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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연평해전

last modified: 2015-04-08 00:29:01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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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교전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대청해전

2002년 6월 29일 대한민국 서해 연평도부근 NLL(북방한계선) 일대에서 북한 해군의 도발로 일어난 교전. 발발시 언론사에서 '서해교전'이라고 보도했으나 국방부의 발표에 따라 제2연평해전으로 정정되었다.

Contents

1. 교전 내용
1.1. 북한측의 선제 발포
1.2. 피격, 교전의 시작
1.3. 우리 해군의 대응
2. 교전 결과
2.1. 한국 해군의 피해
2.1.1. 제2연평해전 대한민국 해군 전사자 명단
2.2. 북한 해군의 피해
3. 분석
3.1. 제1연평해전 패배에 대한 북한 측의 복수
3.2. 대한민국 측의 교전 중 초계함 후퇴 이유
3.3. 당시 대한민국 측 교전 수칙의 불리함
4. 교전 이후 양국 해군의 변화
4.1. 대한민국
4.2. 북한
5. 제2연평해전이 남긴 문제들
5.1. 사건 당시의 문제
5.1.1. 전사자 보상 처리 문제
5.1.2. 전사자 위문 편지 문제
5.1.3. 군 지휘부의 잘못된 장병 대우 문제
5.1.4. 언론사들의 제2연평해전 보도 등한시
5.1.5. 김대중 정부 시기의 논란
5.2. 사건 발생 이후의 관련 이야기
5.2.1. 노무현 정부 시기
5.2.2. 이명박 정부 시기
6. 기타

1. 교전 내용



1.1. 북한측의 선제 발포

연평해전이 벌어졌던 그날도 2척의 북한 경비정이 NLL을 10Km 침범하였고 이에 해군 고속정 4척이 교전수칙대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참수리 358정이 선두를 맡고 357정은 300야드 정도 뒤에서 북한 경비정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윽고 참수리들이 차단 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북한 경비정 진행방향의 횡으로 가로지르기 시작했고, 북한 경비정 684함이 358정을 지나친 순간 갑자기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358정의 뒤를 따르던 357정은 갑자기 정지한 북한 경비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급히 방향을 틀었고 우현이 그대로 북한 경비정에 노출되었다. 이때, 두 함정의 거리는 100m 내외 였고[1] 북한 경비정이 경고 사격없이 선수의 85mm 전차[2]를 357정에 사격함으로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1.2. 피격, 교전의 시작

교전의 시작과 동시에 85mm포탄은 357정의 조타실에 명중했고 정장인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 조타장 한상국 중사(당시 하사)가 전사하고 기타 승조원들이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어진 사격으로 인해 엔진이 정지되고 전력 공급기기가 파괴되어 357정은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엔진이 정지하여 전력이 끊긴 상황에서 정장인 윤영하 소령마저 전사하자 부장[3]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이 한쪽 다리가 절단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진두지휘를 감행하였으며 20mm 시 발칸이 전기 계통이 나간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포를 조작해보려고 하던[4]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와 조천형 중사(당시 하사)가 22포와 21포에서 집중사격을 받고 전사하였고 서후원 중사(당시 하사)도 교전중에 전사한다. 또한 갑판에서 소병기[5] 사격을 담당하던 승조원들과 기관실, 통신실에 있던 승조원들 다수가 벽을 관통한 총알과 파편에 부상을 입는다. 그 와중에 의무병 박동혁 수병[6](당시 상병)은 5군데나 총상과 파편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우들의 구호를 위해 분투한다.

1.3. 우리 해군의 대응

참수리 358정은 즉시 대응사격을 하려 했지만 북한 경비정이 357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너무 가까운 거리라 사격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나서야 북한 경비정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은 357정만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해 한국 해군 초계함이 급히 북상했지만 북한이 지상 기지에서 지대함 미사일을 발사할 준비를 하는 것이 감지되었고 북한 해안의 해안포 때문에 함포 사거리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인근의 공군 비행장에서 F-5, F-4편대가 출격대기를 하고 있었다.

2. 교전 결과

2.1. 한국 해군의 피해

최초 보고된 바로는 4명 전사, 19명 부상, 실종 1명, 무사고 4명이었다.

하지만 실종된 한상국 중사가 SSU대원들에 의해 바다 속에 가라앉은 357정의 조타실에서 발견되었고, 의무병 박동혁 수병이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6명 전사, 18명 부상으로 최종 집계되었다. 또한 참수리 357정이 침몰하였다.[7]

아군 함정들은 북측 함선이 퇴각하는 것을 레이더로 확인한 후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퇴각하였다. 하지만, 참수리 357정은 기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미 85mm, 37mm, 14,5mm등 각종 중화기 공격을 받고 격벽에 구멍이 뚫려 침몰하고 있었던 것. 357, 358정의 장병들은 358정의 해수 펌프까지 동원해가면서, 승조원 중 상당수가 부상당한 상황에서조차 배수작업을 했지만, 이미 너무 피해가 컸기에 침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9일 정오, 참수리 357정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2.1.1. 제2연평해전 대한민국 해군 전사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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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하 소령[8](해사 50기, 당시 대위) 정장 충무무공훈장 추서
고 한상국 중사(해군부후 155기, 당시 하사) 조타장 화랑무공훈장 추서
조천형 중사(해군신병 402기[9], 당시 하사) 병기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고 황도현 중사(해군부후 183기, 당시 하사) 병기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고 서후원 중사(해군부후 189기, 당시 하사) 내연사 화랑무공훈장 추서
고 박동혁 병장(해군신병 456기, 당시 상병) 의무병 충무무공훈장 추서

2.2. 북한 해군의 피해

북한 고속정 684정은 아군 고속정의 집중공격을 받고 조타가 불가능한 상태로 계속 빙글 빙글 돌다 북측 경비정의 예인을 받고 25분만에 퇴각하였다.

지원을 한 3척의 대한민국 해군 측 고속정에서 관측한 자료에선 북한측 함선의 갑판에 나와있던 북한측 승조원 대부분이 피탄당하여 쓰러지는 광경이 관측되었다.

군사정보지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의 피해는 경비정 대파, 사망 13명, 부상 25명 등 38명 사상이라고 한다. 관련 기사.
그러나 당시 북한군 해군에 복무했던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의 전사자는 3명(정장 포함)이라고 한다.[10] 이 탈북자에 의하면 3명의 전사자는 모두 357정이 처음에 조타실에 명중시킨 한 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 한 방에 조타실이 파괴되어 조타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탈북자들도 이에 대하여 주장이 다른데 북한 측이 피해자 규모를 줄여 발표하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북한 해군 출신이라는 탈북자들도 제1연평해전 전사자에 대하여 상반된 주장을 하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한국 측에선 적어도 1백명 이상 북한해군이 죽었으리라 예상했지만 10명도 안된다는(제1연평해전 참고하면 이게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주장에서 그쯤 된다는 주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탓에, 한국 측 조사기록이 더 정확성을 가진다는 분석도 있다. 당시 한국 측의 반격을 보면, 북측에서 발표한 3명 사망자는 실제 규모보다 축소했을 게 분명하다는 지적이다.

아래의 전문은 그 지적을 뒷받침 하는 증언인데,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을 맡고 있다가 탈북해서 시인을 하고 있는 사람이 쓴 글이다.[11][12]

아마도 탈북자 2만명 중 병원에 입원 치료중이었던 북한 서해교전 참전자들을 직접 만나 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생각된다.

2002년 교전 보도가 나온 후 직장에 출근했는데 당비서가 나 외 3명을 급히 찾았다.

그는 이제 곧 조선인민군 11호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취재대상들의 발언을 외부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11호병원에 도착하니 외과병동 중 건물 하나를 해군사령부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병동으로 봉쇄하고 무력부 보위사령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가진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교전 참전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12명 정도였는데 18세~19세 군인들이 그 중 5명이나 되었다. 함께 갔던 국장이 통전부에서 나왔고 교전 경험을 위에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웅담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니 교전소감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한 해병[13]이 휠체어에 실려 왔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며 모두가 합창하듯 말했다.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렌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새까만 점들이 가득했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한 가지 제기해도 좋습니까? 놈들 배는 부럽지 않은데 제일 부러운 게 방탄조끼입니다. 방탄조끼는 비싸니깐 우리에게 목화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내 옆에 서있던 국장은 그의 말을 특별히 줄까지 쳐가며 메모했다.

전투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군관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함장이 평양에 갔다 온 날이어서 우리는 느슨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장이 그날따라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었다.
"평일엔 기름을 가득 안 채웁니까?"
"사실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함선이란 것이 구축함뿐입니다. 현재 우리 해군에 소련 50년대 구축함이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동해에, 한 대는 서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어서 순찰을 못하고 작전지역에 진입하면 정박한 채 레이더 감시만 하다 돌아오곤 합니다. 우리 경비함 같은 경우엔 기름공급이 더 부족한 형편입니다. 순찰이 아니라 한번 북방한계선 근처에 나갔다 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면 남은 기름을 군관들이 몰래 빼서 난방용으로 집에 가져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유부에서 절반씩밖에 안 준지 오래됐습니다."
상사해병이 불만조로 보탰다.
"우린 도색감도 받아본지 오래됐습니다."
"그건 뭔데요?"
"배는 물위에 항상 떠 있기 때문에 선체에 골뱅이와 같은 해류들이 가득 달라붙습니다. 그럼 속도가 느려지죠, 도색감을 정기적으로 발라주어야 해류방지도 되고 속도에도 제한이 없겠는데 그것도 없다니깐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함장이 기름뿐 아니라 포탄과 탄약들도 만장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앞에 붙인 레일도 확인하더니 다시 더 단단하게 용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배 앞에 웬 레일이요?"
"전번 1차 때 충돌싸움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애들 철갑이 굉장히 단단해서 우리 배가 찢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심하던 함장이 창안한 겁니다. 레일을 붙이면 승산 있을거라면서요."
"그럼 그 철의 강도문제는 전번 1차 때 제기 안했었습니까?"
"했죠, 장군님께도 보고돼서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갑으로 무장해주라고 지시하여 연형묵 자강도 당책임비서를 비롯해서 자강도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몇 번이나 우리 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해결 안됐는가요?"
"장갑을 두텁게 하면 함선이 기울기 때문에 대신 탱크포를 내려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실 우리 함선의 위력은 탱크포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정조준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포탄의 위력이 쎄서 놈들 함선에 구멍이 펑펑 납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을 없애면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린데 싸움이 됩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철의 강도대신 화력을 더 보강하는 쪽으로 채택됐습니다. 놈들 자동포는 분당 3000발씩 나오는데 우리는 600발 정도거든요, 그래서 1차교전 후 소련 4구경 발칸포를 올려놨습니다. 그거면 우리도 분당 1500발을 쏠 수 있거든요."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
"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xx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나서 다시 이어갔다.
"기름과 탄약들을 가득 채우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배를 꼼꼼히 점검하던 함장이 이번엔 격노해서 기관장을 소리치며 불렀습니다. 보조조타가 고장났는데 당장 수리하라면서요, 보조조타란 기본조타가 고장 났을 때 수동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약 함장이 그 보조조타 수리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그 보조조타덕이란 게 무엇인데?"
"놈들 폭탄에 기관실이 맞았는데 기본조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선은 한동안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아마 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내 해병은 이번에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때 봤어요? 놈들이 갑판에 나와 쭉 서서 구경하더라구, 아 그 때 쏴야 하는건데..."
그 말에 옆에서 히히거렸지만 나이 든 해병들만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전투상황을 좀 설명해주세요."
"우린 놈들 배에 접근해서 충돌을 시도했어요. 함장이 지시해서 발포도 우리가 먼저 시작했구요, 근데 놈들 첫 포탄에 함장이 먼저 죽었어요, 우리 함선 규정엔 싸움을 시작할 땐 함보위지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함보위지도원이 정치지도원을 겸하거든요, 그래서 함장 대신 그 때부터 보위지도원이 지휘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배가 손실이 컸습니다. 작전이 더 길어지면 화력우세나 함선우세에서 우리가 밀리기 때문에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 전대사령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조타수가 달려와 전대의 철수명령을 전했고 우린 보조조타로 조종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함장 딸이 세 명이거든요, 근데 죽은 함장 몸에서 세 개의 파편이 나왔습니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방탄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3. 분석

3.1. 제1연평해전 패배에 대한 북한 측의 복수

교전시기가 꽃게잡이 철이어서 꽃게 떼를 따라 북측의 어선단이 NLL을 월선하는 경우가 잦았다. 월선하는 어선단은 종종 북한측 경비정을 대동하여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으며 제2연평해전도 비슷한 형태로 시작 되었다. 하지만 우발성이 짙었던 1차 연평해전 때와는 달리 2차 연평해전은 1차 연평해전의 참패를 만회하려는 의도에서 계획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게 이후 조사에서 드러났다.

해전 발발 직후만 해도 언론이나 우리정부에서는 북한군과 한국군의 우발적인 충돌인 듯한 시각이었지만 후에 북의 계획적인 도발로 밝혀졌으며, 탈북자들에 의해 김정일이 해군에서도 영웅이 나와야한다는 지시가 있었다는 정황이 신문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일부 자료에는 북한군의 세세한 준비 과정과 그 이후 처리까지도 나와 있다. 정황증거를 볼 때, 제2연평해전은 1998년 제1연평해전의 일방적 패배에 따른 보복이나 다름없었다.

교전과정을 보면, 북측은 처음부터 완전한 함선 제압을 노리고 함교부터 선제포격으로 무력화 시키는 등 당초 발표와 같은 우발적인 교전은 아니었다. 북한의 경비정 자체도, 제1연평해전의 교훈을 살려 경비정의 기동성을 포기한 채 주요부위를 철갑으로 보강함으로서 아군 발칸에 노출되고도 침몰하지 않았다. 아군 함정에 비해 부족한 화력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승조원을 배치해 소총으로 공격을 했다는 증언도 기사화 된 적이 있다.

때문에, 제2연평해전이 제1연평해전의 복수를 하려던 북한 지도부의 계획 아래 이뤄졌다는 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당시 남재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현 국정원장)이 대북감청부대의 북한 도발 정보를 두번 받았는데도 사령관한테 보고안했다는 정보가 있다. 한겨레 기사라서 신뢰성 떨어진다고 하나 증인도 있으니 그냥 알고만 있는게 낫다.

3.2. 대한민국 측의 교전 중 초계함 후퇴 이유

북한 경비정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후방에 있던 해군 초계함이 지원을 위해 접근하다 퇴각한 일이 있다. 퇴각한 이유는 북한측이 해안에 설치해둔 대함 미사일인 실크웜(중국제 스틱스 미사일)을 발사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기 때문. 함대공 대응 무기를 적재하지 않았던 초계함은 일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후퇴 문제는 이후 국정감사에서 공중지원의 부재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고, 그 지적에 관해 공군은 "공중지원을 하지 않은 것은 북측의 공중 공격에 우선 대응하기 위해 공대공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답변했다.

만약, 이때 북측의 대함미사일에 대응했을 경우에는 확전의 위험이 대단히 컸다. 갓 정상 궤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경제 상황에서 만약 이보다 일이 더 커져서 본격적으로 치고 받는 일이 발생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3. 당시 대한민국 측 교전 수칙의 불리함

제1연평해전 당시 교전수칙은 '경고방송-시위기동- 차단기동- 경고사격 - 격파사격'의 5단계였다. 제1연평해전 이후 한국 해군은 NLL을 침범하는 북한 경비정들에게 고전적인 밀어내기 기동을 지시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배와 배를 맞붙여서 밀어내는 것이다. 굉장히 위험하기 짝이없는 교전수칙이 아닐 수가 없다.
당시 평화정책을 중시하던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 안보와 관련된 사항에 대해 묵인하고 국군에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될 여러 말도 안되는 수칙들을 만들어 냈다. 이는 훗날 노무현 대통령때 수정되었다.

4. 교전 이후 양국 해군의 변화

4.1. 대한민국

교전 수칙을 개선하고, 함대의 구성 또한 바꾸었다.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으로 돼 있던 교전수칙이 2004년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 3단계로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현장지휘관의 권한을 강화하여 즉각대응 능력을 높였다.

또한, 한국 해군은 제2연평해전의 전훈을 반영해 기존의 참수리급 고속정에 소총수용 방호구조물을 설치하는 등 소폭 개량하였고, 보다 대형화되고 강력한 화력과 방호력을 갖춘 신형 고속함 PKX를 개발한다. 그리고 이 PKX의 네임쉽인 1번함에는 故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따 윤영하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후 건조되는 윤영하급 함정에는 차례대로 제2연평해전 전사자의 이름이 붙여졌다.

2009년 9월 23일 진해에 위치한 STX 조선해양에서 윤영하급 유도탄 고속함(PKG-A)과, 같은급 함선인 한상국, 조천형함의 진수식을 가졌다. 이후 2010년 9월~10월 해군에 인도되며, 참수리급 고속정 교체사업에서 윤영하함 포함 24척을 건조하게 된다.

4.2. 북한

국방부는 북한의 선제공격 행위를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며, 묵과할 수 없는 무력도발'로 규정하고 북한측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요구하였으나, 북한은 국방부의 요구를 무시한 데다 우발적 충돌이라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아무튼, 북한에선 해당 전투 전사자들을 전원 영웅급으로 추서하였다고 하며, 또한 문서 위의 북한군의 증언에서 언급되는 고폭탄 파편에 대응하고자, 북한 해군은 전투시 여름에 엄청 더울 듯한솜으로 만든 파편 방호복(이거?)을 입도록 교리를 수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들어서는 윤영하급 등장으로 인한 북한 전투함의 화력 부족을 보강하기 위해 이란으로부터 도입한 76mm 주포(윤영하급의 주포와 동일한 모델)를 장착한 신형 전투함을 배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덕분에 인천급의 127mm 함포를 과잉 화력 내지는 시대 착오라고 까던 여론이 해군의 선견지명(?)을 칭찬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긍정적 효과를 얻었다.

5. 제2연평해전이 남긴 문제들

5.1. 사건 당시의 문제

5.1.1. 전사자 보상 처리 문제

당시 전사한 이들 및 부상당한 이들에 대한 보상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전사자에 대한 보상액이 최대 몇 천만원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즉, 국군연금법에 '전사자'에 대한 별도 항목이 아예 없었고, 단지 공무중 사망자에 한하여 월급의 36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유가족에게 지급하라는 규정만 있었던 것이다.

이는 1967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월남전 파병에 앞서 향후 생길 전사자들에게 줄 보상금을 줄이기 위해 법을개정한것 차후 법이 개정되었지만 2002년에 벌어진 제2연평해전에서 발생한 전사자에게도 정부가 보상을 제대로 해줄 수 없었다. 헌법 29조 2항에 따라, 법률에 정해진 대로만 보상해 줄 수 있었기 때문

다행히도 뒤늦게나마 이 부분에 대한 법 개정이 2002년에 발의되어 2004년에 통과되면서, 천안함 사건때의 전사자 유족들에게는 좀 더 제대로 된 보상금이 지급되었다.

2013년 고 한상국 중사의 부인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남편이 중사 진급일을 이틀 남겨두고 전사했는데, 따로 실종자 수색기간이 있었음에도 수색기간동안 생존자로 인정해 진급시킨 천안함 피격때와 달리 군 당국이 그냥 1계급만 올려 중사로 추서했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5.1.2. 전사자 위문 편지 문제

아이러니하게도 전사한 유가족들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위로의 편지를 보낸 사람은 한국의 정치인도, 군관계자도 아닌 주한미군 사령관 라포트 미 육군대장이었다. 교전 발발 이후 한달이 넘도록 한국인이 보낸 위문편지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SBS에서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자 그제서야 정치인들의 위문편지가 이어졌는데 자신의 이름을 사용 한것이 아니라 보좌관의 이름에 묻어가는 식의 어정쩡한 소속 불명의 편지가 많아 눈총을 샀다.

5.1.3. 군 지휘부의 잘못된 장병 대우 문제

국방부가 승전을 알린다며, 회복되지도 않은 부상자들을 국군수도병원에서 데리고 나와 인터뷰를 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인양한 357호정의 청소에 회복된 생존 장병을 작업원으로 동원했다는 증언이 있다.관련 기사 PTSD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상식적으로 봐도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5.1.4. 언론사들의 제2연평해전 보도 등한시

월드컵 특수를 노린, 방송사들의 시청률 경쟁에 의해 교전 소식은 국민들에게 깜짝 소식이 되긴 했지만 큰 이슈를 남기지 못했다. 공중파로 대표되는 방송3사 또한 제2연평해전을 단신으로 처리하고 당일 있었던 3,4위 결정전 중계에 초점을 맞췄다.

확전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국가에서 일어나는 재해 등의 위험 사건을 가장 먼저 관심있게 다뤄야 할 공중파가 위험한 상황을 알리지 않은 채 시청률에만 치중했다는 건 병크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이는 진짜 사나이 해군편 제2함대 성남함 & 참수리 고속정 편 때도 고속정 선임수병이 월드컵때문에 이 큰 사건이 묻혔다며 안타까워했다.

5.1.5. 김대중 정부 시기의 논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은 한일 양국의 동시 개최로 폐막식 부분은 일본측이 담당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이 영결식에는 참석치 않은 채 일정대로 정상회담을 하러 가면서 폐막식에 참가한 일에 대해 비난여론이 일어났다.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하기로 사전에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사 정상회담을 연기하는 것은 외교적 결례라는 주장이 있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한일 정상회담이 연기된 전례가 있다.[14]

다만, 당시 정부의 방침에도 일리가 있었다.


위 기사에 나와있듯, 당시 정부의 방침은 북한과의 재충돌을 경계하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한국의 경제엔 문제가 없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었다.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2002년은 1997년의 외환위기에서 5년밖에, 그리고 IMF의 관리에서 벗어난지는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따라서 한국 경제에 조금이라도 영향이 갈 일은 되도록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빌미삼아 전사자에 대한 예우를 무시한 처사라는 비난에 대한 방패로 삼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은 한일정상회담에서 제2연평해전에 대한 후속 대처 논의를 할 것이라 밝혔고, 실제로 제2연평해전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총리나 국방장관의 각료진 또한 당시 전사자들의 영결식에 불참한 것은 문제가 있지 않냐는 비판이 있었으나, 당시 국방부 측의 해명총리실의 해명을 들여다보면 해군참모총장보다 상위의 직급이 참여하는 것은 관례상으로도, 의전상으로도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총리 쪽은 대통령의 대리로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참석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뿐만 아니라, 국방부의 해명자료에 나타난대로 해군참모총장의 상급자인 국방장관은[15]사전조문을 갔으며, 총리를 포함한 다른 상급자들 또한 관례대로 사전조문을 했다.

뒤늦게서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전조문에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을 대리로 보냈다. 7월 2일 돌아온후 국군수도병원에있는 부상자들을 방문했다.하지만 끝내 김 전대통령은 조문 행사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당시 기사

5.2. 사건 발생 이후의 관련 이야기

이 부분 하단의 기록을 보기 앞서 우선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더 나아져야 할 여지는 있을지언정, 대한민국에서 유공자들에 대한 대우는 역사적으로 점차 나아졌다고 봐야 한다는 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전까지 어떠한 대통령도 유사한 사건에서 전사자 추모식에 참석한 적이 없다.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16], '해군 방송선 피랍사건', '해경 863경비함 격침 사건'[17] 등은 모두 수십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사건이었으나 정부에서 제대로 된 보상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참석한 추모식이 한 번도 열린적이 없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에도 추모식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5.2.1. 노무현 정부 시기

제2연평해전 추모식은 처음에는 '서해교전'이란 명칭으로 해군주관으로 해군참모총장 및 해군 관계자와 유족만이 참석하던 행사로 열렸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사건 1주기를 앞둔 2003년 6월 25일에 유가족들과 국가유공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행사를 가졌고 이어서 2003년 6월 27일 2함대를 방문하여 참수리357 전시장을 방문하여 묵념하고 헌화하는등 추모하고 이후 참수리357에서 다리를 잃었지만 복귀한 이희완 중위(불편한 몸임에도 해군에 남기로 결정, 병과를 항해에서 정훈으로 전과해 현재 해군 정훈소령으로 복무 중이다.)에게 위로전화, 그 외에도 명절마다 유가족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2005년부터 추모식에 국방장관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5.2.2. 이명박 정부 시기

2008년 이명박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처우가 개선되어 '제2연평해전'으로 명명되었고, 추모식은 해군 자체 행사에서 정부 주관 기념 행사로 격상됐다.

2012년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추모식 행사에 참가했다. 본래는 이번에도 국무총리와 국방장관만이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정부가 주관하는 마지막 기념식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참석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다음 정권에서도 정부가 계속 추모행사를 주관한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제2연평해전에 대해 잊어간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으나, 다른 유공자들의 순국 사실과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6. 기타

  • 이 전투에 참전하여 살아남은 박경수 중사는 이후에도 계속 해군으로 복무했으며 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정 근무를 계속 했다. 그런데, 재배치된 근무지가 천안함이었고,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인하여 끝내 운명을 달리했다.# 북한이천하의 개쌍놈이야

  • 이 사건을 다룬 영화가 제작중이다. 제목은 연평해전. 당초 2012년 부터 제작에 들어가서 주연에 정석원을 확정[18]하고 촬영을 시작했으나 이런저런 사정이 생기면서 영화가 자칫 무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새로운 배급사와 개인 크라우드 펀딩 및 기업은행이 메인 투자자로 결정되면서 재정비하여 2014년 여름부터 촬영을 재개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참조 바람.

  • 이희완 소령은 종래의 군인사법에 따르면 더 이상 현역으로 복무할 수 없는 장애를 지녔으나, 해전 며칠 전 군인사법 일부가 개정되어 계속 군에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장애가 장애이니 만큼 승선은 불가능해졌고 그 대신 해양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해군교육사령부 리더쉽 교관으로 보직이 변경되어 현재까지 현역 복무중이다. 현재 중령 진급을 앞두고 있다.

  • 보훈처는 이 전투를 소재로 '그날'이란 제목의 안보교육영화를 제작했다. 해군 신병들은 기군단에서 한번쯤은 보게되는데 싼티가 풀풀나는 실로 파멸적인 퀄리티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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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북한 경비정의 조악한 사격통제장치로도 초탄 명중이 가능한 거리였다.
  • [2] 아직도 북한의 후방에서 굴리고 있는 T-34/85 전차의 포탑을 떼어 경비정에 단 것이다.
  • [3] 해군에서는 배의 부지휘관을 부함장, 부정장 등이 아닌 부장이라고 한다. 줄임말이 아니라 공식 용어.
  • [4] 인양 결과에 따르면, 357호정에서 수거된 포탄은 탑재량과 일치했다고 한다. 즉, 포탄은 단 한 발도 쏘지 못 했으며, 적함에 피해를 입힌 포탄은 전부 358 호정에서 쐈다는 것.(출처 : 시크릿파일 서해전쟁)
  • [5] 해군에선 개인 화기를 소병기라 부른다.
  • [6] 해군에선 수병들의 경우 계급이 앞에 오게 부르는 경우가 아니면 "XXX 병장"이나 "000 일병님"으로 부르지 않고 "XXX 수병", "000 수병님" 등으로 부른다. 이름 없이 대명사로 부를 때도 계급이 아니라 "거기 가는 수병, 이름이 뭔가?" 하는 식.
  • [7] 이후 인양작업을 통해 인양되었고 복원 작업을 거쳐 평택의 해군 제2함대사령부 내부의 안보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전쟁기념관 야외전시관에도 있는데, 이건 1:1 복제품. 우크라이나에 고철로 팔았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루머가 있는데 절대 아니다.
  • [8] 안타깝게도 포르투갈전 당시에 승리를 축하하는 뉴스 인터뷰에 참석했었다. MBC 뉴스에도 그의 생전 인터뷰가 있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 [9] 수병 출신으로, 진해기지사령부 의장병으로 근무하다 신분전환했다. 아내와도 수병 시절에 만났다고 한다.
  • [10] 전사한 함장 김영식은 후에 영웅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 684정은 '김영식 영웅호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 [11]기사에 나온 사람과 동일인물이다.
  • [12] 정치장교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공산권에선 시인이나 소설가라고 해서 군사문제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다 볼 수 없다.
  • [13] 북한 해군에선 수병을 해병이라 부른다.
  • [14] 허나, 이 경우엔 특기할 사실이 있다. 회담 연기의 이유에는, 김일성 사망 문제 뿐만이 아니라 한일정상회담의 다른 당사자인 무라야마 총리까지 김일성이 사망하기 얼마 전 G7회의에서 쓰러졌다는 문제가 겹쳤기 때문이다. 참조
  • [15] 국방장관이 사전 조문을 갔다는 다른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07311
  • [16] 대한뉴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사자들 위령식에 직접 참가하진 않고 헌화만 전달하였으며 해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gbn=DK&mediaid=20060800&mediadtl=32322&quality=W
  • [17] 이 사건에 대한 충혼비는 국가 주관이 아니라 해경주관으로 1986년에나 세워졌다. 전사자 보상 문제등과 연계하여, 노무현 정부인 2003년에야 관련 충혼비가 해경 관리에서 정부가 관리하는 것으로 바뀌면서 충혼비도 깔끔하게 정비되었다.
  • [18] 현재는 정석원은 하차하고 김무열이 캐스팅 확정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