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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사건

last modified: 2015-04-07 12:48:44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사건의 전말
3. 상세
4. 영향
5. 후세의 평가
5.1. 개신교계의 해석과 비판
6. 신미양요와의 갭이 5년이나 되는 이유
7. 미디어
8. 관련 항목

1. 개요

전후 1년만에 남군의 원수를 갚은 조선의 위엄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 호(General Sherman)가 1866년(고종 3년) 양력 8월 15일,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珠英浦)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양력 9월 2일[1]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평양 군인들과 백성들에 의해 소각된 사건.

이 사건이 불러오게 될 신미양요와 5년의 시간차가 있어 많은 이들을 헷갈리게 한다. 한국근현대사 선택자들이 초반에 마주치게 되는 1라운드 보스(…).

2. 사건의 전말

(영어 Wikipedia, new world encyclopedia[2]의 자료)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셔먼호'로 의심되는 함선 중 하나인 USS Princess Royal(1863) USS Princess Royal(1863)의 제원[3]
종류 스쿠너(schooner)
건조국/제작사 스코틀랜드/Ted & McGregor, Glasgow
미국이 한 시기 1863년 1월 29일
재취역 1863년 2월 4일
획득 1863년 3월 18일
매각 1865년 8월 17일
전장 61.0m
배수량 828톤
무장 9인치(230mm) Dahlgren 활강포 x 4문
30-pounder(13.6kg) Parrott rifle x 2문
24-pounder(10.8kg) 곡사포 x 4문
추진 종류 증기 엔진/스크류 추진

한국어 Wikipedia에서 추정하는 제너럴 셔먼호의 제원
건조국/제작사 스코틀랜드/Ted & McGregor, Glasgow, Scotland
미국이 한 시기 1863년 1월 29일
재취역 1863년 2월 4일
획득 1863년 3월 18일
매각 1865년 8월 17일
전장 38.81m
배수량 614톤
무장 8인치 Sg x 4문
32 pdrs x 16문
승무원 150 명
추진 종류 요트(Sail)
기타 프린세스 로열호와 제너럴 셔먼호의 포획시기/경매시기/판매시기/침몰지역이 미국문서와 다르다는 주장이 있음.[4]

사건의 시작은 19세기 중반, 열강들의 아시아에 대한 개항때문이었다. 이익을 얻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의 문을 개방시키는데 혈안을 세웠고 그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문도 열리게 되었다. 텐진에 머물던 프레스턴은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계약을 맺고 조선으로 출항했다. 그리고 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깽판을 쳤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먹을 게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측에서 소고기와 쌀와 채소까지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그거 받아 쳐먹고도 일절 안 가고 멋대로 들어와 측량을 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포격을 감행하여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을 살상하게 했다.

조선군도 포격을 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서 일절 아무런 포격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어서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평양 군민들이 완전히 빡돌아서 배를 포위하고 화살과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팔매질을 해대자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은 쫄아서 어느 퇴역 군인이 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그에게 중군을 풀어주었다.

이때 배에 탄 개신교 목사 토머스가 조선말을 꽤 잘해서(청나라에 거주하던 신도들을 통하여 배웠다고 한다.) 이 배에 통역으로 탑승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여행을 했다. 그러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하고 1866년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에 통역으로 탑승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났다. 토머스 목사는 프레스턴을 막으려 했으나 막지 못하고 결국 프레스턴은 이현익을 납치한다. 그러나 박춘권이 배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이현익을 구출하고[5] 평양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기름을 뿌린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화공을 펼치니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태워졌다.

배에 타고 있던 선원 및 선장은 대부분 죽었고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 견딜 수 없었고 결국 청나라 선원 이팔용 및 통역을 맡던 개신교 목사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목사(1840~1866)를 비롯하여 말레이시아 및 미국인 선원들은 다구리당해 끔살당했다.

한편 1871년 6월 11일 신미양요로 미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첫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미군 기함 콜로라도호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다. 미군이 제너럴 셔먼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조선 측의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진 뒤 살해되었다고 구라를 쳤다. 미국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3. 상세

제너럴 셔먼 호 전투가 조선군이 일개 상선을 잡기도 버겁다는 것을 드러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 호의 포격으로 죽은 7인은 애당초 군인이 아니었으며 구경하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포를 쏴대서 죽은 것이었다. 정작 셔먼 호를 불태워 버리는 군사작전에서 죽은 조선군은 없었다. 하지만 무장 상선으로서 이 배에 정착된 포는 조선군이 가진 포보다 우수했었다.

흥선대원군은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호를 건저내서 증기기관을 복제하려고 했었다.10개월 만에 복원하기는 했으나, 야사에서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사실상 실패했다고 한다. 하지만 승정원일기는 시범운행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으며 화포 시범 사격도 성공했다고 한다. 일단 배가 처음에 느렸던 주된 이유로는 기관실에 땔감으로 넣은 것이 석탄이 아닌 이었고 숙련된 선원이 없었던 점이 컸다, 그리고 증기선은 예열을 하고 나서나 제대로 속도가 나오는데 예열도 안하고 떌감 넣자마자 움직이려고 해서 그렇게 느리게 간것이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

그 뒤에 통상수교거부 정책이 한창임에도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 어쨌거나 증기선 시범 운행은 대원군의 개망신으로 귀결될뻔하다가 막판에 동력이 확보되면서 성공했고, 이런 증기선을 세척 건조하여 강화도에 배치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불명...[6]어쨌거나 증기기관을 복제하다니 조선의 공돌이들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7]

가끔씩 제너럴 셔먼호가 남북전쟁에 사용된 북부군 군함 USS Princess Royal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국 해군의 공식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호의 민간 판매 시점이 애초에 이 사건이 일어난지 2년뒤인 1868년이었고, 침몰한것도 평양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 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4. 영향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서양에 대한 배척을 나타내더니 같은 해에 일어난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후세의 평가

남한에서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건이지만, 북한에서는 이 때 제너럴 셔먼 호 격침(?)에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통솔했다고 뻥을 치면서 김일성 일족이 과거부터 조선을 지키는데 앞장섰다고 선전을 하고 있다. 이 영향을 받아 운동권에서는 반미의 역사적 명분의 하나로 써먹고 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사료는 비교적 많으나 남아 있는 것들은 조선측의 기록이다. 반면 제너럴셔먼호측의 입장을 담은 기록은 전혀 없다. 생존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제너럴 셔먼 호 생존자가 있다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했을 가능성도 크지만.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근거로 삼는 종교 선교에 대한 박해[8]를 무조건 선전포고라며 기록한 걸 봐도 다를 게 없기에.

당초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조선측의 입장은 다른 이양선의 경우와 같이 부드럽게 타일러 돌려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조선측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쌀, 고기, 계란, 채소, 땔감 등을 대주었다. 그렇다면 왜 조선측이 방침을 바꾸어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제너럴 셔먼호측에서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패강록이다. 이 책은 이현익의 아들 이흥근이 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흡이 만약의 경우 제너럴 셔먼호를 퇴치할 방안을 적은 문서를 든 채 배를 타고 이현익에 앞서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서 띄운 소청선에게 그 문서를 빼앗긴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측에서 그 문서를 통해 조선측에서 선원들을 회유해 상륙시킨 뒤 몰살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했다는 것이다.

5.1. 개신교계의 해석과 비판

이 사건에 대해서 개신교계에서 거의 무리하게 미화하고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 애초에 토머스 목사는 무장상선을 타고 쳐들어와 군 및 민중을 살상하게 한 무리들을 따라 통역을 하고 선교하러 온 인물인데 이런 인간을 얼마나 좋게 볼 수 있을까? 앞에서도 나오지만 제너럴 셔먼호는 평화롭게 들어온 무역 상선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무장 상선이었고, 우매무지한(?) 평양 시민들이 먼저 공격해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사실, 통역을 맡았던 토머스 목사가 제대로 의미를 전하지 못하여 혼선이 초래, 이로 인해 이현익을 붙잡고 전투가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주둔 조선군을 통솔하던 박규수(1807~1876)는 개화파의 효시로 유명한 인물이며 토머스 목사 및 생존자들을 죽이지 않으려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는 서구와의 협상에 카드로 활용할 생각이었던 것. 토머스 목사는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관군이 아니라 성난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애초에 당시 평안도 관찰사가 바로 개화파 박규수였다는 지식만 있었어도 이런 왜곡은 없었을 것이다.

토머스의 죽기 직전의 모습도 개신교 계 자료에서는 "성경을 뿌리면서 의연하게 조선인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소리쳐서 그가 관군에게 참수당한 뒤에 토머스가 뿌린 성경을 읽고 개신교도가 되는 사람이 나왔다."는 것이고, 반기독교 계 자료에서는 강가에서 조선민중들에게 데꿀멍하면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맞아 죽었다는 것으로 극단적으로 다르다. 사실, 둘 다 틀렸다.(…) 역사적 자료에선 성난 군중들이 몰려가서 때려죽였기에 선교도 목숨구걸도 하지 못하고 그냥 끔살당했다. 사실 토머스 목사가 성경을 나눠준 일이 있긴 한데 이는 8월 20일 제너럴 셔먼 호가 막 평양 인근 사포구에 도착했던 시점이라 행패를 부리기 전이라서 조선 사람들이 적개심이 없을 때였다.

그 외에도 토머스 목사는 자기네 본부인 런던 선교회의 말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위험한 독자적 판단을 내렸고, 이에 대해 베이징 교구장이었던 엣킨스는 이런 그의 무모한 행동이 "국제적 분쟁이나 조선의 추가적 종교 탄압으로 이어질 것" 이라 우려하는 편지를 런던에 부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링크

한국 개신교 계에서 이 때 죽은 토머스 목사를 순교자라고 기리고 토머스 교회까지 세웠다.(물론 평양에 있었던 교회이기 때문에 지금은 폐쇄.) 6.25 전쟁 당시 평양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도시가 황폐화되면서 이 교회도 함께 한 줌의 재가 되...었나 싶었는데, 2009년에 평양 과학기술대학을 지으면서 우연히 그 터가 발굴되었다고.

6. 신미양요와의 갭이 5년이나 되는 이유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직후 프랑스의 보복으로 일어났지만,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에 5년이 지나서야 일어나기 때문에 흥선대원군 섭정기의 대외정책을 공부할 때 상당히 헷갈리는 부분으로 작용한다.

이 사건과 신미양요 간의 시간적 간격이 큰 이유는, 애시당초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체가 미국 정부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민간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조선은 이미 병인박해로 인해 프랑스가 조선에 처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외교적으로 영 좋지 않은 시점을 택할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 모험 상선에 불과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직전이라 조선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애시당초 셔먼호가 정부 소속이거나 지시를 받았더라면, 아무런 외교적 군사적 대책도 없이 조선인들 상대로 행패나 부리고, 도주경로 확보도 없이 무턱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마침내 몰살을 자초하는 병신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

어쨌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 정부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와추세트호, 그 다음해인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방문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모두 별다른 충돌없이 끝났다. 그래서 국사 시간에 안 배우고 시험도 안 나온다.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편, 셰난도어호가 방문했을 때 조선정부는 미국에 공식 회답을 보내 제너럴 셔먼 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따라서 미국이 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데만 3년이 걸린 셈.[9]

그리고 미 정부도 조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의하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 지역 책임자(베이징 공사)에게 전하고, 베이징 공사는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를 정비하고....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5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미국 본토 역시 집안일 뒤처리로 바빴다는 점. 신미양요 2년 전인 1869년에서야 미 대륙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덜 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조선의 개항은 대외 정책의 큰 틀, 특히 대 러시아 정책과 관련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라는 점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꽤 지나서야 발발하게 되었다. 한국근현대사 과목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사건 - 신미양요 순서 맞추기가 단골 출제 문제인데, 왜 이런 순서로 사건이 진행되었는지, 위에서 언급된 이유를 참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즉,
1. 병인박해 발생
2. 프랑스가 보복할 거라는 소문이 도는 와중에 뜬금없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
3. 제너럴 셔먼호 사건 직후 예정대로(..) 병인양요 발생
4. 미국이 타이밍을 재는 사이 오페르트 도굴사건 발생
5. 신미양요 발생
이라는 것.

북쪽에서는 위대한 혹부리 수령님 조부가 평양 군민들을 이끌고 자발적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했다며 이걸로 혹부리 왕가에 대한 미화 및 찬양,우상화로 써먹고 있다고 한다.

7. 미디어

1990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도 등장했는데 미국인들이 멋대로 올라와 땅을 측정하고 사진을 찍어가는 것에 지나가던 평양 백성들이 보고 군졸들에게 신고한다. 군졸들이 잡으러 몰려오자 데꿀멍하여 보트로 달아나고 셔먼 호가 포격하여 군졸과 구경하던 백성들이 살상당한다. 이를 본 박규수가 "이,양놈들이...내 차마 죽이지 않고 잘 구슬리던지 쓸모있게 하려고 했더니만..." 혀를 차고 공격을 벌이게 하여 화공으로 배를 침몰시키는 것만 나왔다. 그리고 박규수는 한숨쉬며 '양놈들이 결코 이걸로 끝나지 않을텐데' 라며 불안해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2002년 KBS에서 방영한 양인 이제마에서도 잠깐 등장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뜬금없이 대동강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강변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는데 갑자기 무차별 포격으로 민간인을 마구 학살하는 천하의 개쌍놈들로 묘사되었다. 이후 야간에 야습으로 배를 통째로 불태워버리는 것으로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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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인터넷상에서는 제너럴 셔먼호가 파괴된 날짜가 9월 2일이니 4일이니 말이 많지만, 고종실록에 제너럴 셔먼호가 병인년 (음력) 7월 24일에 파괴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천문연구원이 제공하는 음양력 변환 서비스를 참고하면, 양력으로는 9월 2일 일요일이 맞다.
  • [2]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General_Sherman_incident
  • [3] USS Princess Royal (1863)
  • [4] 제너럴셔먼호 사건
  • [5]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평양군민들에게 쫀 셔먼 호 선원들이 풀어주었다고 되어 있다.
  • [6]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선 되었을 확률이 가장 크다. 당시 조선에는 근대함선에 익숙한 선원도 없었고, 증기선은 연료 때문에 운용에 많은 돈이 들어간다. 폐선되어 후대 기록에 따라 대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 [7]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당시 조선에도 존재했던 청의 서적인 <해국도지>안에 와트식 증기기관의 설계도와 설명이 들어있어 맨땅에 해딩하는 식으로 복제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책에 들어있는 철모(대포 주조용 철제 거푸집)나 수뢰포, 사망포거 등은 조선에서도 생산/개량되어 만들어졌다.
  • [8] 동남아 및 아프리카 수많은 나라에서 선교사를 보내 묻지마 선교를 하여 현지인들과 갈등을 빚고 현지인들에게 구타당하거나 추방당하면 얼씨구나 이걸 명분삼아 쳐들어갔다. 병인양요도 바로 병인박해를 빌미로 벌인 짓으로 똑같다.
  • [9] 얼마나 정보가 없었느냐하면, 제네럴 셔먼호가 무장상선인데 동아시아인 조선 군대에게 아작났다라는 것을 근거로 조선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해버렸다. 여기에 신미양요 초반부에 대원군이 병인양요 등을 거치면서 준비한 최대의 방어병력이 보여준 포격을 보면서, 미군은 그에 더해서 최대한의 함포사격을 하고 다시 공격을 했는데, 결과는(...) 신미양요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