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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last modified: 2015-03-29 22:15:26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임진왜란
2.2. 광해군 시절
2.3. 이괄의 난
2.4. 정묘호란과 최후
3. 기타

鄭忠臣
1576 ~ 1636

1. 개요

조선왕조의 무신(武臣)이자 관료. 본관은 금성, 자는 가행, 호는 만운이다. 조선왕조 600년에서 충무공 칭호를 받은 12인 중의 하나. 이름이 폭풍간지를 자랑하는데, 친분이 있었던 이괄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신기한 인물. 말년에는 정묘호란을 겪고, 서인들에게 탄핵받아서 귀양을 가면서도 끝까지 화친정책을 주장했다.

탄핵받은 이후에도, 관례답게 금방 복권되어서 몇몇 한직을 떠돌았다. 하지만 친금정책은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병자호란 이전에 병사했다. 저서로는 시, 최명길 등과의 군사대담을 실은 만운집, 스승 이항복과 함께 유배기록을 다룬 백사북천일록, 금남집이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일개 병사로 군생활을 시작했음에도, 권율이나 이항복 같은 무시무시한 네임드들에게 사랑받는 제자가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보편적으로 존경을 받는 대표적인 지장이자 덕장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장년기에 떨친 명성을 보면, 일반병에서 출세한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1]

2. 생애

2.1. 임진왜란

나중에 떨치는 명성을 보면 믿을 수 없지만, 본래 신분상 미천한 계급이었다.[2][3] 1576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절까지는 천민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17세 때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권율의 노복(奴僕) 역할을 맡아왔다. 일반병이었지만, 민첩하고 영리해서 권율에게 총애받았다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장계를 평안도 의주에 피신중인 선조에게 찾아가서 전했다. 참고로 정충신 말고는 아무도 자원하는 인물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4] 이때 어명에 따라 면천(免賤)이 내려져서 평민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백사 이항복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이수하고, 후에 무과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무관으로 임명되어 양반까지 신분이 승격되었다.

미천한 계급에서 역사적인 명장에게 사랑받는 심복이 되었다가, 전쟁 도중에 피신한 왕의 명령으로 신분이 상승되어서, 유명한 대학자의 제자로 들어가는 등, 뭔가 양판소 주인공이나 서브 캐릭터의 설정으로 보일지도 모르는데... 이게 실제인물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 명성만 해도 워낙 소설인물 같아서 그런지, 스승님들처럼 야담이나 설화도 만들어졌다.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

2.2. 광해군 시절

1602년 조선 사신 자격으로 을 방문하였으며, 압록강 건너 여진족의 동태와 정세를 파악하는 역할을 하였다가, 1608년 조산보만호직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다. 1618년 스승인 백사 이항복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입장을 밝히는데, 자신 역시 같은 입장을 따르면서 제자의 자격으로 스승을 따라서 유배를 떠나기도 하였다. 오오 으리남 오오

광해군 시절인 1621년에는 만포첨사에 임명되어 국경 수비를 맡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중립노선을 지키며 청나라조선 침략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돌아온다. 광해군의 중립외교에도 참여했던 셈.

2.3. 이괄의 난

인조반정 때는 반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에 이괄의 난이 발발하면서, 이괄과 절친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관신들로부터 의심을 받는다. 본인도 초기에는 그냥 잡혀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괄이 무력으로 봉기하자, 결국 공적(公的) 목적으로 친구였던 적장 이괄을 제압하기로 한다.

여기서 에피소드가 있는데, 정충신은 이괄을 제압하는데 망설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충신처럼 무고로 연류되었던 한명련은 압송되다가 이괄의 손으로 구출되어서 반군에 합류했는데, 그들이 뒤에다 놓고 온 김효신이나 한명련의 부하들은 대거 투항해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정충신군이 반란군을 처음 만났을 때도, 친분이 있던 이괄이 토벌군에게 투항하겠다는 투의 제스처를 보내게 된다. 문제는 정충신이 이에 낚였다는 점이다. 속지마 이괄이야 하지만 이괄은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가 되었으니, 무조건 독한 마음을 품고 동료장수들을 베어버려야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정충신은 순진했는지 아니면 친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어쨌든 낚였던 것으로 보인다.[5]

문제는, 이괄군이 정충신군과 황주벌판에서 단독으로 만났을 때 바로 위의 낚시질을 했다는 점이다. 이때 초전에서 방심한 대가는 참혹해서, 정충신의 토벌군은 독한 마음을 품고 공격을 가하는 이괄에게 병력의 절반을 잃고 도망쳐야했다. 참고로 이때 정충신을 낚을 때 이괄이 전방에 세운 병력이 바로 항왜.

한번 피맛을 본 이괄군은 3일 후의 마탄전투에서 황해도 관군까지 박살내는데, 이때 관군들은 정충신군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싸웠는데도 아예 지휘관들까지 피박살 나서 전멸당한다. (...). 문제는 이때 마탄전투에서 전사한 장수들의 목을 맹렬하게 추격하던 정충신군 앞에 보냈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동료장수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패배한 관군 입장에서는, 충격으로 사기가 급락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하지만 정충신은 "다른 사람의 목이다!" 라고 낚시질을 펼쳐서 추격군이 붕괴하는 것은 막아냈다고 한다.

아무튼, 친분이 있던 이괄에게 이미 한번 속았던 정충신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더러운 심정이었을 것이다(...).[6] 어쨌든 정충신은 추격을 시작하는데, 이괄은 전투를 극도로 꺼리면서 재빨리 한양을 점령하는데 주력한다. 아무래도 피해를 줄이고 조정부터 엎어버리려는 생각이었던 모양. 이미 박살낸 관군들이야 원한이 깊겠지만 여담으로, 정충신군은 산속을 타고 달리는 이괄군의 진격로를 따라가다가 낙오하는 병사가 속출해서 그냥 길로 따라갔다는 기록이 있다.[7]

명성에 비하면 초전에서 이괄에게 많이 당한 셈인데, 그래도 선배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총기를 보여서, 이괄이 인조를 좇으면 상책이오 한양에 남으면 하책이다라는 말을 남긴다. 결국 이괄은 한양에 남았고, 정충신의 말대로 그것은 이괄의 몰락을 불러오는 최악의 실책이 되었다.

정충신은 남이흥과 함께 2천명의 병력으로 무악재에서 이괄군을 도발한다. 이에 낚인 반란군은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산 위에 세운 정충신의 진지를 공격하지만, 고춧가루와 함께 돌풍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한명련이 죽고, 이괄은 패했다!"라고 소리치는 남이흥의 기지 덕분에, 병사들이 탈주하면서 지휘권이 와해되고 한양을 점령한지 2일 만에 대패한다. 남이흥의 진지가 박살나는 와중에도, 정충신군의 진지는 굳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러모로 이 승리는 행주대첩과 비슷하게 분석되기도 한다.[8]

이후, 이괄이 도망치자 남이흥과 함께 궁지에 몰린 쥐는 잡으면 안 된다고 급구 말려서 이괄이 자멸하도록 내버려둔다. 애초에 2천명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1만을 몰아냈으니 좇을 방법도 없었다. 하지만 이괄이 도망치던 지점에서 막아서던 임회가 끔살당하는 피해는 있었다. 그야 상황을 잘 모르는 입장에선 안 막을 수도 없을테니... 어쨌든 반역자인 이괄의 친우였음에도, 그를 제압한 공로로 조정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2.4. 정묘호란과 최후

관직 재직 중에 와병(臥病) 신세를 지기도 하였으나,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이괄이 받은 바로 그 직책 정묘호란 때는 무난하게 수비를 했으나,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병력의 차이 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이괄에게 당한 피해는 복구되지 않았으며, 반역자로 몰린 인재들도 청군에 투항한 상황이었다. 결국 과거의 동료들을 상대로 또 한번 싸운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러모로 안습...

1633년 조선청나라와의 단교에 반대하였다가 충청도 당진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물론 관례대로 금방 석방되어서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병세악화로 관직에서 은퇴하여 와병으로 드러누웠다가 그 해 5월 사망하였다. 인조나 서인들에게 정치적으로는 탐탁스런 인물이 아니었지만, 일단 인조는 병을 돌봐주고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3. 기타

광주광역시 구도심의 주요도로인 금남로는 정충신의 군호 금남군에서 따온 것이다. 그 밖에도 청렴한 성격이나 지장으로서 명망이 높았다. 심지어야담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스승이었던 이항복, 권율 같은 걸물들처럼 탄생설화까지도 존재한다. 야담에서는 만주의 호족들의 추장들에게 식견을 설파하는 장면도 나온다. 생전에 안습한 일을 많이 겪었음을 생각해보면 그나마 위안거리일지도...

여러모로 당대에는 존경받은 인물.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는 이괄의 인지도가 더 높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에는 당연히 충신이 존경받고 역적이 비난받는 것이 당연했을 테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왕조는 봉건왕조일 뿐이지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민주적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딱히 왕에게 충신이든 역적이든 그 자체는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민중들에게 어느 것이 바람직했는가, 역사적으로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일 것이다.[9]찾게 되는데, 사실 역사적 의미는 몰라도 이괄은 국사책에서 이름은 한번'이괄의 난'으로 꼭 붙어서들어보게 되고, 조금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괄이 명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나름 인기를 끌 수 있는 것. 하지만 정충신 역시 무척 드라마틱한 삶을 보냈고 다방면에 뛰어난 명장이기도 하므로 한번 그를 소재로 사극이나 기타 창작물이 나온다면 크게 뜰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없다

다만, 과거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을 보아온 세대의 경우에는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여러모로 말년에는 동료였던 인간들의 뒤치닥거리를 하다가 죽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다양한 호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죽을 때까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았다고 평할 수 있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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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몇 가지 저서를 남겼음은 물론이고, 무술에도 능했으며 천문, 지리, 점술, 의술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고 한다. 이 무슨 엄친아...
  • [2] 천민이라는 말도 있고, 고려시절에는 명망있는 무인가문의 후예였다가 천한 신분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런 기록은 야담이나 전설에서 섞인 것이 많다. 정식기록에 의하면 아버지 대까지는 아전이었으므로, 본래는 나름대로 명망있던 가문에서 낮은 계급이 되었다는 설도 일리가 있다.
  • [3] 하지만 아버지가 아전이라는 기록은 정충신 사후 작성된 행장(행장은 본래 다 있어 보이게 써준다)에 의한 것이고, 정충신이 권율의 보고서를 선조에게 바치고 받은 벼슬은 고작 고을 아전이었다. 애초 광주부에 예속된 심부름꾼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전이라는 벼슬로 면천을 시켜주고, 다음 해 무과급제자 명단에 포함시켜 벼슬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과거급제자는 조부의 이름까지는 당연히 기재하여야 하는데, 당장 조부의 이름조차 무엇인지 기록이 전혀 없는 상황이고, 뜬금없이 7대조 할아버지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는 상황이다.
  • [4] 이런 임무 외에도, 발이 빨라서 평소에도 두려움없이 왜군들의 진영을 정찰을 했다고 한다. 흠좀무.
  • [5] 정충신도 무관으로 경험이 많았음을 생각하면 의아한 결정이다. 하지만 정충신은 성장기부터 왜적을 상대로 싸웠을 뿐, 내전 경험이 있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따라서, 아군 장수(그것도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정말로 같은 조선군을 유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당시에는 이괄이 반란을 선언했음에도, 변변찮은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6] 장수가 아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멘붕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정충신도 임진왜란을 거쳐온 장수인지라, 도리어 독하게 추격을 계속한다. 그래도 기분은 참 더러웠을 듯. 여러모로 이괄김류에 의한 정변의 최대 피해자 중 한명인 셈. 뒤치닥거리 담당
  • [7] 정충신도 젊은 시절에 임진왜란권율 휘하에서 정찰병으로 왜군진영을 날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는 나이도 먹고 부하들도 대부분 패잔병인데다 밥도 못 먹으니 따라잡기 버거웠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전에 군대가 느린거랑 장수가 느린 거는 별개인데 덤으로, 이괄군은 추격군으로 따라붙는 관군들에게 청야전술을 펼쳤다고 한다. 이런 재주를 배신에만 써먹다 죽었으니 문제
  • [8] 하지만 실제로는 이길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승자인 정충신 본인이 천운이었다고 언급한다. 그걸 알면서도 싸웠다는 부분에서 그의 심지를 알 수 있다.
  • [9] 이를 오해하고 전근대의 왕조들을 지금의 국가처럼 감정이입하게 되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역사를 해석하게 된다. 봉건왕조는 봉건왕조일 뿐, 과도하게 비하하거나 과도하게 예찬할 필요도 없고, 봉건적 이념에 충실한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으로 보면 된다. 설령 추앙받는 이순신 같은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자본주의의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