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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야구선수)

last modified: 2015-03-31 13:15:19 Contributors

도에이 플라이어즈 시절.
이거슨 리즈시절! 잘생겼다. 그리고 싸움 잘할 것 같다.

2010년 8월 31일 잠실, LG 트윈스넥센 히어로즈 시구자로 나왔다.

JangHoon_TokyoDome.jpg
[JPG image (Unknown)]
도쿄돔 지하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모습

이름 장훈 (張本 勳 하리모토 이사오)
출생일 1940년 6월 19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히로시마 현 미나미 구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데뷔~은퇴 1959~1981
선수경력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1959~1975)
요미우리 자이언츠(1976~1979)
롯데 오리온즈(1980~1981)
등번호 10번

1959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신인왕
스기우라 다다시
(난카이 호크스)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없음

1962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장훈
(도에이 플라이어스)
노무라 카츠야
(난카이 호크스)

장훈(張勳). 일본명은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애칭은 '하리상(張さん)' 또는 '하리(張, ハリー)' 일본 히로시마현 출생, 2남 2녀중 차남.

한번 떠났으면 뒤를 돌아보지 마라. 기웃거리지도 마라. 차라리 사내라면 신발끈 질끈 묶고 다시 뛰어라.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는데 주력해라.
ㅡ 장훈 태균아 보고 있나

국적은 종이 한 장으로 바꿀 수 있지만, 민족은 바꿀 수 없어요.

Contents

1. 경력
2. 일대기
2.1. 유년기
2.2. 학창시절
3. 선수시절
3.1. 플라이어즈-파이터스 시절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3.3. 롯데 오리온즈 시절 : 마지막 불꽃, 3,000안타 달성
3.4. 기록
3.5. 연도별 역대 기록
3.6. 각종 기록 및 타이틀
4. 재일 한국인으로서
5. 성격
6. 에피소드
7. 현재


1. 경력

2. 일대기


아래의 일대기는 1976년 스포츠 잡지인 <주간스포츠>에 수록된 '야구영웅 장훈'(일본판에서는 '배트 외곬')의 내용을 요약했다.[2] 그밖에 <일본을 이긴 한국인>(1995년 출간)의 내용과도 같다. 장훈 옹 일대기에 대해 한 번씩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2.1. 유년기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도일(渡日)한 아버지 장상정씨와 어머니 박순분씨 사이에서 2남 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네 살 되던 해 겨울, 집 근처 강뚝에서 동네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워 고구마를 구워 먹으려 하던 중, 갑자기 후진한 소형 트럭에 떠밀려 모닥불 속에 오른손을 처박고 말았다. 이 때의 화상으로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심하게 구부러지고 약지와 새끼손가락은 달라붙어 한 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원래 오른손잡이 였던 장훈은 왼손잡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잠깐 타격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하자면, 좌타자가 스윙을 하면 팔로우 스루(follow-through)를 할때 오른손에 힘을 주며 힘있게 배트를 끝까지 뻗어줘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타구가 힘이 붙어 뻗어나가는 것인데, 장애로 인하여 오른손 악력이 왼손에 비해 현격히 떨어지는 상태에서 팔로우 스루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왼손만을 이용한 임팩트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그가 3000안타 뿐 아니라 홈런도 500개나 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의 오른손이 정상이었다면 타율도 훨씬 높았을 것이고, 홈런수도 더 비약적으로 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오히려 장훈의 오른손이 장애를 입었기 때문에 비장애인보다 몇배, 몇십배의 피터지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야구계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는것은 아닌가 라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오른손이 정상이었다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났어도 그렇게까지 노력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니...(그렇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그만큼의 노력으로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정이니 만약이니 얘기는 일단 접어두자)

장훈이 다섯 살 되던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며 전신에 중화상을 입은 큰누나 점자가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못받은 채 12살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잠깐 고향에 다녀오겠다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4] 그렇지 않아도 어려웠던 집안 형편이 더욱 힘들어졌다. 그 때부터 장훈은 "돈을 많이 벌어 맛있는 것도 배불리 먹고 어머니와 형, 누나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일념으로 강한 독기를 품게 되었다.

사실 장훈이 프로야구 선수가 되기를 열망했던 것은 어릴 적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시 히로시마로 원정을 온 프로팀의 경기를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칸논 구장[5] 울타리를 기어올라 보기도 했고 그것도 모자라 선수들의 모습을 더 보고싶어 선수단이 숙박하던 여관 옆의 나무에 올라갔는데, 방에서 선수들이 양껏 먹던 두툼한 스테이크와 출전 수당으로 오고가는 지폐다발에 사로잡혀, 어린 마음에 '야구선수가 되면 저런 음식을 마음껏 먹고 돈도 많이 벌 수 있겠지' 라는 동경을 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장훈의 어머니인 박순분 여사는 아들이 야구를 한다는 것에 대해 별로 탐탁치 않아 했지만 큰형인 장세열[6]과 함께 뒤에서 많은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장훈이 학창시절 입버릇처럼 "야구선수로 성공해서 어머니께 비단 치마 저고리를 많이 사드리겠다" 며 얘기하면 "네가 언제 성공해서 비단 저고리를 사주겠느냐" 라고 웃음을 지었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2. 학창시절



단바라 중학교 시절. 사진 맨 윗줄 왼쪽이 장훈. 또래에 비해 체격이 상당히 큰것을 알 수 있다.


나니와 상고 재학 시절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을 따라 동네야구를 하며 야구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한편으로 장훈은 오른손이 부자유스러웠지만 운동에 만능이었고, 특히 수영에 능숙해서 여름엔 집 부근의 오타 강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유형, 배영, 평영을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하곤 했다. 수영은 오른손의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종목이라 수영 선수가 되려고 했는데 장훈이 다니던 단바라(段原) 중학교에는 수영부가 없었다. 장훈은 형님인 세열에게 무언가 운동을 하고 싶다고 충고를 구하자 형님은 "야구를 하라"고 권유하여 야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훈은 중학 시절 남들보다 우월한 체격과 실력을 앞세워 에이스와 4번타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중학교 졸업 후 히로시마 상고, 고료 고교 등 주변 명문고의 스카웃을 기다렸지만, 폭력적 기질을 가진 학생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전부 입학을 거부 당했다. 장훈의 모교인 단바라 중학교의 운동장은 한 개 뿐이었고 운동부는 야구, 축구, 유도부 세개나 있었기 때문에 운동장의 사용권을 놓고 서로 주먹다짐을 벌이기 일쑤였는데, 승자는 항상 주먹 하면 전교 탑 클래스이던 장훈을 앞세운 야구부였다. 이것이 주변에 소문이 퍼지면서[7] 히로시마 상고 교장은 장훈의 입학을 불허했고, 고료 고교 입시 면접때는 "히로시마 상고로부터 입학을 거부당했는데 고료 관계자가 응시하면 뽑아주겠다고 해서 응시했다" 라고 솔직하게 얘기했다가 면접관에게 호통만 듣고 쫓겨났다고 한다(...).

장훈은 간신히 마츠모토 상고 야간부에 들어가긴 했지만 야구를 못한다는 절망감에 밤거리에 나가 폭력배들과 어울려 주먹을 휘두르며 울분을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훈이 이발소에서 차례를 기다리다 집어든 야구잡지에서 야구 명문인 교토 헤이안 고교와 오사카 나니와 상고에 대한 기사를 보고 헤이안 고교나 나니와 상고로 전학가고 싶다고 어머니와 형님을 조르기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는 집의 부엌을 개조하여 밤에 밀주를 담가 파는 곱창집을 당국 몰래 운영하고 있었지만 가계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고, 형님 세열은 택시 운전을 하던 어려운 상황이라 장훈의 애원을 외면하려 했지만, 동생이 야쿠자가 되어버릴까 걱정하던 형님은 큰 결단을 내리고 어머니를 설득하였다.

결국 형님은 장훈이 전학갈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주었고, 헤이안고는 학기 중엔 전학생을 받지 않는다는 방침 때문에 나니와 상고에 가서 전학을 요청하였는데 당시 야구부장 나카지마 하루오[8]는 처음엔 "돌아가라"고 거절하였으나, 형님이 "동생은 망나니지만 야구 하나만큼은 잘 한다. 테스트 만이라도 받게 해 달라"고 통사정하여 장훈은 타격과 피칭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고 장훈의 실력을 알아본 나카지마 선생은 "전학시험을 통과하면 받아주겠다"는 조건을 붙였다. 비록 밤거리의 주먹패들과 어울려 지내던 와중에도 장훈은 의외로 학교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지라 전학시험에 어렵지 않게 합격하며 정식으로 나니와 상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머나먼 타향 오사카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장훈에게 형님은 월급의 거의 절반인 1만엔을 매달 하숙비와 식비로 보내주며 뒷바라지 해 주었고, 뒷날 장훈은 프로데뷔 후 올스타전 MVP 부상으로 받은 오토바이[9]를 형님에게 선물하고 집까지 장만해 주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 가며 보살펴 준 형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해 했다.

나니와 상고 시절 그에게 밥을 지어주곤 했다던 옆집 누님(...)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정확히 쌀 한말을 먹으며 운동을 했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가난에 시달리던 옛날인지라 제대로 된 반찬이 없어서 밥만 죽어라 먹을 수 밖에 없었다곤 하지만 흠좀무. 그리고 매월 형님이 보내주시는 1만엔을 쪼개고 또 쪼개가며 쓴다고 했지만 월말에는 항상 돈이 떨어져 50엔짜리 한장을 들고 을 사먹을지 목욕을 갈지 고민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고,[10] 학교 절친인 부잣집 아들 타니모토 이사오[11]단무지 조각에 오징어 조림이 고작이던 장훈의 부실한 하숙집 도시락을 마음아파 하며 배려를 베풀어 한개 더 싸온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어쨌든 정식으로 나니와 상고의 멤버가 된 장훈은 4번타자에 투수를 맡으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이 무렵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던 미즈하라 시게루가 직접 학교로 찾아와서는[12] 장훈에게 "팀에 쓸만한 좌완투수가 없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요미우리에 오지 않겠는가?" 라고 제의한 적도 있었다. 장훈은 뛸 듯이 기뻐하며 형님에게 편지를 썼는데, "고마운 일이지만 학교는 꼭 마쳐야 한다. 프로는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배움에는 때가 있는 법" 이라는 형님의 답장을 받았고 미즈하라에게 형님의 답장을 보여주며 제의를 사양하겠다고 하자 미즈하라는 "훌륭한 형님을 두었구나. 나중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와 같이 뛰자" 라고 격려했다.

그렇게 학업과 야구에 매진하던 장훈은 뜻밖에 투수생명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게 된다. 2학년 되던 해 6월의 어느 날, 나니와 출신의 포수 카타오카 히로오[13]가 모교를 방문하여 장훈을 불러서는 "내가 받아줄 테니 한번 던져봐라" 라고 제의했다. 이날 장훈은 이미 300개의 연습 투구를 마친 상태였지만 대선배가 직접 공을 포구해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지 못하고 또다시 300개를 던져야 했다. 총 600개를 던지고 나서 카타오카에게 좋은 투수라고 칭찬을 듣기는 했지만, 그 다음날 팔을 머리 위로 들 수 없을 정도의 어깨부상을 입었고 한 달이 지나 타격은 가능해졌지만 투구는 커녕 공을 10미터 이상 던지기도 힘든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박동희 파워블로거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장훈은 어깨가 아작난 것에 대해 어쩌면 좋겠냐고 나카지마 선생에게 조언을 구하자 대뜸 "아냐 잘됐어. 자넨 애초부터 투수에 소질이 없었으니까 이 참에 타자로 전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네"[14] 라고 답했다고 한다. 미즈하라 감독 밑에서 요미우리의 투수로 성공하려는 꿈을 가졌던 장훈은 실의에 빠져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나카지마 선생은 "바보 같은 녀석, 겨우 어깨 좀 고장난 것 때문에 야구 그만두려고 타향까지 와서 찬물에 목욕까지 해가며 고생을 했느냐?" 며 따끔하게 타일렀고, 장타력을 살려 타자를 해보라는 나카지마 선생의 권유를 받아들여 결국 타자로 완전히 돌아서기에 이르렀다.[15]

타자 장훈의 실력은 이후 계속 성장하였고 나날이 늘어나는 장훈의 타구 비거리 때문에 인근 주택의 유리창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학교에서는 외야 담장의 그물망 높이를 계속 높여야만 했다(...). 이렇듯 장훈이 타자로서 대성하기 까지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 것은 두번 말할 나위도 없다. 장훈은 중학교 시절부터 집 근처 강뚝에 타이어를 세워놓고[16] 손바닥의 물집이 터져 피가 흐를 때까지 매일 타이어를 배트로 쳤다고 한다. 손바닥의 피 때문에 배트가 미끄러지자 아예 손에 붕대를 감고 치기도 했고, 붕대를 벗겨낼땐 피범벅인 손바닥에 말라붙어 있어 물로 적셔가며 벗겼다. 물론 그때의 통증은 말도 못했을 것... 반드시 야구선수로 대성하여 가족들을 가난에서 구하겠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타 학교와 나니와 상고와의 폭력 사태로 받은 2년간 고시엔 출장정지가 풀린 3학년 때, 장훈은 긴키(近畿) 대회 예선 11경기 에서 5할 타율에 홈런 11개를 뽑아내는 맹타를 휘두르며 프로 스카우터 들을 놀라게 했는데 예선대회 종료 후 어이없게도 장훈은 후배를 구타했다는 누명을 쓰고 휴부 처분을 받게 된다. 한국인인 장훈을 고깝게 본 야구부 감독 다케우치[17]의 장난질 이었다. 이 사건으로 장훈은 다케우치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극단적인 결단까지 염두에 두었지만 살인자가 된 아들이 먼저 세상을 뜨면 어머니께 이만저만 불효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눈물을 머금고 다케우치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접었다고 한다.


재일동포 야구단 한국 방문시

그렇게 평생의 꿈이었던 고시엔 출장이 무산된 장훈은 실의에 빠져 화풀이 식으로 배트만 휘두르던 와중에 평소 알고 지내던 민단 관계자의 권유로 재일 한국인 고교야구 대표로 선발되어 한국에서 고교팀들을 상대로 원정 순회경기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에피소드로 장훈의 어머니가 장훈이 한국으로 원정을 간다는 얘기를 듣자 "한국에선 재일교포 청년들을 전부 군대로 끌고 간다더라" 라며 장훈의 한국행을 결사 반대했고 이에 장훈이 민단에 확인하여 그것은 헛소문일 뿐이라고 어머니를 안심시킨 후에야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아무튼 한국 원정에서 장훈은 4번타자 중견수로 출장하여 변함없는 맹공을 퍼부으며 상대전적 12승 1무 1패로 한국 고교선수들을 초토화 시키는데 일조했다. 당시 한일 야구의 전력차도 상당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장훈은 대회 도중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창녕을 찾아 조부모님과 감격의 해후를 했고 무덤 속의 아버지께 눈물을 흘리며 인사를 드렸다.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장훈은 한국인들의 환대에 감격하며 처음으로 조국의 소중함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18] 선수단 환영식 때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장훈에게 악수를 청하며 "일본 놈들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 되네" 라고 충언과 격려를 건내기도 했다. 하긴 1954년 월드컵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일본한테 지면 현해탄을 건너오지 말라"고 한 양반이었으니(...) 시대가 시대인데 당연한 얘기인 것을

3. 선수시절

3.1. 플라이어즈-파이터스 시절


1959년 나니와 상고 졸업을 앞두고 긴키 대회와 한국 순회경기 때의 맹활약을 기억하던 프로 스카우터 들의 뜨거운 추파가 들어왔다.[19] 애초 장훈은 내심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웃을 기다렸지만 고교 시절부터 장훈은 성품이 거친 한마디로 성깔 드럽고 막나가는 선수라는 선입견이 굳어 있었고 게다가 장훈을 영입하려 했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요미우리 구단과의 사이가 벌어져 있던 상태여서 끝내 제의를 받지 못했다. 대신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당시로선 거액인 계약금 6백만엔을 제시하였지만 장훈은 이왕 야구를 하려면 꽃의 에도, 즉 도쿄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당시 도에이 감독이던 이와모토 요시유키가 직접 히로시마의 집을 찾아와 장훈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아들을 저에게 맡겨 주시면 좋은 선수로 키우겠다" 라고 간청하여 결국 장훈은 계약금 2백만엔, 월봉 4만 5천엔에 도에이 플라이어즈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20] 이때 현찰로 받은 1천엔 지폐 2천장[21]을 신문지에 꽁꽁 싸서 품에 안고 형님과 같이 야간열차로 고향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내놓자 어머니는 "네가 어디서 이렇게 큰 돈을 벌어 왔느냐. 설마 나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라고 어안이벙벙 하여 형님이 "훈이가 야구선수로 성공해서 번 돈이다" 라고 어머니를 안심시켰다고 한다. 이 계약금 2백만엔 중 10만엔만 장훈이 갖고 나머지 금액을 전부 고향 히로시마에 53평 규모의 집을 짓는데 썼고, 새 집에 이사하던 날 어머니와 형님, 누나가 감격하여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장훈은 이때 지은 새 집 2층에 자기 방을 만들어 히로시마 원정 경기때마다 사용했다. 덧붙여 장훈의 소속팀 도에이는 퍼시픽리그 팀이라 센트럴리그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경기를 가질 기회는 극히 드물었지만(...)

당시 구단주인 오카와 히로시는 외국인 선수 보유한도[22]에 걸려 장훈의 1군 출장이 어렵게 되자 구단주 회의에서 규약 변경을 강력히 주장, 외국인이라도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는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규약을 변경 시키는데 앞장섰다.[23] 규약이 바뀌기 이전 오카와 구단주로부터 귀화하여 자신의 양자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은 장훈은 야구를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어머니께 상의를 드렸다가 "그러라고 시킨 야구가 아닐텐데?" 라며 야구 때려치우고 히로시마로 돌아오라는 불호령만 들었다고(...).[24] 이에 장훈이 귀화할 수 없다고 설명하자 오카와 구단주는 감탄하면서 "역시 한국 여성은 강하다. 그렇다면 외국인이라도 일본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도록 해 보겠다" 라며 다른 팀 구단주들을 설득한 끝에 앞에서 얘기한 대로 규약 변경을 실현시켰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에 입단한 장훈이 첫 전지훈련 때 타격 코치이던 마츠키 겐지로를 만난 것은 장훈으로선 큰 행운이었다. 오카와 구단주로부터 "장훈을 개막전 4번타자로 출장시킬 수 있도록 만들라" 고 엄명을 받은 마츠키 코치는 처음엔 새파란 고졸 신인을 개막전 출전, 그것도 4번타자로 만들라는 얘기에 앞이 캄캄했지만 장훈의 스윙을 보고는 어느 정도 가능성을 예감했다. 한편으로 마츠키 코치는 화상으로 불구가 된 장훈의 오른손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도 스윙 만으로 대번에 "오른손이 약해서 팔로우 스윙이 제대로 안된다" 라고 지적하며 오른팔로만 토스 배팅을 시키고 오른손으로 샌드백을 두들기게 하는 등 장훈의 오른손 강화를 중심으로 훈련 시키면서 장훈에게 "프로에서 오래 살아 남으려면 슬러거 보다는 중장거리 타입의 타자가 유리하다" 고 충고하여 그의 타격 정확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동계훈련 내내 장훈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에 어깨가 아파 세수도 못할 정도로 훈련에 매달렸고, 그의 근성을 알아본 마츠키 코치도 한 마음이 되어 장훈을 강하게 트레이닝 시키며 마츠키 자신의 주특기이던 광각타법을 전수하였다. 가난에서 벗어나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열망에 불타던 제자와 그를 최고의 타자로 키워 보겠다던 스승의 의지가 훌륭하게 결합된 셈이다.

이를 토대로 장훈은 비록 4번타자는 아니었지만, 프로 데뷔전인 1959년 4월 10일 한큐 브레이브스 와의 시즌 개막전에 6번 좌익수로 선발출장 하게 되었다.[25] 데뷔전에서 잔뜩 쫄아있던 장훈은 당대 최고의 투수이던 요네다 테츠야를 상대로 첫 타석 스탠딩 삼구 삼진을 먹고 수비에선 평범한 플라이를 머리 위로 넘기는 이른바 만세를 부르는 등 실수 연발로 죽을 쑤기는 했지만,[26] 다음 날 4월 11일, 개막 2차전에 전날과 같이 스타팅 6번 좌익수로 그라운드에 나선 장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한큐 선발 아키모토 유사쿠를 상대로 첫 타석에서 우중간 2루타를 날리며 프로 첫 안타를 신고했다. 그리고 다음 타석엔 우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까지 터뜨리면서 비로소 장훈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이렇듯 장훈은 데뷔 첫해부터 신인답지 않은 비범한 활약을 보이며 타율 0.275, 13홈런, 57타점 이란 성적을 거두며 신인왕을 수상, 프로 무대에 화려한 첫발을 내딛었다.

이어서 이듬해에는 19세의 나이로 최연소 4번타자란 기록을 세우며 3할을 쳤고, 그 다음해인 61년엔 첫 수위타자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61년 취임한 명장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의 지도 하에 팀은 1962년 난적 한신 타이거즈를 꺾고 일본시리즈를 제패했고, 장훈은 그 해 퍼시픽리그 MVP 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이후로도 장훈은 1963~1965년에 슬럼프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1967~1970년 시즌 4년 연속 타격왕을 달성하며 최 전성기를 구가했고, 1970년에는 0.383의 타율을 기록, 16년뒤 랜디 바스가 0.389로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 프로야구 한시즌 최고 타율 기록 보유자로 이름을 남겼다.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절친 왕정치와 함께 : 전설의 OH포

이후 구단이 매각을 거듭하며 닛타쿠홈-니혼햄으로 팀명이 바뀌던 어수선한 와중에도 굳건히 팀의 중심타자 자리를 지켰지만, 1974년 취임한 나카니시 후토시 감독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며 1975년 시즌 종료 후 장훈은 구단 사장이던 미하라 오사무와의 1대 1 담판끝에 "자유계약으로 풀어줄 테니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허락을 얻어 17년간 정들었던 친정을 떠나게 되었다. 장훈은 당초 한국인 팬이 많은 한신 타이거즈 로의 이적을 염두에 두고 당시 감독이던 요시다 요시오와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고 오사카에 집까지 사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나가시마 시게오의 러브콜을 받고 곧바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기로 결심하게 되었다.[27] 위에 언급한 대로 장훈은 학창시절 미즈하라 시게루의 입단 제의를 받았다가 형님의 권유로 계속 학업에 정진하며 미즈하라, 그리고 요미우리 와의 인연을 잠시 접어두었는데, 결국 장훈은 뒷날 미즈하라 감독과 도에이에서 사제의 연을 맺었고 요미우리 유니폼도 끝내 입었으니 인생사 역시 알수 없는 노릇...

나가시마의 은퇴 후 외로이 중심타선을 지켰던 왕정치에게 막역한 동갑내기 친구 장훈의 입단은 큰 선물이었고 둘은 OH포를 형성하며 요미우리 타선의 핵심으로 팀을 이끌었다.
1976년 6월 10일, 대 한신 타이거즈 전에서 통산 2500번째 안타를 치는 장면. 다음 타자 왕정치는 우월 투런홈런 으로 장훈을 홈으로 불러들이며 기쁨은 두 배가 되었다.

장훈은 요미우리 이적 첫해인 1976년과 1977년 연속으로 센트럴리그 타격 2위를 마크하였고, 콩까지마(?) 1978년엔 무릎 부상[28]에도 불구하고 3할 타율을 지키는 등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지만, 1979년 시즌 초반 중심성 망막염으로 시력이 나빠지는 바람에 시즌의 거의 절반을 말아먹고 말았다. 결국 병에서 회복되어 복귀하긴 했으나 그해 77경기 출장에 60안타, 타율 0.263에 그쳤다.

3.3. 롯데 오리온즈 시절 : 마지막 불꽃, 3,000안타 달성

3천안타 달성 당시. 사진 왼쪽의 2번을 달고 있는 선수는 백인천이다.

장훈 옹 답지않은 부진한 시즌을 마무리한 이듬해인 1980년, 예나 지금이나 맛이 가버리면 가차없이 내치는 교진으로부터 장훈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했다.[29] 이걸 보니 보사구팽이 생각나는 거슨 기분 때문이려니 3천안타를 불과 39개 남겨놓은 상황이라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3천안타를 기록한 후 은퇴하고 싶어했던 장훈은 크게 섭섭해 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롯데 선수로서 3천안타를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결국 그해 5월 28일, 가와사키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 와의 홈경기에 출장한 장훈은 6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상대투수 야마구치 다카시를 투런 홈런으로 두들겨 3천번째 안타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후 장훈은 다음해까지 현역으로 뛰며 85개의 안타를 보탰고, 1981년 시즌을 끝으로 23년간의 현역 생활을 마감하였다.

199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친구인 왕정치의 경우, 장훈에 비해 은퇴는 1년 빨랐으나 헌액은 1년 늦었다.


3.4. 기록

프로 데뷔 후 20년 연속으로 시즌 100안타 이상을 기록하였다. 통산 안타는 3085개. 통산 타율은 일본인 선수중(4000타수 이상) 와카마츠 츠토무(전 야쿠르트 감독)의 뒤를 이어 2위이며 1967~70년 4시즌 연속 타격 1위를 포함하여 총 7번의 수위타자를 수상하였다(이치로가 타이 기록을 세움). 요미우리로 이적한 첫 해 1976년에 양대리그 수위타자를 기록할 기회가 있었으나 모종의 계략으로 아깝게 1모 차이로 수위타자를 놓쳤다. 자세한 내용은 김기태(항목 2)에 상술돼 있다.

181cm, 85kg의 건장한 체격에 걸맞지 않게 발도 빨라서, 1963년에는 41도루로 난카이 호크스 소속이던 히로세 요시노리의 45도루에 이어 2위를 기록한 것을 비롯하여 통산 319도루를 기록했다.[30] 일본리그에서 통산 500홈런 이상, 200도루 이상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장훈과 아키야마 코지(현 소프트뱅크 감독), 기누가사 사치오 단 3명 뿐이고, 통산 300도루 이상으로 범위를 좁히면 장훈이 유일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통산 3000안타-500홈런-300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윌리 메이스 뿐이다. 전신(前身)구단을 포함해 도루왕을 배출한 적이 없는 니혼햄 구단 사상 시마다 마코토(현 소프트뱅크 1군 외야수비 겸 주루코치)와 함께 도루 1위 타이틀에 가장 가까웠던 선수이기도 했다. 여러 명의 강타자를 배출한 히로시마 지역에서도, 그 대표적인 선수는 장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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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 제조기' 라는 별명은 장훈 이전에는 에노모토 키하치(전 롯데)와 곤도 카즈히코(전 다이요)[31]가 갖고 있었으며, 근래에는 스즈키 이치로가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만, 역시 현재에 와서도「안타 제조기라고 하면 역시 하리모토 이사오이다」라고 하는 평이 절대 우세하다. 또 좌측 우측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타구를 뿌리는 모습에서 광각 타법, 스프레이 타법의 대명사로도 알려져 있다.

반면 공격에서는 S급이었지만 그 빠른 발에도 불구하고 수비는 본인도 인정할 정도로 서툴러 거의 최악 수준의 돌글러브였다. 오죽하면 수비에서도 안타 제조기 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외야수임에도 불구하고 실책수가 워낙 많았고 그래서 요미우리 시절, 장훈의 포지션인 레프트 쪽으로 라이너나 땅볼이 굴러가면, 유격수였던 코노 카즈마사(전 요미우리)가 자주 커버를 하러 따라갔을 정도였다. OB선수들 능력 후하게 주는 파워풀 프로야구에서조차 장훈의 수비력 & 어깨는 E(6) 을 배정했을 정도이다. 도에이 시절 중견수를 보던 백인천이 좌익수 장훈의 좁은 수비범위를 커버해주느라 애를 먹어서 "장이형, 형님 연봉 중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장훈은 "내가 너 수비연습 시켜주려고 그런거다."라고 웃으며 받아쳤다고. 그는 오른손의 장애 때문에 글러브로 라이너성의 공을 잡으면 눈에서 불꽃이 보일 정도로 아프다고 밝혔을 정도니 수비를 못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은 수비가 부족한 것도 원인이었을 것이다. 요미우리는 지명타자제도가 없는 센트럴리그 소속이니 장훈을 외야수로밖에 써먹을 수 없어서 고충이 있었던 것이다.

장훈이 세운 수많은 기록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3085안타[32]이다. 유일하게 깰 가능성이 있었던 이치로는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여 일본 리그 내로 한정한다면 앞으로도 거의 깨지기 힘든 대기록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33]

본인도 이 최다안타 기록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있다. '이치로가 내 기록을 넘는다 하더라도 메이저리그는 일본보다 한 시즌 당 경기수가 많기 때문에 단순한 참고기록 밖에 되지 않는다.근데 지금은 경기수차이(통산 400경기 차이 미만)고 뭐고 통산안타수가 1천개 차이다ㄷㄷ 일본기록은 나의 것'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훈 자신도 '안타를 때리는 기술만이라면 나를 포함한 누구도 이치로를 이길 수 없다'며 이치로의 타격 기술에 관해서는 인정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16일, 직접 관전하러 온 장훈 앞에서 결국 이치로가(메이저리그 기록 포함이지만)3000안타를 넘어서자,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은 타자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치로를 극찬했다.그리고 2013년의 이치로는 결국...

3.5. 연도별 역대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석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OPS
1959 도에이 플라이어즈 125 454 .275 115 18 5 13 57 48 10 29 .435 .328 .765
1960 106 414 .302 116 25 3 16 56 49 15 26 .508 .351 .859
1961 129 526 .326 159 31 10 24 95 77 18 46 .596 .401 .997
1962 133 528 .333 157 24 4 31 99 89 23 86 .597 .440 1.037
1963 150 626 .280 148 16 7 33 96 90 41 92 .524 .389 .913
1964 129 547 .328 151 21 6 21 72 85 31 78 .536 .426 .962
1965 132 538 .292 133 13 3 23 88 61 29 72 .486 .394 .879
1966 122 493 .330 146 13 2 28 90 67 10 43 .558 .391 .949
1967 120 499 .336 139 18 3 28 88 72 18 66 .597 .439 1.035
1968 114 432 .336 122 12 2 24 65 70 13 61 .579 .437 1.015
1969 129 557 .333 160 27 1 20 67 77 20 71 .519 .421 .940
1970 125 537 .383 176 16 2 34 100 92 16 64 .649 .467 1.116
1971 128 546 .313 150 21 3 26 78 73 18 59 .531 .390 .921
1972 127 548 .358 169 25 4 31 89 93 10 69 .625 .443 1.068
1973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128 550 .324 143 18 0 33 93 77 12 93 .590 .448 1.038
1974 닛폰햄 파이터즈 120 491 .340 138 20 3 14 62 64 14 82 .507 .402 .959
1975 119 473 .276 113 12 2 15 46 45 6 58 .424 .367 .791
1976 요미우리 자이언츠 130 574 .355 182 35 5 22 93 89 8 51 .571 .417 .998
1977 122 493 .348 153 16 6 24 82 67 3 40 .575 .409 .984
1978 115 456 .309 131 17 1 21 73 53 1 27 .502 .353 .854
1979 77 255 .263 60 7 0 8 32 26 1 23 .399 .333 .732
1980 롯데 오리온즈 102 370 .261 89 9 0 12 39 50 0 26 .393 .317 .710
1981 70 175 .219 35 6 0 3 16 9 2 12 .313 .273 .586
통산 NPB23년 2752 11122 .319 3085 420 72 504 1676 1523 319 1274 .534 .399 .933

3.6. 각종 기록 및 타이틀

  • 통산 출장경기 : 2752경기(역대 3위)
  • 통산 타율 : 0.31915(역대 3위)
  • 통산 안타 : 3085개(역대 1위)
  • 통산 홈런 : 504개(역대 7위)
  • 통산 타점 : 1676 타점(역대 4위)
  • 통산 도루 : 319 도루(역대 20위)
  • 통산 희생타 : 4개
  • 통산희생 플라이 : 90개(역대 5위)
  • 통산 사구 : 1274개(역대 3위)
  • 통산 데드볼 : 78개
  • 통산 삼진 : 815 삼진
  • 통산 병살타 : 145개

  • 신인왕 (1959)
  • MVP 1회 (1962)
  • 수위타자 7회 (1961, 1967~1970, 1972, 1974)
  • 최고출루율 9회 (1962, 1964, 1967~1970, 1972~1974)
  • 베스트 나인 16회 (1960~1970, 1972~1974, 1976~1977)
  • 올스타 게임 18회 (1960~1964, 1966~1978)
  • 사이클 히트 1회 (1961.5. 7)
  •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1990)

4. 재일 한국인으로서

지금은 한류 붐 등으로 한국인이란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는 재일교포도 많아지고 있지만, 장훈이 현역으로 뛰던 시절에는 애초부터 국적을 밝힌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일본에 건너온 후, 죽기 전까지 일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던 완고한 모친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그 한편으로는, 태어나서 자라고 입지를 세운 일본에 대한 생각도 깊어,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출장하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일본의 국위를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라고 말했다.

민족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가정 내에서는 어릴 적부터 한국어로 말하며 자란 관계로 지금도 한국어는 능통하다. 1991년에 일본에서 개최된 제 1회 한일 야구 슈퍼게임의 중계에서는, 대한민국 TV 방송 측의 야구 해설자로서 출연해, 막힘없는 해설로 한국의 야구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왕정치의 단일시즌 홈런 신기록 55개에 근접했을때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고 조언했다.

위에 언급했지만 고교시절에는 재일 한국인 선발팀에 선정되어 한국으로 원정을 가서 고국의 야구팬들에게 대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동대문 야구장이 철거될 무렵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옛날 여기서 엿장수한테 엿도 사먹고 그랬는데"라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같은 재일교포인 프로레슬러 역도산과도 친분이 깊었다. 둘 다 천성이 거칠었던 탓에 술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던 듯 하다. 어느 날은 장훈이 역도산에게 "한국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제의하자 역도산은 분개하며 "너는 내가 당한 차별을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사실 역도산은 스모 리키시 시절 차별을 받았던 트라우마 탓에 일상 생활에서도 한국어를 전혀 쓰지 않았고,[34] 역도산야쿠자에게 피살당할 때까지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실제로 일본인들 중 아직도 모르는 사람은 많다.

당시 일본프로야구계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간과하여 야구선수가 배트보다 무거운 것을 드는 걸 금기시 하던 시기였는데 장훈은 '체력'을 강조하는 역도산의 권유를 받아 역도산의 레슬링 도장에서 본격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을 받았다. 역도산의 도장이었으니 평범하게 바벨 들어올리고 윗몸 일으키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는 것이 가라데춉이고 드롭킥이고(...) 본격 프로레슬러 육성 그렇다고 장훈이 야구장에서 가라데춉이나 드롭킥을 시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가 현역에서 은퇴한 이듬해인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이후 현재까지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특별 보좌관직을 맡고 있다. KBO 창설 당시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당시 큰 경기나 행사가 있을 땐 나가시마 시게오와 스승 미즈하라 시게루를 함께 초청하여 모셨을 정도.[35] 특히 일본에서 전성기를 지났거나 여러 차별로 별 활약을 못한 재일 한국인 선수들을 한국프로야구에 뛰게 추천한 이도 바로 장훈 옹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송재박이다.) 일본의 스포츠 선수 출신으로서 대한민국 문화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5. 성격

재일 한국인으로서 차별을 많이 받아서인지 성격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고교시절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싸움꾼으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야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야쿠자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장훈의 불같은 성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일본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노무라 카츠야가 자신의 트래쉬 토크(속삭이기 전술)로도 전설이 되었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어젯밤 니 마누라 어떤 남자랑 술먹고 계시더라 ㅋㅋㅋ", "요새 모 술집 아가씨랑 그렇고 그런 관계라며?" 등의 음담패설 등을 지껄이며 타자의 신경을 건드리고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유명한 전술. 예컨대 국내에서는 이만수가 현역 시절 특유의 입담으로 선후배동기 안가리고 농락한 것으로 유명하며 현재 한국에서는 진갑용의 주무기. 노무라의 경우에는 욕이나 음담패설보다는 농담 따먹기나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는 헛소리를 남발하는 수법을 쓴다고 한다. 그래서 갑드래곤은 요즘 국제대회에는 잘 못 불려가나?

그가 통하지 않았던 타자로 세 명을 꼽았는데, 그 세 명이 바로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그리고 장훈이었다고 한다. 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나가시마는 오히려 웃으면서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 쳤으며, 장훈은 노무라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하지만 어느 날은 장훈도 노무라의 야유에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일부러 크게 헛스윙을 하는 척 하면서 배트로 노무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렸고, 이때 된통 혼이 난 노무라는 그 후로 장훈의 신경을 긁는 짓을 그만두었다고.

은퇴 후 코치, 감독으로 일한 적이 없는데 한국 국적자인 그를 각 구단들이 지도자로 데려오기 꺼려했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나 사실 그는 몇몇 구단에서 코치,감독 제의를 받았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스스로 지도자 생활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듯 하고 또한 나가시마, 왕정치 같은 스타선수 출신도 감독 경력 초반부엔 자질 부족이라고 욕만 들어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인인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때 일본인들의 더 심한 비난과 인격모독을 받으며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긴 일본에서보다 한국에서 산시간이 더많은 김성근 감독도 쪽바리네 일본식야구네 하는거보면 안한게 훨씬 나았을지도 그의 친지들도 격한 성격을 가진 그가 지도자에는 별로 맞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70을 넘긴 고령인지라 앞으로 지도자로 부임할 확률은 더욱 희박해질 듯 하니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은퇴 후 30여년 간 줄곧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방송에서의 입담이나 칼럼의 필력은 선수출신 평론가 중에서 으뜸이라는 평이다.

6. 에피소드


위의 사진은 선수시절 찍힌 사진, 아래 사진은 2006년 3월 5일. 도쿄돔에서 열린 WBC 아시아라운드 1,2위전에 참석한 장훈의 오른손. 오른손의 엄지가 바깥쪽으로 휘어져있고,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이 붙어있다.

  • 화상을 입은 오른손을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왼손으로 가리거나 뒷짐을 지고, 식사할때도 오른손은 항상 탁자 밑으로 숨긴다고 한다. 손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1959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타고난후, 식사도중에 "이 오른손을 다치지 않았다면 성적이 더 좋지 않았을까?"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같이 식사중이던 그의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야구인으로서 가장 존경하는 카와카미 테츠하루 에게만 유일하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카와카미는 그런 손으로 어떻게... 라며 말문이 막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나니와 상고 상고 시절의 친구로는 전직 야쿠자이며 화가로 활동중인 야마모토 아츠무가 있다. V시네마[36]화 된 야마모토의 자전적 저서「나니와 상고의 야먀모토다!」에서는 장훈과 관련된 수많은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 또 야마모토가 야쿠자 생활로부터 손을 씻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장훈으로부터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라는 설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학창시절 장훈은 그만의 독특한 타격 훈련법을 갖고 있었다. 한밤중에 방안의 불을 끄고 컴컴한 상태에서 타격 자세를 취한 채로 방 한 구석을 응시하면 가상의 야구공이 떠오르고 장훈은 그 공을 향해 스윙을 하는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 이었다. 그 와중에 정말 맘에 쏙 드는 스윙이 되면 귓가에 "븅"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장훈은 그 소리를 한번 더 듣고 싶어서 밤새도록 몇 백번이고 스윙을 불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훈이 밤마다 계속 스윙 연습을 하면서 그의 방 다다미는 발자국이 움푹 패일 정도였다고(...). 프로 입문 이후 장훈은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다고 느낄 때 마다 이 훈련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 요시 그란도시즌 백인천과는 형-동생 하며 격의없는 의형제로 지낸다.(백인천은 장훈을 '장이형'이라고 부른다.) 토에이 시절 장훈은 백인천에게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줬고, 한국인에게 척박하기 그지없는 일본야구에서 생존하는 법도 알려줬다. 백인천이 입단후 몇년간 불펜 포수 노릇을 하느라 타격훈련할 시간이 부족했는데 팀내의 확고한 실력짱,싸움짱(!)인 장훈이 백인천을 불러 타격훈련을 봐줄때는 그 어느 선수도 백인천을 건들지 못했다고 한다. 장훈은 백인천에게 위협구를 던지는 투수에게 복수하려면 세이프티 번트 후 태그를 하러 들어오는 투수의 발을 사뿐이 즈려밟고 사정없이 밟으라고 알려줬고, 백인천은 이를 실전에서 시전했다.

  • 1970년 0.383으로 시즌 최고타율을 작성할 때 다른 팀이지만 친하게 지낸 미국인 선수 잭 블룸필드[37]의 덕을 본 일이 있다. 블룸필드가 킨테츠 버팔로즈 소속으로 뛰던 1960년대 초반, 장훈은 평소 자기보다 발이 느린데도 세이프티 번트에 능숙했던 블룸필드를 어느 날 긴자의 스테이크 전문점으로 초대하여 "세이프티 번트 잘 대는 법 좀 알려달라" 고 간청했다. 처음엔 '이 자식 뭔 소리야 남의 영업비밀을 알려달라니' 라는 듯한 태도의 블룸필드는 장훈의 정중한 부탁에 팀을 떠나 같은 야구인으로서 식당에서 밥먹다 말고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며 자신의 세이프티 번트 비법을 알려줬다.
    블룸필드의 비법은 1. 절대 상대방에게 번트의 낌새를 보이지 말라 2. 타석에 들어섰을 때 스윙을 크게 하며 강공인것 처럼 페이크를 쳐라 3. 번트를 대는 순간 왼발을 오른발과 크로스시켜 1루 쪽으로 내딛으며 몸을 틀어라... 그렇게 하면 1루에 최소 반 발짝 내지 한 발짝은 먼저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블룸필드로 부터 세이프티 번트 비법을 전수받은 장훈은 이후 번트 안타로 짭짤하게 재미를 봤고, 5타수 4안타 이상을 쳐야 시즌 최고 타율을 경신할 수 있었던 1970년 시즌 최종전 에서 3안타를 때려낸 장훈은 5번째 타석에 들어서 1루쪽으로 기습 번트 안타를 성공시키며 오시타 히로시가 1951년 세웠던 0.3831를 3모 넘어서는 0.3834로 기록을 경신할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블룸필드는 장훈에게 비법을 알려준 이후 종종 아침 댓바람부터 숙소를 찾아가 늘어지게 자고 있던 장훈을 깨워 "하리모토, 아침이나 같이 먹자. 물론 네가 쏘는거임 ㅋㅋ" 이라며 장훈의 컨디션을 자주 흐트러 놓았다고. 다른 사람 같았으면 짜증을 냈겠지만 블룸필드는 장훈에겐 은인이었던 지라 군말없이 따라 나섰다고 한다...

  • 현역시절 퇴장처분을 받은 적은 없지만, 도에이 시절과 자이언츠 시절에 경찰의 조사를 받는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
    전자는 폭언 비슷한 발언을 들었다고 해서 경기 전에 조노우치 쿠니오(당시 롯데)를 때린 것이고 후자는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정차해 있던 요미우리 구단 버스가 경기 중 판정 문제를 이유로 히로시마의 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팬들과 시비가 붙어 "장훈에게 맞았다", "아니, 나는 때리지 않았다"라며 서로 옥신각신한 것이다.
    특히, 자이언츠 시절의 사건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받아들이기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지독한 야유를 받았던 것이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있었던 경기에 장훈의 어머니인 박순분 여사가 아들이 히로시마로 원정경기를 하러 오는 데 맞춰 직관을 왔었지만, 참고 넘기기 어려운 팬들에 야유에 감정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렸고, 경기를 다 못본 채 돌아갔다고 한다.

  • 롯데로 이적한 1980년, 당시의 야마우치 카즈히로 감독과 가네다 마사이치[38] 등 모든 평론가가 혹평한 오치아이 히로미츠(전 주니치 감독)의 특이한 타격 폼을 "훌륭하다, 이대로도 잘 때릴 수 있다"라고 극찬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타격 3관왕을 차지하는 등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 반열에 올랐다.

  • 같은 나이에 프로입문 동기로 일본 이외의 국적을 갖고 있으며, 요미우리 시절에는 함께 중심타선 "O-H포"를 형성한 왕정치와는 프로입문 당시부터 둘도 없는 친구지간이다.
    1979년 시즌 초반 장훈이 중심성 망막염으로 일시적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데뷔 이래 최악의 성적을 남기자 요미우리에서는 장훈을 롯데로 방출하려 했는데, 이제껏 구단에 의견을 한 번도 제시한 적이 없는 왕정치가 시즌 종료 후 납회식 때 "하리모토(장훈)가 거인에서 3000안타를 치게 해 주십시오" 하며, 당시 오너 쇼리키 토오루에게 읍소했다. 쇼리키 구단주가 "왕정치 자네 술 취했나?" 라며 불쾌해 하자 장훈이 왕정치의 소매를 잡아끌며 만류했고, 장훈 스스로 "그동안 감사했다. 롯데로 가겠다" 라고 선언하여 왕정치의 입장을 난처하지 않게 해 주었다. 결국 장훈은 롯데로 이적했지만 그날의 일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왕정치를 따르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왕정치가 오랜 세월의 침체를 극복하고[39] 감독으로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대망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어냈을 때(1999년)에는, "지금까지 왕짱(왕정치의 애칭)을 바보 취급해 온 놈은 모조리 머리를 밀고 사과해라"라고 큰 소리를 쳤다.

  • 터피 로즈가 55홈런을 치고 일본 한 시즌 홈런 기록을 갈아치우려 할 때, 소프트뱅크와 경기에서 사실상 경원당한 것에 대해, "투수도 맞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중략) 그렇게 치고 싶었다면 스트라이크가 두 개 들어왔으니 그걸 쳤으면 됐을 거 아닌가."라고 했는데, 이 발언은 왕정치와 관계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 2014년 8월 10일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추사랑 에피소드에서 특별출연했다. 역도산의 예를 들어주면서 추성훈추사랑에게 격려를 해주었다. 사랑이에게는 자신의 싸인볼과 곰인형을 선물했다.

7. 현재

은퇴 후 줄곧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고, TV방송에서 연예인 못지않는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진정한 엔터테이너 아래의 예를 보아하니 그의 기믹은 호통치시는 거성의 이미지인 듯.

  • TBS테레비계 선데이 모닝의 코너「주간 고견코너」에, 오사와 케이지(전 롯데, 닛폰햄 감독)와 함께 고정출연하고 있다.[40] 내용은 아무래도 야구 중심이지만, 방송 초기부터 인기를 얻고 있어 방송분량을 많이 뽑아내고 있다.

  • 닛폰햄 직속 후배인 신죠 츠요시에게는 항상 엄하게 대하는데 "떽!(원래는 불교식 호통소리인 (喝), 일본어로는 가츠)" 이라며 꾸짖는 모습은 프로그램의 명물이 되었다. 닛폰햄의 캠프에 갔을 때에는 백네트 뒤에 있던 신죠로부터 반대로 "떽!"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장훈은 신죠를 꽤 높게 평가하는데, 2006년 4월에 신죠가 은퇴를 발표했을 때에는, "곤혹스럽네요"고 이야기하며 그때만큼은 "떽" 하지 않았다.

  • 그 흔한 타격 타이틀 한 번도 차지한 적이 없는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 "말도 안 되네요"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일본 프로야구를 빛낸 후배이니 최근에는 이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 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OB리그)에서 삼진을 당하면 거꾸로 팬으로부터 "떽!"이라 야유를 받는다. 그리고 그 장면이 TV에 나오곤 하면 스스로 "떽!" 하며 꾸짖는다. 오오오!

  • 2005년에는 마스터즈 토너먼트 리그에 참가한지 5년 만에 첫 안타를 때렸다. 본인은 "투수인 호시노 노부유키가 적당히 던진 공을 쳤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건, 일본판 흑마구 호시노 노부유키의 공을 쳤다는 것이다.

  • 보수적이고 완고한 성격 때문인지 남자선수가 우승을 하거나 은퇴를 할 때 감정에 복받쳐 우는 장면이 나오면 불쾌하다는 듯 "남자가 사람들 앞에서 훌쩍훌쩍 울면 못쓴다! 떽이다!!"라고 하는 투의 코멘트를 날린다. 이런 투의 발언은 장훈 옹의 유행어 내지는 트레이드 마크로 정착된 듯 한데, 이 얘기를 할 때 다른 해설자나 사회자는 킥킥대곤 한다. 한편, 여성에게는 "떽!" 대지는 않지만 가끔 부진을 보이는 선수에게는 "떽!" 대곤 한다. 한 예로, 부진을 거듭하고 있던 프로골퍼 야자토 아이에게 "떽!"하고 일갈했다.

  • 2005년 NHK배 국제 피겨스케이트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감격에 겨워 통곡하던 오다 노부나리에게는 "반(半) 떽이다!"라고 호통을 쳤다. 사회자인 세키구치 히로시를 비롯해 다른 해설자는 장훈의 "떽!"에 실소했으며, 오사와는 반대로 "오오오! 멋진데!"하고 격찬(?)했다.

  •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시이 타쿠로가 2006년 5월 11일 대 라쿠텐 전에서 통산 2000안타를 기록하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했을 때는 정말 드물게 "훌륭하다!"라고 말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흘린 눈물이니까. 게다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제대로 인터뷰하고 있지 않는가"하고 격찬했다. 참고로 이시이 타쿠로는 투수로서 승리를 기록하고[41] 이후 타자로 전향한 선수 중에서 두 번째로 2000안타를 기록했다. 첫 번째는 와카미 테츠하루 전 요미우리 감독.

  • 야구에 대한 생각은 꽤 보수적이다. 일본리그 정상급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전문가 중 한 명인데 "일본야구에 신세를 졌는데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라고 호통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메이저리그나 일본인 메이저리거에 대한 얘기는 별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리그로 복귀하는 선수에 대해서는 1년 간의 출장금지 페널티를 주자는 의견을 서슴없이 내기도. 이러한 입장은 2012년 현재도 마찬가지여서 이 선수, 저 선수, 그 선수 등이 메이저리그 진출을 선언한데 대해 가차없이 떽!을 날렸다. 2012년 말 오타니 쇼헤이가 메이저리그 진출과 일본 잔류를 두고 갈등을 할 때도 대놓고 반대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좀더 힘을 길러서 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42]
    또한 2013년 WBC 3회 대회에 일본프로야구 노조가 참가 거부를 밝히자 "그동안 노조가 하는 짓이 맘에 안 들었는데[43], 처음으로 노조의 행동이 맘에 든다."라고 이야기까지 했다. 이쯤되면 장훈 옹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시각이 그리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다.[44]
    비슷한 생각으로 2013년 7월에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클럽하우스의 분위기메이커 노릇을 하던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두고 "타율 2할 2푼을 못치는게 선수냐?"는 말을 방송에서 했다가 다르빗슈 유가 트위터로 "가와사키는 팀에 꼭 필요한 선수다. 그 방송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선수를 헐뜯기 위해서?"라며 일갈을 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 언론과 팬들은 다르빗슈가 친정팀 대선배를 대놓고 비판한 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 이렇듯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일본인 선수에 비판적인 장훈도 우에하라 고지 만큼은 칭찬해줬는데...문제는 그 발언 수위가 높다는 것. “우에하라 공은 美 애송이들이 칠 수 없다"[45]는 명언을 남기셨다. 다만 이점과 위의 메이저리그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은 그가 미국에 의해 큰누나를 잃었다는 점이 작용했을수도 있다. 실제로 본인 자서전에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피력하기도 했다.

  • 어릴 때부터 교진군에 대한 강한 동경과 애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AV매니아 마쓰이 히데키가 교진군을 뛰쳐나와 뉴욕 양키스에 입단했을 때나 카와이 마사히로[46]가 은퇴를 철회하고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을 때에는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 한민족이라는 같은 피가 흘러서 그런지 이승엽에게는 절대로 "떽!" 대며 일갈하지 않았다.
    이승엽치바 롯데 마린즈(2004~05) 시절,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2군행의 지시에 대해서는 "승엽이가 컨디션을 되찾으면 수십 승을 하는 데 원동력이 될 수 있는데, 발렌타인은 눈앞의 승리에 안달났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미쿡 동부의 어느 빨간양말 신은 팀이 2012 시즌에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이때부터 장훈 옹은 "승엽이가 도움을 요청해오면 언제라도 힘이 되고 싶다"라고 이야기하며 옆에서 많이 격려를 해줬으며, 특히 2006년 교진으로 이적하고 맹활약을 펼쳤을 때 2007 시즌을 앞두고 트리플크라운도 가능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하지만 기사만 뜨면 별명을 무한으로 만들어내는 어느 현역 야구선수도호쿠 대지진의 여파로 시즌 중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실망감을 넘어 한국 남자로서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라고 강하게 디스하기도 했다. 이건 김경홍 옹과 김성근감독도 마찬가지.[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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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구단 운영권 매각으로 팀명이 바뀐 것일 뿐 '도에이 플라이어즈-닛타쿠홈 플라이어즈(1973년)-닛폰햄 파이터즈(1974년)'로 이어지는 프랜차이즈이기 때문에 이 란에는 도에이 플라이어즈로 단독 표기하고 그 외의 후신명은 각주에 표시한다.
  • [2] 일본야구 전문가 박성호 님이 운영하던 홈페이지(www.npb.co.kr)에 게재되기도 하였다.
  • [3]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계에서 피폭자 수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장훈과 노닌 와타루(전 롯데 감독) 2명 뿐이다.
  • [4] 밥반찬으로 갈치를 먹다 뼈가 목에 걸렸는데 밥을 씹지도 않은 채 꿀꺽 삼키고 술까지 마시는 등 민간요법 이랍시고 뼈를 빼려 했지만 오히려 식도가 파열되면서 과다출혈을 일으켰다 한다.
  • [5] 1957년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완공되기 이전까지 프로야구 경기를 개최하였다.
  • [6] 아버지를 일찍 여읜 장훈에게 8살 연상의 형님은 아버지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 [7] 축구부 주장이 장훈과 말싸움을 벌이다 장훈을 조센징이라고 비난하자 이에 격분한 장훈이 야구배트로 그의 머리를 가격하여 부상을 입힌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 [8] 야구부 감독이었으나 전해 타 학교와의 폭력사태가 터진 것에 대한 책임으로 감독을 그만두고 야구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 [9] 자가용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1960년대 초반이라 오토바이는 상당한 고가품 이었다. 형님은 그 오토바이를 출퇴근 용으로 10년 가까이 타고 다녔다고 한다.
  • [10] 한창 먹어도 먹어도 부족한 사춘기 시절이라 장훈의 선택은 항상 빵이었다. 목욕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수돗가에서 수건에 물을 묻혀 몸을 닦는 것으로 퉁쳤다고(...)
  • [11] 이름이 같아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훗날 장훈은 타니모토가 경영하는 회사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 [12] 미즈하라는 2차대전 때 나카지마 선생과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였고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같이 고초를 겪은 전우였다.
  • [13] 당시 릿쿄 대학에서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주력 선수로 뛰고 있었다. 1959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으나 프로의 벽을 넘지 못하고 4시즌만에 은퇴한 이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명 스카우터로 이름을 남겼다.
  • [14] 사실 장훈 옹도 자서전에서 자신의 팔 혈관은 다른 투수들에 비해 두꺼워서 피칭 시 팔의 피로가 빨리 쌓이는 편이었고 도에이 시절 선배이자 팀의 에이스였던 도바시 마사유키는 자기와는 반대로 팔의 혈관이 가늘었던 투수였다고 서술한 바도 있다.
  • [15] 투수를 꿈꾸다가 부상으로 타자로 전향해서 성공한 케이스로 이승엽이대호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전향한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끝에 얻어낸 결실.
  • [16] 택시 운전사인 형님 덕분에 회사에 남아도는 폐타이어를 마음껏 확보할 수 있었다.
  • [17] 불과 23세의 나이에 감독이 된 자였는데 굉장한 혐한(嫌韓)주의자 였고, 게다가 평소 장훈이 야구는 물론 매사에 대해 감독인 자신은 제껴두고 전임 감독인 나카지마 야구부장에게 조언을 구하고 의지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고.
  • [18] 그러나 일부 재일교포 선수들은 "반쪽발이" 라는 야유를 듣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았다고...
  • [19] 당시 "관동지역에 와세다 실업고 왕정치가 있다면 관서에는 나니와 상고 장훈이 있다" 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 [20] 프로입문 동기이자 친구인 왕정치는 계약금 1천 8백만엔, 월봉 11만엔에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었다.
  • [21] 당시 최고액권은 1천엔 이었다.
  • [22] 당시 규약은 3명 보유에 2명 출장. 이미 도에이는 외야수 잭 래드라와 하와이 출신의 1루수 스탠리 하시모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 [23] 참고로 일본 프로야구가 신인 드래프트 제도를 시행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김일융이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해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서 정규 교육과정을 받았다면 외국인도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다"는 조항이 추가됐다.
  • [24] 그정도로 무섭게 화나신 어머니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고 한다.
  • [25] 일본 언론에 따르면 2013년 시즌 개막전 오타니 쇼헤이 이전 가장 최근의 고졸 신인 개막전 출전이라 한다. 무려 54년 전(...)
  • [26] 이날 도에이의 이와모토 감독은 만세를 부른 장훈을 곧바로 교체하여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질책 차원이 아닌 루키가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한 배려였다.
  • [27] 장훈은 요미우리 입단 후 요시다 한신 감독에게 약속을 못지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요시다는 "가고 싶은 곳에 가야지 어쩌겠나" 면서 장훈을 격려했다고 한다. 대신 한신과의 경기에선 적당히 해달라고 부탁...은 개뿔(...)
  • [28] 그 해 주루코치로 부임한 요나미네 카나메가 2루로 들어갈 때 야수의 글러브를 발로 차라는 조언을 했다. 야수의 실책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는데 장훈은 경기 중에 요나미네의 조언대로 실행했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 [29] 이후 절친인 왕정치도 1980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한다.
  • [30] 장훈 옹의 역대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 시즌에 30-30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타율이 0.280에 그치는 바람에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에는 미치지 못했다. 젠장(?)
  • [31] 텐빙(저울) 타법 이라는 타격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타자다. 배트를 거의 눕히다 못해 아래로 내리는 자세에서도 신기하게 갖다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박정태 보다도 더욱 해괴한 타격 폼의 소유자 였지만, 그럼에도 매년 130안타 이상은 꼬박꼬박 찍었다.
  • [32] 통산 아시아인 프로야구선수 단일리그 최다안타 기록이다.
  • [33] 물론 이치로가 메이저리그 3천안타에 계속 도전하고 있지만 2014년 현재 2800안타를 조금 넘는 정도이고, 팀에서 백업과 주전을 오가는 외야수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달성이 쉽지는 않아보이고, 혹여 포기하지 않고 선수생활을 이어가서 은퇴직전에 3천안타를 달성한다해도 3085안타까지는 어려울 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예상이다. 만약 달성한다면 아시아인 단일리그 최다안타 기록이 이치로의 것이 되겠지만 주전선수 위치를 유지하지 못한채로 만40세가 이미 넘어버린 시점에 메이저리그에서 250개가 넘는 안타를 더 기록한다는 건 힘들거라고 예상되고 있다.
  • [34] 어느 날 역도산이 수제자 김일과 잡담을 하며 "밥에다 기쿄를 넣고 비벼먹고 싶다" 라고 했는데 김일이 기쿄의 뜻을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역도산은 김일에게 한국말로 조용히 "기쿄는 도라지야" 라고 일러준 적은 있었다. 김일이 그에게서 들은 유일한 한국어가 그것이었다고.
  • [35] 미즈하라는 한국프로야구 출범 전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지만, 하필 출범 개막전 전날인 1982년 3월 26일 세상을 떠나 개막전에 초대될 수 없었다.
  • [36] 도에이(東映)가 제작 발매하는 렌탈 전용의 영화.
  • [37] 1930년생으로 선수 등록명은 블룸. 미국 마이너리그를 거쳐 킨테츠 버팔로즈(1960~1964), 난카이 호크스(1965~1966) 에서 활동했고 1962, 1963년 2년 연속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수상했다.
  • [38] 한국명 김경홍. 일본으로 귀화. 롯데 감독을 역임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400승 투수.
  • [39] 1990년대 중반 호크스는 비밀번호나 찍던 막장팀 중에 하나였다. 연패를 밥먹듯이 하던 그런 팀의 감독으로 고생한 오 사다하루에게 공개사과를 받아내려고 했으니...
  • [40] 오사와 케이지는 2010년 10월 7일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이후 장훈 옹의 파트너는 주로 일본프로야구 OB들이 게스트 형식으로 출연하여 매주 바뀌고 있다.
  • [41] 투수로서 통산 1승 4패 기록.
  • [42] 장훈 옹은 오타니가 투타겸업을 선언하자 그의 트리플 크라운급 타격재능에 흠뻑 반하여 160km를 던지는 투수로서의 자질도 좋지만 타격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 몇 안되는 전문가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실상 오타니라는 선수 자체에 흠뻑 빠져있다 봐도 무방하다.
  • [43] 2004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로 일본프로야구 재편문제가 있었을 때, 요미우리 자이언츠 등을 중심으로 10개구단 단일리그로 환원하자는 구상이 거론되었다. 이에 후루타 아츠야 선수회장과 긴테쓰의 이와쿠마 히사시 등 선수들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있었고, 선수회가 파업까지 불사하며 격렬히 반대한 것을 의미한다. 장훈 옹은 이 구상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다.
  • [44] 그런데 1960~70년대에 MLB-NPB의 친선경기를 하면 MLB 측에서 MLB에서 당장 통할 선수로 장훈 옹을 꼽았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 [45] 이 기사에 대해 "일본 기사 번역 과정에 문제가 있던거 아닌가, 기자가 방송을 곡해한 것 아닌가"라는 반응도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 장훈은 같은 방송 패널인 가네다 마사이치와 함께 "메이저 타자들은 'ヘボ(일본어 "下手"와 비슷한 뉘앙스라고 보면 된다. 서투르다, 어설프다 등의 의미. 젊은이들은 잘 쓰지 않는다.)'" "메이저 타자들은 떨어지는 공 던지면 그냥 아웃" 라는 발언을 다르빗슈가 메이저에서 활약한 2012년부터 자주 해 왔다. 한국에서야 저 기사로 처음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지, 오히려 기사에 나온 해당 일자 방송은 일본에서는 그다지 화제도 되지 않았다. 장훈이 한두번 저런 발언을 한것도 아니고 해서.
  • [46] 전 요미우리 유격수, 선수회장 역임, 번트의 달인.
  • [47]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도호쿠 대지진-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방사능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김별명의 아내와 그의 2세를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었다는 점에서는 이 두 분의 의견도 어느정도는 일방적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는 김별명의 일본 프로야구 적응실패라고 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