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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조선)

last modified: 2018-02-26 20:11:33 Contributors

조선의 역대 국왕
초대 태조 이성계 2대 정종 이방과 3대 태종 이방원

묘호 정종(定宗)
시호 조선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공정(恭靖)
방과(芳果) / 경(曔)
광원(光遠)
출생지 고려 함흥 함흥본궁
사망지 조선 한성 인덕궁 정침
배우자 정안왕후(定安王后)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어머니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생몰기간 음력 1357년 7월 1일 ~ 1419년 9월 26일
양력 1357년 7월 18일 ~ 1419년 10월 15일 (62세 96일)
재위
기간
음력 1398년 9월 5일 ~ 1400년 11월 13일
양력 1398년 10월 14일 ~ 1400년 11월 28일 (2년 46일)
태상왕 음력 1400년 11월 13일 ~ 1419년 9월 26일
양력 1400년 11월 28일 ~ 1419년 10월 15일 (18년 325일)

Contents

1. 소개
2. 조선 건국 전까지
3. 지극한 효성과 우애
4. 재위 기간
5. 가족 이야기
6. 정종의 능
7. 후일담
8. 현대 매체에서

1. 소개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영안군 혹은 영안공. 흔히 영안대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대군이라는 호칭은 동생인 태종이 고려시대의 오등작을 폐지하면서 등장시킨 것으로 태종 즉위 후에 생긴 호칭이다. 즉 태종이 '정안대군'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던 것처럼 정종도 '영안대군'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름은 이방과(李芳果)였으나, 즉위 후 경(曔)으로 바꾸었다.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이다.

겨우 2년 남짓 재위했고 정통성 문제로 홀대받아 오랫동안 왕 대접을 받지 못했다. 드라마 등에서는 유약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려 말에는 장군이었던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를 종군하기도 했던 무골이다. 기록에 의하면 체구가 곰처럼 강건하고 왼쪽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인 이성계의 무인적인 기질만큼은 형제들 중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 최민수가 해야겠네

역대 조선 국왕 중 최초로 한양(경복궁)에서 즉위한 왕이다.

2. 조선 건국 전까지

고려시대에는 명장 이성계의 아들 답게 무장으로 활약했다. 약관의 나이를 넘긴 21세가 되던 1377년(우왕 3) 5월에 태조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치는데 동행하였으며, 황산 대첩에서도 태조의 곁에서 함께 싸웠다. 이후 1389년(창왕 1)에 절제사 유만수의 지휘 하에 해주에서 왜구를 무찌른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의 개국 논의가 한참 일어날 무렵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동생 이방원포은 정몽주를 척살할 계획을 세울때 같이 동참을 한 사람이다. 이방원이 정몽주 암살 모의를 할 때 참여한 사람이 이성계의 이복동생 이자 이방원의 숙부가 되는 의안대군 이화, 이방원의 이복여동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그리고 둘째형 이방과였다. 참고로 이방원이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퉁두란)에게도 모의를 건의했으나 이지란은 어르신(이성계)이 반대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정몽주가 고려 최후의 보루로서 대활약했던 것을 방과도 모르지 않았을 터. 함께한 사람들이 전부 조선개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고 4명의 형들 중 유일하게 방과와 상담한 걸 보면 방과도 그 당시 역성혁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1] 게다가 이방원 입장에서도 아버지 이성계는 정몽주 제거를 꺼려하고 있었고, 맏형 방우가 역성혁명에 뜻이 없어 협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2] 나이도 많고 아버지 보필하며 공도 많이 세운 둘째형의 지지가 여러모로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정몽주가 선지교에서 참살된 후, 곧바로 총대를 메고 공양왕에게 정몽주 살해를 알렸으며, 자신들을 처벌하든지 아니면 정몽주 계열 인사들을 모조리 처벌하라고 매섭게 압박했다. 무장으로서 이성계의 모습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방과의 압박은 공양왕에게 심각한 두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막상 공이 있었던 왕자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고 오히려 정도전, 남은 등 소수의 재상들에게 권력이 쏠리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입장에 서 있기도 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1392년(태조 원년) 8월 초 7일에 36살의 나이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하여지고 당시 태조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393년(태조 2) 6월 초6일에 문화현, 영녕현에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3. 지극한 효성과 우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특히 효심이 깊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사료에 의하면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질 때는 홀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단 소식에 크게 놀라서 김인귀란 자의 집으로 도망갔고, 자신이 세자가 되었다는 말에 마지못해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온 후 "내가 세자라니! 차라리 정안군이 하지?"라며 발을 빼려다 역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태조가 정안군 이방원이 붙인 시위군이 말이 시위군이지 간수나 다름없다며 정종에게 하소연하자 재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시위를 풀었다. 이에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은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방원을 공격한 방간에게 방간 측은 승산이 없다며 목숨을 보장해줄테니 궁궐로 들어오라고 권하였으며, 결국 싸움에서 승리한 정안대군이 패배한 방간의 처분을 어찌할지 조언을 구하자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래도 어려울 때 기댈 것은 피붙이밖에 없다."며 선처를 당부했다. 근데 이 설득을 보면 태조와 정종이 방간 보고 "넌 방원이에게 안돼 임마! 속썩이지 말고 목숨이나 구해!"라며 난을 일으킨 방간을 달래는 것에 가깝다. 난을 일으켜 정종의 지지로 명분을 쌓으려던 방간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데꿀멍이었을 듯. 결국 방간은 목숨을 건져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 죽었다. 후술하듯 식읍까지 받았으니 사실상 유배도 아니다.

이후 토산으로 유배 간 동생 방간안산으로 옮겨 안치하면서 방간에게 전답을 마련해 주고, 고을의 주민 50호를 주도록 조치했으며 편지를 보내줬는데 이 편지를 보면 정종의 우애와 인간미가 잘 드러난다.
"토산군(현 황해북도 토산군, 옛 금천군의 일부)은 동북면(함경도의 옛 이름)에 왕래하는 땅이고, 또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네가 만일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 50호를 주는 것이니, 네가 편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 정월 초하루면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자."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2월 13일

이 편지를 받은 방간은 갓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4. 재위 기간

실록에 의하면 재위기간 동안 격구나 사냥을 즐기며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태조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많다. 대간에서 격구를 비판하며 태조가 환관의 꾐에 빠져 격구를 궁에 도입했다고 간하자 대간을 불러 내 허물을 가지고 왜 부왕을 욕되게 하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사냥을 나가면 언제나 중도에 사람을 시켜 잡은 짐승을 태조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것만 보면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일절 없었던것 같지만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기 서자원자로 봉하려다 태종이 압력을 넣어 취소시키고 왕세자가 된 기록이 남아있다. 정치적 야심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 적장자 계승이 무인정사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으니만큼 방우 사후 적장자가 된 그가 명분상 밀릴 일은 없었다. 그리고 태조실록에서 태조와 정도전에 대한 곡필을 행한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정종실록이라고 곡필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 태종이 조선 개국과정에서 세운 공로도 과장되었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는만큼 개국과정과 무인정사까지 정종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성이 있다. 연구에 따라서는 정몽주 격살과 1차 왕자의 난 주동자를 태종이 아닌 정종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정종은 잠시 조선의 수도를 개경(오늘날의 개성특급시)로 돌려보냈다. 여러모로 고려 시대에 대한 향수가 강했고,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한양(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태종이 즉위한 이후 다시 천도를 논의하여 창덕궁을 지으면서, "조선의 수도 개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2차 왕자의 난으로 그치게 되었다.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놀면서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 말년에는 태종도 그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부러워했다고. 태종도 말년에는 고독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상왕이 된 형과 어울려 노는 일이 잦았다. 실록에 정종과 태종이 서로 명절날 장난을 친 이야기를 읽다보면 무척 유쾌할 정도이다.

더불어 63살로 천수를 누렸는데 당시의 평균적인 수명을 생각하자면 오래 산 편이며, 영조(83살)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74살), 고종(68살), 광해군(67살) 다음으로 역대 조선 국왕들 가운데 5번째로 장수했다.

5. 가족 이야기

고려말에도 부인인 김씨와의 젊은 시절부터의 정 때문에 부인을 더 얻을 수 없다하여 평생 해로한 애처가이기도 하다. 상왕으로 물러난뒤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오기로라도 후궁을 더 들인다며 수선을 떨자 정종이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라고 말해 태종이 가례색을 폐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태종이 후궁을 더 들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창하게 혼례를 올리려던 것을 조용하게 했을 뿐, 중국 제후의 예를 따라 최대 9명을 꽉 채워서 다 들였다. 참고로 이건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유일하게 태종에게 한소리 한 것이라고 한다.

후일 김씨가 먼저 사망하자 동생인 태종이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중 갑자기 먼저 간 부인이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그의 부인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아내의 투기를 피해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승정원으로 열흘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애처가이자 공처가.

허나 아내와의 금슬과는 별개로 첩실 소생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상당히 많았다.지금과 당시의 결혼관이 상당히 다른 면이 있어 그런 것도 있지만, 유교관에서 최고의 불효는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이었고 그렇게 금슬 좋은데 자식을 못 보는 것을 왕비가 불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4위로 15남 8녀(23명). 이들은 대체로 행실이 엉망이라 이후 세종대왕 시대에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골칫거리가 된다. 반대로 생각하면 정종에게 적자가 없었다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약 정종에게 정통성이 있는 적자가 있었다면 피바람이 한번 더 휘몰아 쳤을지도 모르겠다. 야사에는 모두 출가시켜서 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종의 아들을 사칭한(친아들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승려의 이야기가 후세에 들어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종에게는 기매라는 이름의 기녀 출신 첩이 있었는데, 그녀는 바람기가 대단해서 많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아들도 낳았지만 아버지가 의심스러워서 정종은 그녀 소생의 아들을 아들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기매가 가짜 내시와 바람을 핀 것이 들통이 났는데 원칙대로라면 이는 처형감으로 태종과 중신들은 가짜 내시와 기매를 처형하려 했으나 정종은 직접 태종에게 부탁하여 그녀를 살려주었다. 기매는 끝까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정종의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종은 죽을 때까지 기매 모자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종 사후 기매의 아들은 '지운'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하였으나 승려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왕자 대접을 받으며 권세를 누렸는데, 이게 왕족 사칭죄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상왕이 된 태종과 국왕 세종은 일단 지운을 체포했는데, 태종과 세종은 지운이 정종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심증적으로는 정종의 아들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지운에게 왕족에 준하는 의식을 공급할 테니 절대 왕자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지운은 이 명을 듣지 않고 계속 문제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세종 6년에 참수되고 만다.

그 외에 서자로 다섯번째 아들이었던 선성군이 있는데 첫째 부인이 바로 정몽주의 손녀(...)인 오천군부인이다.

6. 정종의 능

그의 묘는 현재 북한개성특급시에 있다. 조선시대 왕들 중 유일하게 묘가 북한에 있으며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이다. 왕비까지 포함하면 태조의 첫 비이자 정종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묘도 개성에 있다. 참고로 남한의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은 인조의 장릉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상인 추존왕들의 왕릉은 제외한다. 그들의 무덤은 함흥 부근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현 황해북도 개풍군 령정리).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정안왕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공민왕릉과 비슷한 형식이다.

안타까운 건 묘호로 262년이나 왕따 당한 것처럼 정종의 묘는 연산군의 묘와 광해군의 묘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관련기사

7. 후일담

정통성 문제로 죽어서 묘호와 시호를 받지 못했다. 사후 세종대왕이 묘호와 시호를 올리지 않아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시호가 올려지기 전까지 이 시호를 사용했다. 정종을 인정할 경우 태조에서 태종으로 이어지는 왕실 계보가 꼬이기 때문이다. 이건 여러 면모에서 나타나는데,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이나 종친에 대한 족보인 선원록이나 모두 태조 이성계와 태종으로 이어지는 직계만 기록하고 있지 그외의 인물은 모조리 배제되어 있다. 더군다나 유부록에서 딸과 서얼들을 기록하면서 오로지 서얼 뿐이었던 정종의 자손들은 모두 유부록에 기록되어 종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종친들에게 관대하기로 유명했던 세종대왕도 정종의 아들인 서얼들에게는 상당히 냉정해서, 이들과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면 모조리 유배형을 내렸었다. 그래서 조선 전기 내내 명에서 내린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250년이 지난 숙종대에 와서야 겨우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미 세종대왕, 예종(이때는 희종이라 하려다 요절로 중단.), 성종, 중종 때 등에 이따금 논의 되었으나 계속 미루어졌던 것이다.

이런 중요한 절차를 무시했다는 자체가 세종대왕이 정종을 그리 공경하지 않은 근거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래도 정종의 상중에는 세종대왕도 고기를 먹지 않을 정도로 예를 지키긴 했고 묘호 생략 문제는 의외로 태종에서 이어지는 세종대왕의 정통성 문제가 아주 관련 없었다고는 말 못한다.

이숙번과의 정쟁에서 진 적이 있다. 이숙번의 집 앞으로 새로 길이 나기로 됐는데 이숙번이 누구 마음대로? 라며 펄펄 뛰었고 인덕궁 앞에 좋은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길을 놓으라며 반협박을 했는데 인덕궁이 바로 정종이 사는 곳이다. 정종도 내 집앞에 길을 왜 놓으냐며 못마땅해 했으나 그로써는 이숙번의 요구를 철회시킬 힘이 없었고 결국 그의 집 앞으로 길이 놓였다.

이숙번과 얽힌 일이 또 하나 있다. 1414년 정종이 태종을 찾았고 일이 끝난 후 그를 배웅하는데 하륜, 성석린, 남재, 이숙번 등 의정부 대신들이 술에 취해 풍악을 울리느라 왕이 가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대간이 어떻게 그런 무례를 저지르나며 그들을 탄핵했으나 태종의 변호로 무마되었는데 하륜과 이숙번이 길길이 날뛰었고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대간 새끼들이 감히 대신에게 대들지 못하게 해주세요 라는 취지의 상소를 태종에게 올렸다. 그런데 애당초 대간의 업무 자체가 비판이라 왕의 잘못까지 거침없이 비판하는데 대신의 잘못을 비판하지 못하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것이고 따지자면 그들이 무례를 저지른 것이 맞았기에 성석린과 남재는 소를 올리는 것에 반대하여 니들끼리 올리라며 이와 같은 활동에 간섭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숙번은 그날 밤 그들의 집을 찾아 명색이 상관인 그들의 서명을 강제로 받아냈다. 이숙번의 권력이 강력했던 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직급으로 따지면 자기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대신들의 집에 다짜고짜 찾아가서 반 강제로 서명을 받아왔을 정도로 실권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이숙번은 태종에 의해 숙청되어 지방으로 유배를 가서 세종 때 무인정사 당시의 이야기를 증언하기 위해 잠깐 한양에 온 걸 빼곤 두 번 다시 한양에 올 수 없었으니 거 참 아이러니하다.. 정종: ㅋㅋ 나대더니 꼴좋다 누구든지 권력 세다고 함부로 나대면 아주 X돼는 거에요 아주 X되는거야 이 일에 정종이 딱히 비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신경쓰면 지는 거다

아무튼 죽고 나서 대접이 너무 안습해서 왕실 제사를 맡게 된 신출내기 관리의 꿈에 나타나 전임들이 너무 소홀했다며 한탄했다는 야사가 있다.갈구지도 못하고 한탄을 했다는 게... 이에 이 관리가 정종의 제사를 정갈하고 푸짐하게 잘 지냈는데, 이후에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서 출세했다고 한다.

8. 현대 매체에서

용의 눈물에서는 故 태민영(1954~2000)이 맡았다. 이후에 태민영은 태조 왕건에서 신강으로 출연하다가 출연 중 간암으로 인해 향년 47세로 사망해, 전사된 것으로 처리되어 버렸다(...). 역사상의 소탈하고 호방한 무인의 모습은 없고 전쟁에서 몇 번 승리한 다음에는 아우들의 야심과 거친 행동에 전전긍긍하는 나약한 모습만이 나온다. 태종이 왕세자가 되자 야사대로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중으로 출가시켰다가 태종이 허락한 이후에야 다시 환속시키는 등 카리스마나 막후 권력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등장한다. 다만 효심이 깊고 형제들을 아끼는 면은 많이 표현되었다.

대왕 세종에선 잠깐 등장하는데도 배우 노영국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태종과 맞먹는 막후 권력&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정치적 실권은 물론 없지만 카리스마만 따지면 과연 이방원 형(...). 덧붙이자면 노영국은 권력을 제대로 못 써보고 죽은 고려 2대 국왕 혜종을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한 바 있다. 다만 양녕의 비행으로 같은 둘째인 효령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정치적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고 묘사되는데, 물론 실제로는 그런 거 없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황산대첩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 후 무인의 역할로 간간히 등장하였다. 비중은 적지만 '나약한 정종'이라는 클리셰를 벗어났다. 정도전(드라마)/등장인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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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앞뒤 정황을 보면 억지로 끌어들였다고 보기엔 너무 적극적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불과한 방원이 연배나 공적에서 훨씬 위인 둘째형을 억지로 끌고갔다고 보긴 힘들다.
  • [2] 이쪽도 확실치는 않다. 고려왕실에 충정을 다했다는 기록은 어디까지나 세자경쟁에서 탈락한 다음에 나온 기록이고 창왕 즉위시점까진 아버지의 일에 적극 참여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