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자유민주연합

last modified: 2015-04-03 17:39:39 Contributors


자민련의

Contents

1. 개요
2. 창당과 약진
3. 김대중과의 DJP 연합
4. 분당과 소멸
5. 역대 선거결과
6. 관련 항목


1. 개요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통칭은 '자민련'(합). 연합이 두음법칙 문제상 련->연이라 이렇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정당으로, 충청도(정확히는 충청남도대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정당이었다. 이념적 성향은 자유민주주의, 보수주의.

1995년 3월 30일에 창당돼 2006년 4월 7일 소멸했다. 11년 8일 존속한 정당이었다. 한나라당이 이 기록을 깼지만[1], 2004년 3월 23일 로고를 변경한 것을 감안하면 로고의 지속성 등의 정체성은 더 길었던 정당이다. [2]

2. 창당과 약진

1994년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정의당(노태우 계열)+통일민주당(김영삼 계열)+신민주공화당(김종필 계열)의 세 계파로 구성되어있었는데, 1994년 연말부터 통민당 계열(민주계)이 국민의 높은 지지율을 등에 엎고 당권 장악을 시작했다. 통민당 계열의 젊은 의원들은 특히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종필의 퇴진을 강하게 주장했고 김영삼 대통령과 갈등을 겪던 김종필 대표는 결국 1995년 1월 신민주공화당 계열(공화계)의 의원들을 데리고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민련을 창당하였다. 여기에 민주계에 밀렸다고 생각한 민주정의당 계열 일부가 가담했다.

자민련은 창당 직후 열린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충청권을 석권하고 강원도지사강원도 의원 다수를 당선시켰다. 주된 선거 전략은 김종필 대표의 '당 대표 쫓아내는게 계화냐', '다른 지역에서 충청도바지로 보고있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충청 지역 지지를 호소하는 '핫바지론'과, '김영삼 정부는 사이비 보수, 내가 원조보수다'라는 '원조보수론'으로, 강원도수도권 보수층의 민심을 얻은 게 주효했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의 처남인 김복동의 신민당과 합당하는 등 4, 5공 세력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당시 전두환, 노태우 구속과 5.18 특별법 통과 등에 분노해 있던 TK지역을 공략했다. [3]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총 50석으로 제2야당의 지위를 굳혔다. 텃밭이라고 생각했던 TK 지역에서 김종필에게 뒤통수를 맞은 민주자유당은 박근혜를 비롯한 구 공화계에 다시 손을 내밀게 되었다.

3. 김대중과의 DJP 연합

총선 이후에는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와 연합하여, 소위 DJP연합이라는 체제를 통해 후보단일화에 합의하여 1997년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4] 탈 반대로 한나라당은 이인제가 경선불복을 선언하면서 국민신당을 창당해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분산돼버렸다. 이건 10여년전 김영삼, 김대중이 아웅다웅하던통에 표가 분산돼었고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처럼 비슷한 일이 다시 재현된 것.

김대중 정권 시절에는 김종필, 박태준, 이한동 등 국무총리 3명을 배출하고 국무위원 다수를 배당받는 등 민주당과 밀접하게 협력하였다. 1998년의 제2회 지방선거에서는 인천, 대전, 충북, 충남에서 승리했다. 강원도에서도 무소속 후보 난립이 아니었으면 승리했을 것이다. 이로서 여당야당이 좌우를 딱 나눠먹은 모양세가 되었다.[5]

그러나 2년쯤 되는 2000년대 중반 김종필은 내각책임제나 남북정상회담, 기타 여러 문제로 김대중과 사이가 악화되어 일단 두 당은 갈라서게 되고, 총선에서의 연합공천도 무산되었다. [6] 그리고 김종필이 떠난 연정 파트너의 자리는 같은 충청권 출신으로 1998년 민주당에 입당한 인제가 차지했다. 2000년에 열린 16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충청권 공략에 성공(8석, 한나라당 4석)하게 된다. 한편 자민련은 충청권 11석을 바탕으로 17석을 획득했다. 쉽게 말해, 민주당이 충청권을 손데지 않았으면 [7] 자민련은 충분히 25석 이상을 얻었을 것이다. 선거구제 개편으로 전체의석이 22석(299->273. 04년 도로 회복) 줄었고, 충청권 의석이 4석(28->24) 줄어든 것도 한몫 했다.

그렇게 총선에서 텃밭을 민주당에 내주는 바람에 불과 20석도 얻지 못하고 내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는 굴욕[8]을 겪는가 했는데.. 민주당 측이 '연정은 아직 깨진게 아니다'면서 의원 4명을 빌려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9] 이 때 송석찬 의원의 그 유명한 "여당으로 한 마리 연어가 되어 돌아오겠다."란 말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결국 아슬아슬하게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했고[10], 만족한 자민련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말까지 연정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11] 하지만 연정후에도 132석으로 과반(137석)에서 모자랐던 민주당은 호남 무소속 4석과 허주 김윤환민주국민당(2석)에 손을 벌려야했고, 민국당의 한승수를 입각시켰다. 안습한 상황은 계속되어 2002년 제3회 동시지방선거에서 자민련은 텃밭이었던 충청북도, 대전쪽에서도 당선해내지 못했다.

그후 그럭저럭 유지되던 DJP연정은 2001년 한나라당이 제출한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12]에 자민련이 동조[13],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붕괴되었다. 자민련으로 갔던 민주당 의원 4명은 연정이 깨짐에 실망을 표하고 탈당했으며, 입각했던 자민련 소속 장관들도 사퇴하였다. DJP연정의 붕괴로 민주당은 국정운영에 많은 제약을 받았고, 자민련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며 흔들렸다.

결국 2002년 전국동시지방 선거에서 충북과 대전을 한나라당에 내주는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제16대 대통령 선거 정국이 되자, 자민련은 한나라당 지지를 거의 선언하기에 이른다. # 선거 직전인 11월 7일의 기사 "'이회창-김종필 협력론' 고개" 이로써 자민련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 예측되었으나... 한 달만에 노무현이 당선 되면서 분위기는 급변했고, 이후 열린우리당이 창당 되는 등 정계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자민련의 입지는 점점 애매해져갔다. 그리고 그렇게 자민련의 마지막 시련이 다가오게 되었다.

4. 분당과 소멸

탄핵 열풍이 몰아치던 2004년, 김종필은 마지막 순간까지 탄핵을 원론적인 측면에서 반대했으나, 소속 의원들은 일제히 탄핵에 찬성했다.[14] 결국 이 역풍으로 당시 10선에 도전하던 당 대표 김종필이 비례대표 1번으로 나섰음에도 득표율 2.98%를 얻어, 딱 0.02%차로 3%를 채우지 못해 비례대표 의석을 전혀 획득하지 못하는 굴욕을 당했다.[15] 결국 자민련은 겨우 4명의 지역구 당선자에 만족해야 했다. 그 결과 김종필은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렇게 한때의 여당이자 제2야당이었던 민주당(2004년)과 자민련은 동반자살 함께 몰락한다. 이 선거로 양당은 제3당의 자리를 민주노동당에게 내준다.

김종필 은퇴로 당 내 구심점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당시 충남지사였던 심대평이 당을 탈당하고 자민련을 대신하는 충청신당인 국민중심당 창당에 나서면서 급속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민련은 결국 충청신당에 흡수되는 식의 합당합의를 했으나, 이 합의가 파기되면서 지역구 의원 4명 중 당 대표를 제외한 3명이 탈당의 방식으로 충청신당으로 가버렸다. 결국 자민련은 마지막 의원 1명(김학원 대표)과 조직, 당 자산 등을 갖고 한나라당과 합당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형식은 한나라당과의 합당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민중심당이 후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국민중심연합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2010년대 현재는 구성원 전원이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으로 흩어진 상태다.

특이점으로는 창당 후 한 번도 당명과 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당명을 자주 갈아치우는 한국 정치에서는 참 희귀한 경우. 덕분에 한나라당과 합당될 당시를 기준으로 존재했던 정당 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같은 이름을 써온 정당으로 기록되었다.

5. 역대 선거결과

6. 관련 항목

----
  • [1] 1997년 11월 21일~ 2012년 2월 1일까지 약 14년.
  • [2] 참고로 가장 오래 존속한 정당은 1963년 2월 26일 창당되어 1980년 8월까지 존속한 민주공화당(17년 8개월)이고, 신민당이 13년 8개월, 1969년의 재창당을 고려하면 11년 1개월 존속했다.
  • [3] 여담으로 역시 김종필의 지론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유신본당 드립은 10. 26 사건 직후인 80년이나, 대통령 후보에 나온 87년의 "유신 잔당이 아니라 유신 본당이다"라는데서 나왔다.
  • [4]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 대변인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DJP연합에 반발해 탈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 [5] 합산 지지율 시·도 지사 선거 49.8%, 시·도 의원 49.6%, 시장·군수·구청장 선거 45%.
  • [6] 다만 김대중이 내각책임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해도 개헌엔 전체 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한 만큼 야당인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현실에서 통과는 불가능했다.
  • [7]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회의와 통합민주당은 충청에서 한석도 얻지 못했다.
  • [8] 교섭단체가 되지 못하면 국가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하고, 국회의 상임위의 위원장이 될 수 없는 등 여러가지 불이익이 있다.
  • [9] 말 그대로 남의 당 국회의원을 빌려왔다. 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 4명이 탈당하고 자민련에 입당하는 식. 이들의 당적 자체는 당연히 자민련이지만 사실상 소속은 여전히 민주당이었다. 이 행위 자체를 막을 법적 수단이 없는, 합법적이면서 편법적인 수단이다. 재밌는 사실은 민주당이 이 때문에 원내 교섭단체의 조건을 10석으로 낮추려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일 성공했다면 2004년민주노동당이 덕을 봤을 것이고, 2008년 자유선진당이 20석 만드느라 창조한국당과의 연합을 안해도 되었을것이다.
  • [10] 의원 꿔주기를 반대한 강창희 의원이 제명된 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정말 간신히 20석.
  • [11] 이후 자민련은 김대중의 배려로 장관 3명을 입각시켰다.
  • [12] 8.15 평양축전에 사람들의 방북을 허용했다는 이유였다.
  • [13] 민주당과 연정 상태였으나 대북관에 관해선 의견차이가 컸고, 결국...
  • [14] 아마도 내각제 합의 등이 보장되었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어차피 탄핵과 마찬가지로 내각제도 정족수의 2/3의 동의로 이 가능한 것이고..
  • [15] 사실 지역구 의석이 5석 이상인 정당은 3% 제한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저 득표율로도 비례대표 당선자를 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한 석이 모자라면서 F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