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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last modified: 2015-01-29 22:37:5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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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張澤相, 1893년 10월 22일 ~ 1969년 8월 1일).

Contents

1. 소개
2. 친일 가정
3. 생애
3.1. 출생과 생애 초기
3.2. 청년기
4. 유학
4.1. 해방 이후
4.2. 정부 수립에 참여
4.2.1. 장관 시절
4.2.2. 화려한 외출과 복귀
4.3. 야당 정치인
5. 기타

1. 소개

대한민국독립운동가·정치인·경찰관.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 오태동(현 구미시 오태동) 출신. 자는 치우(致雨)이며 어릴적의 이름은 삼욱, 호는 창랑(滄浪). 경기도감사를 지낸 승원과 어머니 풍양조씨의 셋째 아들이었다. 위로는 길상, 직상(총독부 중추원 참의직 지냈다)이라는 두 형이 있었다.

2. 친일 가정

그의 부친인 장승원은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탐관오리중 한명으로, 청송군수로 재직할 때에는 경북관찰사 자리를 꿰어차기 위해 고을 주민들을 족치다 결국 면직되었다. 하지만 어찌어찌하여 결국에는 목표로 하던 관찰사 자리에 올랐으며, 그의 행적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매천야록의 '탐학으로 누거만 쌓았다' 라는 기록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또한 시세를 보는 눈도 뛰어나 일제 치하에서도 재산을 굴리며 경북 최고 부호인 동시 에 한강 이남 10대 부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의 두 형인 장길상과 장직상 또한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는데, 장길상은 친일 악덕 지주로 그 명성이 자자했으며 장직상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직을 무려 세차례나 지낸 전형적인 은행가 친일파였다.

3. 생애

3.1. 출생과 생애 초기

경상북도 칠곡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10대 선조는 조선 중기의 사림파 학자인 헌 장현광으로[1] 할아버지 장석용은 호조 판서이고, 아버지 장승원은 경상도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아버지 장승원은 대지주이기도 했는데, 한때 후에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의 둘째 형 무희가 장승원 집안의 마름으로 소작농을 하기도 했다. 그때문에 박정희는 장택상을 껄끄럽게 생각했다.[2]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근대식 학교에 입학했으며, 유년기에 임진왜란 때의 장군 류성룡의 후손인 양반가 딸과 결혼했으나 일찍 죽고, 청년기에 부인 연식과 재혼했다. 김연식에게서는 병혜, 병민, 병초, 병화 등의 딸과 아들 병청 등이 태어났다.

3.2. 청년기

본인은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장승원은 친일파였다(…). 장승원은 1917년, 대한광복회를 이끌던 박상진 의사가 보낸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4. 유학

일제강점기 해외 유학, 열차로 만주에 갔다가 아버지 장승원의 친구인 이상설을 만났다.[3] 그에게서 민족혼에 대한것을 주입받은 뒤, 그의 추천장을 들고 열차로 시베리아에 갔다가 여러 사람을 만나 중간 중간 숙박하면서 추천장을 들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식으로 소련을 거쳐 독일에 도착했다.

도산 안창호가 잠시 독일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 독일을 헤매다가 우연히 안창호를 만났다. 안창호는 그에게 낚시를 시전했다.[4] 안창호의 달변에 감동받은 장택상은 후에 진짜 해방 조국의 대통령감인 분인데 일찍 돌아가셔서 아쉽게 됐다며 한탄하기도 했다고.[5]

프랑스에서 여비가 떨어졌을 때 그는 한 프랑스 아가씨와 사귀며 그로부터 차비를 얻기도 했다. 장택상은 프랑스를 떠나면서 그녀를 잊지 못해 50년 UN에 파견되는 대표로 왔을 때 그녀의 집을 찾아 길을 헤매다가 못찾았고, 보좌진들이 그를 찾아다녀서 겨우 찾았다.[6]

그뒤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도착했으며 든버러 대학에 입학했으나[7], 든버러 대학을 중퇴했다. 그뒤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 국내에서는 몇몇 독립운동가를 숨겨두었다는 이유로 가택수색을 당하기도 했고 청구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룬바 있었다.

42년에는 안재홍, 송진우, 여운형, 윤치영, 김성수 등과 함께 이승만이 미국의 방송에 출연한 프로그램 미국의 소리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단파를 밀청하다가 걸리기도 했다고. 이후로 일본은 패망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4.1. 해방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8] 미군정에 채용되어 경기도경찰청 경찰부장, 제1관구 경찰청장, 수도경찰청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직후 제1대 외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정국에서 좌파 킬러로 알려졌지만 여운형, 여운형의 사돈 만규 등과도 인간적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때문에 여운형과 이만규에게 좌우대립이 극심하여 목숨이 위험하니 정계를 은퇴하여 시골에 은거하거나 북으로 가라고 권유하지만, 장택상이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한 한민당에 가담했고 미군정에 채용된 수도권 경찰청장 직위에 있는 상황에서 그의 인정은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특히 통일에 목숨을 걸었던 정치가 여운형에게는. 여운형이 암살당한 그날 장택상이 그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자 맏딸 난구가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뭐하러 여기왔느냐? 썩 나가라"고 소리질렀고 장택상이 우물쭈물 하다가 가버린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한편 이만규는 정치가라기 보다 학자였기 때문에 장택상 조언대로 북으로 건너가서 잘살게 되었지만.

여운형 암살 당시의 정황을 보면 상당부분 관여 내지는 방조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여운형 암살 당시 축구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 집으로 돌아가던 여운형의 차를 트럭이 막았고 저격이 있었다. 같이 있던 여운형의 비서가 저격범을 쫒으려하자 옆에 있던 경찰들이 그 비서를 암살범이라 붙들었다.(이거 말이 되나? 그런데 송진우 암살때는 그의 전직 경호원이 암살에 참여했다...) 당시 경찰 총수가 장택상이었으니 최소한의 관련성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악질고문경관 노덕술등을 총애하고 의열단을 이끈 무장투쟁독립운동가 김원봉을 붙잡아 고문해서 끝내 월북시키고 발췌개헌이 통과하는 데에 공헌하는 등 근현대사의 막장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인 걸 생각하면 결코 호의적으로 볼 수 없는 인물이라는데,저건 그나마 양호한것이다. 김원봉은 죽지않고 고문만 당했으니... 장택상의 진면목은 극우 테러를 묵인,방조한것이다(...) 미군정의 협조도 있고.

4.2. 정부 수립에 참여

4.2.1. 장관 시절

정부수립 뒤에 그는 내무장관에 임명됐으나 이범석의 실수로 외무장관으로 나가게 됐다. 그러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기로 했다가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윤치영과 서로 오해하면서 앙숙이 되어버린다.

정부수립 초기에 그는 이승만에게 건의하여 건상의 영입을 추진했다. 건상의 회고[9]에 의하면 어느날 자신을 부른 장택상이 수도청에 앉아있다가, 장건상 본인이 들어오자 감격받은 듯이 무릎을 탁 치며 형님! 됐습니다. 라는 것이다. 건상이 연유를 묻자 장택상은 장건상에게 장관직에 인선하라는 이승만의 승인이 떨어졌음을 말했으나, 장건상은 원래 복에도 없는 벼슬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단독 정부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이니 참여할수 없다 며 거절 의사를 나타냈고, 장택상은 아쉬워 했다고.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하기도 한 건상경상북도 칠곡 출신으로 장택상과는 같은 항렬의 먼 친척이었다. 그래서 10년의 나이 차이에도 형-동생 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냈다. [10]

이후 이범석, 윤치영 패거리, 이기붕 패거리와 함께 이승만에 대한 충성경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범석이나 장택상 중 승자가 나올거란 예상을 뒤엎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은건 허약하고 세력도 가장 약했던 이기붕이었던 것....

조봉암과 친분이 있었는데, 장택상 자신이 UN 대표로 파견될 때는 가족들에게 내가 없는 동안 조봉암을 따르라 하고, 출국 전에 조봉암에게 가족을 의탁하니 조봉암은 감동받았다 한다. 조봉암이 사형 선고를 받았을때 차마 이승만이 조봉암을 어찌 못할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6.25 전쟁 휴전 후에는 조봉암, 신익희와 함께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사수한다 해 놓고 내뺀 것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으나 퇴짜 맞았다.

이범석과 함께 우익 청년단체를 동원해 부산정치파동사사오입 개헌을 도왔으며 1952년 5월 6일부터 1952년 10월 5일까지 대한민국의 제3대 국무총리을 역임하였다. 국무총리 재직 중에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이범석의 3대 부통령 출마를 낙선시키기도 했다.[11]

이범석은 장택상을 경찰에 고소했지만 그곳이 어딘가. 통할 리도 없었다. 이범석과 족청계는 그뒤 장택상이 일본인으로 일제강점기에 경기도지사를 지낸 일본인을 부산 항구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혐의로 , 장택상은 친일파~ 라는 노래를 불러서 장택상을 낙마시켰다.[12]

4.2.2. 화려한 외출과 복귀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조봉암의 호헌동지회(민주당의 전신) 참여를 적극 찬성했고, 조병옥, 장면, 곽상훈 등의 맹렬한 반대로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입성이 좌절되자 다시 자유당으로 되돌아갔다.

1959년 조봉암이 구속됐을 때 홍진기 법무부장관 등에게 조봉암의 무고함을 설명했고 그를 변호하는 글까지 직접 작성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4.3. 야당 정치인

그뒤 1958년 이범석과 손잡고 공화당 이라는 당을 만들려다 실패했으며, 이승만이 떠나고 이기붕의 자살 이후 썰렁해진 자유당을 떠맡아 운영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기간 중에 정치활동은 야당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박정희 정권 초기엔 한일협정 반대 시위윤보선, 함석헌 등과 함께 가담하기도 했다.

5. 기타

이상한 소문[13]도 있지만, 장택상은 독립운동가 맞다. 다만 후에 노덕술을 중용한 것이 흠좀무... 일화에 의하면,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맞았는데 훗날 그 경찰에게 의욕이 있고 능력이 있으니 채용했다는 야사가 있다.(인격이 훌륭하다는 이미지를 퍼뜨리기 위한 소문이 있다. 그래도 경찰들로 하여금 극우테러를 비호하는 건 인격이 훌륭하지 않다...)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재학중인 김영삼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킨 것도 장택상이다. 1958년 공화당을 조직할 때는 김대중을 일시적으로 대변인으로 채용하기도 했다.[14]

괄괄하고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다. 사람은 좋은데, 하는 일에 철저한 타입(하는일은 극우 테러를 비호하고 묵인하는거).

도자기, 그림 등 고미술품 수집이 취미였으며, 고미술품을 감정하는 데도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위의 이유에서인지 브루스 커밍스의 책에는 당시 미 군정청 관리들의 평가를 인용해서 네로괴링을 합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해방 전후를 다룬 드라마에서 늘 간신배 비슷하게 나온다.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서는 이정길씨가 장택상역을 맡아서 고 김무생씨가 맡은 조병옥과 공작정치를 수행하는 것으로 나온다.

야인시대에선 같은 이환경 작가가 쓴 태조 왕건에서 박영규역을 맡았던 임혁주씨가 맡아서 연기를 했는데, 박술희역을 맡은 김학철씨의 조병옥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조병옥 역의 김학철씨정도는 아니지만 실제 인물의 외모와의 싱크로도 상당한 수준. 다만 후반까지 계속 나오는 조병옥과는 달리 후반되니까 등장이 없다.

서울 1945에서 그의 독립운동 경력은 전혀 소개되지않고 오로지 좌익세력을 축출하는데 앞장섬. 인물 자막 소개 등에 강조하면서 오로지 친일파이면서 빨갱이 축출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故 홍덕영 옹의 증언에 의하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아시아 예선 당시 축구협회장으로서 선수들에게 "일본에 지면 현해탄을 건너올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던 장본인이라고 한다. 장택상 이 아저씨가 진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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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장현광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당파로는 남인 계열이었으며 정조 독살설을 제기하고 거병하려다가 실패한 장현성 형제 등도 장현광의 후손이다.
  • [2] 장택상의 정치적 제자가 후에 야당 총수가 된 김영삼이란 것도 박정희가 장택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됐다.
  • [3] 헤이그 밀사사건에 파견된 그 이상설이다.
  • [4] 안창호는 그에게 왜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가, 왜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며 장택상 스스로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며,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의 입으로 답하게끔 질문했다.
  • [5] 1938년 안창호가 병원에서 죽었을 때는 부인 김연식을 데리고 안창호의 빈소에 당당하게 문병을 다녀오기도 했다. 문병 정도야 무슨 문제인가 하겠지만 당시에 조선총독부령에 특정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입원이나 장례에 대해서 언론인이나 관료들의 접근및 보도를 제한할 정도로 감시가 심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대인배라 볼수 있다.
  • [6] 그러나 쪽팔려서 차마 그녀를 찾으러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소리는 차마 못했다고.
  • [7] 윤보선도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부인 장택상과 고고학과인 윤보선은 학과가 달랐다.
  • [8] 이에 대해서 알려진 비화는 다음과 같다. 장택상이 고향에서 은거하고 있는데 여운형이 명망가인 자신을 안불러줬다고 삐져있는 상황에서 ?김성수 로부터 급히 상경하라는 전보가 날아들어와 경성에 오게 되었다. 때마침 안국동로터리에서 친구였던 야자 이만규를 만났고, 야자는 "오 창랑! 마침 자넬 찾고 있었네. 어서 몽양댁으로 가세."라고 하였으나 "난 선약이 있으니 다음에 만나세"라며 거절, 창랑은 건준이 아닌 한민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 [9]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에 기록한 것에 의하면
  • [10] 장건상이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장택상이 직접 축하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고... 장건상은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의 부당수 노릇을 하다가 여운형이 암살된 뒤에는 근로인민당의 당수로 남북협상에 참여,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 [11]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이범석의 족청의 규모가 커지자 이를 경계한 이승만의 의도와, 이범석, 윤치영 등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을 이승만에게서 떼어 놓으려는 미국의 압력도 작용했다. 그러나 이범석이 쫓겨난 뒤 어부지리 격으로 2인자 자리는 이기붕이 차지했다.
  • [12] 당시만 해도 일본과 정식 외교 관계가 없었고, 만났다는 혐의의 일본인이 조선총독부 고위관리이다. 다만 이 사건은 진짜로 있었는지는 논란이 심하다. 장택상은 친일파~~ 정도 노래가 아니라 장택상은 총독부 고관 아무개와 일본에서 회담해서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논의했다식의 이적행위로 몬 것... 비슷한 류의 폭로가 신익희가 당시 납북돼서 북한에 체류중인 조소앙이랑 뉴델리에서 만나서 중립화 통일을 논의했다는 뉴델리 밀회사건이 있다.
  • [13] 이 글에는 출처가 리영희의 저서라고 되어있는데, 이 책에도 이런 내용이 없다(...).
  • [14] 그때문에 좌파킬러 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여운형, 만규, 조봉암과 친하게 지낸 점, 김영삼의 정치적 스승이라는 점 등 때문에 현재의 우익이나 뉴라이트로부터는 껄끄러운 인물 정도로 기억되기도..
  • [15] http://blog.naver.com/t016mm/1200177567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