인다.
  • [99] 내용 출처 : http://blog.naver.com/donmany0203/30173438900
  • [100] 솔직히 이걸 조조묘라고 발표했던 일단의 학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고 이 학자들마저 고고학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고 한다.
  • [101] 상식적으로 초원의 중요한 군세를 한 사람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도륙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특히 이러한 설화는 진시황과 같은 다른 대제왕의 무덤에도 흔히 따라다니는 풍문이다.
  • [102] 조조가 죽기 전에 그를 따르던 여공과 시녀들에게 제사 지내는 도구를 나눠준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건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단 "내가 죽어도 계속 제사 지내줘"라고 '종신노동'(…)을 시키는 의미가 다분하다.
  • [103] 평화에서 굴욕 장면이던 옷 주는 장면조차 연의에선 조조가 넓은 도량으로 이해해주는 것으로 바뀐다.
  • [104] 다만 이건 정사에는 없는 일.
  • [105] 사실 연의 이전엔 선한 면은 아예 없다시피할 정도로 악독하고 잔인한 면만 부각되고 없던 악행도 새로 만든 데 비해, 비교적 연의는 실존한 악행 대부분에 가상의 악행은 얼마 없고, 여기에 선한 모습을 추가했다. 사실상 연의가 조조복권의 시발점이라 봐도 좋을 정도.
  • [106] 배한성, 배칠수의 만화열전에서는 삼국지연의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초반부의 주인공은 조조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을 정도.
  • [107] 연의에서 아주 초창기인 황건적 토벌 당시 조조가 "붉은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표현하긴 했다.
  • [108] 과시할만도 한게 당태종 역시 막강한 경쟁자를 물리친 사실상의 창업군주였다.
  • [109] 한편에선 서주대학살은 조조가 직접적으로 시켰다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또한 조조가 청주의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병사들이 상당 부분 많았다는 점을 드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최종 책임자는 조조다. 그렇게 따지면 히틀러나 스탈린도 학살 책임이 꽤 줄어들 거다. 조숭을 죽인 직접적인 책임이 도겸이 아닌 황건적 출신들이라 해도 결국 책임을 지는 건 도겸이듯, 청주 일대에서 편입된 병사들이 다수라 해도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조조다. 더군다나 서주 대학살 이전에도 학살이 저질러진 바가 있다.
  • [110] 훗날 남조 유송폭군 유자업은 조조를 본받길 좋아했는데 그 중에 본받은게 바로 도굴이었다(…).
  • [111] 허도에서 도망친 뒤 서주에서 유비 격파, 이후 여남에 있는 유비를 원소와 대치 중에도 불구하고 내려와 직접 격파했다. 그런데 유비도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둘의 마지막 전면전인 한중 공방전에서 판정승을 거둬 조조에게 대패를 안겨줬다.
  • [112] 새롭게 조조를 논한다고 했지만 사용된 단어는 주로 간사하다 등의 부정적인 단어가 많다.
  • [113] 캐스팅도 끝나고 인터뷰도 했으나 이후 관운장과 겹치면서 감독이 엎어버린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