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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last modified: 2015-04-15 09:28:26 Contributors

  • 이 항목은 중앙청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朝鮮總督府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of Korea / The post of Governor-General of Korea

Contents

1. 개요
2. 기관
3. 총독부 산하행정기구
3.1. 역대 조선 총독
4. 조선총독부 청사
5. 연혁
5.1. 조선총독부 청사의 건립
5.2. 해방과 그 이후
5.3. 해체
5.3.1. 청사 해체 논란
5.4. 해체 이후
6. 건물의 가치
6.1. 등록문화재
7. 기타

1.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한국에 설치한 식민지 통치 기관(총독부). 1910년에 설치되어 1945년 해체되었다. 또는 조선총독부의 청사 건물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흔히 알고 있는 청사 건물은 문민정부 시기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식에 철거를 상징하는 행사를 치른 후, 1996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2. 기관


조선총독부 휘장 [1]choose-chose-chosen


강점 이후 대한제국조선이라 개칭한 일본은, 종래의 통감부를 대신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총독부는 총독 아래 5부 9국의 체제를 갖추고, 총독은 일본군 육군이나 해군 대장 출신 중에서 임명되며, 조선의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정무를 총괄,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하여 덴노에게 상주, 재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조선 내의 육군해군의 통수권자이자 위임에 따라서 총독부령 및 명령, 그에 추가하는 벌칙을 내릴 수도 있었다. 내각총리대신 다음의 사실상 제2인자에 해당하던 직위.[2]

초창기 총독부 청사는 남산에 있던 구 통감부 건물을 이어받아 사용했으며, 우리가 흔히 조선총독부로 알고 있는 건물은 1926년에 지어졌다. 남산의 총독부 청사는 6.25 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는 울애니메이션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3. 총독부 산하행정기구

  • 총독부 설치 당초의 직제다.

  • 사법부(司法部)
    • 형사과(刑事課)
    • 민사과(民事課)
    • 서무과(庶務課)
  • 농상공부(農商工部)
    • 상공국(商工局)
      • 산하 2과(課)
    • 식산국(植産局)
      • 산하 3과
    • 서무과(庶務課)
  • 탁지부(度支部)
    • 사계국(司計局)
      • 산하 2과
    • 사세국(司稅局)
      • 산하 2과
    • 세관공사과(稅關工事課)
    • 서무과(庶務課)
  • 내무부(內務部)
    • 학무국(學務局)
      • 산하 2과
    • 지방국(地方局)
      • 산하 3과
    • 서무과(庶務課)
  • 총무부(總務部)
    • 회계국(會計局)
      • 산하 2과
    • 인사국(人事局)
    • 외사국(外事局)
    • 문서과(文書課)
  • 총독관방(總督官房)
    • 비서과(秘書課)
    • 무관(武官)
  • 참사관(參事官)
  • 각종학교(各種學校)
    • 각 직할보통학교(直割普通學校)
    • 관립고등여학교(官立外高等女學校)
    • 관립실업학교(官立外實業學校)
    • 관립외국어학교(官立外國語學校)
    • 관립고등학교(官立高等學校)
    • 관립사범학교(官立師範學校)
    • 법학교(法學校)
    • 성균관(成均館)
    • 중학교(中學校)
  •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 사목회의(士木會議)
  •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 평양광업소(平壤鑛業所)
    • 산하 2과
  • 총독부 의원(醫院)
  • 영림창(營林廠)
    • 산하 2과
  • 인쇄국(印刷局)
    • 산하 2과
  • 전매국(專賣局)
    • 산하 3과
  • 세관(稅關)
    • 산하 5과
  • 임시토지조사국(臨時土地調査局)
    • 산하 3과
  • 통신과(通信課)
    • 산하 5과
  • 철도국(鐵道局)
    • 산하 8과
  • 감옥(監獄)
  • 재판소(裁判所)
    • 고등법원(高等法院) → 공소원(控訴院) → 지방재판소(地方裁判所) → 구재판소(區裁判所)
      • 각 검사국(檢事局)이 대응시설로 설치됨. 단 구재판소에 대응하는 것은 검사(檢事)
  •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
    • 산하 5과
    • 직할경찰서(直割警察署, 경성 주재) → 경찰분서(警察分署)
    • 경무부(警務部, 각 도별) → 경찰서 및 경찰업무를 대행하는 헌병분대(憲兵分隊)
  • 각 도(道, 1관청官廳 2부部)
    • 자혜의원(慈惠醫院)
    • 군(郡) & 부(府) → 면(面)
  • 취조국(取調局)
  • 중추원(中樞院)

3.1. 역대 조선 총독

한국근현대사를 배웠다면 알고 있겠지만, 역대 조선 총독은 모두 일본군 장성들이었다. 특히 해군 대장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1명을 제외한 전원이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육군 대장들이었다. 물론 소위 '문화통치' 시대부터 민간인인 문관 출신도 총독이 될 수 있도록 법령이 개정되었지만, 현실은 시궁창. 이 점은 실제로 문관 출신 총독들이 부임하였던 만총독부와 구별된다.[3]
순서총독재임기간설명
제1대데라우치 마사타케1910년 10월 1일 ~ 1916년 10월 14일기존의 자신의 대한제국 통감 지위를 이어 받아, 조선의 입법·행정·군사권을 장악해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고, 초대 조선 총독으로서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4].
제2대 하세가와 요시미치1916년 10월 14일 ~ 1919년 8월 12일3.1 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등 무단 통치로 비판을 받아, 토지 사업을 완료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3년만에 교체되었다.
제3대사이토 마코토1919년 8월 12일 ~ 1927년 4월 4일형식상의 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임시대리우가키 가즈시게1927년 5월 10일 ~ 1927년 9월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하면서 한국어 교육 시간을 대폭 축소시키는 등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제4대야마나시 한조1927년 12월 ~ 1929년 8월 16일부패한 "금권장군". 조선총독부의옥(朝鮮総督府疑獄)사건에 관련되어 사임하였다. 일설에서는 타이완에서 조명하가 일본 황족(국구) 구니노미야 구니히코[5]를 칼로 찔러 이로 인한 책임까지 겹쳤다는 말이 있다.
제5대사이토 마코토1929년 8월 17일 ~ 1931년 6월 16일형식상의 문화 통치 정책을 추진하여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방향을 돌렸다.
제6대우가키 가즈시게1931년 6월 17일 ~ 1936년 8월 4일경제 개발 정책을 표방하면서 한국어 교수 시간을 대폭 축소시키고 종교 단체를 어용으로 만드는 등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제7대미나미 지로1936년 8월 5일 ~ 1942년 5월 28일내선일체 등을 주장하고, 지원병 제도를 실시해 강제으로 청년들을 중일전쟁에 참전시켰으며, 일본어 사용, 창씨개명, 사참배, 국신민의 서사 암송 등의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역대 조선 총독 중 가장 악랄하고 혹독한 통치를 한 사람. 패전 후, 극동국제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건강 악화로 석방된 뒤 사망하였다.
제8대고이소 구니아키1942년 5월 29일 ~ 1944년 7월 21일학도병제도를 실시하였다. 1944년 도조 히데키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총리가 되었다. 패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도암으로 스가모 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제9대아베 노부유키1944년 7월 22일 ~ 1945년 9월 28일이 경우는 되려 총리 출신이 총독이 된 경우. 마지막 해의 전쟁 수행을 위한 물자와 인력의 수탈에 총력을 다하였다. 국민의용대를 편성하여 비협조적인 조선인에 대한 대규모 탄압과 검거를 자행하였다. 패전 후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산케이 신문극우기자 구로다 가쓰히로는 <착한 일본인, 나쁜 일본인>이라는 책자를 통해 평소 한파라는 자신의 껍데기 속의 혐한극우성향을 가득 드러내면서 이 인물을 두둔했다. 특히 아베 노부유키가 막판에 한국에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느니 헛소리로 옹호했으나, 한국에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며 알려지지도 않았다. 해당 항목에 나와있듯이 오히려 이 천하의 개쌍놈이 저지른 마지막 업적은 해방 이후 지들의 철수 비용을 돈 찍어내기로 때우면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도주한 일이다. 말 그대로 한반도 경제를 초토화시킨 일이니 마지막까지 한반도에 악행을 저지른 종자이다.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지만 갑자기 무혐의로 풀려나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4.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전인 1988년 9월의 총독부 청사. 8.15 광복 이후에는 중앙청이라고 불리며 대한민국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으로 활용되었다. 해체 당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 중이었다. 참고로 사진에서 우측 하단에 보이는 건물은 옛 경기도청으로, 수원으로 이전 후 철거되어 그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5. 연혁

5.1. 조선총독부 청사의 건립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의 일본 공사관을 청사로 사용하였지만, 1908년에 건립된 용산의 통감부 관저 역시 별도로 계속 운용하였다.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청사는 왜성대 총독부 청사를 대신할 일종의 신청사였다. 원래는 서울시청 자리 등이 부지로 꼽혔었지만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당시 건축가였던 이토 주타(伊東忠太)에 의해 지금의 위치가 정해졌다. 1912년경복궁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이 본격화되면서 흥례문과 주위의 행각, 영제교 등이 철거되기 시작한다. 1914년에는 이듬해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한다는 핑계로 경복궁의 중요 전각 몇 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각들이 헐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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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조선물산공진회

1912년부터 선철도호텔을 설계한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e de Lalande)가 설계에 착수하였으나 1914년에 기초설계만 남긴채 사망하였고, 그 뒤에는 일본인 건축가인 노무라 이치로(野村一郞), 구니에다 히로시(國枝博) 등이 청사의 설계를 완성했다.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에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조선에서 3번째로 9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으며, 당시에는 최신 기법이었던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화강석과 대리석으로 마감하고 장식은 유럽에서 수입해와 만든 호화판 건물이기도 했다.

1916년에 시작된 공사는 처음에는 5년의 시간과 300만의 비용이 예상되었지만, 결국 1926년에 완성되어 10년이 걸렸고 돈은 675만 1,982엔이 소요되었다. 예산과 시간이 예상보다 2배씩 들어간 것. 이 과정에서 중국인/일본인 석공 300명과 조선인 노동자 200만 명이 년마다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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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참고로 조선총독부는 1937년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이곳은 8.15 광복 이후 훗날 청와대의 부지가 된다.

5.2. 해방과 그 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1945년 9월 9일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총독부 청사를 미군정청 청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날 오후에 총독부 청사의 제1회의실에서 오키나와 주둔 미군 군단장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과 당시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 사이에 항복 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이후 미군정에 의해 조선총독부 청사는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 불리게 되었다. 중앙청(中央廳)이란 이름은 당시 학자였던 인보(鄭寅普)가 캐피탈 홀을 직역하여 지은 것이다.

1948년 5월 10일에 중앙청 중앙홀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 국회를 개의하였고, 그해 7월 17일 1층의 메인 홀에서 헌법공포식을 열고 헌법을 공포하였다. 1948년 8월 15일에는 청사 앞뜰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중앙청은 대한민국 정부의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정부청사로서의 기능이 계속됐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는 중앙청사는 강점기와 동일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건물이 정부 청사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도 그에 대한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만큼 정부 기관이 입주하기에 적절한 건물이 딱히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용하던 형국이었다. 본래는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청사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무산되었다.

6.25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 후 후퇴하던 북한군서울을 조직적으로 파괴했고, 그 때문에 서울특별시에 성한 2층 건물이 없을 지경이었다. 중앙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불을 질렀는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라 실내만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 아무튼 서울특별시 수복을 상징하는 태극기 사진이 찍힌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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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1962년 11월 22일에 6.25 전쟁으로 파괴된 청사를 복구하여 중앙청 개청식을 열었다. 또 이 때 중앙청 건물밖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안보회의장소로 쓰일 벙커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후 1970년에 서양식 정문이 철거되어 콘크리트 광화문이 복원되고 바로 건너편에 정부종합청사가 설립되면서 정부청사로써의 기능이 이양되었다. 1986년 8월 21일에는 청사의 개보수 작업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이 과정에서 1983년에 안보회의장소 벙커가 유물 보관소로 개조되었다. 이후 1985년서울 지하철 3호선 중앙청역이 개통되었고, 후에 경복궁역으로 바뀌었다.

5.3. 해체

맨 처음에 해체가 논의된 것은 한국 전쟁 중이었던 1.4 후퇴 이후에 막 서울을 수복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의 상징을 서울 심장부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철거를 지시하면서였다. 당시 이 계획을 검토한 게 백선엽이었는데 백선엽은 "이렇게 거대한 석재를 나를 장비를 도무지 못 구하겠다."라고 난색을 표했다. 미군에게 빌고 빌어서 불도저 4대를 빌려오긴 했는데 중장비는 그게 고작이었고 기껏해야 지게꾼들이나 동원할 수 있었다. 해체할 능력은 아예 없고 폭파라도 시켜서 억지로 없앤다쳐도 무거운 석재를 나를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기에 대체할 건물이 마땅치않다는 애로사항도 있었지만 핵심적 원인은 철거할 능력 자체가 없었다. 그 이후 수십년 동안 해체에 대한 논의는 없다가 그후 노태우 대통령 시절 중앙청 철거를 지시했었으나 비서진이 바뀌면서 또 다시 유야무야되었다. 그 뒤 1995년 문민정부가 들어서야 해체계획이 입안되었다.

1995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상징하는 의식으로, 총독부 건물의 첨탑을 절단해 제거하는 공사를 했다. 1995년의 첨탑 절단 행사가 '폭파 행사였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분명히 절단해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제거하였다. 잘 생각해 보면 폭파설은 말이 안 되는데, 폭파했다가는 근처 경복궁 전각 등에 진동+파편 피해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1995년 첨탑 철거 당시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그 옆에 있던 지하 유물보관소로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하며 한국 고건축을 연구했던 학자 후지시마 가이지로의 책인 <韓의 건축문화> 증보판 서문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쓰여있다. 역자인 이광노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쓴 서문인데, 자신이 1984년 교환교수로 일본에 가서 후지시마 가이지로를 만났을 때 후지시마가 "지금 조선총독부 청사를 국립박물관으로 쓰고 있다고 들었다. 총독부 건물 속에 한국의 반만년 역사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스모 선수가 승부에서 지면 상투를 자르듯, 이제라도 그 건물의 상투 부분(돔 부분)을 잘라 버려라"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고건축을 연구한 일본인 학자다운 말이다. 다만 일본인 고건축 학자가 상투 자르듯이 첨탑을 절단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반영되어 실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995년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은 중앙청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이전되었다.[6] 이후 차근차근 기계식으로 절단해서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철거해 나가 1996년에는 완전히 해체했다. 폭파한 적은 없다. 당시 철거 영상을 보면 마치 마지막 외벽 부분을 폭파하는 듯 보여서 이런 이야기가 퍼진 듯하다.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폭파설은 와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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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야 신난다

순수 건물철거비로 당시 돈으로 약 47억원이 소요되었으며, 이 때 중앙청 건물의 실측 및 영상자료, 모형제작을 합쳐 117억원이 소요되었다. 처음에는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보존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2천억원의 엄청난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어 무산되었다.

철거 결정이 내려진 이후 일본 정부에서 통째로 옮겨가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가, 이 발언에 열받은 김영삼이 바로 다음 날 폭파[7] 해 버리고 일본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던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8] 이때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일시적으로 70%를 넘었다 카더라.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의 최고 지지율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개혁 정책으로 인해 90%를 넘은 적도 있으니, 아주 믿지 못할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독립기념관의 건축과 조선총독부로 쓰인 중앙청의 해체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건축사적으로 의미있는 반일/극일 사례인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중앙청은 일제강점 86년, 건설된 지 70년(건설 시작부터는 80년)만에 이 땅에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로서 존속된 건 19년, 그 이후 중앙청으로서 쓰인건 51년 만이었다.

5.3.1. 청사 해체 논란

조선총독부 청사의 문제는 조선식민지배한 총독부의 건물로 세워졌다는 것 외에도 문제가 있었다. 경복궁의 흥례문 권역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어놓은 건물이라는 것. 거기다가 고의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경복궁을 가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원래 광화문과 근정문, 근정전은 일직선에 있어서, 왕이 근정전에 앉으면 육조 거리가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는데 그 앞을 완전히 막아버린 것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저 셋이 이루는 축에 맞지 않게 지어져서, 2006년 새로 복원하기 이전의 광화문은 총독부에 맞게 지어져서 각도가 약간 비뚤어져 있었다. 사실 이는 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지만, 일제의 악의였다는 주장이 끊이지 않는 논란점 중 하나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로, 총독부 해체 결정이 난 후 온 외신 기자(특히 일본)들이 관계자에게 이런 건축물을 왜 헐어버리냐고 하자 관계자 왈. "우리가 너네 왕궁을 허문 후에 총독부 건물을 세우면 좋겠냐?"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이 회수비용을 부담한다고 의사를 피력했기 때문에 일본에 팔아먹는게 이득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지만, 일단 일본이 회수한 뒤에 어떻게 치장해서 자신들의 업적(?)을 자랑할 지 걱정되는 것을 제외하고라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이라는 숙원사업을 진행할 것이 뻔한 상황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원형보존식의 회수보다 철거하는 방식이 우위로 여겨졌다. 이는 반일감정으로 대변되는 다수의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조치였기 때문에 단행될 수 있었다. 정부 내부에서 이전 복원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앞서 말한 대로 국민정서에 불합치한다고 여겨졌던 데다 이전 복원 비용이 신축 비용을 초월했다. 그러자 정부가 내린 결론은 그 정도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복원할 가치가 없다였다.

물론 이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많았다. 1995년 8월에는 일부 서울특별시 시의원들이 서울시의회에 청사의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이유로 "구 조선총독부 건물철거보류 동의안"을 제출하기도 하였으며, 1996년 6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 건물 보존을 위한 시민의 모임>이 서울지방법원에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었지만 모두 기각되었다. 강원용 목사의 철거 반대 의견에 대한 칼럼 또 일부 신문은 사설을 통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으며, 조선일보같은 경우는 4컷 만화로 역사적 자료가 사라진다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측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에 보존의 가치가 있다는 것. 특히 역사교육적 측면에선 상당히 아쉬울 수 있는 측면인데 일제강점기라는 잊혀지기 쉬운 치욕의 역사를 따로 보전하여[9] 이런 실제로 착취에 이용된 건축물을 유지하고 피식민지 피해 관련 전시(식민지 역사관)를 한다면 역사교육에선 큰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8.15 광복의 상징이기도 한 건물이며, 이후 중앙청으로써 우리나라 정부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이였다는 점이 그 것이다. 또한 경복궁의 복원에 대해서도, 이미 왕정이 폐지된 대한민국에서 왕이 살지도 않는 궁궐을 복원해 봤자 그것은 왕궁도, 문화재도 아닌 영화 세트같은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복원 반대의 소수 의견도 있었다. 물론 저우언라이에 의해 보호된[10] 자금성이 현재 중국에서 가진 위상을 고려하면 경복궁을 마냥 무시하는 의견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역사적 의미를 차치하고 20세기 초의 아시아의 주요한 건축물 중 하나로써의 가치로 인해, 철거에 대한 국내외 건축계의 극심한 논쟁이 오간 바 있다.

전면 철거보다는 국내 해체 이전 후 식민지 역사관 등으로 활용하자는 주장 등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짧은 시간동안 제대로 된 합의나 결론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이러한 논쟁의 결론이 제대로 나지 않은 상태에서 1995년 8월 15일에 정부는 철거식을 강행하였다. 다만 철거조치 당시 국민들의 지지는 높았으며, 이로 인해 문민정부의 지지율이 크게 상승하였다. 외환위기 전까지는(…)

5.4. 해체 이후

국립중앙박물관2005년에 현재의 용산구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임시로 쓰던 왕궁박물관 건물은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하다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왕궁박물관 건립에 291억원, 신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에 3,300억원 정도가 들어갔다. 다만 10년간에 나누어 집행되기 때문에 1년에 300억 정도 들어간 셈.

현재 철거지에는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경복궁 흥례문을 복원해 놓았고, 본격적인 철거 전에 행해진 첨탑 절단 행사 당시 잘린 첨탑과 일부 잔해는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독립기념관 부지내에 조선총독부 이전을 위한 부지를 마련해놓았는데, 그게 지금의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이었다. 하지만 이 장식물들의 전시 목적은 능욕과 보존을 동시 추구(…)한다는 것이라, 어떠한 보호 설비나 장치도 없이 사실상 방치되어 있고 관람객들의 오물 세례 속에 부식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없애버리지 저렇게 방치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지적도 많다. 뭐 어때 게다가 당시 철거 현장 주변에서는 조선총독부의 돌조각을 기념품으로 팔기까지도 했다(…).(실화) 다만 조각, 중앙홀 대리석 등 보존 가치가 있는 일부 자재는 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6. 건물의 가치

이 건물은 분명 20세기 초의 아시아의 주요한 서구식 건축물 중 하나로서 건축학적, 역사적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아시아에 건설된 서구식 건축물 중 규모나 장식 면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는 조선을 영구 지배하려고 했고, 그 때문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여 총독부를 지었던 것이다.

다만 당시 건축의 최신 흐름에는 뒤쳐진 매우 보수적인 양식이였으며 또한 한국인의 입장과 역사를 생각한다면, 그 가치에 대해 다 인정해주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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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학적 가치 : 건축 재료는 철근 콘크리트다. 물론 20세기의 여러 걸작 건축물들이 그렇듯이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다는 것만 가지고 싸구려 건물로 치부할 수는 없다[11]. 고전적인 양식의 석조건물의 모습을 차용해와 지었기에 구조적, 양식적으로 진솔하지 못하다는 평도 있지만, 사실 당시 20세기 초반에는 최신 소재인 철근 콘크리트를 가지고서 여전히 인기있는 석조 양식을 차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였으며 일종의 과도기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콘크리트 구조에 석조건물형식의 건축물로 지은 예로는 오귀스트 페레의 샹젤리제 극장이나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스보그성이 있으며, 유명한 안토니오 가우디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도 지난 수십년동안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건설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의 가치가 변하는건 아니다. 사용된 재료가 이탈리아에서 수입하였는등, 당시의 고급 자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건축 양식에 있어서는 서양의 네오 르네상스 양식을 독일인 건축가가 충실하게 기본 설계를 했지만, 그것을 그대로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가 뒤를 이어서 지은 것이라 창조적인 물건이라고 하긴 어렵다. 또한 당시 1920년대에 유럽에서 시작되던 당시의 모더니즘 건축에 비하면 시대에 뒤쳐졌다고 할 수 있으며, 한국동양의 전통문화적 맥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건축물이 되고 말았다.

    다만 일본건축사 기준에서는 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서구의 건축 양식이 근대기간 동안 동아시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터 그로피우스 같은 진보적인 건축가들이 활동하던 당시 세계 건축사 중심의 기준이라면 시대적으로 뒤쳐졌지만, 이러한 세계구급의 기준이 아닌, 당시 변방이지만 발전하고있던 일본 건축사 기준으로서는 조선총독부는 충분히 중요한 건축학적 가치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립적이거나 일본인이라면 모를까,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제국주의와 가혹한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모욕적인 건물이 단지 일본 건축사에 건축학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이를 고려해 줄 필요성은 극히 적다.

  • 미적 가치 :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장중한 미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양식의 미학적 가치에 충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절제된 장식을 부가했지만, 아무래도 그 수준이 서양 건축사의 기준에서 봤을 때는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 역사적 가치 : 이 건물의 가장 큰 가치이자 원죄라고 보면 된다. 일단 치욕적인 역사를 보존하여 후세에 반성과 자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크다. 또한 일제강점기 시절의 건축물이자 대표급이며 오랫동안 대한민국 정부와 국립중앙박물관 건물로써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보존상태가 양호했던 건축물이므로 근대건축유산에 들어갈 가치가 있다. 참고로 같은 일본근대건축물이자 역사적 가치와 건축학적 가치가 비교적 높은 한국은행 본관과 서울역은 현재 대한민국사적이다.

    다만, 아직도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일본에게는 다른 건축물과 달리 조선총독부 건물은 한국정복기념물로서의 가치가 압도적으로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정치 포스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그 역사적 가치가 더욱 떨어지게 된다. 철거 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구경하려 오는 외국인 관광객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본인 관광객의 경우, 과거의 잘나갔던 역사를 추억하기 위해 오는 것이라 한국인 입장에서는 진짜 껄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결정적으로 위에서 몇번 언급했지만 그 자리[12]가 문제다. 다른 자리에 있었다면 한국은행 본관과 서울역과 같이 보존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 경제적 가치 : 일단 구조는 철근 콘크리트라 경제적 가치는 높지 않고, 가치가 있는 것을 굳이 따지자면 외부에 있는 돌과 금속 외장과 실내 장식물들, 미술품 정도다. 참고로 총독부 건물 안에 있던 그림 등 여러 미술품도 같이 폐기처분하려다가, 몇몇 그림(일본인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라 일본에서는 엄청난 값어치를 인정받고 있다. 다만 국제적으로 좀 듣보잡)은 그린 일본인 화가들의 후손이 돌려달라는 요청을 하여 폐기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반환은 되지 않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물론 보관이지 전시가 아니다. 이 무렵 KBS에서 이 미술품들을 촬영하면서 다큐멘터리로 다루었는데, 일본한국식민지로 아주 오랫동안 가지리라 보고 일부러 조선총독부에 전시했다고 한다. 참고로 지하 구석에 대충 둘둘 말아서 통에 넣은 모습으로 당시 방송에서 약 650점이 넘는 그림이나 조각들이 보관된다고 나왔다. 그밖에도 벽화까지 있었는데 이건 정교하게 떼어냈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일본이 약탈해 간 한국문화재를 언급하면서 그리도 되찾고 싶다면 약탈 문화재와 맞교환하자고 했다. 이에 그 유족들이 어렵다고 하자 그럼 반환은 없다고 거절했다. (사실 유족들이 약탈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그들 입장에서는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부 사진. (1993년 1월 촬영)

여하튼, 역사와 경제의 잣대, 그리고 건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그 가치가 상당히 크게 달라진다는 점에 논쟁거리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6.1. 등록문화재

아이러니 한 것은 중앙청 철거로 인해 근대문화재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 되어서 2000년대 이후에 등록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근대 건축물 등에 대한 재평가와 보호제도가 생겼다는 점이 있다. 참고로 이 때 군산시동국사 등도 같이 헐려버릴 위기에 처했으나 살아남았고,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등록문화재는 법적인 강제성이 없어 보호기능이 미약하다.

7. 기타

여담으로 일본한국의 정기를 억누르기 위해 서울에 박아넣은 '日本'글자의 '日'에 해당한다는 풍설이 있었다. 실제로 건물이 '日'자처럼 생기긴 했었고, 당시 왜놈들도 이 떡밥을 좋아했는지 당대 일제의 3개 중추인 일본 국회,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가 모두 '日'자 형태로 생겨 제국주의 삼위일체를 이룬다는 말도 있었다. 물론 근거 없는 주장으로, 당시 서구식 건물들의 전형적인 형태 중 하나였다. 이 도시전설에 대해서는 일제풍수모략설 항목 참조. 여기를 읽을것을 권한다.

1990년대 박물관이 있던 시절엔 일본인들이 관광하러 와서 반드시 들르는 곳이었다. 덕분에 해체 직전 일본 관광객들이 꽤 늘었다는 후문이 있다.

우리와 비슷하게 대만총통부 청사는 1949부터 지금까지 대만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경우는 청나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역사적 문제(독립문제, 지방의 소외감,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 등등) 등이 얽혀,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본의 대만 식민 지배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하지만 중화민국에서도 총통부 청사로 대만 총독부 건물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일부 있기는 해도 대만 총독부 건물은 보존하면서 유지 중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항상 들리는 코스 중 하나.(…) 대만정복기념물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프롤로그 부분에 잠깐 모습을 비추는데, 2009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서 국회의사당처럼 건물이 조명으로 비춰지는 모습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상 자리에 대신 서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상이 그 앞에 떡 서 있는 모습이 우리나라 입장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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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휘장 가운데의 문장은 무로마치 시대 이래로 사용된 오동나무 문장이다. 정확히는 고시치기리(五七桐). 요토미 가문의 가몬으로도 사용되었고, 이 문장은 이후 대정봉환 후 일본 정부를 상징하는 도안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 [2]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궁중 의전상의 서열이 6위였다고 나온다. 대만 총독은 11위였다고.
  • [3] 대신 대만총독은 조선총독보다 의전상 서열도 낮았고, 형식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총리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문관 출신이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이다.
  • [4] 여담으로 이 사람의 악행이 너무 부끄러웠던 아들중국 공산당스파이가 되었다는데 출처가 없다. 확인바람. 항목에 따르면 적어도 큰아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아닌데? 큰아들인데?
  • [5]아키히토 덴노의 외할아버지.
  • [6] 이후 2005년국립중앙박물관용산구로 신축이전하게 되었고, 해당 건물은 궁중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되었다.
  • [7] 다시 말하지만 건물을 폭파한 적은 없다!
  • [8] 사실 이 발언은 당시 일본역사 관련 망언이 극에 달했기에, 김영삼장쩌민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후 공동 기자 회견에서 한 말이다. 관련 기사 이 때, 일본 내 웬만한 지한파, 한국통들도 '버르장머리'란 단어 자체를 해석 못 했었다는 후문이 있다. "「ポルジャンモリ」って何?!" 물론 오늘날에 와서는 속만 시원했을 뿐 정작 외교적 실리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발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속이라도 시원한 적이 별로 없어서 고평가인 듯
  • [9] 일단 지리적 요인과 중국이 급성장한다는 세계정세상 한국은 일본과 교류가 많을 수밖에 없어 왜정시기, 6.25를 겪지 않은 한국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 침략자라는 인식보다는 이웃이라는 인식을 가지기 쉬워지며, 실제 이를 이용한 구 친일 극우세력의 물타기와 어린 일빠들이 족족 등장하고 있다.
  • [10] 중국이 미쳐돌가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과 급진주의자들이 구 제국주의와 복고주의의 상징이라 여겼던 자금성을 때려 부수려 하였다. 이를 경비병까지 보내가며 보호한 것이 바로 저우 총리.
  • [11] 사실 당시 일본에서는 여기저기 콘크리트를 바르는 것이 유행같이 되어 있었다. 미륵사 5층 석탑의 경우만 봐도 당시 콘크리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미륵사의 유적을 하찮게 여겨서 콘크리트를 사용했다고 선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미륵사 석탑이 발라 놓은 콘크리트는 상당히 정교하고, 또 극히 필요한 만큼만 발라져 있었다. 당시 일본은 오사카 성이나 나고야 성을 대대적으로 개수하면서 다량의 콘크리트를 사용하기도 했다.
  • [12] 단순히 경복궁을 가로막고 광화문 뒤에 서 있는 것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흥례문을 파괴하고 지어진데다가 광화문을 중심으로 시청역-서울역으로 이어지는 가로계획상 중심부가 되는 위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