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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

last modified: 2015-02-23 00:20:38 Contributors

* 동명의 드라마제2공화국(드라마) 참조.
한국의 역사
대한민국의 역대 헌정체제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

Contents

1. 개요
2. 제2공화국에 대한 인식과 의의
3. 제2공화국과 박정희 정권
3.1. 무능하고 혼란한 정권이었는가?
3.2. 경제적으로 무능했는가?

1. 개요


큐트한 봉황
1960년 7월 2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의 9개월 19일간 존속하였던 대한민국을 통치한 제4대 대통령 윤보선국무총리 장면내각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말한다. 9개월 19일, 즉 1년도 채우지 못한 대한민국 헌정 사상 가장 짧은 체제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후의 의원내각제 정부였다.

4.19혁명으로 출범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끝난, 한국 현대사상 정말 가장 짧은 정권. 1960년 6월 15일 3차 개헌(4차 헌법)에 의해 의원내각제가 채택되고 같은 해 11월 29일 4차 개헌(5차 헌법)을 단행하였다. 그러니까 그 짧은 기간 동안 개헌을 했다. 목적은 4.19혁명에서의 반민주 행위자를 처벌을 위한 특별볍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제헌 헌법에서도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다. 소급입법을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2. 제2공화국에 대한 인식과 의의

존재감이 너무나 없다. 이승만 다음에 박정희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역사책에도 장면 정권(혹은 장면 내각)의 비중은 매우 낮다. 지못미. 특히 의원내각제인 탓에 장면에 묻혀버린 윤보선의 비중은 더더욱...

하지만 약간만 공부하면 이 시기의 의의가 상당히 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학생 운동이 활성화되고 교직원 조합, 노동 조합 등이 다수 설립되었다. 진보당 사건 등으로 이전 정권까지 철저히 탄압당했던 평화 통일론이 사회 전면으로 대두되었다. 물론 이 시기의 평화 통일론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좀 더 복잡하게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당시는 6.25 전쟁을 겪은지 근 10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상혼이 남은 상황에서 평화 통일론을 달갑지 않아 했으며, 실제 국력 또한 북한이 우월한 상황이었기에(참고로 1960년 당시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71달러였고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137달러였다) 평화 통일론은 북한의 남한 흡수 통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남북 협상이나 남북한의 상호 인정, 외교관계는 시작할 수 있었긴 했다.

무엇보다

  • 지방 자치제 : 광역시/도지사, 시장 선출, 도의회, 시의회 선출은 물론 면장선거도 있었고, 면장선거의 경우 투표율이 93%에 달했다!]와
  • 사법부 선출제 : 안타깝게도 61년 5월 17일날 시행될 계획이었다;;;

...를 실시하려는 시도 또한 이루어졌다는 게 놀라운 점이다. 우리 역사에서 사법부 선출제란 제2공화국이 유일하다. 만약 이 사건이 이뤄졌으면 완벽한 삼권분립과 주권재민이 이루어지면서 대통령이 사실상 사법부를 지배하는 독재체제나 혹은 사법부와 결탁하는 상황은 나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한편 사법 선출제 때문에 공정해야하는 사법부가 지나치게 정파적으로 분열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처럼 일반인들이 법관을 뽑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법관 자격이 있는 사람, 즉 변호사들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한계도 있었다.

4.19 혁명에 고무된 문학 작품들 또한 쏟아져 나왔으며 최인훈의 광장이 발표되어 남북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이다.

과거사 청산에도 나름 노력하는 자세도 보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분들을 위해 제2공화국 정부는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여 가장 많이 학살당한 지역인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등 학살현장을 돌며 실태조사를 벌였고, 정부에 진상조사와 피해배상을 촉구하는 대정부 건의문을 채택했다. 또 각 지역에서 합동위령제가 올려지자, 장면 국무총리는 보도연맹 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조화와 부조금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물론 부정선거 원흉과 전 각료 9명, 자유당 기획위원 13명과 관련자들이 기소되어 7월에 재판이 벌어졌으나 유충렬 한 사람에게만 사형이 내려지는 등 그렇게 깔끔하게 청산된 것도 아니지만.

그밖에도 의의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국토 건설단이 설립되기도 했다. 물론 의의가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5. 16 군사정변 이후에는 현실은 시궁창이 되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참의원·민의원 제도(미국의 상·하원 의원과 같다. 한마디로 양원제)가 시행된 때가 바로 이 때였다. 당시 참의원(상원)의 임기는 6년, 민의원(하원)의 임기는 4년이었다. 물론 둘 다 임기를 1년 남짓밖에 못 채웠다(현재 이 제도는 일본에서 계속 채택 중이다. 임기도 6년 - 4년으로 똑같다. 다만 민의원을 중의원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사실 제1공화국 시절에도 발췌 개헌 당시 양원제를 헌법에 박아넣었다. 그러나 그저 훼이크였을 뿐, 1954년에는 나라가 어지럽다고 민의원만 뽑았고 이후 폐지해버렸다

3. 제2공화국과 박정희 정권

3.1. 무능하고 혼란한 정권이었는가?

제2공화국 이후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서는 제2공화국이 전략적으로 무기력하고 통제력이 없는 정권이었다는 식의 이미지를 유포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이 끝난 이후에는 1961년 초에 들어가면서 장면 정권이 차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는 반격이 본격화되어 이후의 역사관에 많이 반영되었다.

물론 4.19 혁명에 고무되어 빈발하는 학생 운동, 노동 운동 등과 민주당 신파와 구파간의 갈등으로 인한 혼란이 있던 건 사실이다. 이러한 혼란에 지레 겁을 먹은 민주당 구파에 의해 공임시특례법모규제법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는 현재까지도 국가보안법의 일부에 편입되어, 집시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어 전해지는 인상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된 이미지가 많이 덧씌워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한 당시 의석의 무려 3/4(175/233)를 점유하고 있던 민주당이 단일 정당으로 유지되어 나가는 것이 사실상 힘들었으리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애초에 단일정당도 아니였고, 반 이승만 정권이었다. 지식인 층에서는 5.16 군사 정변을 4.19 혁명의 연장 선상으로 보기도 했으며, 여기에는 반유신인사로 유명한 장준하 또한 포함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사회가 혼란하면 북괴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기도 했으며, 이는 허정 과도 정부가 '법과 질서의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운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후에 이런 정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물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대한민국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며, 이 때문에 당시의 사회 혼란을 '민주주의를 위한 당연한 진통'으로 파악하고 긍정적 시각을 보내는 사람 또한 많다. 이런 경우 이른바 "데모를 하지 말자는 데모"가 나온 사례를 부정적으로 거론하기도 하지만, 반박하는 측에서 언급하듯 자정능력으로 볼 수도 있었다. 또 장면 정부도 3월 위기설, 4월 위기설 등 여러 도각 위기설을 잘 버텨나가는 중이었다. 문제는 5.16 쿠데타가 벌어진 당일 아무런 권한이 없는 윤보선은 쿠데타를 추인했고, 장면은 숨어버렸다는 것;;;

3.2. 경제적으로 무능했는가?

국가의 경제개발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쿠데타로 인하여 시행하지 못하고 해당 계획을 박정희 정권이 사용하여 경제 발전에 써 먹었다는 주장이 있다.

물론 이름만 5개년 계획이라고 같은 5개년 계획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장면 정부의 5개년 계획은 수입대체(Import-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 내수 위주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제3공화국은 이 5개년 계획(제1차 5개년 계획;1962~67년)을 실행해본 결과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내수보다 수출로 거두는 효과가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2차 5개년 계획부터는 수입대체 노선을 때려치고 "닥치고 수출"(Export-Oriented Industrialization) 위주 계획로 전환해버렸다. 또 이 사업의 재원은 국방비의 절감과 미국, 일본으로부터의 원조와 차관 도입이었는데 국방지 절감은 군을 10만명 감축해서 국방비를 전체 예산에의 30%에서 20%로 낮추려는 의도였으나 이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급 성장한 군부의 이해를 건드리고 미국의 동북아 전략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2주만에 5만 감군으로, 또 3만 감군으로 하였다가 결국 백지화 되었다. 미국,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도입과 원조 계획도 잘 이뤄지지 않는 등 시도를 했어도 성공 했을지 의문이다. 더욱이 미국의 경제원조가 증대하고 환율이 상승하면서 국가 예산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진 것도 문제였다. 국가 예산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52%나 되었으니 말 다한셈이다.

하지만 가장 성과가 좋은 5개년 계획이 제1차 5개년 계획이었던 것도 사실. 원 계획 7.1%보다 높은 연 평균 8.1%의 성장을 기록했다. (이전 1950년대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5%였다.) 1964년 수출 1억불로(이 날을 1973년 출의 날로 지정) 지정했으며, 70년 100억불 수출 등의 성과를 이룬다. 또한 장면정부에서 등용한 경제학자, 관료들이 박정희 정부 초기의 경제관료로 정책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 자체가 전설에 가깝다는 해석이 주류 학자들 내에서는 많다.

도리어 이어진 5개년 계획들의 성장률은 낮았으며, 세계 경제 성장이나 월남 특수 등의 영향을 제외하면 도리어 지지부진한 편이었다. 다만 박정희 정권이 가장 높은 성과를 보이던 시절은 바로 박정희가 전문가의 견해를 가장 높게 신뢰하던 2차(60년대 중후반)이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는 민생고가 악화되었다. 또한 물가, 지가의 급폭등은 박정희 시대에서 이어지고 있는 나쁜 유산이다. 물론 옹호하는 측들은 2차 5개년 계획을 전후시대를 딛고 본격적 발전을 한시대로 보며, 3차, 4차 역시 경공업국에서 중공업국의 전환에 성공했음을 높이 평가한다. 중화학 공업의 경우 당대에 성공한 케이스는 많지 않았고, 아직도 한국은 경공업의 수출이 훨씬 월등했다. 실질적 성과는 전두환 정부때에나 나타난다. 물론 80년대 이후 탄력을 받은 중화학 공업은 한국의 경제력을 이루는 핵심의 하나이다. 이런 중공업국의 전환으로 당시 전세계가 몸서리쳤던 외계침공급의 70년대 1, 2차 오일쇼크의 충격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이러한 산업 건설과 성장세를 계속 유지하였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여긴다. 항목을 보듯 이는 현재 논쟁이 지속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주류였던 경제학자들의 경우, 후진국이 수출 위주로 하면 타 국가에 경제가 종속된다고 주장했다. 이를 속 이론이라고 하며, 실제로도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1980년대에 바로 한국의 경제 성장(을 비롯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주요 사례가 되어 깨지게 된다(1986년을 기점으로 수출액과 수입액의 양이 뒤집힌다). 이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국가/지역들이 과거 일본의 식민지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착안해 식민지 근대화론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0년대까지 마르크스 사관을 바탕으로 경제를 연구하던 안병직 등이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선회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런 종속이론을 바탕으로 당시 주류 경제학자들은 국내외, 특히 미국 고문단에서 무지하게 반대하였으나, 결과는 수출시장에서 경쟁을 하지않고 국내의 에 있는 상품은 영원히 국제경쟁력을 얻지 못한다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의 초창기 경제 정책은 장면 정부의 노선을 그대로 따랐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의 경제정책은 박정희 정권이 자체적으로 제시한게 맞긴 하다. 하지만 수출중심 노선 역시 제대로 성과를 거둔 것은 제5공화국인 80년대 이후라는 주장 역시 만만치 않다. 게다가 그 공로와 부의 분배는 또 다른 문제이고 말이다. (한강의 기적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