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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연

last modified: 2015-04-14 11:16:32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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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호연 (張浩淵)
생년월일 1960년 5월 5일
출신지 대구광역시
학력 충암고[1] - 동국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OB 베어스 1차 지명
소속팀 OB 베어스(1983~1995)

1984년 한국프로야구 평균자책점 1위
기룡(MBC 청룡) 장호연(OB 베어스)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Contents

1. 소개
2. 은퇴 이후
3. 연도별 성적

1. 소개

전 프로 야구 선수로 OB 베어스 소속의 투수. 등번호 31번.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 OB 베어스에 입단하여 1995년 은퇴할 때까지 13시즌 동안 계속 OB에서 활동하였다. 베어스 역사상 한 팀에서 100승 이상(통산 109승)을 거둔 유일한 투수이다.

장명부, 조계현 등과 함께 한국프로야구 역사에서 기교파 투수의 대명사로 꼽히는 선수로 독특한 야구 철학과 기행으로 지금도 많이 이야기되는 선수. "1:0으로 지는 투수보다는 10:9로 이기는 투수가 훌륭하다"[2],"공 세개로 삼진을 잡는 것 보다 공 하나로 맞춰 잡는 게 효과적인 투구다"같은 말이 유명하며 그다지 빠르지 않은 구속[3][4][5]을 커버하기 위해 자기만이 개발한 다양한 구질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6]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체인지업,그리고 슬라이더와 커브의 장점을 합친 슬러브를 제대로 구사한 투수이며 투심 패스트볼을 개량한 원심 패스트볼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또한 싱킹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써서, 땅볼을 유도해서 "공 하나로 맞춰잡는" 능구렁이같이 지능적인 투구에 얼굴도 왠지 중국인을 연상시킨다 해서 '짱꼴라'(장꼴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한 마운드에서 같은 구질을 두번 이상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구질을 보유한 팔색조.(130km대의 몸쪽을 파고드는 절묘한 직구에, 날카로운 슬라이더, 체인지업, 주무기 싱킹 패스트볼과 슬러브 그 외 여러가지.) 1994년 야구 관계자 설문 조사에서 가장 많은 구질을 던지는 투수 1위에 꼽힌 적이 있다.당시 신문기사 자료

매년 연봉 협상에서 굽히지 않는 자세로 시간을 끌면서 전지훈련에 불참하기 일쑤였지만(임의탈퇴까지도 가보았다.)[7] 자기관리에 철저한 선수였기 때문에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다.[8]

당시 투수로는 드물게 하반신의 중요성을 인식해서 매년 비시즌에 스키로 다리 근육을 단련했으며, 프로야구 선수는 몸이 생명이라는 철학으로 1988년에는 튼튼하기로 유명한 초고급 벤츠 차량을 구입해서 몰고 다녔다든지 하는 것은 그가 굉장히 앞선 사고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9]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야구계에서 적이 많았으며, 매년 연봉 협상에서 구단과의 마찰과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지금도 두산 구단과는 견원지간.

1988년에는 개막전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개막전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 기록이 대단하고 특이한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원래 그가 등판할 경기가 아니었다는 것으로 이 경기에 선발 등판 예정이었던 김진욱이 연습 중 동료의 타구에 영 좋지 않은 곳을 가격당하며 그가 대신 서게 되었던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프로야구 사상 초유의 無탈삼진 노히트노런. 그는 볼넷 세 개를 허용하면서 삼진은 한 개도 잡지 않고 27명의 타자를 전부 땅볼이나 플라이 등의 범타로 처리했다. 세 번째는 99개의 투구수로 최소 투구 노히트노런 기록이라는 점. 노히트노런이라는 기록도 대단한데 개막전, 무탈삼진, 100개 미만 최소투구수 노히트노런이라는 점이 기록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다만 이 기록을 세운 곳이 홈이 아니라 하필 롯데의 홈인 사직 야구장이라 장호연은 제대로 세레머니도 못하고 성난 관중들을 피해 버스로 재빨리 도망쳐야 했다고...[10]

통산성적은 13시즌동 안 1,805이닝을 던져 109승 110패 평균자책 3.26. 전형적인 완투형 선발투수로[11] 1990년대 중반까지 OB의 에이스 역할을 해주었으며 두산 구단과는 끝내 좋게 헤어지지 못했으나 지금까지도 두산 베어스 역사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가져다 준 투수는 장호연이다.

2. 은퇴 이후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효천고에서 조용준[12]을 발굴했고, 그 밖에도 박명환,임창용,윤길현등의 투수를 발굴했다. 2003년 신일고 감독을 맡아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2004년에 자기 팀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위해 야구협회의 규정을 어기고 스카우터들을 볼러 임의적인 공개 테스트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 대한야구협회에 의해 무기한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단순한 테스트 차원이 아니라, 테스트에서 합격하면 커미션을 일정액 수수하기로 협정을 맺었다고 한다. 결국 이 협정이 문제가 되면서 무기한 자격정지.

사실 이건 장호연도 억울한 면이 있는데, 그는 전혀 이 계약서로 돈을 벌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문제가 되기 전에 스스로 이 계약을 폐기하였다. 이미 폐기된 계약으로 징계를 때려서 변화구에 관한한 한국에서 가장 노하우를 축적한 사람이 야구계에서 영구퇴출되었으니...

장호연의 무기한 자격정지는 신일고로 전학온 그 해 최고의 포텐셜덩어리중 하나였던 서동환의 멘탈 붕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장호연은 국내 야구계에서 공식적으로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는 상태이며 간간히 사회인 야구에서 선수로 뛰거나 아마추어 선수들의 인스트럭터 노릇을 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려오고 있다.

2010년 홍윤표 원로기자의 칼럼에 따르면 대한야구협회에서 "그 동안 장호연이 사회봉사를 하는 등 '개전의 정'을 보였고 앞으로 재발할 경우에는 어떤 처벌도 감수한다."는 각서를 받고 징계를 해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징계 해제 이후에도 야구계로 복귀하지는 못하고 있는 듯.

최근 대구광역시 주재의 한 사회인 야구단에서 일반 사회인 선수들을 상대로 학살을 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다. 나이를 먹엇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에서 통하던 그 팔색조의 변화구를 잘 써먹어가며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다. 이래저래도, 과연 프로는 다르다.

2007년, 휘문고에 다니던 그의 아들 장영빈이 국내 최초의 스위치투수로 화제가 되었다.
http://sports.media.daum.net/ncenter/debate/baseball/#read^bbsId=F001&articleId=215422
그러나 장영빈은 실제 공식 대회에서 투수로 등판한 기록은 전혀 없었으며 2008년 말 돌연 경북고로 전학했다. 아마도 휘문고에서 주전을 차지하지 못하자 주전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간 듯하다. 전학 직후 유급해 2009년에는 1경기도 나오지 않았으며 2010년에는 타자로만 뛰었다. 대학 진학에는 실패. 그러나 아직 야구는 포기하지 않았는지 고양 원더스에 도전했다고 한다. # 다만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별다른 근황이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갑자기 도전에 나선 것이어서 다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 결국 합격자에 들지 못했다.


이후 아버지가 속한 사회인 야구단에서 야구를 하고 있음이 목격되었다. 여담으로 장영빈은 좌타다.

3.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83OB 베어스 34 155⅓ 6 17 2 0 4.23 165 81 31
1984 31 102⅓ 5 3 1 0 1.58
(1위)
77 39 47
1985 29 128⅔ 7 4 1 0 3.50 110 67 46
1986 31 165⅔ 13 9 3 0 1.90 136 51 44
1987 32 188⅓ 15
(3위)
8 6
(3위)
0 2.82 170 84 73
1988 36 146 8 12 1 0 3.95 163 50 46
1989 30 171 9 12 0 0 3.47 143 80 72
1990 19 110⅔ 5 8 0 0 4.55 108 52 34
1991 12 99⅓ 6 4 1 0 2.27 85 25 37
1992 35 225
(1위)
16
(5위)
12 2 0 3.12 225 71 90
1993 27 161⅔ 10 9 0 0 2.56 134 46 51
1994 15 71⅔ 2 6 0 0 4.52 75 32 26
1995 15 79⅓ 7 6 0 0 5.33 89 34 28
통산(13시즌) 346 1805 109 110 17 0 3.26 1680 712 625

완투, 완봉기록
년도 완투 완봉
1983년 3완투 1완봉
1984년 0완투 0완봉
1985년 5완투 0완봉
1986년 10완투 4완봉
(3위)
1987년 13완투
(4위)
2완봉
1988년 3완투 1완봉
1989년 3완투 1완봉
1990년 4완투 1완봉
1991년 10완투[13] 2완봉
(4위)
1992년 17완투
(1위)
1완봉
1993년 9완투 3완봉
(5위)
1994년 1완투 0완봉
1995년 1완투 0완봉
통산 79완투
(3위)
16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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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구상고에 입학했으나 나중에 충암고로 전학을 하게 된다. 전학 당시 대구상고에서는 전학동의서를 써주지 않았는데, 당시 충암고 감독이던 김성근이 "책임지고 대학에 보내준다"고 해 전학부터 하고 나중에 동의서를 받았다고 한다.
  • [2] 김은식의 책에 의하면 이 말은 와전된 것으로, 점수를 많이 줘도 상관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고 있더라도 자신있게 공을 던져 실점을 끊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말이었다고.
  • [3] 평균 130km 후반대의 패스트볼을 던졌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성준이나 전병호 같은 '흑마구' 타입의 선수는 아니고 그냥저냥 쓸만한 수준의 직구. 당시는 140km 이상 정도가 강속구 취급을 받았다.
  • [4] 직구구속과 관련된 일화로 차명석이 해설 도중 자신의 공이 느린 까닭이 본인이 학창시절에 롤 모델로 삼은 스타 플레이어가 하필 장호연이었다고 언급하며 자기 디스 와중에 깨알같이 장호연도 깠었다(..)
  • [5] 정작 본인은 현역시절 '느린 공도 빠른 공이 없으면 얻어맞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6] 당시 '12가지 구질을 던진다라는 소문도 있었고, 본인은 6가지 정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 [7] 강병규는 신인 시절 장호연의 이러한 모습에 감탄(?), 장호연의 거의 모든 것을 습득해버리고 만다.성적빼고
  • [8] 통산 79완투로 역대 완투 순위 3위이다.
  • [9] 지금이야 뭐라 하지는 않지만 1980년대 당시엔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것은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장호연도 안팎의 비난에 못 이겨 얼마 못 가 벤츠를 처분하고 국산차로 바꾸었다는 후문.
  • [10] 요즘이야 관중문화가 어느정도 성숙해서 관중 난동같은 것은 극히 보기 드물지만 이 당시만 해도 홈팀이 참패하거나 판정시비가 일어나는 날엔 관중들의 난동이나 소요사태가 연례행사였다. 이날도 성난 롯데팬들의 시위로 OB 선수단을 태운 차량이 몇시간이나 구장을 못 빠져나갔다는 조범현 감독(당시 OB 포수)의 회상도 있다.
  • [11] 1991년에는 연봉 갈등으로 임의탈퇴되어 후반기부터 등판이 가능했으나 12경기(11선발)에서 10완투 2완봉을 기록하기도 했다. 역대 두자릿수 완투 선수 중 유일하게 100이닝을 넘기지 못한(99.1이닝) 선수.
  • [12] 이 때는 아직 프로 출신 인사들의 아마야구 지도자 진출 규제가 풀리지 않아 정식 감독 신분이 아니었다.
  • [13] 선발등판 11번에서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