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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last modified: 2017-11-01 23:21:15 Contributors

Contents

1. 프랑스의 구국 영웅, 가톨릭 성인
1.1. 개요
1.2. 어린 시절과 당시 시대 배경 과 읽기전 요약
1.3. 잔 다르크의 활약
1.4. 시련기
1.5. 체포와 재판, 죽음
1.6. 능력
1.6.1. 오를레앙 전투
1.6.2. 파타이 전투
1.6.3. 랭스 공격
1.7. 전쟁에 끼친 영향
1.8. 사후의 평판과 영웅화, 시성
1.9. 대중문화와 잔 다르크
1.9.1. 셰익스피어와 잔 다르크
1.9.2. 현대 서브컬처의 잔 다르크
1.10. 대한민국에서의 잔 다르크
1.11. 잔 다르크에 대한 다른 전설
1.12. 잔 다르크 신드롬
2. 게임 〈JEANNE D'ARC〉
3. 골판지 전기 W에 등장하는 LBX
4. 이름이나 모티브를 차용한 캐릭터


1. 프랑스의 구국 영웅, 가톨릭 성인

1.1. 개요

프랑스어: Jeanne d'Arc
라틴어: Ioanna Arcensis / Ioanna de Arc
영어: Joan of Arc
1412.1.6[1][2]~1431.5.30
상상화. 초상화를 남기지 못했다. 살아있을 때 그려진 스케치도 적진인 파리에서 남장을 한 처녀가 군대를 이끌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린 상상화라고 한다.
기도하는 잔 다르크,
페테르 파울 루벤스, 1620년
샤를 7세의 대관식의 잔 다르크,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54년

아르크의 성녀 요안나.

축일은 화형이 집행된 5월 30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 루이 9세, 리지외의 성녀 소화(小花) 데레사와 더불어 프랑스수호성인이며, 여군걸스카우트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미군 군종교구도 미군 병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잔 다르크를 지정했다. 그리고 가톨릭의 종교재판에서 파문과 사형을 당하고 성인으로 인정받은 보기 드문 사례다.

흔히 알려진 'Jeanne d'Arc'는 현대 프랑스어식 표기이며, 중세 프랑스어로는 'Jehanne Darc(주안 다르크)'라 썼다.[3] 잔 다르크는 '아르크의 잔'라는 의미로, 출신지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중세식 표현이다. 영어로는 조앤 오브 아크(Joan of Arc)라고 쓴다. 잔(Jeanne)은 라틴어 이름인 요안나의 프랑스어식 표기. 이외에 패색이 짙던 프랑스군에게 전환점이 된 오를레앙에서의 첫 승리를 기려 '라 퓌셀 도를레앙(la Pucelle d'Orléans, 오를레앙의 처녀)'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에서는 구한말에 약안으로 불렸다가 일제강점기와 1950년대에는 '잔닥크', '짠닥크', '짠다크'로 불리었고,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는 '잔 다크'라는 표기가 많이 쓰여졌다. 이 당시를 경험한 어르신들은 주로 이 쪽으로 쓰거나 부른다. 1990년대 이후로도 '쟌 다르크', '잔느 다르크' 등 다양한 표기가 있지만 현대 국어 표준어 표기로는 '잔 다르크'로 통일.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가톨릭 세례명으로 쓰일 땐 '요안나'.

생몰년은 1412년 1월 6일(추정) ~ 1431년 5월 30일. 생일로 알려진 1월 6일은 주님 공현 축일인데, 그녀에 대해 신성함을 부여하기 위해 사람들이 날짜와 이야기를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탄생 당시 밤에 들이 몇 시간 동안 날개를 퍼덕이며 울었다는 전설이 있다. 1412년이라는 생년도 종종 의심을 받고 있는데, 1407년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녀 스스로 재판정에서 19살쯤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1411년에서 1412년쯤에 태어난 것은 확실해보인다. 1407년 설의 경우 후술되어 있는 공주 설과 얽히기도 한다(…).

1.2. 어린 시절과 당시 시대 배경 과 읽기전 요약

잔 다르크는 알자스-로렌 지방에 속한 동레미(Domrémy)라는 프랑스 동쪽의 시골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양치기 아버지 자크 다르크[4]와 어머니 이사벨 로메[5]의 5남매 중 4번째 딸[6]로 태어났다. 집안에 대한 묘사가 서로 엇갈리는데, 가난한 소작농 집안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의 학습만화 및 위인전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지방의 부농이며 동레미의 말단 관리였다는 설이 유력하다.[7] 물론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고,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정도. 집안 생활은 검소했다고 한다.

그녀가 위인전에 나오는것 처럼 시골 출신의 평범한 부농 출신이 맞다면 대다수의 농부 아이들이 그랬듯이, 잔 역시도 부모의 농사일과 가축 돌보기, 바느질요리 등의 집안일을 돕는 평범한 소녀였다. 다만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은,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신앙심이 독실했다는 점.

한편 그녀가 살던 당시는 백년전쟁의 막바지로 전황은 프랑스에게 대단히 불리했으며[8], 왕이 되어야 할 도팽(왕세자) 샤를은 대관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 그가 왕세자라 자칭하기는 했지만, 트루아 조약에 따라 아버지인 샤를 6세 사후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며 섭정을 맡기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다.[9]

하지만 헨리 5세와 왕비인 프랑스 공주가 요절하여, 갓난아기인 헨리 6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왕실은 현실성이 없다며 조약을 씹어버렸고, 이에 이전부터 프랑스 왕실과 대립관계에 있던 부르고뉴의 귀족들이 조약 위반을 비난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황태자 샤를과 부르고뉴 공작이 회의를 하지만, 왕실지지파인 아르마냑 파가 아르마냑 공작의 암살에 대한 복수를 한답시고 부르고뉴 공작[10]을 암살하는 병크를 저질러 결국 부르고뉴 파는 잉글랜드 편에 붙어 버렸다. 즉, 잔 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의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잉글랜드 + 프랑스 부르고뉴파 vs. 프랑스 아르마냐크 파'의 싸움이 되었다.[11]

그런 혼란이 지속되던 와중 1425년, 불과 13세의 잔 다르크에게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목소리에 처음에는 당황해서 거절했으나 그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1428년, 마침내 16세의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참고로 이건 여담이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부분은 역사가들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물론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쪽에서는 '하느님이 명령을 내린 것'으로 끝내버릴 수 있지만,[12] 하느님이 없다고 믿거나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믿는 역사가로서는 난처한 일이기 때문. 따라서 이 일화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져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실은 잔 다르크는 정신병자였다.'라거나 '살균되지 않은 우유를 오랫동안 마셔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샤를 6세가 정신병자였는데, 그의 아들인 샤를 7세가 잔이 정신병자인지 아닌지 모르고 중용했을 리가 없다.'라는 등의 반박을 받아, 오늘날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듯. 사실 오늘날 이 일화에 대해 논리적으로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운데, 일단 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재판 자료밖에 없는데다 그나마도 '잔이 정직하게 말한 거냐, 국가 기밀을 위해 적당히 거짓말도 했느냐.'라든가 '잉글랜드 측이 잔의 발언을 얼마나 위조했느냐.'라는 문제도 명확히 밝혀낼 수 없다. 이러니, '논리니 뭐니 하는 건 됐고, 암튼 잔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 OK?' 하고 넘어가는 역사가도 있다.

현대 역사학의 관점은 이렇다. 위의 주장들은 현대의 입장에서 중세를 해석하려 시도한 일종의 시대착오적 개념들이다. 중세인들의 망탈리테는 당연히 현대인들과 다르다. 이들은 기적이나 하느님의 음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민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현상도 이들에겐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 실제로 중세인들은 모든 사물에서 기적을 보았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주장했을 때, 샤를의 궁정과 이후 그녀가 당한 종교재판은 그것이 하느님의 음성인지 악마의 음성인지 여부를 검증하려 했을 뿐, 음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 잔의 체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시대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 애초에 과학적 언어에 익숙한 현대인들과 종교적, 신화적 언어를 구사한 중세인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다.

1.3. 잔 다르크의 활약

결심을 굳힌 잔은 곧바로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에 찾아가서 시농 성에 머무르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알현하게 할 것을 요청했고, 처음에는 당연히 거절당했으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곳에 머물러 지냈다. 영주는 그녀를 마녀라고 의심하였기에 퇴마의식을 할 수 있는 사제를 보내 시험해 보았으나, 오히려 잔은 그를 반갑게 맞아들여 고해성사를 하며 그 의심을 풀게 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끈질긴 요청에 장 드 메스와 베르트랑 드 폴뤼니를 비롯한 기사들은 잔의 뜻에 동조했고, 결국 영주는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잔을 시농으로 보내게 된다. 그곳으로 가려면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이 점령한 지역을 지나가야 했는데, 시농까지의 거리는 무려 435km로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인 325km보다도 더 먼 것이다. 시작부터 그런 어려운 조건이 있었으나,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무사히 도착한다.

그러나 샤를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해서 자신의 시종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다음 자기의 자리에 가게 하고, 초라한 옷을 입고 구석에 숨어서 잔을 불러냈다. 그런데 변장한 시종을 한번 보고 곧바로 외면한 다음 샤를을 찾아내서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래도 마녀의 속임수라는 주장이 측근들에게서 계속해서 나오자, 다시 푸아티에로 보내서 성직자들의 심문을 받게 했다. 물론 잔은 거짓없는 언변으로 이 심문에도 통과했다.

결국 잔 다르크에게 신통력이 있다고 판단한 샤를은 잔 다르크에게 일군을 주고 질 드 레, 라 이르, 장 돌롱 등의 유능한 기사들을 딸려주었다. 출발 전에 기적 같은 일화가 있었는데, 잔은 천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며 생트 카트린 드 피에르부아 교회의 제단을 파보면 검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 곳에서 검을 찾아내 그것을 자신이 지휘할 검으로 썼다. 오래되어 녹슬은 검이었지만 한 번 닦아내자 새 검처럼 되었다고. 곧바로 오를레앙을 탈환하러 간 잔 다르크는, 현지 사령관 장 드 뒤노아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설득해 군대를 조직하여 싸웠다.

한편 오를레앙에 입성할 때도 기적같은 일화가 있었다. 잔 다르크가 군사들과 함께 오를레앙 성으로 입성하려면 성 앞을 가로지르는 큰 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러나 바람이 잔의 군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불거나 또는 바람이 불지 않아,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곤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잔 다르크가 기도를 올리자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어려움 없이 잔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오를레앙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었다. 제갈공명의 재림 이 때 잉글랜드군은 오나라처럼 화공을 쓰면 큰 승리를 거둘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13]

떠도는 말 중에 잔 다르크가 오를레앙 전투엔 참전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 영어, 프랑스어 위키디피아에서 오를레앙 전투 항목이나 잔 다르크 항목 어디를 봐도 잔 다르크가 참전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없다. 오히려 전장에서 심각하게 눈에 띄는 순백의 갑옷과 옷을 입고 선두에서 싸웠으며, 어깨에 석궁 화살을 맞거나 돌에 머리를 맞기도 했지만 결코 쓰러지지 않았고, 잔 다르크가 이끄는 군대는 잉글랜드군을 차례차례로 패퇴시켰다.

마침내 1429년 5월 오를레앙을 해방[14][15]한 잔 다르크는, 한때 잉글랜드에 충성서약을 하고 트루아 조약을 지지해서 프랑스 왕실의 의심을 사던 리슈몽 백작이 이끌던 군대를 만나 그에게서 "네가 성녀라도 두렵지 않고 마녀라면 더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 이어서 파타이 전투에서 숫적 열세에 처하고도 적장 탈보트[16]를 포로로 잡으며 잉글랜드군을 무찔렀고, 루아르 전역[17]을 이끌며 루아르 강변에 주둔하던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을 연달아 격퇴했고, 여러 교량[18]을 확보하였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지만, 이때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잉글랜드군 중에서 몸값을 지불하지 못한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 내용은 다른 것도 아니고 잔 다르크 위인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잔 다르크 본인이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린 건 아니어서 가능하면 학살을 자제시켰고, 오히려 전장에서 죽어가거나 부상당한 잉글랜드군을 직접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기도 했다. 보장시 성에서는 패잔병들을 보자, 각자 소지품을 챙기고 가도록 풀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5차례의 거듭된 승리[19]로 랭스[20]까지 진격한 잔 다르크는, 샤를이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게 해 주어[21] 그를 프랑스의 왕 샤를 7세로 만들었다. 샤를 7세는 잔의 공로를 인정하여 그녀의 소원대로 고향 마을 동레미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기 전까지 동레미는 조세 면제구역이 되었다.

1.4. 시련기

하지만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이후 잔 다르크와 잔의 수행자들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소(小)영주나 국민들이 새로운 프랑스 왕 샤를 7세에게 돌아올 것을 호소했고 그것은 그런대로 먹혔으나, 이는 왕실에 양날의 칼로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즉, 잔 다르크의 성녀 타이틀을 보고 황태자 파를 지지한 사람들인 만큼, 잔 다르크의 말 한 마디에 왕실을 흔드는 내부의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자크리의 난처럼 농민반란이 일어날 경우 농민 출신인 잔이 그들에 동조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고, 게다가 왕실로부터 의심받는 리슈몽 백작을 잔이 신뢰하고 있었음은 샤를 7세 파에겐 눈엣가시 같은 조건 및 설정이었다.

이즈음 샤를 7세 파의 주교 등이 잔 다르크가 갑옷 위에 입은 금실로 짠 옷과 말 안장 밑을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천 등을 가지고 사치[22]를 문제삼기도 하는 등, 서서히 잔 다르크와 프랑스 왕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정작 샤를과 귀족, 성직자들이 검소하지 않고 사치했다는 것이 함정.

게다가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전투 및 곧바로 이어진 랭스의 진격처럼 공격적인 전략과 신속한 공세를 취했는데, 이는 대관식 이후 비용이 많이 드는 전투를 통한 승리보다는 협상과 조약 등으로 이득을 취하려 하는 왕실과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물론 잔 역시 협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저 부르고뉴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은 몇 주만 기다리면 파리를 바치고 항복하겠다는 부르고뉴의 제안에 낚이는 삽질을 하고 만다. 그래서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의 원군이 파리에 들어오도록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걸 알아차린 잔 다르크는 샤를을 설득하여 생드니 등 파리 주변지역을 탈환한 다음, 1429년 9월 8일 성모 마리아의 탄생 축일[23]에 마침내 파리의 생 토노레 성문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을 물리치며 성문을 열고 맞아주리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파리 시민들은 잔을 여자의 모습을 한 괴물, 마녀, 창녀, 탕녀[24]로 욕하면서 입성을 거부하며 오히려 잉글랜드군과 부르고뉴군과 합류하고 말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고, 잔 다르크는 허벅지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지휘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성전이 조금씩 장기화될 듯하자 불과 이틀만에 냉랭해진 왕실의 지원부족으로 퇴각하였다.

물론 샤를 7세가 영지를 저당잡힐 정도로 프랑스 왕실의 재정난은 당시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파리 함락이 성공할 경우 잔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경우를 두려워해서 일부러 이른 날짜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는 음모론도 있다. 어차피 왕으로 즉위한 이상 부르고뉴파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포기하고 자신의 편에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을지도. 그게 5년 정도 걸리고 부르고뉴 공작의 비위를 맞춰서 했다는 것이 문제지만

부르고뉴인이 쓴 연대기 <파리의 부르주아의 저널>에 따르면, 파리 시민들은 당시 잔 다르크가 군대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로 가 기도를 올리거나 집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거나 무기를 나르는 등 잔 다르크와 맞설 준비를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도 이러한 파리 시민의 반응에 열받아서 "저녁 때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힘으로 들어가서 인정사정 안 보고 모조리 다 죽인다."라고 윽박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부르고뉴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 적대감을 가져서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썼을 수도 있고, 설령 파리를 함락시켰다고 해도 그 전이나 그 후의 일을 생각하면 학살이나 약탈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낮아보인다.

이후 잔 다르크를 반대하는 국왕 측근의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라샤리테 전투에 나섰다가 물자지원을 못 받으며 또 실패,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탈환하고 부르고뉴의 기사 강도들을 토벌하는 일 외에는 이렇다 할 승전을 올리지 못하면서 프랑스 왕실에서는 잔 다르크의 성녀 역할에 대해 서서히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그런 생각하기 전에 지원 잘 해주었으면 계속 성공했을 텐데. 결국 샤를 7세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와 휴전을 하면서 잔의 뜻에 반대함을 대놓고 드러냈다. 일단 겉으로는 그녀의 공로를 치하하며 그녀와 가족들에게 귀족의 칭호를 주긴 했지만, 그리 큰 봉토나 병사를 거느릴 권한도 없는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를 주었다.

사실 샤를 7세는 이전부터 잔 다르크를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중세에는 잔 다르크처럼 자신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 자체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이 무렵 서양에서 왕이 되려면 형식적이게나마 교황의 승인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오직 교황만이 신성을 인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홀연히 나타난 잔 다르크가 앞으로의 왕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는 교황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논란이 일기에 충분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진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는지 확신할 수 없는데 마지못해 선택한 상황에서, 섣불리 교황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파리를 비롯한 영국과 부르고뉴가 점령한 지역을 공격해야 한다는 잔 다르크와 달리, 샤를 7세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서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외교는 힘의 논리로 통한다는 것을 샤를 7세는 몰랐던 것이다. 그는 조용히 끝내고 싶었다. 한편으로 전쟁으로 잔 다르크의 명성이 계속 올라간다면 역으로 자신의 왕권이 추락할 것을 염려했을지도 모른다.

생피에르르무티에를 함락시켰을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약탈을 하려고 하자 엄하게 이를 금지시키고 주민들을 지켜주었으며, 스코틀랜드인 병사가 약탈한 송아지 요리를 자신에게 내놓자 먹지 않고 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또한 휴전기간 동안 부르주에서 빈민들을 구제하는 선행을 베풀었다.

1.5. 체포와 재판, 죽음

1430년 5월 23일, 휴전한 사이에 다시 힘을 키운 선량공 필립[25][26][27] 휘하의 부르고뉴파 군대가 콩피에뉴에 침입하자, 잔 다르크는 왕실의 무관심 속에 대략 200명에서 400명으로 추정되는 자기 휘하의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급파, 부르고뉴군을 기습했다.

초반에는 이들을 물리쳤지만, 증원군 6천 명이 나타난 뒤 상황이 역전되어 성으로 후퇴하면서 후방을 방어해야만 했다. 하지만 잔이 들어오기 전에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끌어올려져 고립되었고, 룩셈부르크 백작 소속의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포로로 잡힌다. 훗날 지원군이 뒤늦게나마 오면서 콩피에뉴의 방어에는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잔 다르크 본인에겐 치명적인 상황을 맞은 것이다.

룩셈부르크 백작은 포로로 잡은 잔이 탈출을 시도하자[28] 더 굳게 가두는 한편, 자기 집안의 여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해주는 등 정중히 대접도 했다. 이때 잔 다르크와 가까이 지내던 룩셈부르크 백작의 이모 '잔'(샤를 7세의 대모이기도 하다.)은 잔 다르크에게 친절했는데, 조카에게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지 말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영지를 상속하지 않겠다고 경고 섞인 설득을 했으나 불행히도 그해 9월에 사망했다.

한편 룩셈부르크 백작은 샤를 7세에게 전형적인 중세유럽식 포로 처리법대로 몸값을 내고 잔 다르크를 데려갈 것을 제의했지만, 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미 잔의 정치적인 용도는 다 사라져 버린 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체포당하는 과정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왕의 측근들이 콩피에뉴 전투 당시 체포되도록 배신 혹은 방관했다는 말도 있다. 결국 기다리다 지친 룩셈부르크 백작은 잉글랜드 측에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29]에 넘겨버린다. 참고로 룩셈부르크 백령은 훗날 부르고뉴 공국에 의해 강제병합되고 만다. 잔 다르크처럼 충성을 바치던 대상에게 버림받은 셈.

파리로 호송된 잔 다르크는 당시 잉글랜드파 및 부르고뉴파에 소속되어 있던 파리 이단 심문관들에게 넘겨져 이단 재판을 받았다. 흔히 잔 다르크가 마녀 재판을 받았다고 하나, 실제로는 이단 재판이었다. 이 재판을 위하여 코숑 주교[30]가 이끄는 70여 명의 이단심문단이 만들어졌으나 잔 다르크의 혐의를 입증하거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실패했다. 주교 이하 신학 전문가 70명이 달려들었지만 말 그대로 일자무식인 시골 소녀 한 사람에게 말빨로 발린 셈이다. 1대 70이라는 수적인 열세, 재판 성립부터 과정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게 잔 다르크에게 불공평했던 상황이었던 것은 물론, 건강까지 악화된 상태인 등 모든 면에서 그녀에게 극도로 불리한 조건이었음에도 말이다.

잔 다르크는 검과 깃발 중에 어느 것이 더 좋냐는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싫어서 깃발을 들었으며 한 번도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고 대답했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은총을 받았다면 함부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다고 몰고 갔을 것이고, 반대로 은총이 없다고 말하면 저주에 들렸다고 몰아갈 의도로 파놓은 함정이었지만 도리어 종교재판관을 데꿀멍하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럴다 할 혐의를 입증해내지 못한 코숑 주교는 마지막으로 잔 다르크에게 남장 혐의를 추궁했다. 죄라고 하기엔 괴이한 이유지만, 당시에는 여성이 남장을 하거나 남성이 여장을 하는 일은 성경에 위배되는 종교적 범죄였다. 이에 잔 다르크는 순결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잔의 재판 이전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장을 한 여성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있었으므로 잔의 주장은 정상적인 재판이라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재판 자체가 교회법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만 예를 들자면, 먼저 종교재판의 판사 노릇을 하려면 일종의 자격증 같은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코숑은 그런 거 없었다. 또한 잔 다르크에게 불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면 재판을 열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측은 일단 재판부터 열고 보라는 지령을 내려보냈고, 잉글랜드 측은 70명에 달하는 법률 고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재판에 임했지만 잔 다르크 측에 유리한 증인이 1명도 없었다. 잔은 이것을 알아차리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 또한 교회법을 어기는 일이었음은 당연. 또한 불리한 상황에 처해진 잔은 잔은 교황청에 항소를 신청했지만,[31] 재판정에서는 이를 저지했다. 게다가 잔에 대해 재판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잔의 고향 동레미로 조사관을 보냈는데, 잔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증거를 전혀 얻지 못하고 조사관이 돌아오자 코숑은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여행 경비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잔이 이미 푸아티에의 종교심문에서 문제없음을 환기킨 성직자는 감옥에 갇혔다가 친구의 보증으로 겨우 풀려났고, 잔의 재판 자체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한 성직자도 나타나자 그를 살해하려는 위협을 가해서 그 성직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결국 로마로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잔의 고향 사람으로 꾸민 사람을 독방에 보내어 위로해주면서 대화하는 척하면서, 엿보기 구멍을 통해 잔에게서 이단으로 보일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얻어내려는 수작까지 부렸다.

당연히 잉글랜드 및 부르고뉴 파의 시각에서 진행된 재판이 공정하기는 힘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당파도, 잔 다르크의 요청으로 당시 재판관이 프랑스 왕실에 그녀가 바라는 증거물들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를 구할 만한 문헌 기록 및 증거자료들을 전혀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이미 잉글랜드군 총사령관인 탈보트를 포로로 붙잡은 상태였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은 탈보트와 잔 다르크를 교환할 의사도 있었지만 당시 관례였던 포로교환 제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후 잔 다르크의 부하이기도 했던 프랑스 장군 장 포통 드 생트라유가 붙잡히자 바로 포로교환을 제의해 성사시켰다.[32] 이걸 봐도 사실상 샤를 7세는 아무 것도 안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오를레앙 시민들이 자신들을 구한 잔 다르크를 구해내기 위한 몸값을 자발적으로 모금하자 그걸 몰수해버렸다.[33] 다만 영국이 잔 다르크를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혹은 1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들여서 대려온 포로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는 영국인 포로 중 1만 리브르 트르누아나 1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포로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잉글랜드 지배하의 노르망디에서도 잔 다르크를 손에 넣기 위해 특별세를 도입(…)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하여튼 이리하여 샤를 7세는 천하의 개쌍놈으로 확정. 그 어머니 이자보 태후는 한술 더 떠 잉글랜드에 잔 다르크를 죽일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다만 이자보 태후는 트루아 조약 이후 부르고뉴 파를 지지하며 아들과 적대적 수준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역사가 줄리엣 바커는 잔 다르크의 재판은 공정하고 합법적이었으며 잔은 이단의 혐의를 결코 피할 수 없었고 잔의 편을 드는 사람도 많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람이 잉글랜드 출신이고 자신의 저서에서 아쟁쿠르 전투 등 영국의 승리를 강하게 묘사하고 잔 다르크가 나오는 책 제목도 "정복(Conquest)"으로 다분히 영국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후 프랑스 왕당파 학자들은 이 재판을 맹렬히 비난했다.

재판을 받을 때 잔은 7년 안에 오를레앙에서의 패배보다 더 큰 재앙이 영국에 닥친다고 경고 혹은 예언을 했는데, 단순히 전투에서의 참패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잔의 죽음 몇년 안에 영국 왕의 섭정 베드퍼드 공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고, 아라스 조약에 의해 부르고뉴파가 프랑스 왕실에 협력하면서 파리까지 잃게 된다.

결국 잔은 고문과 화형 위협을 포함한 협박을 받아 교회의 처분을 따르겠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문맹이었으므로, 자신이 어떤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명하면 수녀원에 감금시킨다는 약속과 달리 여전히 군사 감옥에 가둬놨고, 여자 옷을 입히고선 병사들을 보내 위협을 가했다. 이 상황에서 순결을 지키지 못하면 악마와 관계를 맺은 마녀로 몰 것이 뻔했다. 결국 자신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잔은 남자 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고, 그걸 빌미로 재판정은 이단 판결을 내린다.
어차피 가혹한 감옥 생활로 병에 걸린 잔은 화형 선고가 아니더라도 감옥에 계속 갇히면 병으로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았고, 종교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어도 영국에게는 군사재판이나 정치재판을 통해 포로나 반역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는 방법, 또는 독살이나 암살 등의 방법도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굳이 그녀를 이단자이며 마녀로 몰려는 종교재판을 고집한 이유는, 잔이 감옥에서 자연사하거나 다른 죄목으로 처형당하거나 암살당하면 오히려 영웅의 이미지로 민중들에게 보일 수도 있고, 샤를 7세의 위신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단자나 마녀로 몰아서 죽이면 샤를 7세의 위신 실추가 제대로 될 것이고 다른 처형 방법에 비해서 민중들의 반발심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계산한 일. 물론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소용없게 되었다.

이로써 잔 다르크는 1431년 5월 30일,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녀는 마지막 소원대로 화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루앙 시민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몇몇으로부터 십자가를 받았고, 자신을 화형대로 몰아넣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장작에 불이 붙기 전까지 잔 다르크는 하느님을 계속해서 부르짖었지만, 불이 붙고 불길이 강해지자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걸 본 군중들과 잉글랜드 병사들, 재판관들 대다수, 심지어 헨리 6세의 비서까지도 눈물을 흘렸고, 성녀를 죽였다고 탄식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날은 물론이고 이미 처형집행을 많이 한 베테랑 사형 집행인인 조프리는, 훗날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에서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결국 불길의 열기와 연기에 질식한 잔 다르크가 사망하자, 교회 측은 일단 불을 끄고 그녀의 알몸을 구경하러 모인 군중에게 내보였다. 이는 잔 다르크가 성녀도 마녀도 아닌 평범한 여성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죽어서까지도 극도의 수치와 굴욕을 느껴야만 했던 것이다.
잔 다르크가 죽는 순간 비둘기가 몸속에서 나타나 날아갔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성해(聖骸)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잔 다르크의 몸이 3번씩이나 태워졌고, 그 재는 세느강에 흘려보내졌다는 것뿐이다. 19세기 무렵에 잔 다르크의 화형 장소에서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갈비뼈가 발견되었다며 보관했으나 2006년 조사결과 이집트 미이라의 것으로 밝혀졌다.(…) 그녀를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프랑스 국민, 신자들의 자작극이나 착각으로 추정된다.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루앙 시민들은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댔다고 한다. 루앙이 친영파 도시였음에도 잔 다르크를 지지하거나 동정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샤를 7세는 25년이나 지나서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잔 다르크의 명예 복권을 선언[34]하였고, 교황청은 프랑스 왕실[35]의 요청을 받아들여 1456년에 잔 다르크에 대한 복권재판을 지시했다.

장기간에 걸쳐 파리, 루앙, 오를레앙, 동레미 등 잔 다르크와 관련된 지역에서 자료를 수집하고 전 유럽에서 성직자들을 초청해서 재판에 참여시키고 주민들에게 증언을 듣는 등의 조사를 한 다음, 잔 다르크 생존 당시 휘하에 있던 병사들과 관련지역 주민들, 그리고 재판에 참여했던 재판관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증인들을 불러모아서 재판을 실시한다. 이 재판에서 이단자이자 마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판결을 무효화하였으며, 잔 다르크에게 내려진 이단, 마녀 혐의 및 파문 조치를 철회해 그녀가 무죄라는 결론을 내리고, 잔 다르크를 이단으로 판결내렸던 피에르 코숑을 이단자로 선언한다.

그런데 이건 이단자이자 마녀로 판결받은 잔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 꺼림칙한 샤를 7세와 유족들의 이해관계가 합일된 면도 있다. 정작 잔에 대한 종교재판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아직 살아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코숑을 포함한 이미 죽은 관계자들이나 영국인들에게 죄를 떠넘기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등 얼버무리며[36]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청문회라든가. 처벌을 피한다. 물론 잔이 당하던 종교재판보다는 공정했지만.

1.6. 능력

잔 다르크의 행보를 보면 과연 그녀가 사람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거기다 이 모든 것이 배울 기회도 없었을 시골 소녀가 해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하느님이 내려준 기적의 성녀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정도. 괜히 성녀 소리 들은 게 아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군사적인 측면에서 정녕 '희대의 천재'라 불리울만 한지를 판단하기 위해 잔 다르크가 참가했던 주요 전투들의 내용과 그 과정에서 그녀의 역할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잔 다르크의 행적에 대해서 아직도 연구중이며 프랑스, 교황청, 영국에서 3중 교차 검증 중에 있지만 현재까지도 '구전'이나 '설화'를 제외하고 학계에서 인정 받는 신뢰성 있는 기록 중에서 잔 다르크의 천재적이라는 군사적 능력을 명확히 증명해 주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은 상황이다. 벨리사리우스, 이순신, 한니발 바르카처럼 역사상 군사적인 방면에서 천재 소리를 듣는 인물들은 모두 전쟁수행 과정에서 그들의 천재성을 증명해주는 명확한 기록이 있기에 천재라 불리우는 것이다.

중세 유럽의 전쟁 기록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자세하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정복왕 윌리엄 휘하의 기사이자 음유시인인 이보 테일레퍼가 전사하기까지의 과정, 링컨 전투에서 펨브룩 백작 윌리엄 마셜의 연설 내용과 돌격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프랑스군의 버팀목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중적 인지도는 잔 다르크에 훨씬 못미치는 베르트랑 드 게클렝의 전략과 전술같은 세세한 내용까지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당시 역사 기록을 담당하던 연대기 작가들과 수도사들이 구국의 영웅이자 성녀로 추앙받는 잔 다르크의 업적과 언행을 기록하는데 소극적이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기록상 잔 다르크의 행적에서 그녀의 군사적 능력을 드러내는 대목은 거의 없다.

사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잔다르크의 이미지는 문서 기록보다는 구전이나 설화로 전해지는 내용이 더 많다. 지금으로서 확실한건 그녀로 인해 프랑스군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었고 그리하여 위기 상황을 탈출하여 극적인 반전을 이룩하는데에 성공했다는 점 뿐이다.

1.6.1. 오를레앙 전투

시농 성에서 샤를에게서 4천여명의 병력을 타낸 뒤 잉글랜드 군에게 포위된 오를레앙으로 진격하는데, 도착하자마자 잔의 군대는 아직 완벽하지 않은 오를레앙 포위망의 빈 공간을 정확히 읽어내고 그 간격 사이로 돌입, 오를레앙에 성공적으로 입성한다. 오랫동안 포위된 성내의 주민과 군인들에게 보급품을 전달해준 뒤 잔은 곧장 잉글랜드군이 태세를 정비하기도 전에 공격에 나서고, 생 루의 보루와 생 르블랑의 탑을 점령하여 오를레앙 포위망의 핵심거점인 레 투레르 요새를 포위한다. 하지만 레 투레르 요새의 방비는 탄탄했고 프랑스군의 피해가 늘어만 가자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을 숲으로 후퇴, 매복시켜 마치 철수한 듯한 기만작전을 펼치고 여기에 낚인 잉글랜드군이 안심했을 때 급습을 명령, 요새를 함락시킨다.

하지만 그녀의 명성을 높이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오를레앙 전투의 경우, 잔 다르크의 존재 덕분에 수비군이 구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의지가 생겼고 구원군의 사기도 크게 진작하였던 것과는 별개로 기록상 실제 구원작전을 주도한 지휘관은 알랑송 공작과 오를레앙 공의 사생아인 장 드 뒤노아 였다. 두 사람의 지휘 하에 잉글랜드군의 포위망이 완성되지 않은 빈틈으로 오를레앙에 접근한 후 알랑송 공작이 남쪽 강둑에서 잉글랜드군을 견제하는 사이 장 드 뒤노아가 북쪽 상류에서 조각배에 보급품을 실어 하류의 오를레앙 성으로 내려 보냈다. 두 장군의 합동작전으로 오랜 포위로 지쳐있던 오를레앙 성의 숨통을 틔운 후 프랑스군은 오를레앙 성에 입성하여 수비군을 구원하였다.

잔 다르크가 전투 과정에서 전술적인 측면에 구체적인 기여를 한 것은 레 투레르 요새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퇴각하여 숲에 매복하자고 장 드 뒤노아에게 제안한게 기록상 유일하다.

1.6.2. 파타이 전투

잔의 군대는 곧장 루아르 강 유역에 넓게 포진된 잉글랜드군 요새를 신속하게 각개격파하며 진격했고 전황은 순식간에 프랑스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보장 시를 대포로 함락시키는가 하면, 잔 다르크가 묑에 다가가지만 하자 수비군이 일제히 도망치는 등 기행을 펴치는 동안, 잉글랜드 군도 손만 빨려 놀고 있지는 않았다. 패잔병을 수습하며 군을 정비. 존 탈보트 경과 패스톨프 경이 이끄는 약 6천여명의 군이 남하한다. 근데 이걸 파타이라는 곳에서 프랑스 기병 1,500여명이(그것도 본대가 아닌 선봉이!)공격하고 잉글랜드군은 2천여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한다. 이 파타이 전투가 중요한 것은, 모든 전황은 일전의 80여년전 크레시 전투와 비슷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로 루아르강 전역에 대한 지배권이 프랑스로 넘어간다.

그런데 파타이 전투의, 북쪽 언덕에 잉글랜드군 본대가 대기하고 그 남쪽에는 장궁병들이 위치한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공격하는 양상이 언뜻 크레시 전투와 유사한 것 같지만 상황이 미묘하게 달랐다. 전투가 시작될 때 잉글랜드군이 아직 방어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기병 저지용 말뚝을 박고 있던 중이었다. 선봉에서 기병대를 지휘하던 포톤 드 생트라유와 라 이르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여 아직 말뚝을 박지 않은 방향으로 우회하여 장궁병들의 측면을 공격하여 섬멸하였고 이를 본 잉글랜드군 본대는 퇴각하다 큰 피해를 입었다. 파타이 전투의 승리는 포톤 드 생트라유와 라 이르의 공이 절대적이다.

한편 파타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진을 보면 잔 다르크의 프랑스군에서의 위치와 역할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유능한 돌격대장이 맡기 마련인 선봉은 포톤 드 생트라유와 라 이르, 대게 총지휘관이 자리잡는 중앙은 알랑송 공작과 장 드 뒤노아였고 잔 다르크는 리시몽 공작과 후위에 있었다. 실질적인 전투수행에 있어 프랑스군에서 잔 다르크의 역할은 군의 사기를 고무시키 위한 상징적인 존재 혹은 명목상의 지휘관, 또는 참모 정도로 보는 게 합당하다.

1.6.3. 랭스 공격

중요한 것은, 이 파타이 전투 이후 잔 다르크의 선택이었다. 당시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과 귀족들은 잔 다르크가 당연히 프랑스의 수도였던 파리나 북부의 거점인 노르망디를 탈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히 수도를 탈환하게 되면 안그래도 높은 프랑스 군의 사기는 하늘을 치솟게 될 것이고, 바닥을 뚫고 내려가던 잉글랜드군의 사기는 맨틀을 뚫고 내핵을 향하게 될 것이고, 지금껏 눈치만 보던 지방 영주들이 프랑스 편으로 대거 붙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 그래서 잉글랜드군은 주력을 파리 방향에 포진시킨다. 그런데 잔 다르크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랭스로 진격한다. 랭스는 파리보다 2배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적에게 측면을 기습할 염려와 보급 문제가 겹치게 되면 헬게이트가 열리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런데 이것을 잔 다르크는 해낸다. 그것도 거의 피해를 입지않고 말이다. 그리고 위에서 서술되어있듯이 랭스에서 대관식을 올린 샤를은 정통성을 회복한다.[37]

그러나 파리가 아닌 랭스를 먼저 공격한 것을 두고 전략적인 묘수라 하기도 뭐한게, 일단 잔 다르크가 실질적 총지휘관도 아니었고, 왕위계승 전쟁이라는 백년전쟁의 성격과 당시 샤를 7세가 처한 정치적 상황, 그리고 클로비스 1세의 성유[38]가 보관되어 있는 랭스 대성당이 프랑스 왕가에 갖는 의미를 보면 오히려 랭스를 최우선 목표로 삼는건 프랑스 입장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1.7. 전쟁에 끼친 영향

잔 다르크가 활약한 기간은 길게 잡아 2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녀가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000명이 영국군 200명만 만나도 도망칠 정도로 심각한 모랄빵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즉, 적을 보면 등을 보이기 바쁘던 병사들이 드디어 싸우기 시작했다는 것.

사실 프랑스 군의 군사적 영략은 잉글랜드가 미칠바가 되지 못했다. 대규모 기사단의 운용이라던가 공성병기, 병장기의 질, 장수들의 경험등 모든 분야에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의 한수 아래였다. 다만 오랜 패전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병사들이 사실상 허수아비보다 못한 존재가 된점과 여기서 밀리면 끝이다라는 극단성으로 프랑스군이 소극적으로 움직인점이 잉글랜드군에게 버프를 달아준 셈이었다.
하지만 갑툭튀한 성처녀로 인해 본래의 역량을 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 장군들이 구사할수 있는 전략적ㆍ전술적 선택폭은 크게 넓어지고 이는 전술적 유연성이 구현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된다.

기존 프랑스군은 그냥 닥치고 돌격의 기사중심의 전술을 고수해왔다. 그도 그럴게 중세의 시작이라 불리는 기사가 처음 등장한게 프랑스니 말이다. 즉 장군들은 기사들의 특유성과 기득권 때문에 기사 중심의 전술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39]이것을 바꿀려면 공동체적 합의와 강력한 중심적 인물의 추진력이 필요한데, 백년전쟁 기간동안 크레시, 아크레 전투로 공동체적 합의는 끝났지만 추진력 있는 인물이 문제였다. 당장 왕이 중심이 되자니 대관식도 못한 존재였고 다른 귀족들은 모른체 하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것이 잔 다르크가 명목상 총지휘관이 되면서 해결된 것이다.
물론 기사중심의 돌격전술을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상황에 따라 적시적소에 쓰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위에서 서술된 파타이 전투인데, 잉글랜드 군이 전방에 목책과 말뚝을 설치하자 전면돌격이 아닌 측면으로 우회하여 돌격한 것이었다. 또한 대포의 사용도 등장한다. 물론 당시에 대포는 정확도나 연사력이 크게 낮아 효과적인 타격수단이 아니었지만 알랑송 공작을 위시한 프랑스 장군들이 전투에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 부터이다.

1.8. 사후의 평판과 영웅화, 시성

그러나 잔 다르크의 프랑스 내 이미지는 그 후에도 그다지 좋지 않아서[40], 공식적으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은 그저 오를레앙 일대의 주민들과 스코틀랜드[41]에 그쳤다.

교회나 왕실에서는 시골출신 평민 처녀가 왕국을 구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했고, 위그노 전쟁 때 신교도들은 오를레앙에 있는 잔의 기념물을 부수기까지 했다. 계몽사상이 보편화된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잔의 행동 자체를 광신도의 전형으로 보았는데, 볼테르[42] 같은 학자들로부터 '까놓고 말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게 딱 잔 다르크 가리키는 것'이라는 식으로 전방위로 까이는 처지로 전락한다. 프랑스 혁명 때 혁명공화파들은 한술 더 떠 그녀를 왕당파이자 가톨릭의 끄나풀로 규정짓고 오를레앙에서 그녀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폐지하는 한편, 위그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기념물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병크를 저질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집권을 거치며 사실상 전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되자, 민족주의와 애국심을 고취시킬 만한 떡밥으로 잔 다르크를 다시 들고 나와 그녀에 대한 저작들이 프랑스 정부의 지원하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나폴레옹과 잔 다르크가 프랑스 본토 출신이 아니면서도 프랑스를 위해 싸운 것, 시민군을 주력으로 쓴 것 등등 닮은 점이 많아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나폴레옹 시대 이전에는 듣보잡에 영웅이 아니라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지만 나폴레옹이 영웅으로 과대포장하여 조작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일단 과대포장 되었다는 그녀의 모습은 위의 전쟁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부분만 읽어봐도 충분히 반박되는 주장이며, 나폴레옹이 그녀를 부각시키긴 했지만 그 전에도 영웅으로 알려져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인물이었다. 일단 15세기에 잔 다르크는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여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12 그리고 오를레앙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지방의 수호성인 취급을 했으며, 16세기의 영국에서 쓰여진 연대기와 아래에 언급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쁘게 묘사되어 오히려 영국에게 커다란 치명타를 줬음이 확실해지며, 주로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에서 17세기의 화가 루벤스는 항목 상단에 있는 십자가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그렸다. 게다가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찬양하고 숭배하면서 그녀를 기리는 일을 추진한 게 1803년경인데, 아래에도 언급되지만 그 전에 이미 프랑스의 적대국이었던 영국의 로버트 사우디와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이보다 조금 앞서 그녀를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쓴 영국의 역사라는 책에도 잔 다르크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오는데, 흄은 1711년에서 1776년까지 살았는데 나폴레옹은 1769년에서 1821년까지 살았다. 흄이 프랑스에 체류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벽지인 코르시카에 살던 어린 나폴레옹이 늙은 흄을 만나 잔 다르크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흄이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언급을 처음 듣고 그렇게 썼다면 오히려 잔 다르크가 프랑스에서도 듣보잡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무색해진다. 게다가 한국에서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띄웠다는 주장은 모 일간지에 실린 칼럼과 그걸 바탕으로 하여 실은 역사서적에 의해 널리 퍼졌는데, 이 책 자체가 읽어보면 알지만 가십성 역사내용을 과장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정론을 쓴 책이라고 읽고 믿으면 곤란하다.[43] 결국 잔 다르크가 공적에 비해 부각되지 못한 건 위에도 살짝 언급된 것처럼 평민 소녀의 도움을 받았고 구해주지 않은 것이 꺼림칙한 왕실과 나중에 복권시키긴 했지만 이단자로 몰아 죽인 잘못을 굳이 언급하고 싶어하지 않은 가톨릭 탓이 크다.

19세기 중반에는 좌우파 모두가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앙드레 모로아의 언급에 따르면 좌파는 그녀가 하층민 출신임을 내세우고, 우파는 그녀가 왕권의 회복을 위해 싸웠음을 내세웠다고. 한편 전 프랑스 및 프랑스령 식민지에 걸쳐 그녀의 동상이 2만기 가까이 세워졌는데, 그 중 알제리에 있던 동상은 알제리 전쟁 당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에 세워진 지배국의 여성 우상이지만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기에 그대로 있었으나, 프랑스의 몇 년째 계속되는,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무자비한 진압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을 반달리즘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잔 다르크의 시성 움직임 역시 국가적인 지원하에 일어나, 1910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20세기 초반 영국과 미국의 여성 참정권자들은 자신들의 상징 및 단체의 수호성녀로 잔 다르크를 내세워서 잔 다르크로 분장해서 행진을 하기도 했다. 1913년 경마 경기장에서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영국의 여성 참정권자 에밀리 데이비슨은 사고 하루 전날 그녀의 조각상에 헌화하기도 했다고 한다. 잔 다르크는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는 없고,(당시 그런 개념도 전무했으니까.) 여성 권리에 대한 주장을 딱히 한 적도 없지만,[44] 그녀가 활약하던 당시 시대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여성상이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심볼로서의 이미지는 강하다.
어느 날 카트린 드 로셀이라는 여자가 잔 다르크를 만나 자신이 만난 성인이 밤마다 나타나 금은보화를 놓는다는 주장을 해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잔이 집안일이나 돌보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직접 확인해보라고 말했고, 잔도 궁금해져서 그에 동의했다. 그런데 첫째 날 잔이 그만 피곤해 잠이 들어서 확인하지 못했고, 카트린은 그 날 성인이 왔다갔다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진 잔이 둘째 날엔 중간에 잠들지 않고 끝까지 확인했으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카트린 드 로셀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한 잔은 어리석은 일 하지 말라고 무안만 준 다음 그녀와 헤어졌다. 사실 카트린 드 로셀의 행위는 미신이나 사기꾼에 가까운 행태라서 강력히 처벌해도 모자라지 않은 지경이었으나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잔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때 카트린 드 로셀은 증인으로 나와서 오히려 잔을 고발했다. 그 때 살려둔 게 화근. 이단자를 심판한다더니 오히려 이단자를 자기네 증인으로 부르는 재판정.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엔 잔 다르크를 앞세운 포스터가 나오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연간에 패텡 정권하에서는 반영[45]/반유태[46] 및 프랑스 통합의 상징으로 잔 다르크가 이용되기도 했다. 나치와 페텡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인 자유 프랑스 역시 국기에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로렌의 십자가를 넣어 잔 다르크를 추종했다. 특히 샤를 드 골이 잔 다르크를 무척 찬양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극우파이자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이 높은 정치인 장 마리 르펜은 종종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를 하고, 잔 다르크를 자신의 정치이념 아이콘으로 이용하여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잔 다르크가 영국인을 추방한 것처럼 지금 프랑스인들도 쳐들어온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병맛스러운 논리. 하지만 우습게도 잔 다르크가 이끌던 병사들 전부가 프랑스인은 아니었고, 외국인 용병들도 상당했다.

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의 상징 중 하나로서 존경받았는데, 극우파가 하도 설쳐서 좌파 진영에서는 혁명 정신을 형성화한 '마리안느'라는 가상의 여성 캐릭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잘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분. 그 뒤로는 잔 다르크가 우파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몇몇 잔 다르크 동상들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일부 프랑스 좌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심할 경우 잔 다르크를 왕당파와 파시즘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2012년 1월 6일 탄생 600주년을 맞아 역시나 르펜 부녀가 잔 다르크를 팔아먹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도 잔 다르크의 고향을 방문하여 극우만의 아이콘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물론 둘 다 잔 다르크를 기리기보다는 대선에 이용하려 했던 것 같지만. 이런 프랑스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잔 다르크는 외국인 혐오의 상징도 아니고, 정치적 이용의 도구도 아닌 모두의 인물이라고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지적했다. 해당 신문은 그녀가 전장에서 진두지휘한 것이 아니라 군량미를 나른 수준이었다는 등 직책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또 당시 프랑스인들이 그녀를 배신한 것(…)을 강조해서 언급했다.[47] 선거를 앞둔 노동절을 맞아 또 르펜 부녀가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하기로 하자 보다못한 좌파진영에서는 하루 먼저 같은 곳에서 집회를 열어 잔 다르크의 우파만의 독점을 반대하기도 했다.

앙드레 모로아는 잔 다르크를 가리켜서 "프랑스인이 진지하게 행동할 때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찬양했다.

1.9. 대중문화와 잔 다르크

잔 다르크의 생애는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여러 작품들을 낳았고, 아나톨 프랑스와 같은 프랑스 문호는 잔 다르크의 성인 활동을 일종의 간질병의 일환으로 보고 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생전 유럽 최초의 여성 문학가로 여겨지는 크리스틴 드 피잔은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시를 썼고, 잔 다르크가 죽은 해에 파리에서 태어난 시인 프랑수아 비용은 왕년의 미녀가라는 시에서 그녀를 영국인이 루앙에서 불태워 죽인 로렌의 착한 처녀라고 언급한다. 비용이 어린 시절에 잔 다르크에 맞서 싸우거나 욕한 파리 시민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자랐을텐데도 이런 시를 쓴 것으로 보아,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나 부르고뉴파가 샤를 7세에 협력한 이후로는 파리 시민들도 잔 다르크를 조국의 영웅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파리 시민들이 계속 반감을 갖고 있었다면 잔 다르크의 죽음 25년 뒤의 명예회복재판이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국에서는 처음엔 잔 다르크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가 만연했으며,[48]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헨리 6세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에 대해 자세한 것은 아래 '셰익스피어와 잔 다르크'를 참조. 그러나 계몽시기 이후에는 잔 다르크가 아니었다면 강력한 왕정국가가 이룩되어 영국에 민주주의가 도입이 안 되었을 거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늘었고, 프랑스에 의해 성역화까지 되며 부정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꺼내지 못했다. 18세기 이후에 나온 영국의 역사책에서는 잔 다르크를 적어도 마녀라고 못박아 묘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반 활동한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잔 다르크를 찬양하는 서사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잔 다르크에 대한 무언극을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 헨리 6세 1부처럼 악역으로 나오고 화형당하면서 악마에 의해 지옥으로 끌려가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걸 본 영국인 관객들이 분노하며 썩은 채소 등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극단 쪽에서는 황급히 천사에 의해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내용을 바꾸었다고 한다.(…) 물론 조지 고든 바이런처럼 잔 다르크를 광신적인 프랑스 창녀라고 비난한 영국인들도 없지는 않았다. 한편, 윈스턴 처칠제2차 세계대전 때 샤를 드 골에게서 잔 다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는지 자신의 저서 《영국의 탄생》에서 "잔 다르크는 범상한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뛰어났기에 한 세기가 지나도 그녀에게 필적한 인물은 없다."며 칭송했으며 작가로서 잔 다르크 위인전을 쓰기도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출시한 잔 다르크 위인전의 집필도 영국인이 했고, 영국 출신 변호사가 쓴 인저스티스라는 저서에서는 잔 다르크의 재판에 대해서 부당한 재판에 의한 사법살인이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현대 영국에서는 적일지라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심지어 잔 다르크 조각상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성당과 잔 다르크의 이름을 붙인 학교까지 영국에 있을 정도. 그리고 잔 다르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윈체스터 추기경과 베드포드 공이 묻힌 윈체스터 대성당에는 잔 다르크의 동상을 설치하여 사죄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리드리히 실러는 잔 다르크를 다룬 희곡인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작품을 썼는데, 성녀 이미지로 나오긴 하지만 전장에서 만난 영국군 청년장군인 라이오넬과 사랑에 빠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비극의 주인공으로 다루었다. 독일에서 나온 이 작품에 프랑스가 자극을 받아 뒤늦게 잔 다르크를 찬양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후대의 주세페 베르디표트르 차이콥스키가 이 작품을 각색하여 오페라를 만들었다.

재미있게도 별 인연이 없을 것 같은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49]은 본명을 밝히지 않고 가명을 쓴 채, 화자로서 잔 다르크의 생애에 대해 읊어주는 작품인 《잔 다르크의 생애》란 작품을 썼다. 제3자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이 작품에는 잔 다르크의 소녀로서의 삶과 고뇌가 잘 표현되어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잔 다르크의 시성을 보고 영감을 얻어 《세인트 조운》이라는 희곡을 집필했다. 여기에서 그녀는 신교도의 유형으로 묘사되었으며, 쇼는 이 작품에 힘입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실 이 작품에서의 잔은 단순히 용감하고 청순한 처녀 용사로만은 나오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고집이 무척 강하고 당돌한 성격으로 나오며 죽음 이후 나오는 에필로그에서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과 현실, 그리고 미래(20세기 초반)에 자신의 시성 모습에 대해 빈정대고 냉소적인 모습으로도 나온다.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32년 《도살장의 성 요한나》를 발표했는데, 대공황 시기의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구세군 요한나 다크는 영락없는 잔 다르크를 모티브로 해서 쓰여진 캐릭터다. 주인공 요한나는 노동자들을 돌봐주고 파업에 나선 그들의 편이 되면서도 파업 과정에서 생기는 폭력으로 인해 사회 질서가 혼란을 우려하여 상황이 커지지 않게 안정시키려다가 뜻하지 않게 파업이 실패하는 파국을 보며 노동자들의 질타를 받고 충격을 받아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비극으로 마무리되는데, 죽음을 맞는 부분에선 실러의 오를레앙의 처녀를 오마주했다. 작품이 쓰여진 당시의 사회상에 잔 다르크라는 인물을 넣어 풍자한 작품. 한국에서도 연극이 공연된 바 있는데 그 때 공연한 배우 중 한 사람이 악역 전문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안길강.

잔 다르크를 다룬 영화 및 드라마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무성영화의 걸작 〈잔 다르크의 수난〉은 실제 잔 다르크의 재판 기록을 그대로 옮겼으며 고문 장면과 삭발 장면시 표정연기가 극단적이다. 상업적으로는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1948년 스튜디오 촬영 작품이 유명하고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을 그대로 옮긴 작품이 있으나, 잔 다르크 역[50] '진 세버그(Jean Seberg 1938~1979)'의 운명은 처참했다. 흑인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쪽에 가담해서 남편인 맹 가리의 아이가 이니라 흑인 민권 운동가와 검열삭제 후 임신했다는 소문을 FBI에서 고의로 내었는데, 이게 신문 기사화 되고 결국 충격으로 유산 후 사망한 것[51] 한편 뤽 베송 감독과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1999년 작품은 광신도의 의미로서 파악했는데 꽤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5년 프랑스와 불편한 관계였던 독일에서도 잔 다르크를 다룬 작품이 만들어졌는데, 보불전쟁으로 알자스-로렌 지방을 차지한 독일에서는 잔 다르크를 독일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보다 앞선 1927년에 만들어진 SF영화 〈메트로폴리스〉에 나오는 여성형 로봇의 모델도 잔 다르크.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질 드 레와의 로맨스도 전해진다. 물론 실제로 증명된 일은 아니고 창작에 그치고 있다.

1.9.1. 셰익스피어와 잔 다르크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초창기에 쓴 희곡 헨리 6세 1부에도 등장하는데, 세익스피어는 적장인 잔 다르크에 대해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녀 이미지로 나가다가 몰락할 즈음에 악마와 결탁한 마녀악녀흑화되는 것으로 묘사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대놓고 잔 다르크라고 하진 않고 돌려서 잔 라퓌셀이라고 하지만, 당시 잔 다르크에 대한 17세기까지의 당시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이 어땠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극중 흑화한 잔 라퓌셀은 악마와 결탁[52]은 기본에, 자기가 샤를 7세, 나폴리 왕, 백년전쟁 이후의 인물인 마키아벨리[53] 등 유명인들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질 않나, 심지어 양치기 아버지에게 천하다고 패드립까지(…) 시전한다.

또, 영국의 기사 워릭이라는 등장인물은 잔 다르크의 화형을 지시할 때, 잔이 어린 소녀라도 상관하지 말고 기름을 더 붓고 장작을 쌓아 불을 강하게 해서 빨리 죽여 고통받는 시간을 줄이라는 드립을 친다. 상대방의 내세를 위해 사람들을 죽인다는 깨달음을 얻어 그걸 행한 누군가 같다. 앞뒤가 맞지 않는 유머성 대사로 볼 수도 있지만, 프랑스의 성녀를 깎아내리는 한편 관대하고 신사적인 영국 기사를 부각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후 2부와 3부에는 영국의 기사들도 선역이라고 하기 힘들지만, 잔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묘사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연극을 프랑스에서도 공연했다.(…) 프랑스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아무튼 셰익스피어에게 흑역사인 작품인지 4대 비극, 5대 희극과 달리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되었는데, 사실 로미오와 줄리엣, 4대 비극, 5대 희극 등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들에 비해서 셰익스피어의 사극들은 리처드 3세헨리 5세를 제외하면 영미권을 제외한 곳에서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2011년에는 한국에서도 공연했는데, 원작과 달리 다소 순화해서 표현했으며[54] 사랑과 전쟁으로 유명한 민지영이 잔 다르크 역을 맡았다. 작품 속 잔 다르크의 모습과 해당배우가 주로 출연한 작품과 주로 연기한 캐릭터를 생각하면 의도가 의심 받을 수도 있는 캐스팅.[55]

일본에서 했던 해당 작품의 공연의 경우 재일교포 소닌이 잔 다르크 역을 맡은 적도 있는데, 일본에서의 재일교포에 대한 대우나 인식을 생각하면 이 또한 여러모로 묘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는 이 작품을 두고 셰익스피어가 아닌 다른 작가가 썼다는 주장도 나왔었는데, 이건 그 무렵 잔 다르크의 시성이 추진되고 영국에서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기 때문에 부담감을 느껴서라는 분석도 있다.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가 굉장히 잔혹하면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필력과 묘사 때문에 다른 작가가 썼다고 주장한 것과도 비슷했던 양상.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극단, 극장, 단체인 셰익스피어 글로브의 트위터에는 잔 다르크의 기일에 '오늘은 잔 다르크가 파문되고 이단자로 선언되어 화형된 날'이라는 고인드립으로 오해할만한 내용을 쓴 적이 있다. 반대로 잔 다르크가 명예회복된 날과 시성된 날은 관련 내용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 극장에서 상영한 잔 다르크의 수난이라는 영화의 정보를 게시한 것으로 볼 때 악의적인 고인드립은 아닌 듯 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극중에서의 잔 다르크 캐릭터는 막판 마녀로 돌변하는 모습 이전엔 오히려 셰익스피어가 잉글랜드 입장에서 썼을지라도 그녀를 적일지라도 괜찮은 캐릭터로 만든 편이다. 해석에 따라선 후반부 부친을 향해 패드립을 치는 장면[56]과 잔 다르크가 스스로 외치는 임신 드립[57]도 잔 다르크를 화형시키기 위해 잉글랜드 측이 변명을 하거나 어설프게 정당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애초에 캐릭터가 후다닥 악역으로 돌변하는 것부터가 뜬금없다. 당시 잉글랜드인 입장에서 썼다는 걸 가정하면 그 당시의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잉글랜드인의 일반적인 인식이나 시대적 한계로 충분히 여길 수 있다. 애초에 이 작품을 쓰던 때가 셰익스피어가 작가 생활 초창기라서 이후에 쓴 작품들에 비해서 부족한 게 당연하다. 게다가 정황상 신인 작가였던 그의 자발적인 의지보다는 극단이나 고위층에서 프로파간다로 연극을 활용하기 위해 그에게 맡겼을테고, 역사에 대해 전문가까지는 아니고 당시 역사 자료가 제대로 된 것이 많지 않고 자국이나 특정 집단에 우호적으로, 특히 타국이나 적에 속하는 쪽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비방하는 식으로 편파적으로 쓰여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볼 때 문제가 있는 내용들이 많게 보인 듯 하다. 특히나 해당 작품은 애초에 잔 다르크 내용 외에도 다른 역사적인 사실과도 다른 내용들이 많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러 작가들과 같이 썼다는 설이 사실일 경우에 내용이 갑자기 이상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 하다.

1.9.2. 현대 서브컬처의 잔 다르크

갑옷을 입고 싸우는 투희, 소녀 콘셉트 등 여러가지 배경으로 보아 일본에서 환장할 만하다.[58] 실제로 모티브가 차용되는 경우는 많은데 비해서 본인을 직접 모에화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역시나 모에선의 마수를 피해 갈 수는 없어서 Fate/Zero에 나오는가 하면, 위인전이나 학습만화를 중심으로 종종 나온다. #1#2#3 내 성녀가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1980년대에 슈에이샤에서 출판된 《세계의 역사 '카를 대제와 잔 다르크 중세유럽'편》은 대략 150쪽 짜리인데, 잔 다르크는 카를 대제와 더불어 주인공을 맡은 것처럼 보인다. 표지에서 카를 대제는 왼쪽 구석 뒤에 있고 잔 다르크는 중심에 서서 제일 크게 나왔다. 그러나 카를 대제는 40쪽 가까이 등장하는데 비해 잔 다르크는 미소녀로 묘사되기는 했으나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5쪽 정도만 나온다. 물론 카를 대제는 70살 넘게 살았고 잔 다르크는 겨우 19살까지 밖에 못살았기 때문에 비중의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표지 모습 그대로 잔 다르크가 미소녀로 나오는데, 일본웹에선 잔 다르크의 외모를 미화했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유명출판사인 금성출판사를 비롯한 한국의 몇몇 출판사들은 이 만화를 해적판으로 들여오거나 베껴서 그렸다. 하지만 베껴서 그린 만화의 잔 다르크는 미소녀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카를 대제와 더불어 중세의 대표인물로 선정될 정도의 위상이라 여겨진다.
2011년 9월에는 대놓고 모에화를 노린 《[미소녀 전사 잔 다르크 이야기]》(…)도 출간되었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한국에서도 학습만화를 중심으로 모에화가 시도되고 있다. 댓글에도 주목하자.

잔 다르크 자체가 주인공이 아닌 이상, 주로 용감한 모습이나 미형 단역의 위치로 등장한다. 세계사에서 대표적인 여성 캐릭터인만큼, 용감한 소녀라는 이미지에 더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하고 싶어하는 작가들이 많은 듯.

다음은 기타 많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잔 다르크의 수많은 모습들이다. 가나다순.

  • 거울전쟁 시리즈: 벨리프 쇼링이라는 영웅이 여러모로 잔 다르크랑 판박이. 정확히는 시리즈 2편이었던 '은의 여인' 때의 모습이 잔 다르크다. 악령군에 대항하는 부대의 리더로 성녀 이미지에 승승장구 하다가 배신으로 붙잡혀서 화형당하는 것까지 똑같다. 제작사 공식 유즈맵 히든 미션에서 몰래 탈출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 겨울왕국: 그림 속 모습으로 잠깐 등장. 드디어 디즈니 시리즈에서 등장했다. 뮬란처럼 장편 주인공으로 나오게 해주세요 마지막엔 화형으로 동심파괴

  • 내일의 나쟈: 12화에 잔 다르크가 숨겨놓은 보물을 찾는 에피소드 후반부에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짧막하게 등장. 그녀가 숨겨 놓은 보물은 사실 전쟁이 끝나길 빌며 심은 백합의 씨앗이었다.

  • 노부나가 더 풀 : 카구야 공주와의 합성 캐릭터로 등장.

  • 데빌맨 - 신 데빌맨 편에 등장하는 다른 역사 인물들이(아돌프 히틀러, 마리 앙투아네트,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 악인인데 비해 홀로 선량하게 나오기는 하는데 누가 봐도 악마나 요괴처럼 생긴 데빌맨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자 천사로 착각한다.

  • 드리프터즈: 악랄한 악당으로 등장. 이 X끼들 다들 영국놈들이랑 한패야!
  • 도라에몽 극장판 '노비타와 로봇왕국' 편: 잔느라는 페이크 최종보스 여왕 캐릭터가 나오는데 영락없이 잔 다르크를 모델로 했다.

  • 마계왕자: 질 드 레가 만나고 싶어했던 성녀. 화안 속성. 미카엘의 지시를 받고 천계에서 선봉이 되어 마계를 침공한다.

  •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마법소녀였다 카더라. 외전격 만화인 마법소녀 타루토☆마기카 The Legend of Jeanne d'Arc에 따르면 큐베를 천사로 착각한 모양. 그럼 영국이 주장한 마녀설이 맞게 된다. 본편에서는 카나메 마도카의 소원에 의해 구원받는다.

  • 문명 5: 위대한 장군으로 나온다. 그런데 조금 특이하게도 남자의 모습으로 나온다. 락밴드 베토벤이나 영화감독 미켈란젤로는 안 이상하고? 물론 여성장군 이미지가 없어서 그렇지만 수염기르고 말위에 오른 잔다르크의 모습은 가히충공깽 남장을 그렇게 했다면 들켰을 리 없을텐데. 그나마 현대로 오면 군용 차량을 탄 지긋한 중년 아저씨가 나온다. 이게 다행인 건지

  • 비탄의 아리아: 잔 다르크가 생존하여 남긴 후손인 잔 다르크 30세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런데 헨리 6세 1부에서처럼 주인공들의 적이자 악녀로 나온다.(…) 물론 곧 주인공들의 편이 되지만. 프랑스에서 알면 고소미를 먹일지도 모른다.

  • 세인트☆영멘: 제대로 순교했는데 자기보다 나중에 순교한 사람이 성인품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500년 가까이 성인품에 오르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보다못한 베드로가 성인상(聖人賞)을 만들어서 건네줬다고 하는데…

  • 신격의 바하무트 : 게임판에서는 청순하고 용감한 모습 버젼과 흑화한 모습 버젼이 담긴 카드로 나오며 애니판에서는 원작 게임처럼 용맹하고 과묵한 성격을 지닌 여전사로 나온다.

  • 신풍괴도 잔느: 주인공의 전생이라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근데 사실 전생-환생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극히 힌두교, 불교적인 개념. 사실 이 만화 자체가 본격 신성모독 만화라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선 캠페인에서 직접 조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영웅 중 하나로 나온다. 1번 미션에선 일반 주민보다 조금 강한 유닛으로, 2번~5번 미션까진 기병으로 출전한다. 다른 캠페인의 주인공들보다 자주 게임 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 미션인 6번 미션에선 5번 미션이었던 파리 공성전 이후 부르고뉴에 체포된 것으로 처리되어 탈출했는데 어째서 시나리오 상에서 화형된 것으로 나온다.

  • 엑설런트 어드벤처: 키아누 리브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로, 주인공이 역사과목 숙제를 위해서 타임머신을 타고 위인들을 데려온다는 설정으로 칭기즈 칸, 루트비히 판 베토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등장. 처음 등장할 때는 조신하게 나왔지만 호기심에 현대의 모습을 구경하다가 사람들이 어로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신이 나서 강사를 밀치고 자신이 그 자리에서 에어로빅을 한다.

  • 잔(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단편): 잔 사후 잔과 비슷하게 남장을 하고 잔의 흔적을 따라 여행하게 되는 귀족 가문의 소녀 '에밀리 드 로렌느'가, 모험을 겪으며 잔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잔의 죽음에 절망해 연쇄살인을 하고 있는 질 드 레등을 만나기도 하고, 잉글랜드 출신의 아내를 거칠게 대하거나 성적으로 농락하고, 부왕의 첩을 강간하는 등 가혹한 성격을 가지고 겁쟁이 부왕에 맞서 싸우고 있는 프랑스 왕세자 루이에게 잡히게 된다. 결국 옷이 찢겨져 여자임이 드러나며, 여자 옷을 입으면 살려주겠다고 하는 왕세자를 뿌리치고 결국 요망한 자라고 화형당할 뻔하는데, 그 순간 번개가 내리쳐 화형대가 쪼개지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화형대에서 잔의 환상을 보고 그 덕에 왕세자의 기가 죽어 살아난다. 이후 성인이 된 주인공이 잔의 시복식에 참석하면서 만화는 끝난다. 독특하게도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몸으로 예언자 역할을 해야 했던 잔 다르크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고찰한 만화이며, 파리에서 다시 열린 잔의 종교재판에서 잔의 어머니가 "다른 건 필요없으니 딸을 돌려달라"라고 호소하는 장면 등을 삽입해, 정치적으로 이런저런 상징이 되어 죽어서도 남성들에게 이용당하는 잔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부왕과 갈등하고 아내를 학대한 왕세자 루이의 인물상 등은 의외로 역사적 고증에도 충실했다. 덤으로, 아무리 봐도 버락 오바마로밖에 보이지 않는 신부가 3권에 나온다(…) 한국에서도 출시되었는데, 사실 출시된 것을 아는 사람만 알고 있다는 작품이란 게 더 문제(…). 더 안습인 것은 학습만화로 잘못 전해져 1편은 그냥 '잔 다르크'라고 제목을 붙였다가 2편과 3편엔 '새로운 잔 다르크'로 이름을 바꿔서 출시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번역은 발번역.

  • 코드 기아스 나이트메어 오브 나나리: 짧막하게 등장하는데, 보이시하게 생겼으면서도 굉장히 냉혹한 외모를 가졌다. 프랑스군을 이끄는 여전사라는 설정은 역사와 똑같지만 잉글랜드 편에 있던 C.C와 대립하는 인물로 아예 오를레앙의 마녀라고 등장. 그것도 그냥 마녀가 아니라 C.C의 대사에 의하면 무고한 어린 아이까지 학살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C.C를 띄워주려고 과한 무리수를 던졌다. 프랑스 내 잔 다르크의 위상을 염두해 본다면 프랑스인이 볼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C.C를 마녀라고 부르며 몸에 검으로 잔인하게 흉터를 남기며 치욕을 주었다. 하지만 결국 훗날 C.C의 마법에 처참하게 복수를 당하며 패배, 포로가 되어서 결국 화형당한다. 그 때 사악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C.C에게 불로불사의 저주를 내린다. 이건 역사왜곡의 도가 지나치잖아. 고인드립!

  • 크루세이더 킹즈 2: Sons of Abraham DLC에서 추가된 이벤트로 등장한다. 순결파로 개종하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로 여성이 군대를 이끌 수 없지만 예외적으로 군대를 이끌 수 있다. 33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무력을 들고 나온다. 칭기스 칸이 25인데 이 무슨. 사실상 게임상 최고 무력 캐릭터. 특성도 Inspiring Leader, Aggressive Leader(이건 항상 좋은 트레잇은 아니지만) 등 강력한 트레잇을 들고 있다. 다만 무력 외의 다른 능력치는 답이 없으며 귀족들이나 성직자들이 계속해서 불만을 표출하기 때문에 계속 쓰고 싶으면 군주가 이들을 달랠 만한 외교력이 있어야 한다. 또한 기독교 계통 군주면 이벤트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흑인 잔다르크를 볼 수도 있다.

  • 하마사키 아유미 - Free & Easy: 싱글의 테마가 21세기의 잔 다르크이다. 재킷은 잔 다르크로 분장한 하마사키의 그림이고, PV도 잔 다르크의 처형 장면을 현대식으로 각색한 것, 가사의 주제도 그 테마에 걸맞게 스스로 강해져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1.10. 대한민국에서의 잔 다르크

대한민국에서는 영국과 싸운 잔 다르크의 모습이 구국 영웅의 모습으로 비춰진 듯, 잔 다르크를 '성녀'라기보다는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다. 경술국치 3년 전인 1907년, 장지연은 잔 다르크의 생애를 다룬 《애국부인전》을 발표했다. 제목 그대로 조선 내의 모든 국민들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우자는 취지인 듯하지만 현실은… 이때 잔 다르크를 그린 삽화는 갑옷을 입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당시 선교사 부인들 차림새이다.

류관순 열사가 잔 다르크에 대한 위인전(아마도 애국부인전)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확실하게 기록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겹치는 면이 많아 평행이론, 환생 등의 이야기에 종종 언급된다. 이웃 섬나라에 침범당한 조국을 위해 깃발을 들고 일어서다가 10대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공통점. 굳이 더 들자면 잔 다르크의 탄생 590주년 되는 해에 유관순이 태어났고, 유관순이 순국한 해는 잔 다르크가 시성된 해이다.

어린이들 위인전 시리즈에 높은 확률로 포함되기도 한다. 설령 빠진 경우라도 유관순의 위인전에 곁다리로 소개되기도 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던 외국 이야기 중 하나가 그녀의 이야기라는데, 그의 성향 상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였던 듯. 그 밖에도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시 이별 마지막행에 잔 다르크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 등, 당시 잔 다르크는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많이 여겨졌다.

한편 진취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김우진의 산돼지에서 최영순을, 박경리토지에서도 유인실을 잔 다르크에 비유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여성 개혁가나 운동가, 지도자 등에게 'XX계의 잔 다르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는 개그 코너어떤 여배우, 학력위조범, 그리고 영 좋지 못한 정치인처럼 자기들 혹은 그 주변만 잔 다르크라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다(…).

스토리 잡스에서는 잔 다르크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처녀장군신

세계사 과목 교과서나 참고서에 적어도 이름이 한 번이라도 꼭 나오는 인물이다. 삼국지유비 조조 손권은 빠지는 경우가 많다. 구품관인법진군은 나오는 책은 종종 있지만. 반면 백년전쟁의 최대의 격전인 아쟁쿠르 전투를 승리로 이끈 헨리 5세는 이름이 거의 나오지도 않는다.

공교롭게도 활동 시기가 조선세종대왕의 즉위 기간과 겹치는데, 이 때문에 문화적이고 과학적으로 발달되고 형벌의 가혹함을 줄인 조선 vs 종교에만 의존하고 마녀사냥화형을 집행한 미개하고 잔인한 중세 유럽이라는 옥시덴탈리즘식 예시로 언급된다.

종교적인 성녀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듯 싶지만 의외로 그녀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매된 적이 있다. 물론 찰스 왕세자다이애나비의 결혼기념 우표를 내놓은 경우처럼 외화벌이를 위해서지만.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과장된 선전용 소개일 수 있겠으나 그 소개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그녀를 민족적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1.11. 잔 다르크에 대한 다른 전설

  • 잔 다르크 생존설: 당연히 이런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인물에게는 생존설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특히 잔 다르크의 경우 화형 직후 잔 다르크를 자칭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타났으며, 최소 1명 이상은 잔 다르크의 가족조차 본인으로 인정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잔 다르크의 가족들에게 가짜로 판명되어 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고 한다. 혹은 잔 다르크의 오빠들이 돈을 벌기 위해 용병 여기사와 짜고 잔 다르크가 부활했다는 사기를 쳤다가 발각되어, 세간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 잔 다르크 공주설: 생존설에서 파생된 것으로, 잔 다르크는 샤를 6세의 왕비가 불륜으로 낳은 딸이라는 설이다. 이 경우 샤를 7세와 잔 다르크는 남매가 된다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공주설을 더 파고 들어가면 잔 다르크가 공주임을 알아차린 영국 측에서 비밀리에 가짜를 내세워 화형에 처하고 잔 다르크는 풀어주었으며, 잔 다르크는 나중에 지방영주와 결혼하여 잘 먹고 잘 살다가 늙어죽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잔 다르크의 묘가 프랑스에 몇 개 존재한다고 한다.

  • 잔 다르크 용병설: 잔 다르크가 단순한 시골 소녀가 아니라 여성 용병대장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백년전쟁 직후의 어떤 문서에 의하면 잔 다르크는 '포술에 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높지 않고 다른 기록과의 교차 검증에도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어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대포가 전술적으로 의미있게 사용된 기록은 잔 다르크 사후인 포미니 전투(1450)에서부터 나타난다.

  • 잔 다르크 예비설: 잔 다르크가 하느님의 명령을 듣고 갑툭튀한 성녀가 아니라, 친왕파 귀족들에 의해 프랑스의 구국 영웅으로 미리 엄선되어 준비과정을 거친 뒤에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라는 설.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성이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주장을 따르자면 한낱 시골 처녀에 불과한 잔 다르크가 생전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던 왕세자를 쉽게 알아보았던 것, 프랑스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녀로 손쉽게 인정받았던 것 등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 비록 왕세자 본인은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쉽게 말해 그의 측근들이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는 것.

    사실 이 주장도 역시 잔 다르크와 친밀한 귀족은 그녀와 전장에서 함께한 기사들 정도에만 해당되고, 그들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의 구출 시도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반론이 제기된다. 샤를 7세의 최측근인 라 트레무아유는 심지어 샤를 7세에게 잔 다르크에 대해 "미친 여자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길 순 없습니다!"라고 비난했을 정도다. 한편으로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드가 잔 다르크를 카드로 써서 이용하고 조종했다가,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자 토사구팽으로 내쳤다는 주장이 있는데…[59] 결국 이렇다 할 물증이 없어서 있을 법한 주장 정도로 여겨진다.

    또다른 예비설로는 진짜 잔 다르크가 등장했으나 전장에서 사망하거나 큰 부상으로 이탈하자 이를 다른 사람으로 메꾸었다는 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당시 잔 다르크의 목격담이 다른 부분들이 상당수 존재했다. 덩치가 큰 여성이었다는 것과 덩치가 작은 여성이라는 목격담이 있으며, 잔 다르크 성품에 대해서도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을 좋아해 혼이 난 적이 있다거나 하는 등 알려진 잔 다르크와는 상당히 다른 기록들도 존재한다. 또한 위에는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처형 당시 본인은 잔 다르크가 아니라며 살려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것이 있을 법한 주장인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잔 다르크의 처형이후 잔 다르크라 주장하는 여인들 중 하나가 샤를 7세를 만났고 그가 그녀를 진짜 잔 다르크라고 인정했다는 점이다. 후에 그녀를 돌려보내며 후한 포상을 쥐어 돌려보냈기 때문에 생존설과 엮어지는 가설이다.

  • 잔 다르크 강간설: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다음 강간을 당했다는 주장. 근거는 약하지만, 실제로 처음 포로로 잡힐 때 귀족 기사들이 잔 다르크가 여자인 걸 알고 유혹 및 성폭행을 시도하려 해서,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바지를 입었기 때문에 당시 여성들이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풍기문란 죄목을 구실로 화형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을 다룬 바가 있는데, 애초에 영국군은 어차피 몸값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고, 아군의 명분과 사기를 높이고 프랑스군의 명분과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어떻게든 잔 다르크를 이단자로 몰아서 죽이려고 했지, 단순히 바지를 입었다고 화형을 시킨 것은 아니었다.[60]

    여하간 그래서 잔 다르크가 처녀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영국군이 잔 다르크의 처녀성을 검사했을 때 처녀막이 훼손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말을 타고 다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인 걸로 추측된다. 이는 '발가벗은 역사'라는 책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하지는 않고 몸 아랫부분에 말을 타서 생긴 상처라고 언급되었다. 사실 이 설은 여전히 프랑스를 제외한 전세계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으며, 구글로 검색하면 'Was Joan of Arc raped?', 'Did Joan of Arc die a virgin?' 등의 질문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역사학자들까지도 진지하게 연구했다.

    이 외에도 적군인 영국군과 부르고뉴군 측에서는 전장에서 지휘하던 잔 다르크를 보고 샤를 7세의 정부라고 욕하기도 했고, 이런 비난 외에도 마녀라고 욕설을 들은 잔 다르크가 충격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는 말도 있다. 이건 그냥 억지스러운 비난에 가깝지만. 신풍괴도 잔느에서는 이 설을 채택해, 잔 다르크가 포로로 잡힌 뒤 악마에게 씌인 간수에게 강간당해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나온다. Fate/Apocrypha의 타케보우키 일기에서도 간접적으로 가능성을 언급했고, 댄스 마카브르라는 만화에서는 대놓고 영국군에게 범해졌다고 묘사한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베드포드 공작의 부인이 그녀의 처녀성을 검사해보고 처녀가 맞다고 인정했다고 되어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 잔 다르크 간질설: 잔 다르크의 언행을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발작증상을 동반하지 않고, 환각증상만을 일으키는 측두엽 이상에 의한 간질'이라는 견해를 내놓은 경우도 있다. 잔 다르크는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이며 율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으나, 때때로 공격적인 면을 드러냈다는 점이 전형적인 간질의 증상이라는 것이며, 이 부분이 간질설을 지지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1991년의 국제간질협회 논문에서도, 당시의 증언 및 재판기록을 토대로 간질증상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고찰한 바 있다.

  • 잔 다르크 외계인큐베 접촉설: 20세기 들어 UFO와 외계인 연구가 시작되면서 나온 주장으로, 제니 렌들즈(Jenny Randles)의 외계인 납치(Alien Abduction)라는 책에서 언급되었다. 잔 다르크가 들었다는 야훼의 음성, 혹은 천사를 본 것이 사실은 외계인과 접촉한 것이라는 주장. 좋은 닥터 드립이다!

  • 잔 다르크 진짜 마녀설: 현대에 들어서는 하느님의 계시를 들었다는 주장보다도 더 어이없게 들리는 얘기지만, 마거릿 머리(Margaret Murray)라는 학자[61]는 실제로 그런 이론을 주장했다. 요정 숭배, 샤머니즘, 니미즘 등의 토속신앙 의식, 재판정에서의 이상 행동과 발언, 질 드 레와 연관시켜서 주장하기도 했지만 논리와 설득력이 없어 묻혀버린 주장이다. 토속신앙 문제는 푸아티에에서의 심사 통과와 명예회복 재판에서 고향 사람들의 증언 사실만 살펴봐도 논파되며, 재판정에서 '하늘의 왕' 등의 발언 문제는 잔 다르크가 분명히 예수임을 밝히고 있고, 주님의 기도를 외우는 것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문맹인 그녀를 노린 데다가, 부당하게 성립된 재판에 호락호락 승복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뜻이었다. 그 때 잔 다르크는 재판정을 향해 오히려 "당신이 주님의 기도를 외울만큼 독실한 신자임을 증명하시오."라고 일갈하며 반격했을 정도다.

    질 드 레와의 연관성은 질 드 레의 타락 자체가 창작물을 제외하면 잔 다르크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입증할 자료가 없으며, 그의 범죄 사실조차도 정치적으로 악용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현대에 나오고 있어 얼마나 신뢰성 있을지가 의문. 결국 머레이의 의견을 항상 지지하던 사람들도 이 주장을 듣자 상당수가 지지를 철회했다고 한다. 머레이가 활동하던 시기가 잔 다르크의 시성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시성에 방해할 수 있는 이론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잔 다르크가 마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사실. 이 외에도 재판 과정에서 지혜롭게 대처했다고 사이코패스라고 주장하는 논문까지 있으나 이것 역시 신뢰할 만한 주장은 아니다. <UFO 신드롬>이라는 책에서는 위에 언급된 잔 다르크의 UFO 접촉설을 머레이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주장했다.(…)

    개신교에서도 잔 다르크는 성녀는 아닐지언정 독실하고 참다운 신자로 인정되는 편이 강한 편. 물론 잔 다르크의 화형을 천주교의 잘못으로 여기며 공격하곤 한다. 교황무오설의 비판 요소 중 하나. 하지만 일부 성경 근본주의적 개신교에서는 그녀가 사실은 악마나 악령과 접촉했다고 주장한다.

  • 잔 다르크 인터섹슈얼설: 영국에 잡혀있던 동안 월경을 안하고 털이 없었다는 기록에서, 인터섹슈얼의 하나인 안드로젠 불감 증후군으로 의심하는 설이다.

  • 후스파 협박편지 사건: 신성로마제국에 속해있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에는 위클리프의 사상에 따라 종교개혁을 주장하던, 잔 다르크가 3살 때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얀 후스가 있었다. 그의 사상을 따르는 후스파 신도들과 농민들이 귀족들과 가톨릭 세력에 맞서 1419년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스전쟁이라고 기록될 만큼 커다란 규모의 종교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430년 3월, 잔 다르크는 뜬금없이 이들의 본거지인 프라하 대학에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의 내용은 대략 '얼른 회개해서 이단 그만 믿고 전쟁 그만두고 가톨릭으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내가 십자군 끌고 와서 응징한다.' 잔 다르크의 흑역사로 분류할 수 있을 내용. 영국군 부상병을 위로하기도 한 잔 다르크의 모습과 대조되는 내용이기에 충공깽할 내용이다.

    하지만, 이 편지에 대한 의심의 목소리도 많이 있다. 먼저 잔 다르크는 문맹이라 장문의 편지를 쓸 수 있었을 리 없다. 대필하는 사람이 잔 다르크가 불러주는 내용을 대신 썼을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이 편지보다 더 심했는지 대필한 사람이 부풀려 썼을지는 알 수 없다. 또 당시 후스파는 결과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고 약탈을 일삼았던 것이 사실이기에 그런 소문을 듣고 잔 다르크가 편견을 가질 여지가 충분했다. 아무튼 이 편지는 잔 다르크가 이단이 아닌 정통교회를 따른다는 명확한 증거인데, 종교 재판에서나 명예회복 재판에서나 이 편지의 언급은 전혀 없다. 가짜일 확률이 높겠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 미국 영화 엑설런트 어드벤처(1988)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 키아누 리브스와 친구가 현대 미국으로 데려오는데 교회에서 기도하는 터에 나타난 둘을 보고 하느님이 보낸 사자로 알고 순순히 따라갔다. 그리고 현대 미국 백화점에서 에어로빅 강사로 신나게 활약한다.

1.12. 잔 다르크 신드롬

신기술이 등장했을 때 젊은 세대가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100년 전쟁이 시작되는 시기의 전투는 석궁과 기사로 대표되지만, 한 세기가 지나면서 대포의 화력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계급의 높으신 분들요태까지 그래왔코 아프로도 꼐속 그랬듯이 여전히 중무장한 기사들의 돌격전술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100년 전쟁 말미에 등장한 잔 다르크는 대포 위주의 공격적인 전투를 통해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기마충격술에 대한 인상도 옅은데다 귀족계급도 아닌 잔 다르크가 기사는 장식입니다를 외치며 위와 같은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에 신기술에 대해 신세대가 강세를 보이는 것을 '잔 다르크 신드롬'이라 말하게 되었다. 이전 기술에 대한 경험이 고정관념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새로운 기술에 노출되고 이전 산업에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은 초보자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현실의 대표적 예시인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를 독자적인 상품으로 인식하여 운영체제 개발사로서의 강점을 이용, 로터스나 넷스케이프 등의 유망회사를 밀어내 MS의 급성 성장을 이루어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 게임 〈JEANNE D'ARC〉

2006년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가 PSP로 발매한 게임. 게임 제작은 레벨 5. 장르는 SRPG - 턴제 택틱스 RPG.

웃기는 CM으로 유명한 것 같다(…). 곳곳에 애니메이션이 삽입되어 있고, 원래 역사에는 없었을 괴물들도 등장한다. 잔 다르크의 수난이 모두 표현되진 않았다.

한국에서 정식 발매되었는데, 일본판 기반에 매뉴얼만 한글화되어 발매되었다.한글날 팀이 완벽 한글화를 한 것으로 유명한데, 당연히 정식 펌웨어에서는 구동할 수 없다는 애로사항이 있다.

일본 RPG임에도 북미에서도 호평. 패미통점수는 33/40이었으나 IGN에선 평점 9.0을 찍었다.

제나 헤이즈(Jenna Haze)라는 포르노 배우가 이 게임을 매우 즐겨한다는 인터뷰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제작사에서 하지 않은 것인지 영국에서 거부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영국에서는 출시되지 않았다. 실제로 게임상의 캐릭터들이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고 영국에 아주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긴 하지만, 이것이 이유라면 프랑스에서도 출시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유럽쪽에서는 JRPG가 별로 인기가 없을 뿐이며, 유럽 전역에 출시되지 않은 것뿐이다. 대신, 북미판을 구해서 즐기면 된다.

3. 골판지 전기 W에 등장하는 LBX

제시카 카이오스의 LBX로 이름은 잔 다르크를 줄여서 잔느 D. 전체적으로 여성형에 카우보이 이미지를 하고 있으며, 무기는 쌍권총이다.

골판지 전기 W 주인공들의 LBX들중에서 유일하게 프라모델로 상품화되지 않았다. 작중에서 필살 펑션도 한두 번 쓸까말까 할 정도로 취급이 안습.

4. 이름이나 모티브를 차용한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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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정확한 것은 아니다. 잔 다르크가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412년이라는 것도, 훗날 재판을 받을 때 '나이는 몇인가'라는 질문에 '아마 19살쯤?'이라고 대답한 것을 근거로 잡은 것. 프랑스어판 위키백과에도 '1412년 무렵 출생(née vers 1412)'이라 되어있다.
  • [2] 동시대 역사가들이 기록해두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개 농민의 딸 따위가 태어난 것에 관심을 갖는 연대기 작가는 없었다.
  • [3] 현대에 전해지는 잔의 친필 서명은 Jehamme로 잘못 적혀 있어서 그녀가 문맹이었으리란 유력한 증거로 꼽힌다. 잠 다르크
  • [4] 딸의 화형으로 슬픔을 겪다가 2개월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소문이 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1440년 무렵까지 살았다.
  • [5] 잔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는 딸 잔에게 가톨릭 교리와 신앙을 가르쳤는데, 결혼 전에 로마성지순례까지 갈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성씨 '로메'는 '로마'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중세 시대인 당시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았고 도로는 제대로 포장되지 않았고(로렌에서 로마까지 지름길로 가려면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 아니면 멀리 돌아서 가야 한다.) 좋은 길은 통행료가 비쌌으며, 도적, 사나운 짐승 등의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는 먼 길을 보통 남자도 쉽게 지나가기 힘든데, 여자가 성지순례할 정도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다. 딸이 순교한 이후엔 오를레앙으로 이사를 가서 그 곳에서 살았다. 여담으로 남편(1380년생)보다 3년 가량 일찍 태어난 1377년생으로 추정된다.
  • [6] 5남매는 자크, 피에르, 장, 잔, 카트린 순이다.
  • [7] 동레미에는 잔 다르크의 생가라는 곳이 있다.
  • [8] 1422년까지 헨리 5세가 프랑스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그후로도 접전이 계속되었다. 큰 것만 해도 크라방 전투(1423.7.31)와 베르뇌유 전투(1424.8.17)를 들 수 있고, 잔 다르크가 시농 성에서 샤를 7세를 만난 것이 1429년 3월, 오를레앙 입성은 같은 해 4월의 일.
  • [9] 백년전쟁 이전까지 잉글랜드 왕실의 인사들은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에 건너와 지배층을 형성한 노르망디인이었고 잉글랜드 상류층의 언어는 오직 프랑스어 뿐이었다.
  • [10] 부르고뉴 가문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왕조인 카페 가문의 방계이며, 부르고뉴 방계는 포르투갈의 왕좌를 상속받았다.
  • [11] 해롤드 고드윈 이후 스튜어트 가 사이의 영국의 왕들은 프랑스 왕가의 방계다.
  • [12] 그런데 이쪽은 '그럼 하느님은 어째서 프랑스의 편을 들었나?'라는 의문을 설명해야 한다(…).
  • [13] 사실 잉글랜드군은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 군사가 오를레앙에 입성하도록 놔뒀다. 원군으로 와봤자 이미 바닥나고 있던 성 안의 식량만 축내서 잉글랜드에게 더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고 여겼고, 게다가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 소녀 따위가 이끄는 군대가 뭘 할 수 있냐고 비웃고 만만히 본 모양. 물론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들의 계산은 완전히 틀렸지만.
  • [14] 사실 오를레앙 해방 과정이 참으로 먼치킨스러운데, 오를레앙 공방전은 1428년 10월 12일부터 1429년 5월 8일까지 계속되었으며 잔이 참전한 날은 1429년 4월 29일이었다. 즉 잔 다르크가 등장하기 전까지 반년 넘게 계속되었던 공방전이, 소녀 한 명의 등장으로 열흘도 채 되지 않아 결말이 난 것.
  • [15] 종교가 현대의 과학 상식과도 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신의 부름을 받은' 유닛의 등장은 아군에게 실로 엄청난 사기 버프를 주었을 것이다.
  • [16] 공교롭게도 탈보트에게는 잔이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다.(…)
  • [17] 오를레앙 공방전 이후 잔은 곧바로 랭스로 진격하여 샤를 왕자를 왕으로 옹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샤를의 측근들은 노르망디 탈환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이에 논의를 거듭하던 끝에 랭스로 진군은 하겠는데, 먼저 루아르 강 연안부터 탈환한다는 대안이 나온 것.
  • [18] 당시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에게 털리고 털린 끝에, 루아르 강을 건너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랭스와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루아르 강을 건너야 하는데, 오를레앙 공방전 당시 오를레앙이 중요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루아르 강에 면한 도시로 아직껏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도시이며 교량이 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교량은 공방전 도중에 파괴되고 말았고, 루아르 강 연안부터 차지한다는 것도 교량부터 확보해야 랭스고 파리고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 [19] 이 승리들은 오를레앙과 루아르 강 원정도 포함된 수치이며, 샤를의 측근들이 가장 걱정했을 랭스 진군은 거의 무혈행군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 [20] 서프랑크 이래로 프랑스 왕이 대대로 대관식을 한 도시다.
  • [21] 왕관이나 왕홀 등 국왕의 상징물은 없었지만, 그리스도교 국가의 국왕 대관식의 핵심은 주교가 축성하는 기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고 이것을 받아야만 비로소 합법적인 국왕이 되는 것이다.
  • [22] 사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가 자신이 진짜로 공을 세우게 되자 들뜨게 되고, 화려하고 비싼 물품 등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걸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했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게다가 대관식 이후 샤를 7세의 측근 귀족들과 마찰이 더욱 본격화되면서 그들에게 시골소녀라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그런 듯. 성녀가 아닌 욕심도 있는 인간적인 소녀의 모습이 엿보이는 부분. 사실 대관식 이후 그녀가 시련에 빠지고 결국 적에게 붙잡힌 일은, 가톨릭 교회와 그녀의 시성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되어 왔다. 하느님의 가호를 받는 성처녀가, 어째서 나중엔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잡혀서 화형을 당했냐는 부분. 이에 대해, "그녀가 성공 이후 자만심에 빠져서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욕심도 부리고 오만도 부리고 무리하게 나서다가 하느님은 그녀를 깨닫게 하기 위해 시련을 주었고, 나중에 그녀는 그 시련을 통해 반성하면서 그 가르침을 깨닫고 신앙심을 굳게 지켜서 순교했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 [23] 원래 이런 날에는 전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재판에서 집중적으로 추궁당했다. 잔은 "그 날의 전투는 하느님의 뜻으로 한 게 아니라 나의 의지로 한 것이며, 그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 [24] 중세 시대, 서양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하여 살 곳을 잃은 민간인들 중에서 일부 여성들은 전쟁하는 부대를 따라다니며 몸을 팔았다. 따라서 잔 다르크도 창녀로 오인받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죽은 뒤에도 여러 창녀들이 잔 다르크 행세를 하면서 군 부대 내에서 매춘을 벌였다.
  • [25] 선량공이라는 별명이 붙은 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병원을 지어주는 등의 자선행위를 많이 했기 때문이라는 설과,(실제로 이 병원에서 운영하는 포도밭에 나는 수익으로 20세기 중반 무렵까지 운영해왔다.) 샤를 7세에게 아버지를 암살당했는데도 그를 용서하고 복수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몽트뢰에서 회담을 구실로 다리 위로 불러냈다가 암살자들이 난도질하여 죽었다. 그런데 이 암살자들 중에 샤를 7세의 최측근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왕태자가 배후자로 의심받았고, 선량공 필립은 여러 차례 해명을 요구했으나 샤를 7세는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이러니 화평이 안되지 결국 잔 다르크의 죽음 이후 몇년 뒤 샤를 7세와 화평 조약을 맺을 때 암살을 주도한 사람을 처벌한다는 조건으로 화평하긴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고뉴가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패전을 거듭하고 재정 악화에 귀족들의 내분에 싸여 약해지는 잉글랜드와 손을 떼고 서서히 힘을 회복해가는 프랑스와 동맹하는 대신, 프랑스왕인 샤를 7세도 부르고뉴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정치적이고 실리적인 성격이 더 강했다.) 그리고 측근들과 신하들이 아첨으로 붙인 칭호라는 설도 있다.
  • [26] 예술을 사랑해서 미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후원을 받은 유명한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잔 다르크가 죽은 뒤인 1437년, 선량공의 부하이자 부르고뉴 공국 재상인 롤랭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기도를 올리는 그림을 그렸다. 롤랭은 선량공의 병원 건립 등 자선사업과 선행에 큰 영향을 끼친 한편 잔 다르크를 팔아넘기도록 조장하고 그 몸값의 일부를 챙겼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X선으로 반 에이크의 그림을 촬영한 결과 기도하는 손이 처음에는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 즉 잔 다르크를 팔아서 돈을 차지한 롤랭이 가식적이며, 그런 롤랭을 측근으로 둔 선량공을 간접적으로 깠다고 보는 시선도 있는데, 사실 얀 반 에이크가 선량공과 매우 친밀한 사이이며(선량공 필립이 반 에이크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 주기도 했다.) 필립이 반 에이크를 신임하여 궁정을 옮길 때마다 동행하고 화가 일 외에 중책을 맡겼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설이다. 게다가 반 에이크가 잔 다르크를 알고 있었다거나 우호적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 [27] 선량공의 아들이자 후계자가 용담공 샤를인데 샤를 7세의 뒤를 이은 루이 11세 때 자신의 서로 떨어진 영지인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사이를 가로지르는 땅을 차지할 것을 더불어 아예 그 정복을 통해 부르고뉴 왕국의 왕이 될 것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잔 다르크를 재판에서 몰아넣은 주교 코숑의 관할 구역이었었던 보베에서,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이 된 해인 1456년에 태어난 '잔'이라는 소녀가 농성하는 도중 도끼를 들고 닥돌해서 부르고뉴군의 깃발을 빼앗아버리는 믿기지 않는 일로 인해 군사의 사기가 떨어져 보베를 차지하는 일에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로렌의 낭시라는 지방에서 로렌공의 군대를 상대로 직접 전투에 나섰는데 스위스 용병이 휘두른 무기에 얼굴이 쪼개져 전사하고 시체가 늑대와 까마귀에게 뜯어먹히고 말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낭시는 잔 다르크의 고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고, 용담공이 전사한 날은 잔 다르크의 생일 하루 전날인 1월 5일. 결국 이 일로 인해 부르고뉴 공국과 그 가문은 쇠락해졌고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상속자인 공녀 마리와 합스부르크 가문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으로 합스부르크에 흡수당해 독립된 부르고뉴 가문의 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 [28] 높은 탑에서 뛰어내렸는데, 외상은 없었지만 의식을 잃고 쓰러져 결국 다시 붙잡혔다. 나중에 재판에서 이걸 자살시도로 규정짓고 몰아붙였다. 참고로 이 때 언급된 다른 죄는 상리스 주교의 말을 훔친 혐의와 부르고뉴의 도적 기사들을 토벌할 때 포로를 처형한 것이었는데, 잔은 상리스 주교의 말은 자신이 타기에 적합하지 않아 값을 지불하고 돌려줬다고 해명했으며 도적 기사 포로 처형은 적군에 붙잡힌 아군 포로와 교환을 시도했으나 아군 포로가 죽자 재판에 넘겨서 합법적으로 처리된 거라고 해명했다.
  • [29] 리브르 트르누아(Livre tournois)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지만 1262년 정해진 도량형으로는 고순도 은 80.88g이거나 금화 6.74g으로 정해져 있는 화폐다. 프랑스 위키를 보면 1549년부터 해당 화폐의 도량형 수정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잔 다르크 당시에도 은화 80.88g이거나 혹은 금화 6.74g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은화로 따지자면 은 808.8kg이 잔 다르크의 가치가 되며, 금으로 따지자면 금화 67.4kg로 잔 다르크의 몸무게보다도 더 나가는 금이라고 할 수 있는 엄청난 액수라고 할 수 있다. 단 프랑스 위키피디아는 리브르로 표기하는데, 이게 도량형 리브르인지 혹은 영국 파운드화와 같은 가치를 지니는 리브르인지 리브르 트르누아인지 은화의 하위 단위인 리브르인지 제대로된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일(독일 위키피디아는 프랑으로 표기하며 당시 프랑은 리브르 트르누아와 같은 가치를 지닌 화폐였다고 평가받는다), 영국 위키피디아에 나온 리브르 트르누아로 대체한다. 만약 파운드와 같은 가치를 지닌 샤를마뉴 대제시절의 리브르를 뜻한다면 잔 다르크의 몸값은 1만 파운드 무게의 은으로 4톤에 달하는 무게이다.
  • [30] 근현대의 창작물에선 같은 프랑스인이고 주교라는 신분으로 잔 다르크를 동정하고 목숨을 살리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긴 하나, 애초에 영국군에게 잔 다르크의 종교재판을 주선하도록 제일 먼저 요청하고 몸값을 모으느라 안달이었던 이 인간이 잔 다르크를 배려했을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코숑은 잔 다르크의 랭스 입성으로 인해 랭스 주교가 되지 못해 잔 다르크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를 갈던 사람이었다. 참고로 잔 다르크가 죽은 이후 코숑도 곧바로 죽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급사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나중인 1442년까지 71살로 살만큼 살다 죽었다. 물론 잔 다르크의 죽음을 만든 재판 이후 출세하고 한창 잘 나갈 때 면도 도중 뇌졸중으로 급사해서 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코숑 외에도 재판을 주도한 장 르메트르는 루앙 시외의 외딴집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또다른 주도인 장 데스티베는 루앙 하수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 [31] 당시는 교황들이 분열되어 있던 시대인데, 잔 다르크는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다. 참고로 교황청이 잔 다르크를 화형시키도록 주도했다는 통설은 사실이 아니다.
  • [32] 풀려난 탈보트는 이후 뛰어난 지휘로 프랑스군을 계속해서 물리치며 백년전쟁의 조기종결을 막다가 마지막 카스티용 전투에서 전사한다. 헨리 6세 1부와 오를레앙의 처녀 등의 작품에서는 잔 다르크의 강력한 맞수로 나온다. 이렇게 적이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인상을 크게 남겼는지, 그가 주둔했던 보르도 지방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샤또 딸보라는 와인이 있는데, 거스 히딩크 감독이 좋아하는 와인이라고 한다.
  • [33] 이 외에도 구출시도가 없던 건 아니어서 잔 다르크의 전우 라 이르가 잔 다르크가 갇혀 있는 루앙으로 군사를 이끌고 닥돌했지만 실패하고 포로가 되고 만다. 한편 이 구출대의 배후에 질 드 레가 있다는 설이 있다. 라 이르는 나중에 풀려났지만 잔 다르크는 끝내 구출되지 못했다.
  • [34] 사실 이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마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는 없으니.
  • [35] 프랑스 왕실도 움직였겠지만, 그보다는 잔의 어머니인 이사벨 로메가 교황청에 직접 호소한 것도 한 몫 했다. 이에 교황은 파리에 조사단을 보냈는데, 이 때도 이사벨은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파리로 향해 조사위원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했고. 그것이 끝내 받아들여진 것. 이를 기리기 위함인지, 오늘날 잔 다르크의 고향인 동레미에는 이사벨 로메의 동상도 서 있다.
  • [36] 뻔뻔하게도 잔의 종교재판 당시에 잔을 고문하자는 주장을 한 사람도 그 중에 있었다.
  • [37] 대관식 이전에는 트루아 조약에 따라 법적으로 샤를 7세는 단지 반란군의 수괴에 지나지 않은 반면, 대관식 이후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vs. 프랑스라는 명분이 서게 된다.
  • [38] 랭스 대성당에는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인 클로비스 1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때 하느님이 그의 세례를 축복하기 위해 천상의 비둘기를 통해 보냈다는 성유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 성유는 프랑스 왕권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당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전통적으로 랭스에서 행해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39] 달리 말하자면 기사 중심의 전술을 구사하지 않으면 기사의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에 위협을 받게 된다.
  • [40] 요한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에서는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쟌느 편에서 혹은 쟌느에 대항해서 싸운 모든 류의 장수들이 동레미의 작은 처녀 농부보다 더 크고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했다.'라고 하며, 뒤노아, 쟝 뒤 붸이유, 생트라이유, 라 이르 등과 그보다 덜 유명한 사람들이 연대기에 등장하더라도 쟌 다르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 [41] 스코틀랜드는 1295년에 프랑스와 함께 잉글랜드에 맞서 동맹(Auld Alliance, 스코틀랜드어인데, 'Auld'는 오늘날 영어의 'Old'라는 단어다.)을 맺었으며 이는 1560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백년전쟁 시기에도 헨리 5세의 활약으로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요청해 스코틀랜드군이 샤를 왕자를 돕게 되었는데, 이때 샤를이 지원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편성한 것이 1830년에 샤를 10세가 퇴위할 때까지 존속한 스코틀랜드 근위군(디블: 토탈 워에 등장하는 그 친구들 맞다)이다. 이후 위그노 전쟁 때에도 2백명의 스코틀랜드군이 위그노 편에 서서 싸웠으며, 2차 대전 때는 자유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이 영국에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기리는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에는, 동맹 7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열리기도.
  • [42] 아이러니하게도 볼테르는 잔 다르크와 똑같은 5월 30일에 사망했다.
  • [43] 해당 책의 저자는 조선 역사에 대한 책도 썼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왕조 이전에는 금씨로 불리던 김씨가 음향오행설을 믿어 금씨가 나무를 뜻하는 이씨를 누를 것이라고 두려워한 이성계의 명령으로 김씨로 바뀐 사연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야사의 내용을 실제로 기록된 역사의 뉘앙스로 묘사하기도 했다. 꼭 잘못되거나 나쁜 책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비판의 눈으로 보기 바란다.
  • [44] 군사들을 따라다니는 매춘부들을 비롯한 여성 장사꾼들을 쫓아냈다. 그 중 한 명이 생계를 보장해달라고 매달리자 열받아서 칼등으로 뒷목을 때려 기절시켜서 내보냈다고 한다. 물론 독실한 신자인 잔에게 자신의 병사들이 매춘부와 관계를 가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강력한 폭력을 쓰지 않고 가능하면 말로 그녀들을 내보낸 편이다.
  • [45] 어차피 페탱 정권이나 나치 독일 모두 영국과 전쟁중이었다.
  • [46] 종교재판관 중 하나가 유태인이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 [47] 영국인이 쓴 역사서에는 자신들이 아니라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죽였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책임 떠넘기기. 게다가 영국 왕의 섭정인 베드포드 공이 잔 다르크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도 한다. 잘못한 일인 줄은 아는 모양
  • [48] 다만 1896년에 나온 이 책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라고 불리운 윌리엄 캑스턴이 백년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480년에 잉글랜드 연대기를 냈는데, 캑스턴은 잔 다르크의 용기를 찬양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 [49] 마크 트웨인은 가톨릭과 프랑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잔 다르크는 무척 좋아했다. 어린 시절 밖에 나가다가 바람에 날리는 종이 한 장을 잡았는데 잔 다르크의 위인전의 한 부분이었다는 말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옹호하던 에밀 졸라를 향해서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라고 극찬했다.
  • [50] 오드리 헵번에게 캐스팅 제의가 갔으나 무산된 후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는데, 참가자가 무려 1만 8천명에 달했으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훗날 유명배우가 되는 배우지망생들도 참가했다. 진 세버그와 마지막까지 경합한 참가자는 대배우 헨리 폰다의 딸 제인 폰다였다.
  • [51] 그녀와 염문설이 있던 프랑스 작가 로멩 가리는 그녀가 죽고 1년만인 1980년 자살했다. 이 사람 작품으로 유명한게 마견(영화적으로 각색이 되긴 했지만).
  • [52] 그런데 이 부분의 대사를 미루어 볼 때 원래부터 마녀였는데 프랑스인들 앞에서는 성녀로 둔갑했다가 본색을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 [53] 알랑송을 빗대어 작중에서 마키아벨리라고 표현한 것이다.
  • [54] 적개심 섞인 원본 대사의 강도가 낮혀졌을 뿐 기본적인 내용과 흐름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물론 이 평에 따르면 부정적인 모습을 상당 부분 뜯어내서 고쳐내기는 했다. 극에 쓰여지고 공연되던 과거의 당시와 달리 현대에서는 긍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인 잔을 원작에 충실해서 부정적인 인물로의 표현에 극단이 꺼려했거나, 또는 관객들로부터 오히려 혹평을 받을 수 있고, 원작가인 셰익스피어에게도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끼칠 수 있기에 그렇게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 [55] 오디션을 봤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 본인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맡은 잔 다르크 캐릭터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을 주로 했으며, 연출자(인터뷰에서 잔 다르크도 피해자라고 말하긴 했다. 병주고 약주고)와는 원작 표현에 대해서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실제 역사와 달리 작품 후반부에서 악하게 묘사된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고민이 있었거나 복잡한 심경이었던 듯 보인다.
  • [56] 작중에서 잉글랜드 측이 대동하고 나타난 그 부친이 진짜 잔 다르크의 부친인지 입증이 된 건 아닌 투로 표현된다. 패드립을 들었다고 부친이 그녀에게 맞패드립을 치는데, 진짜 친부라면 친딸이 죽게 생겼는데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즉, 군중들 앞에서 망신을 주려고 가짜를 데리고 왔을 수도 있다는 말.
  • [57] 이것 역시 작품을 볼 때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있다.
  • [58] 2007년 3월 30일 니혼 TV에서 방송된 '일본인이 좋아하는 위인 베스트 100 - 영웅편'에서 잔 다르크는 6위를 차지했다. 잔 다르크보다 높은 표를 얻은 인물들은 2위에 선정된 같은 프랑스인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빼면 전부 일본 인물들이었다.(1위는 사카모토 료마, 3위는 오다 노부나가, 4위는 사이고 다카모리, 5위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 [59] 참고로 라 트레무아유도 욜란드와 불화를 빚다가 쫓겨났다.
  • [60] 하지만 바지를 입은 것은 재판과정에서 큰 문제이긴 했다. 잔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중 갖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다가 결국 5월 24일 남장을 버리고 여자옷을 입을 것을 승낙했다. 그 결과 종신형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틀후인 5월 26일 다시 남장을 하였고(영국 병사들이 추행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를 이유로 재차 재판을 연 후 '또다시 이단의 죄에 빠졌다'는 이유로 화형이 선고되었다.
  • [61] 1863년에서 1963년까지 무려 100살까지 살았다. 흠좀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