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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육군

last modified: 2015-04-13 19:31:35 Contributors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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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日本帝國陸軍. 1867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육군. 현재 일본에선 구 육군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1871년(메이지 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나 영어권에서는 메이지 유신 당시에 덴노를 호위했던 사무라이 근위대를 시작점으로 본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해군보다 육군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있었던듯 하다. [1]

Contents

1. 역사
2. 육군 항공대
3. 인원 선발
4. 관련 항목

1. 역사


1867년 훈련을 받고 있는 쇼군 소속의 부대(막부육군). 막부가 무너지면서 이들은 일본군에 흡수된다. 공식적으로 대일본제국육군이란 거창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1877년(메이지 10년) 이후의 일이다. 1889년 일본 헌법이 제정되면서 군사 권한은 내각이 아닌 덴노의 통수권에 속하게 되었다. 육군의 최고 지휘관은 대원수로 덴노를 뒀고 육군은 육군대신(육군장관), 참모총장, 교육총감의 세 장관이 관리했다. 웃긴 것은 이들은 대장이 아니라 중장이 한다. 최고 보직과 최고 계급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런 일본군의 괴상한 특징은 병과계급을 씹어먹는 문제를 나중에 일으키기도 한다. 육군대신은 육군성(한국으로 치면 육군청), 참모총장은 참모본부(육군본부), 교육총감은 교육총감부[2]를 지휘했다.1938년(쇼와 13년)에는 항공 전력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육군항공총감부가 설치되었다.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도 세웠고 여기 출신들은 나중에 항공자위대의 초기 인원이 된다. 나중에 참모본부는 대본영에게 권한을 많이 이임하게 되나 군정권의 상당수는 유지된다.

기원은 1871년 조슈와 사쓰마, 토사 등에서 징집된 덴노 직속의 어친병(御親兵)이다. 폐번치현이 이뤄지자 이들 어친병은 근위대가 되었다. 처음엔 사무라이 출신들로 군을 유지했지만 곧 국민개병제를 도입할 계획이었다.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1874년에 징병령이 선포됐다. 그러나 징병제가 '사무라이를 모독한다'고 생각한 기존의 사족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히 정한론을 주장하다가 권력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하면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이 대량으로 사직했다. 이후 서남전쟁이 일어난다. 서남전쟁은 하야한 군인들과 남은 군인들이 벌인 것으로 칼을 들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신식군대끼리 총들고 싸운 것이다.

1875년경의 일본 육군 병사들.

1874년 대만을 침략했다. 일본에선 이를 외정(外征)이라고 한다. 1885년엔 프로이센의 소령을 교수로 초빙했고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1894년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이자 최강이라 생각됐던 청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실상 아시아에선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된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일동맹에 따라 연합국으로 참전해 독일 소유인 칭따오와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한다. 전쟁으로 일본은 경기 붐이 일고 경제 규모가 팽창한다. 또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백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본군을 시베리아로 파병했다.

1900년대의 일본군 육군 복장.

1920년대에는 다소 군축한다. 그러나 현역만을 줄였을 뿐 교련 제도를 창설하고 예비 장교를 계속 확보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규모는 평시 편제의 1/3 수준인 10만명을 군축해 20만명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2.26 사건으로 군부가 내각을 지배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확장된다.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데 그 동안 해군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킨다. 1941년 일본 육군은 51개 사단 규모였다. 숫자는 약 170만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중화민국 정부를 적극 지원했고 소련이 1945년에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일본 육군은 패배한다. 관동군 중 상당수는 소련에 포로로 끌려갔다.


1938년에 바뀐 전투복.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옷이다.

규모로 볼 때 1870년에는 1만2천명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0년대에는 12개 사단으로 38만명이 현역으로 근무했다. 1941년에는 41개 사단에서 46만명이 현역으로 일했는데 2개 사단이 한반도와 일본에 주둔했고 12개 사단은 만주, 27개 사단은 만주를 제외한 중국에 주둔했다.

1945년에는 145개 사단에 5백만명 규모였다. 최대로 컸을 때는 609만명이었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150만6천명이 전사했으며 비전투 상황에서 사망한 인원을 합치면 256만 6천명 수준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67만2천명이며 상당수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81만명이 실종됐으며 7천5백명이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 대만침공 때는 543명이 사망[3]했고 청일전쟁 때 13,823명, 러일전쟁 때 8만명[4] 가량이 사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칭따오에서 영국군과 연합을 맺어 독일-오스트리아 군과 싸워 1,455명이 전사했다.

2. 육군 항공대

일본군에서 육군 항공대는 육군비행전대(陸軍飛行戦隊)라고 불렸다. 미국의 육군 항공대가 미 육군의 인사나 군수와는 따로 놀던 사실상 거의 독립된 군종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 육군 항공대는 육군에 철저히 귀속됐다. 1905년 러일전쟁 때부터 풍선부대를 편성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편성된 항공부대를 만들었다. 1915년에 임시항공대는 항공대대로 확장됐고 1917년엔 6개 대대로 증가했다. 1919년엔 육군항공본부가 생겼고 1925년엔 항공병과를 독립시켜 육군항공사령부를 개설하였다. 일본육사 내에 있던 항공병과를 독립시켜 1935년에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육군 항공대의 인원 상당수는 항공전력의 공백이 있던 일본 자위대에 1954년 항공자위대가 나타나면서 상당수 흡수됐고 대한민국 공군의 초기 인원에도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이 상당수 있다.

3. 인원 선발

건군기에는 조슈[5] 출신들이 독점했으며 장교를 기존 일본사족 개념으로 파악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가 생기면서 육균유년학교를 거친 뒤에 사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하거나 육군교도단(陸軍敎導團)을 거쳐 부사관으로 임관한 뒤에 육군사관학교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1917년에는 준위후보자(후보생), 1920년엔 소위후보자(후보생) 제도를 설치해 준위나 병장, 선임부사관 등에서 우수한 인원을 뽑아 소위로 임관시켰다. 1938년에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1883년부턴 국립과 공립, 1889년부터는 사립을 불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자는 1년현역제란 이름으로 예비 장교에 지원 가능했고 이 제도는 1927년(쇼와 2년)부터는 갑종간부후보생이란 이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갑종장교가 육사 출신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1941년(쇼와 16년)에는 특별지원장교 제도가 생겼다. 까놓고 말해 인원 딸리니까 제도를 늘린 것이다. 나중엔 조선이랑 대만에서도 장교를 뽑았다.

병의 경우에는 징병제를 통해 징집되었다. 평시에는 병 중 우수한 자원을 부사관으로 선발했다. 이병과 일병, 상병으로 구성됐으며 일병까진 대체로 그냥 올라갔지만 상병은 중대 당 1할의 인원 제한이 있었다. 진급은 검열로 이뤄졌다. 일본군 병의 특징은 계급이 무조건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이 높다고 꼭 선임인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 병의 복무기간은 2년이었으며 예비역으로 5년 4개월을 지내야 해 총 상비병역으로는 7년 4개월, 그 후엔 후비병역이란 이름으로 10년을 병적에 올렸다. 1943년엔 예비역으로 지내는 기간이 15년 4개월로 늘어났는데 2년 만에 전쟁이 끝나면서 실제 적용되지는 않는다. 창군 시절인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패전으로 해체된 2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을 보면 병역기피자도 꽤 있었다.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고 해서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겨버린다든가 하는 식으로.[6] 이공계 학교에도 병역 면제를 해줬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 이공계로 가 피한 사람이 많았다. 아니면 군무원이 돼서 일본에서 근무하든가. 오진으로 징병을 피한 경우도 있는데 미시마 유키오가 대표적이다. 징병검사를 통과했지만 군의관이 기관지염을 결핵으로 본 탓에 귀가 조치됐다. 소수이긴 하나 여호와의 증인 신도 가운데 일부가 병역 거부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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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당장 조선총독만 봐도 해군 인사는 사이토 마코토가 유일했다. 그외에는 전부 육군 인사. 또한 정한론을 주장한 인사들은 상당수가 후술할 조슈번 출신이었다.
  • [2] 한국엔 마땅히 비교될 만한 규모가 없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육군교육사령부육군사관학교를 합친 느낌
  • [3] 전투로 사망한 자는 12명이고 531명은 질병으로라는데
  • [4] 전사자는 4만 7천, 나머지는 질병
  • [5] 오늘날의 야마구치현.
  • [6]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는 것은 19세기까지 있던 일. 나쓰메 소세키가 대표적.
  • [7]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잠수함이다!
  • [8] 위에 있는 삼식잠항수송정과 더불어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항공모함이다!
  • [9] 전부 육군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