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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조선인

last modified: 2016-06-25 12:51:51 Contributors

각 명칭
한국어 재일 한국-조선인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
재일교포
재일동포
일본어 在日韓国・朝鮮人
在日韓国人
在日朝鮮人
在日コリアン[1]

Contents

1. 재일 조선인이란?
2. 재일동포의 역사
3. 재일 동포의 규모
4.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
5. 관련용어/항목
5.1. 양대 단체
5.2. 관련 항목
5.3. 유명한 인물 & 리그베다 위키에 등록된 인물
5.3.1. 정치인
5.3.2. 기업인
5.3.3. 작가
5.3.4. 학자
5.3.5. 배우 & 성우 & 영화인
5.3.6. 음악가 & 가수
5.3.7. 만화가
5.3.8. 스포츠 선수
5.3.9. 범죄자 & 야쿠자
5.3.10. 기타
5.4. 재일교포에 대해서 다룬 미디어


1. 재일 조선인이란?

대한 독립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자손. 재일동포라고도 한다. 줄여서 재일(자이니치)이 라고도 부른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일본 거주자는 재일 한국인이라고 부르며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국민이다.

법적으로 교포의 기준은 해당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 나라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주해서 10여년 넘게 체류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면 한국에서는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해외교포로 등록되게 되어있다. 단,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내 선거권이 없다. 영주권자도 엄연한 외국인이므로 '시민권'의 일부인 참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참정권을 갖고 싶으면 귀화하거나, 정 일본인이 되기 싫으면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현재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 혈통, 즉 한국계 일본인의 숫자는 326,671명이다. 재일 한국인 중 영주권자는 461,627명이다. 이들은 한국인으로 한국 국적을 보유하거나 조선적(조선국적. 조선은 현존하지않기에 사실상 무국적)이다. 일반 체류자와 유학생 등을 합치면 일본 내의 재외국민은 578,135 명 정도이고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인이거나 한국계 혈통은 90만명 수준이다. 1980년대말부터 귀화를 해 1990년대엔 연 1만명 이상이 귀화를 했으나 현재는 감소세다.

재일 외국인 중에 가장 수가 많다고 알려졌지만 재일 중국인이 더 많다. 하지만 귀화자까지 합치면 한국계가 더 많긴 하다. 재일 외국인 참고.

2. 재일동포의 역사[2]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에 건너간 패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최초의 재일동포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왜구들의 해적질, 특히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들도 재일동포로 볼 수 있다. 이 당시 잡혀간 학자와 도공들, 특히 도공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재산으로 관리되었으며 "조선인"의 "자기"를 유지관리하는 차원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도자기를 굽던지 귀화해서 바닥부터 시작하던지 선택지를 강요받았는데 메이지 유신으로 인해 막부의 비호가 사라지면서 "조선인"적을 대부분 포기하고 일본인으로 귀화했으나 그대로 도공으로 남아 아직까지 도자기를 굽고 있는 경우도 있다. 본격적인 재일동포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간 강제노동인력이 해당한다. (당시 일본의 학정 때문에) 먹고 살길이 막막해지기도 하고, 중국과 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일꾼들을 징발해 갔었다. 물론 어느 정도 부유한 지주 집안 자식들 혹은 머리가 비상한 젊은이들은 유학 등의 목적으로 일본에 체류하기도 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자경단)과 군경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여 상당수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3][4]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명으로 추정한다. 1945년 종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갱스 오브 뉴욕아일랜드 민자들도 아니고..

1929년에 미국 증권시장의 증시가격이 폭락하면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조선의 경기가 더욱 나빠지자 일본에 취업을 위해 이주하는 사람은 한층 더 증가하여, 1930년대 전반에는 절정에 달했다. 그러다 중일전쟁제2차 세계대전 등이 터지면서, 전쟁 말기 전시상황에서 구 일본군의 전방전선 및 일본 영토내로 강제 징용으로 뽑혀나가는 조선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5] [6][7][8] 건너오게 문은 열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때 원자폭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 [9]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정부나 한국정부나 양측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해방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 중 상당수는 한반도로 돌아갔지만, 생계나 정치적인 문제,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상황때문에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않은 숫자도 많았고 이들이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북한을 지지하거나 남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도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10],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는건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11]

그 와중에, 일본 적십자회는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배에 태워 북으로 돌려보낸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 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와중에 북한은 자기들의 나라를 모두가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끌어 모았다. 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 게다가 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12]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13],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80년 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14][15] 안습.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조총련빨갱이 공작원, 민단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16] 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파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알게되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세계를 방황하며 돌다 옴 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사하라 요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근래 들어서서 일본의 단일민족 사상이 조금씩 사라져 가면서 면서 아시아계 노동자나 특히 화교에 대한 묘사가 미디어에 가끔씩 등장하는 데 반해 '재일 조선인'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언급을 회피하는 성향이 여전한 편이다.(단 일반 문학에서는 원래 부터 꽤 보인다.)[17]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지금 일본인들 중에 할아버지가 조선 사람이었다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 아내를 들인 케이스)

3. 재일 동포의 규모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쳐 서서히 늘어나 관동대지진 당시에 8만 명 수준이었다. 1950년대부터 신규 유입이 줄어들고 자연증가하는 만큼 귀화자가 생기면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일본 인구중 재일교포는 60만명이다. 그리고 넷우익들은 이 60만이 1억 2천만 인구의 일본을 정복할 것 처럼 떠들어댄다. 겨우 60만에 지배당할 정도로 국력이 약해? 그중 상당수가 오사카 및 관서지방에 몰려 살고있다. 특히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츠루하시 시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18]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사카는 2ch 관서외 지방의 혐한초딩으로부터 오사카민국(대판민국, 大阪民國, 공교롭게도 대한민국과 한자가 비슷하다. 이 점에서 착안하여 아예 大阪을 음독으로 읽어서 '다이한민코쿠'(ダイハンミンコク)라고 읽는다)이라는 욕을 듣기 일쑤다. 그렇다고 오사카의 한국인들이 순조롭게 정착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도 해방 이후 일본사회에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차별로 인해서 불안하기는 별반 다를게 없었다.

재일동포도 3~4세대로 가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가 된다. 이른바 "통명"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 한국어에 서툴고 일본어에 유창하다. 혹은 이 두 언어가 피진화된 '재일어'로 통칭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조총련이 영하는 민족학교 등의 교육수단을 통해서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교육받았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관동쪽의 코리아타운으로 도쿄의 신주쿠구 오쿠보로 대표되는 동신주쿠 일대가 있다. 해방 이후 비교적 현대 일본에서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너오는 한국인들은 보통 재일교포 사회에서 뉴커머로 불리고 있다.[19] 재일교포에서는 이러한 뉴커머를 "한국인"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재일들도 있다. 일본에 뿌리를 내려 일본사회에 적응하려는 재일과 일본에 잠깐 있었다가 가는 한국인의 인식차이에서 오는 한국인의 경솔한 행동이 일본내에서의 재일 조선인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고 한다.

또한, 한국에서 온 사람(아주 먼 친척)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한국에 가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사칭하는 인간에게 유산을 빼았기거나, 한국에 가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로서 재일교포가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세워진 한국학교에, 해외학교에서 3년을 지내면 재외교포로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한국"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이 몰려와 "한국인 교사"와 "한국 교과서"로 "한국말"만 공부시키게 만들어 버려서 정작 재일교포가 제대로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참고로 일본에 있는 파칭코 점포의 8할은 한국계가 운영하고 있다. 그 8할 중에 5할이 북한계, 3할이 한국계. 때문에 북한의 미사일 실험이 한창일 당시, 일본 돈으로 미사일을 만든다며 일본내에서 파칭코에 대한 비난여론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했다.[20] 현재는 한국에선 파칭코가 금지되어 있는데 일본에서 한국인이 파칭코를 운영해도 되냐는 식으로 까인다.[21]

4.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의 통혼


보라색은 한국과 일본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혼, 연두색은 재일 조선인 아내와 일본인 남편, 붉은색은 일본인 아내와 재일 조선인 남편, 파랑색한국인과의 결혼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들이 30만명 이상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저출산 등으로 젊은 층의 인구가 줄면서 결혼 건수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어쨌든 통혼으로 한국과 일본의 혈통이 동시에 흐르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여담으로 여자의 혼인 비중이 남자의 혼인 비중보다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생애 미혼율[22]이 남성이 16%, 여성이 8%인 점을 감안하면 재일 한국인도 일본인의 인구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셈[23]이다. 일본 전체로는 여초지만 청장년층에선 남초라 그렇기도 하고. 관련기사

5. 관련용어/항목

5.1. 양대 단체

  •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약칭 민단)
  •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약칭 조총련)

5.3. 유명한 인물 & 리그베다 위키에 등록된 인물

이하 목록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계 인물들도 있으니 주의.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한 사람은 재일 한국인이 아니라 그냥 한국계/조선계 일본인이다.

5.3.1. 정치인

  • 아라이 쇼케이(한국명 : 박경재) - 정치인. 1998년 주식 불법거래 혐의로 체포되기 전에 자살했다.

5.3.2. 기업인

5.3.3. 작가

  • 가네시로 가즈키 - 소설가. 단 국적은 일본으로 귀화한 상태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한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 미리 - 소설가. 1997년 쿠타가와상 수상.

5.3.4. 학자

  • 덕상
  • 강상중 - 대학교수, 국제정치학자. 한국 국적자 중 최초로 도쿄대 교수가 되었고 정년을 남겨두고 2013년 퇴임, 세이가쿠인대학으로 옮긴 후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대학 시절까지 '나가노 테츠오'란 일본명을 쓰다가 1972년 한국에 온 후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 전길남
  • 이진희 - 역사학자. 광개토왕릉비가 변조됐다는 주장을 함.

5.3.5. 배우 & 성우 & 영화인

  • 김향리 - 성우.
  • 공대유 - 배우.
  • 박로미 - 성우.
  • 아란 케이 - 다카라즈카 남탑 출신의 뮤지컬 배우.
  • 야스다 나루미(한국명 : 정성미) - 배우. 일본의 유명 개그맨 콤비 톤네루즈의 키나시 노리타케의 부인.
  • 와다 아키코(한국명 : 김복자)[26] - 가수. 일본 연예계의 대모. 한국로 치면 김수미, 고두심씨 정도? 천하의 사와지리 에리카에게도 한소리한 여자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이하라 츠요시 - 배우.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이상일 - 69, 라걸즈.악인,용서받지 못한 자 등 대형 작품을 찍은 영화 감독.
  • 최양일 - 영화 감독.
  • 마츠다 유사쿠 (한국명 : 김우작) - 배우. 형사 드라마 양에게 외쳐라에서 전설적인 명장면을 남겼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라이 히로후미 - 배우.
  • 칸 하나에(한국명 : 한영혜) - 배우. 아버지는 서울 출신 한국인이며, 어머니는 일본인. 일본식으로 이름을 읽기에 귀화했을 것 같지만 본인의 국적은 한국이라고 한다.
  • 쿄 노부오(한국명 : 강창웅) - 배우. 인풍전대 허리켄쟈에서 고우라이쟈 중 한명인 쿠와가라이쟈 카스미 잇슈 역으로 활약했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타마야마 테츠지(한국명 : 김철) - 배우. 백수전대 가오렌쟈에서 6번째 전사인 가오 실버 오오가미 츠쿠마로 역으로 활약했다.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하쿠류(한국명 : 전정일) - 배우.
  • 홍영희 - 성우
  • 이가와 하루카 (한국명 : 조수혜) # 재일 한국인 3세

5.3.6. 음악가 & 가수

  • 권리세 (1991~2014) : 쿠시마 현 출신. 재일교포 4세 레이디스 코드의 멤버. 자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조하자.
  • 김홍재 - 지휘자.
  • 나카무라 유리 (한국명 성우리) - 2의 배우.아버지가 재일 3세, 어머니는 한국인.
  • 미소라 히바리 - 엔카계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 단 일본에서는 재일한국인 설은 부정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소닌 (한국명 : 성선임) - 가수.
  • (걸그룹 S.E.S의 멤버, 한국명 : 유수영, 일본명 : 쿠니미츠 슈)
  • 아이코닉 (걸그룹 SUGAR의 멤버, 한국명 : 아유미, 일본명 : 이토 아유미) - 가수.
  • 양방언 - 음악가.
  • 최성일 - 바이올리니스트. 주로 사운드 호라이즌에 바이올린 세션으로 참가하여 한국에선 이를 통해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바이올린 솔로 앨범[27]을 내기도 하고 작곡활동도 하는듯. 사운드 호라이즌의 첫 내한공연때 아리랑을 연주하고 약간은 어눌한 한국어를 보여주기도 했다.
  • 토와 테이(한국명 : 정동화) - 음악가.
  • JONTE(한국명 : 시종태) - EXILE 신멤버 오디션의 결승진출자, 후에 극단 에그자일 소속으로 활동 하였으며, 현재는 에이벡스 소속으로 가수로 활발히 활동중이다.
  • VERBAL(한국명 : 유영기) - 가수.
  • Crystal Kay - 아버지는 미국인,어머니가 재일교포 3세. 가수.

5.3.7. 만화가

5.3.8. 스포츠 선수

  • 가네다 마사야스(한국명 : 김정태) - 야구선수. 야구감독.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병수(일본명 : 오하라 헤이슈) - 야구선수.
  • 고지행(일본명 : 다카야마 토모유키) - 야구선수.
  • 김기태(일본명 : 가네시로 모토야스) - 야구선수.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김무종(일본명 : 다키무라 시게미) - 야구선수.
  • 김성근(일본명 : 가네바야시 세이콘) - 야구감독, 귀화하여 국적은 대한민국.
  • 김실(일본명 : 다나카 미노루) - 야구선수.
  • 김영덕 - 야구감독.
  • 김용강(일본명 : 아마노 유고) - 야구선수. 프로듀서. 탤런트
  • 김일융(일본명 : 니우라 히사오)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김정행(일본명 : 가나이 마사유키) - 야구선수.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니시오카 츠요시 - 야구선수.할아버지가 한국인인 한국계 일본인. 김별명의 통수
  • 리 타다나리(한국명 : 이충성) - 축구선수. 귀화하여 국적은 일본.
  • 마쓰이 가즈오 - 야구선수. 할아버지가 2008년 화재로 사망했다는 보도에서 할아버지의 이름이 한국이름으로 표기되면서 한국계설이 사실로 밝혀졌다. 국적은 일본.
  • 마고 - 일본명 : 하야시 켄료, 한국명 : 임현형. 일본의 프로게이머. 얼굴 생김새 때문에 계속 한국인이라고 의심을 받아왔음에도 계속해서 부정하다가, 2012년에 비자 문제로 트러블이 생겨 한국적임을 고백하였다. 세계최대의 격투게임 대회인 EVO에서는 줄곧 일본명인 HAYASHI KENRYO로 엔트리 했으나, 국적이 밝혀진 이후에 개최된 2013년의 EVO 2013에서는 한국명인 Hyeonhyeong Im 으로 엔트리하였다. 이는 국적이 밝혀지자 손바닥을 뒤집고 마고를 까대기 시작한 넷 우익 유저들에 대한 반발로 사료된다.
  • 모리모토 히초리(한국명 : 이희철)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 박강조 - 축구선수. 한국 최초의 재일교포 국가대표 선수.
  • 송재박(일본명 : 요시모토 히로시)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 송일수(일본명 : 이시야마 카즈히데)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국적은 일본.
  • 아라이 타카히로(한국명 : 박귀홍)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 역도산(한국명 : 김신락) - 프로레슬링 선수.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야구선수.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태로, 출신(한국인이냐, 북한인이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밝혀진 사실 역시 없다. 일단 현재 국적은 일본
  • 이영구(일본명 : 기야마 에이큐) - 야구선수.
  • 이충남(일본명 : 야마모토 타다오) - 야구감독.
  • 장명부(일본명 : 후쿠시 히로아키) - 야구선수. 결혼하면서 일본 국적 취득.
  • 장훈(일본명 : 하리모토 이사오)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 정대세 - 축구선수. 아버지가 한국인이나, 어머니가 재일 조선인. 아버지 국적을 이어 본인의 실제 국적은 한국이나 실제 거주지는 일본으로 되어 있고 선수 등록은 북한으로 되어있는 등 복잡한 내력을 갖고 있다.
  • 주동식(일본명 : 우다 토쇼쿠) - 야구선수. 야구해설가. 야구지도자.
  • 최일언(일본명 : 야마모토 가즈히코) - 야구선수. 야구지도자.
  • 추성훈(일본명 : 아키야마 요시히로) - 전 유도선수. 이종격투기 선수. 국적은 일본.
  •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 - 야구선수. 야구감독. 국적은 일본.
  • 카네모토 토모아키(한국명 : 김박성)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 긴조 다쓰히코(한국명 : 김용언) - 야구선수. 국적은 일본. 아버지는 재일 한국인 2세인 김황세.
  • 홍문종(일본명 : 도쿠야마 후미무네) - 야구선수.
  • 창수(일본명 : 도쿠야마 마사모리, 徳山昌守) : 전 복싱 선수, 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원래 조선적이었으나 2007년 한국 국적을 취득. 현재 일본 거주.
  • 히야마 신지로(한국명 : 황진환) - 야구선수.
  • 슈 리키(한국명 : 곽강웅) - 프로레슬러. '혁명전사' 라는 링네임으로 유명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스트롱스타일을 대표하는 선수이자 명실상부 소화시대 신일본의 에이스 중 한명.
  • 사이 료지(한국명 : 최영이) - 프로레슬러. 재일한국인 3세. 신일본 프로레슬링ZERO-ONE을 거쳤으며 ZERO-ONE MAX 에서는 챔피언을 하기도 했다. 형인 사이 료(일본명 : 최영)는 공수가이자 종합격투기 선수.
  • 마에다 아키라 - 소화의 격투왕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러.
  • 호시노 칸타로 - 올드 프로레슬러. 한국 프로레슬링 올드팬들에게는 한국 이름인 "여건부" 로 더 유명하다.
  • 가네무라 킨타로 - 한국명 이형호. FMW, W☆ING, HUSTLE 등을 거친 프로레슬러. 구 FMW 시절에는 믹 폴리나 오니타 아츠시 등과 살벌한 데스매치를 치르기도 했고, 엔터테인먼트 노선 전환 후의 FMW나 HUSTLE 에서는 코믹한 경기를 자주 하는 편.
  • 다이너마이트 칸사이 - 한국명 이강자. 여자 프로레슬러.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계에서 손꼽히는 선수 중 하나이자 스플래시 마운틴(크루시픽스 파워밤)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 가네모토 고지 - 한국명 김일우.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프로레슬러.

5.3.9. 범죄자 & 야쿠자

5.3.10. 기타

  • 김태현 - 작사
  • 박리혜(일본명 : 가쓰다 리에) - 재일 한국인 3세, 남편이 박찬호. 본직은 요리 연구가, 미국의 유명한 요리학교인 CIA[28] 출신이다. 케이블 올리브 채널에서 홈메이트쿡에 MC로 출연한 적이 있다.
  • 조치훈 - 바둑 기사.
  • 진창현 - 세계에서 5명뿐인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29] 칭호를 받은 바이올린 장인 중 한명으로, 그가 제작한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아 '동양의 스트라디바리'라 불렸다.
  • 최영의(최배달) - 극진가라데의 창시자이자 전설적인 무도가.
  • 곽인식-화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개최되기도 했다.

5.4. 재일교포에 대해서 다룬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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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재일 코리안. 남북관계를 고려하여 한국, 조선 대신 Korean을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함으로써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할 때 사용한다.
  • [2] 재일 1세들의 증언을 모아 재일 3세 사진작가가 쓴 책인 '재일 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을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 [3] 요시노 사쿠조의 <<압박과 학살>>에는 2534명, 김승학의 <<한국독립연구서>>에는 6066명
  • [4] 관동대학살은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뿐만 아닌 류쿠(오키나와)인,부라쿠민, 쓰시마인,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 심지어 좌파운동가/아나키스트 일본인(대표적으로 오오스기 사카에)들도 희생당했다.
  • [5] 처음에는 우선대상직업군(탄광,군수공장등)을 제외한 취업지를 제한하는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건너갔던 사람들의 편지 소식으로 인해 취업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자발적으로 돈벌러 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물론 일손은 엄청나게 필요하고 할당량은 채워야되고 결국.....
  • [6] 의외인것이 당시 징용자들의 가족의 대상으로 고용사무소에서 배급품 우선 지급권등의 혜택을 명시해놓은 법안은 전쟁도중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 고용사무소는 일본에서는 각 현마다 적어도 2~3개 많으면 5~6군데 있던것을 조선팔도 전체에 딸랑두곳 ....... 당연히 가족에 대한 지원따위는 아웃오브 안중이 되었다
  • [7] 당시 강제징용의 형태는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채용담당관(!)이 조선에 건너와 인력을 데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위에서 상술했듯이 고용사무소가 잘 설치되어서 인력의 금방금방 채웠졌지만 조선에서는 고용사무소를 통한 인력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채용담당관들이 전국각지를 돌면서 채용하게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조선 지리, 사정을 알리가 없으니 지방공무원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공무원들이 처음에는 구슬리고 위에나온 택도없는 법률로 추천하였지만 나중에는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수법으로......
  • [8] 참고로 제주도 사람들은 3.1운동이나 관동대지진으로 취직입국이 제한되어있던 일본을 거의 자유로이 오고갔다. 얼마나 자유로이 오고 갔으면 이런 말이 전해졌다. 긴자의 미츠코시 백화점 스카프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 걸리는것은 한달뒤, 제주도 소녀 목에 걸리는것은 1주일뒤
  • [9] 이에 대해서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후반부에 제법 묘사되어있다. 홋카이도 답게 아이누 촌락도 나온다.
  • [10] 제주 4.3 사건에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 지역)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애당초 일제식민지 당시 제주 출신 중 1/4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살아서 거기 정착했거나 혹은 제주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제주에 4. 3 사건이 발생하여 대규모 민중탄압이 있자 그것을 피해 그나마 연고가 있는 일본으로 피난한 것이다.
  • [11] 민통등의 단체가 줄기차게 동포사회의 통합을 추진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지원하는 등 여러가지로 노력했으나 한쪽에서는 이라고 까이고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까였다(...) 단, 한민통 자체는 한국의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단체.
  • [12] 한 마디로 국제협회가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수 많은 민간인들을 속여 악랄한 북한에 보냈다는 거다.
  • [13] 북한에 간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었다. 편지로 가족들간의 안위를 물을 수 있었는데 심한 검열 속에서도 북한을 실상을 알리는 편지들이 일본에 전해졌다. 북송된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것도 90년대에 말이다.
  • [14] 당시 북한행 배에 몸을 실은 교포들 대부분은 북한을 엄청나게 선진화된 사회,복지국가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70년대 중반까지는 소련 지원에 의해 남한보다 북한 경제사정이 더 나은편이긴 했지만, 이후 상황은 역전되고. 거기에 남한사회가 민주화 되는데, 북한은 막장으로 치달으면서,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15] 강철환의 수필 <수용소의 노래>에서 작가의 조부모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으로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자수성가한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 시기 북한행 배를 타고 평양에서 정착하다 어느 날 작가의 어머니의 밀고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이 때 당시 많은 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이 이러한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 [16] 박정희와 전두환 정부는 일본 내에서 조총련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민단을 지원했다. 하지만 조총련처럼 학교를 세운다거나 하는 식의 지원이 아니고 그냥 민단이라는 단체에만 지원했다. 재일동포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북한세력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만을 가진 이 지원은 남북한을 각각 지지하는 재일동포사회에 반목만 심어주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그 지원이라는게 평범한 재일동포에게까지 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특히 올드커머사이에서 한국정부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었다. 사실 북한이 조총련계긴 하지만 재일동포에 들인 공에 비하면 한국정부는 재일동포에게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었다.
  • [17] 그래도 조금씩 나오고는 있다 서브컬쳐에는 아후로디같은 캐릭터가 있다.
  • [18] 2011년 9월 8일에 방영된 KBS 특집 '쯔루하시 사람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
  • [19] 참고로 이러한 뉴커머들이 모여서 세운 단체가 있는데 이것이 재일본한국인연합회다.
  • [20] 실제로 북한계 점포들은 본국으로 꾸준히 자금지원을 하고 있다는 듯.
  • [21] 한국인이 아니라 "한국계"라면 문제가 없지만.
  • [22] 50세까지 결혼을 하지 않음.
  • [23] 이는 다른 집단이 같은 국가 내에서 결혼에 대한 관점이 크지 않는 이상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내의 화교도 한국인들의 인구 현상을 따라간다.
  • [24] 손정의가 귀화한 1990년 당시의 일본에서는 일본국적을 취득할 경우 일본식 성으로 변경하거나 일본식 통명을 그대로 쓰는 게 일반적인데 쓰거나특이하게도 성이 한국식인 손(孫)을 유지한 채로 귀화했다. 때문에 귀화 신청 당시 '일본식 성이 아니다'라며 거절당했으나, 결혼시 배우자의 성으로 변경할 수 있는 제도를 이용하여 일본인 아내의 성을 손씨로 바꾼 후 아내의 주민등록을 들고 가서 '일본인 손씨가 여기 있으니까 손씨도 일본식 성이다'라고 주장하여 성을 유지한 채로 귀화에 성공했다.
  • [25] 일본 제일의 파칭코 그룹(물론 파칭코 외에도 다른 사업을 하긴 하지만 매출이 제일 높은 건 파칭코 쪽인 듯.). 그룹 회장이 재일교포다 보니 자사 로고에 영어, 일본어에 한글도 병기한다. 덧붙여 마루한이란 이름은 파칭코의 구슬(丸, 마루)과 한창우의 회장의 성에서 따와 지어졌다.
  • [26] 김현자라고 알려져있지만 귀화전에는 김복자(金福子)라는 이름이었으며 일본으로 귀화할 때 변경한 와다 아키코(和田 現子)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화전 현자'이며 '김현자'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은 없다. 최영의가 실제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
  • [27] 한국에도 정식 발매됐다.
  • [28] 절대로 미국 중앙 정보국이 아니다.
  • [29] 다른 이의 감독 없이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다는 뜻.
  • [30] 홋카이도 조선학교 고등부 3학년들의 생활을 감독이 직접 함께 생활하면서 담은 다큐멘터리 작품. 국내에서는 2007년 초 개봉.
  • [31] 메인 캐릭터중 한명인 곽영사가 재일교포
  • [32] 2014년 작품으로 오사카 조선학교 고등부의 럭비팀이 전국 출전 중에 겪는 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