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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last modified: 2015-04-10 23:20:20 Contributors

Contents

1. 한국의 전 야구선수이자 야구코치
1.1. 전설의 대학 시절
1.2.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하지만...
1.3. 은퇴 후
1.4. 프로야구 현장으로의 복귀
1.5. 평가
1.6. 사망
1.7. 최진실과의 관계
1.8. 그외
2. 한국의 농구 선수
3. 국내 리듬게임유저
4. 015B의 객원가수

1. 한국의 전 야구선수이자 야구코치


다시는 볼 수 없는 그의 모습.

이름 조성민
출생 1973년 4월 5일
사망 2013년 1월 6일
출신지 서울특별시
학력 신일고-고려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NPB)
2005년 한화 이글스 신고선수[1] 입단(KBO)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1996~2002)
한화 이글스(2005~2007)

1.1. 전설의 대학 시절


박찬호, 임선동, 정민철 등과 함께 '황금의 92학번'[2]으로 불리는 유망주 중에서도 임선동, 손경수와 함께 '트로이카'라고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넘버1이었다. 195cm의 장신에서 내리꽂는 150km대의 강속구가 무기였으며 당시 운동선수 중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이라 신일고 시절부터 여성팬을 몰고다녔고 고려대학교 시절에도 여성팬들이 많았다.

1.2.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 하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조성민.

엄청난 하드웨어의 강속구 투수로 고교시절부터 주목받은데다 자기보다 뒤에 있던 박찬호의 해외진출로 자극을 받았던 조성민은 드래프트를 거부하고 1996년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며, 일반적인 일본진출 사례와는 달리 유망주 시절 건너가 거인팜에서 길러진 선수. 그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교진에게 관리 따위는 장식이었다.[3][4]

거기에 신일고시절부터 혹사당해왔던 팔에 문제가 생기면서 거의 매일 오마이숄더!를 외쳐야 했고, 때문에 거의 매일 재활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97년엔 중간계투로 뛰면서 잠깐 교진의 마무리를 맡기도 했다. 98년 전반기에만 7승을 거두며 올스타에 선발되기도 했지만 하필이면 올스타전에서 팔꿈치 부상을 당해 그 이후 내리막길을 걷다 2002년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복귀한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해 종종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임창용의 이적설이 터져나왔을때 임창용에게 요미우리로는 이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사실 안 좋은 이미지를 빼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조성민은 교진 관리 때문에 큰 피해를 본 사례이며, 조성민은 엄연한 피해자 입장이다. 자기관리가 소홀하지 않았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SPORTS2.0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노력을 많이 했으며 열심히 했고, 열심히 하려 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고.

1.3. 은퇴 후

이후 개인 사업[5]과 국내야구 해설[6]을 하다가 2005년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이글스에서 3년간 불펜투수로 활동하고 은퇴하였다. 한화에서는 이미 전성기가 지나서 별 기대가 없었으나 그래도 1년 정도는 쏠쏠한 활약을 해주었다.

호남형 외모로 당대의 톱스타였던 최진실과 결혼(2000년 12월)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가정 생활은 조성민의 외도와 가정폭력으로 이혼(거론은 2002년 12월 부터, 실제 이혼은 2004년 9월) 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조성민과 최진실 양쪽 모두 가정사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는 불상사를 일으키고 말았다. 아래 항목 참조.

XTM에서 마해영과 함께 김별명김태균이 출전하는 지바 롯데 마린스의 경기를 해설하기도 했다.

해설로서 평가하자면 무난한 해설톤에 더하여, 투수와 타자로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였던 만큼 굉장히 분석적인 해설을 했다는 평가. 특히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일본전의 경우 케이블에서 녹화해설을 담당하였는데 투수의 모션이라든가 포수의 움직임, 그리고 타자의 스탠스 등을 토대로 한 예측도 뛰어났다.[7] 그 외에도 스포츠 일간지에 기고하는 관전평을 보면 해설로서의 능력은 탁월한 편. 다만 이미지 상의 문제가 매우 크기 때문에 주류 해설로 올라서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1.4. 프로야구 현장으로의 복귀


2012시즌이 끝난 뒤 재계약에 실패했다고 알려졌으나, 후에 밝혀진 바에 조성민이 스스로 재계약을 포기했다고 한다. 박동희의 기사에 따르면, 이혼 이후에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등 정신적으로 불안해 보였으며, 두산 코치시절에서도 코치로서 능력은 뛰어났지만 너무 술을 마셔 잦은 지각과 결근까지 하였다고. 두산 측에서는 해외 연수등을 권유했지만 그가 거부하고 스스로 떠났다고 한다. 이후 방송 해설, 사업등에 집중하다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1.5. 평가

전반적으로 본다면 전도유망하고 운동밖에 모르던 운동선수가 신체부상과 사생활 문제로 나락으로 빠져든 케이스. 같은 대학 출신인 마해영도 자신의 책에 그에 대해 전도유망한 최고의 타자이자 투수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나...하면서 매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행한 가정폭력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의 과거가 어쨌든 실드 쳐줄 수 없는 문제다. 그 후 최진실 기일 때 최진실의 가족들과 조성민이 같이 방문을 해서 추모했다.

1.6. 사망

2013년 1월 6일.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지인 집의 화장실에서 샤워기에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유서는 사건 당시에 발견되지 않았으나 1주일이 지난 1월 13일 고인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고인의 사망 원인은 자살로 확정되었다.# 이로서 환희와 준희의 양친 모두가 고인이 되었다. 조성민은 숨지기 전날 여자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것으로 전해졌다[8]. 이후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저도 한국에서 살 길이 없네요. 엄마한테 죄송하지만 아들 없는 걸로 치세요"라는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유산은 자신의 누나 조성미에게 남겼다#.

1.7. 최진실과의 관계

몇 년 간의 교제 기간을 거쳐 2000년에 결혼했다. 그 해 환희, 준희 남매가 태어나 이 때까지는 어느 가정과 다를 바 없는 유복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는 듯 했다. 그러나 이 결혼이 두 사람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간 전주곡이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5살 많은 연상녀인 최진실과 결혼을 발표할 때부터 우려하는 시선은 많았다[9]. 조성민으로서는 누나와 같은 와이프를 기대한 것이겠지만 연예계 일로 바쁜 톱스타 최진실이 조성민을 서포트해줄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였다. 이 점은 둘째치고라도 외국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조성민이 신혼부터 부인과 떨어져 지내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이다. 결과적으로 조성민의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곁들인 미숙한 판단이 최진실마저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불행이 시작된 것은 2004년 조성민이 부부싸움을 하게 된 끝에 폭력을 휘두르고 결국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터지면서다. 이혼에 합의하면서 최진실과 조성민의 관계는 끝나는 듯 하였지만, 이것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악순환의 서막이 되고 말았다.

이혼으로 이미지가 극히 안 좋아졌는데[10], 건장한 스포츠맨인 조성민이 연약한 여성인 최진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점은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이혼을 합리화하면서 최진실 까기를 시전했는데 이 내용 대부분이 초딩병크라서 이미지는 추락할 뿐이었다.[11] 2005년에 재혼했는데, 상대가 이혼 당시 관계를 극구 부인했던 술집 관련 여성으로 알려져 '아니라고 우기더니만 사실이었군'이란 눈초리를 받았다.

최진실은 2005년 드라마 장밋빛 인생으로 재기에 성공하였지만, 조성민과의 양육권 분쟁으로 갈등을 빚어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 끝에 2008년 자살하고 만다. 조성민은 아내를 죽게 만들고 아이들에게까지 불행을 안겨주었다는 오명을 쓰게 된다.

최진실 사망 이후 아이들의 친권[12]과 양육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특히 조성민이 친권을 갖게 될 경우 아이들이 물려받은 최진실의 재산을 조성민이 관리하는 결과가 되므로 네티즌들이 다음 아고라에서 반대 투표를 하기도 했다. 최진실의 어머니도 임신한 최진실을 폭행하고 딸 준희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했으며 아이들 생일에도 한 번 오지 않았으면서[13] 이제 와 무슨 양육권이냐며 반발했다. 반발이 거세지자 조성민은 최진실 재산을 신탁 재산으로 하여 아이들을 위해 관리하자는 말이었다고 해명하다가 결국 이 문제에서 물러났다.

2010년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마저 자살하자 다시 양육권이 문제가 되었는데[14], 조성민은 최진실의 어머니와 화해하고 친부로서 아이들 양육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그마저도 저 세상으로 뜸에 따라 결국 조성민 장례식의 상주는 환희, 준희 남매가 맡게 되었다.[15] 아직 10살을 갓 넘긴 아이들은 모친과 삼촌에 이어 부친까지 사망하여 3번의 장례를 거치고 상복을 입는 사례를 남겼다.

1.8. 그외

  • 여담이지만 조성민이 아들 환희를 데리고 초등학교 야구부 5~6학년 형인 선수가 공을 받았는데 받자마자 놀랄정도였다고 카더라. 축복받은 유전자.관련기사[16][17]

2. 한국의 농구 선수

3. 국내 리듬게임유저

CSM* 항목 참고.

4. 015B의 객원가수

015B 5집에 실린 리메이크 곡 '단발머리'에 참여했던 객원가수.

015B 해체 이후 레드플러스 1집의 보컬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015B의 재결합 이후에는 같은 음반의 리메이크곡 '슬픈 인연'을 불렀던 김돈규의 역할까지 겸했다. 재결합 이후 015B 공연에 자주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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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입단 후 대우는 신고선수가 아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고선수 입단이었다.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한 적이 없어 국내팀에 뛰기 위해서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했으나 지명받지 못했다.
  • [2] 이외에 타자로는 박재홍, 김종국, 송지만이 대표적이다.
  • [3] 교진에서 뛸때 투수코치에게 팔꿈치가 아프다라는 말을 일본어로 직접 전했지만 코치가 씹었을 정도다. 오른손이 화상을 입어 불구(不具)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3085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우신 장훈 옹이 신으로 보일 정도. 하지만 그 분도 도에이에서 뛰다가 교진으로 넘어오신 분이었다(...).
  • [4] 관리 따위는 장식인 팀 운영뿐만 아니라, 교진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 그리고 언제나 화끈하게 지를 수 있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자금력을 자랑하는 구단이라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인급 선수들이 성장하기에는 영 좋지 못한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이건 뭐 줍키스가 하는 짓과 똑같다.
  • [5] 조성민이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하던 시절 그가 좋아하던 슈크림 빵(보통 동네 빵집에서 파는 베이비 슈보다 크기가 크고, 크림 종류도 다양함)을 국내에 팔아볼 생각으로 사업을 벌였으나 대차게 말아먹었다. 애초에 사전 시장조사가 미비해 무턱대고 사업에 뛰어든게 문제였다. 이 때문에 하술될 막장이미지와 겹쳐서 국내야구팬들에게 '슈크림 조'라는 별명(혹은 혐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도 사업도 말아먹고 사기까지 당한 채 몰락한 이호성보다는 양반.
  • [6] 2005년에 국내 프로야구 중계를 재개한 MBC ESPN에서 잠시 해설자로 있었는데, 고려대학교 선배인 허구연의 권유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 [7] 당시 그의 해설은 엠스플에서 틀어주는 베이징올림픽 야구 하이라이트에서 들을 수 있다.
  • [8] 조성민은 2010년 이후로 부인과는 별거 중이라고 한다. 다만 그의 누나의 말로는 호적상으로도 이혼한 상태였다고.
  • [9] 조성민의 아버지도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고, 운동선수는 내조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었다고 한다.결혼 전 기사 이혼 직전 기사
  • [10] 여기에다 2005년 신인 지명에 나섰다가 어느 구단에도 지명받지 못한 뒤 '지명 받은 선수 중 몇 명이나 뛰는지 지켜보겠다'는 발언으로 까였다. 고려대 선배인 박노준처럼 스타 의식에 지나치게 젖어있다는 비판이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 [11] 주로 기자들에게 결혼애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최진실의 혼전 사생활에 대한 언급을 하는 병크를 저질렀는데, 당시 자신이 업소녀와 벌이던 애정행각을 생각하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식이었다. 이런 막장급 행보 때문에 당시 희대의 막장 영화이기도 했던 영화 '클레멘타인'의 포스터와 합성된 짤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 [12] 부모가 이혼한 뒤 친권이 한쪽에게만 주어졌을 때, 친권을 가졌던 쪽이 사망한 뒤 다른 쪽이 친권을 회복하는지, 아니면 다른 쪽이 친권을 상실한 것과 같이 봐서 후견이 개시되는지는 명문의 규정이 없다. 학설에서는 후견이 개시된다고 보았으나 대법원 실무는 살아있는 부모가 친권을 회복한다고 보고 있었다. 결국 2011년 법이 개정되어 후견 개시가 명문화되었고, 2013년부터 일명 '최진실법'이 발효되기 시작했다.
  • [13] 조성민 측의 주장은 물론 이와 다르다. http://godemn.tistory.com/267 참조. 조성민도 고인이 된 지금에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다만, 위 링크의 블로그의 경우, 신뢰성이 지극히 모자란 가쉽이나 음모론 수준의 게시물들이 게제되는 공간임을 감안하여 읽을 필요가 있으니 참고하자. 위 글 이외에 다른 글들을 조금만 읽어보면 알겠지만... 세월호 참사가 반정부 세력에 의해 기획된 테러라는 음모론을 대놓고 게제하는 블로그다.(...)
  • [14] 일단 양육권은 최진실의 어머니가 갖고 있지만, 최진실 사후 저 집안의 사실상 가장이 최진영이었기에 그마저 자살하자 상황이 어려워졌다.
  • [15] 단, 상주로서 이름이 올라갔을 뿐 아직 어리기 때문에 상주로서 조문객을 맞이하는건 하지 않았고, 입관식과 발인에만 참석하였다. 상주로서 조문객을 맞이하는게 다 큰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며, 줄초상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는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 [16] 여담으로, '남자의 자격-패밀리 합창단' 편에서 환희와 준희가 같이 등장했을 때 동생 준희가 오빠인 환희보다 키가 더 컸다. 물론 초등학교 5~6학년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보다 키가 큰 걸 감안한다면 놀랄일은 아닐 터. 여자가 2차성징을 더 빨리 시작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 [17] 하지만 환희 본인은 어머니와 같은 연예인이 되고싶다는 꿈을 밝혀서 야구선수가 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