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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last modified: 2018-11-10 00:54:11 Contributors

  • 본 항목은 삼국지의 촉한의 장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음이의어에 대해서는 조운(동음이의어) 항목 참조.

Contents

1. 개요
2. 정사의 기록
2.1. 개요
2.2. 출생
2.3. 유비와의 만남
2.4. 장판파
2.5. 입촉
2.6. 한중 공방전
2.7. 북벌
2.8. 성격
3. 삼국지연의에서
4. 논란
4.1. 호위무사설
4.2. 클래스
4.3. 능력
4.4. 조운별전
5. 기타
6. 자손
7. 다른 매체에서의 조운


1. 개요


趙雲(?~229), 후한 말~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이며 소설 삼국지연의의 등장인물.

기주 상산군(常山郡) 사람으로 는 자룡(子龍). 시호는 순평후(順平侯)이며 촉한오호대장군 중 일인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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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조운의 고향인 하북성 스자좡(石家庄) 시에 있는 조운의 사당.

2. 정사의 기록

촉서 조운전 본편에는 그의 신상명세, 그가 유비군에 합류한 경위, 장판전, 기곡전, 그의 사망과 더불어 그에게 내려진 시호에 대한 기록이 있다. 본편 분량은 약 350자 정도로 중에서 적은 편이다. 배송지 역시 너무 적다고 생각했는지 주석으로 많은 내용을 했는데, 조운별전에서 인용하여 추가한 내용이 1000자 이상이다.

2.1. 개요

그의 고향인 하북 기주의 상산은 원래는 항산(恒山)으로 불렸지만, 한문제의 이름을 피휘하여 상산으로 개명되었다. 그의 출생연도는 불분명하나 정사 삼국지와 조운별전 등을 참고하여 추측하면 아마도 170~171년으로 추정된다.[1]

조운은 고향에서 약관에 천거를 받아 기주태수 한복(삼국지)아래에서 잠시 벼슬살이를 하다가 원소가 치사한 방법으로 기주를 뺏자, 원소를 벗어나 공손찬 휘하로 들어갔다.[2] 공손찬이 원소와 싸울 때 유비와 처음 만났고, 공손찬이 멸망한 후 업에서 유비와 재회해 그의 수하가 되어 원소 몰래 유비의 사병을 모았다.

유비가 박망에서 하후돈을 맞아 전투를 치를때, 조운은 하후란이라는 자를 사로잡았는데, 유비는 하후란이 법무에 밝다고 판단해서 그에게 벼슬을 주었다. 조운은 하후란과 고향이 같았지만 주군인 유비가 그를 등용하자,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서 그와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유비가 당양에서 조조에게 패주했을 때는 유선감부인을 호위하여 무사히 사지를 빠져나왔다. 이때 조운이 배신했다고 고한 사람이 있었지만, 유비는 믿지 않았다. 유비가 계양을 평정하자 전 태수였던 조범이 조운과 같은 성씨라 과부가 된 형수와의 결혼을 제의해 왔으나 이를 의심하여 거절했다. 조범이 급하게 항복했기 때문에 그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운의 예측대로 조범은 곧 유비의 진영을 빠져나가 달아났지만 조운은 처신을 잘하여 이 일에 관련되지 않았다.

유비가 입촉했을 때는 제갈량, 장비 등과 함께 서진하여 군현들을 평정하였다. 익주를 얻은 유비가 성도의 부동산을 수하들에게 전리품으로 나누어 주려고 하자, 민심이 동요할 것이라며 이를 반대했고, 유비는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를 따랐다. 한중 공방전황충, 장저 등이 적군에게 포위되자 소수의 기병만을 이끌고 적을 물리쳐 이들을 모두 구해냈다. 적의 대군이 추격하여 위에 가까이 다다르자 공성계를 써서 이를 격퇴했다. 이릉대전을 앞두고는 명분론을 들어 오나라가 아닌 위나라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번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유비는 육손에게 대패했고, 조운이 이를 구원하러 달려갔으나 그가 전장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군이 물러간 뒤였다.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종군하여 의병의 임무를 맡았다. 공명의 군대는 기곡으로 가서 조진과 싸워 패했으나 퇴각 중에 후미를 맡은 조운이 흩어진 물자들을 수습하였다. 군자(軍資)에 여유분의 비단이 있어서 군대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제갈량이 비단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지만, 조운은 "싸움에 졌는데 상을 줄 수는 없다"며 반대했다.

229년에 사망하였고 촉한이 패망하기 직전인 후주 경요 4년(261)에 시호가 추증되었다. 이는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보다 한 해 늦게 마지막으로 시호를 받은 것이다.

2.2. 출생

소설에서 그는 상산(常山) 출신에 자가 자룡이라고 소개를 한다. 보통 상산 조자룡이라 알려져있기도 하여, 삼국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룡'이 그의 이름인 줄 알기도 한다.

사서에는 생년이 밝혀지지 않으므로, 연의와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문학 작품에서 조운은 유비와 관우보다 나이가 어리게 묘사되고, 제갈량마초보다 조금 많게 그려진다.

현재 사천성 성도시 대읍현에 가면 조운의 묘가 있다. 그 묘비에는 조운(趙雲)이 한 환제 영흥 원년(153년) 출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조운은 관우여포보다 7살 더 많고 유비보다는 8살이 더 많다. 조조보다는 2살이 더 많고 손견보다 3살이 많다. 가장 경악할 만한 사실은 황충과의 나이차가 불과 8살밖에 안 난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대에 가까운 연대를 살아갔던 인물인 진수가 생년조차 표기 못할 정도로 이미 조운의 생년은 오래 전에 망각되었으며, 묘비는 청나라 강희제 연간에 세워지고 문화대혁명 때 파괴된 것을 1996년에 다시 건립하여 세운 것이다. 따라서 비문의 기록은 삼국지연의나 민간전승에서 비롯됬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그를 170~171년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2.3. 유비와의 만남

조운별전에 따르면 조운은 기골이 장대(8척의 키)하고 용모가 남자다웠다. 기주 상산군에서 천거되어 처음에는 기주자사 한복(삼국지)에게 잠시 일했다가 원소가 치사한 방법으로 기주를 차지하자, 조운은 사병(吏兵)들을 데리고 공손찬에게 귀부했다. 즉, 공손찬의 세력에 편입전부터 이미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뒤 원소와 조조의 연합 세력이 공손찬과 원술 그리고 유비 등이 연합하여 만든 세력과 맞붙은 전쟁에서 유비가 청주자사 전해를 도와 고당이라는 곳에서 병력을 이끌고 있을 때, 조운은 유비의 기병 지휘관이 되어 그와 첫 인연을 맺는다.

이후 형이 죽자 공손찬에게 이를 고하고 낙향했는데, 그가 장례를 핑계로 공손찬으로부터 떠나려는 것임을 직감한 유비와 훗날을 기약했다.
그리고 유비가 원소에게 몸을 의탁할 때 재등장했다. 유비는 조운과 한 침상을 쓰며 그를 두텁게 대하였으며, 그를 시켜 몰래 수백 명의 수하들을 모으게 했다. 별전에서는 이때 조운이 유비와 처음 만났다고 하기 때문에 배송지는 이 점을 들어 양측의 기록이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두 기록을 모두 받아들여 공손찬 휘하에서 처음 만나고 업에서 재회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처음에는 기주 한복에서 일했다가 공손찬을 섬기다가 유비를 만나 업군 또는 서주에서 다시 만나서 유비를 섬기고 유비 사후 유선을 섬긴 것이다.

2.4. 장판파

선주가 조공(曹公:조조)에게 쫓겨 당양(當陽)의 장판(長阪)에까지 이르게 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후주 유선)을 품에 안고 감부인(甘夫人:유선의 친모)을 보호하여 모두 화를 면하게 했다. - 정사 조운전

유비가 형주에서 장판파로 달아날 때 아두와 감부인을 무사히 탈출시켰다. 연의의 영향으로 백만 대군 사이를 단기로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을 상상하곤 하지만 실제로 조조군과의 충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굳이 '保護'과 같은 서술을 미루어보건대 적군과의 큰 접촉은 없었다고 추측된다.

연의에서 보여주는 무쌍에 대한 환상에 젖어 정사에서도 조운은 단기로 수천 호표기를 돌파했다며 과대포장을 하려 드는 극성 촉빠들을 좌절시키는 근거가 되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정사에서의 그 행동이 훨씬 현명한 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진수의 평에서 하후영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애초에 조운의 목적은 아두와 감부인이라는 주요인물을 호위하는 것이었지 적병을살육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두를 품에 안고 다녔을 정도로(雲身抱弱子) 그 당시의 상황이 급박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무력충돌은 피하는 것이 그야말로 당연하다. 만약 교전 중에 이들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기라도 했으면 오히려 조운에게 있어서는 평생의 실책이 되었을 수도 있다. 촉한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 편이 나았겠지만. 따라서 적과의 충돌이 적었을 수록 조운의 판단력이 당연하다는 셈이 되는 것이다. 현대의 요인경호도 마찬가지다. 위험에 처한 경호대상을 구하는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지침은 위험한 상황자체를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판에서는 감부인과 아두를 보호하면서 조조군과의 조우를 피해 도망쳐 나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이 과정에서의 어느 정도의 무력충돌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지만 아두와 감부인의 생사를 위협할 정도의 교전은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호위대상에 대한 위협을 사전에 배제했다는 점이 매우 당연한 것이다. 연의처럼 무쌍 찍어봐야 후세 사람들의 입담에나 오르내릴 뿐이지 임무 달성이란 시각에서 보면 그게 현실적이다.

2.5. 입촉

선주가 익주(益州)로 들어갈 때 조운을 남겨 사마(司馬)의 일을 보게 했다. 이때 선주에게 손권의 누이 손부인(孫夫人)이 있었는데 그녀는 교만하고 굳세어 오(吳)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을 많이 거느리고 방자하여 법을 따르지 않았다. 선주는 조운에게 특별히 내부의 일을 장악하도록 하여 이를 엄중히 바로 잡도록 하였다. 손권은 유비가 서정(西征)길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많은 배를 보내 누이인 손부인을 데려가려고 했다. 손부인은 후주(後主)를 오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하였지만 조운은 장비와 함께 강을 끊고 후주를 데리고 돌아왔다. - 조운별전

이 사마를 원문에서 유영사마(留營司馬)라고 하는데 유는 남아있는 사람에게 주는 관직이다. 營은 군영이다. 그러므로 유영이란 원래 軍營이 있는데 그 군영의 책임을 진 사람이 어떤 일로 떠나게 되어 원래의 장소에 남아있게 되는 군영이다. 그런고로 유영사마란 남아있는 군영에서 군사업무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제갈량 휘하에서 장비 등과 같이 장강을 거슬러 올라 서진하면서 군현을 평정했다. 강주(江州)에 이르러 조운을 분견해 외곽의 물가를 따라 강양(江陽)으로 올라가 성도(成都)에서 제갈량과 만나도록 했다.

성도가 평정되고 난 후 조운을 익군장군(翊軍將軍)으로 삼았다. 건흥(建興) 원년(223) 중호군(中護軍) 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고 영창정후(永昌亭侯)에 봉해졌고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승진했다. - 정사 조운전

여기서 익군장군은 전한 익군교위의 변형이라고 한다. 익군교위는 남군 소속으로서 황궁 수비를 전담하는 관직이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황궁 문들을 숙위하는 병사들의 지휘관이다.

2.6. 한중 공방전

조운의 병력이 황충을 수행하여 쌀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수십기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圍)를 나서 상황을 살펴보러 갔다. 곧 조조가 거병하여, 조운은 조조의 전열에 공격받았다. 이에 싸우는데, 적의 대군이 도착해 핍박받는 형세가 되자, 적에게 돌진하여 한편으론 싸우고 한편으론 물러섰다. 조조군이 패했다가 다시 합치자, 조운이 이를 파하고 위로 급히 되돌아왔다. 장수 장저가 부상당하자 조운이 다시 말을 달려 영(營)으로 가 장저를 맞이했다. 조조의 군사가 이를 추격하여 위에 이르자 위 안에 있던 면양장 장익이 문을 닫고 막으려 했다. 그러나 조운이 영 안으로 들어와 문을 활짝 열고 싸우지 않는 것처럼 군기를 눕히고 북을 멈추었다. 조조의 군사는 조운이 복병을 뒀을까 의심하여 물러났다. 조운이 하늘을 뒤흔들 듯 북을 올리며 뒤에서 조조의 군사들에게 융노를 쏘아대니 조조의 군사가 놀라고 어지러워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고 한수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 조운별전

이후 한중 정벌전에서는 황충을 수행하여 출정했다. 황충이 군량 수레를 급습하고자 했으나 조조군은 이미 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고 황충은 위기에 빠졌다.

이때 조운은 경무장한 수십의 기병만을 이끌고 조조의 대군을 공격하여 황충을 구출해 낸다. 이때 한 번 조조군을 물리쳤고 다시금 조조군이 몰려오자 이걸 또 깨뜨렸다 물러갔던 조조군이 다시 모여서 기세를 몰아 본진에 육박하자 공성계로 아예 개발살을 냈다.사람이 아닌건가? 조운은 이 일로 호위장군(虎威將軍 : 호랑이의 위세를 가진 장군. 호위 장군이 아니다.), 일신시담(一身是膽 : 온 몸이 쓸개로 이루어져 있다.)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후 유비가 오나라를 치러 갔다가 이릉에서 대패했을 때 이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했으나 오군은 이미 물러난 후였다.

2.7. 북벌

유비 사후 제갈량이 기산에 출전하였을 때도 동행하였다. 제갈량은 기산으로 움직이고 조운은 등지와 함께 의병[3]으로 기곡으로 출진한다. 즉 조운이 기곡에서 조진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제갈량의 본대가 기산을 통해 공격한다는 내용이다.

雲,芝兵弱敵彊,失利於箕谷,然斂衆固守,不至大敗.軍退,貶爲鎭軍將軍.

조운과 등지의 병사는 약하고 적은 강하여 기곡에서 패했으나, 군사들을 거두어 굳게 지켰으므로 대패에 이르지는 않았다. 군을 물린 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 정사 조운전

제갈량이 말했다. "가정의 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들을 서로 수습하지 못했는데 기곡군이 퇴각할 때는 병장이 처음처럼 잃은 바가 없으니 어찌된 까닭이요? 등지가 말했다. "조운이 몸소 뒤를 끊고 군자와 집물조차 함부로 버린 일이 없으니 병장들을 잃을 까닭이 없었습니다." - 조운별전

"大軍在祁山﹑箕谷,皆多於賊,而不能破賊為賊所破者,則此病不在兵少也,在一人耳."

"대군이 기산과 기곡에 이르러 모두 적보다 수가 많았는데, 이를 능해 파하지 못하고 격파되었으니 이 과실은 군사가 적은 것에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사람(제갈량 본인)에게 있다" - 한진춘추

"臣以弱才,叨竊非據,親秉旄鉞以厲三軍,不能訓章明法,臨事而懼,至有街亭違命之闕,箕谷不戒之失,咎皆在臣授任無方."

"신이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게 과분한 자리를 차지하여 직접 모월을 잡고 삼군을 독려했으나, 능히 규율을 가르치지 못하고 법을 밝히지 못하고 일에 임해 두려워하여, 가정에서는 명을 어기는 허물을 범하고 기곡에서는 경계하지 못한 실책을 범했으니, 그 허물은 모두 신이 임무를 준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 제갈량전

그리고 이 싸움에서 조운은 패한다. 중국어로 실리(失利)라는 말은 단순히 '불리하다'라는 뜻보다는 '시합이나 싸움에서 패하다'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일단 대패는 면했고, 오히려 몸소 후미를 맡아서 병력과 물자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그 시절 전투에서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순간이 퇴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패주하는 군대를 수습한 건 선방이라 할 만하다.

조운전의 "雲﹑芝兵弱敵彊" 때문에 후대의 창작물에서는 병력에서도 열세인 전력으로 분투했다는 식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진춘추에서는 오히려 기곡에서 촉군의 병사가 더 많았다는 서술이 있다. 모순이라기 보다는 말그대로 조운의 군사가 수 만 많은 미끼부대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어쨌든 패전으로 인해 강등까지 당한 싸움이고, "箕谷不戒之失"라고 실책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조운의 실패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째선지 조운이 스스로 강등을 자청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지만 사서에는 그냥 강등되었다고만 나온다.

북벌에 나섰을 때 고생이 매우 심했다. 제갈량의 편지에 의하면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잔도가 다 무너진 탓에 조운과 소수의 병사들이 산 속에 고립당했고 그 상태에서 나무 베고 줄로 몸을 묶어가면서 겨우 잔도를 다시 수리해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229년에 사망한다. 아무래도 늙은 나이에 너무 무리해서 골병 들어 죽은 듯. 그리고 조운의 사망에 대한 언급 때문에 후출사표위작설이 제기된다.[4]

2.8. 성격

강직한 원칙주의자.

조운은 항상 맡은 임무에 성실하였고 색을 탐하지 않았으며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계양에서 조범의 혼담을 거절한 일로, 조범은 유비에게 항복한 후 조운이 자신과 성이 같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의 형수를 조운에게 재가시키려고 했다. 자신의 보신을 위한 연을 만들어 두려는 것이었는데, 조운은 그를 믿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훗날 정말로 조범이 유비를 배신하고 달아났지만 조운은 그 혼담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 일에 관련되지 않았다.

조운이 박망전투에서 하후란이라는 자를 사로잡았는데, 그는 조운의 동향으로 법학에 조예가 있어 유비에게 발탁됐다. 같은 고향을 둔 사이이기에 교분이 있을 법도 했지만 조운은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그와 교류하지 않았다. 그의 처세관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익주 정벌 후 성도에 있는 집(옥사屋舍-가옥)과 땅(원지(園地-과수원), 상전(桑田-뽕밭))을 제장들에게 나눠주려는 유비를 말리며

"(한무제가 집을 하사하자) 곽거병(霍去病)은 흉노(匈奴)를 아직 멸하지 못했으니 집이 쓸모없다고 하였으니, (지금) 국적(國賊)이 비단 흉노만이 아니니 아직 안락을 구해서는 안됩니다. 천하가 모두 평정될 때를 기다려 각자 상자(桑梓-고향)로 되돌아가 본래 땅에서 농사짓는 것이 마땅합니다. 익주의 백성은 전란을 당했으니 논밭과 집을 모두 되돌려주고 안정시킨 다음 다시 생업에 힘쓰게 한 연후에 조(세금)를 거둔다면 그들의 환심을 얻을 것입니다." - 조운별전

라고 간언했다. 당시 익주는 유비에게 막 평정된 상태로 유비의 이러한 행동은 승리자가 패배자의 것을 취한다는 난세의 당연한 섭리였다. 공신인 자신 역시 이 조치로 이득을 볼 수 있었겠지만 작은 이익보다 주군에게 익주 호족들의 지지를 얻을 것을 간한 것이다.

"국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또한 를 토벌하면 는 절로 복종할 것입니다. 비록 조조가 죽었으나 그 아들 조비가 찬탈(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에 오름)했으니 응당 민심에 의거해 관중(북쪽)을 도모해야 합니다. 하수, 위수의 상류에 위치해 흉역한 자들을 토벌하면 관동의 의사들이 필시 양식을 짊어지고 말을 달려와서 왕의 군대를 영접할 것입니다. 위를 내버려두고 오와 싸워서는 안됩니다. 군세란 한 번 교전하여 급히 풀 수 없습니다." - 조운별전

유비가 손권을 치려 했을 때도 이를 말렸다. 한실복권이라는 대의를 내세우는 유비는 위를 멸하는 것이 우선해야 할 과제고, 조비의 찬탈 이후 아직 조위가 민심을 진정시키지 못한 틈에 위를 치면 유비의 위명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서북 지방의 호족, 백성들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실제 유비 사후 제갈량이 북벌에 나서자 양주의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촉에게 호응하기도 했다.

결과론적이지만 당시 정세에 대한 조운의 판단력과 냉철함, 그리고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주군(유비)에게도 직언을 하는 조운의 모습이 돋보인다고 볼 수 있다.

FM 성향은 유비 사후에도 이어져 1차 북벌에서 퇴각했을 때 군중에 남는 비단이 있어서 제갈량이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자, "싸움에 졌는데 포상을 줄 수는 없다" 라며 거절하기도 했다.아...장군님 참고로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조운에게 주려고 했고, 이걸 조운이 병사들에게 하사해 달라고 간했다.

3. 삼국지연의에서


아두를 구해 궁극적으로 촉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자

한 마디로 말해서 슈퍼맨 또는 고대(古代)판 슈퍼 솔져이자 인간 병기. 모 대학 교수님 한 분은 현대로 치면 '프로페셔널 킬러'라고 평하기도 했다. 지못미.. 행적의 큰 줄기는 일치하지만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엄청나게 과장되었다. 조운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가장 큰 이유인데, 실존인물 조운이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이 확실함에도 창작물인 연의에서 너무나도 과장된 나머지 안티들을 양산하는 것.

공손찬 휘하로 들어갈때는 위기에 빠진 공손찬을 구하면서 문추와 일기토를 벌여 쫓아내고, 장판에서는 아이까지 데리고 있으면서 홀로 무쌍난무를 찍고, 막판에는 한덕과 그의 아들들을 죽여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조자룡 헌 창(다른 버전은 칼) 버리듯 한다."라는 속담은 이 장판파 돌파에서 유래 한다.

연의에서는 유비군 합류가 더 늦춰져서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할때로 변경되었고, 첫 만남과 재회의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었다. 관우, 장비급으로 일기토 묘사가 많아 수많은 가공인물의 인생을 끝장냈다. 연의에서 일기토 묘사가 많은건 문제도 아니고, 가공인물 또한 얼마나 죽어나가든 문제가 아니지만, 조운은 정사인물을 세 명이나 죽인 전적을 가지고 있다.

첫 희생자는 국의로 원소군의 객장으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오만해져 처신을 잘못했다가 숙청당한 인물이다. 두번째 희생자는 고람으로 원소군 장수였으나 관도대전 중 장합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 등장 끝. 세번째 희생자는 오의 명장중 하나인 주연

국의는 어느 쪽이 더 굴욕인지 애매하고, 고람은 분량은 챙겼으니 아주 손해는 아닌데, 문제는 세번째 희생자. 이릉대전 이후의 오나라 분량 일부까지 죽여버렸다. 오나라팬들과 주연팬들의 천하의 둘도 없는 원수. 특히 국의, 고람은 일기토 묘사를 넣어서 확실히 버프캐라는 느낌을 주는데 주연은 그런 묘사도 없는걸보면 나관중이 주연까인 듯하다. 단 국의나 고람이나 엄연히 실존했던 인물인데 역사를 왜곡하면서까지 조운을 띄워주려 한 것을 보면 나본이 그에 대해 가진 애정을 알 수 있다.

어쩐지 주군이 위기에 빠졌을 때 바람처럼 달려와 구해주는 멋진 역할을 자주 맏는다. 문추로부터 공손찬을 구해주기도 했고, 고람으로부터 유비를 구했고, 장합 및 무수한 위군으로부터는 유선을 구했다. 이릉에서 대패한 유비를 구하기도 했는데 주연을 죽인 것이 바로 이때의 일이다. 물론 이런 사건들은 전부 허구다.

이밖에도 상산초옹 에피소드, 북벌에서의 제갈량과의 환상듀오, 세심하고 꼼꼼한 이미지, 문앙의 조운재림 등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조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다.

4. 논란

확실히 연의의 대표적 수혜자라 재평가 바람이 불면서 완전히 거품 of 거품이 낀 장수. 그래서 지키려는 자들과 까내리려는 자들의 싸움의 결과가 아래의 소항목들이다.

4.1. 호위무사설

위에 보듯 일신도시담 호위장군(一身都是膽 虎威將軍)이라는 말 때문에 호위무사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래 '온 몸이 간덩어리인 호랑이 같은 위세의 장군'이란 뜻이다. 조운별전에서 유래한 말로 관직명 같은 것은 아니고 일종의 별명이다. 애초의 호위무사의 호위(護衛)와는 한자 자체가 다르다.

애시당초 조운은 정사에 처음 등장할 때부터 기병지휘관으로 등장한다. 정말 호위 무장이었던 허저전위와의 차이는 단순히 기전만 놓고 비교해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5]

4.2. 클래스

먼저 가장 높았을때를 보면 관우, 장비 다음[6]이었고, 가장 낮았을 때도 위연, 진도보다 서열이 한단계 낮았지만 (당시 위연의 직책-독전부 행 승상사마 2품 진북장군, 조운의 강등된 직책-3품 진군장군) 이것도 기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강등되기 이전에는 조운의 직책이 위연, 진도보다 높았다.(2품 진동장군)

실질적으로 위연의 직책이 조운을 뛰어넘게 되는 것은 조운이 죽은 이후인 230년 양계 전투에서 곽회를 격파하고 전군사 정서대장군 가절에 임명되었을 때부터다.

촉한의 장군직 서열

거기장군, 표기장군 > 사방대장군 > 사진대장군 > 사정대장군 > 사방장군(전후좌우) > 사진장군 > 사정장군.

보통 사방사진사정대장군 등을 기존 장군직에 대(大)자를 붙여 높여부르는 칭호로 알고 있으나 엄연히 다른 관직이다. (위연이 230년에 임명된 직책은 사정대장군의 하나인 정서대장군으로 사정장군 중 하나인 정서장군[7]과는 엄연히 다른 직책이었다)

참고로 촉한의 관직서열에서는 사진장군이 사정장군보다 높다. 그 체계가 아래의 잡호장군에게까지 이어지는 모양이며 그 위의 서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대장군(1품)을 제외하면 전부 다 서열상 2품 관직이다.

1차 북벌 당시 조운의 직책이었던 진동장군은 본래 후한의 관직 체계의 의하면 사진장군 중에 하나로 거기장군 바로 아래의 직책으로 결코 낮은 서열의 직책이 아니었다.

원래 유비군(촉한)의 군부 내 투톱은 관우와 장비였다. 이후 마초가 합류하면서 둘과 동렬로 평가 받았고,

先主復領益州牧, 諸葛亮爲股肱, 法正爲謀主, 關羽、張飛、馬超爲爪牙, 許靖、麋竺、簡雍爲賓友. 及董和,黃權, 李嚴等本璋之所授用也, 吳壹、費觀等又璋之婚親也, 彭羕又璋之所排擯也, 劉巴者宿昔之所忌恨也, 皆處之顯任, 盡其器能. 有志之士, 無不競勸.

선주는 익주목을 겸했다. 제갈량을 고굉(股肱 다리와 팔, 유능한 보좌관)으로 삼고, 법정을 모주(謀主 모사)로, 관우, 장비, 마초를 조아(爪牙 손톱과 이빨, 용맹한 장군)로, 허정, 미축, 간옹을 빈우(賓友 손님과 친구, 친한 벗과 같은 사이)로 삼았다. 동화, 황권, 이엄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 비관 등은 유장의 인척이고 팽양은 유장에게 배척받았고 유파는 예전에 시기받고 원망한 자이니, 이들 모두를 요직에 두어 재주를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가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선주전

유비가 한중왕에 오른 뒤 관우, 장비, 마초, 황충을 각각 전우좌후(前右左後)의 4장군으로 임명하면서 황충도 같은 열에 서게 된다. 관우가 황충과는 동렬에 설 수 없다고 반발하기는 했지만 곧 받아들인다.
"忠之名望,素非關﹑馬之倫也.而今便令同列.馬﹑張在近,親見其功,尙可喻指;關遙聞之,恐必不悅"

황충의 명망은 본래 관우나 마초와 같지 않았습니다. 이제 동렬에 두려 하시는데, 마초와 장비는 가까이에 있어서 직접 그 공을 보았으므로 이해할 수 있으나 관우는 멀리서 이를 듣기 때문에 필히 달가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부분만 보면 열전이 묶인 다른 4명과는 생전에 동렬에 서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입촉 전에는 황충(비장군), 위연(6품관 이하)보다도 서열이 높은 관우, 장비 다음가는 장수(편장군)였고 화양국지에서는 조운의 익군장군 직책을 사방장군(전장군, 후장군, 좌장군, 우장군)과 나란히 언급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실제 유비가 한중왕 이후의 직위상으로는 조운이 다른 4명보다 직책이 낮은 건 사실이며, 이에 대해서 몇몇 사람은 원래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기 전에는 본래 조운보다 지위나 명망이 낮았던 장수라는 점을 들어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하기 전에 위상으로 따지면 관장마황조의 순서가 아니었고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이후에 '관마장황조' 순으로 위상이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같이 묶인 5명 중에 생전 지위가 가장 낮았다고는[8] 하나 대체로 위연보다는 서열이 높았으며 애초에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조운의 급을 나머지 4인에 버금간다고 여겨서 함께 열전에 묶은 것이다.[9]

4.3. 능력

가장 인정받는 부분은 용맹함. 무력 뿐 아니라 공성계 같은 일화를 가진 나름대로 지략을 갖춘 용장이었고, 한중전의 활약과 기곡에서의 퇴각은 그가 야전사령관으로서 나쁘지 않은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일신시담(一身是膽), 언기식고(偃旗息鼓) 등의 고사성어가 이 조운별전(趙雲別傳) 속에 등장하는 공성계 일화에서 유래한다.

한 전선을 맡은 것은 기곡전이 유일한데, 기곡전은 양동에다 조운이 총사령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곡에서 패한 책임을 조운에게 물은 것을 봤을때 그 지역의 전투를 위임받은 듯하다. 숫적 우의는 있었지만 의군이었다는 기록보다는 당초 계획대로 양동을 위해 위의 주력을 묶어둘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주목해야 하는데, 조운은 기산의 본대가 퇴각할때까지 기곡에 있었다. 다만 확실히 적의 주력을 묶어둔게 아니라 조진의 수비군만을 잡아두었고 조운의 군이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위는 기산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논란은 의외로 쉽게 판가름낼 수 있다. 기곡전투 후 조운이 강등을 당했다는 것이다. 조운군 전력이 어땠건 전술적 목적이 무엇이었건 조운은 싸움에 패했고, 이로 인해 처벌까지 받았기 때문에 이는 사령관 제갈량이 부여해 준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운이 스스로 강등을 청했다는 기록은 없고, 하물며 제갈량은 평소 합리적인 일처리로 정평이 나 있는 사람인만큼 신상필벌에 있어서 까닭이 없었을 리가 없다. 1차 북벌로 많은 인물들이 그 실패에 응하는 처벌을 받았으나 왕평처럼 공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상을 받았던 만큼 조운에게 공이 있었다면 강등을 당했을 리 만무하다. 이걸 두고 또 어떤 사람은 조운의 위상이 제갈량만큼 높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벼슬을 깎았다고 하는데, 당시 조운의 직책인 4진장군이 높다한들 승상인 제갈량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에러.

결과적으로 볼 때 용맹함으로는 당대에도 손꼽힐 인물이었으나 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고 볼 수 있지만 기곡전투의 경우 조운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4.4. 조운별전

작자와 작성 시기는 모두 미상.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참고한 사료 중 하나로 배송지가 주석으로 단 부분 이외에는 소실되어서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실상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부분이 현재 남은 조운별전의 전부라고 봐도 좋을 듯.

조운전의 기술이 매우 간략한 반면, 조운별전은 정사 조운전에서는 간략하게 쓰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조운의 활약을 찬양한 내용이 있어 청나라 사가 하작은 거의 많은 부분에서 비판을 했고, 이광지도 조운별전에 대해 의문을 표했으며 통감집람에서조차 조운별전의 몇몇 내용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게 촉한정통론자에 속하는 사가들의 비판도 있다.

다만 배송지나 사마광은 조운별전의 내용을 비판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정사에 기록을 적었고 청나라 일부 학자들의 지나친 고전문헌 비판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지 않은것은 감안해야한다.

5. 기타

후세에 그의 이미지는 과단성 있고 용감무쌍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미남에 행동 단정, 사생활 깔끔, 계급질서에 깍듯하고 과묵, 엄숙하여 모든 사람의 신임을 받는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인지 현대에 조운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 조운을 주인공으로 한 잡극, 대접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장수이기도 하다. 아예 신의 영역으로 넘어간 관우보다 일반(특히 젊은 사람들)의 인기는 높은 편.

옛날에도 인기가 있었는지 관우와 장비 다음으로 민간설화가 많다. 모기랑 결판내는 것도 있고(...) 저승에 가서 '난 전장에 나가서 상처 입은 적 없음ㅋㅋㅋ'이라고 사기치는 것도 있고[10] 집 뒤뜰에 샘물 파서 말을 목욕시켰더니 간지폭풍이 되었다는[11] 설화라든가 조운이 장수로 임관하기 전에 수많은 창을 못 쓰게 만들어가며 창 연습을 해서 결국 절벽을 부쉈다든지 하는 설화 등등 많다.

여담으로 나관중이 이렇게까지 조운을 띄워준 이유는 나관중의 고향이 조운과 같은 상산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나관중본에는 조운이 아두를 구하기 전에 주모를 핍박해 죽게 만들어 충신의 사당에 들어갈 자격을 잃었다고 써져 있다. 또 삼국지연의에서 북부지방의 지리가 틀린 점이 많아 나관중 상산 출신설이 반박되기도 한다. 연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고려하면 그만큼 조운이 민중들에게 사랑 받았다는 이야기다.

삼갤 한정으로 킬러조란 별명이 있다. 혹은 자룡대원군[12].(...)

동양에 비해 삼국지가 비교적 덜 알려진 서양에서도 이 이미지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신 짜오의 이름/설정/외형적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판에서는 조운과 성도 동자(同字)로 '조신(趙信)'[13]이라고 쓴다. 또한 국내에 "대장군 신 짜오"로 발매된 스킨은 중국판에선 대놓고 이름이 조자룡 스킨이다. 물론 "대장군 자르반"은 여포. 둘다 코에이의 진삼국무쌍에서의 이미지와 흡사하다...라기 보다는 표절시비 걸 정도로 비슷하다.

소시민 두 명원수로도 유명하다. 조운 개객기 해봐 사실 두 명만 있는게 아니라 조운 손에 날아간 목 중에 소시민을 찾아보면 미친 듯이 많다. 그것도 대부분 뭐라 말도 하기 전에 댕겅.

6. 자손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 장남은 조통, 차남은 조광이다. 자손의 기록이 부실한 촉서의 특성상 언급된 게 적지만 조광은 훗날 강유를 따라 출전했다가 답중에서 전사했다. 여기서 엇갈리는 진실. 연의에선 두형제가 조운의 묘를 지켰다. 관우, 관평 부자의 후손인 관중진의 족보에 의하면 관평의 부인이 조운의 딸 조씨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조운에게는 딸이 있었고 관우와 사돈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관평의 아들 관월(關樾)[14]은 조운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중국 정부에서 이 족보는 조작 가능성이 없는 진짜 관우 집안의 족보라고 판명내려서 관우와 조운은 공식적인 사돈 관계가 인정되는 격. 하지만 삼국지연의라든가 평화, 진수의 기록, 자치통감, 배송지 주 등이 있을 시기에는 이런 기록이 없어서 둘의 사돈 관계가 묘사되거나 언급되지 않았다. 2000년대에서야 알려지고 인정된 사실이니.

7. 다른 매체에서의 조운

삼국지삼국지연의를 제외한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조운. 항목이 길어져 따로 분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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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중국어판 위키백과의 각주에 근거로 제시된 진정 조씨 족보에는 후한 영제 건녕 3년(170)에 상산군 진정현(眞定縣)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사에 기록된 사항은 아니다.
  • [2] 공손찬도 원소가 한복의 기주를 뺏는데 일조한 인물인데 그런 인물에게 휘하로 들어간 이유가 뭘까? 정사 내용에는 "명공(공손찬)이 유명해서 아니라..."라는 말이 있다.
  • [3] 疑軍 - 적을 속이는 군사. 이 의병(義兵)이 아니다!
  • [4] 228년작 후출사표에 229년 조운의 사망이 언급되어 있다.
  • [5] 허저나 전위의 경우에는 평시에도 조조를 수행하면서 경호원 역할을 수행했지만, 조운의 경우에는 군사업무를 수행했다. 다만 진수의 기록이나 '하후영'에 비견된다는 평으로 미루어 볼 때, 전시에는 유비를 호위하는 정예부대를 지휘했을 가능성은 높다. 친위기병대장과, 경호실장급은 분명히 다르다.
  • [6]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는 관우, 장비 다음 서열(편장군)로 황충(비장군), 위연(6품관 이하)보다 직위가 높았다.
  • [7] 230년에 정서장군에 임명된 건 강유이다.
  • [8] 유비가 입촉하기 전후 그리고 한중왕에 즉위하기 이전에는 적어도 황충보다는 서열이 높았다.
  • [9] 다만 위연의 경우, 본의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반역에 연루되어 죽었으므로 비슷한 이유로 처형당하거나 몰락했던 사람들과 '유팽요이유위양전'으로 묶인 것이다. 따라서 편찬만을 근거로 조운이 위연보다 더 중요했다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 [10] 손가락 안쪽에 상처가 있었지만 반지로 가렸다.
  • [11] 여기서 조운의 말이 백마라고 나와서 이후 조운의 말=백마라는 공식이 설정되었다.
  • [12] 장판파에서 유선을 마치 자기 아들내미 지키듯 필사적으로 지킨 모습 때문에 나온 말(...).
  • [13] 발음은 짜오 신.
  • [14] 건안 18년(서기 213년) 생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