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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last modified: 2015-03-13 21:53:18 Contributors

Contents

1. 前進
2. 前秦
2.1. 초기 팽창
2.2. 부견의 비상과 비수대전
2.3. 혼란과 쇠퇴
2.4. 부등의 최후 분전과 멸망
2.5. 역대 황제
3. 잡지 전진
4. 포켓몬스터전진(포켓몬스터)
5. 신화전진(신화)

1. 前進

앞으로 나아가다.

어쩌면 인류의 위대한 도약 들중 하나

2. 前秦


351~394

오호십육국시대에 티베트계 저족이 세운 국가. 국호는 (秦)이지만 동시대에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아 가장 먼저 나타난 이 나라를 전진(前秦)이라고 따로 구분한다.

2.1. 초기 팽창

황하 연안에서 할거 중이던 포홍(蒲洪)은 후조(後趙)와 염위(冉魏)의 대립으로 화북이 혼란해지자 삼진왕(三秦王)을 칭하고 성을 부(苻)로 고쳤다.[1] 부홍은 서쪽으로 진격해 관중을 점거하려 했지만,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한다.

부홍의 뒤를 이은 아들 부건(苻建)은 삼진왕의 칭호를 버리고 동진(東晉)의 관작을 따르면서 관중으로 진격했다. 장안 지역에서 할거하던 두홍(杜洪)은 방심하다가 부건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부건은 관중에서 하남 일대에 걸쳐서 강력한 세력을 세웠다. 그리고 351년 부건은 동진의 관작을 버리고 천왕(天王)에 올라 국호를 대진(大秦)으로 정하였으며, 이것이 전진(前秦)이라 불리는 왕조의 시작이다. 그 뒤로 352년에 부건은 마침내 황제에 오른다.

그 뒤 부건은 두홍의 잔당을 소탕하고, 관중으로 쳐들어온 동진의 양주자사 사마훈을 물리치면서 관중을 평정해 나갔다. 그 뒤 동진의 북벌군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지만, 승상 부웅(苻雄)이 잘 대처한 덕에 가까스로 살아남았다.[2]

2.2. 부견의 비상과 비수대전

그 뒤 355년 6월, 관중을 통일한 지 1년도 채 안 지나 부건은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원래 태자였던 부장(苻萇)은 환온의 1차 북벌 때 다쳐 354년에 죽어서 새로 세운 태자인 부생(苻生)이 뒤를 잇는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애꾸였던 데다가 사이코패스 기질이 있었던 부생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부웅의 뒤를 이었던 부견(苻堅)도 목숨이 위험해 반정을 계획했다. (王猛)이라는 명재상을 얻자 그는 357년, 반정을 일으켜 부생을 폐위・살해하고 전진의 천왕(天王)에 올랐다.

그 뒤 부견은 내치를 다지고 개혁을 실시하면서 국력을 키워 366년부터 서서히 외부로의 확장을 시작하면서 동진의 형주(荊州)를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농서(隴西)를 정벌한다. 하지만 367년 전진의 왕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뺀 관중 전체가 조각조각으로 나뉠 만큼 전진은 위험했다. 그러나 당시 전연(前燕)의 정권을 잡던 용평(慕容評)이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368년 한 해를 모두 써 부견은 반란 평정에 성공한다.

369년에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연을 공격하자 전연에서 구원군을 청하며 낙양 근교 뢰관(虎牢關) 서쪽의 땅을 할양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자 왕맹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연에 군사를 보내주어 환온의 북벌군을 물리치는 것을 도와준다. 그 뒤 전연의 왕족 모용수(慕容垂)가 망명해오자 그를 받아들이고 호뢰관 서쪽 땅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369년 말에 전연을 공격했으며 370년에는 전연을 멸망시켰다. 373년에 동진의 사천(四川) 지방을 정복하고, 승상 왕맹이 죽은 뒤인 376년에는 전량(前凉)과 대(代)를 멸망시켜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 때만 해도 통일 플래그가 선 듯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나왔다. 부견은 (왕맹이 반대하던 원정인) 동진까지 멸망시켜 천하통일을 시키려 했지만 비수대전(383)에 져서 그 꿈은 좌절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고. 하지만 이것이 순조롭게 천하 통일이나, 이른 남북조시대로 바뀔 만했던 중국사를 다시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 넣는다.

2.3. 혼란과 쇠퇴

그 뒤 농서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3] 전진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며 끝내 부견은 모용홍, 모용충의 서연에게 공격을 받아 장안을 버리고 도주하였다가 인근에서 강족 출신 후진(後秦)의 요장(姚萇)에게 사로잡혀 선양을 하라는 그의 제안에도 거부하고 그를 모욕하다가 죽음을 겪었다.[4]

그 뒤 진양에 이르러 부견의 죽음을 안 부견의 서자이자 장자인 부비(苻丕)가 385년 8월 말, 에서 황제에 올랐다. 부비는 피폐한 세력을 이끌고 전진을 부흥시키려 하지만 끝내 상황이 나빠져 진양에서 출진하여 평양(平陽)으로 진출한다. 하지만 거기서 모용영(慕容永)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고, 동진의 낙양을 습격하는 무모한 선택을 하며 끝내 동진의 군사에게 죽자 그의 아들 부녕은 건강에 살던 부견의 태자 부굉에게 보내진다.

2.4. 부등의 최후 분전과 멸망

그 뒤, 위평이 이끄는 부한(枹罕)의 저족들의 세력을 얻은 부등(苻登)이 부비의 사망소식을 듣고 386년 11월, 농동(隴東)에서 황제에 올랐다. 부등은 부견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후진의 요장과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를 펼친다. 초반에는 후진이 많이 졌는데, 후진의 황제 요장은 부견의 귀신이 부등을 돕는다라 생각하고 생전에 시신을 훼손까지 했던 부견의 형상을 만들어서 그 형상에 자신의 잘못을 비는 코미디같은 짓을 한다(...) 당연히 도움이 없었고 나중에 그 상의 목을 베 부등한테 보냈다. 병주고 약주는 고인드립

하지만 이 일이 있은 뒤 요장의 군에게 부등은 대패해 뼈아픈 타격을 받는다. 설마 저주가 통했나 그 뒤의 상황을 보면 전진의 세력이 투항했다가 전진이 쳐들어오면 그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키는 일 등을 빼면 전진에 비해 후진의 세력은 안정적인 편이었고, 그 상황에서도 전쟁을 잇던 전진의 세력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394년 봄, 부견이 나오는 악몽 등을 꾸다가 나이가 든 요장이 세상을 뜨자 부등은 그의 뒤를 이은 요흥을 얕보고 대대적인 준비를 해 후진과 싸우지만 요흥의 침착한 대응으로 대패했다. 그 뒤 부등은 산중에 숨어서도 재기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그 사이 자신의 막하에만 이름을 올린 채 거의 도와주지도 않던 금성(金城)의 걸복건귀에게 아들을 인질로, 누이동생을 왕후로 보내 1만의 기병을 받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394년 7월에 요흥의 대군이 걸복건귀의 원병을 맞으러 산에서 내려온 부등을, 원군이 오기도 전에 사로잡아 처형시켰다.

그 뒤로 부등의 태자 부숭이 황중(湟中)에서 황제에 오르지만 오히려 걸복건귀의 군사에게 쫓겨나 땅을 빼앗긴다. 그래서 부숭은 구지의 양정에게 도망가 그의 밑에서 전진의 부흥을 꿈꾸지만 끝내 구지의 양정이 걸복건귀에게 지면서 그도 같이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394년 전진은 멸망했다.

2.5.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태조(太祖) 무혜황제(武惠皇帝) [5] 부홍(苻洪) - 350 -
1대 고조(高祖) 경명황제(景明皇帝) 부건(苻健) 황시(皇始) 351 ~ 355 350 ~ 355 -
2대 - 여왕(厲王) 부생(苻生) 수광(壽光)355 ~ 357 355 ~ 357 -
3대 세조(世祖) 선소황제(宣昭皇帝) 부견(苻堅) 영흥(永興) 357 ~ 359
감로(甘露) 359 ~ 364
건원(建元) 365 ~ 385
357 ~ 385 -
4대 - 애평황제(哀平皇帝) 부비(苻丕) 태안(太安) 385 ~ 386 385 ~ 386 -
5대 태종(太宗) 고황제(高皇帝) 부등(苻登) 태초(太初) 386 ~ 394 386 ~ 394 -
6대 - - 부숭(苻崇) 연초(延初) 394 394 -

3. 잡지 전진

1930년대 독일의 좌파 계열 시사잡지. 프란츠 폰 파펜의 정치적 공작으로 히틀러를 수상으로 하는 우파연정이 출범했을 때, 유일하게 히틀러와 나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계속해서 반히틀러, 반나치 노선을 지켰지만 괴벨스가 강제 폐간시켰다.

5. 신화전진(신화)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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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도참설에 따른 것으로 당시 세간에는 "草付應王"이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포홍의 손자였던 견(堅)의 등에도 草付라는 글씨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포홍은 "草(艸)"와 "付"를 모아서 "苻"로 성을 삼았다.
  • [2] 그러나 관중 평정 뒤 한 논공행상에서 부웅은 이름을 못 올렸는데 그가 관중 평정 2개월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듣자 부건은 피를 토하며 곡을 했다고 한다. "하늘이 내 사해 평정을 안 바란다는 말인가? 어찌하여 나의 원재(元才)를 이렇게 빨리 빼앗아 가는가?"라는 부건의 말에서 명재상 부웅을 잃은 부건의 슬픔이 잘 드러난다.
  • [3] 사실 이 반란의 원인은 부견 그 자신의 정책에 있었다. 이상주의자였던 부견은 멸망시킨 나라의 국민들을 수도로 이주시키고 오히려 저족을 지방으로 내보냈는데,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지자 이 정책은 전진을 발목잡는 원인이었다.
  • [4] 부견은 이민족이던 요장과 모용수 등을 중용하고 우대했으며 진심으로 포용했다. 그러나 요장은 그가 불리한 틈을 타서 그를 사로잡아 죽이고 말았다. 나중에 동진의 권신 유유가 요장의 손자 요홍을 수도 건강으로 압송해 요씨 일족들과 함께 참수시켜 후진은 멸망했는데 일종의 인과응보, 업보였다. 반면 모용수는 일종의 애증관계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서인지 그가 세운 후연은 상대적으로 번성했다.
  • [5] 경명제 추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