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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회신학대학교

last modified: 2018-06-20 20:42:40 Contributors



長老會神學大學校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1]
개교일: 1901년
소재지: 서울시 광진구 광장로5길 25-1
학훈: 경건과 학문(Pietas et Scientia)
면적(m3) 56,441m2
홈페이지

Contents

1. 개관
2. 특성
3. 역사
3.1. 해방 전 역사
3.2. 해방 후 역사
4. 개설 과정
4.1. 학부
4.2. 대학원
4.2.1. 석사
4.2.2. 박사
4.3. 같이보기



학교 로고 및 설명. 왠지 이 친구가 사는 거기가 생각난다

1. 개관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개신교계 사립 대학교. 흔히 줄여서 "장신대[2]"라고 불린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마포삼열(Samuel.A.Moffett, 1864.1.25~1939.10.24)이 1901년도에 설립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속칭 평양신학교)를 전신으로 삼는다. 마포삼열 선교사는 1901년 평양에서 김종섭, 방기창 두 사람을 데리고 자신의 사랑방에서 신학반을 만들어 가르쳤다. 이것이 평양신학교의 모태가 되어 1903년 장로회 공의회에서 정식 인준되었고 조선예수교장로회의 교단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 즉 평양신학교로 시작되었다.[3]

2. 특성

2014년 기준 대한민국의 장로회 교단 중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 이어 2위 규모를 차지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신학을 대표하는 직영 신학 대학교이다. 1960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이 WCC 가입문제[4]로 예장합동의 총회신학교(現 총신대학교)와 분열되면서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시작했다.

한국의 개신교계에서는 총신대학교와 함께 대한민국의 개신교 신학을 주도하는 양대산맥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만의 리그

총신대학교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정통주의에 부정적이며 성서무오설, 축자영감설을 기반으로 하는 박형룡 목사[5]보수신학을 대표한다면 장로회신학대학교는 신정통주의, 성서비평, 사회복음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입장에 서 있는데, 이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이 개신교 내 스팩트럼에서 보수와 진보를 모두 포용하는 이종성 박사의 통전적 신학(Holistic Theology)의 토대 위에 세워졌기에 가능했다.[6]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및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신학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나 간단히 말해, 칼바르트(Karl Barth) 계열의 신정통주의를 따르며 한국 개신교 스팩트럼에서 중도(보수)노선 정도로 보면 된다.
(보<혁 기준으로 고신대학교<총신대학교<장로회신학대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한신대학교성공회대학교)

예장통합 교단의 목사를 양성하는 과정인 신학대학원(M.Div)[7] 입시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총신대학교의 신학대학원과 더불어 준고시급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재수, 삼수는 기본인 리즈시절이 존재했다. 흠좀무[8]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 및 넘쳐나는 목사후보생 대비 사역지의 부족 등의 이유로, 2000년대 후반부터 하락세를 보이며 2012년 지원자 1,000명선이 무너졌고, 2014년 현재 823명이 지원하면서 망했어요

3. 역사


역대 총장. 2014년 현재 제 20대 총장으로 김명용 박사[9]가 재직 중이다. 정년퇴임하였다.

2018년 현재 제21대 총장 으로 임성빈 박사가 재임중이다.
다음은 장로회신학대학교측의 공식 설명이다.

3.1. 해방 전 역사

초창기에는 각 장로회 선교부의 선교사들이 평양에 가서 가르쳤고, 학생들은 1달 공부하고 3달 목회하는 방법으로 1년에 3달 공부하여, 5년간 수업하는 제도로 운영되었다.

1907년 6월 길선주, 한석진, 이기풍 등 7인의 첫 졸업생이 나오게 되었고 그해 9월에 독(립)노회가 창설되어, 이분들이 한국 장로교회의 첫 목사들로서 안수되었다. 1912년에는 장로회 총회가 창립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선교사로 파송하여 해외 선교의 시작이 이루어졌다.

1919년 기미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본교 출신 목사들 여러분도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학교 학생들도 다수 이 운동의 선두에 나서 활동함으로써, 여러 학생들이 체포되어 학교가 일시 휴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제의 갖은 억압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의연히 그 임무를 수행해 왔으나,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총회장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되므로, 신학교는 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절함으로써, 무기휴교 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신학교가 문을 닫자, 목사 양성을 중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는 친일하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40년 평양에 '평양신학교'를 세우고, 채필근 목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에서는 김대현 장로가 중심이 되어, 김재준 목사를 교수로 '조선신학교'[10]가 설립되었다.

3.2. 해방 후 역사

1945년 해방이 되자 북한에는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자연히 신학교가 폐쇄되었고, 남한에서 총회가 기존해 있던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하여 교역자 양성을 하였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되었던 목사와 평신도들, 소위 '출옥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워 따로 신학교육을 시도하게 되었다.[11] 그러던 중에 1947년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신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입장에 반박하는 탄원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총회는 '장로회신학교'를 인준하고 조선신학교에서 나온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육을 하게 되므로, 총회 안에는 조선신학교·장로회신학교의 두 신학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1950년 4월 총회에서 경남노회의 출옥성도들 문제로 싸움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졌고, 결국 1951년 출옥성도들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소위 '고려파'로 갈라져 나가고 말았다.[12] 이것이 1885년 언더우드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 하나로 내려오던 장로교회가 두 쪽이 나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총회는 조·신과 장·신을 통합하여 '총회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이를 실행하려 했는데, 장신은 총회의 결의에 순응했으나 조신은 이에 따르지 아니하고 독자적으로 신학교를 계속 운영하다가, 1953년 '기독교장로회'라는 간판을 걸고 분립해 갔다. 1953년 총회는 '총회신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시작하여 후에 서울로 옮겨오게 되었다.

서울로 옮겨온 총회신학교는 남산의 옛날 조선 신궁 자리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이 자리가 적산이었으므로,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아, 교사를 짓자고 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돈 3,000천만 환을 사기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어 분쟁을 계속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 싸움으로 결국 1959년 대전에서 모인 제44차 총회에서 총회신학교가 두 파로 나뉘어, 에큐메니칼 측은 서울 광진구 광장동 353번지 1만 9천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교사를 짓고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새 출발을 하였고 N.A.E 측, 즉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는 측은 사당동에 교사를 짓고, 옛 이름 그대로 '총회신학교'[13] 출발하였다.

장로회신학대학교는 1961년 문교부로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으며, 1966년 대학원 설립, 1973년에는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개명하고, 1976년부터 미국 San Francisco 신학교와 목회학 박사과정을 공동으로 개설하였다. 1980년에는 신학대학원(M.Div.)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92년에는 지금까지 San Francisco 신학교와 공동으로 실시하던 목회학 박사과정을 중지하고, 1992년에 시카고에 있는 McCormick 신학교와 공동으로 이 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1993년부터는 '장로회신학대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3년에는 교육부로부터 '세계선교대학원'이, 1995년 10월에는 교육부로부터 '교역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이, 1996년 11월에는 '교회음악대학원'이, 2001년 7월에는 '교역대학원'을 폐지하고, '목회전문대학원(목회신학석사과정, 목회학박사과정)'이 설립인가를 받았다.

4. 개설 과정

4.1. 학부

  • 신학과(Th.B)
  • 기독교교육과(B.A)
  • 교회음악학과(B.M)

4.2. 대학원

4.2.1. 석사

  • 신학대학원(M.Div)
  • 일반대학원(Th.M, M.A, M.M, M.P.S)
  • 목회전문대학원(Th.M in Min)
  • 세계선교대학원(Th.M in Miss, M.A)
  • 교역대학원(Th.M in Min)
  • 교육대학원(M.A in Ch.Ed)
  • 교회음악대학원(M.C.M)

4.2.2. 박사

  • 일반대학원(Th.D)
  • 목회전문대학원(Th.D in Min, D.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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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문명의 경우 2014년 이전까지는 단과대학같은 느낌 때문인지, College를 고집하다가 2014년에 들어오면서 2/3년제 대학에서 많이 쓰는 College 대신 University를 정식 채택하였다. 취지는 세계적 추세에 맞춘다나 뭐라나?
  • [2] 전국 각지(서울장신대학교, 부산장신대학교, 한일장신대학교)에 '장신대'라는 표현이 들어가는 학교들이 있다. 이 학교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산하 7개 직영 신학대학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와 같은 교단 소속이다. 하지만 이들은 장로회 통합교단 소속의 신학대학라는 뜻에서 장신대라는 이름이 학교 명칭에 들어가있는 것일 뿐, 모두 엄연히 다른 별개의 대학교이다. 재단도 각각 다르다. 보통 그냥 "장신대"라고만 부를 때는 '장로회신학대학교'를 가리킨다.
  • [3] 이 평양신학교를 전신으로 삼는 또 다른 대표적인 학교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의 총신대학교를 들 수 있다. 두 학교의 소속 교단이 과거에는 하나(조선예수교장로회)였으므로 평양신학교가 장로회신학대학교와 총신대학교의 모태라는 주장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에는 논란이 있다. 현재 설립자의 후손 및 설립자의 소속 교단인 미국장로교회(옛 미국북장로교, 현 PCUSA)와 교류를 하고 있는 곳은 장로회신학대학교이다. 참고로 후손의 동의하에 마포삼열의 유품과 유해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교내에 안치되어있다. 또, 평양신학교의 학적부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있다.
  • [4] 이 문제는 사실 좀 더 복잡한 이면과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표면적으만 보았을 때에는 WCC 가입에 찬성하는 노선이 통합측, 반대하는 노선이 합동측의 기원이 되었다. 따라서 통합이 합동보다는 진보적인 편이며(세계 신학흐름에선 둘 다 보수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 [5] 근본주의 개신교 신학자로도 유명하다.
  • [6] 어떤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의 중립적 영성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그분은 너무도 중립을 좋아하셔서 군부독재시절에 전두환 옆에 웅크리고 앉아서 조찬기도를 했다. 별로 자랑할 것은 못된다는 뜻.
  • [7] Master of Divinity의 약자로 우리말로는 교역학 석사 또는 목회학 석사로 번역할 수 있다.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개신교 정규 신학 학제에서는 이 학위 과정에 입문해야 정식 목사후보생으로 인정받는다. 목사 되는 것도 FM대로 가자면 꽤 어려운 과정이다.
  • [8] 보통 300명 정원에 1,500~1,600명 정도는 기본으로 응시했다. 학부부터 신학을 공부하게끔 되어있는 독일과 달리,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신학학제는 신학대학원 지원자가 학부시절 다양한 전공을 공부하고 진학하는 것을 격려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신학대학원생들은 신학대학 외에도 일반대학교 출신들이 많다. 즉,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학의 문을 개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응시생 중 간혹 10수생도 보이는 등, 불굴의 의지를 지닌 용자들이 생겨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 [9]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의 제자로, 한국에서는 칼 바르트(Karl Barth) 신학의 권위자로 알려져있다.
  • [10] 현재의 한신대학교의 전신이다.
  • [11] 고려신학교는 현재의 고신대학교의 전신이다.
  • [12] 이 계열이 현재 한국의 개신교 스펙트럼에서 가장 보수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이 되었다.
  • [13] 지금의 총신대학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