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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last modified: 2015-03-16 05:13:38 Contributors


(왼쪽부터 세종실록, 중종실록, 성종실록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시스템이 제작한 국역 조선왕조실록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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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이름 조선왕조실록
The Annals of the Choson Dynasty /
Annales de la Dynastie Cho-son
국가·소장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1997년
제작시기 1392~1863년

Contents

1. 소개
2. 편찬
2.1. 세초(洗草)
3. 보관, 그리고 수난
4. 현대화 노력
4.1. 영인
4.2. 번역과 전산화
5. 위대함
5.1. 옥의 티
6. 이모저모
6.1. 실록 전산화의 영향
6.1.1. 사극
6.1.2. 교양서
6.1.3. 그 외
7. 조선왕조실록의 목록과 분량
7.1. 고종실록, 순종실록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개설한 무료 열람 홈페이지

영어 명칭은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는 대략 '연대기' 정도의 의미이다. 이 단어는 라틴어 annus에서 유래한 말로, annus는 연(年)이란 뜻이다. anniversary, annual 등에도 라틴어 어원이 반영돼 있다..

1. 소개

조선 정부가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편찬한 실록을 총칭하는 말. 한민족 기록문화의 정수이며 한국에서 역사 좀 배운다는 사람이라면 한번은 봐야 할 사료의 바이블.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도 있지만, 일제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실록이고 기존의 실록과 편찬 방식의 차이점이 있으며 심각한 역사 왜곡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실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어쨌든 승정원일기성록을 이용하여 당대에 쓰여진 사료인데다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만 현실은 시궁창. 사료로서의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교차검증용 참고 자료 이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대한민국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기도 하다.

2. 편찬

먼저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 대에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해 선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실록청의 구성원이 모두 춘추관의 구성원이었으니 춘추관이 실록을 편찬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춘추관원들도 모두 겸직이었다.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史草)뿐만 아니라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조보(朝報) 》(오늘날의 관보), 《비변사등록》, 《일성록》등이 중요한 1차 자료였다. 해당 1차 자료 중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첫 단계는 실록청을 도청(都廳)과 1~3의 방(房)으로 나누어,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初草)를 작성하는 것이다. 또 세종, 성종과 같이 분량이 많은 실록의 경우 방을 6개까지 늘렸다고 한다.

둘째는 도청에서 초초를 편집해 중초(中草)를 작성하는 것이었고,

마지막으로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正草)를 작성하면 실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완성된 실록을 사고(史庫)에 보관하기에 앞서 초초와 중초를 시냇물에 세초하였는데, 그것은 하위 항목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2.1. 세초(洗草)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를 기록한 종이들을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초식은 실록 편찬의 '쫑파티'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세초식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기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실록 편찬 과정은 세계적인 역사기록의 편찬 과정이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록 말살의 과정인 셈이기도 한데,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정초본에 없는 광해군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세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물자를 아끼기 위해선데 왕도정치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꽤 가난하게 정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모든 물자를 귀하게 여겼고 그런 조선정부에게 초조본과 중초본의 제작에 들어가는 종이는 무척 큰 지출이었다. 여기에 두 가지의 판본 외에도 사료 편찬을 위해 왕의 재위기간동안 사관들이 열심히 왕을 깐 여러가지 일을 기록한 원본사료인 사초에 쓰인 종이까지 합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의 양을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은 정초본이 완성되면서 필요성이 줄어든 다른 사료들을 전부 세초해버리는 것. 는 세초작업을 통해 먹물을 빼낸 뒤 잘 말리면 다시 사용이 가능하다.

두번째 이유는 뒤에 나올 연산군조의제문사건이다. 연산군 이전까지는 왕이 실록을 열람할 수 없다는 금기가 지켜져실록편찬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물론 이를 깨보고자 시도한 왕도 없는건 아니었지만 넌지시 말을 꺼내볼 때마다 대신들의 격렬한 항의를 이기지 못하고 전부 뜻을 접었다. 이성계도 "니네들이 나 어떻게 써놨는지 읽어보고 내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 싶음."이란 얘기를 꺼냈다가 신하들이 "너님 통치의 귀감으로 삼을려면 전대의 역사책만 읽어도 충분하거든요."라고 나오자 더 말을 못 한 적이 있다. 참고로 이 실록 내용은 수능 언어영역 기출이다(물론 국역본). 그런데 연산군이 실록의 기록을, 그것도 실록이 완성된 형태로 편찬되기 전에 사관들이 보고들은 바를 자유롭게 기록한 원본인 사초를 억지로 열람한 사건을 겪으면서[1] 사관을 비롯한 대신들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다듬어서 완성된 형태로 만든 실록과는 달리 사초는 그야말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상황과 사관의 생각이 여과없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게 왕의 손에 들어가고 그걸 읽은 왕의 심기가 불편해질 경우 목이 달아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연산군이 한 번 전례를 남겼으니 또 다른 왕이 비슷한 일을 시도하지 않을거란 보장이 없었으니 대신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 자체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중종 때 대대적인 세초작업이 이뤄짐과 아울러 세초작업 자체가 의무로 규정되기 시작하여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뒀던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연산군 이후 그런 막장짓을 한 임금은 없었다. 애초부터 금기시 되어 왔던 일인데다 연산군 이후 사초 열람을 시도하는 것 자체가 나는 연산군급의 폭군이다!하고 자랑하는 짓으로 규정되어 사초를 보자는 요구 자체가 폭군의 증거가 되어 버렸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기록물'인데 왕이 실록을 참고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이 실록을 직접 읽는 방식은 아니었고, 조정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전례를 찾아보기 위해서 왕이 사관에게 지시를 내려서 열람하여 기록을 찾도록 했다.

이 작업 때문에 사라진 어마어마한 분량의 초초와 중초, 생생한 현장 자료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애석하게 여기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나마 조선 후기는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다른 자료들도 남아있지만 조선 전기는...그런데 이렇게 해도 웬만한 나라의 역사기록을 모조리 합친것보다 많다는 것이 함정

3. 보관, 그리고 수난

컴퓨터하드디스크도 없던 그 시절에, 백업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 보여주는 사례. 고려실록도 궁궐에 1부, 해인사에 1부 두 부를 만들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항상 4~5부를 만들었다.

《세종실록》때부터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춘추관에 보관할 정초본 이외에 활자로 3부를 더 인쇄, 간행하여 충주, 성주, 전주의 4개 사고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3부밖에 안되는 데 굳이 활자로 인쇄한 이유는 복사본이 모두 동일하게 만들어지도록 한 조치이다. 3년에 한번씩 꺼내 볕에 말려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겉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세조 12년(1466) 11월 17일에 상소를 올렸다. 양성지는 "춘추관은 어쩔 수 없지만, 지방에 있는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장차 외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도 있으니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가령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고 땅을 지급해서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72년 후인 중종 33년(1538) 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부터 연산군까지의 실록이 전소되자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필사해서 성주로 보냈는데, 사고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그로부터 54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실록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이 때 경복궁 춘추관에 있던 고려왕조실록 외사고본이 유실되었다. 내사고본은 이미 고려말 홍건적의 난으로 궁이 불 탈 때 유실되어서 현재 고려실록은 이 때 전부 유실되었다.) 양성지가 우려했던 사태가 모두 현실화된 것이다. 전주 사고본도 선비 둘(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전주의 유생이었다)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정부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 지킨 것이다.

이후 광해군 때 춘추관,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의 5대 사고를 마련하고 전쟁 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출판, 합해 모두 5부의 실록이 갖추어졌다. 이 중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버렸고 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에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적상산 사고본은 창덕궁 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오대산 사고본은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나 관동대지진 때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소실되었다(...).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의 명령으로 월북한 사학자 석형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점령 이후 평양으로 이송된 뒤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보다 먼저 번역된 '리조실록'의 원전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도중 수차례 폭격 맞을 뻔한 기회를 넘기고 천운으로 살아남은 실록본이다. 분명히 피난갈 때 부산행 기차에 실어서 출발한 것을 확인했는데 불구하고 실록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한국전쟁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힌다.

최종적으로 한국에는 2종류의 사고본이, 북한에는 1종류의 사고본이 남아 오늘날에 전해졌다.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태백산본은 부산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다. 남아있던 오대산 사고본은 2006년에야 한국에 반환되었다.

이렇게 보관을 철저하게 했어도 현재 남아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00% 온전하지 못하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주 사고본의 문종실록 11권이 파본이었기 때문이다. 인쇄 실수로 9권에 11권 표지가 입혀진 것이 그 원인으로 그 이후 판본은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했기에 문종실록 11권은 소실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4. 현대화 노력

4.1. 영인

영인(影印)이란 도서, 그림 등의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요새 감각으로 말하면 스캔본.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사진판으로 영인한 적이 있었고, 해방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955년부터 4년 간에 걸쳐 태백산본을 영인해 A4크기의 양장본 48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는 영인이 아닌 책을 그대로 복제하는 복본 제작과정이 진행중이다. 가쿠슈인에서도 영인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55년까진 이조실록이라고 불렀으나 이조가 멸칭이란 주장이 대두되어 1955년 10월 12일 조선왕조실록으로 공식적으로 개칭했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리조실록이라 부른다.

4.2. 번역과 전산화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6.25 도중에 서울에서 입수한 판본을 바탕으로 1980년 모두 400권으로 번역이 되어 '리조실록'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남한에서 고유명사와 용어를 살린 것과 달리 북한은 대중서를 지향하여 공식용어나 표현을 모조리 현대어로 고쳐서 내놓았다. 가량 주상이 종친을 거느리고, 란 표현은 임금이 가족들 데리고로 고쳐졌다. 남한에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주관하여 번역 작업에 들어가 1993년 말에야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되었다.

1994년 4월 문화체육부, 교육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민족문화추진회, 서울시스템(주)의 합의로 '조선왕조실록 CD롬 간행위원회가 발족되어 전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95년 CD롬 초판이 간행되었고 이후 1997년에 1차 개정판, 1999년에 2차 개정판이자 보급판이 출시되었다. 뒤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별도로 CD롬으로 제작했으며 원문 전산화도 뒤이어 이루어졌다.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유롭게 무료로 국역본과 원본을 열람할 수 있어서 역덕후들은 올레!

조선왕조실록 전산화는 전세계 지식인들은 물론 한국의 많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거 만들면서 수많은 오류와 새로운 발견이 많이 됐다고 한다.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도 이 전산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현재도 꾸준히 증역, 오역 수정 등으로 보완 중에 있다.

5. 위대함

권수나 책수로는 대명실록이나 청실록에 비해 적지만, 내용의 풍부함과 상세한 묘사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편년체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권 수 자체는 적지만 글자 수는 조선왕조실록이 오히려 많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던 거대 제국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문명 5에선 처음엔 도시국가로 나왔던 그 쬐끄만 조선 땅덩어리에서 중국의 국찬사서랑 맞먹는 분량의 역사책이 나왔다는 게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단순한 국가의 정무뿐만이 아니라,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서로 평가받는다.(분류가 역사서고,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이지. 그 실체는 1400년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동아시아의 데이터 베이스.다른 미티어 컨텐츠에서 가끔 나오는 지구책장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했듯이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체계가 확고하게 잡힌 관료제 사회였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여진족(혹은 만주족)의 중흥을 연구하는 데는 1차 사료로 꼽힌다. 청나라 건국 전에 만주족 스스로 남긴 사료가 거의 없는데, 조선에서는 북방을 항상 관심지역으로 간주해서 열심히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 옥의 티

지방 기록이 중앙 기록에 비해적다는 점.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앙 기록의 꼼꼼함이 원인임을 잊지 않도록 하자.

사신은 논한다.(史臣曰)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사관이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논평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사관도 사람이니만큼 가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당파에 치우친 생각을 적어 놓았다. 사관의 평을 읽으면 공감이 가거나 통쾌할 때도 있고,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도 있다. 실록에 풍부하게 기록된 사실을 읽어보면 사관의 평이 옳은 지, 그른 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또 사료가 중간 중간 왕이나 왕실, 세도가의 압력으로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빠진 경우도 존재한다,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의 최후나 영, 정조때 사도세자 관련 기록, 계유정난과 세조의 왕위찬탈 등이 대표적인 예.

6. 이모저모

  • 국사 교육과정에서 조선분량 ≥ 그 이전의 모든 분량 현상이 나타나게 된 주요 원인. 조선시대 이전 역사가 쓰여진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은 모든 서적을 합쳐도 실록 하나보다 양이 적다. 그만큼 실록의 분량이 초월적으로 방대하고 자세하며, 조선시대 이전의 사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과 같이 역사서 집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은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반란이나 전쟁등의 이유로 보관되어있던 전대의 역사서가 소실되어 버렸단 것이다. 한국사에서 사서의 대규모 소실이 있던 대전쟁만 해도 최근 1천년간 3개나 있다. 여몽전쟁, 임진왜란, 한국전쟁. 특히 고려왕조실록이 제일 큰 피해를 봤다. 여요전쟁, 여몽전쟁, 임진왜란 3연타로 결국 존재가 말소되었다. 조선왕조실록 또한 한 부만 찍어서 보관했었다면 대부분의 실록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여러 부를 뽑아서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 소실을 겨우 넘겼다.

  • 몇몇 경우에는 중국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기도. 나라 궁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사에는 치부를 감추기 위해 기록을 없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당시 고문을 당했던 조선 출신 궁녀의 증언으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피해자도 둘 다 조선 출신 였다. 중국인 여씨가 조선에서 온 여씨에게 성도 같으니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영락제의 총애를 받다가 마침 급사한 조선 공녀 출신 권씨를 여씨가 독살했다고 무고한 것. 여기서 조선 출신 후궁들 여럿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은 조선으로 도로 방출당했는데, 그녀들의 증언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덕분에 명나라 궁중의 잔인한 고문법을 현대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 이렇게 기록이 많이 남을 수 있었던 건 조선 사관들이 그만큼 근성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관들은 자세한 기록을 위해 왕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한 예로 사냥을 나간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자 부끄러웠는지 '사관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한 일이 있었는데 이 내용이 그대로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즉 왕이 알리기 싫어한 일조차 기어코 사관들이 알아내어 기록에 남겼고, 후대에도 그걸 없애지 않고 편찬까지 했다는 얘기. 태종 4년 2월8일 4번째기사 "임금이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졌으나 사관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하였다."나의 낙마를 사관에게 알리지 말라 사관 찾았다
    아닌게 아니라 태종때 민인생이란 사관은 경연때 왕이 말하는걸 들으려고 병풍뒤에서 숨어있던 경우도 있었고, 평범한 연회때도 기록하려고 초대도 안받고 불쑥 나타나지 않나. 태종때 이름모를 사관은 왕과 중전등이 거주하는 내전에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흠좀무. 이정도면 거의 스토커나 파파라치 저리가라 수준.
    이 때문에 왕은 사관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이 벌을 내리는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올려서 터진 것 정도로 알고 있으나 세조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기사들을 많이 실었었다. 결과는 피바다.... 그리고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선 영조가 사관들에게 '죄인의 흉악한 말을 쓰지마라'고 하자 사관이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쓸 수 없었습니다'라고 맞장구치며 설설긴 모습도 있다. 이 얘기가 지금 여기 써 있다는 건, 앞에서는 그렇게 말해놓고 어느 책인가에는 적혀내려갔단 뜻이겠지 아닌게 아니라, 30년 후 신치운이 경종 독살설과 게장을 언급하며 영조의 이성을 잃은 틈을 타서,지금 신치운의 게장 드립이 지난 이천해의 그 말과 같다 라고 재치있게 기록했다.

6.1. 실록 전산화의 영향

6.1.1. 사극

수많은 사극이 실록의 전산화 덕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국 사극작가들의 애증이 교차하는 공포의 책

쉽게 검색을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인물들을 찾아내서 대입한다든가, 새로운 해석이 많아졌다. 진짜 검색만 해보면 다나오는 수준이다.

그 전에는 나이먹은 남자(즉, 제도권의 역사 교육을 받은 연륜이 많은) 작가만 사극을 썼는데, 지금은 젊은 여성(제도권의 역사 교육 지식도, 연륜도 전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작가가 사극을 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트랜디 사극의 주범 조선왕조실록. '나이먹은' 세대에 여자가 대학 교육을 받는 일이 얼마나 희귀한 일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그것도 사학 같은 순수학문이면.

조선시대 사극이 이전에는 연산군, 단종, 장희빈 같은 몇몇 소재만 수십번은 우려먹었지만, 지금은 온갖 퓨전 사극이 나올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뭐 꼭 이런 자료가 있어야 퓨전 사극이 나오는건 아니겠지만.

다만 이렇게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덕에 아니러니하게도 사극작가들을 공포에 떨게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록의 데이터가 워낙 방대하고 상세하여서 약간의 고증오류만 내더라도 전국의 역덕들이 미친듯이 물어뜯기 때문. 실록이 존재하는 한 고증오류는 사극작가들이 피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뢰밭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딴에는 열심히 조사하고 '이쯤이면 완벽하겠지' 싶다가도 역덕들은 실록을 통해 귀신같이 오류를 찾아낸다. 그리고 작가들은 아예 대놓고 퓨전사극으로 가거나, 조선시대를 피해서 삼국시대를 우려먹겠지

6.1.2. 교양서

검색만 하면 교양서 하나가 나온다.

서점가에는 조선시대 교양서가 범람하게 되었다. 기록이 방대해서 책쓰기 자료로도 참 좋다. 대충 주제 하나를 잡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서 기사를 좀 복붙한 다음, 적당히 자신의 을 덧붙이면 그럴듯한 역사교양서가 하나 나온다. 책 쓰기 참 쉬워졌다. 실록이 공개된 후로 조선왕조를 다룬 책들은 거의 다 이런 상황이다.

하지만 실록만 대충 훑어보고 사료를 자기 주장에 들어맞는 것만 쥐어뜯어서 쓴 불쏘시개 수준의 역사교양서도 참 많이 나오는 것이 문제. 대표적인 예가 원균명장설. 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에 대해 찬양한 발언만 적당히 짜맞추고, 다른 기록과 신하들의 의견과의 교차 대조는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합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은 실록 이외에 신뢰할 만한 사적 기록도 상당히 많은데, 원균명장설에서는 오직 '원균행장'만을 취사선택한다.

6.1.3. 그 외

  • 자기 조상님의 을 찾아보려고 검색했더니 탐관오리였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견하기도 한다.(…)[2]

7. 조선왕조실록의 목록과 분량

실록의 분량을 말할 때 쓰는 '권'과 '책'에서 '권'은 내용상의 분량을 나눈 단위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종이를 묶은 단위를 뜻한다. 즉 현대 감각상의 '장(챕터)'이 당시의 '권'이고, '권'이 당시의 '책'이다.

  • 태조실록(15권 3책)
  • 정종실록(6권 1책) : 숙종 때에 묘호를 받았기 때문에 실록 속 표제는 전부 '공정왕실록'이라고 적혀 있다.
  • 태종실록(36권 16책)
  • 세종실록(163권 67책) :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유일하게 오례, 지리지, 악보, 칠정상 내외편이 별도로 포함되어 있어 편년체 사서와 기전체 사서가 혼합된 듯한 형식을 보여준다.
  • 문종실록(13권 6책) : 문종 1년 12월에서 2년 1월까지 다룬 11권이 표지만 11권이고 내용은 9권이기 때문에 전체 실록 중 유일하게 공백이 있는 실록이다. 원인은 인쇄 중 실수로 표지와 내용이 바뀐 책이 전주사고에 봉인된 바람에 생긴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다른 사고에 아마 표지만 9권이고 내용이 11권인 문종실록이 있었다는 것이다. 선조 33년 예문관 대교 권태일이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열람하다가 문종실록의 표지가 11권인데 정작 내용은 9권의 내용이 거듭 실린 것을 확인했다. 이 때 권태일은 분명 처음에 인쇄하여 나누어 저장할 때 권질이 잘못되어 서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훗날 영조 9년 누락이 재확인되어 오대산에 있는 실록을 전서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오대산에 있던 실록도 결국 전주에 있던 실록을 복사한거라 의미가 없었고 결국 문종실록 11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단종실록(14권 6책) : 숙종 때에야 묘호를 받았기 때문에 실록 속 표제에는 전부 '노산군일기'라고 적혀 있다.
  • 세조실록(49권 18책)
  • 예종실록(8권 3책)
  • 성종실록(297권 47책) : 권수가 가장 많은 실록. 원래 실록의 권 편성은 보통 1년치를 한 권으로 편성하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반년치나 2개월치를 한 권으로 편성했지만 성종실록은 기사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그냥 1개월치를 한 권으로 편성해 버려서 이렇게 되었다.
  • 연산군일기(63권 17책)
  • 중종실록(105권 53책)
  • 인종실록(2권 2책)
  • 명종실록(34권 21책)
  • 선조실록(221권 116책) : 임진왜란으로 인해 관련 자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임진왜란 이전은 극히 소략하다. 반면 임진왜란부터 선조 말까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대거 들어가 분량이 비대해졌다. 선조 24년(1591년)까지가 25권 뿐인데 비해 선조 25년부터 41년까지는 196권이다. 그나마 선조 25년이 1월부터 3월까지가 빠졌음에도...
    • 선조수정실록(42권 8책) :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편집 주체가 되어 북인이 편집한 선조실록의 내용을 수정한 것. 효종 대에 완성되었다. 이이, 성혼 같은 서인 인사들에 대한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는걸 목적으로 수정된 것이다. 서인만 좋게 쓰면 눈치 보여서인지 유성룡 등 대북파에 의해 폄하된 남인도 좋게 써준 기술이 많다. 하지만 생각보다 고쳐진 부분은 많지 않다. 원균명장론이나 만양병설 같은 떡밥들과 관련이 있어서 관련 논쟁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실록.
  • 광해군일기(중초본)(187권 64책)
    • 광해군일기(정초본)(187권 40책)
  • 인조실록(50권 50책)
  • 효종실록(21권 22책)
  • 현종실록(22권 23책)
    • 현종개수실록(28권 29책) : 남인이 편집 주체가 된 현종실록의 내용을 경신환국 이후 서인이 집권한 후 개수한 것. 고쳐진 실록 중 가장 많은 범위가 고쳐졌다. 고쳤다기보다는 아예 실록을 새로 하나 더 만들었다고 봐도 되며 기존의 현종실록보다 분량도 더 많다. 그 유명한 예송논쟁 떡밥.
  • 숙종실록(65권 73책)
    • 숙종실록보궐정오 : 노론이 편집한 숙종실록을 소론이 집권하자 고친 실록. 그런데 가장 고쳐진 부분이 적다. '보궐정오'는 고쳐진 부분을 기존의 숙종실록 권말에 '어느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쳤다'는 식으로 수정부분을 부록 형식으로 끼워 넣은 것.
  • 경종실록(15권 7책)
    • 경종수정실록(5권 3책) : 소론 집권기에 편찬한 경종실록을 노론이 집권하자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 노론에 대한 불리한 기록이 삭제, 수정되고 상대적으로 소론에게 불리한 기록이 실려 있다.
  • 영조실록(127권 83책) : 처음 받은 묘호가 '영종'이었기에 표지에는 '영종대왕실록'이라 적혀 있다.
  • 정조실록(54권 56책) : 처음 받은 묘호가 '정종'이었기에 표지에는 '정종대왕실록'이라 적혀 있다.
  • 순조실록(34권 36책)
  • 헌종실록(16권 9책)
  • 철종실록(15권 9책) : 순조 ~ 철종대의 실록들은 세도 가문에 불리한 기록이 대부분 삭제되는 등 이전 시기의 실록에 비해 분량이 적고 서술 자체가 빈약하다.

  • 총합 1894권 888책

7.1. 고종실록, 순종실록

  • 고종실록(52권 52책)
  • 순종실록(22권 8책)
  • 순종실록부록: 경술국치 후 조선의 정세를 기록해 놓은 책이나, 왕조가 망하고 난 뒤의 이야기니 엄밀히 말하면 실록이라고는 할 수 없는 셈이다.

위의 실록들은 실록의 이름을 하고 있으나, 조선멸망 후 일제강점기에 씌여져 상당 부분이 일제의 의도에 따라 왜곡되어 실록 목록, 유네스코 목록 모두 빠져 있다. 이것 때문에 두 실록을 재편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지다가 2017년까지 신편 고종시대사를 편찬하기로 했다. 고종시대사는 1960년대에 편찬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으로 2017년까지 15억을 들여 여러 사료들과 전거를 들어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향후 고종실록, 순종실록이 재편찬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재편찬 논의는 그렇다고 쳐도 고종실록, 순종실록 모두 《승정원일기》《성록》등의 주요 관찬사료를 채택하고 있다. 거기다 주요 조서ㆍ칙령ㆍ법률ㆍ조약문 등을 망라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을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엄밀한 사료 비판을 하면서 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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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다만 이건 무오사화가 일어날 당시 사초에 기록된 기사의 문제도 있었다. 무오사화, 김일손 항목 참조. 그리고 그 연산군도 아무렇게나 본 것도 아니었고 대신들이 문제가 된 부분만 추려서 왕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열람했다.
  • [2]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나라에서는 족보 위조가 너무 흔했기 때문에 자신의 조상이 사실 자신의 조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근데 이럴 경우 양반인 줄 알았던 자기 집안이 사실 평민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함정 천민일수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