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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last modified: 2015-02-23 02:31:42 Contributors

Contents

1. 정경, 화면, 현상
2. 대한민국의 정치인, 교육자, 외교관
2.1. 개요
2.2. 그의 생애
2.2.1. 출생과 성장
2.2.2. 초기 활동
2.2.2.1. 학창 시절과 결혼
2.2.2.2. 미국 유학과 귀국
2.2.2.3. 졸업과 선교 활동
2.2.2.4. 교육 활동
2.2.3. 정계 진출
2.2.3.1. 외교 활동
2.2.3.2. 2대 총리 시절
2.2.3.3. 부통령 시절
2.2.3.4. 국무총리에 재선
2.2.3.5. 5.16 군사 정변 전후
2.2.4. 사후
2.3. 기타

1. 정경, 화면, 현상

어떤 장소에서 겉으로 드러난 면이나 벌어진 광경, 영화, 연극, 문학작품 따위의 한 정경. 같은 인물이 동일한 공간 안에서 벌이는 사건의 광경을 이른다. 영어로는 Scene이라고 한다.

2. 대한민국의 정치인, 교육자, 외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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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장면
출생 1899년 08월 28일
사망 1966년 06월 04일 (66세 8개월 7일)
분야 정치, 종교, 교육, 외교
주요활동 대한민국 정부 승인에 기여함
평가
비고 대한민국의 최초이자 마지막 의원내각제 총리를 지냄

장면(張勉, 1899년 8월 28일 ~ 1966년 6월 4일)은 대한민국의 종교인, 교육자이자, 외교관, 정치가이며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는 인물이다. 대통령이 아닌 총리였다는 이유로, 윤보선도 편집은 안되는데 리그베다 위키에서 허정과 함께 편집이 허용된 대한민국의 전직 행정부 수장.


2.1. 개요

초대 주미한국대사, 2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4대 부통령, 7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국근현대사 부분에서 제2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로 축출된 인물 정도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지만, 사실 제2공화국 활동은 그의 활동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종교는 가톨릭이며, 아호는 운석(雲石)이고[1] 세례명은 요한(John)이다.

1999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에 추서되었다.

민주당계 인사중에 보수진영에서도 인정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고 세련된 신사였으나 정치적인 결단력이 부족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선인 천주교인들을 총괄해 일제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는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를 지냈으며, 김구 선생의 친일파 처단 목록에까지 오른적이 있어 친일파라는 의혹도 존재한다.

2.2. 그의 생애

2.2.1. 출생과 성장

조선 말기 정계에서 소외되었던 남인계 몰락 양반 출신으로 8대조 때에 경상북도를 떠나 평안남도에 정착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대한제국 말기에 세무관리로 진출하면서 다시 한성으로 올라왔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의 외할아버지 황성집의 집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 장기빈 어머니 황루시아 내외는 인천에 집이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인천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장면은 태중교인으로 어려서부터 순종하는 태도가 배인 생활을 했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2대 국무총리가 되고도 어머니에게 무릎꿇고 빌 정도로 순종이 몸에 배이게 됐다.[2]

2.2.2. 초기 활동

2.2.2.1. 학창 시절과 결혼

천 성당부설 박문소학교[3](5년제 초등학교[4])와 인천 공립 심상소학교(6학년 과정)를 거쳐 원농림고등학교[5]에 진학했다.

수원농고 재학 중에 아버지 장기빈이 이웃 천주교 신자와 사돈을 맺기로 하고 혼사를 추진, 17세에 2년 연하의 김옥윤과 결혼했다. 이후 장면은 한시도 한눈을 팔지 않고 아내에게만 집중했다고 한다.[6]

2.2.2.2. 미국 유학과 귀국

그러나 모자 쓰고 칼 차고 호령하는 일본인 관료가 되는 꿈도 없었고, 더구나 그의 조용한 성격상 소질도 맞지 않았기에 그는 YMCA에서 운영하는 영어학원에 진학했다.잠깐, YMCA는 개신교 단체인데...!
YMCA 청년회 영어학원을 2년간 공부하고 YMCA 학원 재학 중, 용산 천주교소신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학생으로 이중생활을 했다. 용산 천주교소신학교의 제자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유명한 노기남 대주교.[7]

그 뒤 미국으로 유학하여 리놀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해턴 칼리지에 진학했다.

2.2.2.3. 졸업과 선교 활동

1925년 미국 해턴 칼리지를 졸업했고 당시 한국인 대표 자격으로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뒤 귀국하여 메리놀 선교회를 도와 천주교 평양교구 개척을 도왔다.
이후 장면은 평양교구 개척을 위해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사하고,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 평양성당에서 평신도 대표로 선교활동과 성당 사무를 보는 데 투신했다. 그 밖에 메리놀 선교회의 한국어 강사를 겸임하며 메리놀 선교회 및 외국인 천주교 신부들의 통역과,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2.2.2.4. 교육 활동

그 뒤 성실성을 인정받아 천주교 재단의 추천으로 일제강점기에 동성상업고등학교 서무주임, 동성상고 교장, 혜화동성당 부설 유치원 원장, 계성국민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동성상고 교장으로 있을 때는 선 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인 시학관을 쫓아내기도 했다. 노기남의 스승이었다.
조선총독부 교육청에서 지도를 나왔을 때 당시 학생이었던 김수환이 발표시간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닌데 왜 신사참배를 하느냐?"고 발표하여 물의를 빚었다. 장면 교장은 즉석에서 김수환 학생의 뺨을 후려쳤다. 맞는 말을 했는데 왜 때렸냐 하면, 만약 저 상황에서 장면이 저런 제스쳐를 안 했다면 김수환은 나중에 곤혹을 치렀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에 일본 유학 장학생을 선발할 때는 김수환을 1등으로 추천해서 보냈다. 이렇게 보면 그가 사람을 아끼는 안목이 있었다는 평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2.2.3. 정계 진출

2.2.3.1. 외교 활동

해방 뒤에는 임정요인 환영회를 개최했고, 민주의원 의원, 과도입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고, 이때 미군정과 한국인 대표의 통역 역할을 한 것도 그의 입신에 큰 도움이 되었다.

주미 한국 전권공사를 역임한 바 있었으며, 바로 현지에서 제1대 주미대사로 임명됐다. 주미 대사로 있을 때 한국전쟁 터지자 미국 국무부UN을 오가며 남한에 파병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그의 설득이 통해 한국은 한국전쟁 때 미군과 UN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2.3.2. 2대 총리 시절

그 공로로 이승만은 그를 총리로 내정했고 귀국 후 2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러나 야당 국회의원들이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려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눈에 찍히고 말았다.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곽상훈의 중재로 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됐다.

2.2.3.3. 부통령 시절

1956년 이승만 측근인 이기붕을 누르고 대한민국 4대 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부통령을 지냈었다.[8] 그런데 이기붕을 이긴 것이 자유당 세력의 눈밖에 나서 그야말로 암살당할 뻔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때 괴한의 총격을 맞아 왼손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던 것(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천주교 계열 신문이었던 경향신문은 이 사건을 앞장서서 비판하였다.

저격범들은 조병옥 박사 만세를 외치며 내부 소행인 것처럼 조작하려다 체포되어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장면은 대인배같이 선처를 호소하여 감형을 주선했다. 이에 감화된 피고인 중에는 뒤에 천주교 신자가 되거나 목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2.2.3.4. 국무총리에 재선

1960년에 다시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3.15 부정선거로 낙선되었고,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제2공화국이 출범하자 대한민국 최초로 의원내각제를 시행하여 국무총리가 되었다.[9] 민주당 신파의 리더로 활동하면서 민주당 구파로 대통령 권한을 확대하려 했던 대통령 윤보선과 사이가 껄끄러웠다.[10]

총리 시절 장면은 이름처럼(勉 근면할 면) 매우 근면한 성격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무를 보기 시작했고 밤늦게야 일을 끝마쳤다고 한다. 덕분에 아랫사람들은 죽어나갔다고 한다...... 나중에 박정희 군사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리즈의 모태가 되는 경제개발계획도 장면 정부에 의해 세워졌다. 장준하를 비롯한 당대의 전문가 여럿이 모여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초기 단계의 몇몇 작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다만 총리가 정치에 대해서도 관여해야 하는 의원내각제 정부에서 오로지 근면하기만 했던 점은 문제였다.

2.2.3.5. 5.16 군사 정변 전후

우유부단한 성격의 장면은 민주당 구파와 신파[11]의 이전투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으며 이는 이 시기 정치적 혼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혼란정국에 있기에는 조금 역량이 부족한, 하지만 그래도 크게 흠잡힐 일은 하지 않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 때 박정희가 탱크를 몰고 쳐들어오자[12] 처음엔 주미 대사관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장면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수가 영어를 제대로 할 줄 몰라 대사관에 상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13] 카르멜 수녀원으로 도망치고 종적을 감추었다. 나름대로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문제는 이 때 대사관에 들어가지 못한 장면이 미국이 쿠데타 세력을 밀어주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공포에 질린 나머지 이후에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것.

초기 소위 소장파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던 쿠데타 세력은 소수에 불과했고[14] 일선부대 중 일부 부대를 중간 장교들이 높으신 분들을 습격해서 체포하는 형식으로 장악한 정도였기 때문에 그 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했다. 때문에 대통령인 윤보선을 확보했지만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장면을 놓친 것은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굉장히 큰 위험이었고, 만약 장면이 아직 장악되지 않은 군을 움직이려 했다면 얼마든지 쿠데타가 진압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나중에 쿠데타 사실을 들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인 C.B 매그루더는 자신의 허락 없이[15] 함부로 군을 움직인 것은 물론이요, 하극상의 극치인 쿠데타까지 일으킨 박정희와 그 일당들에 대해 격노했으며 요청만 들어오면 당장 전차를 몰고 가서 반란군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릴 생각이었다(심지어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했었다. 이렇게 되면 쿠데타 세력이 선포한 계엄령은 그냥 데꿀멍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두 통수권자 중 한 명인 윤보선은 진작에 체념해서 매그루더의 설득에도 쿠데타 진압 자체를 포기하고[16] 또 다른 한 명인 장면은 눈 막고 귀 막은 채 수도원에서 기도만 하는 통에......[17] 이보시오! 대한민국은 신이 아니라 당신이 다스리는 나라에요! 일부 의견에 따르면 윤보선은 쿠데타를 잘 이용하면 장면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유명한 "올 것이 왔구나!"의 대사나 기타 처리 문제를 보면 어느 정도 의심은 가는 사항. 하지만 그 뒤의 상황을 보면 윤보선은 쿠데타를 역이용하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나중에 장면의 수행원 중 하나가 필사적으로 장면을 찾다가 쿠데타 당일 밤에 장면을 차에 태우고 도망쳤던 운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수행원의 애타는 질문에도 끝까지 장면이 있는 곳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바람에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역으로 보면 당연하다. 수행원들이 박정희편에 매수되었거나, 협박당해서 장면을 찾으러 다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의 운전수 및 기타 노동 등을 하는 사람은 보안을 중요시한다.

그 사이 전두환이 육사생도들을 이끌고 쿠데타 지지 시위를 하며 점차 반란군의 입지는 탄탄해져 갔고, 결국 이틀 뒤인 5월 18일 제풀에 지친 장면이 수도원에서 나와 내각 총사퇴 서류에 서명하고 하야를 선언하며 5.16 군사정변은 성공하고 말았다. 군의 정치 불개입을 주장하며 끝까지 반란세력에 동조하길 거부했고 이로 인해 예편되어야 했던 당시 1군 사령관 이한림과 비교하면 너무나 어이없는 항복이었다.[18]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이주당 사건이라는 반쿠데타 사건의 배후 인물이라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고 징역 선고를 받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냈고,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병이 악화되어 성모병원에 입원, 박정희 정권은 장면이 타계 한 달 전에 정치 정화법 대상에서 해제시켰다.

2.2.4. 사후

정치적으로 김대중, 철승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19]

가족으로 동생인 서양화가 장발이름처럼 긴 머리가 아니다(서울대학교 미대 초대 학장)과 아들인 서강대학교 장진 교수, 천주교 춘천교구장인 장익 주교가 있다. 여동생도

사 정권에 의해 무능하고 우유부단하였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다가 사 정권이 붕괴된 뒤에는 재평가의 바람이 불고 있다.[20]

1998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박정희,최규하 등과 함께 그가 건국훈장중에서도 제일 1등급인 대한민국장의대한 자격이있는지 논란이 많다. 실제로 김대중은 장면의 영향받은 인물이다. 최규하의 대한민국장도 대통령 재임당시에 수여한것이다.(...) 정권넘겨준 공로?[21]

2009년 편찬된 친일인명사전가톨릭 분야 친일파로 등재가 되었는데, 비판적인 의견이 많다. 한국 천주교회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분적 협력을 했다는 사유로 친일파라고 분류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도 이건 너무 심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반민특위의 기본이 된 김승학의 친일 관련 문서에서는 그를 안 좋게 묘사했다.반민특위 살생부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연맹 간사라고......

2.3. 기타

전형적인 부유한 엘리트. 선거 중 여러 사람과 함께 투숙한 여관이불이 불결하다 해서 혼자서만 덮지 않고 잤으며, 시골 주막집에서 때가 묻은 '더러운' 주박으로 떠 주는 막걸리를 마시지 못하고 거절한 위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는데 한국 정치판은 서민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야 지지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중국시진핑만 하더라도 이런 마인드 때문에 중국 인민들에게 인기가 많기도 한 걸 보면 한국만 그런 건 딱히 아니다. 애당초 서민을 주 지지층으로 삼는 정치인이라면 패시브 스킬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국민학생 시절 자신의 어린시절 별명이 "짜장면"이었다는 나름 유머를 선보였으나 당시 짜장면은 고급음식으로서 당시 아이들은 짜장면은 커녕 밀가루조차 보기 힘들었다. 이는 장면 도움으로 좌익 논란에서 벗어난 부친을 둔 이회창이 고스란히 비슷한 재현을 하고 만다.

최규하와의 친척서면과 알고지냈다. # 당시에는 그의 정체를 몰랐지만.

문화방송 드라마 제2공화국(드라마)제3공화국(드라마)에서는 고 김무생씨가 장면을 맡았다. 우유부단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이지만 제2공화국 첫 회의 쿠데타군에게 쫓기는 장면은 진짜 명장면.

그가 살았던 가옥은 서울 혜화동에 복원되어 있다. 대학로 로터리를 지나는 버스에서 이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면 꼭 '장면 총리 가옥'이라는 안내도 함께 내보낸다.

가톨릭에 대한 개신교의 오해를 반박하는 호교서 "교부들의 신앙"을 번역하신 분이다. 본인의 말로는 수원농림에 다닐 때 개신교예수쟁이의 근거없는 조소에 한마디도 반박 못한 것 때문에 한이 맺혀서 미국 유학 때 번역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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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호가 태암(太巖)이었던 아버지 장기빈은 아들들에게 운석, 우석이라고 호를 지어줬다 한다. 큰 바위의 아이들이니 돌 석 자를 붙인 것이다.
  • [2] 그가 50대의 나이에 무릎 꿇은 이유는 국무총리 당시 옷이 화려했다는 어머니의 질타 때문이었다.
  • [3] 현 박문 초등학교
  • [4] 일제시대만 해도 정해진 학제가 없어서 6년제 초등학교, 5년제 초등학교가 있었고, 중고등학교는 통합으로 3년, 5년제가 있었다.
  • [5] 훗날 서울농대로 발전한다.
  • [6] 소년시절 친구들이 기방으로 끌고갔을 때 그는 긴장해서 줄행랑을 놓기도 했다. 일제 말기에는 협력을 요청하는 한 총독부 관리의 만찬장에 갔다가 기생들이 들이닥치자 역시 줄행랑을 놨다. 오오 공처가 오오
  • [7] 노기남 대주교는 추기경 김수환이나 정진석이 성장하기 전 한국 천주교회의 거목이었다.
  • [8] 당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기붕은 병약한 데다 권력에 욕심이 많았고,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문제가 많았다."라고 말한다. "장면은 성격이 온순한 편이며,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에 표를 주었다."고 말한다.
  • [9] 단, 이 과정에서 장면이 총리로 당선되는 것이 못마땅했던 김두한이 장면의 친일 경력 및 창씨개명 사실을 전단으로 뿌리고 다니며 장면 깎아내리기에 앞장섰다.
  • [10]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큰 권력을 갖지 못하는 대통령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대통령의 권한을 확대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는 바람에 장면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 [11] 거의 조선시대 훈구파사림의 차이 정도다.
  • [12] 다급한 나머지 안경도 잃어버렸다. 후일 수녀원에서 나왔을 때 안경 없이 연설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 [13] 이는 장면 홈페이지에 있는 당시 의전비서 이홍렬의 1999년 증언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그러나 증언자인 이홍렬 본인도 직접 본 것은 아니었고 자신이 운전수와 총리만 태워서 보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되었다는 식으로 얘기한 것이고, 당시 미국의 움직임은 음모론이 나올 정도로 상당히 모호한 것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다.
  • [14] 쿠데타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병력은 6군단 포병대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등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특히 서울을 공격한 부대는 박정희를 주축으로 한 육사 8기생 250명과 병력 3500명뿐이었다.
  • [15] 이 시기 모든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에 넘어온 것은 1990년대로, 전시 작전통제권은 추후 넘어올 예정이다.
  • [16] 매그루더가 진압 명령서를 들고 가서 사인만 해주면 된다고 했으나 "우리 나라는 며느리가 물에 빠져도 시아버지가 안고 나오지 못한다."는 해괴한 발언을 하며 사인을 거부했다. 아무래도 한국의 어려움은 미국이 나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뜻인 듯하다.
  • [17] 당시 카르멜 수도원의 수녀가 목격한 장면이다.
  • [18] 그럼에도 이한림은 박정희 정권에서 장관직을 지낸다.
  • [19] 종교적으로 천주교도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부가 바로 장면이다.
  • [20] 군사 쿠데타에 의해 기회가 박탈되었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고, 그밖에 정부수립 초기에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UN에 가서 받아온 점과 6.25 전쟁 당시 미국과 UN에게서 UN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여 성공시킨 것 등이 있다. 그러나, 소련이 의도적으로 행한 행위를 제외핻 이러한 점이 오히려 국가 최고 정치 지도자가 가져야 하는 고유 책임에서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는 말을 피할 수 없었다. 외교를 해보았다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을텐데, 외교쪽이지만, 평생 공무원으로만 지낸 최규하보다도 더욱 심각핟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가린 박정희 정권 역시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든 자기 권력욕을 위해 세워진 정권이란 평를 지울 수 없게 되었다.
  • [21] 어떤 원로가 지적한 것이지만, 문민통제로 군을 다스린다는 점을 하찮게 본 최고 지도자라는 평이 아깝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