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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용

last modified: 2019-03-12 01:59:05 Contributors

야쿠르트 시절 컵스 첫 등판 그리고 국내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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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최훈이 그린 일러스트 (...)

성구회
회원번호 기록 가입년도 비고
8 327 세이브[1] 2014년 최초의 세이브 기록 가입자

KIA 타이거즈
임창용 (林昌勇 / Chang-Yong Lim)
생년월일 1976년 6월 4일(음력)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광주광역시
학력 대성초 - 진흥중 - 진흥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5년 고졸우선지명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95~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7)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8~2012)
시카고 컵스 (2013)
삼성 라이온즈 (2014~2015)
KIA 타이거즈 (2016~2018)
등장곡 N.EX.T - Destruction of the shell : 껍질의 파괴[2]
응원가 Downstait - I Came to Play[3]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7번
김봉연 (1989~1994)
정현발 (1995)
임창용(1996~1998) 곽채진(1999~2001)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9번
김형석(1998) 임창용(1999~2001) 덕윤(2003~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7번
강영식(2001) 임창용(2002~2006) 김문수(2007~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5번
이여상(2006) 임창용(2006~2007)[4] 웨스 오버뮬러(2008)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7번
허승민(2013) 임창용(2014~ ) 현역

1998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이상훈(LG 트윈스) 임창용(삼성 라이온즈) 진필중(두산 베어스)
2004년 한국프로야구 세이브
조웅천(SK 와이번스) 임창용(삼성 라이온즈) 정재훈(두산 베어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Contents

1. 개요
2. 프로 선수 시절
2.1. 한국프로야구 1기
2.1.1. 해태 타이거즈 시절
2.1.2. 삼성 라이온즈 시절
2.2. 일본프로야구 시절
2.2.1. 2009년 WBC 2회 대회
2.3.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에서의 새 시작
2.3.1. 2013년
2.3.2. 2014년
2.4. 한국프로야구 2기
2.4.1. 2014년
2.4.2. 2015년
2.4.3. 2016년
2.5. 은퇴
3. 투구 스타일
4. 이야깃거리
5.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한국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사이드암 투수.
경기장에 공 대신에 뱀을 풀어놓는 사나이.
노송과 함께 통산 100승-200세이브 기록 보유자
그러나 이제는 손대선 안될 것에 손을 댔다가 커리어 전체를 더럽히고 만 인물.

아래 투구 스타일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우타자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가는 특유의 직구를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가진 공을 슈트라고 하여 변화구로 구분하고 있다.

대표적인 별명은 창용불패(昌勇不敗) 창용이가 불질러서 패한다, 애니콜[5]이며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노예이기도 하다. 좌완 최강 노예 겸 중무리 투수구대성이라면 우완 최강 노예 및 중무리 투수는 임창용이라 할 수 있겠다.[6] 1995년 입단 때부터 2007년까지 제대로 된 관리를 받기는커녕 혹사를 당하며 선수생활을 평탄하게 해 본 적이 없다.

2012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함에 따라 구대성, 박찬호, 김병현, 이상훈과 함께 한, 미, 일 프로야구 무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2014년 메이저리그 진입에 실패하면서, 국내로 복귀하였고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법칙을 증명했다. 그러나 과도한 직구의존, 지나친 승부근성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2014년 5~6월 사이 블론세이브를 세 번 기록하는 등 마무리로서는 오승환에 비해서 매우 심각할 정도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며, 9월 접어들어서도 계속해서 블론으로 무너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프로야구 역대급 사이드암 투수라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해태, 삼성의 양 팀이 한창 강팀으로 군림하던 시절 주역으로 활동했고, 가정사적인 불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일본 도쿄 팀에서 연봉 60억원을 받을만큼 기량을 길렀으며, 선수생활 막바지에는 미국 메이저리그까지 진출해서 활약한 그의 모습은 나이가 들수록 분발하는 투혼과 함께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것이다.

2. 프로 선수 시절

2.1.1. 해태 타이거즈 시절


해태 타이거즈 시절. 많은 사람이 착각하고 있지만 해태 타이거즈에서도 엄청나게 굴렀다. 일례로 해태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3회에 등판하였다. 이 정도면 그냥 땜빵 선발 수준.

진흥고 시절에는 언더핸드 투수였다가 사이드암으로 전향하였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언더핸드로 던질 당시에는 구속이 130km도 채 넘지 못해서 팔을 조금 들어올렸고 그 이후로 구속이 나왔다고. 그 뒤 1995년 해태 타이거즈에 고졸우선지명을 받아 입단하여[7] 선발 투수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며, 1996년과 1997년 KBO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겨 주었다. 참고로 임창용 이후 한기주가 데뷔하기 전까지 타이거즈에서 한 시즌에 세이브를 20개 이상 거둔 투수는 나오지 않았다.

2.1.2. 삼성 라이온즈 시절


그러나 해태 타이거즈의 경영난이 심각해지자 1998년 시즌 후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에다 거액의 현금을 얹어서 임창용을 상대로 맞바꾸는 트레이드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였다. 참고로 이 중 황두성은 해태 측 담당자의 착각으로 트레이드된 경우. 황두성을 두고 담당자가 '덩치 크고 밥 잘 먹는 투수'라고 말했는데, 원래 원하던 그 진짜 덩치 크고 밥 잘먹는 투수는 정현욱.

삼성으로 이적한 후에도 충격과 공포급의 활약을 선보이며 창용불패라는 별명까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창용불패의 신화 이면에는 애니콜이라는 달갑지 않은 또 다른 별명이 있었다. 애니콜이라 불린 이유는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나온다 해서. 마무리 투수가 규정 이닝을 채우고[8], 그럼에도 팀 내 다승 2위까지 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서정환 감독에 의해 1999년 정규 시즌에 워낙 무리한 탓에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결국 무너졌다.

이렇게 1997년~1999년 3년동안 중무리 투수로 뛰며, 이런 혹사에도 매해 2점대 초반 이하 방어율에 40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방어율만 보더라도 그 무시무시한 활약이 느껴진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2위, 2위, 1위의 방어율을 기록했는데, 1997년의 방어율왕은 바로 구원 20승 신화를 이룩한 김현욱. 게다가 1998년에 방어율 1위를 차지한 정명원과 임창용은 그 이후 류현진이 1점대를 찍을 때까지 12년 간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1점대 방어율의 주인공이다. 또한 99년은 한국프로야구계에서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으로 기록된 시기인데[9], 이 시기에 2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했다!

2001년 외국인선수 벤 리베라[10]를 전문 마무리로 영입하며 선발로 보직을 전환, 단연 1선발로 등극했다. 그러나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그다지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2002년에는 주로 선발로 뛰며[11] 정규 시즌에 204⅓이닝이나 던지며 2002년 삼성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2002년 말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타진하며 포스팅을 신청했으나 제시받은 포스팅 비가 기대치에 못 미치는 65만달러에 불과하여 국내 잔류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당시에 그는 간통죄를 저질렀고 이것 때문에 한동안 곤욕을 치뤘다. 이 때문에 생긴 별명이 임간통.[12][13] 2004년 다시 마무리로 보직을 전환해 구원왕을 수상했다. 2005년 말 팔꿈치 부상으로 인대접합 수술을 받고 재기를 꿈꿔 오던 그는 2006년에 프로 통산 100승을 이루기도 했고 한국시리즈에서는 지연규와 마찬가지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던져(!)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제몫을 했다.

사실 2005년~2007년은 임창용의 흑역사.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결국 삼성 라이온즈와 2년 간 총액 18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계약을 체결한 다음 날 임창용의 아버지는 삼성에게 계약을 취소하거나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삼성 구단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신임 김응용 사장은 계약을 물러주느니 차라리 임의탈퇴시켜버리겠다며 격노했다.[14] 임창용이 두 손을 들면서 야구계를 뒤흔든 계약파동은 마무리되었지만 이후 3년간 임창용은 2류 투수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중간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던 2005년은 91.1이닝 5승 8패, 방어율 6.50, 복귀한 2006년에는 2이닝(…) 방어율 4.50, 2007년 119.1이닝 5승 7패, 방어율 4.90.

결국 2007년 시즌이 종료되고 아무도 모르는 새 일본프로야구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이 당시에는 임창용의 선수 생활이 거의 끝났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삼성과 FA 계약을 체결하면서 계약 기간이 끝난 후 선수가 원하면 해외 진출을 허락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꿈을 위해 간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 사장이었던 김응용과 감독이었던 선동열과 불편 관계에 있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임창용은 KIA에서 은퇴하고 싶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삼성과의 불편한 관계를 숨기지 않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선뚱이 기아에 있잖아? 안될거야 아마... 그래도 선동열과 김응용이 모두 팀을 떠나고, 프런트 수뇌진과 감독이 바뀐 이후로는 삼성과의 관계도 양호해진 듯하다. 삼성의 스프링캠프에도 자주 찾아오고 같이 훈련도 받으면서 류중일 감독님과 같이 야구하면 야구할 맛 나겠다는 등의 표현까지 하였고, 2014년에 실제로 복귀를 하였다.

어찌됐건 임창용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2.2. 일본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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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올드 유니폼을 입은 모습.

모두 임창용이 곧 국내로 복귀하거나 일본에서 은퇴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러나 여기부터가 임창용의 진정한 전설. 2008년 1승 5패 33세이브 평균자책점 3.00이라는 성적을 기록하게 되며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수호신으로 떠올랐다. 참고로 일본 데뷔 첫 탈삼진이승엽에게 빼앗았다.[15]

2009년 5월 15일과 16일에는 이틀 연속으로 최고구속 160Km/h의 공을 날리면서 한신 타이거즈 타선을 꽁꽁 묶는 등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스토퍼로 주목받았다. 야쿠르트의 상대 팀 팬들은 9회말 임창용이 나오면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런 덕분인지 야구팬들한테나 2ch에서나 칭찬을 많이 받는 편이다. 오죽하면 "야쿠르트와의 경기에는 9이닝이란 게 없다." 라고 했을 정도. 이제는 한신이 9회가 없어질 차례

참고로 160km/h을 넘긴 일본 리그 소속 선수는 마크 크룬사토 요시노리, 임창용 단 3명 뿐. 2011년 기준으로 마크 크룬이 찍은 162km가 일본 최고 구속. 그런데 임창용은 속구를 던지기에 상대적으로 불리한 사이드암[허나 임창용이 160km/h를 기록한 팔 각도는 리쿼터이다.. 그에 비해 마크 크룬은 속구를 던지기에 유리한 오버핸드다.

그 후 임창용은 2009 시즌에 시이 가즈히사가 세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팀내 연속 무실점 기록인 19이닝의 벽을 넘어 20이닝 연속 무실점의 대기록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그 뒤 바로 팀 동료 이가라시 료타가 재경신하긴 했지만.

이렇듯 일본 2년차인 2009년 시즌은 그야말로 후덜덜한 활약을 보였다. 개막전부터 7월까지 단 한 개의 자책점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무패 행진을 이어가며 야쿠르트 구단 기록을 갈아치우는 대활약을 한다. 하지만 7월 12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전 9회 말 등판에서 포수도루 허용과 희생번트, 이어지는 희생플라이로 역전을 허용하면서 결국 첫 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이후 후반기 체력 소진 등으로 페이스가 약간 떨어져서 5승 4패 28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점 2.05, WHIP 1.04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또한 2009년 시즌부터, 진구구장 홈 경기 한정으로 야쿠르트 구단에서 임창용이 등판할 때만 나오는 PV를 만들어 방영하는데 가히 폭풍간지다. 이가라시 료타의 경우도 비슷한 PV가 있지만, 배경음 덕분인지[16] 간지는 오히려 임창용쪽이 훨씬 좋다. # #2011년버전 게다가 PV를 틀어주기 전에 응원석에서 외쳐주는 "창용불패!"는 정말 멋있다.[17]

초기에 연봉 30만달러에 2년+1년 옵션으로 계약하고, 2009년에는 50만달러를 받았는데 야쿠르트 입장에서는 이게 초대박이 터진 셈. 이 때문에 200만달러 이상(300% 이상)의 연봉 상승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그건 시즌 초반의 이야기. 하지만 뛰어난 평균자책과 WHIP, 그리고 초반의 추세를 생각한 구단 덕에 임창용은 160만달러(220% 상승)에 야쿠르트와 재계약했다. 이 정도만 해도 대박.#

2010년에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니, 엄청난 구속으로 돋보였던 2009년보다도 좋은 활약이다. 구속을 낮춘 대신 제구력과 기술을 가다듬었다는 평가. 9월 16일 30세이브를 돌파했으며, 9월 26일 기준으로 ERA 1.34 33세이브를 기록하며 일본 진출 이후의 본인 기록(2008년 33세이브)과 타이를 찍었다. 후반기가 됨에도 불구하고 ERA가 오르지 않는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리고 이혜천은 또 곁다리로 기사 하단부에 등장. 이 쪽은 1군에서 계속 버티면서 위기 상황마다 진화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무적 결국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35세이브/노 블론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재계약 과정 중 한때 교섭이 결렬되었을 정도로 진행에 난항을 거듭하였으나 결국 3년 총액 15억 엔이라는 초대형 계약으로 야쿠르트 잔류가 결정되었다.

이렇게 재계약한 임창용은 5월 3일 일본 통산 99세이브를 기록하여 과거 선동열의 한국인 일본프로야구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했고 바로 다음날 100세이브를 기록했다. 2011시즌 최종성적을 보면 투고타저의 리그에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64경기에 나와 61⅓이닝 4승 2패 32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2.20 68탈삼진을 기록했지만 5블론세이브를 기록하여 다소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 요미우리와의 퍼스트 스테이지 1차전에서는 공 1개로 세이브를 기록했지만 2차전에서는 ⅔이닝 동안 2개의 안타를 맞고 4실점했다.[18] 경기 직후 임창용은 구위 문제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가와 준지 감독은 제구, 구위가 모두 불만스러웠다면서 마무리 보직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감독의 이야기와는 달리 클라이맥스 파이널 시리즈 3차전에 나와 세이브를 기록했다. 준지 감독의 발언은 현재 그저 언플&선수 관리 차원의 발언인 것으로 보인다. 퍼스트 스테이지 3차전 이후 준지 감독은 경기에서 선발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김성근 감독마냥 투수를 팍팍 내리고 주전 타자들도 가차없이 교체하면서 이기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히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팀은 주니치에게 패퇴. 결국 임창용은 2011시즌을 다소 아쉽게 마무리지었다.

2012 시즌은 안타깝게도 2군에서 시작하였다. 이후 또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일단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1년 정도의 재활 기간을 가졌다.

2012년 9월 11일경 재계약이 불투명하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때문에 국내 복귀의 가능성도 생겼다. 일본 진출시 임의탈퇴를 거쳤기에, 국내로 복귀한다면 삼성 라이온즈로 가야만 한다. 마침 눈엣가시도 없겠다 일단 류중일 감독은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지금은 대답할 상황이 아니다[19]

2012년 11월 15일 결국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퇴단을 발표하여 방출이 공식화되었다.

2.2.1. 2009년 WBC 2회 대회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결승전 때 10회초 2사 2,3루의 상황에서 스즈키 이치로와의 맞붙어 정면 대결하였고 결국 결승타를 맞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을 아깝게 놓치게 되자 한국에서 욕을 좀 많이 먹게 되었다. 그래서 붙었던 별명이 임완용M창. 덕분에 양국에서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당시 상황에서 김인식 감독이 고의사구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알려지고, 임창용의 감독으로 있었던 김응용, 선동열이 관련 인터뷰에서 임창용이 지시를 무시하고 고집을 부려 승부를 한 것처럼 말하는 바람에 더더욱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러나 2014년에 나지완을 거르지 않고 상대하다 역전타를 쳐맞는 것을 보고 이 부분은 재조명받게 되었다

참고로 실제로 결승타를 맞기 직전 2사 1,3루 상황에서 1루수가 베이스에서 떨어져서 1루 주자가 견제 없이 2루로 뛰게 놔두었고, 도루 상황에서 포수도 2루로 공을 던지지 않았다

임창용에게 온갖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는 가운데 일본의 "카리스마 백서"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분석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고, 그 프로그램에 의하면 당시 투수코치인 양상문이 감독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임창용에게 고의사구 사인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다른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당 프로그램에 출연한 김인식 감독과 양상문 코치는 프로그램이 자신들이 실제로 한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방송을 했다며, 통역이 말을 잘못 전한 것이거나 일본 취재진이 내용을 왜곡한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양 코치는 "내가 감독님의 지시를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했으며, 김감독은 "양코치에게 어렵게 승부하라는 지시를 두번이나 내렸고, 이 내용이 전달됐는지 확인까지 했다. 고의볼넷을 내주라는 의미는 아니었으나, 승부가 여의치 않을 땐 정면대결을 피하고 볼넷을 내주라는 의미도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당시 정면대결의 원인에 대한 논란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게 되었다. 훗날 하일성KBO 사무총장이 KBS 아침마당에 출연,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김인식 감독에게 어떻게 지시했냐고 묻자 그가 말하길 "내가 일어서서 적극적으로 거르라고 지시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모두 내 탓이다." 그런데, 강민호3년이나 지나서 자기 잘못이라며 자백했다.

2.3.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에서의 새 시작

2012년 12월 13일, 어느 100년 동안 우승 못 하는 팀과 계약하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기사가 떴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컵스와의 계약서에 사인하게 됐다. * 인터뷰 조건은 1+1년, 옵션이 다소 복잡하게 얽혀있는 스플릿 계약으로 최대 연봉 5m(500만 달러)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마무리 투수후지카와 큐지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것보다도 다저스류현진, 신시내티 레즈로 이적한 추신수와 함께 오래간만에 한국 선수들의 대대적인 메이저리그 러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2.3.1. 2013년

해당 항목으로.

2.3.2. 2014년

2014년에는 자신을 논텐더시킨 시카고 컵스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했다. 연습 경기와 시범 경기를 통틀어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하고 1이닝 퍼펙트를 기록하기도 하는 등 구위와 제구력이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였다.

이 와중에 인터뷰에서의 발언으로 컵스와의 계약 문제로 전 에이전트한테 사기를 당했다는 의혹이 퍼지기도 했다. 임창용 인터뷰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젊은 선수들이 많은 컵스 조직 특성상 25인 로스터 진입을 위해서는 특별히 더 좋은 모습을 보어주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개막 로스터 진입에 실패하여 마이너리그 캠프행 통보를 받았다. 결국 3월말 방출되었는데, 기사에 따르면 임창용 스스로 방출을 원했다고 한다.
임창용보다 1살 많은 우에하라 코지는 작년에 대활약했는데!

4월 20일 네이버 이영미 칼럼에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여기서 임창용은 컵스가 불펜에 좋은 선수가 많으니 불펜이 약한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을 알아보고 싶어했지만, 컵스가 임창용을 25인 로스터에 넣긴 그렇고 다른 메이저리그 구단에 내주긴 아깝다는 심보로 임창용의 에이전트를 거치지 않고 삼성과 연락을 취해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설명했다. 컵스가 갑인 만큼 을인 임창용으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2.4.1. 2014년

창용불패에서 창용불=패로, 그리고 다시 창용불패로 끝난 국내 복귀 첫 시즌

유독 삼성 프랜차이즈 배영수를 집중으로 하는 블론이 많았지만, 배영수의 FA우선협상 결렬이 난 이후로 재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전설의 9블론 전업 마무리가 5승이라니?! 노송 기록 도전

해당 항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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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의 마지막은 빙구(..)의 모습으로 삼적화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면서 끝냈다.

2.4.2. 2015년

해당 항목으로.

2.4.3. 2016년

도박 파문으로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은데다 올해로 만 40세인 그의 나이 때문에 새로운 구단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많이 제기되던 중에, 정규 시즌을 앞둔 3월 28일에 KIA 타이거즈와 연봉 3억 원에 계약을 맺었다. 연봉은 전액 야구발전을 위해 기부된다고 한다. 방출 후 여러 번 고향 팀에서 불명예를 씻고 싶다고 어필해온 것에 대해 구단에서 반성과 재기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전해진다.

2.5. 은퇴

2018시즌 후반기에 김기태 감독과 마찰을 빚은 것이 원인이 되어 시즌 종료 후 구단 측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당초 매스컴에선 불펜 자원이 급한 다른 구단에게 어필할 만한 선수이므로 다른 팀과 계약할 가능성이 점쳐졌으나, KIA 구단 측의 언플로 인해 타 구단에서도 '팀 단결력을 손상시킬 수 있는 강성 선수'라는 이미지가 박혔고, 거기에다 FA 몸값 거품 빼기 및 유망주 키우기가 화두가 된 KBO 리그 상황까지 맞물려 아무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결국 2019 시즌 시범경기 개막을 앞둔 3월 11일에 전격적으로 은퇴를 발표한다. 이에 KIA 팬덤을 비롯하여 수많은 야구 팬들은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이며 성토하였다. 한국프로야구사에 한 획을 그었던 '애니콜'에게는 만부당한, 너무나 허망한 퇴장.

3. 투구 스타일

youtube(w-Aev71vezQ)

사이드암(팔을 옆으로 돌려 공을 던지는 투구폼) 투구폼으로 150km대의 강속구를 던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강속구가 나올 때 팔이 로우 쓰리쿼터 높이까지 올라간다. 로우 쓰리쿼터를 넘어 하이 쓰리쿼터로도 종종 던진다. 이 투구폼의 궤적과 빠른 강속구가 합쳐져 만들어진 일명 뱀직구는 임창용의 대표적인 전매특허 구질이다. 이 공을 처음 본 일본, 특히 2ch 사람들은 '이건 뭐 파워프로(실황 파워풀 프로야구)냐?'라고 말할 정도. 사실 일본 야구에서는 이런 테일링 무브먼트를 가진 투수가 드물다. 애초에 이런 무브먼트가 있어도 잘못된 것이라고 교정하는 판(…)[20]. 2013년 기준으로 국내에서 이와 비슷한 무브먼트를 갖고 있는 선수는 한화 이글스칰창용정재원이나 삼성 라이온즈심창용심창민 정도. 박 모씨지만...


임창용의 전매특허 뱀직구 직구인데 궤적이 휘는 것이 포인트. 원래 직구라고 해도 똑바로 날아가지는 않는다. 야구의 구질참조. 단 임창용은 휘는 정도가 엄청나게 심할 뿐. 지금도 보면 사이드암 보다는 약간 위로 올라갔다.

한물 갔다고 평가받았는데 일본에 가서 이처럼 화려하게 부활한 이유로

이렇게 셋을 들기도 한다. 국내에서는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로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무리하게 뛰었기 때문에 공의 힘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또한 프런트나 감독과의 불화설도 종종 보도되었고, 개인 사생활 측면에서도 물의를 빚는 등 야구 내외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본인은 일본 진출 직후 '모든 것을 잊고 야구에만 전념하겠다'라는 인터뷰를 했는데, 그 말 속에 일본에서의 호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농담으로 도는 얘기로 2005년도에 토미 존 수술을 받았는데 실은 이게 부상 치료용 수술이 아니라 신체 강화 수술이 아니였냐는 소리도 있다. 이 당시에 배영수의 10km/h를 훔쳐갔다는 우스개도 한다. 배영수는 같은 수술을 받은 뒤 시속 150km에 육박하던 속구 구속이 10km/h 이상 떨어져 긴 부진에 빠지고 말았다. 물론 배영수가 1년 늦게 수술했으므로 도둑질이란 건 농담. 하지만 배영수가 재활 뒤 복귀한 2008년에 좀 모자란 듯한 성적을 낸 반면 같은 해 임창용은 일본 최고 수준의 마무리로 다시 태어나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2009년에는 배영수가 직구 구속이 135도 못 넘을 정도로 아예 충격적으로 몰락한 반면 임창용은 160km/h를 찍는 등 날아다녀 대비되는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4. 이야깃거리

  • 투수이지만 발이 대단히 빠른 걸로 유명하다. 해태 시절부터 삼성 시절까지 기회가 되면 대주자로 나오곤 했다. 지금도 후배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편.#1#2 [21]


  • 지승민, 권오준, 삼적화 되기 전의안지만, 심령사진김진웅 등 후배들과 함께. 2014년 현재도 삼성 라이온즈 투수들은 임창용을 존경하고 따른다고 한다.그래서 안지만하고 임창용하고 쌍으로 이번시즌을 말아먹고 있는 중인가 보다.

  • 삼성에 있을 적에 프런트나 감독과 불화설이 있었던 것과 달리 정현욱, 권오준,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 등의 삼성 시절 후배들은 임창용을 많이 따른다. 특히 이들 중 윤성환, 오승환, 안지만과는 비시즌 기간에 같이 여행을 가거나 당구치면서 밥값 내기를 한다고. 다만 이승엽과는 2000년대 전반기에 사이가 안 좋았다는 설이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나돌고 있다. 임창용이 중무리 투수로 고생했는데 스포트라이트는 홈런왕인 이승엽이 더 많이 받았다는 점을 들어서이다. 그러나 2014년 현재 하는 모습을 보면 둘이서도 그렇게까지 어색하지는 않은듯.

  • 자신의 전성기가 해태에서의 4년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연도를 적자면 1995~1998년. 또 삼성으로 이적한 뒤 2~3년간도 페이스가 좋았다고 언급했다. 해태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1998년을 포함해 1998, 1999, 2000년 동안 3년 연속 30+세이브를 달성하기도 했었다. # 기사 말미 참조. 동시에 김응용 전 사장이나 선동열 전 감독도 구위만 따지면 대한민국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날아다닌 걸 보면 일본 시절이 진짜 전성기 같다. 다만 유념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임창용의 보직이 중무리 투수였다는 점. 야쿠르트에서처럼 철저하게 1이닝 마무리로서 관리를 받으며 등판하는 것과 비교하기 힘들다. 일본의 야구 팬들은 임창용의 대한민국 시절 스탯을 보고 저렇게 혹사를 당하고 부상을 안 당한 게 이상하다는 반응이 대다수.

  • 일본 진출 후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부처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유는 임창용의 성인 '임'을 일본어로 イム라고 적는데, 이를 합치면 일본 한자로 부처{仏(佛)}를 의미하는 글자가 되기 때문. 그리고 이 루트를 같은 임씨 성의 한국 출신 2D 아이돌이 그대로 탔다. 2채널의 응원 스레드에는 임창용이 등판할 때 イムイム...로 도배가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통칭 미스터 제로로 통한다고. 야쿠르트에서 미스터 제로라 불릴 수 있는 선수로는 2008년에 히어로즈에서 잠시 뛰었던 타카츠 신고뿐이었다.

  •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인상적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도시락동그랑땡을 싸온 적이 있는데 그걸 본 친구가 동그랑땡만 자꾸 먹어서 그만 먹으라고 했더니, 반찬에 침을 뱉고 도망치길래 화가 나서 포크수저를 던졌는데 그만 포크수저가 친구 머리에 꽂혀버렸다(...). 그걸 본 담임 선생님이 부모님 모셔올래 야구할래라고 물어서 부모님을 모셔오기 싫었던 임창용 어린이는 야구를 선택했다고(...). 오오 인생초구 포크볼 오오

  • 임창용의 별명 중 하나로 "창드"가 있는데 이는 진갑용G드래곤 조어방식으로 만들어진 별명인 갑드와 마찬가지로 잘한다는 의미에서 용을 드래곤으로 표현한 별명. 하지만 이름에 쓰인 한자는 龍이 아니라 勇이다. 2012년에 심창민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자 일부 삼성 팬들은 시속 150km대의 속구를 던지는 사이드암 투수라는 점과 이름에 창이 들어간다는 점 등을 임창용과 연관지어 "심창드"라 부르기도 한다. 당연히 칭찬하는 뜻. 사실 한국프로야구 사이드암 투수 중에선 거의 전설적인 존재라서, 딱히 삼성 투수들 말고도 사이드암으로 누군가가 조금만 잘던지면 순식간에 그 선수는 XX의 임창용, X창용이 된다. 물론 그 중에 원판을 뛰어넘은 투수는 지금까지 없다.

  • 2003년에 이혼을 한 적이 있다. 이모씨와 2003년 1월에 혼인신고를 했고, 2월에 이혼신청을 한것.이혼소송 관련 기사 여기에 대해 이런저런 카더라들이 있지만 적당히 걸러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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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NG image (Unknown)]

  • 마구마구2 for kakao에서 14년도 선수가 추가될 때, 14 임창용은 처참한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최고등급 8볼 플래티넘으로 나왔다. 흠좀무

5. 연도별 주요 성적

  • 투수 기록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5 해태 타이거즈 14 29⅓ 0 2 0 - 0.000 5.83 37 0 8 16 19 19 1.432
1996 49
(4위)
114⅔ 7 7 0 - 0.500 3.22 91 8 44 78 48 41 1.125
1997 64
(4위)
135 14
(3위)
8 26
(4위)
- 0.636 2.33
(2위)
93 6 42 120 44 35 0.956
1998 59 133⅔ 8 7 34
(1위)
- 0.533 1.89
(2위)
90 4 42 141 35 28 0.89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삼성 라이온즈 71
(4위)
138⅔ 13 4 38
(1위)
- 0.765
(3위)
2.14
(1위)
91 10 36 141 33 33 0.865
2000 52 88⅔ 5 4 30
(3위)
0 0.556 1.52 58 2 31 95 19 15 0.902
2001 30 184⅔
(5위)
14
(3위)
6 1 0 0.700
(4위)
3.90 169 25 79 136
(4위)
88 80 1.251
2002 36 204⅓
(2위)
17
(3위)
6 2 0 0.739
(3위)
3.08
(3위)
188 24 58 160
(4위)
82 70 1.086
2003 28 147 13
(3위)
3 1 0 0.813
(2위)
3.55 141 15 59 85 63 58 1.259
2004 61 67 2 4 36
(1위)
0 0.333 2.01 51 4 26 67 19 15 1.090
2005 29 91⅓ 5 8 0 3 0.385 6.50 110 11 51 70 67 66 1.599
2006 1 2 1 0 0 0 1.000 4.50 3 0 1 0 1 1 2.000
2007 40 119⅓ 5 7 0 3 0.417 4.90 138 9 54 62 68 65 1.52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8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54 51 1 5 33
(5위)
3 0.167 3.00 55 6 14 50 18 17 1.314
2009 57 57 5 4 28
(3위)
5 0.556 2.05 40 4 25 52 15 13 1.105
2010 53 55⅔ 1 2 35
(2위)
6 0.333 1.46 32 3 19 53 9 9 0.880
2011 65 62⅓ 4 2 32
(5위)
4 0.667 2.17 40 2 28 69 15 15 1.043
2012 9 7 0 0 0 3 0.000 0.00 6 0 2 7 0 0 1.14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3 시카고 컵스 6 5 0 0 0 - 0.000 5.40 6 0 9 5 3 3 2.6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4 삼성 라이온즈 49 44⅔ 5 4 31
(2위)
0 0.556 5.84 50 4 25 52 33 29 1.590
KBO 통산(14시즌) 583 1500⅓ 109 70 199
(4위)
6 0.609 3.33 1310 122 556 1223 619 555 1.156
NPB 통산(5시즌) 238 233 11 13 128 21 0.458 2.09 173 15 88 231 57 54 1.082
MLB 통산(1시즌) 6 5 0 0 0 - 0.000 5.40 6 0 9 5 3 3 2.600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7해태 타이거즈 2 3 .000 0 0 0 0 0 0 0
1998 2 3 .333 1 1 0 0 2 0 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004삼성 라이온즈 1 1 .000 0 0 0 0 0 0 0
2007 1 0 - 0 0 0 0 0 1 0
통산 6 7 .143 1 1 0 0 2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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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KBO 리그 199 + 일본프로야구 128
  • [2] 오승환에 이어 임창용도 넥스트의 곡이 등장음악으로 정해졌다. 등장 음악은 전주 부분을 따로 편집한 듯 하다.
  • [3] WWE 프로레슬러 더 미즈의 등장음악이다. 이 노래의 후반부에 맞춰서 응원구호를 외친다. 창! 용! 불! 패! 창!용!불!패!
  • [4] 팔꿈치 수술 후 2006 시즌 말 1군에 복귀하며 35번으로 번호를 바꿨다.
  • [5] 아래 내용에도 있듯이 연투와 선발과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던지는 경우가 있었고, 그래서 감독이 부르면 언제든지 올라온다고 해서 애니콜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삼성전자삼성 갤럭시 시리즈를 생산한 이후로는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 갤럭시라고도 부른다.
  • [6] 혹사도만 따지면 넘사벽 of 넘사벽인 장명부가 있지만 장명부는 자의로 등판한 것이기 때문에 노예라는 호칭을 붙이기엔 좀 그렇다.
  • [7] 놀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입단 초에는 2군을 밑돌던 날라리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었다. 방황하던 임창용을 다잡아준 이는 김성근 당시 해태 2군 감독. 체력적인 부분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응용 감독은 갓 스물이 된 임창용이 여러 유혹에 이기지 못하자 30일동안 여관에서 숙식을 같이 했다고 한다.감독이랑 같이 사는 신인 선수의 일상
  • [8] 마찬가지로 특급 중무리(...)였던 진필중도 1999년 최다 세이브포인트 경쟁에서 이겼을 때 규정 이닝에 조금 모자란 114이닝을 던졌고, 구대성도 다를 바가 없었다.
  • [9] 이 시기에 30-30 클럽 선수가 3명이나 나왔고 홈런왕 이승엽이 54홈런을 기록했으며, 해태 타이거즈왕조의 마지막 불꽃 팀홈런 210개로 2003년 삼성 라이온즈의 213개에 이어 한 시즌 최다 팀 홈런 2위를 기록했다.
  • [10] 2001 시즌 중반까지 21세이브를 올리며 잘 나가다가 개인사로 시즌 중 임의탈퇴되었다. 김진웅벤 리베라를 대신해 마무리를 맡았고, 2002 시즌부터는 노장진이 마무리를 맡게 되었다.
  • [11] 밑에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선발인 주제에 구원으로 7경기를 더 나왔다.
  • [12] 당시 부인의 말에 따르면 팬티 한 장까지 명품이냐 아니냐를 따졌다고까지 했고 그때까지 보수적이었던 국민성에 의해 비난도 엄청났다. 그럼에도 성적이 곤두박질치지는 않았다. 사건 하나 터지면 멘탈에 상처를 입어 성적이 눈에 띄게 하락하는 2010년대 선수들을 생각해보면... 하지만 재판이 석연치 않게 끝난데다 임창용의 부인 측이 지나치게 언플을 활용하다 모순되는 말을 했다는 점, 등 간통 여부에 대해선 아직 논란점이 많다.
  • [13] 비슷한 시기에 간통을 저지른 김동주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묻히는데, 그 이유는 2009년 이후 프로야구의 부흥때 임창용은 해외리그에서 활약한지라 잊혀진 것이 크다.
  • [14] 선수가 임의탈퇴 신분이 되면 원 구단은 물론 다른 구단으로 들어가는 길이 완전히 봉쇄되어 프로 무대에서 뛰지 못하게 된다.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나는 셈.
  • [15] 여담으로 두 선수간의 사이가 일본에서 벌어졌다는 내용의 카더라가 이 당시에 돌았다.
  • [16] 007 제임스 본드 테마 음악이다,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쓰던 배경음이다.
  • [17] 외치지 않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지만 임창용이 나왔다고 좋아하는건 다를 게 없다.
  • [18] 당연히 분식회계.
  • [19] 류중일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이승엽일본에 있을 적에 국내 복귀를 두고 지나가는 말로 '복귀하면 좋지'라고 말했다가 그게 실제로 기사로 나오자 난처했다고. 자팀 전력이 늘어나는 차원에서는 좋지만 반대로 현재 자팀 선수가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에 선수들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 거기에 기사처럼 임창용은 2번이나 팔꿈치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아무리 레전드라고 해도 이런 투수를 쉽사리 기용하는 건 무리. 이제 나이도 있고.
  • [20] 때문에 실제로 파워프로에서는 '슈트 회전'이라는 페널티 어빌리티로 구현돼있다. 효과는 발동시 상대타자의 비거리 강화.
  • [21] 투주 대주자라 하면 해괴망측하게 생각 할지도 모르지만, 항상 러닝 훈련을 소화하는 투수들이 보통의 야수보다 발이 빠른 선수가 많다. 다만, 임창용은 발 빠른 야수와 비슷한 주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여담으로, 투수 대주자의 경우 다른 팀에서도 가끔 가다 볼 수 있다. 단적으로 602 대첩임정우이진영을 대신해 주루플레이를 벌인 적이 있었다.
  • [22] 한국시절만 기록. NPB시절에는 2009년 4월30일 나고야 주니치전 1타석 1삼진이 유일한 기록. MLB에서는 타자로 출전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