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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last modified: 2017-02-17 00:04:23 Contributors

고구려의 역대 국왕
19대 광개토왕 고평안(고담덕) 20대 장수왕 고거련 21대 문자명왕 고나운

[1]
시호 장수왕(長壽王) / 강왕(康王)[2]
고(高)
거련(巨連/巨璉)
생몰년도 음력 394년 ~ 491년 12월 (98세)
재위기간 음력 413년 10월 ~ 491년 12월 (78년 2개월)

Contents

1. 개요
2. 내정
2.1. 평양 천도
3. 외정
3.1. 남진정책
3.2. 왜와의 관계
3.3. 중국 북위,남조와의 교섭
3.4. 지두우 분할 시도
4. 삼국사기 기록


1. 개요

고구려의 제20대 . 394년에 태어나 413년 음력 10월에 왕위에 오르고 491년 음력 12월에 사망하며 재위를 마첬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전하는 시호는 장수왕(長壽王)이다. 말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오래 살았다는 뜻의 장수이다.[3] 는 거련(巨連). 단순 한자풀이로는 크게 잇는다는 뜻. 아마도 부왕인 광개토왕의 뜻을 잇는다는 의미일 듯 하다. 중국에서는 줄여서 연(璉)이라 기록했다. 북위측에서 내려준 시호는 강(康). 하지만 북위에서 시호를 내린 것도 잘 알려저 있지 않고, 강왕이라고 불리지도 않는다. 조선 왕들이 청나라로부터 시호를 하사받았으나 듣보잡인것과 마찬가지. 다만 북위에게 시호를 하사받은 건 독자적인 외교의 산물,청에게 하사받은건 굴욕으로 여겨지는 이상한 경향이 있긴 하다. 뭐 시호를 내린 분위기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시호인 장수(長壽)처럼 98세까지 매우 오래 산 왕이다. 의학이 발달한 21세기에도 98세까지 생존하기는 굉장히 힘들며, 5세기 당시의 의학과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정말 오래 살았다. 게다가 재위 기간은 총 79년. 위의 연도를 보다시피 5세기 초부터 5세기 말까지가 장수왕의 치세라 사실상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의 단독 치세였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길다(...). 덕분에 다음에 즉위한 문자명왕은 장수왕의 아들이 아닌 손자다. 그 태자였던 조다는 부왕이 너무 오래 재위한 탓인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아바마마가 너무 오래 해먹고 계시니 제가 일찍 요단강 건너도 불효는 아니죠? 떠도는 이야기엔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왕도 못 된 조다같은 놈"이란 뜻에서 쪼다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무근이다. 애초에 왕족의 이름이 평민들에게 그렇게 막 퍼지는 것도 아니고, 낭설일 뿐 근거는 없다. 비슷한 이야기로 "염장 지르다"란 말이 장보고를 죽인 염장에게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인 광개토왕이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였고 장수왕도 거란, 백제신라를 공격했기에 정복군주라고 알려져 있지만 장수왕은 광개토왕처럼 공격적인 정복군주는 아니였다. 광개토왕은 정복사업을 국가 1순위 사업으로 삼아 재위기간 내내 정복전쟁을 벌였지만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으로 변모한 고구려 사회를 안정시키는 내치에 주력했다. 지두우 분할 시도나 백제 한성 공함은 분명 정복사업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지두우 분할 시도는 물길이 북위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치려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고 백제 한성 공함은 개로왕이 고구려에게서 이탈하려던 게 원인이었다.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이 능동적이라면 장수왕의 정복사업은 비교적 수동적이다.

장수왕이 죽자 북위 황제가 애도식을 거행했다. 백제나 신라의 경우도 왕이 죽었을 때 중국 황제가 애도를 한 적이 있으므로 특수한 사례는 아니다. 더구나 장수왕 말년에는 북위 황실과 고구려 왕실이 혈연으로 묶여 있었으니 납득이 안되는 일도 아니다.

일각에서는 장수왕을 장수태왕이라 하기도 하는데 고구려의 칭호를 따르자는 의의는 좋으나 사료에서 장수태왕이라 기록된 예가 없다. 장수왕 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는 중원고구려비에 태왕이라는 용어가 보이긴 하나 시호인 장수와 함께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일단 기록에서 확인되는 유일한 시호인 장수왕이라 하는 것이 옳다.

흔히들 고구려의 최전성기라 여기기 때문에 얼핏 보면 이때 고구려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잘 나갔을 것 같지만, 디테일하게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먼저 광개토왕이 넓힌 땅을 관리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고구려가 흡수한 북연의 인구도 고구려에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았고 평양 천도로 인한 국내성 파와 평양성 파의 대립[4], 왕권 강화로 인한 귀족과의 대립에 외적으로는 물길의 발흥, 중원을 통일한 북위의 압박, 이탈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백제와 신라의 도전 등 장난 아니게 골 때리는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 내정

재위 3년 갑인년에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했다. 고구려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규정하며 광개토왕때 입안된 수묘인 제도를 성문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건 문자명왕 때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5]. 광개토왕비의 건립시점을 장수왕 시기로 보느냐, 문자명왕 시기로 보느냐는 건립 목적과 관련되어서 중요한 부분이라 논란이 많다.

419년 여름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 424년 나라에 풍년이 들어 왕이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2.1. 평양 천도

427년 평양으로 천도했다. 기존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동천왕, 고국원왕 때의 경험으로 그다지 방어하기 좋지 않은 곳이라는 게 입증된데다 척박하여 생산력이 후달리는 곳이였다. 이 곳의 겨울 평균기온 -11℃. 쉽게 말하자면 철원보다 겨울에 6도 정도 낮은데 여름엔 철원보다 더운데다 춘천 평야의 반에 불과한 좁은 평야 외엔 모두 산이다.

반면 평양 지방은 황해도의 평야와 인구밀도를 바탕으로 높은 생산력을 가지고 있음은 물론 한사군 시절부터 중국 동방과 연결된 정치, 문화, 경제 중심지였다. 또한 평양 천도는 중국계 귀족들과 손을 잡고 국내성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더구나 백제, 신라, 가야를 조져놨기 때문에 남쪽의 조무래기들로부터 뒷통수를 테러당할 위험도 적은데다 떠오르는 강자 북위를 방어할 만한 위치였다. (하지만 후대에 돌궐, 북주, 말갈, 신라, 백제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아 평양 인근에 북상하는 신라를 막기 위해 대성산성을 건축하기도 했다. 6세기 말에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털린 이후로는 평양이 국경에 인접해버리는 위험한 꼴이 되어버린다.)

다만 이로 인해 국내성 세력과 평양 세력 간에 갈등이 생겼고 고구려가 쇠퇴할 때마다 양자간의 대립이 점화되었다. 주리의 난과 고구려 멸망 시 국내성 세력의 당나라 투항은 그러한 갈등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환빠들에게는 대륙을 놔두고 반도로 들어왔다고 까인다.


이상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장수왕의 내정 관련 기록의 거의 전부[6]로,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북위와 남조에 조공한 기사들이다. 덕분에 농담삼아 '조공왕'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록이 부족하여 《삼국사기》에서는 당연하게 중국 사서를 기준으로 삼았다. 당연히 중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야 조공 기사만 있을 수밖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정 관련 기록이 워낙 빈약하여 주변국에서 장수왕대 고구려를 기록한 글(개로왕의 상표문 등)을 바탕으로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압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추측한다.

3. 외정

내정이나 외정이나 고구려 자체의 사료가 거의 없다. 외정 관련 기록은 주변국에서 남긴 것들이 제법 있기 때문에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 특히 중국에서는 조공, 책봉 기록의 양이 후덜덜하고 중국과의 교섭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사건들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에서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을 꽤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물론 장수왕 대로 추정되는 시기의 일본과 고구려의 교섭도 기록으로 남아있긴 한데 《일본서기》의 지랄같은 기년왜곡 장난 때문에 장수왕 시기의 기록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3.1. 남진정책


신라에서 사냥을 하던 고구려 장수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신라에 주둔했던 고구려 장수가 자신의 신라인 부하에게 "우리나라가 너희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해서 경각심이 생긴 신라 측에서 신라 내의 고구려 군인들을 학살해버렸다. 이러한 어이없는 연유를 거쳐 신라가 고구려의 복속에서 풀려났다.

백제의 개로왕북위(北魏, 386~534)에게 밀서를 보내 침략을 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제는 고구려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된 상황이었다. 장수왕은 첩자인 승려 도림(道琳)을 보내 개로왕이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궁궐 등을 짓게 하여 국고를 낭비하게 했고 결국 백제의 국고가 바닥날 낌새를 보이자 바로 백제를 침공해 한강 유역을 빼앗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다. 이 때 비로소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보는 고구려의 남방 강역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백제를 친 뒤 신라도 치기 위해 무서운 기세로 동해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신라 북변 7개 성을 점령하고 별다른 장애물이 없었던 서라벌까지 쭈욱 진격하던 도중 백제, 신라, 가야 연합군에게 격퇴당했다. 이로써 신라 재복속은 실패했고 문자왕 사후 고구려가 점차 쇠퇴하며 고구려 주도의 삼국통일의 꿈도 사실상 물거품이 되었다.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백제 한성을 함락시켰을 때 고구려 장수들이 더 치고 내려가 백제를 완벽하게 멸하자고 건의하자 장수왕이 백제의 뒤에 야마토가 버티고 있다는 식의 핑계를 대면서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기록에는 장수왕이 뜬끔없이 백제가 야마토(왜)의 속국이라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는 일본서기 특유의 허풍적인 사관을 생각해보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대목이다. 즉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다는 뜻이다. 얼마나 어이없는 내용인지 참고하기위해 그 내용을 아래에 적어놓는다.

(웅략) 20년 겨울 고려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그 때 조금 남은 (백제) 군사들이 창하(倉下)에 모였다. (그들은) 군량이 이미 다해 근심하고 울기만 했다. 고구려의 여러 장수가 왕에게 '백제인의 마음은 정상이 아니라, 신(臣)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당황하곤 하옵니다. (그러니 그들을) 뒤쫓아 없애기를 청하나이다.'라고 했다. 왕은 안 된다. 과인은 백제국이 일본국의 관가(官家)로서 그 유래가 오래라고 들었다. 더구나 그 왕이 천황을 섬기고 있다. (이는) 이웃 나라가 다 아는 바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고구려군은) 드디어 (추격을) 그만두었다.
- 《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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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발굴 성과가 진척되어, 대전 인근까지 고구려 식 산성이 발견되고 있다.

3.2. 왜와의 관계

일본서기》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온 사신이 왜왕 앞에서 외교문서를 읽는데 그 내용이 "고구려왕이 교한다"(=가르친다)라는 것이라서 왜의 왕자가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왜왕이 남조에 보낸 외교문서에 의하면 고구려가 왜의 변경을 약탈하고 사신을 차단해서 제대로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온다.

3.3. 중국 북위,남조와의 교섭

북위의 위협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특히 후연(後燕)이 멸망한 직후 건국된 북연(北燕, 407~436) 2대 황제 풍홍은 북위가 북연을 멸망시키려 하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장수왕은 군사 2만을 파견해 용성의 주민들을 구출한 뒤 용성을 약탈, 방화하고 돌아왔다. 북연 황제 풍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가 분수를 모르고 황제 대접을 바라다가 더 천대를 받게 되었다. (고구려는 북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풍홍을 보내지 않았다. 충분히 할 일을 했다는 것.) 이후 풍홍은 (宋, 420~479)에 망명을 요청하게 되고, 결국 풍홍은 이 때문에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물론 고구려의 위세가 남북조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어서, 송의 사신이 이 때 풍홍의 잔당군으로 풍홍을 죽인 장수를 죽이고도 송의 형식적인 처벌만 받은 사건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역대 중국 왕조들이 이렇게 형식적으로나마 처벌한 경우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면 그당시 고구려의 국력이 상당히 강력했다는 반증은 된다.

이후 북위는 고구려 왕실과의 혼인을 바랬지만 장수왕의 한 신하가 "저 놈들 연나라도 저렇게 뺑끼치고 침공했음"이라고 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러나 10여년 뒤에는 역으로 고구려 측에서 북위에게 요구하여 혼인이 성사된다. 이 때 고구려에서 북위로 건너간 자가 문소황후로, 그녀의 오빠 고조는 북위의 권력자가 되어 북위의 정계를 주무른다.

참고로 일부에서는 장수왕이 북위에 역대 황제의 계보를 바치도록 요구하였고 이에 응한 북위가 황실 계보를 바쳤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해석의 오류로, 기실 북위가 신하국으로서 계보를 고구려에 바친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봉물을 바치면서 일종의 조공국으로서 북위 황실에 대해 피휘(避諱)하기 위한 이유로 원한 것이다.

여하간 이 당시 고구려는 북위, 송보다 강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북조도 고구려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의 국력이었다. 이 때 고구려는 북위, 남조, 유연(幽然)과 함께 동아시아 4강 체제를 구축한다. 중국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고구려에 최대한의 높은 직위를 내리면서 고구려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중국 국가들이 내린 작위 기준으로 장수왕보다 높은 위치에 오른 국왕도 찾아보기 어렵다. 기껏해야 원 간섭기 시절 몇몇 고려 왕들 정도가 고작인데, 실질적 권위까지 고려하면 따라오지 못한다. 고구려가 북위를 공격하고, 북위 사신의 고구려 통과를 불허하고, 양다리 외교를 하는 등 피책봉국답지 않게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여도 북위가 묵인한 걸 보면 보통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토욕혼, 유연, 남조는 틈만 나면 괴롭히면서도 고구려는 건드린 적이 없다.

남제서(南齊書)에 따르면 북위에서 사신을 대우할 때 남제의 사신과 고구려의 사신을 동등하게 대우해 남제의 사신들이 불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북위가 사신들의 숙소를 배치할 때 남제의 사신을 첫 번째로, 고구려의 사신을 두 번째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3.4. 지두우 분할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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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빨간 선은 원정로가 아니라 답사로이다.

이후 479년에 몽골고원의 유연과 모의하여 현재의 대흥안령(大興安嶺)에 위치한 유목민 부족국가인 '지두우'의 분할을 시도했다. 유연과 지두우 분할 모의를 했다는 기사만 남아있고 그 경과에 대해서는 기사가 남아있기 때문에 성공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두우와 고구려 사이에 있던 거란이 "고려(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대릉하 인근으로 도망했다"는 기록이 2건이나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분할 시도는 했던 것 같다. 헌데 그 때 유연은 북위에게 털리고 있던 터라 지두우를 원정할 사정이 못 되었고 이후에도 지두우나 물길이 아무런 변화없이 잘 활동하는 걸로 보아서는 실패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확실한 건 지두우 원정 성공 여부를 떠나서 시도는 이루어졌고 그 와중에 거란이 고구려에게 침략당하여 당시 내몽고의 유목민 세계에 혼란을 야기했다는 것. 종종 내몽고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계통 성터를 이 사건과 연관짓기도 한다.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아예 장수왕 때 지두우를 먹고 내몽고 초원까지 확장했다고 못박고 있지만 국정 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적인 시각 때문에 무리한 주장을 담는 경우도 종종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당장 요서경략의 시기를 근초고왕 대로 잡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리고 국정 교과서는 모든 학설이 변한 다음에 가장 마지막으로 변한다. 애초에 국사와 윤리, 국어라는 교과목은 국가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철저한 규정과 관리를 통해서 결정된다. 때문에 과거의 학설들도 분명한 오류가 확인된 것이 아니라면 쉽게 수정되지 못한다. 가야 항목만 봐도 기존의 학설이 분명히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지만, 대체할 만한 학설이 확립되지 않아서 결국 과거의 "전기 금관가야, 후기 대가야 연합설"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서경략의 시기를 근초고왕 대로 잡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요서경략 시기를 근초고왕 대로 잡은 이유는 정말 단순한데, 요서경략 기록은 보이는데 언제인지 모르니 백제의 최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로 비정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게 교과서에 실렸고, 이를 대체할한큼 주도적인 학설이 학계에서 확립이 안 되었기 때문에 어느 한 학설로 대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놔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그야말로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건, 장수왕의 지두우 분할 시도가 내몽고 초원 진출이라는 표현으로 국정 교과서에서 등장, 강조되기 시작한 시기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몽골 땅에 농경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던 시기와 비교적 일치한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서영교도 이 둘을 몽골(유연)과 한국(고구려)이 손을 잡고 벌인 사업으로 엮었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冬十月 장수왕이 즉위하다
二年 동진이 왕을 책봉하다
三年秋八月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이다
三年冬十月 흰 노루를 사냥하다
三年冬十二月 국내성에 많은 눈이 내리다
八年夏五月 나라 동쪽에 홍수가 나다
十三年春二月 신라가 사신을 보내다
十三年秋九月 풍년이 들어 왕이 잔치를 베풀다
十四年 북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十六年 평양으로 천도하다
二十四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니 북위가 책봉하다
二十四年 북연왕 풍홍이 도움을 요청하다
二十五年 북위가 북연을 토벌할 것임을 알려오다
二十五年夏四月 북연의 화룡성을 점령하다
二十五年夏五月 북연왕 풍홍을 데려오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七年春三月 북연왕 풍홍을 죽이다
二十八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八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九年 신라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다
四十三年秋七月 신라 북쪽 변경을 침략하다
四十四年 남송에 조공하다
五十一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二年 남송이 왕을 책봉하다
五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五年春三月 북위가 후궁으로 들일 왕녀를 요구하다
五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七年春二月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다
五十七年夏四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五十八年秋八月 백제가 침입하다
五十九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年秋九月 백성 노구 등이 북위로 달아나다
六十一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一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二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三年秋七月 북위와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四年秋九月 백제 한성을 함락하다
六十五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七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六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남송에 조공하다
六十七年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다
六十八年春三月 북위에 조공하다

북위에 조공기록만 25회. 기록의 반이 북위 조공기록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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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중국 화가 병예가 그린 장수왕. 한국측의 초상화나 표준영정은 없다. 성병예는 역대 고구려 왕들의 초상을 그렸는데 하나같이 유인원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장수왕은 그나마 나은편.
  • [2] 북위효문제(孝文帝)가 장수왕이 사망하자 시호를 내렸는데 그게 강왕이다.
  • [3] 오래 살아서 장수라는 시호를 올렸다는 해석이 대세이나, 종종 불교 용어인 '장수'와 연관짓기도 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가, 기록상으로 더 오래 산 왕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가 불교 진흥 정책을 밀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근거가 없는 주장은 아니다.
  • [4] 덤으로 한사군 파 귀족도 고구려에게 고분고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5] 그런데 이 설은 커다란 문제가 있는데, 고구려는 평양천도 이후 국내성 시대 왕들의 시호에 '옛 고(故)'자를 붙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국원왕(故國原王), 고국양왕(故國壤王)등이 그 예이다. 이들은 모두 국내성 시대 왕들로 원래 시호는 국천왕, 국원왕, 국양왕, 국강왕 등이었는데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함에 따라 국내성은 '옛 수도(故國)'가 되었으므로 거기에 묻힌 왕들의 시호에 '故'자를 올린 것이다. 장수왕이 427년경 세운 것으로 보이는 지안고구려비에 국내성을 가리켜 고국이라 한것을 보면 평양천도 직후 바로 시호 장지명도 고쳐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평양천도 후 60여년이나 지난 문자명왕대에 광개토왕릉비가 세워졌다면 국내성에 묻힌 광개토왕의 장지명인 '국강상'앞에 당연히 '故'자를 붙여야 마땅하다. 따라서 문자명왕이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했다고 보는 설은 근거가 없다.
  • [6]광개토왕릉비』 건립 기사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 [7] 이 부분에서 김부식의 사대정책이 드러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데, 실제로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심히 부실한 것이 문제였다. 백제보다는 낫지만. 신집 5권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국원왕 대 까지(신집은 소수림왕 때 편찬된 100권의 역사서 '유기'를 5권으로 줄인 것이기 때문에 고국원왕 대까지가 상세하다)의 기록은 그럭저럭 있고 광개토대왕은 광개토대왕비의 존재때문에 기록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데 장수왕 대 기록부터는 전적으로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했다. 연개소문만 보더라도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 고구려 기록이 없어서 김부식이 골머리를 싸맨 기록이 남아있으며 민간에서 주도해 만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신라시대의 기록에 비해 고구려 백제의 기록은 심히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