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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각

last modified: 2015-04-12 10:54:20 Contributors

의 대도독
주유 노숙 여몽 육손 주연 제갈각 손준 손침 주적 육항

Contents

1. 개요
2. 엄친아적인 일화들
2.1. 안하무인 성격
3. 일대기
3.1. 활약의 시작
3.2. 이궁의 변
3.3. 정권을 장악하다
3.4. 합비 공략과 몰락
3.5. 사후: 가문이 풍비박산나다.
3.6. 정사야사의 기록들
4. 후세의 평가
5. 제갈량과의 비교
6. 기타 창작물에서


1. 개요

諸葛恪(203년 ~ 253년). 는 원손(元遜).

삼국시대 오나라의 권신으로, 제갈근의 장남이자, 제갈량의 조카. 동생으로 제갈량에게 입양된 제갈교와, 입양되지 않고 오나라에 남은 제갈융이 있다.

2. 엄친아적인 일화들

어려서부터 재치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해 손권의 총애를 받았는데, 다음은 그와 관련된 일화들 모음이다. 이중 몇 가지는 삼국지연의에도 실려있다.

1. 한번은 손권이 제갈근의 얼굴이 긴 것을 놀려줄 생각으로 연회에 나귀 한 필을 끌고 오게 해서 그 낯에 '제갈자유(제갈근의 )' 라고 적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는데 그때 제갈각이 나서 그 아래로 '之驢'라고 덧붙여 썼다. 즉 '제갈근의 나귀'란 뜻으로 고쳐 아버지가 욕을 보는 것을 막아준 셈인데 그 기지에 손권이 감탄해 그 나귀를 제갈근에게 주었다고 한다.

2. 연회장에서의 일이다. 손권이 제갈각더러 중신들에게 술잔을 돌리려 했는데, 장소의 차례가 되자 장소가 "이는 어른을 모시는 예의가 아니다."라면서 술잔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이 때 손권은 싸움 붙일 작정으로 제갈각에게 "장자포(장소의 자)가 술을 마시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제갈각이 "강태공은 나이 80이 되고도 최전방에 나가서 계책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대해 전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선생(장소)을 전쟁 중엔 뒤에 모시고, 술 마실 때엔 앞에 모십니다. 이러한데 어찌 어른을 모시는 예의가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자 결국 장소는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셨고, 좌중은 감탄했다.

3. 태자 손등이 자기더러 말똥이나 먹으라고 반쯤 욕이 섞인 농을 걸자 달걀을 잡수시라는 말로 대답해 손권이 그 이유를 물으니 나오는 구멍이 매한가지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4. 이렇게 어린이가 이름을 날리자 장소의 아들 장승은 그 어린이를 상대로 말싸움을 해서 이겼다고 한다. 꼬맹이 상대로 무슨 지거리야[1]

5. 한 번은 촉에서 사신 비의가 왔을 때 신하들에게 엎드려서 먹고 일어나지는 않게 했는데 비의가 이걸 보고 '봉황이 날아오자, 기린은 먹던 것을 뱉었는데, 당나귀는 무지하여, 예전처럼 엎드려 먹는구나!' 라 하였고, 그 말에 제갈각이 답하길 '오동나무를 심는 것은, 봉황을 맞이하려 함인데, 어찌하여 제비나 참새가 스스로 날아왔다고 하느냐? 활로 쏴버리지는 않을 것이니, 사절은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그 말에 비의는 떡을 먹기를 멈추고, 붓을 찾아 '맥(보리)부'를 지었는데, 제갈각 또한 붓을 청하여 '마(보리를 가는)부'를 지으니, 모두 훌륭하다고 하였다.

6. 한 번은 제갈각이 손권에게 말을 바쳤는데, 먼저 그 귀를 뚫어놓았다. 그때 손등의 태자시설부터 제갈각의 친구인 범신이 제갈각을 조롱하며 '말이 비록 큰 짐승이고, 하늘로부터 품성을 타고났지만, 지금 그 귀가 상했으니, 어찌 그 미덕(仁)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라고 했더니, 제갈각이 답하길 '모친은 여인 중에서도 은애가 지극한 사람인데, 귀를 뚫어 구슬을 걸은들, 그 미덕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며 친구를 발라버린다. 시대를 앞서간 패드립

7. 한 번은 촉의 사자가 도착하여 신하들이 모두 모이게 되었는데, 손권은 사자에게 제갈각이 말타기를 매우 좋아한다며 돌아가서 승상에게 말하여 좋은 말을 보내오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즉시 제갈각은 무릎을 꿇고 감사해했다. 이걸 보고 손권이 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감사해 하냐고 묻자 제갈각은 "촉나라는 폐하의 외부에 있는 마구간인데, 오늘 은혜로운 조서를 내렸으므로 말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어찌 감히 감사해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패기를 보여줬다.

이런 얘기들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말재주만큼은 당대 인물들 중에서도 일류였던 듯하다. 심지어 손권으로부터 "네 아버지 제갈근과 숙부 제갈량 중 누가 더 훌륭하냐?" 란 질문을 받자, 거리낌없이 "밝으신 군주를 받드는 신의 부친이 더 위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해, 아버지의 체면치레와 황제 애널써킹을 동시에 해내는 걸 보면 절로 혀를 내두를만 하다.

2.1. 안하무인 성격

다만 아버지 제갈근은 이처럼 아들인 제갈각이 지나치게 총명함을 과시하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해, "분명 저놈이 우리 집안을 망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2]그 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숙부 제갈량도 제갈각이 군량 관리를 담당하게 되자 따로 손권에게 글을 보내 '그놈은 성질이 더러워서 군량 관리에는 알맞지 않다' 고 일러줄 정도였다.[3] 육손도 가끔 따로 불러내 그 거만한 성격을 좀 다스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3. 일대기

3.1. 활약의 시작

손등이 태자로 있을 때 장휴, 고담, 진표와 함께 태자를 모셔 일명 태자사우로 불렸다. 234년 단양태수로 임명되어 산월족을 토벌하게 되자 책략으로 병력 손실을 최소화해 3년 만에 토벌을 완수해 4만의 병사를 새로 확보했다.[4] 그 공으로 위북장군이 되고 도향후에 봉해져 제갈근의 작위를 잇지 않고 스스로 입지를 다졌다. 그 뒤로도 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워 246년 대장군 자리에 올랐다.

3.2. 이궁의 변

손등이 죽고 손패손화 사이에 태자 쟁탈전이 벌어져 이궁의 변 사건이 발생하자 제갈각은 손화 편에 섰으나, 자신의 아들인 제갈작은 손패 편을 들었다. 결국 양쪽 다 밀려나고 손량이 새 태자로 세워진 뒤 손권이 아들 교육 좀 제대로 시키라고 나무라자,[5] 집에 돌아가서 제갈작을 독살한다.

3.3. 정권을 장악하다

손권이 위독해지자 태부로 임명되어 손홍,[6] 손준, 등윤, 여거 등과 뒷일을 부탁받는다. 손권이 죽자 제갈각을 미워하던 손홍이 제갈각을 제거할 심산으로 손권의 죽음을 숨기려 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해 자기 목숨만 잃었고, 이때부터 제갈각이 오의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에는 나름대로 백성들의 인망을 얻으려 노력한 듯, 관리를 감찰하는 교관 제도를 폐하고 미납된 세금을 없던 것으로 해서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얻는다. 위소를 태사령으로 세워 오서를 편찬하게 하는 한편, 252년 10월에는 동흥에 큰 둑을 만들고 둑 양편에 성을 쌓기도 하면서 국방과 정치, 문화 각 방면에 두루 힘을 쏟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의 실권자 사마사의 명령으로 호준, 제갈탄 등이 공격해오자 정봉, 전서 등을 선봉으로 내세워 위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싸움에서 특히 오를 배신하고 위에 붙은 오나라의 개국공신 한당의 아들 한종을 잡아 죽여 그에게 앙심을 품고 죽은 손권의 사당에 제사지냈기 때문에 제갈각을 추켜주는 오의 여론은 거의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에 시도한 합비 공략이 성공하는 일은 없었다.

3.4. 합비 공략과 몰락

이듬해, 기고만장해진 제갈각은 주변 동료들은 물론 촉한의 장수 장억조차도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차 위를 침공해 합비신성을 포위한다. 하지만 수장인 장특관구검, 문흠이 강력하게 방어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군사들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어 나가자 결국 철수했다. 연의에서는 제 성질을 못이겨 마구 군사들을 몰아대다가 이마에 화살까지 맞는다. 안습.

그리고 합비에서의 참패 이후, 드높던 인기도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한다. 전투 한번으로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로 대패한 주제에, 반성을 하지 않고 책임을 이곳저곳에 전가하는 한편, 측근들의 부정부패를 방치해서 패전으로 흉흉해진 여론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이런 상태에서 재차 정벌 계획을 세우고, 반발 의견까지 옥죄어 가며 박차를 가했으니... 오나라 국내의 제후들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죽여 달라고 간덩이가 부은 짓만 골라서 한 셈이다.

결국 손준암살 계획을 손량이 묵인하는 형식으로, 연회 자리에서 참살당해 시체가 거적에 싸여 석자강 공동묘지송장 구덩이에 던져졌다.

결과적으로 전략적인 시야는 있었으나, 반성할 줄 몰라서 쫄딱 망해버린 케이스. 그래도 능력도 뛰어나고 오나라를 이끌어갈 비전도 있었던 인재의 죽음치고는 상당히 허무하다. 게다가 제갈각의 죽음은 자기 가문은 물론이고 오나라까지 말아먹는 일련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한 번 더 안습.

3.5. 사후: 가문이 풍비박산나다.

물론 제갈각 본인만 죽은게 아니라, 나머지 아들들도 제갈각이 죽은 이후에 끔살당한다. 장남 제갈작은 이궁의 변 때 스스로 독살했고, 차남 제갈송은 아버지가 죽고 군사들이 잡으러 오자 약을 먹고 자결, 막내 아들 제갈건은 수레에 어머니를 싣고 위나라로 도망가다가 손준이 보낸 유승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또 제갈각의 동생 제갈융도 약을 먹고 자살했고, 제갈융의 세 아들들 또한 주살되면서 결과적으로 제갈근의 대가 모두 끊겼다. 아버지와 숙부의 걱정이 현실로...

그나마 다행인 점은, 뒤에 장균이 상소를 올려 장사지내는 게 허락되었고, 손휴손침을 제거한 뒤 신원되었다는 것,[7] 그리고 제갈량이 양자로 들였던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이 촉나라에 살아있어서 손침이 주살되자 오나라로 돌아와서 제갈근의 대를 다시 이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3.6. 정사야사의 기록들


오록에서는 제갈각의 키가 7척 6촌(약 175cm)에 이마가 넓고 입은 컸으며, 눈썹과 수염숱이 없고 매부리코에 목소리가 높았다며 그 외모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키는 아버지를 닮아 큰 편이었지만, 그 시대 기준으로 좋게 봐줘도 미남이라고 보긴 어렵고 상당히 이질적인 외모였던 것 같다.

정사에서나 삼국지연의에서나 죽음 전후의 묘사가 이상하리만치 자세한데, 읽다 보면 가히 호러물이 따로 없다. 집에 갑자기 상복을 입은 자가 불쑥 들어온다거나, 세수를 하는데 물에서 피비린내가 난다거나... 김구용 삼국지에 실린 인물 삽화에는 수레를 탄 채 뭔가 헛것이라도 봤는지 양 손을 치켜들고 놀라 멍때리는 자세가 압권이다.

정사에 의하면 제갈각이 살해당하기 전 연회를 참석하려고 할때 제갈각이 기르던 가 제갈각의 소매를 물고 놔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제갈각 또한 연회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마땅한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지 못하여 그냥 참석했다고 한다.

야사 세설신어에서도 지력을 자랑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흰 머리 새가 오나라 궁전 앞에 모여들 때 여러 신하들에게 손권이 무슨 새냐고 묻자 제갈각은 백두옹(알락할미새)이라고 대답했다. 장소가 좌신이 좌중에서 가장 연로했기 때문에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의심[8]해 제갈각이 폐하를 속이고 있다면서 백두옹이라는 새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시험삼아 백두모[9]를 찾아보게 하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제갈각이 새 이름은 앵모(앵무새)지만 반드시 짝이 있는 것은 아니오니 시험삼아 장소에게 앵부를 찾아보게 하라고 했고 장소는 대답할 수 없었다.

괴담 모음집인 수신기에 또다른 일화 하나가 실려있다. 제갈각이 단양태수로 있었을 때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 어느 계곡을 지나던 중 어린 아이같이 생긴 짐승 하나가 손을 뻗어 제갈각을 당기려 했다. 제갈각이 오히려 손을 뻗어 끌어당기자, 그 짐승은 바로 죽어 버렸다. 사람들이 신기한 재주라며 칭찬하고 부하들이 감탄하자 제갈각은 이 짐승은 계낭으로 요괴 백과사전인 《백택도》 에 나와 있으며, 단지 당신들이 그 책을 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4. 후세의 평가

동오 역사가 아침 드라마 평가를 받는데 기여한 맛깔스러운 조역 중 하나. 요약하자면 제 잘난 멋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파멸을 자초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 아버지숙부를 비롯해 온갖 출중한 인물들이 결점을 계속 지적해줬지만, 끝내 자기 잘난 맛에 살다가 자신도 죽고 국가 막장 테크에도 가속도를 붙인 권력자라고 볼 수 있다.

제 아무리 혼자서 능력이 뛰어나도, 주변 상황을 정비하고 측근들의 인덕을 조율하는 등, 실수를 반성하는 의식이 없으면 큰 재앙을 안겨준다는 것을 증명하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젊은 혈기에 제 능력만 믿고 나대다 죽은 권력자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생몰년도를 보면 알겠지만 죽을 때 나이가 이미 50대였다. 즉 젊을 때부터 나대던 사람이 나이를 먹을만큼 먹고도 정신 못차리다가 집안 말아먹은 사례.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제갈각도 호부견자에 포함된다. 비록 재주가 뛰어나서 같은 나라의 다른 비슷한 사례들 보다는 나아보여도 자신의 재주를 지나치게 과신하는 바람에... 안습.

하지만, 이런 식으로 까이기만 하는 건 제갈각 입장에선 억울한 일이다. 비록 제갈각이 자기 잘난 맛에 국정을 밀어붙이다가 패망하기는 했으나, 제갈각을 암살하고 정권을 잡는 손준, 손침은 정말로 개막장이기 때문이다 (...) 한마디로, 제갈각에 대한 비판은 그 자신이 나쁘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오만해서 일을 그르친 점으로 기운다.삼국지 팬덤에서는 잘난 척 쩐다고 깐다

어쨌든 합비 공략으로 생겨난 측근들의 부정부패와 국내 혼란을 정비하지 않고, 동오의 아침 드라마 역사의 흐름을 가속화시켰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 아버지인 제갈근이 정치면에서도 나름의 족적을 남기고, 병사들의 목숨을 아끼는 전법을 병행하며, 나라의 건실함을 세우는데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5. 제갈량과의 비교

그런데 이상하게 숙부 제갈량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도 둘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 같은 제갈 가문의 능력자.
  • 군주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또는 공식적으로) 전권을 갖고 통치함.
  • 북벌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함.

이 때문에 제갈량을 까기 위해 둘 다 북벌을 하다가 망했다는 투로 둘을 비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위의 설명을 보면 알겠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해석. 개인의 충절은 말할 가치도 없고, 능력을 봐도 제갈량을 제갈각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제갈량은 몇 차례나 북벌을 추진하고도 위에 입힌 피해에 비교할 만큼 촉에 피해를 입힌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나, 제갈각은 20만의 대군과 오의 경제력을 합비신성 전투 단 한 번으로 파탄냈으며, 제갈량은 사후 30년까지도 중원 구석에 박힌 촉이 위와 비등하게 대결할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축적한 먼치킨이지만 제갈각은 전횡을 일삼아 동오가 막장 테크를 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쯤되면 비교 자체가 제갈량에게 모욕인 셈.

단적인 예로, 제갈량의 가정 전투 → 읍참마속 vs 제갈각의 합비신성 전투 → 전후 대처법을 비교해보자. 겉보기에는 비슷해보이지만, 곱씹어보면 두 인간의 차이가 어떤 점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 우선, 제갈량은 가정에서 패배하자마자 퇴각을 결심하여 큰 피해를 보지 않았고, 군법을 어긴 마속을 처형하여 엄격한 법가 통치를 바로 세웠다. 게다가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며 벼슬까지 깎아서, 촉나라의 민심을 달래면서 오히려 권력을 자신에게 묶는데 성공한다.

  • 반면 제갈각은 합비에서 오나라 대군을 공중분해시킨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벌어진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기는커녕 부하 관리도 안하고 허황된 전쟁 계획이나 외치다가 암살당한다. 그리고 자기 잘못을 바로잡고 전략을 재편하기는 커녕, 책임전가에만 급급하면서 온 나라의 공분을 샀다.

제갈량의 북벌이 촉을 망하게 만든 계기라는 해석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적어도 제갈량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득이 되었으면 모를까 해가 된 적은 없다. 하다 못해 해가 되었다고 쳐도, 제갈량은 북벌에서 소모한 이상의 국력을 축적한 명재상이었다. 그에 비해서, 제갈각은 전투 한번으로 나라가 엉망진창 (...) 즉 전략에서부터 숙부 제갈량과는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제갈량의 북벌은 촉나라의 존속을 위해서 생각해낸, 일종의 국가전략을 위한 종합적인 개념에 가깝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제갈량은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보다는, 전략거점을 확보하면서 촉나라의 내정을 가꾸는데 주력했다. 이러니 과로사하지 하지만 제갈각의 북벌은? 한번에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서 그대로 좆ㅋ망ㅋ.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유비와 함께 건국공신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제갈량과는 다르게, 제갈각의 경우 사방이 적이었다. 게다가 오나라의 특성상 국론도 통일되기 어려웠다. 즉, 제갈각은 오나라의 활로를 뚫겠다는 의미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본받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제갈각은 제갈량처럼 확실한 국가이념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독단적이었으며 실패시의 피해를 최소화하지도 못했다.한마디로, 두 사람은 인간적인 매력은 물론 국가의 전략을 내다보는 안목부터가 넘사벽이었다.

실제로 제갈각은 촉의 재상이었던 숙부 제갈량을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집권 초기 연호를 촉에서 제갈량이 집정하던 때 쓰던 연호인 건흥(建興)을 그대로 채택하는데,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북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후출사표를 위조했다는 의혹도 있는데, 출사표 항목 참조. 이후 북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서신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후출사표와 그 논지가 거의 똑같았다.

한마디로 숙부만큼 잘난 인물이 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행적으로 봤을때 비교자체가 제갈량의 조카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수준이다. 클라스 차이 그나마 제갈량과 비교해서 개 취급이라도 받는 제갈탄에 비교하면 정말 개 만도 못한듯(...)

만약, 제갈량이 이때 까지 살아있었다면 편지 한 통으로 제갈각이 합비로 진군(進軍)을 막았을 것이다. 집안이 통째로 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6. 기타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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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런데 2번의 일화도 있는걸 보면 어쩌면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 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장승은 제갈근보다 고작 4살 연하로, 제갈각에게는 아버지 뻘이다(...)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 했더라도 상당히 찌질해 보인다.
  • [2] 비록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무시당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인 제갈근도 오의 고위직에서 옳은 정치를 펼친 상당한 정치가이자 시대를 풍미한 호걸이었다. 제갈근이 연의에서 저평가된 일화들도 알고 보면 제갈근이었기에 겨우 그 정도로 막아낼 수 있었을 정도라는 것이 당대의 평가이다. 그리고 계속 읽다보면 알겠지만, 제갈근이 아들에 대해서 내린 인물평은 예언처럼 적중하고 만다...
  • [3] 그리고 손권은 이를 제깍 받아들여 제갈각을 교체한다. 제갈량이 본인의 부하가 아닌 다른 나라의 관리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받아들이는 걸 보면 손권의 눈에도 제갈각이 너무 나대는것이 껄끄러웠던 모양. 숙부인 제갈량도 제갈각의 안하무인 성격 탓에 자칫하면 형인 제갈근 가문과 오나라가 휘청거릴 가능성을 간파한 것 같다.
  • [4] 위에서 언급한, 제갈근이 제갈각을 두고 탄식한 게 제갈각이 이 계획을 세웠을 때다. 그리고 아무도 제갈각이 성공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5] 근데 손권 본인도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전혀 못된다. 애시당초 이궁의 변이 손권의 삽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 [6] 회계 사람으로, 오나라 황실 일족이 아니다.
  • [7] 연의에서는 부하 장약을 시켜 손준이 이끌던 어림군 지휘권을 빼앗아 분노한 손준이 등윤과 모의하고 손량을 설득해 제거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정사에서 등윤은 제갈각과 친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후에 손침에게 살해당했다. 술에 독이 들었을까 두려워 집에서 궁으로 술을 가져오게 했다는 서술은 정사와 연의 전부 같다.
  • [8] 백두옹(白頭翁)이라는 글자에 늙은이라는 의미의 翁이 들어갔다.
  • [9] 母인 어머니를 의미하는 글자가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