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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부

last modified: 2015-04-08 13:48:30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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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장명부
생몰년도 1950년 12월 27일 ~2005년 4월 13일 (55세)
국적 일본[1]
출신지 일본 돗토리 현 야즈 군 지즈 정
학력 일본 돗토리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
포지션 투수
투타 투우타
프로입단 1968년 드래프트 외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8~1972)
난카이 호크스 (1973~1976)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7~1982)
삼미 슈퍼스타즈 (1983~1984)
청보 핀토스 (1985)
빙그레 이글스 (1986)
등번호 34번(1983~1984)→18번(1985)→19번(1986)

1983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태환(OB 베어스) 장명부(삼미 슈퍼스타즈) 최동원(롯데 자이언츠)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2]

역전의 명수이자 만년 꼴찌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에 기적을 몰고 왔던 수호신이자 무리한 혹사로 비참하게 쓰러진 비운의 투수.

Contents

1. 일본프로야구 시절
2. 한국프로야구 시절
3. 이후
4. 장명부의 기록
5. 그 외 에피소드


1. 일본프로야구 시절


히로시마 시절의 투구 모습.

돗토리 현립 돗토리니시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시 재일교포를 외국인 선수로 분류하는 일본프로야구 규정[3]에 의해 1968년 지명외 선수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였다. 1970년 1군 승격 뒤에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의 기대를 많이 받았지만 1973년 도미타 마사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야마우치 신이치와 함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였다. 그 해, 무라 가쓰야의 밑에서 선발 투수로 뛰면서 7승을 올리면서 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당시 일본 시리즈에서 선발로 등판하기도 했다.

1977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고바 타케시 감독에 의해 김기태와의 맞트레이드로 히로시마로 이적하였다. 선발투수로 활약하면서 1978년, 80년 시즌에 15승을 올리는 등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1979년과 1980년 히로시마의 일본시리즈 2연패 달성에 공을 세우며 히로시마 황금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그 후로도 마운드의 중추적 멤버로 활약했지만 1982년 3승에 그치며 구단에서 연봉의 대폭 삭감을 통보하자 이를 현역 은퇴선언으로 받아치며 유니폼을 벗었다. 이 당시의 뒷이야기로 1982년 시즌 종료 후 선배인 장훈에게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은 장명부는 고민 끝에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리고는 스승인 고바 타케시에게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털어놓자 고바는 처음엔 강력히 만류하였으나 아버지의 나라에서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싶다는 장명부의 의지를 이해했고, 결국 장명부가 평소 동생처럼 여기던 재일교포 2군 내야수인 이영구를 데려간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또한 장명부가 한국으로 간다는 사실을 숨기고 연봉 협상 테이블에 나섰을 때 고바는 모른 척 하고 장명부가 하고 싶은대로 하도록 묵인해 주었다.

1982년 12월,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전력 보강과 야구 활성화의 일환으로 추진한 재일동포 영입 계획에 의하여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하게 된다.[4] 당시 그의 계약 내용은 계약금 1,500만엔(약 4,500만원), 연봉 2,500만엔(약 7,500만원)에 부대 비용(세금, 아파트, 승용차 제공) 6,000만원 등 토탈 1억 8,000만원의 금액을 받는 조건이었다. 당시 국내 최고 연봉선수이던 OB박철순이 2,400만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게다가 당시 2,500만엔의 연봉은 일본 프로야구 기준으로도 제법 고액연봉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그 시기 일본 프로야구 최고연봉 선수가 7,000만엔 정도 받았다. 장명부의 직전해 일본에서의 몸값도 2,050만엔이었으니 모국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은 셈. 지금 금전가치로 환산하자면 수십억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금값으로 환산하자면 4억으로 적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파트, 차값이 천문학적으로 뛴 것을 감안해 보면...)

입단 계약은 해가 바뀐 1983년 1월 18일에 마쳤고, 장명부는 1983년부터 삼미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라섰다.

그리고 그 해에 장명부는 전설을 써낸다.#

2. 한국프로야구 시절


neo.jpg
[JPG image (Unknown)]

만화가 최훈김형준 칼럼에 투고한 일러스트.

장명부는 1983년 시즌 시범경기에 두 차례 등판했다. 한국 프로무대 데뷔전이라 할 수 있는 3월 19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구덕 경기에 5회말 무사 만루 상황에서 임호균을 구원하여 첫 선을 보인 그는 일단 5회말은 1실점으로 막아냈지만, 이후 2이닝을 던지며 롯데 타선에 4안타 3사사구로 3실점을 허용했고, 무엇보다 일본 프로야구의 베테랑이란 얘기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걍 설렁설렁 던지는 피칭이 야구팬들의 의구심을 살 정도로 형편없는 피칭이었다. 그리고 3월 22일 MBC 청룡과의 인천 시범경기에 선발등판 했는데, 경기 전 김진영 감독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던져보라"고 주문을 받았지만 변함없는(...) 대충대충 투구로 일관하며 13안타를 두들겨 맞은 끝에 9대 7로 간신히 승리를 따냈다. 시범경기 동안 2게임 등판에 11이닝을 던져 17안타를 얻어맞은 끝에 11점을 내준 것이다. 매 이닝 1점을 내준 셈으로 누가 보아도 형편없는 투수로 보기에 충분했다. 김진영 감독으로선 장명부를 괜히 영입했다고 땅을 칠 만 했지만, 장명부는 MBC와의 시범경기 후 김진영 감독에게 상대팀의 전력을 평가하기 위해 일부러 직구 만을 던졌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5][6] 역시 레알 너구리

장명부의 진가는 삼미의 시즌 개막전이자 장명부의 공식경기 데뷔전이었던 4월 3일 롯데와의 구덕 경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날 장명부는 7이닝 동안 29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7개를 잡아내었고, 6안타 4볼넷으로 1실점, 10-4로 첫 승리를 이끌었다. 평소엔 설렁설렁 던지는 듯 하다 위기다 싶으면 전력을 다 하여 투구했고, 사이드암과 스리쿼터형의 투구 스타일을 변칙적으로 사용하며 145km의 강속구[7]와 낙차가 큰 커브, 특히 능수능란한 완급 조절로 경기장을 지배했다. 그날 한국무대 첫승을 거둔 장명부는 대번에 언론과 팬들로부터 너구리라는 별명을 선물받았다.

그 후에도 그는 닥치는 대로 등판하여 닥치는 대로 던졌고, 그야말로 한국 모든 선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투수임을 보여줬다. 한국 최초로 빈볼로 타자들을 견제했고, 벤치 클리어링을 한국에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하며, 빈볼을 던진 다음엔 특유의 썩은 미소로 타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심리전에도 능했다.
결국 장명부는 1983년 한해 60경기 등판, 44경기 선발, 30승(28선발승), 36완투, 26완투승, 5완봉승, 8경기 연속 완투승이란 결코 다시는 나오지 못할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먼치킨급 기록을 세우고 만다. 참고로 2008년에서 12년까지 5시즌 동안 류현진이 15완투 6완봉을 기록했다(...). 게다가 이 때 한 시즌 경기가 100경기였으며,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52승을 올렸다. 장명부가 선발이었던 경기에서 삼미의 승률은 0.636이지만 장명부가 선발이 아닌 경기의 승률은 고작 0.429. 이는 정말 이게 인간이야 장명부야라고 의심하게 만들 정도의 기록임에 틀림 없었다.

사실 그가 이러한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운 것은 시즌 전 삼미의 허형 사장이 장명부와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30승을 하면 보너스 1억원[8]을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한 것에 낚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반 농담같은 계약이 설마설마 하다가 Dreams come true가 되어버렸고, 당황한 허사장은 그런 약속 안했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차피 계약서에 명기된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에 구단 운영비에서 이를 충당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결국은 허사장의 사비를 털어 일부를 지급하는 것으로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이 일로 장명부는 삼미에 오만 정이 떨어져버렸고, 장명부는 아무리 한국 야구판이 후지다고 해도 어떻게 사장까지 선수를 속이냐고 분개하며 이듬해부터는 고의 태업을 일삼기 시작한다.). 그런데 삼미는 장명부와 관련해 장명부도 속이고, 기자들도 속이고, 심지어는 모그룹인 삼미그룹까지도 속였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결국 전 시즌 엄청난 기록을 세우긴 했지만 이는 몸을 극한으로 혹사시켜 얻은 결과였고, 장명부가 무슨 터미네이터 내지는 마징가Z가 아니었던 이상 몸이 망가질 수 밖에 없었다. 지난 해의 혹사는 이듬해부터 장명부와 삼미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사실 장명부는 한국에 오기 전부터 허리부상으로 고생 중이었고, 거기다 1983년 시즌의 혹사까지 겹쳐 급속도로 구위가 추락하며 1984년 13승 20패란 부진한 성적을 남겼고, 이듬해인 1985년에는 한 시즌 최다패 기록(25패, 11승)을 세우기도 했으며, 빙그레로 이적한 1986년 1승 18패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만다.[9]http://blog.naver.com/khm159/220032079228[10][11]

엎친데 덮친격으로 1983년 시즌 이후 보너스 문제로 매년 삼미 측과 갈등을 빚었고 팀이 청보에 매각된 이듬해인 1986년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 그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12]

3. 이후

은퇴 후 그의 인생은 완벽하게 쇠락했다. 1987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출국하려다가 김포국제공항에서 합소득세 730만 원이 체납된 사실이 밝혀져 혼자만 대한민국에 발이 묶였고, 이후 이혼까지 당했다. 이후 서울의 고등학교를 순회하며 투수를 지도했고 삼성롯데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하지만 롯데 코치 시절에 팬을 폭행한 흑역사가 있는데다 1991년에는 성낙수, 등과 함께 마약사범으로 구속당하며 KBO에서 영구제명되어 한국 프로야구계에서 사실상 완전히 매장당하고 말았다. 동시에 대한민국 입국 금지 조치를 받아 죽을 때까지 다시는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롯데 자이언츠 투코 시절의 장명부. 뭐가 그리 웃기는가??

고교 순회코치 시절 그가 발굴한 투수 중 한 명이 LG 트윈스의 야생마 "이상훈"이다. 그 해 12월, 그는 추방 형태로 도쿄행 비행기에 오를 수 밖에 없었고, 이후 건설업, 택시 운전 등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무지 그의 행적은 찾기 어려웠으며, 김무종이나 주동식 등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힘든 말년을 보내던 중, 2005년 일본 와카야마 현의 미나베 마을에서 자신이 운영하던 마작 하우스 사무실의 소파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당시 벽에는 '落ち葉は秋風を恨まない'(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향년 56세.#

4. 장명부의 기록

비록 한 해뿐이었지만 장명부는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세운다. 이 기록들 중 시즌 최다이닝 등판, 시즌 최다경기 완투, 시즌 최다승, 시즌 최다패의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절대로 깨질 확률이 없다(...). 아니, 깨져서도 안 된다. 저 기록에 근접하려는 것 자체가 무식한 혹사 없이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것이니... 뭐 굳이 장명부의 기록을 깨고자 하겠다면, 류현진정도의 투수가 선발, 중간, 마무리 안가리고 로테이션? 등판간격? 그런 거 없다는 식으로 마운드에 올라야 될까 말까 하다. 물론 그 해 시즌을 끝으로 밥숟가락 놓겠다는 각오도 반드시 필요하다(...).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68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기록 없음
1969
1970 11 40⅔ 6 0 0 3.07 0 3 - - 38 4 18 32
1971 2 7⅓ 1 0 0 5.14 0 0 - - 6 1 3 6
1972 5 9 2 0 0 8.00 0 0 - - 17 4 4 2
1973 난카이 호크스 27 140⅔ 18 6 1 2.87 7 0 - - 130 10 73 56
1974 26 139⅓ 18 5 2 3.04 9 7 0 - 130 10 43 59
1975 32 188⅔ 21 11 4
(1위)
3.00 11 12 0 - 185 10 60 66
1976 24 115⅓ 17 3 0 3.68 6 7 1 - 120 13 44 23
1977 히로시마 도요 카프 46 100 6 0 0 5.13 6 6 5 - 129 11 45 39
1978 41 230 32 12
(1위)
2 3.60 15 8 0 - 236
(1위)
23 75 94
1979 37 163⅔ 25 4 1 3.57 7 9 1 - 156 24 47 109
1980 31 187 28 8 1 3.95 15 6 0 - 195 28 55 106
1981 35 201⅓ 28 7 1 4.03 12 9 0 - 211 22 81 116
1982 22 111⅓ 15 5 1 4.46 3 11 2 - 113 21 43 77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3 삼미 슈퍼스타즈 60
(1위)
427⅓
(1위)
44 36
(1위)
5
(1위)
2.34
(2위)
30
(1위)
16 6
(3위)
0 388 19 122 220
(1위)
1984 45
(3위)
261⅔
(2위)
25 15
(1위)
2
(3위)
3.30 13 20 7
(4위)
0 261 20 72 145
(4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5 청보 핀토스 45
(3위)
246
(2위)
35 10
(4위)
0 5.30 11 25
(1위)
5 0 304 22 112 128
(3위)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선발 완투 완봉 평자책 피안타 피홈런 사사구 탈삼진
1986 빙그레 이글스 22 108⅓ 17 3 0 4.98 1 18 0 0 130 12 50 38
통산 NPB 15시즌 339 1634⅓ 217 61 13 3.68 91 84 9 - 1666 181 591 785
KBO 4시즌 172 1043⅓ 121 64 7 3.55 55 79 18 0 1083 73 356 541

시즌 최다 선발 44경기[13]
시즌 최다 완투 36경기
시즌 최다 투구 427⅓이닝[14]
시즌 최다 승리 30승
시즌 최다 완투승 26승
최다 연속 경기 완투승 8승
경기 최다 피안타 승리 16피안타
시즌 최다 패전 25패
시즌 최다 연패 15패
특정팀 상대 연패 10패(vs MBC 청룡)
시즌 최다 피안타 388피안타
시즌 최다 실점 175점
시즌 최다 자책점 145점

사실 이런 그의 초인적인 기록은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 2년 밖에 안 된 초창기 시절이니까 가능했지 한국 야구의 수준이 많이 올라간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있다.[15] 하지만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고는 해도 장명부가 세운 기록은 무쇠 어깨를 가진 '괴물'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업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5. 그 외 에피소드

  • 엄청나게 가난한 집안에서 병약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글짓기 시간에 "병이 나으면 야구선수가 되고싶어요"라는 주제로 글을 지어 아버지에게 보여줬더니 다음 날 아버지가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사 갖고 오신 것이 계기가 되어 야구를 시작했다.

  • 일본에서 쓰던 본명은 마쓰바라 아키오(松原 明夫)였지만 결혼하면서 처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며 후쿠시 아키오(福士 明夫)로[16], 둘째 아들을 낳은 후에는 후쿠시 히로아키(福士 敬章)로 개명했다. 하지만 자신의 본명인 장명부에 애착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불러주길 원했다고.

  • 난카이 호크스 시절 팬이던 후쿠시 치에코와 사랑에 빠지며 결혼까지 생각하게 되었는데, 걸림돌은 장명부를 탐탁치 못해하던 치에코의 아버지였다. 그는 일본 정부 고위직을 지낸 거물급 인물이었는데 장명부가 결혼 승낙을 받으려 치에코의 집에 쳐들어와 3일 동안 대치했고, 참다 못한 치에코의 아버지가 장명부를 안방으로 불러서는, "자네는 야구를 그만 두면 무엇을 하려는가?"라고 묻자 잔뜩 얼어있던 장명부는 "막노동이라도 해서 어떻게든 굶기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무남독녀인 딸을 데려가서 호강시켜 주겠다고 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이러한 대답에 보통의 니뽕국아버지라면 "이 조센징 색히!! 뭐가 어쩌고 어째?!"라면서 멱살을 잡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치에코의 아버지는 "그래? 무릇 사내라면 그래야지... 자존심을 버리면 뭐든 할 수 있다"라며 어깨를 토닥이며 결혼을 허락했다 한다. 장명부의 장인이란 양반도 어찌 보면 대인배였던듯...

    그렇게 결혼에 성공한 장명부는 이듬해 한국 국적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했고, 장명부의 아버지는 "섭섭하다"라고 토로했지만 본인이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서 온갖 멸시와 박해를 받은 입장인지라 더 이상 아들을 탓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 삼미에서 뛰던 시절, 팀 동료들과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특히 1983년 12승을 거두며 원투펀치를 형성한 임호균과의 사이가 굉장히 불편하여 이듬해 롯데로 트레이드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고, 배터리를 이루던 김진우와는 견원지간이었다(...). 가장 친한 팀메이트가 히로시마 시절 동료였던 이영구뿐이었으니 말 다한 셈. 그렇지만 한편으로 자신이 등판한 경기 때 결승타를 치거나 파인 플레이를 보여준 선수에게 고급시계 또는 양복 등을 선물하는 등 인심을 쓰는 면도 있었다.

  •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충청남도 아산에 이복 형이 살고 있다고 한다. 장명부가 일본프로야구에서 뛰던 1975년 한국 실업팀과의 친선경기 차 방한한 프로 연합팀 멤버로 한국에 와서 서로 만난 적이 있지만 그 당시 장명부는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해 대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참고로 장명부는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의 고향에 꼭 가보고 싶다고 염원했으나, 결국 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 MBC 청룡의 내야수 김인식이 장명부의 사구에 가장 많이 맞았는데 김인식은 계속 참다참다가 어느날 또 사구를 얻어맞자 헬멧을 집어던지고 장명부에게 달려들어 원터치를 뜰...려고 했는데 마주치니깐 20cm 이상 신장차가 나는 장명부를 보고서는 그냥 1루로 갔다. 허걱 너무 크잖아 장명부를 다룬 다큐에서 이 장면이 나왔다.

  • 현대 유니콘스에 이어 인천을 연고지로 삼은 SK 와이번스가 2004년 개막전에 장명부를 시구자로 세우려고 장명부를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링크참조 인천 시민들에게 아직까지는 낯설었던 SK 구단을 홍보하기 위함이었지만[17], 장명부는 은둔생활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히 야구계 관계자를 피했고, 장명부의 행방을 아는 재일동포들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반면 어떻게 보면 라이벌인 김일융은 야구해설 등으로 너무 세간에 잘 알려졌고...) 결국 SK에서는 장명부 대신 감사용으로 시구자를 대신했으며,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고서야 세상에 그의 행적이 드러났다.

  • 이런 멸시와 차별, 선입견 때문에 일본에선 조센징, 조국에선 반쪽바리 로 불리며 단지 '야구만 잘할 뿐이던' 그의 비참한 인생이 계속되었다. 오죽했으면 '내 조국은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내 조국은 현해탄 이다.[18] 이 라고 말했을까. 그의 설움이 잘 드러나는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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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부인과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 http://blog.naver.com/soonil39/120093578544 참조.
  • [2] 그의 사망장소에서 발견된 자필문구. 하단 참조.
  • [3] 이 규정은 같은 해에 역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김일융 사건을 계기로 재일교포도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것으로 개정된다.
  • [4] 위에 언급한 대로 히로시마 시절 팀메이트인 내야수 이영구도 같이 입단했다.
  • [5] MBC와 시범경기를 끝내고 장명부의 부진에 속을 끓이던 김진영에게 장명부는 "감독님, 걱정 마세요. 제가 시범경기에서 이긴 건 일본야구 통틀어 8년 만에 오늘이 처음입니다. 제가 마음만 먹으면 별거 아닙니다"라고 오히려 김진영을 달랬다고 한다. 이 말에 김진영은 반신반의 했지만 롯데와의 정규시즌 개막전 때 선발 등판한 장명부가 호투를 보이자 무릎을 치며 "이런 너구리 같은 놈!!"이라고 감탄했다고.
  • [6] 심지어 삼미와 입단 계약조건을 조율하던 도중에 삼성의 훈련캠프를 찾아가 "내가 뛰게 될 삼미라는 팀이 작년에 그렇게 시망이었다며? 레알 뛰기 싫다."라고 삼성의 조감독이던 이충남에게 투덜거렸고 이충남은 '혹시 삼성으로 오려고 이러나?'라면서 일말의 희망을 품기도 했다. 한술 더 떠 장명부는 "여기서 몸도 풀 겸 연습이나 하고 가겠다"라면서 삼성 타자들에게 직접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는데, 알고 봤더니 삼성 타자들을 분석하려고 훼이크를 썼던 것(...). 결국 그해 삼성은 장명부에게 철저히 농락당했고 특히 그해 신인으로 데뷔한 장효조는 장명부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나 마찬가지 였다.
  • [7] 당시 한국에선 최고 수준의 볼스피드였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당시 최고구속 150km를 넘기는 투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지금도 KBO에서 150km넘는 선수는 십수명밖에 안된다.
  • [8] 60평짜리 강남아파트가 5000만원 정도 하던 시절이다... 현재 돈으로 환산해도 10억을 훨씬 넘을것이다.
  • [9] 사실 방어율은 4.98로, 18패나 할 성적은 아니지만, 이해 빙그레 이글스는 신생팀스러운 물빠따였음을 감안해야한다. 에이스 이상군조차 2.63의 방어율로 12승 17패나 했으니..
  • [10] 장명부가 유니폼을 벗은 후 한 TV프로그램에 나와 그 해 20승 정도만 했으면 아무 일 없었을텐데 괜히 30승을 거두어서 망했어요라고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린 장면은 유명하다.
  • [11] 빙그레 이글스 입장에서는 흑역사 오브 흑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구대성, 송진우, 이상군, 정민철, 한용덕, 한희민등 투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상관 없지만...
  • [12] 빙그레와의 입단계약 당시 2년치 연봉 1억 5천만원을 한꺼번에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해 세상에서 가장 비싼 1승을 거두었고(...), 빙그레는 장명부를 방출하며 나머지 연봉 7천 5백만원은 토해놓고 가라고 했지만 장명부는 "나를 스카웃한 너님들도 책임은 있지 않은가? 몰러 배째!"라고 맞대응하기도... 결국 빙그레 구단주인 김승연 회장의 대인배적인 조치로 탕감되었다고 한다.
  • [13] 현재의 133경기를 기준으로 해도 무려 전체 리그의 ⅓ 가까이 된다!
  • [14] 2011시즌부터 적용된 KBO의 한시즌 경기수인 133경기로 환산하면 대략 569이닝(...)
  • [15] 같은 이유로 최동원, 백인천, 장효조 등의 기록도 폄하되는 경우가 인터넷 상에서는 종종 있다.
  • [16] 흔히 일본에서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데릴사위의 경우는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기도 한다. 일본 야구계에선 나카니시 후토시가 그 경우에 해당되며,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사위로 미하라 가문에 입적된 바 있다. 그래서 미하라 후토시가 그의 호적상 이름이다.
  • [17] 인천 야구팬들에게 장명부가 의미하는 게 상당했기 때문에...
  • [18] 현재의 대한해협. 여기서 그가 일컽고 싶었던 건 한반도규슈, 즉 한국와 일본의 정중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