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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last modified: 2014-10-29 23:46:40 Contributors

Contents

1. 소개
2. 생애
2.1. 생애 초기
2.2. 애국·계몽 운동
2.3. 일제강점기 활동
3. 사후


1. 소개


장지연(張志淵, 1864년 ~ 1921년 10월 2일)은 대한제국의 애국·계몽 운동가, 언론인이다. 1905년 황성신문에 주필로서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기고해 유명하다. 본명은 장지윤(張志尹). 호는 위암(韋庵). 위암?

구한말기에 애국·계몽 운동에 엄청난 공적을 남겼으나 경술국치 이후 실의에 빠져 1914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논설 730여 편이 문제가 되어 친일 의혹 논란이 현재 계속된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186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에 향시에 붙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다. 이후 과거에 4차례 응시했으나 낙방. 1894년 2월 식년시 진사시에 붙었으나 이 무렵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2.2. 애국·계몽 운동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8년 4월에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변명해 발행에 참여했고 9월에 '황성신문'으로 개편해 창간할 때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 10월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 순종이 외교권을 일제에 이양하자〔순종실록, 순종 4권, 3년(1910 경술 / 대한 융희(隆熙) 4년) 8월 29일(양력) 2번째 기사 참조〕, 바로 다음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11월 21일 투옥되었고 이어 황성신문도 정간되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때 장지연은 을사오적은 물론 참정대신 한규설도 "명색이 정부 수석이라는 자가 을사조약 체결도 못 막은 주제에 무슨 낯으로 숨을 쉬냐" 고 엄청나게 깠는데, 그 한규설은 죽는 날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는데 반해 장지연은 말년에 친일했다. 저 세상에서 한규설을 만났으면 기분이 어땠을까...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부터에도 장지연은 구국 애국·계몽 운동하면서 수많은 교육 활동해 왔다.

친일 단체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한자강회한협회의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면서 1년 가량 머물렀고 귀국해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서 일했다. 이 경남일보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되고 복간되는 부침을 겪었다.

2.3. 일제강점기 활동

그러나 일제강점기1914년에서 1918년까지 나쁜 행실로 남긴 흔적 탓에 논란이 상당하다. 1914년에 장지연은 조선총독부의 어용신문사인 매일신보주필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친일 한시와 사설 730여 편을 기고했다.

그 사람이 매일신보 주필로서 활동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장지연은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사 내홍 탓에 퇴사하고서 조선총독부 인사인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활동했다. 이런 행보는 당시 지식인과 유림에게 많이 비난받았다. 이런 비난을 두고 장지연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원고 내용은 일사유사, 종교 풍속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조건에 입각해 매일신보에서 활동한다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장지연의 논설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성을 띤 언설이 상당수 존재한다. 이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언론인 부분에 선정되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는 논란할 여지가 상당하다. 이 무렵 장지연의 행보를 간단히 정의하면, '구한말기 애국·계몽 운동했으나 성과가 없고 망국해 실의에 빠졌다.'고 해석 가능하다.[1][2]

매일신보 주필로서 근무할 무렵, 장지연은 매일같이 실의에 빠진 상태로 술에 너무 의존해 쪄들어 지냈다. 스스로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 모양이다.

1918년 12월 1일자 매일신보에 논설 기고를 마지막으로 이후 1919년 4월 경남 양산을 유람하기 시작해서 3.1 운동때는 별 말 없었고 1921년 1월에 결국 병들었다. 회복되지 않고 병세가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평소 에 쪄들었던 생활을 끊으면서까지 치료에 몰두했지만, 그해 10월 2일 죽었다.

3. 사후

1962년 대한민국 행정부 측이 건국훈장을 추서했으나 1990년대부터 현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강명관과 재야사학자 이화 등이 한 연구 덕분에 친일 의혹이 제기되어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2010년 12월에는 국가보훈처에서 건국훈장 서훈 취소를 결정했고 2011년 4월 5일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는데 후손들이 제소해 서울행정법원에서 2012년 1월 20일 서훈 취소 무효라고 판결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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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혹자는 장지연의 성품으로 보건대, 장지연은 전형이 될 만한 선비 정신이 있는 유생이었다. 구한말기에는 매국 단체 일진회와 정면으로 맞짱 까는 등 연해주에서 주도한 애국·계몽 운동을 감안하면, 경술국치를 맞으면서 자신이 구한말기 활동한 애국·계몽 운동이 성과가 없자 실의에 점점 빠졌다고 해석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근데 너무 봐줬네요
  • [2] 유사한 케이스가 윤치호다. 장지연이 술에 찌들어 살다가 죽었다면, 윤치호는 본격으로 흑화하여 국개론의 선구자가 된다.
  • [3] 대통령에게만 권한이 있는 서훈 취소 결정을 국가보훈처에서 내린 것이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판결이지 친일 의혹 사실 여부를 다룬 판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