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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last modified: 2015-04-14 00:37:56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반전
3. 옥살이 이후
4. 저서와 역서


1. 소개(?)


1946년 생인 역사학자로 이름은 무함마드 깐수. 레바논인 2세로 국적은 필리핀이며 모국어는 아랍어이다.

1984년 4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연세대학교 어학당에 유학, 같은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신라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란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아내 윤씨와는 1988년 결혼했는데, 당시 무함마드는 42세, 아내는 26세였으며 서울시내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재직했다.

동서문명 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1990년부터 1996년까지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조교수) 자격으로 동서문화교류사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80년대부터 KBS3(지금의 EBS) 등의 교양역사 프로에 고정 자문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신문에 칼럼도 게재하고 저술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국내 문명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모국어'인 아랍어와 한국에서 습득한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를 시작으로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필리핀어(타갈로그어), 말레이어 등 11개국 언어를 습득하엿다. 하지만 원어민수준이거나 고급어휘력을 구사하지는 않았다.

2.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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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페이크다 이 ○○들아

그러나 이 사회적 신분은 사실 훼이크였고, 놀랍게도 깐수의 진짜 신분은 간첩, 그것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랍 혈통은 단 0.001%도 섞이지 않은 조선족 출신 북한 사람 '정수일'이었다.외모만 봐서는 한 50%섞인 것 같은데 참고로 당시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깐수 교수는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했다고 한다. 이런... 앞으로 된장국을 좋아하는 외국인을 발견하면 매의 눈으로 쳐다보자.

1934년 중국 지린성(길림성) 옌지(연길)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조선족 출신이었던 그는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동방학부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기도 하였다. 이집트모로코에 유학한 후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하여 1963년 북한으로 귀화하게 되었다.[1]


귀화한 후 평양외국어대 아랍어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해박한 언어구사 능력과 외국인을 닮은 외모[2]에 관심을 가진 조선노동당의 관심을 받아 1974년부터 공작원 교육을 4년 반에 걸쳐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하게 된다. 남파를 위해 당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레바논에서 1979년 11월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고 튀니지 대학의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레이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교수 등을 거쳤고, 이후 필리핀에서 다시 한 번 국적을 세탁해 필리핀 어머니를 둔 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한국에 들어오는 데 성공하게 된다.[3]

사실 더 일찍 잡힐 수도 있었다. 1984년 5월 당시에 방을 구할 때 한국의 화폐단위를 원화가 아닌 구 화폐인 ""으로 착각하여 용산구 한남동의 복덕방 주인에게 의심을 샀고, 은연 중에도 북한 사투리가 강하고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위화감을 느낀 복덕방 주인이 신고를 했으나 국내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신원보증을 해줘서 풀려났다. 이 사실은 수사기록에도 남지 않은 채 오랫 동안 잊혀졌고, '깐수'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본 복덕방 주인은 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상부에서는 구체적인 첩보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월간 잡지에 나온 '신상옥 · 최은희의 최근 소재지', '클린턴의 방한', '남조선 학생 운동권의 최근 동향'[4], '최신형 전차 생산 및 첨단 첩보기 도입'같은 기사들을 편집, 분석하여 암호편지나 팩스를 통해 중국 베이징선양으로 보냈다. 1987년 2월부터 1995년까지 4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부자충성맹세문과 "조국통일상"을 수상하고, 단파수신기, 암호표, 앰프, 공작금 19,000미국 달러 등을 받기도 했다. 수표가 동원되는 등 흔히 생각하는 첩보 방식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원시적인 행위였던 것인데, 결국 1996년 7월 안기부가 간첩 관련 첩보를 입수한 후 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고 시도하던 그를 체포하게 된 것. 90년대 중반들어 팩시밀리로 전송수단을 바꾼게 치명적이었다고 한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첩보 내용만 보았을 땐 북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가치는 거의 없었다라고 한다.[5] 또 깐수씨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회의를 품어 넘어온 '조국'에서 자신을 일개 어학 교수로 대접하며 매주 1, 2일 씩 막노동을 강요하고 매주 25시간, 강의 외의 아랍어 방송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에 힘들어 했으며, 심지어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귀의 로염(전정신경염)을 앓았다고 한다.

그의 위장이 철저하다 보니 아내조차도 정수일이 검거되기 전까지는 그가 간첩인 줄 전혀 몰랐고, 잠꼬대도 아랍어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가끔가다 이슬람교도들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코스프레까지 하셨다고... 정말 철저하다. 이러니 다 넘어갔지. ㄷㄷㄷ
심지어 첫번째 결혼이 아니라 북한에 아내가 있었다. "부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라는 질문에 북한의 조강지처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서류상 국적이 필리핀이었으므로 정씨는 국제법 상 국외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감된 곳도 구치소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밝혔고[6], 결국 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

체포 당시 그는 방대한 자료와 주석을 붙인 '동방교역사'[7]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던 상태였는데, 검사는 그를 취조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사는 압수당한 그의 원고를 찾아다 준 후 검사실에서 정리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그가 전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북한의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서였다. 남한에서 만난 후처에게도 '나를 잊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아내는 매달 2번씩 면회를 오면서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둘의 부부관계는 투옥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으며 남한에서 만난 후처의 지극한 옥바라지에 흔들렸다고 한다. 결국 1996년 11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물론 재판부도 그의 사연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 전향 의사, 그리고 조사 결과 '언론에 보도된 사실만 북측에 전달했기 때문에 국가기밀탐지에 대한 혐의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 후 2003년에 특별사면 및 복권을 거쳐 학계로 돌아왔다.

그가 옥중 서신으로 밝힌 외국어 습득은 다음과 같다.
  • 한국어 - 조선족 출신으로 배운 모국어.
  • 일본어 - 중국 용정에 있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며 감옥에 들어간 후에도 일본 서적을 읽음.
  • 중국어 -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중국 외교부에서 근무할 정도로 배움.
  • 러시아어 -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대학 교재 원서로 또 배우고, 북한 학계에서 러시아어 원전이 보편적이다 보니 연구를 위해 더 배움.
  • 영어 - 대학에서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집트 유학 중 공용어여서 계속 배움.
  • 아랍어 - 전공이었으며 10년간 현지에서 살았고 남한에서 단국대, 외대, 명지대 등에서 교수로서 가르치기도 함.
  • 독일어 - 이집트 카이로 대학 유학 시절 아랍어 고전을 연구하다 보니 필요해서 '어느 정도' 익힘.
  • 프랑스어 - 알제리에서 근무할 때 업무상 익힘.
  • 스페인어 - 모로코에 있을 때 호기심으로 익힘.
  • 이란어 - 이란 사람과 웬만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익힘.
  • 마인어 - 말레이시아 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익힘.
  • 필리핀어 - 필리핀 국적 취득을 위해 익힘.

3. 옥살이 이후

2008년에는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다만 전력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전만큼 방송에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다큐에는 꽤 나오는 편.


2004년에 촬영한 사진.수염을 깎으니 한국인 같다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가리켜 "분단시대의 불우한 천재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고은 시인은 자신의 시 '만인보'에서 '북으로 돌아갈 수 있어도/가지 않고 어차피 가도 숙청 크리밖에 없으니 남으신 게 여러모로 좋았을 것 그냥 대한민국 국민의 하나로/굽은 소나무같이 살아가는 '깐수' 정수일'이라고 언급했다. 황석영도 극찬. # 수감기간 동안의 편지도 명문에 옥중에서 한 학문적 연구까지 담겨있다(북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조선일보에서도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낼 정도) 수감 기간동안 아내분도 그를 버리지 않았고, 계속 옥바라지를 하셨다고 한다. 오오 #

지금은 '정수일'이란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와 아랍 연구 및 실크로드나 유라시아 관련 연구 책자를 쓰며 활동 중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그가 간첩이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대로 그가 진짜 간첩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북한에 전달한 문건도 아랍 역사 및 연구관련 정보를 많이 보냈기에 북한에서도 이딴 걸 뭐하러 보내느냐(...)며 짜증냈다는 이야기도 있다.[8]

사실 그는 무슨 군사 관련 지식이 아닌 전문 역사가였으니 군사 정보 취득 목적 간첩으로는 골라도 단단히 잘못 골랐던 것. 아랍 전문가 하나 남쪽에 퍼준 셈.[9] 아랍어에 능통하고 그 쪽 지리 및 여러 지식도 많아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아랍 및 이슬람 관련 전문가로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고 관련된 여러 가지 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예컨데 쿠란의 표기(코란, 쿠란, 꾸란)에 대해서도 한방에 논쟁을 종결시킨게 이 사람이다.[10] 그의 석방 후 저술을 보면 심하게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측면[11]이 종종 드러나기는 하나, 역사학자로는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명망높은 이슬람권 역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다.

특이한 이력 하나를 꼽자면 처용의 이슬람 도래인설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경주로 제시할 만큼 실크로드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고 의미있는 주장을 내놓는 학자.

참고로 이 사람 때문에 연세대학교보다 단국대학교가 실제로 크게 곤욕을 치뤘다. 정수일 교수가 체포 당시 단국대학교 초빙교수였다는 점 때문인 듯. 연세대야 어학당에 다녔기 때문이지만, 실질적인 학문 활동을 했던 곳은 단국대였기 때문에, 단국대학교가 치른 곤욕은 더했을 것이다.

교내에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 이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분이 종종 있다. 특히 동아시아사, 특히 이슬람의 역사를 다루면 거의 반드시 언급이 된다. 실례로 단국대 사학과[12] 교수들은 과 천안을 오가면서 강의하는 일이 많다. 특히 정수일 교수를 아는 분들은 대부분 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다. 만일 1984년 이후부터 단국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시거나 석/박사 과정을 밟으셨던 분이 아직도 학교에 계신다면 100%다.

2011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조카쪽 가족들과 50년만에 재회하기도 했으며 모교 방문등의 활동을 했다. 모교측에서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북경대에 진학한 두 명의 학생중 한 명[13]이라는 것을 알고 바로 정수일씨와 다른 학생의 사진을 확대해서 학교의 역사 자료관에 걸어뒀다고 한다. 가족들과 재회해서도 정수일씨의 조카들과 조카 손자들이 한국어를 잘 못하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

2013년에는 2013 경주-이스탄불 세계문화엑스포와 관련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1 관련기사2

4. 저서와 역서

옥중 이후의 저작은 200자 원고지로 3만장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현재 진행형.
《신라 서역 교류사》, 1994
《기초 아랍어》, 1995
《세계속의 동과 서》, 1995
《고대문명교류사》, 2001 - 옥중 저작
씰크로드학》, 2001 - 옥중저작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2002
《이슬람 문명》, 2002
《문명 교류사 연구》, 2002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2004 - 옥중 에세이
《한국 속의 세계 상·하》, 2005
《실크로드 문명기행》, 2006
《시대와 소통》, 2008, (공저)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한국문명교류연구소 학술총서 1)》, 2009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2010, (창비사), (역서) - 모두 옥중에서 번역한 것이다. 역시 위대한 작가는 옥에 가둬야 명작이 나온다
《이븐 바투타 여행기1, 2》, 2001[14]
《중국으로 가는 길》, 2002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2004
《실크로드 사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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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때 그는 저우언라이에 탄원해서 귀화한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갔던 조선족들은 대부분 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는데, 정수일은 저우언라이가 공식으로 발급한 허가증을 받고 귀화한 덕분에 이후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2] 좀 웃긴 부분이지만, 의외로 중요한 부분이다. 간첩활동을 확실히 하려면 상대의 정보를 많이 캐낼 수 있도록 깊이 침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외모와 인상이란 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 [3] 그의 아랍식 이름인 '깐수'는 동방과 이슬람 사이의 교역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고 한다.
  • [4] 당시 정수일은 북한 지도부의 선전과 달리 남한 학생 운동권은 '남한 혁명 운동'의 기수가 될 수 없으며, 재야운동 역시 활발하나 '혁명의 선봉'으로는 역량이 부족하다라고 평가했다. 80년대 북한 지도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으나, 임수경 등의 운동권 세력의 방북 이후 교차 검증이 끝난 90년대 이후에는 북한마저도 이들의 정보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정수일의 표현대로 이후의 NL 운동권 세력의 북한이 자신들을 높게 평가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연방제 통일 지지 행보는 말그대로 '짝사랑'이 되었다.
  • [5] 판결문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구형인 사형에서 비교적 작은 형량(12년형)으로 선고되었다. 사실 그가 보낸 잡지나 신문기사 따위는 정보분석자의 손을 거쳐 유용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본을 통해서나 혹은 제3국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획득성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북한입장에서는 있으나마나한 정보원이었다. 최근에는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기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정보원보다는 정보분석자가 더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 [6] 평상시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필리핀인이었는데, 체포된 후 취조부터 재판까지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체포했던 담당자들도 놀랐다고 한다(...).
  • [7] 이는 출옥 다음 해 '고대문명교류사'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 [8] 북한은 아랍 관련 인문학 분야 연구가 남한보다 뒤쳐진 상태라서 북한 학계가 연구에 참고하길 바라며 보냈다고 한다.
  • [9] 북한이 그로부터 얻어온 정보와 그가 남파되어 남한 학계에서 공유한 정보를 생각한다면 북한이 손해다.
  • [10] 이것이 얼마나 이 사람이 국내 아랍 학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인데, 자세한 내용은 쿠란 항목을 참고할 것. 국내 아랍 학계 안에서는 이 쿠란 표기법 때문에 매우 심한 논쟁이 일어났었다. 쿠란이 필수 아랍어 단어이기는 한데,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이 가장 중요한 발음들 - q, r, ء 이었기 때문.
  • [11] 사실 그는 1963년 북한국적 취득 당시 중국에서도 상당한 엘리트로 대접받는 처지였으면서도 민족적 자존심 하나 때문에 당시 직속상관으로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장관) 천이와 얼굴을 맞대고서 대판 싸운 끝에 북한 국적 회복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 [12] 천안캠퍼스에서는 역사학과로 부르고 2016년까지 존속될 예정이다. 현재 천안에 있는 학생들은 2012학년도 이전에 입학한 학생들이 있는 셈.
  • [13] 다른 한 사람은 북경대 철학부에 진학한 임원철로, 역시 문화대혁명 때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정수일과는 달리 불법 도강을 선택했기 때문에 후일 숙청당했다고 알려졌다.
  • [14] 프랑스어 번역이후 2번째의 아랍어 원전 번역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