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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마라

last modified: 2015-03-24 21:30:26 Contributors


위의 그림은 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Jean-Paul Marat

프랑스 혁명의 중심에서 활약한 3인 중 한 사람(나머지는 당통, 로베스피에르)이다. 개인적으로 부르봉 왕가에 격렬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저돌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1789년 혁명 이후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정치일선에 뛰어들었다. 이 신문은 온동 선동적인 문구로 도배가 되어있으며, 혁명회의에서 "인민의 적에게 줄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귀족과 왕당파를 몽땅 없애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덕분에 프랑스 전 국토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오고, 이 무자비한 숙청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 중 한 명인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지병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욕을 하던 중 목욕탕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애시당초 살아서 탈출할 생각을 포기하고 저지른 짓이었기 때문에 코르데는 마라를 죽이자마자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며칠 후 사형을 받고 단두대로 끌려갔다. 참고로 마라가 피부병을 앓았던 이유는, 그가 정적들에게 쫒길 당시 도피처로 파리의 하수도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하수도에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지내야 했으니 피부병을 앓게 된 것.

이런 마라의 죽음은 후에 화가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라는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여담으로, 다비드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마라가 죽은 지 꽤 되어서 시체가 심하게 부패된 상태였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그림에서 욕조 바깥으로 늘어져 있는 팔이 실제로는 시체에서 팔이 썩어 문드러져서 떨어져 나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걸 '죽은 직후의 상황'으로 알아서 재현해 그린 그림이다.(…)

사실 한때는 과학자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열정은 넘치는데 재능은 없는 타입이었는지 아이디어가 퇴짜를 맞았고, 이 때 과학도의 길을 포기한다. 이 때 퇴짜를 놓은 사람이 바로 산소를 발견한 라부아지에인데, 공교롭게도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혁명 때 마라에 의해 숙청당했고 1년 뒤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사형당한다. 세금에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는 하는데, 이에 대해개인적인 감정도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정이 결정적으로 개입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애초에 마라는 의학과 관련되어 있고, 라부아지에는 화학자이다. 의사로 일했던 마라가 화학을 이야기 했을 리도, 그렇다고 라부아지에가 의학을 다뤘을리도 만무하다. 그리고 세금과 관련된 일이라는게 다름아닌 세금징수인이었는데, 당시 프랑스의 세금징수인이라는게 자기 구역에서 재주껏 세금 뜯어다 일정액의 상납금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먹는 조폭 비슷한 일이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엄청난 원한을 사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고, 따라서 최우선적인 숙청대상 중 하나였다. 마라와의 사이에 개인적인 감정이 있건 없건 숙청을 피할 길은 없었던 셈이다. 덤으로, 과학자로써의 업적과는 별개로 세금징수인으로써 라부아지에는 악명이 자자한 인물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정부도 이 때문에 그를 살리고 싶어도 살릴 수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기의 지도자들 가운데 과격파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코뱅파에서도 그 끝에 가있는 인물이었다. 당통은 온건한 편이었고, 로베스피에르는 귀족들의 무자비한 숙청만은 피하려고 했으니까 말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의외처럼 들리지만, 사실 공포정치가 막을 올린 시점이 바로 마라의 암살 이후다. 오늘날에도 마라에 대한 평가는 "무자비한 사형집행인"과 "혁명 최전선의 투사"로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페터 바이스의 희곡 "마라/사드"가 마라에 대한 이러한 두 시각을 잘 다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스탈린은 마라를 개인적으로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으며,인민의 적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게 맘에 들었나 보다 강구트급 전함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마라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