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조비

last modified: 2017-10-19 19:36:50 Contributors

Contents

1. 의 초대 황제 문제
1.1. 개요
1.2. 즉위 이전
1.3. 정치적 역량
1.4. 시인 조비
1.5. 찌질한 조비
1.5.1. 불효자
1.5.2. 원한은 꼭 갚는다
1.5.3. 뛰어난 형제들에 대한 질투
1.5.4. 조강지처 진씨를 폐하다
1.5.5. 항장에겐 따뜻하겠지?
1.6. 남방 정벌의 실패
1.7. 평가
1.8. 각종 미디어에서의 묘사
2. 비료 생산 전문업체 조선비료공업
3. 고려 충선왕의 4비

1. 의 초대 황제 문제

조위의 역대 황제
태조 무황제 조조/조위 건국 1대 세조 문황제 조비[1] 2대 열조 명황제 조예

묘호 세조(世祖)
시호 문황제(文皇帝)
연호 황초(黃初, 220년 10월 ~ 226년)
조(曹)
비(丕)
자환(子桓)
생몰기간 187년 ~ 226년 5월 17일
재위기간 220년 11월 25일 ~ 226년 6월 29일

1.1. 개요

曹丕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 이자 희대의 싸이코.

역사적으로는 최초로 남방정벌을 통한 중국 통일에 실패한 북조의 군주이기도 하다.
삼국지는 물론, 위진남북조시대는 조비가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몰년도 187~226년. 재위 220 ~ 226. 자는 자환(子桓).

조조의 3남으로, 무선황후(변부인)의 소생.[2] 위나라의 왕위를 물려받은 후, 후한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의 초대 황제 문제(文帝)가 된다. 묘호는 세조. 본디 위로 조앙(曹昻)과 조삭이란 형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젊은 때 죽은 이후 조비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흔히 조비가 장자 또는 차남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항목에서 그를 3남이라고 하는 이유는 조앙, 조삭과 조비의 나이 차이 때문이다. 조비를 차남으로 가정한다면 조비는 187년생이고 조앙은 175년생으로 조조는 무려 12년 후에 둘째 아들을 본 것이다. 더구다나 조앙의 생모 유부인은 조앙, 조삭을 아들로 두었는데, 유부인이 일찍 죽어 유부인의 두 아들은 조조의 정실 정부인에게 입적되었다. 만약 조삭이 조비의 아우라면, 유부인이 요절했다는 말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유부인이 일찍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앙-조비간의 나이가 12살이나 차이나기 때문에 조앙이 장남, 조삭이 차남, 조비가 삼남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아내로는 문소황후 진씨('견희')와 문덕황후 곽씨(곽귀빈, 곽여왕)가 있다.

1.2. 즉위 이전

후한 영제 중평 4년(187년) 겨울에 태어났다. 푸른색 구름의 기운이 둥근 모양으로 (황제가 타는) 수레 덮개처럼 걸쳐 있다가 하루 만에 없어져 버렸는데, 이것을 바라본 자들은 지극히 존귀한 증거라고 생각하였다. 태어나기 9년 전인 176년에 초현에 황룡이 출현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은 220년 3월에도 황룡이 출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언플[3]

창업-수성 군주에 대한 묘사가 대부분 그렇지만 나이 여덟에 이미 붓을 잡으면 그대로 훌륭한 시가 되었고, 각종 경전과 제자백가 서적을 모조리 꿰뚫었으며 궁마술과 검술에 정통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조비 자신이 직접 썼던(…) 자전에서의 묘사를 후대 사서들이 그대로 따른 것인데, 아 자전의 전반적인 내용 자체가 좀 중2병적인 느낌이 강해서 다 믿긴 그렇다. 별다른 활약 없이 태자가 되었던 조비의 자기 PR정도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조비의 과시욕은 유별난 수준이었는데, 위왕 시절 남방 종군에 순욱(荀勗, 동명이인)이 칭찬했을 때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자랑을 할 정도로(…) 문무에 능하다는 자부심 혹은 자뻑이 강했다.

소년기의 기록은 많지 않으나 자전의 내용에 따르면 조조가 완의 장수를 정벌(197년)할 때 10살로 종군하여, 형 조앙과 사촌 조안민이 죽는 와중에도 말을 타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204년, 조조가 원소의 아들 원상을 칠 때 종군해 원희의 처인 견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때 조비의 나이 18세. 이전 버전에서는 조조가 원소의 가족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그랬을 기록은 없고 《세설신어》의 근거없는 루머를 제외하면 관련 기록도 없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문소견황후전〉에 주석으로 언급된 《위략》에 자세한 묘사가 나오고, 《삼국지연의》에서 조비가 견씨를 보쌈하는 장면은 《위략》의 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후한서》 〈공융열전〉에서는 조조가 업성을 도륙하고 원소의 딸과 며느리를 비롯한 원씨 가문의 여성들은 대부분 조씨 일족에게 강간당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업성 점령 직후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행위가 있었으며, 조조가 원소의 가족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서 아랬사람들은 이를 지켰을지 몰라도, 정작 조비를 비롯한 조조의 친인척들은 아랬도리를 마구 후리고 다녔다는 것(…). 다만 조비는 견씨를 정실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아예 전리품 취급 당하던 다른 원씨 일족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상황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예 아내로 삼았다는 것 자체도 웃기긴 마찬가지라 조조는 이 행위가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을 염려했고 실제로 여론이 그랬다. 한편 공융은 이를 두둔해주는 척 하면서 조조를 경전도 제대로 모르는 무식한 사람 취급하는 등 이중으로 굴욕주며 조록하기도 했는데, 《세설신어》에서 조조가 업을 점령 한 이후 견씨를 품으려 했으나 이미 조비가 데려갔다는 말에 "이번에 전쟁을 벌인 것은 그 계집 때문이었는데 자식놈한테 빼앗겼다." 고 분노하는 답없는 호색한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 기인한 것.

이후 조조가 고간의 난을 진압하러 나간 사이에 업에서 사냥과 음주가무에 열중하는 것을 들어 아버지 위세가 강해지는 것만 믿고 사치향락에 빠졌던 원소의 자식들과 똑같다고 최염한테 까인 적이 있다. 조비는 당장 이를 시정했다고 하나 이런 행보는 황제 즉위 이후까지도 계속되었기에 일시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수의 최후에도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장수는 207년 조조가 오환에게로 도주한 원상을 추격해 유성을 공격할 때 같이 종군했지만 유성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장수전〉 본전에서는 그냥 오환을 정벌하러 유성으로 갔으나 이르기 전에 '죽었다'고만 나와서 [4] 내막을 알기 어렵지만 《위략》의 주석에 따르면 조비가 하도 갈궈댔기에 불안감에 휩싸여 자살했다는 것.

적게나마 남아있는 소년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아버지의 위세만 믿고 방약무인해 아버지인 조조의 정치적 입장을 다분히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충동적인 성향이 강한데, 이후 후계구도에서 동생들에게 위협을 받은 것은 이런 성품의 문제가 크다는 견해가 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근본적인 성격이 변하지는 않았다.

건안 16년(211년) 한수마초의 난에 종군했고 이후 이 공으로 오관중랑장이자 부승상이 되었으나, 후계 경쟁에서는 아직 확고하지 못했다.[5] 이에 가후에게 대책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인덕과 관용을 발휘하고 숭상하며,평범한 선비의 업을 행하고,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하며,아들의 도리를 그르치지 않으면 됩니다."

결국 가후가 조조가 위왕에 오른 뒤(216년)에야 원소와 유표의 예를 들어 설득하여 다음해 세자의 자리가 확고해졌다(217년). 흥미롭게도 야사집인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이 당시 조조가 자신을 세자로 세운 것이 급하다 생각하여 의아해 했다고 한다. 님 서른 한살이고 3년 뒤에 즉위함. [6]

220년 2월 아버지 조조가 죽자 승상과 위왕에 올랐고, 가후를 태위, 화흠을 상국, 왕랑을 어사대부에 삼고 3월에 하후돈대장군에 봉했으나 하후돈은 4월에 세상을 떠났다. 6월 열병하고 남방정벌을 떠났으나, 이릉대전 시기이므로 실제적으로 개입은 못했고 무력시위 겸 명분 다지기[7]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8월에 봉황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또 나왔고(…), 조비는 초현, 곡려 정도에서 노닐다가 손권이 헌상하고 맹달이 투항하는 정도의 성과에 그쳤다. 그런데 사냥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헌제에게 10월 28일(경오일) 선양을 받았다. 연호를 황초로 삼고, 헌제를 산양공으로 삼고 상서에서 "신(臣)"이라고 쓰지 않게 했다는 이야기야 하도 유명하니 통과. 평화적인 정권교체였던 건 사실이다.

1.3. 정치적 역량

선양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조비는 재위 기간 내내 제도의 확립과 민심의 안정 그리고 유학의 부흥에 힘쓰는 등 난세를 끝내고 태평성대를 이끄는 통일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제도적인 면에선 행정구역을 재확립하고 인사제도를 정비해 구품관인법을 실행한다. 한편으론 관료간의 상사 탄핵에 제약을 가했는데, 이는 고위 관료와의 타협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어떤 측면에서 관료기구 내의 질서를 확립한 거라고도 할 수 있다.

구휼책이나 사면령을 종종 내려 민심의 이반을 제지하고자 했다. 심지어 연·예주 일부지역 한정으로 세금 면제책도 시행하기도 했다.

유가부흥책도 역시 사회의 안정과 전통적인 향촌질서를 부활시키고자 한 정책으로 보인다. 유학의 부흥을 위하여 즉위 직후(221년 2월) 노군에 공자의 묘당을 다시 세우고 주변 일백호에 그를 관리하게 하는 한편 제사규칙을 재정하고, 더 나아가 장례제도를 개선시킨다. 그리고 저술사업을 시행해 유학경전을 편찬 천여편에 달하는 '황람'을 출간한다.

뭔가 괴리감이 들겠지만 치세 내내 유가적 덕목의 권장에 힘써 왔다. 한나라 말엽의 당시 비관적, 회의주의적 경향의 사고가 지식인계 전반에 만연했다는 점에서 조비의 유가진흥에 기울인 노력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본인이 천대하던 인물들, 그러니까 동생과 동생 친구 및 그 후학들이 도학현학에 손을 대는데… 정통성 측면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한편 제도의 정비 측면에서는 많은 논란을 겪고 있는데, 10만 명당 1년에 효렴 한 명씩을 추천하게 했던 기존 후한의 향거리선과 달리 우수한 인재가 있다면 굳이 이런 제약을 두지 않았으며 또한 각 지역에 중정관이라는 심사관이 천거하고, 능력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눈 구품중정제는 지역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의 기본 틀을 되살리되 여론 보다 다소 낮은 관품을 내린 뒤에 실력을 보고나서 그에 준하는 관품을 내리는 유재시거의 요소를 도입했다.

구품중정제가 시행 초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사족을 재규합하고 묻혀버린 인재들을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제도였으나 후대 사마씨가 집권하는 과정에서 심사관들이 친 사마씨 투성이라 변질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에는 반박도 만만찮다. 중정에게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는 해당 제도의 특성상 일부 가문들의 파벌 정치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지만, 훗날 하후현이 지적했듯 추천한 사람은 피추천자의 역량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인재 임용의 기준도 불명확한 등 구품중정제의 폐단에 대한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기 때문. 조비 본인은 죽기 직전까지 대규모 남정을 계획하고 있었으니 이에 대한 재고는 전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조예는 비록 조비와 달리 상당한 전략안을 보이긴 했지만 문제는 후계자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가 되는 등 권력기반이 불안했다는 점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고명대신의 권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인사제도의 대대적인 개편은 커녕 사마씨의 문벌화에 박차를 가했다. 조예 사후 조방 대에 들어서야 하후현,하안을 중심으로 하는 조상 내각이 개혁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나, 이미 이 시기에 들어와선 최소한의 안전장치라도 마련하자는 주장마저 사마의에게 거부당할 정도로 문벌화가 심각하게 진행되어 있었으며, 조상 내각은 미숙한 국정 운영으로 난항을 겪다가 사마씨의 정변으로 역관광을 타면서 위나라 자체가 멸망한다.

물론 구품중정제로 세력을 키워 찬탈에 성공한 사마씨의 진왕조도 구품중정제의 폐단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이후 중국 역사는 남북조시대라는 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구품중정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후 통일왕조를 건국하면서 강력한 중앙정부를 완성한 수나라 문제 때에 과거 제도를 도입했지만 그 또한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당나라 들어서야 겨우 안착되었다. 이렇듯 구품중정제 자체를 비판하는 주장에 따르면 구품중정제가 첫 시작부터 잘못되었으며, 개선할 기회를 수백 년간 얻지 못하고 폐단만 늘리다가 수문제 대에 이르러서 간신히 폐기된 제도라고 보기 때문에 조비의 구품중정제 도입에 대해서도 크게 비판한다. 다만 그 잔재는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관직을 구품으로 나눈 제도는 청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사실 지금도 9급 공무원의 형태로 남아있다~

사실 조비는 검소한 황제는 아니었다. 토목공사를 아들 조예보다 크게 안 했을 뿐이지, 수도를 허창[8]으로 정했다가 얼마 못가 허창을 헐고 낙양으로 옮겨서 새롭게 궁을 지었다. 또한 3년상 기간 중에도 손권에게 사치품을 요구하는 등 사치스러웠고 무엇보다도 수렵을 광적으로 좋아했다. 이는 여러 상소에서 보이듯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강행할 정도였다.[9] 사냥나갔을 때 울타리가 허술해 사냥감이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자 분노한 조비가 관리원들을 모조리 잡아죽이려 한 사례도 있다. 이건 조조 때부터 밥과 집은 줘도 평생 징병의무를 짊어지게 하고, 자주 거처를 옮기게 강제한 위나라 제도의 문제까지 겹치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다.

1.4. 시인 조비

(나는) 어려서부터 시와 논論을 읊었고, 자라서는 오경五經, 사부四部를 모두 겪었으며, 《사기》, 《한서》, 제자백가의 말을 두루 아니 본 것이 없었다. - 전론, 배송지주.

문재가 뛰어나 아버지인 조조, 아우인 조식과 함께 삼조(三曹)라 일컬어졌다. 대표작으로 운문으론 연가행(燕歌行)을 포함한 가 40수, 산문으론 위에서 보듯 자뻑 문집인 《전론》(典論)이 있다. 그 외 열이기 3권과 문집 23권이 있었다 한다. 그중 전론은 동양 사상 최초의 논문(論文; 평론)이라고 평해지며,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한 문학론의 선구가 된 책으로 원래 5권이었으나 현재는 모두 소실되어 논문 1편만이 전한다. 건안7자 등도 조비가 선정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알까기와 비슷한 놀이인 탄기(彈碁)를 아주 잘했다고 한다.

탄기는 위대 궐내에서 화장품 상자를 사용한 놀이에서 시작되었다. 문제(조비)는 특별히 이 놀이를 잘 했는데 수건 모서리로 바둑알을 튕기면 맞추지 못하는 게 없었다. (후략)

1.5. 찌질한 조비

정치적 역량은 둘째로 치더라고 인간성이 상당히 쪼잔했다. 변덕스러운 면이 있었지만 아량과 그릇만은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컸던 아버지에 비하면 할 말 없을 정도로 쪼잔했던 면이 많다. 한 번 찍힌 사람은 두고두고 기억하며 보복했고 친한 사람에겐 지나칠 정도로 오지랖이 넓어서 문제가 일어나곤 했다.

숱한 일화들이 있기 때문에, 삼국지 관련 팬사이트에서도 두고두고 인간성 때문에 멘탈 정신병자라고 까인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조막장(혹은 레알 조막장). 괜히 이놈의 목을 쳐라 짤방의 진정한 주인공(혹은 조조의 광증 계승자)이 조비라는 드립이 나오는 게 아니다(…).

야사에 있는 이야기지만 그의 성품은 에게조차 자비롭지 못했다(…). 유명한 관상장이 주건평은 앞서 주석에서처럼 조비의 수명도 예견했는데, 말의 관상도 잘 봤다고 한다. 한 번은 조비가 외출하려고 말을 밖에서 골라 들여보내도록 했는데 주건평이 "이 말의 상을 보니 오늘 죽을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주건평의 말이 어찌됐든 조비는 말을 타려고 했는데, 말은 자기가 싫어하는 옷의 향기를 맡고 놀라서 조비의 무릎을 깨물었다. 조비는 크게 화가 나서 이 요망한 말의 목을 쳐라 즉시 이 말을 죽였다. 다만 그냥 조비가 주건평의 체면 세워주기 위해서 죽인 걸 수도 있기는 하다.

아버지때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명장 우금을 오나라에 사자로 보내면서 아버지의 능을 보게 하는데 아버지의 능에 우금 자신이 관우에게 쩔쩔매는 장면을 그려진걸 보게해서 우금을 화병으로 죽게 하였다. 한심하기 그지 없다.

또한 의외로(?) 행동이 가볍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지 못하는 일면도 있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위왕의 뒤를 이을 태자로 낙점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신비의 목을 끌어 안고(…) 기뻐했다고 한다. 신비가 집에 돌아가 총명하기로 유명했던 딸 신헌영에게 이 일을 말해주니, 그녀가 평하길 왕이 되어 국사를 짊어진다는게 고된 일인데도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니 위의 앞날이 오래갈지 걱정된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40여년 후에 위는 멸망했다. 그것도 이미 손권 때부터 막장 테크를 탄 오나라보다 먼저.

1.5.1. 불효자

220년 갑오일에 고향인 에 가서 관현은 물론 백성들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축제를 벌였다. 고향 땅에서 군주가 축제를 벌이는 일이야 뭐가 문제인가 싶지만 이때가 조조의 삼년상 중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 동진의 역사가인 손성이 "왕이 이 모양이니 나라가 오래 못 가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깔 정도.

다음해인 221년에는 업에 있는 종묘(조조의 무덤)에 가지 않고 낙양에 있는 건시전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민간의 제사와 동일하게 제사를 지냈다. 검소하게 치르라고 정말 검소하게 치르나 조조는 죽을 당시 위왕이었고 조비가 선위를 받아 황제로 오른 뒤에 태조 무황제로 추증까지 했으니 제왕의 격식에 맞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귀찮다고 평민과 같은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손권은 형주 침략 이후 조비와 화친을 맺은 뒤에 오왕으로 책봉받았다. 이에 신하인 조자를 보내 감사를 표시하고자 했는데 조비는 온갖 사치품을 요구했다. 이에 오나라의 신하들은 보내는 물품에 대한 규정에 있어 예법에 맞지 않으므로 거절해야 한다고 했지만, 손권은 위의 군주인 조비에게 의존해야하는 상황이라서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무례하고 굴욕적인 상황에서 손권은 아비의 복상 기간 중에 사치품을 구하려는 사람하고 어떻게 예법을 논하겠느냐고 말해서 조비의 체면을 팍 깍아내렸다. 또한 손권은 조비가 요구하는 사치품을 자신에게는 기왓조각이나 돌맹이와 같다고 평하여 자신에게 검소함과 도량을 드러내보였다.

이로서 형식적으로는 손권이 조비에게 조공하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손권이 언플을 펼쳐 조비를 "예의를 모르고 불효하며 사치스러워 상대하기도 귀찮은 놈"&"이까짓 거 나한텐 아무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준다."로 만듬으로서 오히려 조비의 무례함이 손권의 도량과 대비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일들이 왜 문제가 되었는가 하면,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는 유교 도덕이 매우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조비 자신도 상당히 유교 도덕과 유유서의 질서를 강조했으나, 앞으로는 유학자의 면모를 내세우면서 실상은 이랬으니 기본도 못하는 양반이었던 것이다.

1.5.2. 원한은 꼭 갚는다

일단 어렸을 적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촌인 조홍을 미워했으며 나중에 황제가 되자 사형시키려 했다. 이 때문에 조홍이 재물에 인색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사실 삼촌이 조카가 자꾸 돈 달라고 하면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고, 조홍이 위의 태조인 조조를 구한 적이 있는데다가 개국공신 중 한 명인 걸 생각해보면 금전관계로 개국공신 겸 아버지의 구원자 겸 삼촌을 죽이려 한 조비의 인간성이 눈에 선하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조비가 돈 빌리고 안 갚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또 다른 대표적인 예는 포훈. 꽤나 복잡한 얘기지만 결국에는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죽음까지 이른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참고.

하후상은 조씨 일족의 여자와 결혼했는데, 조씨인 정부인을 냅두고 다른 애첩과 아주 가깝게 지내자 그 애첩을 죽여버리는 일까지 저지른다. 그래서 결국 하후상은 슬픔에 못 이겨 애첩의 무덤을 파 시체를 껴안는 등의 정신질환을 보이다 죽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원한관계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인물들은 황제가 된 뒤 괴롭혔다. 형 조앙을 죽인 책임을 물어 장수를 몰아붙인 끝에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장수전〉에 주석으로 나온다.[10] 실제로 이때 참전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복형인 조앙의 죽음을 보고 트라우마가 생겨서 사람이 비뚤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아니 그래도 장수가 아니었으면 당신이 황제가 되지는 못했을 텐데요? 배은망덕 갑중갑

왕충 같은 신하는 기아에 못이겨 인육을 먹은 일화를 들춰내어 두고 두고 놀림감을 삼았다.

양준은 조조에게 자신과 조식을 칭찬하면서도 조식이 아름답다고 말한 이유로 한스럽게 여겼다가 완의 수레를 이끌고 갈 때 저자거리의 열기가 가득하지 않다는 죄목을 달아서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순운은 조식과는 친하면서 자신과 친한 하후상과는 사이가 나빴다는 이유로 미워했다고 한다.

가장 치졸한 장면은 이 부분이다. 관우에게 항복했다가 손권에 의해 석방되고, 항복 사절과 함께 돌아온 우금[11]을 조조의 묘에 참배토록 하면서 그 곳에다 미리 관우방덕과 우금을 사로잡는 장면을 그려 두었다. 여기서 방덕은 떳떳한 모습이지만 우금은 비굴하게 항복하는 모습이었고, 이를 본 우금은 울화통이 터져 병을 앓고 죽게 된다. 우금이 항복한 점이 잘못이면 국법에 따라 죄를 묻고 처형하는 게 옳지, 이렇게 치졸한 짓을 한 것은 30년간 자신의 아버지에게 충성을 바쳤던 숙장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더욱이 우금 항목을 봐도 솔직히 그런 상황이였으면 항복하는 게 옳은 행동이다.

심지어 위서에 따르면 조조가 죽자 유비가 조의금 조로 예물을 보냈는데, 조비는 오히려 사신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반대로 유비가 보내준 선물을 받고 특히 허리띠가 훌륭하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얘기가 있다.

이런 못된 기록도 있다. 조조는 죽을 때 자신의 시녀들로 하여금 바느질을 하며 스스로 먹고 살라며 약간의 재물을 주고 귀향시켰는데, 어느날 생모인 태후(무선황후) 변부인이 조비의 침실로 와보니 조조의 시녀들이 있었다. 왜 이곳에 있냐고 물어보니 조조가 죽은 직후부터 조비가 그들을 불러 살게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변부인은 노발대발했다. 이 일은 정치에 간섭한 기록이 거의 없는 조조의 정실 변부인이 정치에 관여한 몇 안 되는 일화기도 하다. 사태의 내용을 들은 태후는 정색하며 조비를 질책했다고 한다.

다만 이에 대한 항목은 정사가 아니라 《세설신어》라는 야담집에서 등장한다.

1.5.3. 뛰어난 형제들에 대한 질투

문무에 있어서 천재적인 재능을 두루 보인 조조의 자식들 답게, 조비의 형제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위에서 보듯이 조비 역시 성격이 문제긴 해도 나름대로 능력을 타고 났으며, 무엇보다 조앙과 조삭의 사망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장자의 자리를 타고 났으니 나름대로 행운아라고 할 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유능한 아우들과 비교되어야 했던 불운아이기도 했다. 이 중 조비와 가장 갈등을 많이 빚은 형제들은 칠보시로 유명한 조식과 오환족을 토벌한 것으로 군사적 재능을 입증한 조창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무선황후의 아들이었다.

사실 조조는 조식, 조창, 조비보다도 마음에 들어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조충이며 10대 초반에 일찍 병사했지만 굉장히 사려 깊고 지혜가 뛰어나 조조가 이미 후계자로 마음 두고 있었다 한다. 조비가 제위에 오른 후에 '만약 창서(조충의 자)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을 정도. 조조는 조충이 죽자 남은 자식들에게 '조충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결국 이런 견제 속에 왕(그리고 황제)이 되고 난 후에는 형으로서도 최악을 보여줬다. 조식과 조창 등의 형제들을 경계하여 각각 왕위를 줘서 지방 임지에 묶어두고 감시하면서 수도로는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고, 벼슬이나 일도 맡지 못하게 했다.

특히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형제를 소재로 시를 지어라, 다만 그와 관련된 글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라면서 칙명을 내리고는, 짓지 못하면 칙명을 어긴 죄로 죽이겠다고 했다. 이때 지어진 칠보시는 21세기 현재까지 회자되는 명시로, 결국 조비는 조식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그를 추방하는 데에 그쳤다.

조창이 임지로 돌아가자, 연이어 해마다 식읍을 추가하고(220년), 공으로 봉하고(221년), 왕으로 봉하는(222년) 등 후대한 편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수도에 와서 조비를 알현한 뒤 갑자기 병에 걸려서 수도에 있던 관저에서 급서(의문사)했다.[12] 반면 조식은 왕으로는 봉해졌지만, 항상 봉지가 바뀌었다(견성왕 - 진사왕 - 진왕).

다만 이 것을 과연 조비만의 문제로 돌려야 하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식은 조비가 확실히 후계자리를 다지기 전 까지 양수 등의 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후계 싸움을 벌였으니 고금제일의 명문장가라는 것을 따지기 이전에 제위 등극 이후에도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조창은 맹수와도 싸우는 무골에다 북방 정벌로 잔뼈가 굵은 장수이며 가규와의 대화만 봐도 제위에 욕심이 없는 인물로 볼 순 없기 때문에 경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런 피비린내 나는 후계자들끼리의 암투는 전 세계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방원왕자의 난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복 형제들은 아니지만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을, 특히 청소년에 지나지 않던 동생 의안대군마저도 죽여버렸다. 그렇다고 태종이 한 행위가 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악행을 벌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기에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긴 했으나 오다 노부나가도 동복 동생 노부유키를 처형했으며, 명군으로 추앙받는 오스만 제국셀림 1세는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13]

당장 조조가 원소와 전쟁을 했을 때 승리한 결정적인 이유가 원소의 급사로 인한 원씨 가문의 분열이라는 것만 봐도, 조비의 조식과 조창 탄압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원담파와 원상파로 나뉘어 원씨 가문은 내전에 준한 상태가 되어버렸으며 결국 조조의 군대에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거기에 당시 삼국 시대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면 곧 망했어요 테크를 탈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촉한과 동오는 당연히 위에 비해서는 작은 국가들이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다는 이야기고 가장 국력이 약한 촉한도 몇 번이고 위로 쳐 들어 올 정도의 국력은 있었다. 무엇보다 이 두 국가는 조비가 황제가 되자 황제를 자칭할 만큼 강한 국가들이었고 혹시라도 위나라가 조창, 조식, 조비의 세 갈래로만 분열되어도 위나라는 큰 위기에 빠지는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비의 형제 탄압은 욕하기는 그렇다. 어차피 그게 전제 군주의 숙명인 것일 뿐. 그리고 조비는 이거 아니어도 인간성으로 깔려면 깔 거리가 수두룩하다.(…)

또 다른 동생인 조웅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연의의 각색이다. 조웅은 222년 소회왕으로 승진했으며, 조예 때인 234년 요절했는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를 들어 조비가 조조 사망 직후 겁박해서 목을 메어 자살했다로 바꾸어버렸다. 안 그래도 짧은 인생 12년을 더 줄여버렸어 그러면서 소회왕 역시 조웅이 죽자 후회해서 내린 직위로 바뀌었다. 이때 연의에서는 조식을 죽이려는 와중에 어머니 변태후 역시 등장하여 "조웅이가 죽더니 이젠 식이까지냐? 피눈물을 더 흘리지 않게 해다오"(…)라고 말했으며, 결국 죽이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화흠이 건의한 칠보시로 결정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하간 조비는 조웅을 겁박하진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친형제로 막내인 조웅과 레알 막내동생인 조간에게는 그런대로 너그러웠던 듯하다.[14] 막내동생과는 나이차가 너무 나서 그랬는지 동생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다만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비판은 유효하다. 조창과 조식은 어느 정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 둘 이외의 형제들은 딱히 조비를 위협할 만한 위상도 능력도 없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형제를 연금 상태에 놓고 지나치게 억눌렀다. 왕권 강화를 한 것은 좋은데 덕분에 위나라는 방계 황족들이 매우 약해져버렸고, 이는 사마씨에게 너무나 쉽게 나라를 내주는 결과를 불러왔다. 한 마디로 도가 지나쳤다.

다만, 사마씨의 서진은 조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방계 황족의 힘을 키워 줬는데 그것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 조비가 거국적인 선택을 잘못 했다기보다, 섬세한 강도 조절에서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조위는 후한말 내조를 장악한 환관, 외척과 대립했던 지방 호족들을 조조가 포섭해 성립한 정권이어서 권력구도에서 환관, 외척은 철저히 배재했다. 그런데 거기에 황족들까지 배체해버리니 황권과 신권의 균형이 무너졌을때 황실을 수호할 세력이 미약했다. 그나마 조비 때는 군권과 내조에 조씨 일족과 세력기반이 약한 호족들을 배치했으나 조예말 이 균형이 본격적으로 무너지면서[15]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나라를 내주게 된다.[16]

여담으로 오빠로서도 굉장히 나쁜 축에 들어간다. 어머니 무선황후가 친딸보다 귀하게 길렀다는 청하공주가 재주가 뛰어나지만 자신과 사이가 나쁜 (조식을 지지한) 정의와 혼담이 오가자 중간에 끼어들어 호색한에 인간성도 능력도 바닥인 하후무와 혼담을 넣어 결혼시켰고[17] 금향공주의 남편 하안을 싫어해서 살아있는 동안 관직에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다. 근데 을 허구헌 날 마구 피워대는 걸 보면 싫어하는 것도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조의 딸 셋을 비로 맞은 헌제는….

1.5.4. 조강지처 진씨를 폐하다

하안의 첩은 죽여놓고는 본인은 여러 첩을 아껴 조강지처 문소황후를 내팽겨쳤으며, 결국 곽귀빈의 모함에 즉위 직후(221년 6월 28일) 사약을 내려 죽여버렸다. 곽귀빈을 기어이 황후로 삼으니 문덕황후다. #

문덕황후를 봉하기(221년 9월 9일) 직전인 221년 9월 3일에는 태후한테 일을 상주하지 말고 외척을 배제하는 내용으로 요약되는 조칙을 내린다. 이에 대해서 외척의 발호를 억제한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 위의 《세설신어》 관련 떡밥을 생각하면 좀 이상한 추측이 들게 된다.

이렇듯 조비는 형제와 조강지처에게 냉혹했다. 위에서 언급된 조홍, 우금, 왕충, 포훈 외에도 대릉, 두기(杜夔) 같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신하들에게 갖은 모멸적인 행위를 자행하기도 했다.

참고로 조비는 헌제의 두 딸을 후비로 삼았다. 그 두 딸의 모친이 조조의 딸들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세 조씨[18]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조카딸들이다.

1.5.5. 항장에겐 따뜻하겠지?

반대로 좋아하는 자는 한없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홍에겐 그리 냉혹했으면서도 하후돈이 죽을 때는 예법을 어기면서까지 곡을 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갭 모에? 또 그가 몹시 아낀 인물로 오질이 있는데, 이 오질도 글재주는 있었지만 인간성이 하도 막장이라 당대부터 미움살 짓만 골라서 했고 그 때문에 죽자마자 가차없이 까였다. 유유상종

촉에서 온 항장들을 특히 좋아했는데, 관우의 죽음으로 처지가 곤란해진 맹달이 대표적이다. 사마의유엽 등이 맹달을 중히 쓰지 말라고 간언했으나 조비는 이를 묵살하고 상용 태수로 두고 높은 관직에 앉혔다. 근데 그 이유가 좀 깬다. 이유는 재능도 뛰어나거니와, 무엇보다 맹달이 용모가 뛰어나서. 《정사 삼국지》 〈위서〉에는 맹달의 용모를 좋아했기 때문에 상용태수 자리를 줬다고 명백히 적혀 있다. 결국 맹달은 조비가 죽자 제발저려서 제갈량과 내통하고 자멸해버린다.(…)

이릉대전에서 포로로 잡아온 황권의 경우, 유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쌤통이라 여기며 잔치를 베풀면서 다들 크게 기뻐하는 와중에 황권 혼자만 서럽게 울자 이런 황권을 조비는 충의지사라며 총애했다.

오래전의 항장인 전예에게 신경을 써주기도 한다. 황초 연간(220~226년) 전예가 호를 토벌했는데, 영호준(후의 영호우)이 전예가 지시를 조금 위반했다고 법으로 잡으려 했다. 조비는 분노해 영호우를 포박하고 벼슬을 파면해 죄를 묻고서 조서를 내렸다. 조비가 조서를 내리면서 영호준은 어찌 그리 멍청하냐고 했기에 우(愚)를 이름으로 삼았다.(…)

우금 지못미[19]

정말 예외인 경우가 장수. 조비는 장수에게 너 이놈아. 우리 형을 죽게 해놓고 뭔 낯으로 우리 아버지가 주시는 녹봉을 받아먹냐?고 까자 장수는 그것 때문에 분사 혹은 자살했다.

1.6. 남방 정벌의 실패

조비는 즉위 이래 5년간 일관되게 남방 정벌 사업을 벌였으나 되려 성과는 없었다. 진공 루트는 일관되게 오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비가 죽고 촉은 한동안 망했어요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기〉를 보면 초반의 내정 수습책을 제외하고는 계속 남방 정벌 이야기만 나오는데, 세세한 기록이 없을 뿐이지 한마디로 패전의 연속이다.

어떻게 보면 성격적 문제에 비해 가장 알려지지 않은 조비의 실패점이다. 이는 대부분의 기전체 사서가 그렇다 시피 기록이 세세하게 분할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리기가 쉽지 않고, 영토를 주고받지 않다보니 세력 판도에도 큰 변화가 없었던 데다가 적벽대전, 이릉대전처럼 한 번에 왕창 말아먹은게 아니라 몇년에 걸쳐서 꾸준히(…) 말아먹었기 때문에 '대참패'라는 이미지가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의 매년 전쟁하러 나갔다가 지고 돌아왔으니 패배의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남방 정벌은 예방될수 있었던 것이, 이릉대전을 앞두고 유엽은 촉을 도와 오를 멸망시키고 촉을 없애면 천하통일이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촉이나 오나 둘 다 위에 비하면 약하지만 촉은 진공해서 들어가기가 힘들기 때문. 하지만 조비는 이 말을 전혀 듣지 않았으며 결국 이릉대전 이후 촉과 오가 다시 연합하고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그리고 위나라가 사마 가문에 먹히게 되면서 망했어요.

사실 조비의 군사적 감각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이릉대전의 승패를 예측하기도 했다. 《연의》에도 나온 것으로 유명한 일화로 221년 윤달 5월 유비의 군대가 동쪽으로 내려와 손권과 교전하면서 7백여 리에 이르는 나무 울타리(樹冊)를 세워 진영을 이었다는 말을 듣고, 유비가 깨질 것을 예측하고 이것은 7일 만에 유비를 깨뜨렸다는 손권의 소식이 오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릉대전에서도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손권을 오왕으로 봉하고 그의 재능을 가늠하려 드는 등 사실 적절하게 대처했던 셈이다. 물론 문제는 이릉대전의 승패 따위가 아니라, 자신은 세력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였던 데다 선양까지 받은 황제이니 당연히 손권이 굴복하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결국 손권이 모반을 일으켜서 공격했지만 이 모반이란 게 결국 아들(세자 손등)을 볼모로 보내라는(임자) 것을 거절한 것이다. 손권은 이미 이전부터 사실상 독립 세력이었고, 조비에게 신종을 한 것도 촉한의 공세 때문이었는데 사실상 오나라가 단독으로 이릉대전에서 촉한을 물리쳤으니 조비는 거의 도움이 안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볼모를 보내라니 거절할 만도 하다.

손권은 조비군이 남하하자 으레 그렇듯 "스스로 잘못을 고치게 해달라. 사면되지 않는다면 땅을 바치고 교주로 돌아가겠다."라고 엄살을 폈고, 조비는 또 "삼공이 그대의 과실을 보고했는데, 모두 근거가 있었다."며 살살 달래고 대신들에게 탓을 넘기면서도 손등을 볼모로 보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침에 손등을 직접 수도에 도착하도록 하라. 그러면 저녁에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오도록 할 것이다. 이 말의 진실은 대강(大江)과 같도다!"

물론 손권이 그 말을 또 들을 리가 없다. 손권은 아예 스스로 연호까지 정하고 사실상 독립 선포를 한 다음 대치 상황을 계속했다. 이때 조휴 등이 여범을 상대로는 호투를 했으나 계속된 대치를 뚫지 못하고[20] 강릉에서 주연이 분투하고 유수구에서 대장군 조인이 주환에게 깨지고 하제 등의 원군이 도착하자 결국 실패하고 만다.

다음해 정월에는 조비군이 강릉의 모래톱을 점거했으나, 손권이 강하산에 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상조와 조태(조인의 아들)은 주환에게 격파되었다. 결국 3월 8일 조비는 완성에서 궁으로 돌아왔다. 그달 19일, (작년 11월에 대사마로 승진한) 조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이달 역병이 크게 유행했다는 기사를 보아 역시 장강의 전염병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남정에서는 자기 자신의 용주도 폭우에 휘말리며 거의 전복당할 뻔하고 수많은 설레발 끝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퇴각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조비가 224년 9월에 "저 같은 인물이 있으므로 도모할 수 없겠나."라고 한 걸 보면 〈연의〉의 묘사처럼 크게 깨지진 않았으나 여하간 원정에 실패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225년에는 포훈의 말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원정을 했다가 결국 제대로 된 싸움도 못하고 퇴각한다. 퇴각하는 루트에 있던 강도 수량 때문에 제대로 된 퇴각도 못하고 가는 길에 손소 한테 얻어터지는 등 생고생을 했다.

위왕 승계 직후의 열병까지 생각하면 거의 매년마다 원정에 실패했던 것이다. 기주의 기근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진행했던 마지막 원정에서도 실패하여 돌아온 조비는 226년 정월 허창에 도착하려 할 때 허창성의 남문이 이유없이 무너지자 불길하게 여기고 낙양으로 들어갔다. 여름 5월 16일, 위독하여 낙양 가복전에서 붕어하니 향년 40세였다. 유조는 진군대장군 진군, 정동대장군 조휴, 무군대장군 사마의에게 내려졌다.

결과적으로 조비의 무리한 원정은 '손권 좋은 일'만 시켜줬다고 볼 수 있다. 소위 '위나라 황제'라는 조비가 '자칭 오왕'이었던 손권을 몇번이나 공격하고도 제대로 이기지도 못하고 매년 패배만 거듭했으니,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던 위황제의 위엄이 떨어지는 결과는 당연하고, 오나라에서는 지역의 군사적 수호자로서 손권의 정치적 입지는 급상승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게다가 손권은 이전부터 조비가 사치하고 부도덕 하다고 비판하고 자신의 도덕적 명성을 올리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조비 사후 몇년 뒤에는 손권이 마침내 황제에 등극했으니, 조비의 무리한 원정이 떡밥처럼 작용해서 '손권의 명성'만 높여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이쯤되면 자버다. 조인배라고 불러줘야 할 듯.

여담이지만 훗날 위나라의 실권을 찬탈하고 건국의 기반을 다진 사마의보다도 8살 이상 적다. 사마의가 오랜 산 편이긴 하지만,[21] 죽은 나이로 따져도 조비의 사망당시 나이는 사마의 사망 당시 나이의 절반에 불과했다.

연의에서는 오로침공이 실패한데다 오가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남방정벌을 감행한다. 촉을 먼저 치자는 중신들의 의견마저 무시하고 그럼 배라도 더 만들자는 사마의의 말에 조선시설을 풀가동하여 배를 늘리고 바로 삼로로 밀고 내려갔으나 결과는 위에 적힌대로 와장창. 더불어 이때 장료가 사망하기까지 했다.

1.7. 평가

촉빠-위빠 논쟁의 새로운 핵. 어떻게 보면 조조보다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일단 인격적으론 소인배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인물. 별 이유도 없이 죄없는 신하들을 여럿 잡아서 거인이었던 아버지에 곧잘 비교되곤 한다. 신하라면 모르겠으나 황제였던지라 조비 개인의 인격적 결점에서 오는 기행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났다.

대외정책에서도 결정적인 삽질을 저질렀는데, 이릉대전을 앞두고 촉과 오가 적대관계로 돌아서면서 삼국정립 이래 최고의 호재를 맞았음에도 그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했고, 선양을 받아 이미 통일왕조의 황제가 된 것처럼 행세하며 위신 세우기에만 급급했다. 손권이 열심히 비위를 맞춰주며 칭신 의사를 밝히자 대범하게 개입을 포기한 것. 이릉대전이 끝나고 손권이 더 이상 조비의 장단에 맞춰주지 않자 분노해 원정에 나섰지만, 손권이 반성하겠다며 밀당을 걸어오자 원정에 나선 것을 대신들 탓으로 돌리며(…) 손권을 달래는 등 시간만 잔뜩 허비하며 손권에게 농락당했으며 결국 연이은 남정은 모조리 실패해 천하 통일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본인이 일찍 죽어버렸다. 즉, 이릉대전 이후에도 삼국지가 삼국지가 된 것은 조비에게 원인이 있다.

한편 조비가 개인적으론 소인배였고 대외적 행보에서도 삽질을 저지르긴 했지만 내적으로 정치, 인사, 행정분야에서는 대체로 유능한 모습을 보였다며 이를 조명하는 주장도 있으나 여기서 찬반이 크게 엇갈린다. 조비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조비가 제도의 확립과 민심 안정에 힘을 기울여 어느 정도의 성과도 보였지만, 후대의 삽질로 변질되었을 뿐이라고 보는 편. 반면 비판하는 쪽에선 남방원정의 실패나 구품중정제의 무책임한 도입 등 대내외적으로 삽질만 거듭했지만 조조가 유산으로 남긴 권력기반과 재정흑자가 워낙 건실했던 데다, 이릉대전이라는 뜻하지 않은 호재까지 누렸기 때문에 이런 삽질들에도 불구하고 당장은 큰 문제가 없어 보였을 뿐이며 위왕조의 말기의 폐단들은 조비가 방향성 측면에서 포석을 단단히 잘못 깔아뒀던 것에 원인이 크다는 것.

삼국지연의》는 조비의 찌질함과 원정 실패를 극대화 시키는 등 조비를 까는데 집중한 편이다. 가장 대규모였던 조비의 첫 원정은 육손어복포에서 호되게 당한 뒤 미리 위의 침공을 경계해 바로 물리쳤으며, 2, 3차 원정은 용주를 끌고 장료를 대동하였으나 서성의 가짜 군세에 속아 크게 깨지고 서황의 분투로 도망했으며, 그 과정에서 장료마저 정봉의 활에 맞아 후유증으로 죽어버린 것으로 묘사된다. (아버지 조조와 마찬가지로) 조비를 까는 야사들은 당대(혹은 가까운 후기인 육조시대)에 이미 범람했다.

한때 팬덤에서는 조조 이상가는 정치적 역량을 가져 위나라 최전성기를 이끈 유능한 성군이었다는 평가가 주였으나, 두 번 다시 없을 호재를 잔뜩 맞고서도, 대내외적으로 거하게 삽질을 저지르면서 삼국 정립 구도를 고착화시켰으며 인간성조차 최악이었다는 점이 조명받으면서 까이는 트렌드가 되었고, 진수의 평가 또한 위왕조를 정통으로 놓고 있는 이상 초대 황제를 대놓고 깔 수가 없으니 지식이나 기억력 등 개인적인 장점들을 열거한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물론, 아예 대놓고 최소 유선 이하의 암군급으로 취급된 적도 있었다[22]. 이런 비판에 대한 반발로 다시 최소한 내치 면에서는 유능한 군주였다고 조명받는 것이 삼국전투기 때문에 일어난 경향인데, 이 또한 논란이 계속되었다. 지나친 빠가 까를 부르고, 지나친 까가 다시 빠를 부른 사례로 봐야 할 것이다.

진수는 조비에 대해 "문제는 천부적으로 문학적 소질이 있었으니, 붓을 대면 문장이 되었고, 넓은 지식도 갖추고 있었고, 기억력이 탁월해 다방면으로 재능을 갖추었다. 만일 여기에 그의 도량이 약간만 더 크고 공평한 마음 씀씀이에 힘쓰며 도의의 존립에 노력을 기울이고 덕망이 있는 마음을 더욱 넓힐 수 있었다면 어찌 고대의 현군이 멀리 있었겠는가"라고 평했다. 참으로 뼈아픈 평가라고 하겠다.

1.8. 각종 미디어에서의 묘사

조비/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2. 비료 생산 전문업체 조선비료공업

1955년 11월 15일 국내 최초 민간자본으로 조선비료공업(주)으로 설립된 복합 비료 회사.

3. 고려 충선왕의 4비

고려의 제26대 왕 충선왕의 제4비. 조준의 증조부인 조인규의 딸. 다른 왕비들과 달리 시호가 없어서 성과 비를 합쳐서 그냥 趙妃라고 부른다.

충선왕이 1비인 계국대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데 반해, 이 여인과 충선왕의 금슬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러자 계국대장공주는 그녀가 자신을 저주했다고 원나라에 모략했고 결국 원나라로 끌려가 아버지와 함께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은 1298년에 1차적으로 즉위한 충선왕이 폐위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원나라에 끌려간 이후 그녀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 [1] 막 후계자가 됐을 무렵에는 황제가 아니라 위왕이었다. 조비가 위왕에 오른 후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했다가, 헌제에게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 [2] 조비, 조창, 조식, 조웅이 모두 변부인 소생이다.
  • [3] 광록대부 교현이 태사령 단양에게 물어 인증한 말인데, 이 말을 들은 내황 은등이 44년 뒤에도 살아있어서 "50년이 못되어 황룡이 나온다더니 맞네."하고 인증했다.
  • [4] 순욱, 조모의 죽음에서도 드러나듯 진수는 정치적으로 민감할법한 주제는 앞뒤 다 자르고 결과만 언급하는 식으로 통편집하는 성향이 있었다.
  • [5] 이때 주건평을 불러 점을 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건평은 하후위, 융거, 조표죽을 때를 예견했다. 그러면서 조비에게는 "장군의 수명은 여든인데 마흔 살에 작은 재난이 있으니 조심하여 보호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알다시피 조비는 장수하지 못하고 딱 마흔에 죽었는데, 죽으면서 낮과 밤 따로 따로 이틀 쳐서 여든이란 거구나!라고 하고는 죽었다고 한다(…).
  • [6] 여기에도 또 흥미로운 뒷 이야기(역시 《위략》의 야사)가 있다. 조조는 그 당시 관상을 잘 보는 고원려(高元呂)라는 사람에게 조비의 상을 물었더니, 고원려는 "그 고귀함은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수명을 묻자“그의 수명은 마흔살 때 작은 고통이 있겠지만, 이때를 지나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과연 조비는 과연 재위 6년만에 마흔살로 사망한다. 여러모로 조비가 마흔에 돌연 죽은 것이 뒷 사람들의 떡밥거리가 되었던 모양이다.
  • [7] 6월 ~ 10월 동안 군대를 운용했는데, 10월 4일 헌제가 한고제 유방의 릉에 제사 지내고 선양을 거론했다.
  • [8] 그것도 자신이 직접 '허도'에서 '허창'으로 개명했다.
  • [9] 황제가 수렵을 좋아했다는 것은 단순히 황제가 할 일 안하고 농땡이 부리는 수준을 넘어 백성들에게 심각한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사냥갈 때마다 몰이꾼에 호위병에 수천 명이 동원되는 건 예사라 적지 않은 예산이 소모되었고, 더 큰 문제는 사냥터는 대개 도읍 주변의 민가와 논밭을 밀어버리고 만들었다. 21세기에도 국책사업에 피해입은 시민들이 제대로 보상 못받는 일이 수두룩한데(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이 시절에 피해입은 백성들에게 제대로 보상이 되었을 것 같은가? 괜히 사서에서 왕이나 황제가 나 사냥갈래 하면 충신들이 일어나 아니되옵니다 외치는게 아니다. 참고로 연산군이 백성들에게 가장 크게 끼친 민폐가 다른 게 아니고 사냥이었다.
  • [10] 《위략》에서 형을 죽인 네가 뻔뻔하게 말을 거냐는 식으로 쏘아 붙였다고 한다.
  • [11] 《촬요(撮要)》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락제건문제를 두고 일으킨 정난의 변에 대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 항목 참조. 여기에 따르면 유엽은 손권이 훼이크치는 거라며 믿지 말라고 했는데 조비는 낚였다는 식이다.
  • [12] 《세설신어》에는 조비가 조창을 독살했다고 나온다.
  • [13] 다만 오스만 제국은 예전부터 형제 숙청이 관행이었기에 유달리 지독했던 건 있다.
  • [14] 근데 이건 조조가 특별히 부탁한 것도 있다. 조조가 죽기 전 "조간이는 이제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도 없으니 니가 잘 보살펴 줘라."라고 부탁했던 것. 아무리 냉혹한 조비라도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조간은 너무 불쌍했을지도 모른다.
  • [15] 조비 시절까진 경력이 별볼일 없었던 사마부에게 도지상서(재정부장관)직을 하사하는 등 다방면으로 힘을 실어줬다. 군사, 재정이란 국가에서 가장 주요한 두 분야에서 강한 푸쉬를 받은 사마씨는 구품중정제로 완전히 특권계층으로 자리잡은 호족들의 대변자가 되어 세를 착실히 불려간다.
  • [16] 조비 시절에는 대사마 조인이 이름뿐인 태위 가후 대신 실질적 일인자 노릇을 했고 그의 사후에는 대사마 조휴와 대장군 조진이 군부 투톱으로 대오, 대촉 전선을 책임졌다. 사마의는 명백히 그들보다 아래였다. 그러나 조예 시기 조휴, 조진이 사망하고 조예가 사마의를 전력으로 밀어주면서 무너지게 된다. 대촉 전선에 사마의의 능력이 필요했던건 맞다. 하지만 조조가 왜 실적이 거의 없는 하후돈을 대장군직으로 삼았는지 생각해보자. 더구나 조예는 후계구도도 불안정했다.
  • [17] 조조는 뒤늦게 정의를 재주를 보고 후회했다.
  • [18] 헌목황후 조씨, 효헌황후 조씨, 귀인 조씨.
  • [19] 비슷한 예로 장패도 있지만, 그나마 장패는 실권은 없어도 집급오로 있었고 식읍도 3,500호나 됐기 때문에 우금과 비하면 우금은 그저 안습이다.
  • [20] 조휴에 의해 장패가 서릉을 습격했으나, 전종, 서성은 윤로의 목을 베는 등 전황은 일진 일퇴했다.
  • [21] 오래산 편이긴 하지만 90대 중반에 사망한 동생 사마부같은 사람도 있고 위나라 중신중에 조조-조비-조예 3대에 걸쳐 활약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특출나게 오래산 케이스는 아니다.
  • [22] 이는 유선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일었던 것도 한몫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