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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조

last modified: 2015-04-05 23:01:58 Contributors



그토록 원하던 친정 팀 감독 유니폼을 입었지만 1년도 채 입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보고 계십니까? 들리십니까? 당신이 꿈꿔왔던 그 순간! 2011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 입니다! - 한명재, KS 5차전에서 삼성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직후.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 심판들 사이에 돌던 우스갯소리, 그만큼 선구안이 넘사벽이었다는 소리.[1][2]

"나도 이승엽양준혁도 장효조는 못 따라간다." -이만수

"당신이 어디에 계시든 당신이 타격의 달인임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 최훈

타격의 달인
KBO 역대 최고의 타격본좌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 아니 한국 프로야구의 좌타대두 본좌라인의 초대수장

이름 장효조(張孝祚)
생몰년도 1954년[3] 7월 6일 ~ 2011년 9월 7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부산광역시 영도구 [4]
출신학교 삼덕초-대구중-대구상고-한양대
포지션 외야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3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소속팀 포항제철 야구단(1979~1980)[5]
육군 경리단(1981~1982)
삼성 라이온즈(1983~1988)
롯데 자이언츠(1989~1992)
지도자 경력 롯데 자이언츠 타격코치(1993~1998)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2000)
삼성 라이온즈 2군 수석·타격코치(2010)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타격코치(2011)

1987년 한국프로야구 MVP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김성한(해태 타이거즈)

1983 ~ 1987년 한국프로야구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김준환(해태 타이거즈)
양승관(삼미 슈퍼스타즈)
성관(롯데 자이언츠)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박종훈(OB 베어스)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홍문종(롯데 자이언츠)
이광은(MBC 청룡)
박종훈(OB 베어스)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이광은(MBC 청룡)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김종모(해태 타이거즈)
이광은(MBC 청룡)
장효조(삼성 라이온즈)
이강돈(빙그레 이글스)
이정훈(빙그레 이글스)
이순철(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0번(1983 ~ 1988)
허규옥(1982) 장효조(1983 ~ 1988) 정성룡(1989 ~ 1992)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0번(1989 ~ 1992)
장효조(1989 ~ 1992) 임수혁(1994~200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4번(2000)
장효조(2000) 이선희(2001 ~ 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3번(2010 ~ 2011)
강성우(2006 ~ 2009) 장효조(2010 ~ 2011) 세리자와 유지(2012 ~ 2014)

삼성 라이온즈 역대 주장
함학수(1985) 장효조(1986~1988) ?

Contents

1. 소개
2. 선수 시절
3. 은퇴 후
4. 기타
5. 연도별 주요 성적

1. 소개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를 거쳐간 전 한국프로야구 선수. 아마추어 시절부터 프로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왼손 교타자. 그리고 장효조-양준혁-이승엽-최형우로 이어지는 삼성 라이온즈 좌타 계보 중 시작점.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등번호는 10번, 롯데 자이언츠에서는 20번이었다.[6] 좌투좌타의 외야수였고 지명타자로도 자주 출전하였다. 코치로서의 등번호는 83번(롯데) - 74번(삼성, 2000) - 83번(삼성, 2010~2011)

2. 선수 시절

아마추어 시절부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원래대로라면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시즌부터 뛰어야 됐지만, 그 해 벌어질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에 국가대표로 차출되면서 프로 데뷔가 한 해 미루어지게 됐다. 아마추어 시절에 알루미늄 배트 덕분에 장타력도 출중했다. 아직도 명 승부로 기억되고 있는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결승전의 4번타자는 바로 장효조였다. 하나 단점을 꼽자면 큰 경기에선 약하다는 점...(반면 이해창은 빅 게임에 강해서 서로 비교되기도 했다) 당시 서울 세계야구선수권 일본과의 최종전에서도 8회말 1사 1, 3루의 찬스를 2루 땅볼로 날려버릴 뻔했지만, 일본 2루수의 판단 미스로 병살타를 노리는 대신 홈으로 던져 3루주자 김재박만 잡혔고, 후속타자인 한대화의 극적인 결승 3점홈런으로 장효조의 삽질이 묻혔다. 그 외에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롯데 한문연의 플라이를 판단 미스로 만세를 부르는 통에 3루타로 둔갑시켰고, 타격 또한 정규시즌과는 딴판으로 허공만 가르는 등 한국시리즈에선 유독 재미를 못 봤다...

알루미늄 배트가 나무배트로 바뀌면서 장타력은 줄었지만, 1983년 데뷔 첫 시즌에는 안타를 117개나 쳐내는 등[7] 기록을 쏟아냈으나, 이미 성인무대에서 어느 정도 활약을 한 상태에서 입단했으므로 신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8]는 황당한 이유로 신인왕을 OB박종훈한테 넘겨줘야 했다.[9] 실제로 1991년에 벌어진 한일 슈퍼게임에서 선수소개 때 가장 큰 환호와 박수를 받았던 건 선동열도, 이만수도, 장종훈도 아닌 바로 장효조였다. 일본의 올드 팬들이 그때까지 장효조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아마추어 시절에 장효조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 데뷔시즌의 장효조가 얼마나 황당한 기록을 남겼냐하면 타율이 0.369에 홈런도 18개다. 클래식 스탯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타격이었으나, 더 흠좀무한건 세이버스탯. 출루율이 0.475, 장타율이 0.618, OPS는 무려 1.093, RC/27[10]의 경우는 99이승엽, 03심정수, 94이종범과 동급이다. 비록 당시의 게임수가 100경기에 불과하여 누적스탯에선 밀리지만, 비율스탯에선 역대 그 어떤 타자에도 밀리지 않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는데, 장효조가 날뛰던 시절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투고타저 시절이다.

이후에는 타율이 3할 이상에 오르며 4차례나 타격왕에 오르는 등. 안타 제조기, 타격의 달인, 타격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죽하면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 라는 말도 있었으니...... (교과서적인 타격을 한다고 우타자 김종모와 함께엮어 '좌효조 우종모'라는 말도 있었다) 다만 수비는 안습 홈런을 제외하면 타율은 1987년 0.387, 안타수는 1985년이 129개가 커리어 하이. 경기수 출장은 롯데 시절인 122경기로 한해 최다 출장을 기록했다.

프로 생활 10년 통산타율이 무려 0.331, 5년 이상 규정타석을 채운 한국프로야구 선수 중 최고. 통산 OPS는 0.886. 특히 선구안이 매우 좋아 통산 BB/K는 1.75(!), 출루율은 0.427(!)에 달한다. 남들 평생에 한번 하기도 힘든 3할7푼대 이상을 무려 3번이나 기록했다. 또한 당대 최고의 투수인 최동원에게 통산타율 3할 8푼 6리로 굉장히 강했다.

더구나 프로 입단호적상으론 27세 때지만, 사실은 29세(...)였다. 무슨 중남미 선수도 아니고[11][12]흠좀무.
장효조 이후의 한국프로야구 왼손 대두 교타자 라인은 이정훈 - 양준혁 - 장성호 - 이진영 - 김현수[13]로 이어지게 된다.

1988년 12월, 선수협 파동으로 인해 좌완투수 장태수와 함께 외야수 김용철, 투수 이문한을 상대로 롯데 자이언츠트레이드됐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의 횡포에 의한 보복성 트레이드의 피해자인 셈이다. 롯데로 트레이드된 후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허나 지금 롯데 팬들의 경우 최동원이나 박정태같은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언급할 뿐이지 장효조의 경우 연고지인 부산 출신임에도 타 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언급이 잘 되지는 않는다. 더구나 정작 소속 팀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하던 1992년, 장효조는 시즌 타율 0.265, 54안타라는 프로 데뷔 이래 최저의 성적을 기록했다. 본인도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스카우터로 복귀할 때 굉장히 기뻐했던 것을 보면 엄연한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대한 애정은 삼성에 대한 애정보다 많이 떨어진 듯하다.[14]
이와 함께, 롯데 이적 후에는 지명타자로 활동해 왔으며 홀수 해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등 그야말로 '격년제 징크스'를 겪었다.

3. 은퇴 후

1992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한 뒤에는 롯데 자이언츠삼성 라이온즈의 타격코치로 일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떠난 뒤 잠시 야구계와 거리를 두었지만, 2004년에 스카우터로 복귀했으며(동시에 삼성 리틀야구단 감독도 맡았다.) 2010시즌부터는 2군 수석코치와 타격코치를 겸하게 되었다. 공석이 된 스카우터 자리는 우용득이 하게 되었다. 말이 수석코치지 사실상 1군 감독이 2군을 총괄한다는 의미의 직책이기에 2군 감독이나 다름없었다.

류중일 감독이 부임한 2011 시즌부터는 2군 감독 직함을 달게 되었다. 여전히 타격코치도 겸하고 있었지만 8월 10일 강기웅이 2군 타격코치로 부임하며 짐을 덜게 되었다.

삼성 스카우터로 부임하기 전 코치를 하던 시절에는 선수들을 잘 지도하지 못했는데, 지도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 본인이 선수 시절 워낙 뛰어났던 탓에 선수들이 자신의 지도방식을 따르지 못한 이유가 컸다. 차범근? 난 선수 시절 이만큼 했는데 니들은 왜 그게 안 되니 스카우터로 현장직을 떠났다가 다시 현장에 돌아온 후 배영섭을 필두로 모상기, 정형식 등 2군의 여러 타자들을 키우며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했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 출범 30주년 기념으로 실시한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에 선정되었고, 7월 23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 식전 행사때 등장하여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그런데 이것이 팬들에게 보인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장효조가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제대로 꽃피워 보기도 전에 8월 21일 동아대학교 병원에서 투병 중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고,(당시 장효조는 자신이 무슨 병인지를 밝히지 말라고 부탁했다.#관련기사) 그의 건강 악화로 양일환 2군 투수코치가 그를 대신해 2군 감독 대행을 겸직했다. 결국 2011년 9월 7일 아침, 간암으로 58세라는 이른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발견 당시 이미 간암이 위암으로 전이된 상태여서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고.

9월 9일 아침에 부산광역시 서구 동대신동3가 동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발인이 엄수되었고, 금정구 두구동 소재 영락공원에 안장됬다.


생전에 2군에서 같이 일하던 코치 6명이 고인을 운구했고 가족과 친지, 류중일 삼성 라이온즈 감독, 구단 관계자 등 백여명이 운집하여 고인의 가는 길을 지켜봤다. 전설의 타자가 가는 마지막 길답게 전혀 쓸쓸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발인 당일 새벽 2시경, 광주 KIA 타이거즈전을 마친 삼성 선수단이 구단 버스로 문상을 와서 마지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고.

이렇게 거꾸로 방망이를 들어도 3할은 친다던 교타자의 전설은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장효조가 타계하고 일 주일 뒤, 최동원 선수가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묘하게도 최동원은 롯데에서 데뷔했지만 위의 트레이드로 인해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고 장효조는 비슷한 시기에 삼성에서 롯데로 트레이드되어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 명의 전설이 작고한 2011년 시즌 페넌트레이스 1, 2위는 경상도 지역 연고의 삼성과 롯데. 만약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붙게 되었다면 여러가지의 관점에서 많은 의미가 부여될 한국시리즈가 되었을지도....

4. 기타

  • 마구마구에서는 약간 느린 발이지만, 이를 송구로 커버하는 어깨 괴수로 출현..(...) 특히, 삼성 세트덱에서 레어 87 장효조나 엘리트 83 장효조는 레벨업시 컨텍 최상, 스로잉 최상괴물이다. 덕분에 우익수 플라이 이후 섣부르게 뛰었다간 금세 끔살당한다. 더욱더 충격적인건 여태나온 장효조 카드의 스로잉 평균은 86.6이다.

  • 대구상고시절부터 프로까지 항상 잘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모양. 고교 시절에는 4개의 주요 대회에서 3번의 타격상을 수상하고 소속팀의 우승을 4번이나 이끌었음에도 최우수 선수에 선정된 적이 없었다. 프로에서 와서도 위에 나온 것처럼 프로 첫해에 MVP급의 활약에도 시즌 MVP는 커녕 신인왕도 수상하지 못했다.

  • 고교선수 시절, 장효조에겐 또다른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도루가 그저 몰래 한 베이스 이동하는 기술정도로 치부되던 시절에 놀랍게도 홈 스틸을 성공시킨 적이 있었다. 그 점수는 그대로 결승점이 되어 그의 모교인 대구상고에 승리를 안겼지만 정작 본인은 홈 스틸을 성공시킨 후에 체력이 다해 기절하고 말았다. #

  • 최동원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가 5년만 빨리 생겼더라면 떡밥의 단골손님. 양준혁의 통산기록은 가뿐하게 넘었을 거라는 게 올드 팬들의 생각이다.

  • 통산 병살타가 31개(!)밖에 안 된다.(통산 타석수는 3632타석) 1%도 안된다. 흠좀무!

  • 전성기 시절 높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최다안타에서는 높은 순위에 들어보지 못했는데, 이는 장효조, 이만수 같은 주전 선수들은 체력 안배를 위해 삼미 슈퍼스타즈전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시절 삼미는 최약의 약체팀이었기 때문에 주전 타자들과 투수들을 쓰지 않고도 압도적으로 이겼다고 한다.

  • 한편 그가 쓴 10번은 훗날 양준혁의 번호로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2011년 10월 25일에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그의 아들이 시구를 했는데 등번호가 331이었다. 그의 통산 타율 0.331에서 유래한것. 일각에서는 331번을 영구결번 처리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거기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은 한국시리즈 한정으로 유니폼에 검정색 원형 패치를 달고 경기에 나섰다."효조 행님. 고마 한번만 도와주소."[15] 패치에는 LEGEND HITTER JANG HYO-JO라고 씌어 있고, 가운데에는 0.331이 씌어 있다.

  • 2011년 한국시리즈 당시 우승한 삼성 선수들은 하늘을 가리키는 세레모니를 했는데 이 세레모니는 하늘나라로 간 고인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긴 세레모니 였다고 한다.

  • 군인, 기업가, 정치인이었던 박태준 회장이 좋아했다고 한다. 1979년 한국실업야구팀 포철 야구단에 영입할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달라던 장효조에게 돈까지 얹어준 일화는 유명하다.

  • 여담으로 모 팀추모경기와는 달리 삼성은 현재까지 장효조의 기일에 펼쳐진 경기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16] 2014 시즌 장효조의 기일은 그 날 삼성이 경기가 없는 관계로 이 징크스는 2015 시즌까지는 쭈욱 유지될 듯.

5. 연도별 주요 성적

  • 한국야구위원회 기록실에 표기되는 리그 TOP 10위 이내 기록은 순위가 등재.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입상성적.

역대기록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1983 삼성 라이온즈 92 317 .369
(1위)
117
(1위)
19
(8위)
3
(9위)
18
(3위)
62
(3위)
61
(2위)
22
(4위)
.618
(1위)
.475
(1위)
1984 89 309 .324
(4위)
100
(8위)
19
(4위)
7
(2위)
7 44 56
(4위)
8 .498
(5위)
.424
(1위)
1985 107 346 .373
(1위)
129
(2위)
24
(2위)
1 11 65
(3위)
66
(2위)
17
(7위)
.543
(3위)
.467
(1위)
1986 95 304 .329
(1위)
100 20
(6위)
2 6 41 55
(7위)
16
(8위)
.467
(4위)
.436
(1위)
1987 88 284 .387
(1위)
110
(10위)
16 4
(9위)
2 58
(6위)
51 7 .493
(4위)
.461
(1위)
1988 96 283 .314
(8위)
89 12 2 4
(9위)
35 41 5 .413 .419
(4위)
년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장타율 출루율
1989 롯데 자이언츠 94 333 .303
(5위)
101 8 3 1 31 40 12 .354 .407
(3위)
1990 96 324 .275 89 13 4 1 22 36 8 .349 .347
1991 122 346 .347
(2위)
120 17 10
(2위)
4 54 45 11 .488 .452
(1위)
1992 82 204 .265 54 9 0 0 25 23 3 .309 .365
KBO 통산
(9시즌)
961 3050 .331
(1위)
1009 157 36 54 437 485 109 .459 .430
(1위)

역대수상
년도 수상내용
1983년 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4년 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5년 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6년 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1987년 프로야구 시즌 MVP
골든글러브 외야부분 수상

매일신문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불세출의 타격왕 장효조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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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제로 테드 윌리엄스도 같은 일화가 있다
  • [2] 마구마구에서도 이효봉 해설도 같은 말을 한바가 있다.
  • [3] 공식적으로는 1956년생이었으나 실제로는 2살 더 많았다. 즉 데뷔 시즌에 이미 대한민국 나이로 30세
  • [4] 그 동안 대구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매일신문에서 연재된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기사에 따르면, 출생지가 부산 영도라고 한다. 부산 영선초교(현재는 남항초교와 합병)를 다니다가 9살 때 대구로 이사와서 삼덕초교 2학년부터 야구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 [5] 당시 기사에 따르면 1979년에 입단해서 1980년 9월까지 포항제철에서 활약한후 10월부터 경리단 소속으로 뛰었다.
  • [6] 이 당시 롯데에서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자갈치' 김민호가 10번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 [7] 당시 1시즌 경기는 총 100경기였다(원년에 80경기, 이후 100경기로 늘어났고 증감을 거쳐 2013년부턴 128경기). 교타자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이 해에는 18개의 홈런을 쳐서 리그 3위를 기록(이는 1991년 쌍방울김기태가 27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신인 좌타자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다). 참고로, 1983년 홈런 1위는 이만수(27개), 2위는 김봉연(22개).
  • [8] 오마이뉴스의 김은식에 따르면 '참신성이 없다' 라고...사실 프로에 오기 전에도 성인 야구무대인 실업 야구에서도 커리어가 쌓인 고참급 선수이기는 했다. 입단 당시 나이만 봐도 현재를 기준으로 해도 중참에서 고참으로 넘어가는 단계.
  • [9] 이 이유에도 나름 근거는 있는게,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사실상 전신이라고 봐야하는 실업야구에서 충분히 활약을 한 선수를 신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느냐는 건데, 종목은 다르지만 프로농구에서도 이상민이 실제로 현대전자에 입단한 후 거의 뛰지 않고 바로 상무에 입대하고 프로 2년차부터 현대 다이냇 소속으로 뛰면서 MVP를 수상했음에도 불구, 신인왕 투표에선 주희정에게 밀렸던 예가 있다. 어떻게 보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일본리그출신 선수들에게 신인왕 자격을 주는것이 합당한가 하는 논란이 종종 벌어지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 [10] 같은 타자를 1번부터 9번까지 도배했다는 가정하에 9이닝 당 얻을 수 있는 예상 득점을 계산하는 기록, 자세한건 야구의 기록 계산법 참고.
  • [11] 장효조의 경우, 당시 대한민국이 못 살던 시절이라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죽는 경우가 많아 아이가 어느 정도 큰 후에 호적 등록을 해 호적 나이와 실제 나이가 차이가 나는 것. 잘 보면 실제로 우리 부모님 세대를 보면 그런 경우가 많다.
  • [12] 여담이지만 중남미 선수들은 나이가 어릴수록 계약금을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이를 속이는 것. 예외도 있긴 한데 아드리안 벨트레의 경우 천부적인 재능을 보고 계약했지만 계약 당시 나이가 만 15세라 만 16세부터 프로 활동이 가능한 메이저리그 규정때문에 일부러 나이를 만 16세라고 속였다. 하지만 이 페이크가 걸려서 결국 1년 정지를 먹고 진짜 만 16세가 되던 해부터 마이너 생활을 시작했다. 매우매우 희귀한 케이스.
  • [13] 하지만 이 경우, 투구와 일상생활은 오른손을 주로 사용하므로 엄밀한 의미의 왼손잡이는 아니다.
  • [14] 부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삼성의 스카우터로 복귀할 때 엉엉 울었다고 한다. 또한 부인은 남편이 우는 모습을 그때 처음 봤다고 한다. 초창기 한국프로야구에서는 트레이드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이였기에 선수들이 트레이드된 팀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떨어졌다. 최동원은 삼성으로 이적한 후 야구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고, 김시진도 롯데로 이적한 후 마찬가지였다.
  • [15] 류중일 감독의 우승 후 실제 인터뷰 내용.
  • [16] 매년 6월 10일김상진의 기일만 되면 KIA는 대부분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