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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last modified: 2017-01-28 17:36:49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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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경에 국오 정홍례가 그린 조광조 초상. 야사 어우야담에 의하면, 조광조는 자신의 얼굴이 남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며 '이게 어찌 길한 상이란 말이냐'며 탄식하곤 했다고 한다.


趙光祖
(1482-1519)

Contents

1. 개요
2. 일대기
2.1. 조광조 시절의 사회
2.2. 집안 내력과 초년기
2.2.1. 사림파의 아이콘으로
2.3. 조선의 개혁을 꿈꾸다
2.3.1. 폐비 신씨의 복위 논쟁
2.3.2.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文廟) 배향(配享)에 대한 논쟁
2.3.3. 군자, 소인의 논쟁
2.3.4. 현량과(賢良科: 천거제)
2.3.5. 소격서 폐지 논란
2.3.6. 정국공신 개정 시도(위훈삭제 사건)
2.4. 기묘사화와 몰락
2.5. 기묘사화의 원인
3. 이야깃거리와 평가
3.1. 조광조의 승진 속도
4. 드라마
4.1. 역대 사극에서 등장한 배우들
5. 기타

1. 개요

조선 중기의 학자. 정치인. 는 효직(孝直)[1], 호는 정암(靜庵), 본관은 한양(漢陽). 거꾸로 해도 같은 글자가 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사후 붙은 시호는 문정(文正)[2]이다.


2. 일대기

2.1. 조광조 시절의 사회

조광조가 등장한 시기는 중종시절이었다. 중종은 연산군을 반정(反正)으로 쫒아내고 반정공신들이 앉힌 왕으로서 실권이 약했다. 반정공신에겐 연산군의 폭정(暴政)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나, 조선 최초로 일어난, 그것도 신하가 주동이 된 반정이라는 점에서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컸다. 이 때문에 중종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역모 사건이 줄지어 발생할 정도로 사회는 불안정하였다. 중종 2년의 김공저, 조광보의 옥사(獄事)와 2년 8월의 이과의 옥사, 중종 3년의 신옥의의 옥사, 중종 4년엔 왕실의 종친들이 연루된 옥사가 있었다. 그리고 중종 8년엔 박영문, 신윤무의 옥사가 있었다.

이들 옥사를 살펴보면 당시 중종반정에서 보였던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모순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김공저, 조광보의 옥사의 경우는 유자광 같은 자가 공신으로 책봉된 것에 대한 반발 심리가 작용했으며,[3] 이과의 옥사는 왕을 호위하는 내금부에서 꾸민 역모로, 반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무사들이 온당한 포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신옥의의 옥사 역시 원종공신이었다가 박탈당한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으며, 왕실의 종친의 옥사 역시 논공행상의 불만 때문이었다. 박영문, 신윤무의 옥사의 경우는 반정의 과실을 문신들은 마음껏 누리나, 무신들은 제외된 현실에 대해 불만을 성토하다 모반죄가 적용된 것이었다.

중종반정에 참여한 반정공신 책봉의 기준을 본다면 공평과는 거리가 멀었다. 공신을 선정하는 과정이 얼마나 허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예가 있는데 중종은 자신의 외척인 윤탕노를 정국공신에 추천하였다. 그러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윤탕노는 반정 때 서울 밖에 있어 반정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중종을 추대하려는 마음은 다른 이들의 배가 넘었을 것입니다"

라며 정국공신 3등에 임명한 바 있다. 이때 임명된 반정공신의 수는 110명인데, 개국공신의 수가 30명인 것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의 나눠먹기였다. 게다가 윤당(允當)대신이라 불리며 연산군의 말마다 "윤당하신 분부이옵니다"라고 아부를 해대던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4], 연산이 총애하던 시인 김감, 연산에게 여자를 바치고 임숭재 급의 총애를 누렸던 구수영 등 연산의 총신들이 (일을 꾸밀 때부터 가담한 것도 아니고) 반정 당일 가담하고도 1등, 2등에 척척 배정되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이과를 비롯해서 격문을 돌리고 군사까지 모집한 진짜 정국공신이 될 만한 사람들은 "결국 한양에 있던 게 아니니까 무효 ㅋ 연산 미워하던 거야 만백성이 한마음 아니었음?"하면서 격이 확 떨어지는 원종공신에 봉해버렸다.(…) 분노한 이과는 반정을 꾀했다가 들켜서 처형당한다.

대간(臺諫)과 홍문관(弘文館)은 이것을 연이어 비판하였고, 정국의 불안정이 심화되었으나, 때맞춰 신복의 옥사가 일어나면서 공신 개정 문제는 잠잠해진다. 그러자 이젠 연산군 대의 과거 청산 문제가 대두되며, 무오사화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그 결과 무오사화를 주동했던 유자광이 유배되고, 사화를 입은 사대부들이 복권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논쟁을 주도한 것은 대간이었으며, 대간에 맞서는 반정공신들은 도덕적인 결함들을 안고 있었으므로 대간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못했다. 이러한 실정에다가 반정을 이끈 성희안, 김수동, 유순정 등이 모두 사망하게 되고 국정에 공백이 생기게 된다.

이러자 중종은 이 공백을 메꿈과 더불어 자신의 친정 체제를 굳히기로 결심하였고, 국정의 공백을 메꿀 대상으로 반정 세력을 궁지로 몰아대던 대간, 즉 사림을 지목한다. 조광조의 등장 이전엔 이러한 정세가 있었으며, 조광조가 정치에 전면으로 등장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게 된 것이다.

2.2. 집안 내력과 초년기

조광조의 5대조 조상은 개국공신[5][6] 출신이었지만, 아버지는 역참을 관리하는 찰방을 할 정도로 조광조가 태어날 당시엔 가세가 몰락해 큰 권세는 없었다. 아버지가 압록강 지역의 어천지역의 찰방으로 부임하였을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유학자 김굉필이 그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자, 17세였던 조광조는 아버지에게 간청하여 김굉필의 밑에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김굉필에게 배운 유학은 조광조의 일평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뒤 18세에 결혼하였고, 19세에 아버지를 여읜다. 조광조는 조광보의 옥사 때 심문 당하기도 했는데 무혐의로 풀려난다. 이는 조광조가 반정공신들을 비판하는 세력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뜻도 된다.

1510년, 조광조는 29세의 나이에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한다. 이때 실록에서,

"생원 김식, 조광조 등이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고 관대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대하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본받는 자도 생겼다. 성균관에서 그들이 스스로 사성십철(四聖十哲)을 일컫는다고 하여 이들을 죄로 몰아넣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를 보면 조광조는 자신의 행동도 철저히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르려고 하였다. 주위에서는 이를 비웃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죄악시하기까지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나 한편으로는 조정에 조광조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광조는 유생들 중에서도 돋보이는 존재였는지, 중종 5년 사정전에서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강의를 하도록 했는데, 조광조가 대표로 나와 중용(中庸)을 강(講)하였다. 그 뒤 중종의 명으로 성균관에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한 유생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200명 중에서 3명 정도를 천거하는 데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조광조의 천거를 많은 대신들이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조광조를 시기하거나 꺼린 게 아니라조광조가 천거를 받을 경우 받는 관직이 참봉이나 별좌였는데, 이에 쓰기에는 조광조의 학문이 아깝고, 그가 학업에 정진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광조를 6품직에 바로 올려서 등용해야한다는 여론이 나왔고, 이후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1515년 조광조는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로 임명된다. 그 뒤 34살의 나이에 성균관의 전적으로 임명되며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미 뛰어난 학문의 수준을 가진 조광조였지만, 늘 선비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남다른 각오로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읽게 되는 책인 《소학》을 늘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조광조를 놀리면서 "소학을 열심히 읽어라. 그러면 조지서 사지는 할 수 있다"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2.1. 사림파의 아이콘으로

스승 김굉필무오사화로 죽었지만 김굉필의 동문들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리고 김굉필에게서 배출된 다른 제자들인 정국, 안국 등도 있었다.

조광조는 이들을 찾아다니며 학문과 정치, 시사를 토론하였다. 그중엔 훗날 그의 죽음을 방관하게 되는 남곤도 있다.

하루는 남곤과 조광조가 산책을 나갔는데, 조광조는 어떤 젊은 아가씨들이 지나가자 계속 흘끔흘끔 쳐다보게 됐다. 그러나 남곤은 눈길 한번 안주고 그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다.

집에 돌아온 조광조는 부끄러움에 자책하며 한탄하였으나, 어머니 여흥 민씨남곤을 무섭게 생각한다.

"젊은 사내가 어떻게 여자 보고 눈이 한 번도 안 돌아갈 수 있겠느냐? 그러나 남곤이란 친구는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목석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아가씨들에게 마음이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이냐.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하거나 외면할까봐 무섭구나"

이 말을 마친 조광조의 어머니는 짐을 싸서 남곤의 집에서 최대한 멀리 이사했다고 한다[7].

2.3. 조선의 개혁을 꿈꾸다

2.3.1. 폐비 신씨의 복위 논쟁

1515년, 증광문과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3사중 하나인 홍문관에 들어간다.

중종 8년 박영문과 신윤무의 모반사건이 있었고, 천둥 번개가 여러 번 울리는 등의 일이 생기자 중종은 구언(求言)의 명을 내린다. 이는 신하들에게 아무 제안이나 좋으니 자신에게 상소를 올리라는 명이었다. 이때(중종 10년) 박상과 김정은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의 딸로, 반정 때 신수근이 살해당하고 신씨는 폐비된 바 있다. 이러한 신씨를 복위하자는 것은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것으로, 부인이 쫓겨나는 것은 남편에게 잘못이 있거나 시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렀을 때 가능한 것일 뿐이므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왕비가 폐위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또한 이 폐위는 신하가 왕을 위협하여 왕비를 폐위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므로, 박상과 김정은 이를 복위함으로써 바로 잡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때 박상과 김정은 상소문을 단단히 밀봉하고 왕이 직접 뜯어보소서라는 쪽지를 위에 붙인다. 이를 본 승정원(비서실)은 뜯지 않고 왕에게 직접 올린다. 왕은 이를 읽어보고 놀랐고, 상소를 확인하지 않고 올린 승정원을 질책한다. 그래서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조정의 신하들은 사정을 알아내고 동요하기 시작한다. 곧 대간에서는 박상과 김정을 탄핵하기 시작하였는데, 표면적으로는 종묘와 사직을 위협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이들이 반정 세력의 도덕성과 왕의 무능을 정면으로 꼬집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구금되고 심문 당했으며 결국 유배형에 처해진다.

이때 조광조는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의 전적을 두 달간 지낸 뒤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상태였다. 이때 조광조는 상소를 제출하여,

"박상과 김정은 왕의 구언의 명에 따랐을 뿐입니다. 만일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지 처벌을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대간은 나서서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들을 처벌하게 되었습니다. 대간의 직분은 언로(言路)를 열어야 그들의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만일 재상들이 그들을 처벌하자고 해도 대간은 그들을 용납하자고 하여 언로를 넓혀야 합니다. 저는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이들과 어찌 함께 근무하겠습니까? 저와 그들은 서로 용납할 수 없으니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을 전원 파직하고 언로를 여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발언 후 조정은 크게 동요하였다. 우선 박상과 김정을 탄핵한 대사헌(대간 중 하나인 사헌부의 수장)이었던 권민수의 후임 대사헌 이장곤이 이 발언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조광조와 같은 견해를 가진 관료들이 하나 둘씩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대간에 남아 탄핵을 주동한 적이 있었던 사헌부의 관료들은 여전히 그들의 주장을 고집하며, 종묘와 사직이 언로보다 더 중요한데 조광조의 처사는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 반정공신들 역시 조광조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자 홍문관의 전체 관원이 나서서 조광조의 견해가 옳긴 하지만, 전 대간도 종묘와 사직을 위해 결단하였으니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는 양시론(兩是論)을 주장한다. 그러자 중종은 한쪽이 옳으면 옳은 것이지 양쪽이 옳다고 하는 것은 안된다, 라고 하였다.(중종실록 권 23권 10년 11월) 그러자 사간원이 사헌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고 비난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은 조광조가 옳다고 생각하는데 사헌부는 양시론을 주장하고 있으니,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왕은 당황하여 '조광조 한사람의 발언 때문에 모든 관료들이 서로 대립하다니 매우 놀랍다. 어찌하여 이 조정에 이런 큰 변고가 있는가?' 라며 질책한다.

그래도 논란이 계속 되자 왕은 대신들을 불러 그들의 의견을 물었고, 영의정 유순은 조광조나 대간의 주장이 다 옳은 것이다, 라고 말하며 박상과 김정의 처벌을 경감하자, 라고 말하며 살짝 논쟁의 핵심을 벗어난다. 그러자 좌의정 정광필, 우의정 김응기, 우찬성 김전, 우참찬 남곤은 조광조의 견해가 옳다고 하였고, 이에 따라 대간의 거취를 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양시론을 가장 처음 주장했던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인 김근사가 의정부의 대신들이 화목을 도모하지 않고 조광조의 편을 듦으로써 분란을 키운다고 비판하였고, 이것을 들은 대신들은 홍문관의 비난을 받았다며 사직을 청한다. 그러자 왕은 만류하며 수습한다.

결국 조광조의 발언에 의해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졌고,[8] 결국엔 좌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많은 관료들이 박상과 김정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대간은 교체되었고, 중종 11년 조광조는 3월 6일에 홍문관 부수찬이 되고, 3월 28일에는 홍문관 수찬으로 승진한다. 그리고 5월 22일에는 경연 검토관이 된다. 그리고 그해 11월엔 박상과 김정이 복직하였고, 이 논쟁은 조광조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2.3.2.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文廟) 배향(配享)에 대한 논쟁

1년 뒤인 중종 12년 10월, 정몽주를 비롯한 성삼문, 박팽년 등의 문묘 종사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영의정인 정광필은 성삼문, 박팽년에 대해서는 아직 보류하는 게 좋다고 답했고, 다만 정몽주에 대해서는 모두 문묘 배향에 동의한다. 이때 우의정 이자가 조광조의 스승이었던 김굉필을 언급하며 그를 포상하자고 하였고, 중종도 동의하여 이들의 자손을 등용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틀 뒤 성균관 생원 권전이 정몽주 뿐 아니라 김굉필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많은 신하들이, 김굉필이 뚜렷이 족적을 남긴 것도 아닌데 문묘에 배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한다. 중종 역시 자격이 없는 자를 문묘에서 배향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언급한다. 그러자 조광조는 김굉필같이 행실이 바른 자는 찾기 어렵다며 응답한다.

또한 조광조는 뒤이어 "많은 유생들이 김굉필을 칭송하므로 그의 사람됨을 알만 합니다"라고 칭찬하며, 그는 행실로 유학의 모범을 보였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받드는 것이며, 그렇다면 배향해도 괜찮지 않겠냐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을 비롯한 원로대신들은 정몽주는 괜찮으나 김굉필은 비록 그가 뛰어난 유학자이긴 하였으나 짧은 삶을 살았으므로[9] 성리학을 떨치지 못하였음을 지적한다.

하지만 중종은 정몽주도 배향하면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몽주가 우왕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광조는 당시 사람들은 우왕이 왕씨인지 신씨인지 몰랐을 뿐 아니라[10] 정몽주가 그의 밑에서 벼슬을 한 것은 부귀영화를 원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흠이 안 된다고 한다.

결국 원로대신들과 중종은 양보하여 정몽주를 문묘에 배향하고 김굉필은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이를 논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것이다.

조광조와 그의 세력은 신진 사림 세력이었고, 사림은 성리학을 내세우는 학파들이었다. 정몽주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였고, 또한 김굉필은 사림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며, 젊은 사림들의 리더로 떠오른 조광조의 스승이었다. 이들 신진 사림은 이들을 문묘에 배향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성리학화를 더욱 촉진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사상적 뿌리로 여겨지는 정몽주의 문묘 배향을 통해 자신들의 학문적 권위를 높이려고 했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중종은 신진 사림을 밀어주는 입장이면서도, 이들이 훈구세력과 적당히 균형을 이루길 원했으므로, 이들의 손을 완전히 들어줄 수는 없었다. 또한 김굉필을 배향하자는 것은 조광조에 호의적이었던 정광필 같은 대신들도 반대할 정도로 억지성이 강했다. 이들이 김굉필을 민 것은 아무리 봐도 조광조의 스승이라는 것 때문이지, 김굉필이 성리학에 큰 공헌을 해서가 아니었다.

만일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한다면,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는 문묘에 배향된 대유학자의 수제자가 되는 셈인데, 그렇잖아도 신진 사림의 리더였던 조광조는 국가 이념의 스승의 지위까지 갖게 되는 셈이었다. 이는 지나칠 정도의 권력 강화였다. 이러한 사림들의 속셈을 당시 반정 세력들과 왕이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김굉필의 문묘 배향은 이때 논의되었던 것이 전부였고, 훗날 사림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잊히는 것을 볼 때, 김굉필의 업적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김굉필을 문묘로 모시자는 것은 신진 사림의 권력 강화를 위한 무리한 욕심이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훗날 마침내 사림이 정권을 잡게 되자 당파싸움을 시작하고, 이것이 일당 독재화를 거쳐 마침내 세도 정치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면, 사림이 아무리 성리학의 이념으로 무장을 한들, 정치가로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11]

2.3.3. 군자, 소인의 논쟁

중종 13년 5월 15일 서울에서 큰 지진이 일어난다. 담장과 집, 성벽이 무너질 정도였다. 당시 천재지변(天災地變)은 사람의 잘못에 하늘이 노한 탓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왕은 신하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갖는다.

이때 논의에서 지진은 음양이 쇠했기 때문이며, 음은 소인이고 양은 군자이니 조정에 소인이 가득해서 생긴 결과라는 내용을 토론하게 된다. 이때 반정공신 중 하나였던 조계상이 소인들의 행적은 겉보기엔 알 수 없고, 따라서 왕을 바른 도로 인도한다고 하지만 실은 그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한 수작이라는 말을 한다.

이에 신진 사림들은 격분하였고, 조계상과 그를 옹호한 장순손을 군자를 해치려는 간사한 소인이라고 지목해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참잔관 권벌, 대사헌 고형산 등이 합동으로 탄핵한다. 결국 중종은 조계상을 파직하나, 장순손은 가볍다고 보고 파직에 동의하지 않는다. 영의정 정광필은 단지 말 한마디 잘못한 것 가지고 재상을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다, 라고 하였는데 대간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5월 20일 경연에서 당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대간과 홍문관의 견해는 한사람의 견해가 아닌 모두의 공론이라고 말하며 중종을 설득한다. 마침내 중종은 그 둘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파직을 명한다.

위의 논쟁은 사소한 듯 보이나, 신진 사림과 반정공신들이 직접적으로 부딪힌 최초의 사례라는 의미가 있다. 조계상은 반정에 가담하여 정국공신 2등에 임명된 데다 조광조가 등용되기 전엔 대사헌, 예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낸 거물이었다.

반정공신들은 그동안 폐비 신씨의 논쟁, 문묘 배향, 그리고 소격서 폐지 등, 이들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는 사림들의 행보를 방관만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 역시 유학자 출신으로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는 것에 강하게 반대할 이유가 없었고, 또한 사림들의 행보가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군자와 소인 논쟁은 위의 사건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반정공신 중 거물급에 속하는 인물들이 신진 사림의 탄핵을 직접 받아 실각한 최초의 사례였기 때문이다.

2.3.4. 현량과(賢良科: 천거제)

중종 13년 3월 경연에서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경연에 참여할 시종을 뽑자고 건의한다. 그런데 경연은 왕과 더불어 강론하는 자리이므로 학문이 깊은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이미 조정의 고관들이며 말단의 관료들을 왕과 같이 있는 자리에 동행할 수는 없으므로, 특별히 사람을 뽑아 시종으로 등용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이는 상당한 고위직에 오를 사람을 천거로 통해 바로 뽑자는 뜻이었다.

그러자 대사헌 최축생이 거드는데, 그동안 유능한 인재가 천거되어도 과거 급제자들과 차별되어 임용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쓰지 못하였고, 따라서 종래의 천거제가 아닌 과거 급제자와 동등한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천거제를 운용하자고 말한다. 뒤이어 조광조는 지방에선 감사, 수령이 서울에서는 홍문관, 육경, 대간이 천거한 뒤, 그 인재들을 한 데 모아 왕이 직접 면담하여 시험한다면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이는 한나라에 시행했던 현량방정과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조광조는 과거 시험의 문제점은 글재주만 있는 자만 선발되는 것이며 그 사람의 행실을 알 수 없는 반면, 천거제는 이러한 것을 모두 감안한 뒤 뽑는 것이므로 이것이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다음날 대간에서는 이는 한나라의 현량과와 효렴과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므로 문제가 없으며, 이는 조광조의 한사람의 견해가 아닌, 성균관 등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은 반대하는데, 이는 과거 시험에서도 재주와 행실이 빠질 수 있듯 천거제에서도 그러한 인물들이 빠질 수 있고, 또한 이 천거제로 인한 폐단을 알 수 없으므로 과거의 법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자 남곤이 이에 반대한다. 우리가 삼국지를 읽어 보면 알 수 있듯 중국에서 과거 제도가 마련된 것은 현량과, 효렴과 등의 폐단을 거친 뒤에 나온 제도[12]이며 이때의 폐단은 천거된 사람들은 천거한 사람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정작 재주가 있던 사람들은 누락되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천거를 잘못하였다고 천거한 사람을 처벌할 수도 없으므로, 이러한 폐단이 일어나는 것을 법적으로 규제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천거로 선발하는 것은 어쩌다 한번 할 수는 있어도 항상 시행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자 김정은 이를 받아, 사소한 문제점을 걱정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어느 세월에 교화를 하겠냐고 말한다. 조광조는 이를 받아 발언하길, 천거제를 시행하되 과거 시험 역시 유지할 것이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천거에서 빠졌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과거 시험을 치루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 측의 반론은 한 눈에 봐도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여 아무 대안도 없이 무시하였다. 그리고 조광조가 주장한 과거제와 천거제를 병행하자는 것 역시 좋은 대안이라고 볼 수 없다. 현량과 방식의 천거제는 천거를 받은 사람을 과거를 치른 사람보다 우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천거를 받을 인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애써 힘든 과거를 볼 필요 없이 천거를 받을 것이다. 따라서 천거를 받은 사람끼리 뭉치는 파벌화가 쉽게 이루어지고 서로 밀어주기로 올라오게 된다. 이에 비해서 과거를 치른 사람은 상대적으로 넓은 범위에서 등용되므로 인맥이 적고 고위직으로 올라가기가 힘들어 진다. 따라서 천거제에는 '인맥이 튼튼하고 뒷배경이 빵빵한 인물'이 모이게 되고, 과거제에는 '인맥이 없고 뒷배경이 부족한 인물'이 몰리게 된다. '천거를 받을 수 있는게 좋지만, 그럴 인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과거를 본다'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천거제의 이상은 '재주도 있고 행실이 훌륭한 사람'(검증된 인재)인데, 과거제는 '재주는 있으나 행실은 알 수 없는 사람'(검증되지 않은 인재)로 폄하된다. 당연히 천거제가 실행되는 동안에는 천거 받은 사람이 과거 치르고 들어온 사람보다 우대받을 수 밖에 없다. 이는 현량과로 뽑힌 인재들이 빠르게 고위직에 올라간 것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이대로 가면 기존에 과거로 뽑힌 사람들이 심각하게 위화감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하다.

즉, 천거제와 병행하여 실시하면 과거제는 그저 하급 관리를 뽑는 시험으로 변질되고 사실상 널리 많은 인재를 뽑는다는 과거제의 의의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전락한다. 이는 당나라 전기에 과거제가 실행되었으나 구래의 문벌귀족이 고착되어 있어 과거로 등용된 인재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던 제도로 회귀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미 전면적인 과거제가 실시중인 상황에서 이는 퇴보적인 제도나 다름없다. 이렇게 천거제 자체의 문제를 지적하는 주장에 대해서, '과거제를 병행하면 된다'는 조광조의 반론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천거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은 될 수 없다.

조광조의 천거제와 과거제를 병행하자는 제안은 안당 같은 대신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한다.[13] 그리고 중종 역시 천거제를 속히 시행하라는 명을 내린다. 곧이어 세부적인 절차가 마련되는데, 서울의 경우 중추부, 육조, 한성부, 홍문관에서 인재를 찾아내면 성균관에 보고하고, 그러면 성균관에서는 이를 예조에 보고한다. 그리고 지방의 경우 향약에서 추천된 인재들은 수령에게 보고되며, 수령은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이들을 심사한 뒤 예조에 보고한다. 예조는 이들을 한 데 모아 시험을 보고, 천거자의 잘못을 막기 위해 천거자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과 나란히 적어 놓게 한다.

이렇게 중종 13년 6월에 천거제가 정해졌는데 이의 실행은 지지부진하였고, 이는 조정에서 반대하는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중종 14년 2월에 누가 대궐에 익명의 편지를 매단 채 화살을 쏜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는 승정원(비서실)에서 곧바로 불태웠기에, 그 편지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중종이 소인이 군자를 해치기 위해 한 짓이라고 말하고, 또한 신용개는 이를 쓴 사람이 조정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누군가가 한 짓이라고 말한다.

현량과로 천거된 사람들은 벼슬 초년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종 6품, 7품의 (상대적으로) 고위직을 척척 받았고, 이에 정광필이 "세종대왕께서도 신하를 예우하는 방법은 자급뿐이다, 라고 하셨는데, 처음부터 이런 높은 자리를 함부로 내리는 것은 폐단이 클 것입니다"라고 다시 만류했으나 씹혔다.(…)

그리고 곧이어 강윤희 고변 사건이 터진다. 강윤희는 정국공신인 김우증을 고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김우증이, 현량과 출신이 조정에 들어오면 정국공신을 다 죽일 것이라고 말하며 그 전에 이들을 쳐 없애자, 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김우증은 화살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를 우려했으므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그 사건을 조사한 결과 김우증은 유배를 당하게 되고, 현량과는 탄력을 받아 그 결과 마침내 중종 14년 4월 28명을 최종 선발한다.

현량과의 인재들은 과거 시험을 치룬 급제자들과는 달리 상당한 지위에 등용될 만한 사람들을 뽑는 게 목적이었으므로 평균연령이 35세가 넘었고, 또한 그 중 12명이 관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반대한 사람들이 우려한 대로 이들은 명문 귀족출신의 자제들로 정부와 상당한 연줄이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였다. 이는 숨어있는 인재들을 널리 구한다는 취지와는 달랐다.

뿐만 아니라 천거제를 시행한 것은 조광조를 위시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들은 전부 사림들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의 유입은 가득이나 신진 사람의 대두로 골치를 썩히던 반정공신들에게 불리한 영향을 주게 된다.

게다가 공정과도 거리가 멀었던지, 안당의 세 아들인 안처겸, 안처근, 안처성 삼형제가 전국에서 28명을 뽑는 현량과에 함께 급제하게 된다. 여기에 김식, 박훈, 정완, 송효직은 뚜렷한 조광조파였다.

때문에 반정공신들은 조광조가 그의 야욕 때문에 현량과를 이용하여 자기 파벌의 사람들의 수를 늘린다고 생각하였고, 이로써 그들이 조광조에 대해 가지고 있던 적개심이 구체화된다.

2.3.5. 소격서 폐지 논란

발단은 종묘대제에 쓸 제물인 소가 종묘의 문턱을 넘다가 쓰러져 죽은 것이었다. 이때 삼공과 예관 등의 중요 대신들이 모두 참관하였는데 그래서 더욱 파문이 컸다.

중종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벌였고, 조광조는 조선의 제례가 옛 방식과 맞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좌의정 신용개는 제례 방식을 바로 잡기 위해 우선 소격서와 같은 도교 방식 제례의식을 하는 관청을 폐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은 이는 옛날부터 해온 것이므로 굳이 폐지할 필요는 없다고 반대하였다.

그 뒤 잠잠해졌다가, 홍문관의 관료중 하나가 소격서 폐지에 대한 상소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불붙는다. 그 뒤 8월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승진한 조광조가 소격서의 폐지를 심각하게 재론하면서 소격서 논쟁이 매우 격화된다. 조광조는 상소에서 세상을 규범하는 것은 오직 성리학뿐이며, 다른 이단을 모두 혁파해야 함을 역설하고,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망설이는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왕께서는 단단하고 굳은 것은 버리고 유약하고 부질없는 것을 생각하며, 이리저리 정처 없이 헤매며 부질없는 것에 연연해하며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중종실록 13년 8월)

이에 중종은 소격서는 오래돼서 혁파하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는데, 그러자 김정이 전대의 잘못된 일을 후대에 반복하면 안 된다고 간하고, 중종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간은 전원이 사직하겠다고 말한다. 중종은 설령 그리 되더라도 소격서는 폐지 못시킨다고 하였고, 당시 도승지였던 문근은 중종의 완고한 태도가 놀랍다고 비판한다.

그 뒤 거의 한달 뒤에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신용개, 우의정 안당등도 나서서 소격서를 혁파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중종은 거부하고, 대간은 출근을 거부한다. 이때 과거를 시행할 시기가 다가오자 중종은,

"대간은 반드시 복직하지 않을 것이다. 소격서 문제는 오래 토론해도 무관하지만, 과거는 왕정의 대사라 결코 미룰 수는 없다. 그러니 대간을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오늘 중으로 빨리 다른 대간을 뽑도록 하라."

대간을 모두 교체하고 새로 뽑으라는 강경한 명을 내린다. 그러자 조광조는 이를 받아,

"… 이는 암군(暗君)이 하는 일입니다. … 오늘날 일어나는 일은 너무도 그릇되어 저희들이 눈을 씻고 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마음과 말이 격분하여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중종실록 13년 8월 30일)

라며 강하게 대답한다.

9월에 접어들자 마침내 조광조도 사직을 요청한다. 중종이 이럼에도 물러나지 않자 조광조는,

"연산군 이후 새로운 풍조가 생겼는데,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었고 이로 원기를 배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니 저의 마음이 아프고 애통함을 진실로 다 아뢸 수 없습니다"

라며 답한다.

여기서 조광조의 소격서 폐지 논란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있다. '원기를 배양한다'라는 말은 곧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학문의 풍조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진 사림의 등장과 성리학의 성장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앞서 있었던 문묘 배향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을 확고한 성리학 국가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소격서 폐지는 같은 연장선상에 있었다. 소격서는 사소한 관청에 불과하지만 성리학 이념에 그릇된 것이므로, 폐지함으로써 국가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길 원했던 것이었다.

중종이 '사소한 관청'을 폐지하는 데 이렇게 격하게 반대한 이유는, 신진 사림이 국정을 독점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14] 중종은 대간과 의정부의 대신들이 모두 조광조에 의견에 동의하는 것을 볼 때 당시 사림의 득세는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했으며, 소격서를 폐지함으로써 국가의 이념이 성리학이라고 보이는 것은 이들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줄 뿐이라고 보았다. 중종이 신진 사림을 등용한 이유는 반정공신의 득세를 견제하고 싶었을 뿐이었고, 애초에 이들로 독점된 정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었던 중종은 이를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한 소격서 논쟁은 예전에 세종 때와 성종 때도 논쟁이 되었으며, 이때 왕이 모두 소격서를 남기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린 바 있었다. 중종은 정치 세력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도뿐만 아니라,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신하들의 견해를 물리치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함으로써 적당히 왕의 권위를 세우길 원했던 것이었다. 과거에도 관철된 선례가 있었으므로, 중종 역시 이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격서의 경우는 또 다른 의미가 존재하는데,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다. 즉 형태상으로 조선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점에서는 중국의 천자와 같은 위치[15]에 놓이게 되는 등 왕권을 강하게 상징하는 것이 소격서이고, 그곳에서 지내는 초제이다. 같은 역할을 고려시대에 하던 관회가 조선건국과 동시에 불교적이라는 이유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미신이라느니 도교적이라느니 하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조선의 왕들은 소격서와 초제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16].

그러나 조광조는 이에 대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급기야 연산군과 중종을 비교하며 비판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조광조가 이렇게까지 하자 중종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결국 중종은 자신이 대간을 교체하라는 명은 과거 시험이 다가왔으므로 그렇게 한 것이지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하며, 소격서 폐지 논란을 재검토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조광조는 '이런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감격스럽기 짝이 없다'라고 말한다.

결국 중종 13년 9월 3일, 소격서의 폐지를 명하고 대간의 복직을 명한다. 이로써 두 달 만에 소격서 폐지 논쟁은 조광조의 승리로 일단락된다. 누가 왕이고 누가 신하인지.

그럼으로써 조광조의 입지는 상당히 강화되며, 2개월 만에 그는 대사헌에 임명된다. 따라서 그는 대간을 이끄는 최고 수장이 되었으며, 관직에 등용된 지 단 3년 4개월 만에 말단에서 종2품인 대사헌이 된 것이었다.[17]

이러한 표면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중종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는 점에서, 소격서 논쟁은 조광조에게 크나큰 위험을 안게 하였다. 소격서 논쟁 과정에서 중종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고, 중종으로서는 친위세력으로 삼기 위해 주목한 신진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의견을 꺾게 되자, 이들 역시 반정 세력과 마찬가지로 믿을 만한 자들이 못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며, 그의 고립감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그 동안 조광조의 의견은 어느 정도 중종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관철되었는데, 이토록 왕의 의견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관철된 적은 없었다.[18]

훗날 중종은 조광조가 실각하자마자 소격서의 부활을 논의한다. 그때 남곤 등은 혁파한 지 얼마 안 된 것을 바로 부활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 라며 반대한다. 그러자 중종은 부활이 안 된다면, 기우제나 기청제 같은 것은 소격서가 있던 곳에서 지내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놓고 이를 관철시킨다. 3년 뒤 중종은 어머니의 병환을 핑계로 기어이 소격서를 부활시킨다. 이를 본다면 조광조와 중종의 대립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했으며, 중종이 소격서의 폐지를 반대하는 그의 의견이 조광조 등에 의해 꺾인 것을 얼마나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2.3.6. 정국공신 개정 시도(위훈삭제 사건)

조광조가 추진한 현량과에 대한 정국공신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었고, 이는 화살을 날린 사건이나 김우증의 모반사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에서 조광조는 정국공신들에게 먼저 정면공격을 시도함으로써 이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해결키로 하였으니, 이는 곧 정국공신 개정 시도였다.

중종 14년 10월 25일 대사헌 조광조는 중종에게 다음을 건의한다.

'정국공신 중엔 연산군의 총신도 있고 이들의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들이 만일 반정 때 공을 세웠다면 몰라도, 이들은 공도 없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자들로, 이로움이 있다면 왕도 시해하고 나라도 빼앗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임금은 이러한 일의 근원을 막아야 하며, 따라서 정국공신을 개정하지 않으면 국가가 유지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러며 조광조는 공신 2, 3등 중 개정할 자가 많고, 4등 50명은 대부분 공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때 중종이 공신의 개정을 반대하자 홍문관 부제학 김구가 대간의 뜻을 따를 것을 촉구한다. 대간들과 승정원에서까지 공신의 개정을 촉구하지만, 중종은 이러한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간은 전원 사직을 요청한다. 또한 조광조와 대사간 이경동은 밤이 깊어 새벽 1시가 되었는데도 거듭 정국공신 문제를 거론한다. 정광필, 안당을 비롯한 대신들은 처음에는 그 많은 공신들을 어떻게 다 개정하겠냐면서, 1, 2, 3등은 놔두고 4등에서만 문제되는 자들을 개정하자는 의견을 내었고, 이에 중종은 반색하였으나, 대신들은 이내 다시 생각해보니 다 개정하는 것이 맞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빡친 중종이 그럼 처음부터 다 개정하자고 할 것이지 왜 말을 바꾸고 난리냐고 한소리를 했고, 이에 대간들이 대신들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을 말을 바꾸었다고 구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왕을 꾸짖어 중종의 속을 더 긁었다.(…) 박시백 화백 등은 그동안 조광조를 견제하던 정광필을 비롯한 대신들마저도 조광조의 개정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고, 더 위기를 느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중종 14년 11월 8일 결국 대간 전원이 사직을 요청하자, 중종은 한발 물러서 19명의 명단을 제외하였는데 그러면서도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다.

중종 14년 11월 9일 영의정 정광필은 삭제할 명단을 작성해 제출한다.

그리고 중종 14년 11월 15일 밤, 기묘사화가 발생한다.

2.4. 기묘사화와 몰락

그날 밤 자정 승지 윤자임 등은 승정원에서 숙직을 하다 궁궐 안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고 밖으로 나온다. 이때 경복궁의 서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그 문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경복궁의 중심부인 근정전에선 군인들이 계단 아래 좌우로 정렬해 있었고, 안팎이 모두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 안엔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 등이 있었다.

윤자임은 그들에게 왜 그곳에 있냐고 물어보자 이들은 왕이 불렀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승정원(비서실)을 거치지 않고 불렀다면 말이 안 된다고 항의하며 내전으로 들어가 왕을 만나보려고 하였다. 그때 안에서 승전색이었던 신순강이 나와, 병조참지 성운에게 지금부터 승지가 되었으니 가서 왕의 전교를 받으시오, 라고 말한다. 군졸들은 계속 항의하는 윤자임을 밀쳐내고 성운을 들여보냈고, 성운이 나오면서 의금부에 투옥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가지고 나온다.

새벽 5시경, 왕은 승정원, 홍문관, 대간을 다 교체하고 새로 승지가 된 성운에게,

"조정의 큰일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지체해선 안 된다. 빨리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전지를 내려라. 두세 번 재촉하였는데 밤이 새도록 결정을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한다.

누가 주도적으로 조광조 처형과 같은 문제를 논의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그를 처형하는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대신들은 소식을 듣고 속속 입궐하고 있었으며, 도착한 영의정 정광필, 좌의정 안당 등의 의정부 대신들은 조광조 등을 붕당(朋黨)죄로 처형하겠다는 것을 듣고 강하게 반발한다.

정광필은 붕당죄에, 대해 중종이 그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붕당죄가 적용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자 중종은 자신이 그러한 게 아니라 조정에서 그리 말하였다고 하였다.[19]

그러자 정광필은 자신이 도착하였을 때 이미 와있던 사람들은 모두 "왕께서 죄를 청하라고 시키셨고 따라서 이는 모두 왕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특히 조정의 뜻이라면, 어째서 의정부의 대신인 자신이 왔을 때 이미 그들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결정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중종은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대신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빨리 조광조에 대한 형을 결정해 올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정광필, 안당의 면담을 거절한다.

그러자 정광필은 "그들을 왕이 뽑아 높은 지위에 임명하고 그들의 말을 다 들어주었으면서 하루아침에 처형하는 것은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다"라면서 반발한다. 뒤이어 의정부, 육조, 한성부에서 모두 그들이 붕당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고, 뒤이어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150명이 궁궐 안으로 난입해 통곡하며 항의하는 일이 발생한다. 결국 왕은 한발 물러서 조광조의 죄는 사형에 마땅하나 곤장 100대에 유배형으로 경감한다, 라고 명한다. 정광필은 이것도 부당하다고 항의하나, 중종은 '사형을 감형하는 것이므로 사정을 둘 수 없다'고 말한다.

다음날 왜 이러한 중대한 결정이 밤에 갑자기 이루어졌는지, 또한 왜 신하들 몰래 비밀스럽게 했는지 신하들이 따지기 시작한다. 이때 정광필은 남곤을 노려보고, 남곤도 부끄러웠는지 눈을 피하다가 조광조 사사(賜死) 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사관(史官)도 하도 기가 막혔는지, "조광조를 총애하던 왕과 지금 조광조를 죽이기 위해 악을 쓰는 왕이 같은 사람인가?" 하고 사론에 남겼을 정도.[20]

신하들은 중종이 조정이 청했다고 했는데 대체 누가 왕에게 처음 청했냐고 묻는다. 중종은 이를 밝히기를 거부하였는데, 새로 교체된 대간에서 이를 비판하며,

"왕이 신하를 처벌하는 것을 몰래 명을 내려 깊은 밤중에 비밀리 처리하실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왕께서 신하를 신임하신다면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밖으로는 신임하는 척하며 속으론 죽일 생각을 가지셨으니 임금의 마음이 이러하면, 이는 나라가 위태로워질 조짐이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자 중종은 드디어 내막을 털어놓는데, 홍경주가 남곤, 송질, 김전의 집에서 무사 30명이 조광조 등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홍경주는 중종에게 무사들의 공기가 심상치 않으므로, 이를 무마하려면 조광조를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밝힌다. 무사들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조정의 대신을 죽이는 것은 쿠데타를 의미하고, 이를 왕에게 밀고가 아닌 통보식으로 언급한 것은 노골적인 쿠데타 위협이었다.

중종이 내막을 털어놓자 다급해진 홍경주가 나서서 해명하길, 자신이 남곤, 김전 등과 의논한 뒤 조광조의 죄를 바로잡자고 청했고, 이때 남곤은 자신이 훗날 소인이 군자를 해쳤다, 라는 평을 듣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단언까지 했다고 말한다. 그 뒤 홍경주에게 무사 30명의 불온한 행동을 고했다는 박배근의 조사를 하였는데, 이때 무인들은 아직도 조광조의 처벌이 너무나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유생들의 집단 상소에 이 일이 무마될 것 같아 추가적인 집단행동을 계획 중이었음이 드러난다.

이것은 완벽한 역적모의였고, 이것이 밝혀진 이상 대역죄인으로 처벌하는 게 가능하였으나, 중종과 조정은 이에 맞설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조광조에 대한 논의를 중단하였고 조광조의 죄를 기정사실화 한다. 즉 왕은 그때도 무인들에 대한 통제수단이 없었고, 이를 여전히 반정공신들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1월 20일, 중종은 정국공신 개정 논란을 취소하였고, 조정을 장악한 정국공신들은 현량과도 파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유관은 '현량과를 통해 행실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단지 아는 사람이라 하여 등용되었으므로, 모든 이들이 이를 분하게 여길 뿐 아니라 이런 행위는 왕을 기만하는 짓입니다'라고까지 말한다. 곧이어 대간에서 이들 의정부의 대신들을 탄핵하였고, 그러자 중종은 남곤과 이유청을 영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여, 정광필, 안당을 실각시킨다. 그리고 왕은 정광필이 교체되는 그날 조광조를 사사하고 현량과도 파방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2.5. 기묘사화의 원인

조광조의 개혁정책들은 성리학적 이념 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지만, 문제는 조광조 자신이 너무 성급하고 완급조절을 하지 못한 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정책들을 성리학을 추종한다는 사람이 군주를 윽박지르는 듯중종에게 강요한 데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광조의 왕도정치(王道政治)에 공감했던 중종도, 자신을 마구 굴리고 갈구는 조광조에게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더욱이 반정공신들이 폐비 신씨 복위문제와 소격서 혁파, 위훈삭제 등으로 조광조와 사림파들에게 감정이 격해지면서, 중종은 조광조와 반정공신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지경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기묘사화 때 궁궐에 호출되어 있던 인물들의 벼슬을 본다면, 군에 관련된 인물들이 눈에 띄는 것을 알 수 있다.[21] 이를 보면, 조광조의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은 정국공신들이었는데 이들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과거 다섯 번의 모반을 본다면, 공신호에 대한 문신과 무신들의 알력이 상당하였는데, 이는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위험을 무릅쓴 무신들보다 문관들에게 더 많은 공이 돌아갔기에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공신호에서 주로 문관들이 높은 등수에, 그리고 무관들은 낮은 등수에 올랐는데, 여기서 조광조가 공신호 삭제를 하며 낮은 등수를 대거 삭제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낮은 등수에 집중되어 있던 힘없는 무관들이 대거 희생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무관들은 공신들과 호응해 그들의 군사력으로 이를 제재(制裁)하려 한 것이었고, 군에 대한 통제수단이 전혀 없었고 또한 이를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조광조와 그의 일파들은 아예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었다.

반면 중종은 이들이 벌인 반정의 중심에 있었던 경험이 있었고, 또한 왕이 축출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으므로 군의 반란 조짐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그 결과 그는 무관들을 대표하는 반정공신의 의견대로 조광조를 처형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진정하고 싶어 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종 자신도 조광조에 대한 두려움과 그의 개혁정책에 대해 슬슬 질렸을 가능성이 높다.(중종 항목 참조) 중종이 소격서를 폐지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나, 문묘 배향을 반대한 것, 또한 공신 삭제 등을 반대하거나, 군자 소인 논쟁에서 처벌을 반대하는 것을 볼 때 조광조의 개혁에 대해 중종이 썩 내켜하지 않았다. 조광조를 발탁하고 이들을 상당한 위치까지 등용한 것이 왕인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개혁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은 중종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급진적이었고, 중종의 입장에서는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중종실록에는 없지만 선조실록에는 다른 설도 언급하는데, 남곤 등이 궁궐 후원의 나뭇잎들에 꿀로 글씨를 새긴 뒤 개미들로 하여금 그 잎을 파먹게 하여 "주초위왕"[22]의 글씨를 만들게 한 뒤 중종에게 이것을 고해바쳐 중종을 분노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에 불과하다. 실제로 KBS 방송 프로그램 《역사스페셜》에서 실험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결국 조광조는 이후 능성(현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그때 당시 능주는 인조 때까지는 능성현이었다.)으로 유배되었지만, 결국 유배 1달 만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최후에 금부도사에게 왕의 편지 같은 것 없냐고 물어보았는데, 달랑 쪽지 한 장잘 먹고 잘 죽어라을 받자 내가 이래봬도 대부였는데 하며 기막혀했다고 한다. [23]

사족으로, 조광조를 죽이는 데 한 몫을 한 남곤은 사실 사림파로, 조광조의 선배 뻘 되는 인물이었다. 조광조의 사형이 확정되자 그는 눈물을 흘렸으며, 자신의 일을 후회해 유언으로 자신이 평생 쓴 모든 글을 불태우게 했다. 이로서 당대 최고의 문사였던 그의 글은 모두 후대에 전하지 않고, 다만 시 한 수만 전한다. 죽은 뒤에는 몰라도, 살아 있을 적에 그가 영의정의 자리를 거치고 천수를 누린 것에는, 다른 사람 눈치를 살펴서 적절히 브레이크를 밟을 줄 아는 능력이 조광조보다 우월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도 후세의 인식은 남곤, 심정이 불쌍한 우리 전하를 꼬드겨서 조광조를 죽이게 만들었어요, 쳇 'ㅅ'-3으로 인식되었으니… 이 이후 사림파의 주적은 조광조를 죽이려고 기를 썼던 중종이 아니라, 조광조를 살리려던 남곤이 되었다. 몇몇 교수들은 이러한 인식 자체가 중종이 치밀한 정치적 술수의 계획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꼴 보기 싫은 조광조를 제거하면서도 그 주체를 남곤 등의 관료로 인식하게 만들어 조광조 반대파의 세력을 억제하는 한편, 조광조를 죽이려는 데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중종은 그냥 빠져나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정치적 술수의 걸작품이다.

중종 말년에는 "젊은 친구들이 나름 잘해보려고 했던 일인데,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처벌한 것은 아닌가 싶다"훈훈하게 얘기할 거면 그냥 유배를 보내고 끝내지 왜 죽였어란 분위기가 대세가 되어, 그 때까지 살아있던 김안국이 복직되었고(그의 친구인 김안로의 영향이란 말도 있다), 죽은 이들은 다수가 복권되었으나, 유독 조광조만은 선조 대에 와서야 복권되게 된다. 아마도 훈구세력의 견제, 무엇보다도 중종의 질투가 아니었나 하는 분석이다.

3. 이야깃거리와 평가

조광조는 향약(鄕約)을 널리 보급했다. 그리고 향약은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튼튼히 하여 선조 때에 이르러 사림파의 세상이 되게 하였다.

꼿꼿하고 청렴결백한 성격으로, 아무리 고관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24] 그 외에도 키가 좀 작은 편이었는데, 부패한 대신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싫다고 하여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녀서, 조광조가 오면 멀리서부터 콧구멍만 보였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말 그대로 우스개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 것. 조광조의 꼿꼿한 성격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보인다.

개혁에 적극적이었으나, 이는 밝은 정치적 감각에 의한 시대 개혁이 아니라, 단지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한 학자의 탈레반성리학 독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성리학에 매우 충실해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도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제법 적극적이었다.

조광조가 정치가, 행정가라기보다는 이론에 치우친 학자라는 단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또한 여러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여진족 토벌이다. 중종이 영의정 정광필, 병조판서 이장곤, 무신 유담년과 여진 토벌을 논하다 몰래 기습을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데 갑자기 조광조가 두두두 달려오더니, '아니 되옵니다, 저은하~!' 하고 펄썩 엎어지며 아뢰길, 여진이 죽일 놈들은 맞으나, 비겁하게 기습을 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위 서술은 조광조가 무슨 시위라도 한 것처럼 써놨는데 조금 과장이다. 실제 기록에 따르면, 마침 입궐했던 조광조가 '이 일은 가벼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자 중종이 불러들여 의견을 물었다. 한다는 말이 여인족 추장 속고내에게 글을 보내 꾸짖고, 말을 안 들으면 그때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 성대하게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듣고 있던 무신들의 어이를 날려버렸다. 송양지인 다만 조광조의 근거는 단순히 군자답지 못하다는 게 아니라 '비겁한 기습을 할 경우 국제관계에서 신뢰를 잃을까 두렵다'이니 원론적으로는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정광필과 이장곤이, "말은 맞는 말인데 오랑캐가 득실거리는 변방에서 조광조가 하는 고매한 말은 통용되기 어렵습니다"라고 완곡하게 제지하려 했으나 중종도 조광조도 막무가내였고, 옆에서 듣다가 어이가 없어진 무신 유담년이 '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보고 길쌈하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북방의 일은 저희 무신들의 의견을 들으셔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결국 무산된 일이 있다.

또 유명한 사례로는 소격서 철폐에 관한 건이 있다. 국가에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소격서라는 곳이 있었는데, 조광조가 이를 철폐하기 위해 밤새도록 무릎 꿇고 궁궐에서 상소를 읽은 것은 유명하다. 그런데 그 소격서 폐지로 내세운 이유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성리학으로 운영되는 나라에서 도교 따위 미신에 의지한 기관을 운영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이유이다. 이것까진 당시 사상적, 학문적 근거 등을 보아 괜찮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가 문제였다. '하늘에 대한 제사는 하늘의 아들, 즉 천자인 명나라 황제가 할 일이지 일개 제후왕인 중종 당신이 할 일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한 것(…).[25] 여기까지도 그렇다 치자. 이때 중종은 폐지를 요구하는 조광조에게, "세종께서도 소격서를 철폐하지 않았다"며 반론하자 조광조는 대뜸 "세종대왕의 유일한 오점이 바로 소격서를 남긴 것."이라고 받아쳤다. 선대(先代) 왕의 오점 운운하는 이 발언은 지금 봐도 패드립?상당히 무례한 말인데, 당시 시대에는 단순한 무례함의 범주를 넘는 발칙한 언행이었을 것일 테고, 그걸 면전에서 들은 중종 입장에서는 대놓고 너 처형은 못할지라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단연 조광조가 관료로서 개념은 제로고, 현실을 모르고 나는 옳다는 고집으로 뭉친학자에 가까운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조광조는 조선이 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하여 국가를 운영하기를 원했던 사람으로, 그의 정책들은 한결같이 이런 기반 하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성리학을 통한 이상적인 국가의 형성을 기대했지만, 조광조 자신이 흑백논리를 앞세워 너무 과격하고 성급하게 개혁정책을 밀어붙였고, 중종에게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여 죽음을 맞고 말았다.[26] 그러나 조광조가 뿌려놓은 성리학에 기반한 조선이라는 이상은 결국 선조대에 이르러 사림파들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현실화 되었다. 하지만 역시 조광조가 바라던 이상적인 정치는커녕,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게 문제. 역시 현실은 시궁창.

사실 조광조의 정치도 그렇게 이상적이지는 않았다. 현량과에서 나타나는 공정성 문제도 컸고, 김식은 아예 대놓고 시험지의 이름 가려놓은 봉인을 찢고 과거제에서 사림들을 뽑았으며, 조광조파였던 이조의 낭관들이 잘못이 없음에도 관료들을 자질이 없다고 파면해서 쫓아내기도 했다. 이는 명백한 월권행위였는데도, 조광조는 내가 쫓겨난 사람들하고 같이 공부해봐서 아는데, 걔들 소인임 ㅇㅇ라고 무마시켰다. 흑백논리는 더욱 심해져서 조정 신료를 순전히 자기네들 기준으로군자와 소인으로 나누고, 군자와 소인은 함께 일할 수 없으므로 소인을 정치판에서 배제시키려고 했다. 물론 소인은 조광조의 반대파와 훈구세력이었다.

특히 이 부분, 현량과의 공정성 문제는 조광조의 도학정치, 원칙주의 자체에 치명적인 도덕적 타격을 줄만한 문제였다. 현량과의 원형인 향거리선제의 경우 이것이 시행되던 당시에도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품관인제로의 변화를 거친 육조시대에는 문벌귀족이라는 정치적 괴물을 탄생시키고 말았다. 따라서 현량과 시행에 반대하던 대신들 역시 이런 고사(古史)의 선례에 따라 반대론을 펼쳤던 것. 그런데, 강경하게 밀어붙여서 현량과를 시행하자마자 예상됐던 문제들이 바로 터져 나온 것이다! 이는 행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부작용이 뻔히 예측되는 정책을 억지로 시행하다 개망신당한 꼴이고,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도학정치를 위한다던 현량과를 악용해서 자기 당파의 세력확대를 추구했다는 오명(汚名)을 뒤집어쓰기 딱 좋은 일이다. 단순한 오명이 아니라 사실인데?

여기에 김정이 대간, 형조판서에 있을 때에는 감옥에 사람이 넘쳐나고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특별조사까지 해야 할 정도였으며, 이들 대부분은 천인 출신에서 출세한 사람들이었다. 이는 조광조의 개혁안 역시 철저한 신분차별, 혹은 성리학적 신분질서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조광조는 훈구파의 모순은 인식했지만, 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사림의 독단적인 방식으로 진행했고, 여기에 대한 비판을 군자-소인론으로 막아버렸다. 대표적으로 남곤은 사림의 지도자에서 졸지에 훈구파의 일원으로 낙인 찍혔다. 남곤이 조광조를 등용해야 한다고 중종에게 간하면서 조광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음에도. 남곤이 조광조 일파에게 제일 욕먹은 것이, 유교 경전 읽고 마음 닦기도 바쁜데 어디서 시나 글을 좋아하느냐? 이런 막돼먹은 인간 같으니![27] 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곤은 "그럼 중국하고 외교할 때 시나 글 짓는 재주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라고 강하게 자신을 변호했고, 실제로 그는 영의정 재직 시절은 물론 그 전에도 뛰어난 글 솜씨로 중국과의 외교를 전담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사림들은 자기네들이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모호한 기준을 들먹이며 일단 매도부터 하고 본 것이다.

조광조의 개혁 내용을 보더라도, 민생이나 국방 등의 현실에 대한 문제인식은 물론, 현실적 대책이 부족하다. 분명 공신들의 위훈 삭제 등으로, 가짜 훈구파들의 농장을 빼앗아 백성에게 돌려주는 등 민생에 이바지하였으나, 적극적 개혁책 마련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28] 흔히 비교되곤 하는 송대의 개혁자 왕안석과 대조되는 부분이다.[29]

물론 성리학 자체의 보수성과 수신(修身)을 통한 어짊의 확대라는 측면을 볼 때, 그리고 당시 사회의 최대 모순이 훈구파의 토지겸병과 수탈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훈구세력에 대한 공격과 그 부의 축소가 국가와 백성을 위한 급선무임은 분명하였다.

방납의 폐단을 거론했고, 이에 대한 계책으로 수미법을 주장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논의가 된 건 이이와 류성룡 때다. 당시 조광조의 주장은 훈구파가 세조, 중종 때 받은 방납의 권리 때문에 전황이 일어나는 걸 까는 것에 불과하다. 즉 방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훈구파를 싹 쓸어버리고, 사림파의 세상을 만드는 것 말고는 특별한 해결책이 없다는 의미. 결국 우리가 권력 잡겠다는 소리와 뭐가 달라? 나중에는 사림세력들이, 그들이 죽어라 비난하던 대지주세력이 되었다는 걸 보면?

하지만 조광조는 신진 사림 중에서 가장 온건파에 속했으며, "땅은 좁고 인물이 없으니 노비나 서자라도 능력이 있다면 관직에 뽑아 써야 한다"라는 정신의 소유자로 하인들에게도 공손히 대했으며[30] 구신들의 토지 독점을 비롯한 각종 사회문제 개혁에도 적극적이었고, 생의 마지막 순간 금부도사를 맞이하면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금부도사에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날이 저물도록 방에 들어가서 가끔 밖을 내다보며 다른 사자, 즉 사약이 취소되었거나 연기되었음을 알리는 사자가 오지 않나 기다렸다고 한다. 금부도사가 기다리다 지쳐 투덜대자 그때야 자진했다. 덤으로 조광조는 남곤, 심정이 좌의정, 이조판서가 되었다고 하자, 내가 죽는 게 당연하다고 탄식했지만, 그때 남곤은 같은 패거리인 심정 등과는 다르게 조광조를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었다.[31]

3.1. 조광조의 승진 속도

조광조의 승진 속도는 조선사의 여러 권신의 예에 비견할 정도로 이례적인 속도였다. 조광조와 비슷한 페이스로 승진한 사람이 없을 정도.[32] 또한 전형적인 청요직의 루트를 타고 승진한 것으로, 조광조의 직책에 실무를 맡은 관직은 단 하나도 없다. 이러고도 현재의 장관 격인 판서와 같은 정 2품까지 승진한 것.

중종 10년 9월 문과에 급제
중종 10년 11월 종6품 사간원 정원

중종 11년 봄 호조좌랑 → 예조좌랑 → 공조좌랑
중종 11년 3월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겸 춘추관기사관

중종 12년 2월 홍문관 부교리 (종5품)
중종 12년 3월 홍문관 교리 (정5품)
중종 12년 7월 홍문관 응교 (정4품)
중종 12년 8월 홍문관 전한 (종3품)

중종 13년 1월 홍문관 부제학 겸 경연참찬관 (정3품)
중종 13년 5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정3품)
중종 13년 7월 동지성균관사 겸 가선대부 (종2품)
중종 13년 11월 사헌부 대사헌 (정2품)

4. 드라마

KBS 월화드라마
서궁 조광조 신고합니다

KBS2에서 1996년 1월부터 6월까지 방송된 사극. 정하연 작가가 집필했으며 조광조는 유동근이 맡았다.

타이틀 롤은 조광조이지만, 드라마는 중종반정부터 시작하며, 도학정치를 추구하는 조광조의 삶과 중종폐비 신씨의 순애가 맞물려 그려진다. 이 드라마에서 중종은 공신들의 등쌀에 시달리는 나약한 왕으로 나오며, 폐비의 복위 문제를 두고 조광조와 충돌하다가, 조광조를 죽이면 폐비 신씨를 왕비로 복위시켜주겠다는 홍경주의 꾀임에 넘어가 사약을 내린다. 중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와는 매우 거리가 먼 이야기(…) 어쨌든 덕분에 폐비 신씨의 비중이 큰 유일한 사극이 되었다.

4.1. 역대 사극에서 등장한 배우들


1980년대 방송된 조선왕조실록 500년에서는 유인촌, 2000년대 방송된 여인천하에서는 차광수가 맡았다.

5. 기타

경희궁에서 공연한 고궁 뮤지컬 대장금에서도 등장한다. 근데 비중이 '뮤지컬 대장금'이 아니라 '뮤지컬 조광조' 수준(…). 아이돌의 무대를 연상케 하는 '조광조의 소격서 혁파'가 대표곡인데, 제법 들을 만하다. 조정석 버전 김태훈 버전

묘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상현동 산55-1)에 있다. 묘 자체는 잘 꾸며놓기는 했는데 주위가 온통 공사판이다(…). 묘 바로 앞으로 난 43번 국도(포은대로) 밑으로 신분당선이 지나갈 예정이라 도로를 다 뜯어놨고, 설상가상으로 묘 바로 앞이 광교신도시 끝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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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삼국지의 인물인 법정과 자가 같다.
  • [2] 여담으로 용인시 수지구에서 오래된 학교 중에 하나인 문정중학교의 교명은 바로 조광조의 시호에서 따왔다.
  • [3] 박원종이 연산군이 거느린 미녀들을 모두 소유한 부도덕에 대한 반발 심리도 있었다.
  • [4] 혼자 해먹는 걸로 모자라서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일가친척들까지 죄다 공신에 봉했다.
  • [5] 태조의 조카인 조온이 그의 5대조. 태조와 태종을 보필하며 무공을 세운 인물로 그의 자손 조광조와는 느낌이 참 많이 다르다.
  • [6] 조광조의 가문인 한양 조씨는 이성계의 할아버지인 도조의 벼슬 계승 문제로 인해, 처음에는 이성계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한양 조씨 가문은 시조의 외아들인 조휘가 원나라에 포섭되어 초대 쌍성 총관이 되면서부터, 성총관부의 수장인 총관을 세습해 온 원나라의 끄나풀 집안이었는데, 어찌어찌해서 후손 중 한 명인 조돈이 환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귀순하였다. 그리고 귀순 후 환조를 돕게 된 조돈의 후손만 대가 이어지게 되면서, 한양 조씨는 대표적인 조선 개국공신 집안이 된다.
  • [7] 사실 삼국지 등에서는 이 일화가 화흠병원의 일화로 나온다. 즉 저 일화는 표절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삼국지의 일화에서는 병원이 남곤 포지션인데,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어서, 세속적인 인물로 묘사되는 조광조 포지션인 화흠과 인연을 주도적으로 끊는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화를 가져다가 정반대로 해석한 것
  • [8] 대간이 계속 교체되다 보니, 3번째 교체에선 아예 국가 인재 풀에 더 이상 추천할 사람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러, 당시 이조판서 안당이 만류하여 없었던 일이 된다.
  • [9]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이 부관참시 당하자 유배되었고 곧 사사(賜死: 죽음을 내림, 즉 사약을 내림)된다.
  • [10] 우왕이 신돈의 첩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이성계가 집권하자 이것을 공식화한다. 그래서 세종 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도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은 신우, 신창이라고 불리고 있다.
  • [11] A세력에 대해 보수세력이 어떻고 윤리성이 어떻고 비판, 비난을 퍼붓던 B세력이, 정작 자신들이 권력을 쥐고 나면, 개혁이나 윤리성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A세력도 기함을 할 정도의 막장짓을 하는 것은 역사에서 정말 흔하다.
  • [12] 당시로도 한나라가 망한지 1200년 후이다. 현대에 있어 1200년 전이면 약 기원후 800년인데, 이는 당나라와 통일신라시대이다. 골품제를 21세기에 도입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 [13] 고위 대신들 입장에서는 대대로 자손이 쉽게 관직에 오르면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천거제가 훨씬 유리하다. 음서의 한계를 우회적으로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 [14] 그리고 이는 역사적, 현실적으로 볼 때 중종이 옳다고 볼 수 있다. 특정세력이 절대다수절대권력를 차지하면, 그 집단은 반드시 부패한다. 사림파가 득세한 후 더더욱 어지러워진 조선 중, 후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 [15] 비록 유교식이 아닌 도교식 제사이긴 하지만.
  • [16] 결국 소격서와 초제가 완전히 폐지되는 것은 사림들이 조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선조 시기이다.
  • [17]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6급 공무원(경감, 웬만한 학교의 교감급)이 된 지 3년 4개월 만에 2급 공무원(부장판사, 시장, 준장급)이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 [18] 말이 거스른 것이지, 거의 협박이나 강압 비슷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봐도 상관이나 상사에게 단단히 찍힐 행동이다.
  • [19] 이런 남의 탓 하기는 중종이 평생에 걸쳐 써먹은 정치 생존술이었다.
  • [20]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라는 뜻의 사관(史官)은,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의무이며,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기록 후에 짤막하게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았고, 큰 흠도 되지 않았다. 물론 개인감정 등으로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한다든지 하는 것은 엄청난 불명예였다.
  • [21] 병조판서 이장곤, 판중추부사 김전, 호조판서 고형산, 화천군 심정, 병조참지 성운, 병조판서나 병조참지의 경우 군사의 최고 책임자였고, 판중추부사는 왕명출납과 숙위(宿衛)·군사기무를 담당하던 관청의 수장이었다.
  • [22] 走肖爲王 走와 肖를 합치면 趙가 되니 조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 라는 의미.
  • [23] 당시 사약의 효능이 그저 그랬던지라 한 그릇을 먹어도 죽지 않았는데, 고요하고 차분하게 '허허, 내가 죽지 않았으니 한 그릇 더 주시구려'라고 했다고 한다….
  • [24] 이를 다르게 말하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올바른 판단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독선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학자로서도, 정치인으로서도, 친구를 만들기보다는 적을 만들어내는 데에 최적화된 성격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그 성격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인지도.
  • [25] 사실 이도 세종대왕의 오점 운운만은 못해도 중종 입장에서는 꽤나 자존심 상하는 발언이었을 터다. 너한테 벼슬 준 게 나지 명나라 황제냐?
  • [26] 사실 그렇게 된 데에는 중종의 탓도 있다. 사림파를 그토록 밀어주고 그들이 지나칠 정도로 과감해진 것은 중종의 무한한 신임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종 입장에서는 조광조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은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았고, 단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사림파와 훈구파의 상호견제를 통한 힘의 균형을 꾀했던 것이다. 만약 너무 커진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조광조의 성품으로 보아 언젠가 그가 왕권을 잡고 전횡할 여지가 있었기에, 중종의 판단은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 [27] 역사적 식견이나 지식이 없이, 조선시대를 비판, 비난하는 사람들이 종종 내세우는 논리가 이것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시하고 글 짓고 하는 걸 뛰어나다고 하니 그 모양, 그 꼴로 망했다는 것. 그러나 이는 오늘날, 수학, 영어 등에 열심인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아무 쓸모도 없는 걸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소리와 어찌 보면 통한다. 남곤의 반박은 당시에는 무척 현실적인 것이었던 셈이다.
  • [28] 당시 사림파들은 민생과 부국강병보다는, 성리학에 바탕을 둔 백성의 교화를 중점으로 두었다. 그런 사림파들이 민생안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때는 붕당의 형성 시기부터이며, 이는 점차 발달되어가는 산업과 민생사회에 따라가지 못한 관학파 집권기 관료제의 모순에 격렬히 대항하기보다 현실에 눈을 돌린 것에 가깝다. 붕당들은 다 같이 민생에 관심이 깊었지만, 서인들이 특히 민생안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 자체가 민생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
  • [29] 다만 왕안석은 조선시기 간신으로 여겨지기까지 할 정도로 사림파 전반에 걸쳐 부정적 평판을 받았다. 실제 개혁의 실패나 부작용 측면에서도 그렇고, 보수적 지주층인 사림파 입장에서 불편하기도 했으며, 국가의 부 확보와 국력강화라는 것은 민생안정을 내세우는 성리학자들에게 호응받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동법 논의와 시행에서도 왕안석의 경우는 김육을 비롯한 추진론자들에 대한 강력한 견제로 작용하였다.
  • [30] 다만 겉으로 공손히 대했다 뿐이다. 실상 기록을 보면, 조광조 일파가 세력을 잡고 있을 때 투옥되거나 쫓겨나거나 죽은 사람들은, 천인에서 출세하여 관직 등에 오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 [31] 사실 남곤은 소장파에 가까웠다. 사장에 능했고 훈구파들과도 친했기에 조광조의 당과 멀어지고 소인으로 몰렸던 것.
  • [32] 굳이 있다고 하면 이순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