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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last modified: 2019-01-06 17:36:0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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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보병 이와중에 깨알같은 착검 일본 육군 89식 중전차
항공모함에서 발진 대기 중인 제로센 편대 후소급 전함

넷 중에서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존재 자체가 사망 플래그


Contents

1. 개요
2. 이상과 현실
2.1. 그들이 꿈꾸었던 일본군
2.2. 현실의 일본군
3. 굴욕의 역사
3.1. 리즈 시절(?) 일본군
3.2. 막장의 전조
3.3. 군부의 폭주
4. 편제
5. 문제점
5.1. 개관
5.2. 일본군의 무기체계
5.3. 시대에 뒤떨어진 사관학교의 교육과정
5.4. 문제 많은 인사제도
5.5.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5.6. 적이 바보라는 전제하에 만든 작전계획
5.7. 전투교리와 훈련의 막장성
5.8. 적이 지는 걸 전제로 하는 훈련
6. 일본군의 전략적 병크
6.1. 항복하는 자가 없는 이유
6.2. 물주와의 대결
6.3. 시끄러운 기습
6.4. 말로
6.5. 숭숭 뚫리는 암호
7. 보급
7.1. 외양
7.2. 실상
7.3. 콩나물과 관련된 일화
8. 전쟁 범죄
8.1. 개관
8.2. 포로 학대
8.3. 학살강간
8.4. 식인
8.5. 인간 방패
9. 각종 부조리 및 악행
9.1. 구타
9.2. 휴가, 휴식과 재충전의 박탈
9.2.1. 휴식과 재충전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음주, 약물, 안부, 가혹행위 허락
9.3. 부정부패 및
10. 한반도에서의 일본군
10.1. 개관
10.2. 조선 군인
10.3. 한반도에서의 일본군 만행
11. 전후의 일본군
11.1. 패전 이후
11.2. 일본군 잔당
12. 대중 매체
12.1. 한국
12.2. 중국
12.3. 서방권
12.4. 일본
13. 결론
14. 기타 관련 항목
14.1. 참고 서적
14.2. 조직체계, 계급체계, 주요 인물, 무기체계
14.3. 관련 학설
14.4. 관련 전투 및 사건
14.5. 연관 항목

1. 개요

한자 : 日本軍
영어 : Imperial Japan Army, IJA(일본 제국 육군) / Imperial Japan Navy, IJN(일본 제국 해군)

20세기 인류를 멸망시킬 뻔한 나치 독일과 버금가는 인간 쓰레기이자 천하의 개쌍놈들 그리고 조선인민군의 대선배. 그리고 병크계의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확고한 일인자. 대한민국 국군의 실질적 전신[1]
1945년 8월 15일 패망하여 완전히 해산하기 이전까지의 일본 제국의 군대를 흔히 구 일본군이라고 한다. 물론 현대 일본의 방위를 책임지는것은 군대가 아니라 명목상 준군사조직자위대이니 그냥 "일본군"이라고 해도 구 일본군을 지칭하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보통은 그냥 '일본군'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그들이 칭하던 정식 명칭은 대일본제국육군과 대일본제국해군이었지만 보통 칭할 때는 이렇게까지 길게 부르지 않는다. 중국군한국군이 늘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과 '대한민국 국군'이라는 정식명칭으로만 불리는게 아니듯이.

아니면 황군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천황의 군대'라는 뜻이다[2]. 하지만 워낙 이들의 패악질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륙을 점령한 일본 육군의 신멸작전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약탈행위를 보며 軍, 즉 메뚜기 같은 군대라고 비난하고 치를 떨었다고 한다.

2. 이상과 현실

2.1. 그들이 꿈꾸었던 일본군

nohon.jpg
[JPG image (Unknown)]
撃ちてし止まむ
第三十八回陸軍記念日
陸軍省
진격해서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제38주년육군기념일
육군성

야 신난다

이 포스터는 서양화가인 미야모토 사부로(宮本三郎)가 육군성의 의뢰를 받아 만든 것. 전쟁 표어인 '撃ちてし止まむ'[3]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썼다. 당연히 일본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 국가들과 연합군 입장에서는 이뭐병만 불러일으킬 뿐. 참고로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서도 2번째 미션에서 일본군 기지를 잘 뒤지다 보면 벽에 있는 이 포스터를 볼 수 있는데 해당 미션에서는 화염 방사기도 나오니 소각하면 시원치는 않지만 탄다.

2.2. 현실의 일본군

mmmm.JPG
[JPG image (Unknown)]
모두 도망쳐! 강력한 중(重)(中)전차가 온다!!

거론한 전차는 M3 스튜어트인데, 스튜어트 전차는 경전차다. 경전차일 뿐인데도 스튜어트는 일본군의 주력 중전차보다 강력하고 기계적 신뢰성이 높았으며, 일본군의 대전차포는 이것도 잡기 버거웠다(...).

"일본군의 행동과 전술은 잡병수준이다. 단체로 모여서 돌격밖에 할줄 모르며 제대로된 중화기도 없었다. 악에 받쳐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력이라는 말도 안되는 힘으로 화력 차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존 바실론

"장군님. 저는 이러한 전투 방식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거나 스스로 자결을 기도합니다."
― 미국 해병대 제1사단 밴더크리프트 소장이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뒤 해병대 사령관 홀컴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 中.

" 일본군한테 중화기란 단지 장식품일 뿐이다. 그들은 정신력의 일본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소위 '야마토 정신'의 정체이며 우리 나라에 대한 경멸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번 전쟁으로 그들도 무엇인가를 깨닫겠지만 그러기까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클 것이 두렵다."
― 미국 해군, 과달카날 전투보고서.

"모두들 안심하라. 저들은 헛된 망상에 빠져 온갖 병영부조리로 인해서 내부로나 외부로나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 이제 우리의 승리가 눈 앞에 있다!"
장제스근데 국민당이 할 얘긴 아닌 거 같다[4]

한 마디로 적군인 미군중국군조차 "쟤들 저러면 안될 텐데(...)" 하고 걱정할 정도였다라는 것. 한 마디로 답이 없다

미군이 보기에는 일본군이가진 그나마 제대로 된 무장은 군복 말고는 없었다고 말할 만큼 개판이었다. 물론 그 군복 역시 제대로 된 품질을 보장하지 못했다. 지금 시점으로 봐서는 도대체 이런 군대로 어떻게 아시아에서 깽판치고 다녔나 싶을 정도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은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개발도상국이었지 선진국이 아니었으며 실제적인 국력의 격차는 유럽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즉 그냥 동네 힘센 사람 1. 그나마 서구열강들이 자기네들 방식의 발전을 이뤄놓았기에 말이 통하는 상대로 인식한 것이었다.

사실 일본군이 아시아를 재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군대가 제대로 근대화/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탄탄하고 강대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10년,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넘어가게 될 정도로 경제력이 커진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당장 1919년의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20%까지나 됐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측으로 가입했었으므로 이러한 이점을 누렸으며 이는 일본이 소위 '문화'통치를 할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된 것.

명목 GDP 자체는 중국이 아시아 1위였지만 그게 일본처럼 제대로 근대화되고 기업화된 경제력이 아니라 단순히 인구가 많아서 1위였다는게 문제였다. 물론 서양문물의 우수성만 내세우고 '제국주의'를 힘입어 아시아를 식민화시켰던 당시 서구열강들을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도 중국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 이미 사문화된 중화사상을 그대로 유지한 채 미국과 영국같은 열강을 대우했다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에서나 통할 수 있었던 정책을 그대로 서구열강에 대입시킨 것은 자폭 그 자체였다. 미국이나 서구열강이 자신들의 중화사상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은 청대부터 내부의 문제와 열강의 침략정책으로 국력이 약화되어있었고,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중국의 국력은 지방별로 분열되어 중일전쟁 발발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중국은 실질적인 경제력면에서는 일본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특히 이런 오합지졸 군벌들이 심지어 중일전쟁 중에도 완전히 따로국밥으로 놀았던지라 중일전쟁 당시의 중국은 사실 하나의 나라로 엮어서 보면 안되는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일단 아시아에서는 최강이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이지만 1919년의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20%였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보여준 판단력 역시 그렇게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어김없이 203고지 전투같은 삽질도 보여준다그 삽질이 당시 일본군이 동원가능한 총 군인 숫자의 6분의 1을 날려먹은것이 문제(...). 당시 시점에서 육군 선진국인 프랑스, 독일도 훗날 참호전에서 병사들이 녹아내린 것을 보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 그래도 이 때는 언플이나 포로에 대한 대접, 보급로 확보 측면에서 괜찮기라도 했다. 심지어 적에게 포로로 있다 잡힌 병사들에 대해 딱히 기밀을 분 게 아니라면 터치하지 않았고, 칭찬할 게 있으면 훈장도 줬다.

그러나 일본은 지속된 승리로 스스로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국의 역량을 과신했다. 보통 그 시점을 대략 1919년 시베리아 출병으로 잡는다. 급격한 근대화의 여파로 이어진 군국주의 체제에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었다. 결국 일본은 중국에서 이들의 역량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전선을 늘렸으며, 끝내는 끝판대장 진주만 공습을 해버리며 급격히 그 허실을 드러내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아시아 최강이었다는것으로 이들은 자랑할수는 없다. 탈아시아 타령을 하면서 수준문제로 아시아내 타국가들을 들먹였지만 사실상 본인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탈아론에도 언급되는,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좋은 친구들의 발 끝도 못 따라가던게 실상이었다. 이들이 당장 '탈아입구'론을 자랑할 수 있었던 이유중의 하나도 당시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최고의 경제성장을 이뤘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역구 짱이라는 이유만 가지고 저렇게 거들먹거린 것이다.

3. 굴욕의 역사

3.1. 리즈 시절(?) 일본군

근대 일본군의 사상적 배경은 조슈번의 오오무라 마스지로(大村 益次郎)로부터 시작한다. 네덜란드유학하여 근대적 체제를 공부한 그는 신분의 차이에 상관없이 장교를 양성하는 체제와 프랑스를 본뜬 육군, 영국을 본뜬 해군을 기초로 한 국민개병제를 일본군의 모델로 삼았다. 그가 조슈번의 장교로 취임하면서 그가 지휘한 군대가 무진전쟁에서 도쿠가와 막부군을 격파하면서 오무라의 구상이 옳음을 증명하였다.

물론 조슈번군의 주력은 여전히 아시가루, 장교는 상급무사들이 차지했다. 농민들은 구식의 머스킷을 가지고 향토방위군 정도의 임무만 맡았다. 신분에 상관없이 편성된 기병대(奇兵隊)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무사와 농민은 전투능력에 있어서 천지차이라는 인식을 가진 때에 이런 결과를 보인 것 자체가 혁신이었다. 덕분에 오오무라는 사무라이의 특권을 박탈하고 전국민을 무장시키는 사상에 반감을 가진 초슈번 무사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하지만 그의 동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기도 다카요시 등은 그의 구상을 받아들여 일본군을 창설하는 데 힘을 바친다.

에도 막부가 쓰러진 1868년 말, 덴노의 도쿄 행차를 호위하기 위해 각 번에서 차출했던 어친병(御親兵)을 1870년에 상설편제로 전환하였다. 이는 각 번들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상비군을 해체하기 위한 배경으로써 덴노 직속의 무력을 조직하려는 용도였고 총 병력은 8,000명에 달했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소수이지만 당시 일본의 번들 치고 독자적으로 이만한 병력을 원정에 내보낼 능력은 없었다.

서양식의 군복을 입고 막부에게 넘겨받은 최신형 샤스포 소총을 장비하였던 어친병의 무력을 배경으로 메이지 신정부는 폐번치현을 단행, 봉건제의 잔제였던 번을 해산시켜 현으로 만들어 중앙집권화시켰으며 각 번들이 보유하던 소총대포들이 중앙 정부로 넘어온다.

내전이 막 끝난 상태에서 다수의 신식무기와 훈련된 병력이 각 번의 손 안에 있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폐번치현이 이루어진 데에는 어친병의 존재 말고도 각 번들의 재정상태가 전쟁과 흉작으로 크게 악화해 경영난에 시달리던 점도 컸다. 특히 구 오우에쓰열번동맹 소속 번들은 신정부에 막대한 배상금을 바쳐야 했으므로 번정부가 경영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따라서 폐번치현 이전에 이미 신정부에 권한을 양도하는 번도 소수 있었다. 다만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츠마번의 시마즈 히사미츠만큼은 이 폐번치현에 크게 반발했으며 매일 불꽃놀이를 하는 형태로 항의를 표시했지만 끝내 포기한다.

1871년에는 진대병(鎭臺兵)을 창설한다. 진대병은 이름 그대로 국내의 내란에 대비한 존재로써 요새를 기반으로 주둔하며 수비 위주의 전략을 구사하는 프랑스식 사단편제였으며 구 무사들이 생활고로 점차 여론이 나빠지던 시점에서 국체 수호를 위한 진압무력의 성격이 컸다. 초창기에는 동경, 오사카, 히로시마, 센다이의 4개 진대를 편제했고 징병령 발효 이후로는 병력이 늘어나게 된다. 진대병 창설에 따라 1872년 5월에 어친병은 폐지하고 근위사단으로 개편한다.

1872년 11월에는 1927년부터 병역법으로 바뀐 징병령을 발효하면서 무사 위주로 돌아가던 국군이 평민 병사로 충원되고 서구 유럽의 전례를 따라 덴노를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유신의 주역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육군대장에 임명하여 근대적 군대의 체제를 갖춘다. 뒤이어 1873년에는 각 번에서 생활하던 무사들에게 신정부에서 주던 월급을 정지하는 질록 처분을 단행, 동원의무에서 해제시킨다.

당시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 무사들이 평민보다 전투력에서 우월하다는 점을 들어 무사들 중심으로 군대를 꾸려나가는 이른바 강병(强兵)체제를 주장했지만 이지 6년의 정변으로 사츠마번 출신이 대거 공직을 사퇴하고 낙향하면서 국민개병제가 정착한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초슈번과 달리 사츠마번은 전군이 사무라이였고 이들이 큰 활약을 했기 때문에 평민의 자질을 무시하던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분노한 무사들로 사족반란은 빈발했다. 진대병 체제가 효과적으로 기능하여 대부분의 반란은 진압당했지만 최대의 반란인 서남전쟁에서는 고전했다. 사츠마군의 발도 돌격에 정부군이 도주하는 추태를 여러 번 보였지만 결국 화력에서 앞서는 정부군이 승리하여 근대식 일본국군의 제도가 비로소 완전히 정착한다.

초창기에는 프랑스식 육군을 지향했지만 1870년에 벌어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참패하면서 프로이센식 군사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교관으로 맥켈을 초청하고 프로이센으로 수뇌부가 유학을 떠나면서 일본육군은 1886년에는 완전히 독일식으로 개편한다. 청일전쟁에 즈음해서는 내란의 우려가 사라지고 대외원정의 필요성이 늘면서 구 진대병을 독일식 사단편제로 바꾼다.

청일전쟁때는 일본군이 본격적으로 위용을 나타냈다. 이미 청나라과의 일전을 대비하고 엄청난 양의 예산을 쏟아부은 일본군은 지지부진한 개혁과 지리멸렬한 전술로 무장한 청군에 압승을 거두고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뒤이은 러일전쟁에서 세계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규모의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한편 쓰시마 해전에서는 T자의 ─선에 아군 함대를, │선에 적 함대를 위치시키는 기동인 화력집중방식으로 러시아 발트 함대를 고기밥으로 만들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학익진?

위 일본군의 전술은, 보통 군함의 화력을 가장 많이 집중할 수 있는 방향이 측면이므로 이런 식의 기동으로 아군은 적 함대 선두에 전함대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고 적함은 선도함 한 척의 그나마도 절반의 화력만이 유효하다. 이 전술은 전열함시대부터 이어져온 전통적인 필살 전술이지만 각 함간 통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유효사거리가 짧았던 근대에는 완벽하게 성사시키기 어려운 전술이라 성공사례가 적었다.

이 쓰시마 해전은 함포 사거리의 중요성이 처음으로 드러난 해전이었으며, 이때의 전훈을 받아들인 결과로 자잘한 중소구경의 무장을 생략하고 대구경 주포에 올인한 드레드노트전함이 등장하면서, 거함거포주의 시대가 열린다. 이러한 일본군의 상승세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원인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영미가 일본을 뒤에서 밀어준 것이 가장 컸다.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 보급품 조달문제가 컸다. 전쟁 끝나고 보급품이 조달되었을 정도. 일본은 승리하긴 했지만 사상자 수는 일본군러시아군보다 배는 많았고, 전쟁자금을 무리하게 끌어 써서 빚더미에 앉게 되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이 발행한 차관을 포함한 외채가 총 1억 3000만 파운드(약 13억 엔/당시 일본의 연간 조세수입이 2억 6천만 엔)였는데 러일전쟁 총 전비가 18억 2,629만 엔이었으니 전비의 65%가 외채인 완전한 빚잔치 전쟁이다, 그리고 더 웃긴 건 이 외채를 다 갚은 게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때였다는 것이다.

3.2. 막장의 전조

일본 제국의 성장세에 세계 각국은 일본군의 높은 사기와 신사적인 태도, 절도 있는 자세를 높이 평가했고 러일전쟁 중 조선인들은 청군, 러시아군과 달리 민간에 피해를 안 주며 꼬박꼬박 대가를 내 식량을 사고 노역을 부리는 일본군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하지만 승기가 굳어진 러일전쟁 말기부터 강제적인 식량 공출과 무임금 노역 강제동원은 이들이 결코 신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일본군을 높게 평가하던 세계 각국은 정작 203고지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근성론에 경직되어 있고 융통성 없는 사고방식에 찌든 일본군의 실상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청일전쟁 이전 1873년의 대만 원정에서부터 나타난다. 이 때는 정부의 방침을 무시하고 육군사령관이 독단으로 파병하고 청일전쟁 중 평양전투 때에는 이틀치 소총탄약만 남은 상황인데도 추가보급을 안 기다리며 닥치고 총검 돌격(!)을 해댔다. 문제는 그렇게 멍청하고 위험한 짓을 했는데도 이겼다는 것이다. 이런 일본의 승승장구는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에게 패할때까지 계속되었다. 개별 전투로 따지면 203고지 전투가 일본군의 최초 삽질이긴 하지만, 러일전쟁은 이긴 전쟁으로 인식되었다.[5]

이러한 일본군의 승리는 주변국이 워낙에 허접해서(...) 벌어진 승리였는데, 이는 결국 일본군이 실패를 통한 문제점 파악을 하는데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연승에도 청일전쟁에선 삼국간섭으로 요동 땅을 모조리 토해내야 했고, 러일전쟁에선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전비 소모와 희생자를 내면서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이는 총력전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전쟁 1번에 국가가 휘청일 만큼 국력이 낮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러시아 견제를 위한 영국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몰라도 러시아와 싸우기란 무리였다.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러일전쟁은 영국과 미국 양국이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 일본을 용병으로 고용해서 싸우게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전시국채를 영국과 미국 양국이 인수해주는 덕분에 5년 예산을 넘어서는 엄청난 전비를 조달할 수 있었다. 1904년 일본의 1년예산은 3.27억엔이고 러일전쟁의 전비는 17.2억엔(...)이었다. 그 밖에도 영국과 미국에 의한 온갖 경제적 또는 외교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긴 것이다.

실제로 종전 당시 러시아는 육군이든 해군이든 추가적인 병력충원이 가능했던 반면 일본은 겉으로는 크게 이겼지만 그 사이의 피해로 전력이 극도로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종전협상 당시 러시아 쪽은 피의 일요일로 더 전쟁을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강경한 태도로 나왔고, 일본 정부는 이겼다라 생각해서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의 상태를 알고는 서둘러 전쟁배상금을 포기하고 종전을 선언'''했다. 당시 동맹국이던 영국과 미국에서 추가적인 전시채권의 구입을 거부한 탓에 만약 2달만 더 전쟁했으면 일본은 국가파산할 위기였다. 한 마디로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꼴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런 경제적 손해를 만회하기 위하여 유일한 전리품인 식민지 대만조선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군인출신 총독을 내세운 강압적 지배의 이면에는 이런 까닭이 있다.

일본군의 전쟁목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창한 주권선이익선 개념에 따른다. 주권선은 절대로 침해당해서는 안되는 주권영역, 즉 국경과 같은 개념이고, 이익선은 일본국의 이익을 위해 경제·군사적 동맹 또는 우방으로써 일본의 이익을 위해 유지할 권역이다.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제2의 아시아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할 여지가 큰 청나라에 대항해 주권선으로 일본 본토를, 이익선으로 한반도를 설정하였다. 이것을 위해 조선이 서구형 주권국가로 나서도록 강요했다.

물론 이렇게 한 것은 선의로 한 것이 아니었다. 진짜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유지하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일본에 기대도록 만들 만해서였다. 원래 정한론이 에도 시대 말기부터 지속적으로 일본의 여러 요인들이 주장한 이론이며 애초에 메이지 유신의 유신지사란 사람들도 시기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정한론 자체는 합의가 완료된 상태였다. 다만 당장 하는가 잠시 연기하는가의 견해차 등의 여러 문제로 난 서남전쟁을 생각하면 일본의 선의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정상적으로 통상하자는 인간들이 운요호 사건 같은 것을 일으키면서 원인을 "일본의 통상요구를 조선이 거절했으며 그 대응방식도 졸렬했기 때문"이라는 억지를 뒤집어씌우겠는가?

이에 청나라는 일본의 행태에 대항해 구시대의 조공책봉체제 아래서 조선이 속국으로 남도록 일본과 암투를 벌였다. 이 대항이 청일전쟁으로 발전했고, 러일전쟁 또한 이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 주권선은 한반도와 대만, 이익선은 만주 및 중국으로 확장했다. 주권선의 수호는 이익선의 유지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익선의 유지를 위해서는 주변 강국을 외교 및 전쟁으로 굴복시켜 이익선의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에 따라 만주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워 통치했고, 중국을 침공했다. 이 과정에서 더 이상의 일본의 확장을 경계한 미국의 압력이 커지자, 그에 대항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끝내 1945년까지의 일본의 표면적인 전쟁행동은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의 유지 및 확장에 따랐다.

하지만 이러한 주권선과 이익선 드립은 결국 그럴싸한 침략 명분일 뿐이었다. 청나라나 러시아와 같은 일본 입장에서의 외세로부터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에 의거하여 국가를 유지하려면 군비를 증강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이 비대해져 군이 정부를 위협할 수준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효시가 되었다. 또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은 전략이 공세로만 치우처져 역량이 안 되는데도 무리하게 공세를 밀어붙이고 방어를 해야할 시점에도 공세를 추진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논리는 쓰시마 해전의 교훈과 결합하여 수많은 전투로 어느 한 쪽의 모든 역량이 소진되어 항복하거나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싸운다는 현대전의 개념을 한 번의 전투에서 이겨 상대를 굴복시켜 협상에 나오게하여 전쟁을 아예 끝낸다.로 크게 왜곡시켜 총력전과 소모전으로 흐르는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여 한 번의 전투로 전쟁을 아예 끝내는 '한타싸움', 함대결전사상에 집착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 쪽은 움츠러드기는 커녕 도리어 죽자고 덤벼들었으니... 후술하겠지만 일본 안의 파벌과 얽힌 일로 막장이 일어난 측면도 있다.

3.3. 군부의 폭주

게다가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대공황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니, 일본 정계가 민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하자 군부는 수 없이 정치테러를 벌였다. 당장 이 당시 일본은 한국과 대만 이외에 식민지는 거의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다 한국 역시 그들에게 나긋나긋한 곳이 아니었다. 결국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게되니 저지른 짓이었다.

이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군인도 예외는 아니라서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테러로 올 암살 우려 때문에 그를 아낀 상부에서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바다로 피신시켰을 정도. 시망의 징조가 보이지않는가

이것도 모자라 쿠데타를 기도하는 등 정권 장악의도를 드러내 갔고 끝내 5.15 사건2.26 사건이 벌어졌다.

2.26 사건은 1936년 2월 26일 22명의 덴노 추종자 황도파의 전 현직 청년장교들이 1,400여 명의 사병을 이끌고 '국가의 전면적 개조와 군사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일으킨 쿠데타다. 그들은 내각을 습격해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상과 사이토 마코토 내무대신 와타나베 교육총감 등을 살해하고 총리관저와 국회 의사당, 육군성을 포위했으나, 사흘 뒤의 진압으로 미수에 그쳤다. 끝내 도파는 박살나고 내각 총리를 지지하는 제파가 군부의 주도권을 잡았다. 참고로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 대장 출신으로 조선 총독을 지냈고, 무단 통치를 무늬만 문화 통치로 바꾸기도 했다.강우규 의사에 의해 폭탄공격을 당했던 그 사이토 맞다.

여하튼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은 정권장악에 성공한다. 그리고선 그 때까지도 어렵던 경제사정을 "식민지를 늘려 수탈하자!"라는 방침으로 풀려 한다. 처음에는 중국 침공으로 풀려고 했으나, 미국이 , 석유 등의 금수조치를 주요 골자로 하는 제재를 가하자 당시 이들 품목 소모량의 80~90%를 미국 수입에 기대던 일본은 궁지에 몰렸다.

문제는 이걸 타파한답시고 진주만 공습 결정을 내리는가 하면 필리핀동남아시아로 쳐들어갔다는 점이다.[6]

그래도 침략행위를 나름대로 포장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일본은 "서양열강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 공영권을 결성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이게 얼마나 골때리는 코멘트인가 하면 일본을 개화하는데 일조한 중심세력 가운데 아시아를 긍정적으로 본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기이한다. 일본 돈에 등장하시는 어떤 천하의 개쌍놈은 아예 "중국이나 조선 등은 일본에게 있어서 하등 도움도 안되는 나라임. 내다 갖다버리는 게 일본에게 이득이삼."이란 망언을 퍼부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자행한 온갖 수탈과 횡포를 보면 알 수 있다. 애당초 일본군한테 있어서 식민지는 전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고, 자국민이 아닌 모든 타국 국민들을 멸시했다. 그렇다고 자국민도 그다지 대접이 썩 좋은것도 아니었다. 당장 츠야마 살인사건 항목에 서술된 주석을 보더라도 알겠지만 징병검사에 떨어져 군복무를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비황국신민' 즉 "너는 일본국민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만 하더라도 얼마나 제 정신이 아닌 집단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들어난다. 이들이 보기에는 지적장애가 있어 징병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화가인 야마시타 기요시도 비황국신민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종전 때까지 계속되는데 (조선을 떠나며)란 책을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만주 작전으로 소련군이 북한에 입성하자 당장 군인 가족들 외에는 모두 북한땅에 남겨둔 것이라든지[7], 귀향민들에 대한 재산압류라든지, 잉여집단으로 취급한 것이라든지..하여간 말이 많다. 심지어 한 귀향 일본인은 인터뷰에서 본국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식민지에서 그렇게 착취해먹고 살았으니 당연히 받는 인과응보지 뭐."라고 하는 말들이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을 정도.

일본군의 만행은 이들의 점령지에서는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아시아 각국이 일본한테 괜히 이를 가는 게 아니다. 최근에 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가 뭉치자고 주장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탈아입구를 외친 작자들이었다. 상술된 것이지만 일본을 개화한 인물들 중 아시아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한 인물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여기에 이미 이들은 서양문물에 경도된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의 번드르르한 포장 뒤에서 뭘 꾸몄는지의 증거로 쇼와 18년 (1943년) 5월 31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한 '대동아정략지도대강(大東亜政略指導大綱)'이 있다. 당시에는 군부와 정부에서 꼭꼭 숨겨서 전후에야 드러난 이 계획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말레이, 수마트라, 자바, 말레이 반도 동쪽의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의 영토인 르네오, 현재 술라웨이라 불리는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자바섬 북단에 위치한 레베스는 대일본제국의 영토로 만들어 중요 자원의 공급원으로 개발하고 민심을 파악하는 데 주목한다. (중략)... 이들 지역을 제국 영토로 삼는 방침은 당분간 공표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아시아 해방 그딴 거 없고 죄다 식민지로 삼겠다는 소리다.

이거 어전회의, 그러니까 덴노의 면전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이것은 "흑흑 우리 덴노께서는 나쁜 군부놈들 거짓말에 속으셨스므니다. 징징징" 같은 변명이 얼마나 개드립인지 정면으로 반박하는 증거다. 그리고 쇼와 18년은 1943년'' 이다.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에 이어 비스마르크해 해전에서도 탈탈 털리고도 두 달된 시점'''에서 저런 망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조 히데키가 수상일 때 쯤에는 일본은 완벽한 군국주의 국가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의 길을 간 원인은 주권선과 이익선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군사력을 증대하였기 때문이다.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느니 주변에 약해 보이는 놈 좀 패서 식민지로 삼으면 된다는 생각, 즉 이익선의 확장을 중시해서였다. 이렇게 주변국을 뜯어먹으려고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은 군대를 키워 놓으니, 국민들도 "이제 이만큼 키워줬으니 어디 가서 한 놈 족치고 식민지 만들 때지...?" 하는 기대심리를 품었다. 그야말로 군대와 국민이 합심해서 강도짓을 하자고 나섰던 것이다.

4. 편제

일본군/편제를 참고 바람.

5. 문제점

5.1. 개관

구 일본군은 유신의 인사들 중 군 창설 인사들이 구미, 유럽 등지에서 근대 군사 사상과 개념을 일본 사회에 맞게 변형시켜 들여왔으나 이것이 변질해 폐습으로 점철되어 결국 태평양 전쟁으로 그 비참한 결과가 드러났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일본군은 그 실상을 보면 매우 열악했으나 식민지 치안유지군이 상대이거나 제대로 방비가 안되있거나 등으로 운이 너무좋다못해 상대방의 상황이 너무 나쁜 탓에 승승장구했다. 사실 중국 전선에서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몽고-만주 접경에서 소련군을 얕보고 선빵을 날렸다가 개발살이 났다. 이것이 바로 할힌골 전투. 이때 바로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일본군은 자신들의 패배로부터 학습을 하지 못했고, 별 다른 개선점 없이 그냥 여태까지 하던 그대로 쭉 밀고 나가기만 했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병림픽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은 당시에 투입된 소련군은 매우 정예였다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대숙청의 영향을 받아서 당시 상황에서는 정예급이라고 보기에는 문제점이 많았고, 이후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이 훈련을 했으며, 모스크바 전투때는 다른 정예병력이 개발살난 후라서 유일한 정예병력으로 남았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동원된 후 독일군을 패퇴시킨 전력으로 성장한다.

당시 영국독일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르는 탓에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미국도 본격적인 전쟁은 아직 안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아예 본국이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다만 영국의 경우 전황이 호전되고도 적어도 무장에서는 그리 바뀌지 않았다. 영국은 2차대전 내내 아시아 전선을 퇴역 병기의 처분장으로 봤다. 유럽 전선에서 사용 불가로 판정한 병기들을 일본군 상대로 아주 잘 써먹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2파운더 대전차포마틸다 전차.

중국의 경우 일본군보다도 병사들의 질이 훨씬 형편없었고, 지역에 따라 군벌로 나뉘어서는, 심지어 자기들끼리 싸우는(!) 때가 더 많아서 그야말로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을 만큼 막장이었기에 초창기에는 일본군이 대승하는 듯했다. 실제로도 일본군은 여러번 대승을 거두긴 했었다.

하지만 장제스 직속 정예부대는 독일식 훈련과 장비를 보유했으므로 상하이 전투나 우쑹 등에서 중앙군은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물론 이는 콘크리트 벙커토치카참호로 탄탄하게 구축한 독일식 방어선의 정면(...)으로 닥돌한 일본군의 전투사상 덕이었지만, 실은 일본군이 닥돌했던 장제스의 방어선은 그냥 방어선이 아니라 독일에서 파견된 중국고문관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직접 감수한, 그야말로 프로의 방어선이었다. 하지만 이정도 우주방어를 구축하고도 1차대전식 돌격만 반복해대는 일본군에게 결국 패배한 것은 중국군의 떨어지는 질과 용병술이 큰 몫을 했다. 사실 이 정도 방어선이면 일본군의 공격을 무난히 격퇴했어야 정상이다. 군사강국의 고문관이 구축해준 실전 지향적인 방어선, 거기에다가 중국 측이 병력에서 3배나 우위에 있었음에도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 한것은 중국군의 질적 문제가 가장 컸다고 볼 수밖에 없다.[8]

어찌되었거나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좋았던 시절에도 상당한 피해를 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신멸작전을 일으켜 광활한 중국 본토에서 민중의 지지를 전혀 못 받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병력을 넣어봐야 연안지대의 점과 선, 그것도 상하이, 천진 같은 대도시와 각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철로 주변 정도만 점령할 수 있었다. 이에 후방의 드넓은 농촌지대에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고, 장제스의 국민당은 깊숙한 내륙지대에서 버텼다.

결국 일본군은 국민당, 공산당, 군벌을 섬멸해서 전쟁을 끝내기엔 중국 땅이 너무 큰 관계로 병력부족과 병참선의 압박이 심하고, 그렇다고 철수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그야말로 막장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중국 안쪽으로 진군하면 할 수록, 보급선이 길어져서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고, 지형지물도 모르는 곳에서의 전투는 게릴라에게 기습당하기 딱 좋았다.

게다가 중국군에게 계속 이겨봤자 별 소용이 없었던 것이, 미군영국군이 점차 전투력을 회복하고 보강하여 달려들자 전사자 교환 비율은 심하면 1:10, 1:20, 후반기 맥아더의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1:40에 육박했다. 여기서 일본군은 미군 40만 명 vs 일본군 40만 명의 1:1 매치에서 미군에게 전사자 1만여 명을 안겨주고 39만여 명이 전사하며 학살당하는 신세로 전락, 적군은 죽여보지도 못 하고 그야말로 시체의 산을 쌓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미군은 기계화부대를 중심으로 기동전을 펼쳤지만 일본군은 보병 위주의 부대로써 그러지 못 했고, 게다가 방어선을 제대로 형성할 기회도 갖지 못한 상태로 각개격파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적에게 자살적이고 즉흥적인 돌격을 펴 일방적으로 사살도 겪었다. 이를 일명 반자이 어택이라고도 한다. 이는 일본군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총칼을 앞세워 돌진할 때의 두려움 또는 몇 달을 굶고 폭격에 시달려 해골만 삐적한 상태로 비실비실 돌격하다 이쪽의 우월한 화력에 전멸하는 실상을 비꼬는 말이다.

한편 초반에 뜨거운 맛을 본 미군 사이에서는 일본군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슈퍼맨, 정글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인식이 컸지만 수기나 포로들의 고백을 통해서 이놈들도 인간이구나라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미군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군의 저항이 극심했기 때문에, 미군은 가면 갈수록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고, 결국 그것은 일본군의 피해를 늘리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설령 일본군이 근접전에 들어갈 만하더라도 일본군이 주로 총검이나 군도를 썼다. 물론 권총도 들었지만 남부 권총을 비롯한 일본 권총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있으나 마나한 물건이었다. 거지같은 신뢰성, 빈약한 사용 탄약, 유리같은 내구성 등 여러모로 군용으로 쓰면 절대 안되는 물건들이었다. 오죽하면 남부 버리고 FP45 리버레이터같은 권총같지도 않은 걸 주워다가 썼을까?

반면에 상대인 미군은 수류탄기관단총으로 응수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화력 자체가 미군에게 현저하게 밀렸다. 게다가 미군은 반자이 어택을 우려하여 더욱 확실하게 일본군을 쓸어버렸다.

어쩌다가 반자이 돌격으로 미군의 진지에 돌입하는데 성공한데다, 또한 운 좋게 미군이 일본군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무장을 한 상태였더라도 일본군이 후나사카 히로시가 아닌 이상 육박전으로 돌입하면 미군들이 평균적으로 일본군보다 체격이 더 좋았고, 더 잘 먹고, 훈련 수준도 뛰어나 주먹질과 야전삽만으로도 칼을 든 일본군을 쉽게 제압했다. 심지어는 군도를 든 일본군 병사가 미군 진지를 야습했는데 오히려 맨손의 미군 병사에게 멱살잡혀서 내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실례까지 있다(...).

오히려 미군이 야밤에 반자이 어택을 펴서 일본군 진지를 날려버린 적도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일본군의 정식 작전교리"미국, 영국 놈들은 겁쟁이. 작전 계획을 바꾸려는 놈들은 참모감이 못 됨. 닥치고 착검돌격.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근성으로 어떻게든 된다!"였다.김성모냐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일본군의 편제나 전투교리를 따진다면 훌륭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군대에 가깝다. 일본군은 제1차 세계대전 혹은 그 이전 제국시대, 과장하면 전국시대 방식의 전투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서는 죽어라고 전투기니 탱크니 대포니 소총이니 불을 켜고 개발하는 와중에도 혼자서만 철조망과 기관총 진지에 닥돌해서 하루 3km 전진에 몇만씩 죽어나가던 그 시절 전법을 고수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당시의 일본인이 전부 야마토 정신과 무사도 운운하는 돌머리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제정신인 사람들도 눈꼽만큼은 있어서 실전에 투입시킬 만한 전차와 전투기를 개발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공작기계들을 서양의 수입에 기대야 했던 당시 일본의 공업기술로는 치하제로센의 대량생산 정도가 고작이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못 만든 불량품들이 넘쳐났다. 끝내 일본군의 높으신 분들도 절반 정도는 어쩔수가 없어서 1차 세계대전식의 전술을 고수했다. 하지만 자신들의 역량은 쓸데없이 과대평가하고 적의 역량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면서[9]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어처구니없는 마인드로 무작정 전쟁을 벌이고, 그 지경으로 박살나면서까지 국민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며 항복하지 않은 것은 1차 세계대전식 전술을 고수한 것 보다 더더욱 무능하고 질이 나쁜 짓이다.

일본에 징병자원인 남성은 그럭저럭 충분히 있었지만 정작 군인으로 육성할 만한 제대로 자질을 갖춘 사람이 적었고, 일본 경제 자체가 농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서 평소 종사하는 산업 인력의 징집이 산업 자체의 약화로 이어지기 십상이었으니 문제였다. 일본군식민지에서까지 지원병을 모집하고 학병 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로 전장에 끌어낸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에초에 일본에 쓸만한 인간이 부족하니 식민지의 인재들까지 끌어다가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게다가 농사짓는 농부를 전장에 무작정 끌어다 총을 쥐어주면 당근 잘 싸울리가 없다. 전쟁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상징으로까지 여기는 일본군도와 긴 총검은 일본군의 기관총 편제와 1만 정만 생산한 1차대전식 기관단총, 75mm 야포가 주력이었던 사단 포병연대의 편제를 따져보면 왜 그랬는지 추론이 가능하다. 참고로 미군과 독일군의 2차대전 중 포병연대 편제는 105mm 견인곡사포가 주력이었고, 155mm 견인곡사포나 150mm 중포를 상설편제에 넣었다.

그런 고질적인 화력문제를 일본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8살 때부터 준군사훈련을 시키는 걸로 해결하려고 했다. 애초에 거국적인 징병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에서 애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대체 어디에 써먹으려는지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여러 문제점을 현대에 훌륭히 재현하는 한 미친국가가 있다. 유소년기부터 군사훈련이라든가, 정신력 강조라든가, 병사 및 장교의 질 하락이라든가.그러고보니 병영부조리나 밥 쫄쫄 굶거나 고작 3발 쏴보는거 등등 생각하면 일본군과 판박이네? 전쟁나면 사격실력이 끔찍해서 반자이 돌격하는거 아니야?

결국 이러한 대부분 문제점은 일제의 역량에다가 일본군 상부, 장교세력의 멍청이들 때문에 더 증폭되었다. 애초에 제대로 된 지휘관들이었다면 서술된, 그리고 서술 될 모든 문제점을 조장하거나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고, 애초에 중일전쟁을 하는 가운데서 미국을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군의 막장 행각은 좋은 유머소재이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미친짓들을 하다하다 사람과 물자가 부족해 결국 한반도에서 사람과 물자를 강제징병과 위안부 강제투입 및 강제 수탈을 해서 갖다 쓰는 더 미친짓으로 발전하기까지 했으니 한국 입장에선 분노할 일이다.

5.2. 일본군의 무기체계

전쟁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자원은 바로 무기다. 그런데 일본군은 이 무기 체계부터가 벌써 막장이었다. 이하 본문에서는 조직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도록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의 무기체계일본군/무기를 참조.

5.3. 시대에 뒤떨어진 사관학교의 교육과정

결론만 추려서 말하자면 총 든 사무라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육군육군사관학교, 일본군 해군해군병학교라고 하는 장교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교육과정은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이 많았다. 이는 "장교=사무라이니까 전통 사무라이 교육을 토대로 장교 교육을 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인식 때문이었다. 참고로 원래의 사무라이들은 글을 모르는 일자 무식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비롯한 여러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들의 대부분은 문맹들이었다)

물론 귀족 출신 전국 다이묘들은 꽤 교육을 받았다. 가령 도쿠가와 이에야스다케다 신겐 등이 있다. 전국통일 이후 도요토미는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민들이 사무라이가 될 기회를 막아버리면서 사무라이 계급은 고착화되며, 평화시대에 접어들자 사무라이들은 차별화를 위해 한문을 포함한 학업에 힘쓰게 된다. 승려들이 근근히 전하던 일본의 유학이나 국학은 모두 이런 사무라이 계급출신 유학자들에 의해 에도시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에도시대 이후로는 사무라이 교육하면 검술뿐만 아니라 유교경전이 중요시된다.

육군은 특히 구시대적 교육을 고수했는데,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사무라이 정신을 기른다는 명목아래 필기구를 붓으로 통일하고, 만년필이나 연필 등은 사용을 금지했다. 게다가 볼펜이 보급된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일본 육군은 긴박한 전장에서도 반드시 지필묵을 휴대하여 작전일지도 붓으로 썼다. 그나마 연필이나 만년필이 없던 다시 말해 붓이나 구식 펜외에는 마땅한 필기구가 없는 시대라면 모를까 이 시기에는 만년필이 존재했고 2차 대전기에는 상술한 대로 볼펜도 존재했다.

게다가 더 웃기는 건 차라리 실용적인 의미에서의 붓글씨라면 모를까 서예를 하라고 했다. 그러니까 만약에 일지 작성을 맡은 하급장교가 급하다고 작전일지를 날림으로 갈겨 쓰다가는 나중에 고급장교에게 크게 갈굼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 이게 얼마나 멍텅구리 짓인가는 서예가들이나 서예를 공부한 이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서예는 절대로 급하게 빨리 쓸 수 있는 필기수단이 아니다. 서예는 실용적인 목적의 글씨를 쓰려는 것이 아닌 일본군이 그토록 좋아하는 정신수양 내지는 교양의 수단이다. 붓을 종이와 직각으로 직립해 차분하고 침착한 마음을 갖고 써야 쓸 수 있는 글이다. 때문에 수백년 전 조선의 승정원 관료들도 매일 바로바로 써야하는 정원 일기는 초서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썻는데비록 그덕분에 후손들이 번역한다고 고생좀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더구나 내가 속한 부대의 안위가 위급한 상황의 연속인 전장에서 서예는 비효율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에 글씨 예쁘게 쓰고 자시고 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급한 상황임에도 갈굼을 먹지 않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서예를 하면 보고가 늦었다고 까이기도 하는 등 정말로 가지가지 했다.

더 웃긴건 그것도 모자라서 벼루와 을 따로 챙겨가지고 다녀야 했다. 즉 즉석 먹물이 없으므로 그때 그때 먹을 갈아야 한다는 얘기. 깨끗한 식수가 귀한 정글에서 물을 낭비하는 것에다 보너스로 울퉁불퉁한 참호에선 벼루와 먹이 떨어지지 않게 놔둘 평탄한 곳이 적다는 불편함도 좀 있었지만, 특히 비나 고인 물에 종이가 젖었을 때 쉽게 번져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물론 연필이나 볼펜 같은 경우엔 물에 젖어도 내용이 번지는 일이 없다. 무엇보다 연필이나 만년필처럼 작게 글씨를 쓰기 어려워서 종이에 쓸 수 있는 글의 분량이 적다 보니 종이의 낭비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현대 전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필기도구인데 일본은 본토 민간인들이 만년필볼펜을 쓰고 다닐때 자국 군인에겐 붓만 쓰도록 강요한 것. 차라리 붓펜이나 후리펜을 보급했으면 좋았을 것을(...)

교육내용의 구식 정도는 더 심각해서, 1차 대전 이후 다른 나라는 전차나 기관총 전술 등 현대전에 적합한 군사교육을 펼 때 일본군 사관학교에서는 기마술이나 검도, 스모가 매우 가장 중요한 교과목이었다. 물론 장교들의 체력증진을 위해 대다수의 사관학교들이 전통무술을 가르치고 있지만. 일본군의 문제는 이것을 장교의 필수인 전술교육이나 기술교육보다 더 중요시 했다는 것이다 '필수'로서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정작 중요한 현대전에 대한 전술 교육등을 등한시하는 그야말로 주객전도가 일어났다는게 문제다. 당장 일본군 사관학교에서는 이런말이 내돌았다. "장교의 덕목은 검술, 마술(馬術), 전술이다."

그리고 정신교육을 한답시고 교과과정의 상당 부분이 군사학이나 군사기술이 아닌 17세기 사무라이들이 공부한 사서오경류였다고 한다.[10]

원래 일제 시대의 교육은 소학교, 중학교 때부터 한문 학습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으며, "수신"이라 하여 유교+군국주의를 가르치는 도덕 과목도 존재했다. 괜히 야마토 정신같은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그리하여 주자어류에 나오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같은 유교경구를 장교들의 머리 속 깊히 박아 두었고 전선에서도 어구에 기반을 둔 작전을 적절히 실현해서 종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물론 주자어류에는 저러라고 쓴게 절대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서오경을 배웠다면 자연스럽게 배우는 손자병법같은 것도 분명 보았을 것인데, 정작 일본군은 병법서인 손자병법에서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손자병법은 분명히 전쟁이 최선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렇기 떄문에 명분이 없거나 국력이 뒤진 상태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극력 피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일본군은 그 반대로 했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그러면서 이상한 것만 왜곡해서 보고 배워서 보급이란 적에게서 얻는 것이라는 말한 사람도 있었다.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적혀 있긴 했지만 그전에 전쟁은 단기로 끝내고, 성을 공격하는 것은 가장 하책중에 하책이라는 말은 상큼하게 씹었다. 더불어 손자병법에도 엄연히 불리하면 자리를 피할것을 권하고 있으나 일본군은 후퇴를 몰랐다. 손자병법에선 미리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승리가 확정된 상황을 만들고 싸우는 것을 강조하는데 말이다.

일본군 해군은 그나마 기계를 다루는 일이 많아서 이런 병맛나는 짓은 안...한 듯하지만, 지나치게 기술 과목을 중시한 나머지 리더십이나 위기 대처능력을 기르는데 소홀했다.

일본군 공통으로 사관학교출신에 대한 엘리트주의는 쩔어서, 비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차별은 엄청나게 심각했다. 당시 기술직 장교들은 학사장교 형태로 배치했는데. 더 웃긴 사실은 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사관학교 출신 장교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비사관학교 출신의 영관급 장교조차 사관학교 출신 소위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니 토목공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관학교 초짜 소위가, 수많은 공사판에서 경험을 쌓은 비사관학교 출신 영관급 공병장교를 지휘하는 경우도 벌어지는 등 군대라기보다는 조폭에 가깝게 운영되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차별이 심한 한국군도 이따구 짓거리 시도라도 했다가는 닥치고 하극상으로 군법회의 감이다. 아니 그전에 계급이 낮는 부사관한태도 막대했다가가 상관한태 박살나는것이 현실이다.

사관학교 외에도 육군대학과 해군대학이라는 고위장교를 위한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있었지만, 문제는 이런 고급기관에서 수석급의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인재들이 바로 츠지 마사노부세지마 류조였다. 이것을 보면 교육내용이 영 허접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마저도 도조 히데키는 3수 끝에 들어간 것으로 유명하다.

5.4. 문제 많은 인사제도

일본 해군의 경우 졸업 후 모든 인사고과를 임관한 뒤의 근무성적이 아니라 사관학교 성적으로 결정했다. 즉, 졸업 성적만 좋으면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대령 정도는 승진을 보장했다. 특히 사관학교에서 포술 같은 병과가 아니고서야 장성진급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이 때문에 장교들은 튀는 행동을 삼갔기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으려고 소극성과 보신주의를 보여주었다.

사실 이런 보신주의 경향은 모든 군대에서 평시에 자주 보인다. 일례로 대한민국 국군만 해도 공군의 경우 조종사 출신이 아니면 장성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육군의 고급 장성은 국군의무사령부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전투병과 출신이며 해군은 거의 모든 장성이 해사 함정병과 출신이다. 일본군의 문제는 이런 인사 고과를 전시에도 했다.

처음부터 성적이 나쁜 사람들은 "내가 요즘 군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게, 최대한 열심히 해야겠어. 근데 나는 성적이 나쁘지? 나는 안 될거야 아마" 하면서 스스로 더 이상의 출세를 포기하고 시간만 때우며 밥벌이만 하려고 드니 적극성을 보일 까닭이 없었다. 실패하기만 하면 쪽박인데 성공해도 그대로 현상유지하는 상황이니 누가 나설까? 진주만 공습이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보이던 소극성과 보신주의는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판단을 내린 장성들을 자기가 출세하려면 남들이 삽질해줘야 하는데 다들 신중해서 출세에 방해되니 너무 소극적이다라고 평가절하한 나구모 주이치였다. 이상의 내용을 고려할 때 일본 해군이 얼마나 복지부동이였는지는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군대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 전체가 이런 식이었다. 고위관료와 판검사 등도 고시성적에 따른 연공서열로 평생 가는 체계로 복지부동과 무사안일 등 온갖 병크를 일으켰다. 참고로 이런 악습은 해방 이후 현재의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남았다. 대한민국 사법부도 2000년대까지는 사법연수원 성적이 인사의 제1기준이었다.

물론 학벌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나라나 비슷한 경우는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일본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고, 많은 부분에서 그렇다. 일례로 대학 부설 소학교부터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간의 차별이나 반목이라든지.

이렇게 애초에 시험 성적으로 진급 상한을 정해놓던 것은 과거의 과거 제도에서나 벌어지던 일이다. 과거 제도에서 빌려온 걸지도 모르지만.

이에 반해 일본 육군은 해군에 비해 성적보다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고, 그런 사람들이 승진에 유리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라는 거지 일본 육군이 성적을 아예 안 봤다는건 아니다. 오히려 서면상의 성적에도 광적으로 선긋기하던 게 구 일본군이었다.

이렇게 된 결과 일본 해군보다는 하급자가 출세할 가능성이 조금 더 있었지만, 그런 기회를 잡아서 육군에서 빨리 승진하는 자들은 물불 안 가리는 호전광들이나 아니면 지휘권을 무시하고 상관을 간섭하는 안하무인적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군사작전에서 무조건 적극적인건 절대 좋은게 아니다. 일례로 상대가 진지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만일 휘하 부대에 그런 방어선을 돌파할 전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포병, 항공전력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합동해서 돌파하는것이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데, 얘네는 그냥 닥치고 돌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일본군이 무모하게 닥돌을 감행한 반자이 어택과 지하 요새를 건설하여 기다렸다가 방어전을 한 이오지마 전투의 전력교환비를 비교해 보자.

만주사변을 획책한 이시와라 간지, 정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조선주둔군을 동원해 관동군을 지원해 만주를 침략한 야시 센주로, 그리고 츠지 마사노부무타구치 렌야 등이 보이는 행태는, 무모함을 적극성으로 포장해 높이 평가한 일본육군의 승진고과 시스템이 낳은 기형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미나가 교지는 사관학교나 육군 대학 성적도 개판이었다. 이놈은 그냥 군인 자체를 안했어야 했다

이러한 시스템하에서 육성된 일본 육군의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전쟁을 수행하지는 못하면서 내부의 적 수준의 병크나 일으키는 떨거지들이었다. 정작 고위급의 자리에 올랐어야 할 진정한 실력자들은 이런 떨거지들 아래에서 복무하며 말도 안되는 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무능한 인간이라도 인맥이나 사상만 맞으면 사고를 쳐도 넘어가고 오히려 멀쩡하고 유능한 자를 잡아다가 일선에서 내몰아버리니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었다.

일본군 똥별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고 이에 맞물리며 병영부조리도 심각한 수준으로 계속되었다. 물론 모든 조직에서 무능한 상사는 일부 있기 마련이고, 모든 군대에서 병영부조리는 늘 나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무능한 상사가 적시에 해임되지 못하였고, 이러한 악습들을 오히려 권장하는 쪽으로 갔다. 결국 일본군의 병영부조리는 거의 정신병적 수준으로 커졌다.

육해군이 각기 보유한 항공대의 경우 장교와 부사관과 병이 모두 조종사에 지원할 수 있는 것은 타국과 동일하였으나, 문제는 임관한 조종사들은 거의 대부분 훈련 전의 계급을 유지했다. 훈련을 이수하고 임관한 시점에서도 계급이 그대로니 계급의 조종사가 나타났다. 그 병 계급 달고 있던 조종사 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사카이 사부로.

설상가상으로 진급에도 대단히 인색하여 병 계급의 조종사가 부사관 계급으로 진급하거나, 부사관 계급의 조종사가 장교 계급으로 진급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앞서 언급한 사카이 사부로도 많은 상급자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승진신청을 넣어준 덕분에 전쟁 말기에 소위로 진급했는데, 이렇게 진급한 사례가 그 이전까지 단 1건에 불과했다. 바로 그 한 명은 무려 그 멍청한 도조 히데키의 아버님 되시겠다. 이 사람은 장군까지 진급했는데, 일본군 특유의 파벌로 인한 진급으로 봐야할듯.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물론 사카이 사부로 스스로도 일본에서 2명밖에 못누린 영광을 누렸다고 서술할 지경이었으니 말 다했다. 그래서 같은 조종사 동기간에도 계급 격차가 심하므로 조종사 내부에서의 차별과 멸시가 심했다.

이런 점 때문인지 일본산 창작물들을 보면 이등병 전투기 조종사가 당당하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실제 일본군의 상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배경이라면 할말 없지만 문제는 현대 전장물에 이딴 어이없는 계급의 조종사가 당당히 등장한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사전조사도 안하고 밀리터리 작품을 만드는 셈이다.[11]

어쨌거나 일본군이 이런 삽질을 하는 사이 영국과 같은 다른 나라에서는 조종사로 임관하면 무조건 최소 부사관 계급을 부여했으며, 미국, 영국, 독일 등은 일단 전투기 조종사가 되면 계급이 낮더라도 기본적으로 소위 임관을 시켜줬다. 이렇게 조종사들에게 타국이 대접을 해준 이유는 어려운 싸움을 하는 격려차원 뿐 아니라 비행기를 정비하는 쪽이나 작전을 명령받는 쪽에 발언권을 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평소 일본군같이 병사들에게 가혹한 갈굼을 하는 곳에서 값비싼 전투기를 이등병에게 주면 전투기째 들고 탈영이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이런 무기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장교 계급을 주는 것은 앞서 말한 이유 외에도 대접을 해줌으로서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각종 전쟁에서 값비싼 무기를 가지고 투항하면 로수용소에 잡아넣지도 않고 막대한 상금과 함께 영웅으로 대접하는 국가가 많았으며(이웅평 참고) 삐라등을 통해 적군에게 적극적으로 해당 행위를 권장까지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걸 무시했기에 조종사들은 불합리한 명령을 받았고, 자신의 희망에 맞는 적절한 정비도 못 받은 비행기를 몰고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 전시에도 불구하고 사관학교 성적, 파벌만이 승진을 결정한다는 막장 요소가 모이자, 아돌프 갈란트커티스 르메이 같은 파일럿 출신 지휘관이나 장군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또한 파일럿의 경험을 통한 효율적인 공군전략수립도 사실상 못하였으며, 현대의 독립적인 공군 탄생의 가능성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상황이었다. 같은 추축국독일만 봐도 약빨기 전의헤르만 괴링을 비롯한 1차대전의 에이스들은 루프트바페의 탄생에 기여했으며, 미육군 항공대 파일럿 출신인 커티스 르메이도 미 공군의 아버지로 불려지고 있다.

일본군과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조직이 독일 국방군이다. 독일 제국 시절부터 독일군, 특히나 참모진영은 철저한 실력주의를 고수해온 덕에 장교가 4천명으로 제한되었던 전간기 시기에도 독일군은 유능한 자원들을 보유했고 이는 재무장 선언 후 빠르게 군세를 확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전쟁 초반까지만 해도 독일군히틀러에게 할 말은 했고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발터 모델 등 유능한 지휘관들이 집단군 내지 야전군을 지휘했다. 극성나치빠로 계급이 원수까지 올라간 인간 중에는 헤르만 괴링이나 빌헬름 카이텔 같은 답 없는 족속도 있었다. 그래도 빌헬름 카이텔은 자신이 차지한 국방군최고사령관이라는 자리가 자신의 분에 넘치는 자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의 Yes맨이기는 했을지언정 남을 모함한다거나 권력암투를 벌이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독일군 내에서 무능하다는 비웃음은 샀지만 미움을 받지는 않았다.

이외에도 독일군에는 발터 폰 라이헤나우페르디난트 쇠르너처럼 제법 유능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소전쟁을 기점으로 히틀러의 전횡이 본격화되고 유능한 지휘관들이 대부분 옷을 벗게되면서 독일군도 막장화되었지만 그래도 일본군과는 비교하는게 실례다.

독일군의 문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과 역사상 최고의 돌아이인 히틀러를 자신들이 제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을 상대로, 그것도 양면 전쟁을 치루면서 한 때나마 모스크바, 런던까지 위협하며 6년이나 전쟁을 끌고 간 건 독일군 사령부와 지휘관들의 능력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반면 일본군은 그나마 몇 안되는 유능한 지휘관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사단장 정도에 머물렀고 그 이상의 제대를 지휘하더라도 대부분 후방에서 뒤치다꺼리나 하거나 무능한 인간들이 더 높은 자리들에 있었으니 뭐라도 해보고 싶어도 못 그럴 상황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패퇴하면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부하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고작이었다.

거기에 육군성해군성, 그리고 전시에 이 둘 위에 같이 설치한 대본영무능으로는 일본군 제일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그들은 끝내 자신들이 바라는 것, 덴노제의 유지와 일본에서 전범 재판을 여는 데에는 성공했다. 만약 연합군 쪽에서 했다면 엄청나게 가혹한 판결이 나왔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태가 빚어진 것은 소련을 견제하려던 미국의 개입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애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만으로도 막장 이하의 존재일 뿐이다.

참고로 독일은 동서로 탁 트인 평야지대여서 사방에서 포위공격을 받기에 최적화된 불리한 조건이었고 일본은 본토 자체가 섬인데다 드넓은 영해 군데군데에 방어진지 역할의 섬들을 갖추고 있어 독일과는 비교도 할수없이 방어에 최적화된 유리한 조건이었다. 아무리 세계최강 미국을 상대로 했다지만 이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도 그 정도로 밀렸다는건 일본군의 무능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5.5.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대부분의 군대들이 다른 군 사이의 예산, 작전을 두고 알력 다툼은 있었지만 일본군은 크게는 일본군 육군과 해군끼리, 작게는 육군내에서는 도파제파, 일본 해군에서는 약파대파끼리 대립하여 내전 직전까지 갔었다. 또 덴노 직속으로 관동군연합함대가 따로 독립해 있어서 이들과 육해군 사이에서 갈등도 심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참조

5.6. 적이 바보라는 전제하에 만든 작전계획

애초에 일본군전쟁 돌입시 상대방의 역량을 따져보지도 않고 덤볐다가 고전을 치룬 것은 러일전쟁부터의 일이지만, 여기서 반성을 않고 계속 정신력만을 강조하면서 작전계획을 짜는, 참 이상한 행위를 지속했다. 손자병법에도 나오듯이 적을 경시하면 얼마나 위험한가는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인데도 애써 그걸 무시했다.

개전 초기 남방작전까지만 해도 적이 바보라는 전제아래 세운 작전이 먹히긴 했다. 남방작전은 3단계로 나눠서 계획했는데, 1기는 말레이와 필리핀 기습, 2기는 자바와 수마트라 공략, 3기는 이들 점령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미얀마 공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점령지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는 자원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기간을 6개월 이내로 계획했다. 거기에 투입한 지상 병력은 고작 11개 사단, 방대한 남방지역을 모두 확보하는데 11개 사단과 6개월만 있으면 충분하단 생각을 했다. 연합군 병력은 안중에도 없나보다.

그래도 초반엔 그게 현실이 되었다. 남방지역 일본군은 영국 Z기동부대를 격파하고 1942년 5월 바탄반도에서 필리핀 주둔 미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정말로 6개월 안에 남방지역을 확보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는데 일단 연합군의 본국 사정이 매우 나쁜 데다, 일본군을 얕잡아 보고 방심했던 탓이 컸다.

그리고 일본군과는 달리 현지 병력들은 정규군이 아닌 식민지 치안병으로 장비와 훈련이 부족하고, 말라리아나 각종 풍토병 탓에 급감한 전력도 원인이었다. 거기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레일리아다양한 나라들이 있었던 탓에 각국 병력들의 연계도 원활하지 못했고 쉽게 항복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후 재정비를 하고 돌아온 연합군은 180도 달라졌고 일본군의 행운도 바로 거기서 끝나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이 고생했던 말라리아나 각종 전염병에 일본군도 똑같이(...) 고생을 하게 되었고, 남방작전시 양산된 수 많은 게릴라들은 일본군을 계속 괴롭혔다. 거기에 일본군이 대처하는 방식은 다를 바가 없었다. 공개처형은 기본이었고, 마을 하나를 피바다로 만드는 건 다반사였다. 당연히 게릴라들은 더욱 거세게 항전했다.

적이 바보라는 전제아래 세운 작전은 재정비를 한 연합군이 돌아온 이후로 거의 먹히지 않았고,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에서 보여주듯 수 많은 삽질을 되풀이한다.

미군에 대하여 일본군이 내린 평가는 1943년 3월 1일 삼간사우의 맴버이자 육군성 군무국장인 사토 겐료 소장이 의회에서 중의원의 질문에 미군을 상세히 해부했다면서 한 답변에서 엿볼 수 있다.


미군만 일본군으로 바꾸면 정확한 일본군 4줄요약
왠지 일본군 관련항목으로 링크된것 같이 보이는 것은 눈의 착각이다. 우리가 저러니까 미군애들도 똑같겠지?

그리고 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하던 날 일본군은 비스마르크해 해전을 시작했다.

해군이고 육군이고 애초에 지나칠 만큼 초기계획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고, 심지어 작전계획을 세울 때는 적이 예상대로만 움직이는 상황을 상정해놓고 계획을 짜서 극도로 낙관적이고 안일하기 짝이 없는 작전을 세웠다는 점이다.

예컨대 일본 해군의 작전계획에는 야간에 적 함대를 기습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적함대는 야간에 회피나 기만 없이 원래의 진로를 유지하며, 일본해군은 적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적은 일본군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전제로 작성했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식의 경우가 있긴 하다. 과달카날 공방전 중 사보섬 해전에서 이 말도 안되는 전제가 실제로 일어났다. 놀랍게도 해협 입구를 구축함 2척이 레이더 수색을 하고 견시까지 두면서 해역감시를 했는데도 일본 함대의 진입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다만 이 당시 레이더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아서 함선탑재 레이더보다 사람의 견시가 더 좋은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미국병크가 화려하게 빛나는 사건. 덕분에 일본 해군은 엄청난 대승을 거뒀지만 이러한 요행이 매번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이런 일본군의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 함정들은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서로의 통신을 전혀 않으면서도 자신의 위치와 적 함대의 위치, 그리고 다른 일본 함정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포위망을 형성한 뒤 정확한 타이밍으로 정확한 지점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묘기를 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고안하는 데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포위망을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설정놀음 그 자체였다.

일본군의 야간작전계획 같은 것은 그나마 실전에서 적용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문제가 미군과의 결전계획을 짤 때도 터져나왔다. 일본군이 미 해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한 작전의 핵심은 점감요격작전이었다.

이는 미국 함대가 접근할 때 동남아시아 여기저기에 매복해 있던 항공기들이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발진해서 미 해군 함정들과 함재기들은 한쪽에서의 공격에 대응하다가 다른 쪽에서 다시 공격을 당하는 식으로 우왕좌왕하다가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미국 함대를 함대결전을 통해 결정적으로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일단 준비과정부터 문제인 것이 일단 비행기를 매복시키고 써먹으려면 활주로가 필요한데 비행기야 숨긴다 치고 활주로를 어떻게 숨긴단 말인가?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계기가 과달카날섬에 건설중인 활주로를 보고 그 기지가 완성될 경우 미국-호주간의 보급선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서둘러 공격한 데서 시작했으니, 활주로를 숨기기란 어렵다. 물론 나름 숨겨보겠다고 활주로 한가운데 나무를 심었다가 뽑고 이동식 위장가옥을 이동시켜서 촌락처럼 보이게 하는 등 여러가지 꼼수를 고안했지만 그래봤자 들키는 것은 그냥 시간문제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작전을 하려면 미군일본군의 위치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군이 미군 함대의 위치를 먼저 파악한 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기지들이 유기적으로 연합해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실제로 도상연습에서 점감 요격 격파 연구(!!)만 하는 장군으로 유명한 나카무라 료죠 중장이 미군을 맡아 연구한 대로 움직이자마자 일본 연합 함대가 일본 근해까지 밀려서 전멸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장교들이 항의하자 그는 구 일본군 2대 명언 중 하나인 미군이 우리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란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나카무라 중장은 2.26 사건 이후 파벌싸움에 얽혀서 퇴역했다. 참고로 나머지 하나는 만주사변의 주역이자 전쟁 초기에 큰 전공을 세웠던 이시하라 간지가 육군대학 시절 "기관총의 가장 현명한 운용요령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에 "기관총을 항공기에 장비시켜 술주정꾼이 걸으면서 소변을 보듯 전방위 화망을 형성해 적 행군 종대에 퍼붓는다"라고 구술한 그 것.

또한 이러한 사건에도 일본군은 정작 미군 함대를 어떻게 먼저 찾아낼까, 기지들이 어떤 수단으로 통신을 하고 누가 어떻게 작전을 지휘할까도 제대로 고려한 적이 없다. 단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좋을지만 예술적으로 다듬었을 따름이다. 그 결과 결전을 위해 준비한 기지들은 미군이 먼저 발견하고 선제공격을 받아서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처참하게 각개격파를 겪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넓은 지역에 흩어진 부대들이 지휘권이나 통신 등의 문제로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없다면 부대를 산개시키지 않고 전투력을 집중해야겠지만 일본군은 기묘할 정도로 "한 부대가 적의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부대가 작전목표를 달성한다."는 식으로 보기에는 예술적이나 매우 복잡하며 스스로의 힘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좋아했다.

여담이지만 이 점감요격작전은 SF소설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문벌대귀족의 수장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라인하르트와 맞설 당시 세운 전략의 모형이기도 하다. 일단 메르카츠 제독이 바꿨지만 슈타덴과 그 이후 이어진 귀족들의 병크로 결과는...

위의 점감 요격 작전도 그렇지만 해전에서도 나구모 주이치가 동솔로몬 해전에서 경항모를 미끼랍시고 따로 떼놓았다가 무의미하게 격침시키는 삽질을 했다. 또한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미군의 색적 및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함대를 상호 지원이 불가능할 만큼 광범위하게 분산했다.

그 결과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본대는 나구모 주이치 기동부대가 얻어터지는 사이 아무 것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다가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미군의 주의를 끈답시고 류산 열도를 공격해서 귀중한 전력을 무의미한 곳에 박아놓고 나중에 구출하러 가느라 고생했다. 게다가 알류산 열도 점령은 원래 계획이 어그러진 상황에서는 더 이상 점령할 필요는 없었으나, 미드웨이의 패전을 가리기 위해 점령했지만 아무런 전략적 가치가 없었다.

적의 탐지를 회피를 위해 함대를 무작위적으로 널리 분산시키는 것은 현대 미군 항모전단 운용전술에도 쓰는 기본적인 전술이다. 다만 상호지원이 가능할 정도로는 가까워야 하고, 현대 미군은 데이터 링크를 통해 모든 함정이 전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그나마 미끼 작전은 성공했지만,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을 다른 함대에 알리지 못해서 물거품이 되었다.망했어요

5.7. 전투교리와 훈련의 막장성

육군의 기본 훈련 기간은 24주, 반면 미군의 14주에 비해 훈련기간이 더 길지만 일본군 교관들은 계속 들에게 총검이 필수적인 공격무기라고 가르쳤다. 이 아니라! 또 개개인의 조준사격보다는 부사관분대의 사격을 지휘하는 공동 소총 사격을 강조했다. 전열보병이냐? 위에서 나온 교리를 봐서 알겠지만 제대로 싸울 만한 군인이 아니었다.

정글에서 행군을 할 때는 무조건 분대장이 앞서고 그 뒤로 병사들이 한 줄로 나란히 걸었다. 이 때 적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당연히 맨 앞의 분대장이 죽고 분대장의 위협으로 간신히 유지하던 부대는 병사들의 도망으로 순식간에 와해됐다. 군대에서 이동방식을 배울 때 안전한 후방에서 이동할때나 신속히 빠져나갈 때는 종대로 이동하고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정밀한 수색이 필요할 때, 적이 앞에 있음이 확실할 때는 횡대로 이동한다는 걸 생각하면 일본군의 방식은 유사시 분대장은 그냥 죽으라고 한 행동이다. 사실 이 때에도 분대장은 대열의 중간위치에 있어야 되고, 대열의 선두는 부분대장이 위치하는게 기본이다.

가장 압박은 일본의 조종사 훈련으로 훈련내용이 어려워서 훈련의 수료에는 50-64개월이 필요했고, 매년 졸업하는 수송기 조종사는 100명에 불과했다. 이 훈련이 성적순으로 잘라서 소수정예의 초인적인 실력을 가진 조종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기는 한데 20여 명을 일렬로 앉혀놓은 뒤 "비행기로 이륙한다고 생각하고 뛰어봐라."며 훈련생을 서전트 점프로 날게 만든다는 황당한 과목도 당당히 정식훈련과정으로 있었다. 쉽게 말해 뻘짓을 시켜놓고 뻘짓을 잘하면 엘리트로 쳐줬다는 얘기다 요즘에도 저런식으로 하는 병신들이 존재한다. 비행기 띄울 기름도 없는데 뭘...
또한 훈련생에게 행하는 신체 검사 중에는, 손금골상학 검사도 있었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서 인용) 나치가 무장친위대 대원을 선발하면서 쓸데없이 외모를 중요시한 것과 비슷하다. 바보끼리 닮아간다

진짜 압권은 이렇게 힘든 훈련을 마친 조종사 후보생들을 아주 사소한 규정 위반에도 "정신머리가 썩었다!"면서 퇴교시켜버린 점이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는 "단추를 잘못 잠궜다"고 복장 불량으로 퇴교시키는 일이 다반사였고, 졸업 전날 몰래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퇴교당한 사례가 언급된다. 한 마디로 똥군기 잡느라 자질이 우수하고 열심히 훈련받던 훈련생들을 무더기로 내쳤다. 이는 전쟁 말기 극심한 조종사 부족을 겪게 되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필리핀 해 해전 등을 거치며 숙련한 조종사를 대량으로 잃은 뒤에는 훈련과정을 극단적으로 줄여야 했다. 얼마나 시간을 줄였는지 잠깐 살펴보면 1943년 이전 : 700시간, 1943년 이후 : 500시간, 1944년 : 275시간, 1945년 : 90시간이다. 2년 사이에 훈련 시간이 1/8 정도로 급감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 쪽은 일단 조종사들 인원도 늘어났고, 어느 정도 경험을 쌓으면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으며, 전쟁 후반기쯤 가면 그동안 양성한 조종사의 숫자가 충분하다고 보고 양성속도를 약간 줄이는 대신 훈련을 크게 강화해서 조종사들의 기량이 상향 평준화했다. 이러니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중일전쟁부터 참전한 고참 of 고참인 사카이 사부로 역시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자 출격이 금지당하고 훈련교관으로만 있을 것을 명받았으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조종사가 딸리자 직속상관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에이스 취급을 받으며 실전에 출격했다. 이때 앞서 말한 같은 책에서 대전 후반에 보충으로 합류한 애송이 조종사들 그 누구보다도 해군 비행학교 시절 퇴교당한 자신의 동기들이 더 뛰어난 조종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문구로 일본군을 깠다

해군에서는 세계 3위권 수준은 했다고 볼 수는 있다. 일본 해군이 까이는 것은 사실 상대가 미국이라 넘사벽으로 보이는 것일 뿐,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우수한 하드웨어를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전함의 시야 확보를 위해 영미는 우수한 레이더 기술을 써먹었다. 그러나 일본은 대신 훈련된 요원을 써서 이를 대충 땜질하려 했다. 문제는, 독일/프랑스/소련/이탈리아같은 나라들은 이나마도 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거함거포주의 운운하지만 사실 그런 문제는 영국 해군을 위시한 다른 해군도 비슷하게 겪었던 문제였다. 오히려 일본 정도면 항공모함을 적극적으로 운용한 편에 속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비교법이 정신승리자기합리화라고 보면 딱이다. 위에 언급한 비교법 자체가 자신보다 뒤떨어지는 해군들을 보면서 자기위안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둘째치고라도, 세계 1위와 세계 2위의 해군국가에게 스스로의 의지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선빵을 날리면서 전쟁에 돌입한 것은 일본군 해군이란 점만 생각해보더라도 당연하게도 서로간의 비교는 미국,영국 대 일본으로 해야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전장이라는 링에 올랐는데 상대방 선수와 전력을 비교해야지 전혀 엉뚱한 관객석에 있는 사람과 전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시간낭비인 행동인 것이다.

당장 독소전쟁 개전 초반에 당시 세계 1위의 전차전술을 가진 나치 독일에게 신나게 발렸던 소련은 솔직하게 당시의 독일군에 비해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취약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했지, 독일의 동맹국인 루마니아나 헝가리의 전차 전력을 보고 그 녀석들보다는 낫다고 자기위안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최후까지 항전했으나 결론적으로는 털려버린 폴란드도 항전의 정신상태는 인정받지만 당시의 독일군과의 비교는 냉철하게 받는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현재의 일본도 상대가 미국이었던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기만 하고 정신승리식의 비교방법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교방법론을 유지하더라도 함선의 통상파괴 및 보급선 경호 및 유지를 경시해 그 독일조차도 한 소리 했던 것은 까여 마땅하다. 이 분야의 선각자로 노우에 시게요시가 있었으나, 이 사람은 해군 내 비주류였다.

전쟁 말기의 가미가제, 가이텐 삽질은 논외로 하고 따져본다면 군사적 측면에서 일본 해군의 문제점은 전쟁 기간을 전체적으로 볼 때, 무기를 일선에서 운용하는 사람이나 야전 사령관들보다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 전략의 결함이 뼈아프게 다가왔다고 볼 수 있다. 육해군과 해군 내 파벌의 대립, 대미 개전을 위시한 전략적 삽질이라는 오판, 연공서열, 민간 경제 등에 대한 지식 결여가 총체적 난국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런 소프트웨어도 따지고 본다면 그만큼 돈을 발라야 한다는 반론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다못해 일본 이상으로 막장이라는 중국군도 충칭에서 농성해서 지구전을 펼치면 어떻게 될 거라는 상황 판단하나는 잘 한 점, 아니면 유고나 이후의 베트남같은 나라들도 전략적 판단 하나는 잘 한 점을 본다면 일본군의 문제가 큰 것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함대결전사상에 기반한 점감요격작전에 심취했다. 이 와중에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일본의 주력함대는 주요 적국에 비해 양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했다. 조약상 일본의 전함 쿼터는 영국, 미국의 60%였다. 그렇지만 태평양과 대서양으로 전력을 나누어야 하는 미국, 전 세계에 전력이 분산되는 영국과는 달리 일본은 해군력의 집중이 가능했다.

그래서 사실 일본 해군의 주전장인 태평양으로 한정할 경우 오히려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압도할 만했다. 그리하여 보조전력을 포함한 일본 해군의 모든 전력은 결정적 함대결전에서 주력함대의 양적 부족을 보충한다는 유일하고도 매우 어려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건설되었고, 이는 이러한 보조함대의 성격을 크게 왜곡시켰다.

이러한 생각은 잠수함을 취급하는 태도에서도 매우 잘 드러난다. 1차 대전 당시만 해도 각국은 잠수함을 함대결전에서 적 함대의 신경을 긁는 조공 내지는 양동 전력으로 여겼고, 오직 독일만이 홀로 잠수함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닥치고 격침 교리를 고수했다.

20년 뒤에 세계 각국이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잠수함으로 적국의 밥줄을 끊느라 여념이 없을 때, 일본해군은 정반대로 전장에서 적의 주요 대형함들을 격침시키려는 시도로 많은 노력을 허비했다. 문제는 전장에서 쳐들어오는 적의 주력함대야말로 가장 빠르고 스스로를 잘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잠수함이 노리기 가장 힘든 표적이다. 그래서 이런 뻘짓에 대해 동맹국이자 잠수함 전술의 선두주자인 독일이 조언을 해주었지만, 당연하게도 일본군은 생깠다.

물론 그들의 주적인 미군은 유럽의 적국인 독일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태평양을 항해하는 일본 배란 일본 배는 모두 미 잠수함의 표적이었다. 일본 잠수함은 태평양의 미국 잠수함에 비하여 결코 적지 않은 수였고 어뢰무장, 항속거리와 작전지속능력 등에서 매우 강력했으며 유명한 센토쿠급같은 잠특형 빼고도, 대부분의 일본 잠수함은 태평양에서 장대한 항속거리를 활용하기 위해 매우 크기가 컸다.

2차대전 중 전 세계적으로 배수량 3,000톤 이상의 잠수함은 총 56척인데, 그 가운데 52척이 일본 잠수함이다. 따라서 통상파괴작전에서 큰 활약을 할 수도 있었지만, 앞서 말한 어이없는 교리 덕분에 실제 전황에 기여한 부분은 공기에 가까웠다.

잠수함이 좀 심했지만 수상함도 마찬가지였다. 구축함은 적함을 산소어뢰로 뇌격하는 능력에 집중한 탓에, 대잠능력과 대공능력은 크게 떨어져 이름처럼 잠수함을 쫓아내서 함대를 보호할 구축함이 오히려 잠수함에 쫓겨다녀야만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조 전함의 역할을 맡는 중순양함조차 산소어뢰를 가지고 함대결전시 야간에 미국의 전함전대를 습격하는 대형 구축함 정도로 컨셉을 잡고 특화시켰다. 그 덕에 동급의 중순양함 상대로 열세를 보여아만 했다.

5.8. 적이 지는 걸 전제로 하는 훈련

훈련할 때도 처음부터 적이 지는 것을 전제로 한 훈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상다반사였다. 애초에 훈련이라는 것이 실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훈련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뻘짓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훈련을 하면서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면 판을 뒤집어엎는 수준의 조작질을 공개적으로 했다.

미드웨이 해전 직전 벌어진 워게임을 예로 들자면 미국 항공모함에 의해 4척 뿐인 일본 항모 중 2척이 침몰하고 2척이 대파하는 결과가 나오자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며 도로 부활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당시 대항군 지휘관이자 판정관을 겸했던 연함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폐하의 정강인 항모에 기량이 엉망진창인 미군기가 감히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을 리 없다."라고 어거지를 쓰는 동시에 "미군의 폭격 명중률은 우리 군의 명중률의 1/3 수준이다. 그러니까 피해량도 1/3로 계산해야한다."는 괴상망측한 개드립을 내세워 결과를 뒤집었다. 이때 수정된 결과가 1척 중파.

하지만, 현실은 첫 워게임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더욱 참담한 형태의 결과를 얻었다. 이러한 상식을 따르지 않는 지휘관들 때문에 일본군의 전사자 비율은 유독 높았던 데다가 미드웨이 해전만 하더라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고 나서는 상황 판단 실수의 연속으로 망했어요.

작전의 핵심이 미드웨이 점령인지 아니면 미 해군의 격멸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실제로 작전을 시작하고 미 함대를 찾자 미드웨이를 우선적으로 공격할지 아니면 미 함대를 먼저 공격할지를 두고 우왕좌왕했다. 미드웨이 공략 함대도 항모부대와 그 외의 전함을 주력으로 한 부대로 나눠서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하게 떨어뜨려 놓았고, 그 결과 실제로 항모가 공격당한 후 야간에 전함으로 접근전을 벌이려 했으나 거리가 멀어서 불가능했다.

이런 결과는 당시 미 해군의 지휘관이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교전을 회피한 것도 한 몫했으나, 일본군은 미군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일지도 예측 못했으니 이미 싹수가 노랬다. 당시 미 해군은 대다수의 전함이 진주만 공습 당시 격침해 전함이 턱없이 적었다. 특히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 해군은 전함이 하나도 없어 접근전을 회피하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선 병사들까지 목표가 미드웨이인 걸 알고 노래를 부를 정도로 엉망인 정보통제로 오죽했으면 미국은 이러한 미드웨이 타령이 실제 목표를 숨기기 위한 연막인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특히 이전의 진주만 당시에는 정말 질릴 정도로 정보를 통제해서 뒤통수를 때렸던 만큼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미군은 일본 해군 암호를 다 빼돌려서 작전 자체를 이미 다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어떤 뜻에서는 일본군 입장에서도 연막이긴 했다.

원래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의도는 미드웨이를 공격하면 미군이 반드시 주력 항모부대를 끌고 기어나올 테니 이를 격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항모가 기어나왔지만, 못 잡아서 문제였다.

이 때 일본군정찰기가 담당한 정찰구역 자체가 넓은 데다가 사용했던 정찰기의 숫자도 모자라고, 유사시를 대비한 예비 정찰기도 없어서 원래 임무를 맡은 정찰기만 쓸 만했다. 덕분에 기존 정찰기를 출격시킬 때 정비를 제대로 안했다는 까닭에 제때 날리지 못했으며 심지어 정찰기의 무전기가 고장났었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정비가 안된 정찰기를 억지로 날려서 기껏 미국 항공모함을 발견했지만 그걸 항공모함인지도 몰라서 제대로 보고도 않는 등 각종 삽질을 저지르는 바람에 좆망 테크를 탄다.

6. 일본군의 전략적 병크

제로기의 명성이나 거대 전함인 야마토급 전함, 거대 항공모함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해군도, 무적의 군기와 훈련도를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 일본 육군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야말로 썩어있다고 할 만한 실정으로, 후나사카 히로시의 표현대로 '자살밖에 못 하는 칼'이 딱 들어맞는 군대다.

6.1. 항복하는 자가 없는 이유

일본군/포로 항목 참조.

6.2. 물주와의 대결

"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쟁도 또한 군인만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 국방비가 미국에 맞먹을 수준이라 할지라도, 러일전쟁 시기와 같은 소액의 재정으로는 미국과 전쟁을 펼칠수 없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를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미국 이외에 국채를 사줄만한 나라는 없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이 적이 된다 하면, 그러한 방법은 조기에 차단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은 불가능에 수렴한다.

기본적으로 국방은 국력에 상응하는 무력을 갖춤과 동시에 국력을 함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 수단에 의해 전쟁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현재 세계정세의 국방의 본의에 따르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21대 내각총리대신 원수 해군대장 정2위 공1급 자작 가토 토모사부로

일본은 석유연료의 92%를 수입에 기댔다. 물론 정밀 공작 기계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석유와 기계를 공급하는 미국과는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끝내 이것이 진주만 공습의 원인이 되었다. 한 마디로 생필품과 자금을 대주는 물주에게 자기 능력도 안 생각하고 한판 붙은 격이니 이렇게 자신의 나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주국을 선제공격한 광란행위를 두고 자칭,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반일 밀덕 사이트인 구일본군약소열전에서는 이 당시의 일본의 멘탈을 매우 훌륭하게 요약했다. 거칠고 과격한 표현이 있으니 주의하고 보자.

"(전략)...국제사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일본이 거슬린 미국이 일본의 말살을 획책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는 인간들까지 나타나는 실정입니다. 일본을 말살하고 싶었다고? 그따위 일은 아킬레스건을 모두 쥐고 있었으니, 맘만 먹으면 아이 손을 비틀듯이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일본사춘기였나 생각합니다. 자만심만 강해서, 자기 실력이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일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어른이 하는 말에 반발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나 싶군요.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런 일본인의 치졸함이나 유치함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일본의 정신연령은 12세 소년과 같다." 말 그대로 사춘기의 반항심이 절정에 이르른 애새끼였다는 얘기죠. 게다가 문제의 미국 자신도 조금 일본을 꾸짖어 주제를 알게 해주려고 했더니 돌연 빡돌아서 후원자인 자신의 뒤통수를 금속빠따로 까버릴 줄은 예상 못했던 듯했군요. 아무래도 소년의 마음 속 어둠은 상당히 깊었던 듯합니다."

참고로 마음 속 어둠이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1990년대 초 빈발한 청소년 흉악범죄를 설명할 때 즐겨 쓰여 유행어가 된 단어다.

게다가 물주와 굳이 붙을 생각이었으면 그 전에 미리 물자를 비축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자금을 융통하고 수입이 필요한 물자를 얻을 다른 수입원을 강구한 뒤에 붙어야 하는데 이미 중국과의 전투로 물자와 인원을 보충하기는커녕 날로 줄어가는 데다가 미국 아닌 다른 국가간의 관계도 나쁘고 돈도 달랑거리는 상황에서 을 결심했다. 이는 그냥 "자살하고 싶어요!"와 동일어다. 자기 딴에는 한타 싸움에서 이겨 굴복시켜 협상해서 끝내자!!였지만 미국 눈에는 헛바람들어 날뛰어대니 자살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 셈이다.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비다. 2차 대전 전 기간을 통틀어서 일본군의 총 전비는 미국의 1/8도 안 된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투입한 전비의 80% 이상은 유럽에 투입되었다.

사실 개전 당시 일본의 위세는 굉장했고, 일본군 또한 왠만해선 진적이 없는 전적을 자랑하는 아시아 최강의 군대였다. 하지만 그 원인은 일본은 섬나라였고, 특히 서구 열강들과는 멀리 떨어진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이게 일본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줬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아무리 열강이라도 지구 반바퀴를 돌아와 상륙전까지 감행하는 원정은 상당한 지출과 시간을 요구하니 적당히 방어만 잘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일본도 미국이 강대국임은 알았겠지만, 그들은 이런 거리적, 지리적 이점을 믿고 개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상륙전은 일반적인 지상전에 비해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전비와 자원소모를 유발하는데, 일본도 전간기 식민지들을 다 상륙해서 점령해 봤으니 매우 잘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해군이 빈약한 소련 상대로도, 미국만큼의 물량은 안 됐던 영국 상대로도 이 전략은 매우 훌륭했다. 실제로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바빠 상대적으로 부실한 Z함대, 일명 '영국 동양함대'를 보냈다가 말레이 해전에서 말아 먹으면서 일본의 이런 확신만 굳건하게 만들어놨다.

문제는 미국의 힘이 일본의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강대국임을 알던 일본이라도 설마 수송함을 하루에 1척씩 찍어내고, 수평선을 새까맣게 덮으며 몰려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 함대를 발견한 일본군 초병은 "바다가 3, 적이 7"이란 보고를 올리는 사태를 맞이하고 만다.

결론은 다 좋은데 말이야, 미국만 아니었으면 좋았겠군. 그래서 <조선을 떠나며>란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종전이 되어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자 당시 남한에 남아있었던 일본인들이 주둔한 미군들의 개인장비를 보고 "세상에, 우리가 이런 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6.3. 시끄러운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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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폐하 만세(天皇(てんのう) 陛下(へいか), 万歳(ばんざい)!!!
잠깐 오른쪽 아래 뭐야 안되겠소 쏩시다 쏘지마세요 저희는 선량한 위키니트입니다 멍청아!누굴 쏘는거야. 죽고싶어!?
보병전술의 기본을 망각한 반자이 어택. 총검 돌격의 기본 중의 기본은 두 가지다. 은엄폐총검술.

문제는 일본군은 이 2가지를 모두 상큼하게 씹어먹은 군대였다는 것이다.

본디 이 일본식 총검 돌격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프랑스군이 시초였다. 프랑스군은 총검 돌격을 승리에의 의지라는 주창과 함께 정식 교리로 채택했으나,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프랑스 군인들을 기관총 밥으로 던져주는 결과가 나왔다(...).

그제서야 프랑스는 이 문제를 풀려고 했으나 이 무식한 총검 돌격이 가져온 후폭풍은 엄청났다. 사실상 젊은 남성들이 씨가 마른 상태였으니 중요한 산업 기반인 인력 부족으로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도 큰 경제적 발전을 일으키지 못 했다. 게다가 인구 규모 자체도 독일에게 추월당하는 막장상황까지 겪었다.

하지만 병신력은 돌고 돈다는 법칙에 따라 이런 프랑스식 총검 돌격을 일본군이 감동먹고 정식 교리로 채택했다. 하긴 정신력 운운하는 일본군에겐 "승리에의 열망을 바라면 그것은 곧 승리"라는데 맘에 안 들 리가 없다.

교리상으로는 은밀한 기습을 펼쳐야 하는 반자이 어택이지만, 일본군은 반자이 어택 직전에 기도를 했었다. 주 내용은 작전의 성공과 가족과 덴노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중얼중얼대던 기도소리가 점차 커져서 돌격시에는 함성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반자이 어택을 할 전장에서 기도소리를 내면 곧 미군에게 "우리 조금 있다가 너네들한테 돌격한다잉~" 하고 떠드는 꼴이라, 미군이 저 기도소리를 듣고 기관총 사격 준비를 하는 등 반자이 어택을 미리 대비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돌격하는 족족 죽어나갔다.

게다가 이렇게 큰 기도소리를 낸 것은 전투 전에 기도 합창을 통한 자기최면으로 병사들이 공포감을 극복하고 무아지경으로 돌격하게 만들기 위한 조치였으니 일본군 스스로도 반자이 어택이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 셈이다. 자고로 광신, 최면 등으로 무작정 돌격하게 만드는 것은 제대로인 현대전의 전술이나 전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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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런 시끄러운 소리에 그 지역에 대규모로 서식하던 연합군 바다악어떼들이 놀라 일본군에게 떼로 몰려와 천명 이상의 무장한 군대가 동물에게 역으로 반자이 어택을 당해 400명이 씹어먹히고 살아남은 20명만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궤멸당하는 기네스북동물에 의한 가장 큰 재앙(The Greatest Disaster Suffered from Animals)이라는 항목으로 등재 되었던 대규모의 참사가 일어난 람리섬 전투라는 사고까지 있다. 항목 참조.바다악어들도 반자이 어택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듯.

설령 운 좋게 적군의 진지에 돌입했더라도, 일본군의 총검술 동작은 딱 하나, 찌르기 뿐이었다. 나름 총검술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대검의 날을 미군보다 5cm 정도 더 늘여 무려 38cm에 달하는 총검을 만들고, 미군의 M1개런드 보다 20cm가까이 긴 아리사카 소총의 길이 + 미군보다 더 긴 총검에서 나오는 리치의 우세로 상대를 제압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전에서는 개머리판을 이용한 타격과 발길질 등 다양한 동작을 활용하는 미군의 총검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긴 길이로 적을 못 오게 제압하기는 커녕 실전이든 연습이든 미군 병사는 얼마든지 일본군 병사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미군과 일본군 간의 체격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나버려 악력이나 근력에서도 애초부터 일본군이 밀리는데, 반자이 어택을 할 때쯤이면 일본군은 십중팔구 보급이 끊겨 쫄쫄 굷고 말라리아나 이질 같은 온갖 전염병에 시달려 반은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심할 경우 운 좋게 기습에 성공해 백병전을 벌였더니 "맨주먹"으로 달려든 미군에게 잡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내던져지는 사례도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일본군답게 개선할 의지도 없었다. 일본군 안에서 미군 포로와의 총검술대련 등을 한 사례가 몇 번 있었는데, 일본군 쪽이 번번히 졌다. 이런 결과를 보고서까지 만들어서 상부에 보고했으나 높으신 분들은 그걸 '근성' 이나 '병사의 숙련도' 문제 따위로 간주하고 개선할 생각은 안 했다. 정신승리

게다가 일본군 장교들은 기본적으로 돌격과 총검을 중시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거기에다가 소대급 화력부터 시작해 연대급 화력까지 총체적으로 미군에 비해 뒤지는 상황에서 그나마 정신력으로 뒤집을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 반자이 어택이었다. 하지만 화력의 차이가 엄청난 데다 병사의 질, 훈련상태, 전투의지에서 총체적으로 뒤지는 일본군이다 보니 가뿐히 미군에게 전멸당했고 역으로 권총수류탄, 정글도를 휘두르는 미군식 어택에 혼비백산 흩어지는 때마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자진입대율이 90%에 달했다. 자진 입대율이 이만큼 높은 이유를 따지고 보면 일본군이 선전포고도 안 하며 싸움을 걸어온 진주만 공습이 원인이었다. 상식을 벗어난 공습 소식에 미국 국민들은 복수에 눈이 뒤집혀버렸다. 괜히 "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를 지금까지 회고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의 자진 입대율이 제2차 세계대전과 비교하면 훨씬 떨어진다.

일본군이 구타로 극한에 몰아붙이는 식으로 전투의지를 억지로 끌어냈다면 미군 병사들은 처음부터 왕성한 전투의지가 있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1화에서 참전용사 인터뷰 중에서는 전쟁 발발 뒤 신체조건 때문에 군대를 가지 못해서 자살한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 어느 군국주의 국가에서도 이처럼 '복수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살까지 할 정도로 전 국민이 적국에 대한 복수를 불태우며 군대에 투신하는 광신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는 힘들다. 그런데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면서 군국주의 국가 저리가라할 흠좀무한 신념의 병사들을 배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일본이다.

결론을 내자면, 총검 돌격 항목에 보다시피 일본군은 매우 잘못된 방법으로 총검 돌격을 했다. 총검 돌격 문서를 보면 총검 돌격이 유효한 경우는 상대의 숙련도가 아군보다 낮고 돌격 자체가 기습적일 때인데 일본군은 이에 전혀 해당 안 되는 상황에서 그저 아무 때나 닥돌하기만 했다.

6.4. 말로

애초에 이들은 전쟁에서 지면 어떤 결과인지, 혹은 자기들이 틀렸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나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질 리가 없다고 믿었다. 아니, 질 수 있다는 생각을 않도록 스스로를 세뇌하였다.

전세가 기운 후에는 군부나 고위 관료들도 일본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패배에 대해 말이나 생각을 하는 것은 금기로 취급했기 때문에 제대로 논의를 못했다. 파 묻는다. 시간이 지난다. 그리고 터진다. 쾅!

그나마 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일단 국지전에서 승리한 다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협상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정작 상황이 나빠지자 군부나 고위 관료 모두 종전에는 입을 다물고 1억 총 옥쇄까지 부르짖으며 총력전을 주장했다.

그런데 정작 총력전이 뭔지를 몰라서 귀중한 인적자원을 다 날려먹는 삽질만 저지르고 망했어요.

총력전에서는 무엇보다도 전쟁 물자와 식량, 연료 등의 필수적인 요소들의 생산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일본군에서는 오히려 숙련공들을 군인으로 징집하고 그 자리를 정신대 여학생 등으로 메웠기 때문에 생산되는 물자는 질과 양 모두 하락하기만 했다.

이것 때문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분야가 항공기, 특히 전투기 분야인데, 갖고 있던 주력기 제로센은 물론이고 이후 겨우 뒤늦게 개발된 신형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도 각종 카미카제 등등으로 남아나지 않던 파일럿들까지 잡아 잡수셨으니, 어떻게 보자면 일본 패망의 가장 큰 결정적 원인 중 하나를 제공 한 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성들이 대량으로 징병된 빈 자리를 미숙련된 여성인력으로 채우는 것 자체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고, 성운동이 활발해진 게 이 당시의 여성의 사회진출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보편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은 '''정밀기계와 표준화된 품질관리 덕에 미숙련된 여성인력을 동원해도 일정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공업분야에서 표준화된 품질관리가 불가능해서 숙련공의 중요성이 대단히 높았다. 일본은 숙련공의 세심한 마무리로 품질이 관리된 만큼 숙련공의 부재는 물자의 품질과 양에 바로 타격을 주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공작기계의 품질은 유럽 기준으로는 저급품이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정상적인 너트는 육각형인데 너트도 조악하게 만들어서 오각형 너트 같은 것이 정식 출고된 장비에 다닥다닥 붙었다. 오죽하면 독일에서 수입한 공작기계를 적재한 공작함 아카시(明石)의 작업능률이 국산 공작기계가 주류인 본토 해군공창 수준을 훨씬 능가했을까? 그래서 아카시가 격침되자 그 이후에 일본 해군의 보수 및 보급능력이 격감했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유럽 각국도 비슷한 삽질을 했지만 유럽에서는 몇 주 내에 실수를 알아채 기술자들을 공장으로 돌려보내고 오히려 공장주들에게 군인들을 선발해서 일하게 할 권한을 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일본에서는 몇 년이 지나도 그런 거 없다. 그 시절 유럽 각국은 정부가 민간과 군사 영역을 조율할 수 있었지만 일본은 군부가 민간과 정부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에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투원만을 우대하는 문화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군인의 정신력보다 물자가 더 중요하다는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반역으로 간주되고, 기술자 등을 특별 취급하는 것은 장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판이다. 그와 달리 미국은 그 엄청난 생산량을 책임졌던 것은 전선에 나와있던 수십만명의 장병들보다도 본국에서 공장에서 일하던 수천만명의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생산량을 토대로 장병들이 막대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전투원만을 우대하고 비전투인원을 무시하는 성향 때문에 라바울에서 철수할 때는 전투기들만 파일럿과 함께 날아가버리고 정비인원은 그냥 방치했다. 물론 이 때 현실적으로 정비원들을 철수시킬 수단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전설적인 에이스 파일럿 에리히 하르트만의 일화에 따르면 전황악화로 포위된 비행장에서 탈출할 때 전투기의 무전기 등 비행에 필요없는 장비를 버리고 생긴 공간에 정비병들을 태워 이륙하여 무사히 탈출한 일화가 있다. 게다가 애당초 그 지경일 때까지 간 것 자체가 여차하면 정비원들은 내버려두고 가도 된다는 암묵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량의 정비원이 적중 한가운데 고립돼서 전투가 끝난 후에 고스란히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숙련된 정비원이 부족해서 고생하는 등.

게다가 정비병이라고 하니 전문성이 낮아 보이지만, 이들은 조종사 수업 낙오자들을 교육해서 육성했기 때문에, 급하면 약간의 교육만으로 바로 조종사로 사용이 가능한 수준의 고급인력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육성되는 수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답이 없다. 게다가 이런 막장 사례는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에 대해 일본 해군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는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서 개전 전 일본군이 조종교육생 과정 중 아주 사소한 행위마저도 군기위반으로 간주하고 퇴소시키거나 다른 특기를 부여해 전용한 사람들을 제대로 써먹었다면 전쟁 후기의 조종사 부족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반 일본 국민이나 당시 일본 내 식민지 출신이었던 선인, 중국인 등을 포함한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이 고위층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 예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엄청나게 희생되었다.

그런데 오키나와류큐라는 독자적인 왕국이 존재하였었고, 일본의 정벌에 의해 1879년에 편입되었기에 일본 내에서의 인식은 일본 본토라기보다 식민지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때문에 오키나와 전투를 일본 본토에서 일어난 전투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당시 뿐만 아니라 1990년대까지도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로 올 경우에는 별도의 행증을 요구하는 등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아직까지도 상당하다.

오키나와 전투는 민간인이 대량으로 전투에 참여할 것을 강요당한 전투였으며, 이 전투로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도 이러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올림픽 작전을 계획했다.

연료 사정은... 참담하다. 정어리 기름을 윤활유로 쓰고, 송근유를 연료로 쓰는 상황이었으니... 그나마 쓰겠다고 만들어논 저 송근유도 원유는 20만 킬로리터나 뽑아 놓고서는 폭격 때문에 500킬로리터 정도밖에 정제 못했다고 한다(...). 만들어논 것도 거의 야매로 만든 지경이니 뭐, 항목 참조.

6.5. 숭숭 뚫리는 암호

전쟁 전 일본독일에니그마를 베낀 97식 구문인자기(九七式欧文印字機: 유럽 알파벳을 쓰는 97형식의 타자기)란 걸 대사관의 최고위 암호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서방측은 일본의 다른 암호는 어느 정도 뚫을 수 있었지만, 퍼플(PURPLE)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암호기계를 해독하는 데 시간이 엄청 걸렸다. 이 암호기계는 에니그마에는 있었던 반사판 장치가 없어서 구조적으로는 진일보했다. 덕택에 독일에서도 이 기계의 암호를 못 깼다.

그러나 예전에 지 파비앙(George Fabyan) 밑에서 유전학자 일을 하던 리엄 프레더릭 프리드먼이라는 천재와 그가 일한 SIS측에서 1930년대부터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들 휘하에 있는 랭크 로렛퍼플을 뚫는데 성공하고 여기에 Magic이라는 코드명을 붙인다.

일본측에서도 이게 뚫린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멍청한 일본군은 "양키놈들이 우리 거 읽고 있다는 의심이 드니까 조심해~!"라고 전문을 보내고 암호기계에 "이건 국가기밀임!"이란 에나멜 딱지를 붙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조치를 안 했다. 앞서 말했듯 자기도 못 깨고 독일도 못 깨니 안심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로 저런 짓을 한 이유는 자기네 "일본어가 엄청나게 어려운 물건이기에 코쟁이들은 절대로 못 풀 것이다!!!"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이미 미국에는 재미 일본인들이 바글바글대고 있었다. 여기에 진주만 공습이후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김영옥 항목 참조.

거기다가 미군에는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수십 명에서 1만명으로 늘릴 계획으로 양성된 일본어에 능통한 장교들이 몇 명씩 일선부대에서 뛰었다(...). 당연하지만 어학병이 존재하는 이유가 동맹군은 물론 적군의 언어를 해독해야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동맹군과의 접촉이나, 적으로 부터 받은 전갈, 또는 적 포로 관련 등에 대해 담당한다.

현재 한국군어학병 중에서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장 미군 역시 해당 작전지역의 언어를 교육하는 것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암호는 기본이지만 작전지역의 대민업무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퍼플의 미국제 모조품

게다가 이 암호를 뚫기 위해서 아예 퍼플을 상상해가며 위 사진같은 모조품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1945년에서 1952년 쯔음에 찾아낸 퍼플 원본을 미국에 가져와 비교해보니 놀랍게도 짝퉁 주제에 연기가 좀 나고 조잡했다는 걸 빼고는 원판과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일본 제국 하와이 대사관이 전문을 모두 받았을 때는 이미 진주만 공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도 일본과 동시에 일본의 암호문을 해독했다. 암호문을 다 받고 제출할 때는 벌써 진주만에 폭격을 맞은 뒤였다(. 그래서 일본은 선전포고를 다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범 재판 때 가중처벌을 받는다. 전보 내용을 다 알던 미국 쪽에선 일본 대사가 공습 이후에나 선전포고를 한 점을 비꼬아 위에 서술된 비난을 실컷 퍼부었다. 그 이후에도 전범재판에서 선전포고 안한 것도 전쟁범죄 기소에 포함되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저력인 Show Me the Money 신공보다 Black Sheep Wall이 더 위력이 강했던 예론 미드웨이 해전야마모토 이소로쿠 처치가 있다.

물론 맵핵을 켰어도 미국이 발컨이었다거나 엉뚱한 테크를 올렸다면 전쟁에서 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적의 상황이 빤히 보이는가 안 보이는가는 대세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전후 의회에서 벌인 조사에서 암호해독은 전쟁을 몇 년 앞서 끝낸 주역으로 부상해 NSA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조사단에서 암호해독은 정말 킹왕짱이야!라고 했는데 국가암호전담 기관이 안 만들어지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일본군은 야전암호 배달도 허술해서 암호북 박스가 없어져도 걍 없어졌다라 치고 살았다. 예를 들어 뉴질랜드군의 기뢰제거선 HMNZS Kiwi가 1943년 1월 29일 과달카날 근해 순찰 중 자기보다 덩치가 더 큰 일본군 잠수함 I-1을 발견하고는 오클랜드에서 외박이나 따자는 생각으로 다소 무리를 해서 잠수함을 겨우겨우 격침시켰는데, 이 일본군 잠수함 안에는 코드북 및 각종 기록이 페이지로 무려 총 20만 페이지나 들어 있었다. 야~ 신난다!

게다가 보통 이런 암호 해독문서는 유사시 긴급폐기하기 위해 겉표지에 납이 있어서 바다에 던지면 돌덩이처럼 가라앉는다던지, 물을 뿌리면 잉크가 확 번져서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다던지, 아니면 기름 먹인 종이에 인쇄를 하여 잘 타게 만들다던지 하는 조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기본적인 조치는 게을리 했다. 결국 일본군은 멀쩡한 암호책만 연합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나마 일부 승조원이 암호책중 당시 쓰이던 부분만 들고 도망쳤지만, 이미 쓴거나 나중에 쓸 부분은 남기고 갔기 때문에 당시 쓰이던 암호책 부분도 쉽게 패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일본군에서 폭격을 했지만 너무 늦었고, 연합군에선 배를 건져 올린 뒤 암호북을 다 쓸어갔다. 그리고 그냥 외박 바라고 격침한 기뢰 제거선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전원 해군십자장을 받았다.

또한 적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암호내용을 평문으로 재전송하거나 높은 암호라고 준 걸 낮거나 시간이 지난 암호로 전송하거나 문서에 쓰이는 상투적인 말투를 그대로 암호화를 하거나 쓸데없는 말까지 모조리 암호화했다. 이런 행위들을 보면 일본군의 암호는 적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봐도 무관하다.

물론 일본에서도 대응책을 마련했다. 일단 일본측에서도 특수 코드북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특수 코드북을 A-GO 작전에 써먹으려고 들고 왔지만 하필이면 기함에 직격타를 맞아 코드북은 증발하고 이 코드북으로 보낸 모든 전신은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려서 끝내 미군에게 졌다. 망할 팀은 망한다 이 코드북 얘기도 그렇지만 암호를 만들려는 일본군의 삽질은 계속 이어졌다.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이 가장 푸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일본군이 고안해낸 암호가 아니라 가고시마 사투리였다. 이 가고시마 사투리는 독일에서 잠수함 U-511(일본 제식명 ロ500)을 도입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미군에 있었던 가고시마(가지키) 출신 2세 데이비드 아키라 이타미가 해독하였다. 사실 미군도 비슷하게 나바호족 원주민들을 무전병으로 써서 적군이 감청해도 못 알아 듣게 했다. 영화 '윈드 토커'를 보면 나온다.

일본군은 야전에서 이렇게 개판이었지만 본국의 암호 해독실도 만만치 않게 개판이었다. 미국측에선 일본군 고급암호 전문도 훔쳐보는 판국에 본국에선 중급 정도의 암호 메시지조차 못 풀었다. 물론 M-138-A 같은 기계로 만들어지는 최상급 암호는 건드릴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일본군이 해독을 하려고 제일 공들이던 물건은 미 해군에서 가장 낮은 암호 체계로 간주하던 물건이었다. 나중에 이것도 못 풀어서 암호 쪽은 GG쳐버리고 통신 분석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심지어 오래되고 푸는 방법도 있던 플레이페어 암호도 못 풀어서 쩔쩔 매는 바람에 어느 한 사람이 살아 남아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반면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비행기 타고 솔로몬 제도 시찰 가다가 미국 전투기에 격추당한 것은 미국이 비행기의 목적지와 도착 시각을 암호 해독으로 알아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이렇게나 암울했지만 전파 위치탐지로는 어느 정도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근데 이건 암호 해석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습.

게다가 이런 병크 짓은 동맹국인 독일에게도 어마어마(?)한 손실을 안겨다 주었다. 당시 주독 일본 대사 오시마 히로시(大島 浩)는 퍼플 암호기로 독일의 전쟁 상황을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중에는 대서양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할지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평문이나 다를 바가 없는 비밀전문을 바탕으로 연합국은 상륙지점으로 노르망디를 택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오시마 히로시는 3국 동맹 결성으로 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야 할 몸이었으나, 이런 공로(?)로 감일등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7. 보급

7.1. 외양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의 일본군은 서류상에서나 제대로인 주둔지에 있다면 보급과 복지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식사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야채, 생선, 간식 등이 매끼에 있었고 그 양도 결코 적지 않았다. 간식으로는 사이다양갱, 찹쌀떡 등이 나왔다. 또한 서양의 커다란 건빵을 현재 한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먹고 보관하기 좋은 모양으로 개량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 그리고 일부 건빵에 별사탕이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도 일본 육군이다. 산소어뢰도 그렇고, 항모를 처음으로 제대로 굴려 전과도 따내고 묘하게 선진적이거나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왜 그걸 꼭 못 써먹었는지는 참

최정예라 불리며 일본의 수도인 도쿄와 일본 왕궁을 지키는 근위사단의 시설은 준수한 편에 속했다. 내무실은 전부 침대형에 2층 짜리 건물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28년에 준공한 보병 제3연대의 병사가 대표적으로,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4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당시로는 최신식 엘리베이터 4대와 리프트2개가 있었고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난방은 모두 증기 난방을 채용하고 있다. 다만 입대해서 사용하는 병사들은 시골 출신자가 많고 수세식 화장실의 고장이나 엘리베이터의 고장이 속출하여 속을 썩었다"고 한다.(<陸軍建立史>, <<銀星>>, 제6권, 1973) 지금의 우리나라 육군 생활관보다도 훨 나아보인다면 그건 사실이다


여담으로 우리가 아는 을 당시 일본군도 사용하고 있었다. 32년에 제정된 92식 반합을 주로 사용했다. 여담으로 이 반합은 M31로도 불린, 독일이 31년에 제정한 코흐게쉬어 31형 반합(Kochgeschirr 31)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야마토의 경우 아직까지 해먹을 쓰던 당대의 함선에 비교할 때 초호화급인 침대를 두어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렸으며 실제로 야마토급 전함의 식당은 전쟁 전 일본의 해운회사들이 운영하던 호화여객선의 조리장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을 징집해서 운영했다.

게다가 공간절약이 생명인 잠수함도 승무원 대비 침상 비율이 1:1이었을 정도다. 미국 잠수함이 1.5~1.75:1 정도였으며 소형함인 독일의 U보트는 2:1의 비율을 보인 것에 비해 엄청난 비율이다. 대신 반대 급부로 일본 해군 잠수함들이 싣고 다닌 어뢰는 1척당 6~10발이 다였다. 그것도 수상배수량 3천 톤이 넘는 이호형 잠수함들이 그랬다. 2천 톤 대의 미국잠수함들이 어뢰를 24발씩 탑재했고 배수량이 1천 톤도 안되는 독일해군의 7형 유보트들도 14발의 어뢰를 챙겼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수량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급선이 닿는 한 본토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군인부터 먹이고 본 모양. 태평양 전쟁 후기 일본 민간인들의 삶은 처절 그 자체였다. 1인당 하루 배급 식량은 300g에 불과했는데, 확 와닿게 설명하자면 북한의 배급량과 일치한다. 그나마도 쌀은커녕 콩이나 고구마는 한참 양반이고, 보통은 돼지 사료였던 콩껍질이나 고구마 줄기 따위를 잔뜩 섞어 주었다.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은 4인 가족에 하루 2마리가 배급되는 정어리였고,[13] 규정상으로는 그나마 15세 이하 어린이와 60세 이상 노인에 한해 한 달에 딱 1번 과자가 배급되었지만 어린 시절 태평양 전쟁을 체험한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그런 거 없다. 당시 일본 민간인들은 이런 배급 식량으로 끓인 '천장죽'으로 연명해야 했는데, 죽이 어찌나 맹물처럼 맑은지 천장이 다 비쳐 보인다는 블랙 조크로 붙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종전 직전의 야마토 승조원의 증언 중에는 "매운 카레라이스사과바나나, 마카로니가 들어간 샐러드가 맛있었으며, 내가 이러한 것을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일본 해군은 육군보다 그나마 상식적이어서 병사들의 보급에 좀 더 신경 쓴 점도 있다. 그러나 육군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군과 마찬가지로 주둔지에서는 좋은 급식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보급에서 좋은 점은 딱 여기까지라서 문제다.

7.2.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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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보급이 정상적일 경우에 잡힌 일본군 포로 일본군의 보급이 끊어진 후에 잡힌 일본군 포로

일본군이 잘 나갔던 시절에도 일본군은 야전취사장비를 구비하는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인 밥을 먹으려면 지급받은 쌀과 반찬으로 밥과 국을 만들던가 민가에서 징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체 보급이 없어 각 병사들이 문자 그대로알아서 연료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 결과 민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고, 점령지의 식량만 약탈한 게 아니라 땔감으로 쓰려고 멀쩡한 문짝이나 가구 같은 것도 거뒀을 정도로 철저한 덕분에 반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만 한 게 아닌 미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이나 기타 대단하지 않은 명목으로 수시로 민간인살해하거나 혐의자가 1명만 있어도 해당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식으로 잔혹한 지배 정책을 펴서 태평양 전쟁 전역에 일본군에 대항해 미군과 협력하는 수많은 게릴라가 나오는 결과를 불러온다.

게다가 전쟁 중에 병사의 수가 급속히 팽창하여 수 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게 되자, 복지는 어느새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국 보급마저 끊겨 태평양 등지에서는 몇 달을 굶은 병사들이 마침내 포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사건도 자주 목격되어 연합군과 일본 양측에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덕분에 조지 워커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부시도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항목 참조.) 중국 등에 주둔한 부대들도 민간에서 식량을 조달이라고 쓰고 약탈이라고 읽는 도적질하는 것이 주요 업무들 중 하나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현지의 민간인들에게서 식량을 구입하는 것은 유럽에서도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구입과 약탈에는 당연하게도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정부와 같은 행정기관을 통해서 거둬들이는 것도 아니었고, 군인들이 직접 빼앗아오면서 더 비효율적이면서도 더 폭력적인 양상이 되기 쉬웠다.

또한 식량 보급의 중요한 부분을 그런 조달에 의존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일본군은 아예 전선 후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조달하는 둔전 부대를 따로 운영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교전지 근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로 일관했다.

또한 일본군의 무기체계 역시 병사의 배려는 많이 부족했다. 열악한 제로센의 생존성은 이미 유명한 일이며, 1921년 영국 관함식에서 영국 해군들이 일본의 중순양함을 보고는 "우리가 타는 건 호텔쉽이군!"이라며 비아냥을 때린 걸로 보아 그 열악함을 가늠해볼 수 있다. 심지어 범선시대에나 있었던 무기와 탄약 사이에서 수병들이 해먹 걸고 잠자는 위험한 현상이 전함 같은 거대함선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등 상황이 심각했다.

장교사병의 차이도 심각했다. 초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쌀만을 지급하고 부식을 살 돈을 따로 줬다. 그래서 가난한 병사들은 부식비를 모았다가 월급에 보태 송금했는데 덕분에 쌀밥만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백미로만 밥을 먹으니 각기병이 유행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각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영양 문제는 각기병이 유명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문제를 빼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밀보다 영양의 균형이 좋고 생각보다 단백질이 많은 편이지만 쌀과 밀 둘 다 필수 아미노산이 적다는 문제가 있다. 동양 식단에서 이걸 보완해주는 게 , 그 가운데서도 간장이나 된장 종류다. 각기병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이러한 부식이 없는 식생활을 했더라면 나중에라도 단백질 결핍 등의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각기병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러나 해군은 백미 외의 다른 부식류를 충실히 하면 각기병 발병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반면 육군은 각기병은 영양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미생물전염병이라면서 그냥 쌀밥을 먹였다.

이러한 막장이 발생한 이유는 당시 육군 군의 총감이었으며 일본의 대문호이기도 한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 잘 알려진 모리 린타로 장군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의학박사였지만, 각기병 미생물 원인론을 신봉했던 것이 문제였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일본군 육군한 상비사단 분의 해당하는 병력인 1만여 명이 각기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반면, 일본군 해군은 각기병 발병자가 없었다. 이는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해결책으로 제안된 현미보리 이 당시의 서민층 식사여서 병사들이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는 의견이 컸고, 또한 야전취사에서 현미 및 보리가 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14] 특히 집단취사가 거의 배제된 일본군의 특성 상 보리는 줘봤자 제대로 조리할 여건 자체가 아님이 문제 중의 문제였다. 이 말은 그냥 만 주고 밥은 각자가 해먹으라는 소리로, 주둔지와 야전에서의 식사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양학적 문제는 1943년 이후 갑자기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그 이유는 어이없게도 보급체계가 붕괴되면서 아무거나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2차대전 종전까지 병사들은 장교의 잔반이 사병 식사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장교들은 다른 반찬들이 잘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 없었다. 또 장교가 사병의 식단을 착복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사병들의 식단은 장교들의 식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었다고 볼 수 있다.

종합하자면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나 특정부대나 주둔지 등 특수한 곳에서만 정상적이었고, 전장 등 나머지 장소에서는 기본적인 보급 상태가 굉장히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위로부터 보급이 끊겨 미군으로부터 입수한 전투식량으로 연명한 부대의 영양상태가 더 좋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미군영국이나 독일 시민보다 잘 먹던 사람들이지만 노획한 전투식량이 매일 전원에게 줄 정도로 풍족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보급이 빈약한지 짐작이 불가능 할 정도다.

사실은 처음부터 일본군의 기본적인 보급 자체가 다른 나라와 크게 차이가 났었다. 주적인 미군은 1인당 4톤의 보급물자를 지원받는 반면에 일본군은 1인당 0.9kg(2파운드) 정도였다. 0.9톤을 잘못 쓴 게 아니라 진짜로 0.9kg이다.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7.3. 콩나물과 관련된 일화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으로 수프만 쑤어먹어서 각기병으로 고생할 때 일본군은 콩을 키워 콩나물을 만들어 먹어서 각기병을 예방한적이 있다. 물론 이것이 '결정적인' 승리 요인은 아니었다. 게다가 알고 먹은 건 아니고. "콩이 자랐네. 버리긴 아까우니 그냥 먹지 뭐."였다.

사실 러시아에서도 콩나물이 나오기는 했으나 식용인 줄 몰랐기에 먹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콩으로 가득한 러시아군의 식료품 창고를 보고 콩나물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이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포로로 잡혔을 때 배식으로 나온 콩을 먹을 줄 몰라서 그냥 굶고 있었다. 식문화의 차이가 전투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문제는 콩나물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콩나물이 자라고 적군이 각기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이 전장이 고착상태에 빠진 전선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전선이 어디냐고? 바로 그 유명한 전설203고지다. 한 마디로 말해 전체가 막장에 빠진 상황에서 콩나물 하나 건진 셈이다.

8.1. 개관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등이 지금도 사회적으로 이슈다. 중국 역시 난징 대학살 사건신멸작전 당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왔다. 그런데도 나치 독일의 만행에 비해 의외로 서방 쪽에서는 이 사실을 잘 모른다. 사실 일본군의 만행은 나치와 같은 근대적인 문명 국가의 조직이 관료적으로 했다기보다 오히려 관료제의 부실한 부분들이 봉건적인 조직문화와 시너지를 일으킨 병크에 더 가까우므로 정치, 사회학 관련 연구자들에게 집중할 대목이 적음도 한 몫한다.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후자의 악당들에게는 자신들의 만행이 그리 크지 않았거나 소수 사례에 국한된다, 내지는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의 전쟁범죄 항목에서 보듯 일본군의 만행은 나치의 만행따위는 그냥 싸대기 서너번 후려칠 정도로 훨씬 가혹하며 절대로 적다고 할 수 없다. 난징대학살 때 나치 특사마저도 일본군의 학살에 경악하여 야수의 행위라고 비판 할 정도이다. 상기된 아무 생각 없이라는 것이 바로 봉건적인 조직문화다. 즉, 나치 독일과 같은 계산된 조직적 관료제 아래의 만행이 아닌, 전근대시대의 마인드로 저지른 야만인 셈이므로 만행의 원인이 약간 다를 뿐, 결과는 둘 다 참혹했다.

현재 북미나 서유럽 학생들에 대한 역사나 사회과학 교육 과정에서 나치즘, 파시즘 문제는 굉장히 크게 다루지만, 일본 제국의 병폐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이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이 별로 없는 이유 중 하나.

8.2. 포로 학대

중일전쟁 때 난징 총사령부에 참모대위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대위는 어느 날 병사들이 중국군 포로를 향해 총검술을 시전하려고 하자 깜짝 놀라서 당장 훈련을 취소시켰다. 그래서 의아해하는 장교 한명이 물었다.
젊은 대위: "전하, 전하께서는 왜 병사 훈련을 막으시는 겁니까?
다카히토 대위: 그걸 몰라서 묻는가? 왜 포로를 가지고 총검술을 연습하나? 저기 나무허수아비도 있는데 말일세!
젊은 대위: 전하. 이렇게 훈련해야 병사들의 두려움을 없애는 데 효과적입니다. 전하께서는 실전을 안 나가서 잘 모르신가봅니다.

그 말을 들은 다카히토가 어이 없어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다카히토 대위: 그런가? 그럼 내가 그 훈련 중에서 하나만 더 추가하지. 자네가 80m에서 일본도를 들고 달려와 내 목을 치게. 그러면 나는 이 권총으로 30m 정도 왔을때 사격하지, 한번 해보겠나? 뭐 일본인이 일본 황족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고 말일세.

그 말을 들은 그 대위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날 오노 소위가 말했다.
"너희는 지금까지 아무도 죽이지 못했으니 오늘은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중국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고양이로 여겨라. 용감해져라!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할 사람은 앞으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소위는 자제력을 잃었다.
"이런 비겁한 놈들같으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대일본제국의 군인이냐? 그럼 내가 지목하겠다! 오타니, 후루카와, 우에노, 타지마!"
세상에 내 이름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총에 총검을 꽂고 소위의 신경질적인 명령에 따라 공포에 질린 중국인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이 판 구덩이 옆에 서 있었다. 난 속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며 눈을 질끈 감고 소위의 욕설을 들으며 불쌍한 중국인을 향해 돌진했다. 눈을 뜨니 중국인 포로는 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다.
'살인자!'
나는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잠은 얕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점호 때문에 정렬하거나 특별 작업반에 뽑히거나 매를 맞기 위해 오두막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지독하게 아픈 환자라도 집합에는 무조건 나가야 했다. 집합은 몇 시간 동안이나 한나절, 심지어는 밤새도록 계속될 수도 있었기에, 아픈 환자들이 죽어 나갔다.


-잭 초커, 싱가포르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포병.

1943년 3월 19일...내일 철도 작업을 위해서는 600명이 필요하다...신발이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일을 견뎌 내야 한다. 이것은 살인에 버금가는 짓이다. 일본인들은 여기(수용소)와 싱가포르에 엄청난 인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 작업을 하면서 생명이나 건강은 눈꼽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망가뜨리려는 온갖 의도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히 계획적인, 냉혹하고 무자비한 반인륜적 범죄라 간주할 수밖에 없다.

1943년 5월 17일...요즘 각기병에 걸려 부풀어 오르고, 니코틴산 결핍증이나 이질, 말라리아에 걸리거나 구역질 나는 종기에 시달리며 점차 여위고 가없은 몰골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오른다. 구역질나고 증오스러운 원숭이들.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이 짐승들에게 항복해선 안 됐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얻은 쓰라린 교훈이다.

1943년 6월 22일...말라리아 증세로 몹시 아픈(그는 일하다가 실신했다) 할렘 하사는 병실에서 끌려나와 기관병 하사와 다른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매질을 당했다. 놈들은 이런 짓을 했다. 주먹으로 때리기, 얼굴과 머리를 나막신으로 내려치기, 소방관처럼 어깨로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심하게 메치기, 배와 사타구니와 늑골을 발로 차기, 대나무와 나무 그릇으로 머리 때리기...이 역겹고 잔인한 짓은 몇 시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할렘 하사는 열이 39.7도까지 오르고 얼굴과 목, 가슴, 사지에 심한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은 채로 완전히 실신했다.

1943년 6월 26일...할렘 하사는 상처 때문에 죽었다. 그는 으로 쏜 것보다도 더 확실히 저 일본인 사디스트들에게 살해당했다.

-호주군 에드워드 던롭 중령, 포로 수용소에서 몰래 남긴 일기 中

"너희는 잡석이나 다를 게 없는 것들이니까, 뒈지면 시체는 철로를 놓을 때 잡석과 함께 밑바닥에 깔아버릴거다."
-제임스 노블, 일본군 포로가 되었을 때 콰이 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 받았던 협박에 대한 회상

...목적은 미국과 영국의 전쟁 포로들을 조선에 억류함으로서, 대부분의 선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럽아메리카 숭배 사상을 박멸하기 위한 심리적 선전 활동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게 우리 제국의 힘을 확실히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 총리 도조 히데키에게

구타와 더불어 일본군의 사디스트적인 면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포로학대이다.

일본군은 1930년대 중일전쟁 시기부터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일단 난징대학살을 저지른 명분은 난징시민들중에 중국군 잔당이 숨어있다는 것이였다. 달리면 포로를 살려서 관리한다는 개념이 일본군한태는 없었다. 때문에 '''저항 없이 항복한 중국군 병사조차도 처리하기 귀찮아서 학살하기 일쑤였고 포로를 이용한 인체실험도 서스럼 없이 할수 있었던 배경이였다.

이후 이는 태평양 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주만 공습 이후 처음으로 치른 웨이크 섬 전투에서 잡은 포로를 배로 수송하다가 포로가 허락 없이 일어섰다는 까닭만으로 즉석에서 목을 베는 만행을 저질렀고, 리핀 전투 이후 대규모로 미군-필리핀군 포로를 잡자 이들을 포박한 채로 식량이나 물도 없이 수백 킬로미터를 행군시켜 아사하거나 낙오자의 즉결처분으로 만 명이 죽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탄 죽음의 행진이다. 이 때 포로의 즉결처분은 총알이 아까워 총검으로 찔렀다'''고 한다.

전후 통계에 따르면 유럽에서 독일군에게 잡힌 서방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대략 1.8%였던 반면 일본군은 무려 약 37%에 달하는 포로 사망률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더 섬뜩한 건 저 37%도 개념인 항목의 군인들이 있던 포로 수용소 사망률을 합한 수치다. 대개 개념인으로 취급되는 일본군 지휘자가 데리고 있던 포로 수용소 사망자 수치는 대략 추정치로 0.09%다. 그러니까 만약 개념인 군인들의 포로 사망자 수치를 빼면 무려 88%로 올라간다.

포로 수용소에서도 식량보급 없이 중노동에 종사시켜 연합국 포로 수만 명을 죽였고, 사소한 규칙 위반을 이유로 참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명한 콰이 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만도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과 의료 지원도 없었다. 거기다 끔찍한 작업 환경과 거주 시설, 그리고 말라리아, 뎅기열, 이질, 콜레라 등 온갖 전염병이 창궐했다. 결국 약 1만 2천 명의 연합군 포로들과 현지에서 징발당한 9만 명의 강제 노역자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이런 야만적인 포로관리를 선인들에게 맡게 하여 전후에 전범으로 몰려 연합국이 처형한 조선인들도 꽤 많다.

1945년 항복 직전에도 일부 항복 반대파들은 자국 내에 있는 연합국 포로들을 모조리 처형하여 일본의 의지를 보이자정신나간 소리도 쳤다. 물론 이 때 덴노가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여 더 이상 이런 미친 짓은 안 했다. 만일 해당 소리를 덴노가 받아들였다면 분노에 찬 연합군에게 덴노도 절대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일본군부는 이런 미친짓을 무사도로 포장해서 포로는 불명예스럽게 항복을 했으니 비겁하고 한심한 군인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일본군들이 착각하는 내용으로 사무라이는 사실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걸 불명예로 여겼다. 심지어 사무라이가 최고로 명예롭게(?) 죽는 할복도 전국시대 시절에 시미즈 무네하루가 부하들 항복 후 목숨보장을 해주기 위해 할복을 한 게 그 시초다. 당연하지만 이건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하지만 돌대가리 우리의 일본군은 이걸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긴게 문제였다.[15] 게다가 더 웃긴건 정작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을 비웃던 놈들이 정작 그 상황이 되면 반대로 자기네들이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이 되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이나 하는 멍청이가 되어있었다.

정작 진짜 무사도를 지킨 사람들은 다름아닌 일본군 개념인 항목의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사관학교나 각군 대학에서 배운 내용중(해군이건, 육군이건 성적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손자병법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했고 심지어 생명존중이나 도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때문에 항복을 하더라도 개념인들 눈에는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이 아니라 정당하게 싸워서 그 대가를 얻는 현명한 군인들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자는 항복을 하더라도 자기네들이 포로들에게 했던 학대를 되돌려 받았고 후자는 정당하게 포로 대접을 받았다.

8.3. 학살강간

여자들이 가장 고통을 받았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모두 강간당할 운명을 모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자들을 붙잡기 위해 (중략) 석탄 트럭들을 도시 중심가와 마을로 보냈다. 그리고 트럭마다 강간을 하기 위해 15명에서 20명씩 군인들을 배분했다.

우리가 그녀들을 강간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행이라는 소리는 못하겠다. 우리는 항상 그녀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 난징 대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 114사단 퇴역병 아즈마 시로 등의 증언 中

우린 달아나는 여자들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달아나면 그제야 등에 총을 쐈다. 강간할 때는 여자로 보였고 죽일 때는 돼지로 보였다. - 다코코로 코조 114 사단 병사

전투를 할 때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약탈인데, 상관도 제일선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약탈을 하는 자도 있었다. 어느 중대장은 "볼일이 다 끝났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돈을 쥐어 주든지, 아니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그냥 죽이도록 해라."며 몰래 강간을 한 뒤의 처리방식까지 가르쳐주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을 하나하나 조사했더니 모두 강도살인, 강도강간의 범죄자들뿐이다. -1939년 2월 육군성 비밀문서 제 404호, '사변지에서 귀환한 군대와 군인의 상황' 中

중국 전선에서 맛봤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 연쇄강간살인마 고다이라 요시오, 전후 7명의 일본인 여성을 강간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된 뒤 한 진술에서.

러일전쟁까지만 해도 일본군양민학살은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실제로 이것이 문제화된 게 일본군이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적백내전에 개입해서 시베리아에 출동한 1917~1921년 이후였다. 이를 일본에서는 자신에게만 유리한 명칭인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연해주 지역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우려고 했으므로 명백한 침략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험난한 시베리아에서 고전을 했고 시베리아 현지 사정상 유흥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으므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학살극을 벌이거나 강간을 일삼았다.

특히 강간이 문제였는데, 일본군 수뇌부는 강간이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생각보다는 성병을 옮겨 병사들의 전투력을 저하시키고 군기에 악영향을 주어 작전능력을 떨어뜨리는 점에 주목했다. 심지어는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했던 병사의 50%(!!)가 성병에 걸렸다니, 일본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만하다.

이것의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그 유명한 일본군 위안부. 그러나 일본군은 그 이후에도 양민학살강간을 일삼았으며, 막장 전설은 "시베리아 출병" 이후로도 지속되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까지 지속된다. 특히 난징 대학살 당시에는 미쳐 날뛰는 일본군들이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을 강간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어난징 대학살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난징강간(The Rape of Nanjing)일 정도다.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1968-2004)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녀의 부모는 난징 대학살을 피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난징의 강간>은 스트 셀러가 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아이리스 장은 일본 극우들의 끊임없는 협박을 받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3년에 파푸아뉴기니의 Kavieng에선 독일인 목사 약 10여명과 독일인 수녀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그것도 매달아 놓고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이유가 걸작인데, 연합군이 상륙하면 같은 백인이니 협력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 이유라고 독일이 자기네들 동맹국이었던 것도 잊었는지?#

게다가 당시 현지에 민간인들이 몇명정도 있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호주군이 전후 민간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샅샅이 조사하다가 2년만에 학살을 밝혀냈고, 이때 체포된 일본군 장교들은 전부 다 책임회피하고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또한 1945년 필리핀 전투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마닐라에서도 친추축국인 스페인의 영사관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를 미군의 무차별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해명했지만,당연히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뿔난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던 스페인은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당시 스페인은 형식상 중립국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세력이 독일 및 이탈리아로부터 지원받은 인연 때문에 추축국과 관계가 매우 좋았다. 당연히 일본과도 공식적으로 동맹 관계만 아닐 뿐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스페인이 단교를 해버릴 정도였으니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막나갔는지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와서도 일본 당국은 당시 모든일을 부정하려고 들거나 혹은 인정해도 어쩔수없는일 등으로 감추려고하나 그들이 전선에서 공식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공개적인 잔혹행위를 장려한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8.4. 식인

식인 항목 참조. 사건으로는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이 유명하다.

8.5. 인간 방패

일본군은 사이판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문 위키피디아 인간 방패 항목 참조.

9. 각종 부조리 및 악행


대표적으로 일본군의 똥군기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프러시아식의 엄격한 내무규율과 강한 군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본 제국은 당시 농민과 구 사무라이 출신이 대부분이던 일본군을 단기간에 근대화한 군대로 발전시키기 위해 들여왔다. 이러한 프러시아식의 군사제도는 그 전의 프랑스식의 자율적인 군사제도보다는 일본 무가사회의 분위기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지라 일본군 안에 급격히 퍼져 단기간에 근대화한 일본군의 모체로 거듭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다.

단, 프러시아등의 18세기당시 엄격한 군기의식은 전열보병을 이용한 당시 전투방식에 기인 한 바가 크다. 시대가 바뀌면서 구 시대의 이런 측면은 독이 되기 시작한다. 전열보병 항목 참조.

여기까지면 참 좋았는데, 이것이 변질되어 창의성을 말살한 간부육성교육, 군내 심층 인사들의 교류와 토론 차단으로 온 질적 저하, 폭력을 통한 강압적 통제를 거쳐서 일본군의 암덩어리로 자리잡았으니, 이러한 점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9.1. 구타

"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 편에 더 가까웠다."
모리가네 센슈, 중국 전선에서 5년간 종군했던 일본군 병사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창설기에는 천왕 숭배 교육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군기가 세워지지 않았다. 만세일계인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천왕에게 위대한 권위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신화가 천왕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겠어? 그래서 군 지휘부는 폭력으로 철저한 군기 확립을 하려고 한거야.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납득시키는 방법으로는 폭력이 제일 쉽지."
가리야 데츠일본인과 천황


사실 군대 내의 가혹행위구타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하는 일이었다. 가령 어 퓨 굿 맨, 풀 메탈 자켓미국 해병대를 다룬 영화에서도 가혹행위로 인한 사고나 자살사례가 나오고, 현대 러시아군에서도 데도브쉬나라고 불리는 선임병들에 의한 가혹행위로 불구가 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처벌이나 개선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일본군은 아예 조직을 굴리는 기본적인 논리가 바로 이런 구타와 가혹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일본군은 단기간 안에 병사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을 대면서 구타를 묵인했다. 카리야 테츠일본인과 천왕에 따르면, 일본군 창설 당시, 각 군은 번주(藩主)에 충성하는 체제에서 국왕에게 충성하는 체제로 만들기 위해,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구타를 묵인했다. 실제로 이러한 구타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 중 하나가 메이지 국왕이 내렸다는 군인칙유로 일본의 근대화는 껍데기였을 뿐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하급 장교는 상급 장교에게 맞고 맞은 하급 장교는 상급 부사관들을 때렸다. 하급 장교에게 맞은 상급 부사관은 하급 부사관을 때리고 맞은 하급 부사관들이 상급 병사들 때리며 상급 병사가 하급 병사를 때리고 하급 병사도 자기들끼리 만만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구타의 쉼 없는 고리가 군 생활을 지배했다고 한다. 일본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회고에 의하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후 해군 경리장교로 배치받은 직후 고참이라는 놈이 처음으로 가르쳐 준 것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그의 동기를 한 줄로 세운 다음 차례로 주먹으로 뺨을 갈기면서 이것이 하급자를 다루는 법이라고 가르쳐 줬단다.

심지어 가혹한 체벌이 성행하던 수백 년 전 전열보병 시대에 비교하더라도 일본군의 구타는 후진적이다. 우선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은 어디까지나 군형법상의 처벌이지 비합법적인 구타가 아니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아무런 권한 없는 고참병 따위가 아니라 장교가 직접 선고하고 공개적으로 집행하며 집행 도구나 횟수도 정해져 있었다. 물론 이러한 체벌의 강도 자체는 채찍질 수십에서 수백 대 수준이라 한 번 당하고 나면 주검이 될 정도라 구타보다 낫다고 할 것이 없었지만, 적어도 군법의 테두리 안에서 집행되는 것이므로 이후 이런 태형에 관한 사항을 군법에서 없애고 나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유럽군의 간부사이에 구타는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우선 장교끼리는 계급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를 귀족이나 신사로서 존중하는 유럽의 사회 문화적 배경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결투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하급자라 해도 장교 계급인 부하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악에 받친 부하에게 결투 신청을 받고 사이좋게 인생이 퇴갤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수 있다. 그래서 장교끼리 막 대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투에서 지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할 수도 있고, 이겨도 군법에 따라 처벌이나 좌천을 면키 어려우며, 거부하면 겁쟁이로 몰려 상류 사회에서 매장 당했다. 그야말로 뭘 골라도 고자되기

사실 여기에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식 선(禪)불교가 원조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인 팬시 댄스를 보면 알겠지만 똥군기가 여기서 유래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고, 영화와 만화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에이헤이지(永平寺)라는 절에서는 실제로 승려가 행자를 구타한다거나 하는 일이 태연했다고 한다. 참고 물론 만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만큼 과장이 상당수 있지만, 인터넷으로 이쪽 바닥에 있었다가 환속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그리고 몇몇 땡중들은 전시에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병크를 태연하게 저지르기도 했다. (참고, 참고2)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rian 'Daizen' Victoria)[16]이 1997년에 내놓은 '불교 파시즘(원제: Zen at War)'이라는 책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17] 그리고 아래에서 설명할 정신주입봉도 사실은 다른 것도 아닌 일본죽비에서 변형된 것. 일본죽비는 거의 몽둥이에 가까운 수준으로, 타악기에 가까운 한국 죽비와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강한 군기를 핑계로 병사들에겐 폭력을 당하고도 불만이나 하소연을 할 권리조차 박탈됐다. 구타 정도도 못 견디는 약골이 실전 상황은 어떻게 견뎌내겠느냐는 정신나간 논리 아래 구타를 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더 강력한 폭력을 행사했다. 복장, 내무생활, 군기, 기타 모든 핑계가 폭력을 정당화했고, 수 많은 암기사항을 강요하며 암기를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폭력의 방식이 연구되었다.

심지어 아침점호 시간에 환자는 보고하라 해 놓고, 진짜로 몸이 아픈 병사가 보고하러 오면 정신머리가 썩어서 꾀병을 부린다며 패질 않나, 총기수입 시간에 제식 소총 에 새겨진 국화 문장이 더러우면 더럽다고, 빡빡 열심히 닦아놓으면 흐릿해졌다고 패는 등 별의별 정신나간 트집거리가 다 구타의 까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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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일계에 길이 이어야 할 졸라 자랑스런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

해군은 아예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이라는 구타 전용 몽둥이까지 애용했다. 군인정신주입봉에 맞을 때 하급병들은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다리 가랑이를 벌리고 양손으로 발목을 잡아 엉덩이를 내미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럼 상급병이 온 힘을 다해 군인정신주입봉을 후려갈기는데, 하급병은 앞으로 쓰러지자마자 즉시 일어나 다시 자기가 맞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영화인 남자들의 야마토에서 보면. 햇치를 안닫은 주범이 누군지 추궁하다가, 일반사병을 때리고 하는데 그것을 후임에게 시킨다. 그러자 그 후임이 "싫습니다" 하고 하자 "뭐 이새꺄". 하면서 모범을 보여주지 하고서 만세정신주입봉이 부러지자 나중에는 쇠파이프로 때리려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후임이 "아놔 ㅅㅂ 뼈부러지잖ㅇ" 하며 그 상관을 구타한다

이 외에도 차렷 자세로 세워 놓고 명치를 위로 올려치기, 엎드려 뼏쳐 시켜놓고 다리 차서 넘어뜨리기, 아예 날을 잡아 손을 보기로 작정하고 상급병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주먹과 발로 뭇매 때리기 등이 난무했으니, 일본군 내에서 구타로 인한 의문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직접적인 구타 외에도 구보나 각개전투를 몇 시간씩 쉬지 않고 시킨다거나, 받들어 총 자세로 몇 십 분씩 세워놓는 식의 가혹행위 또한 일상이었다. 이 지경이다 보니 하급병들은 차라리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기를 간절히 바랬다고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을 이전처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어 구타는 그나마 후방에 있을 때보다 좀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도 행군 중에 무거운 것은 무조건 하급병들이 들어야 한다거나, 식량이 떨어지면 아사자 비율은 하급병으로 내려올수록 급증하는 등의 부조리는 어김없이 나왔다. 1900년대 초반 일본군의 신병훈련을 참관한 서양인은 행군훈련때 탈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여러명 나왔음에도 부대가 아무일 없었던듯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심지어 자기들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 담임이었던 선생이 이것과 비슷한 벌을 자주 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니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선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으로 일본군부의 영향이 유독 강했다. 이것도 일본군에서 하던 원조 뺨 때리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순화된 것이다! 원조는 병사들끼리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봐주려고 하면 바로 고참이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주먹으로 죽빵을 날리거나 슬리퍼로 얼굴을 사정없이 갈겨대기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걸 면하려면 서로 죽기 살기로 때려야 했다. 그 결과 전쟁 후의 일본에서는 아직 젊은데도 왼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들 -- 뺨은 보통 오른손으로 때리니까 -- 을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폭력의 결과로 일본군 병사들은 판단능력과 이성을 상실했고, 겉보기에는 상부에서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신건강에 크나큰 악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자발성이 없는 이러한 외형적인 군기는 병사들의 무단 이탈, 탈영, 명령 불복종, 심지어 상관폭행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부사관이나 장교까지 처벌을 두려워해 탈영해서 마적단이 된 사례도 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내무생활의 불만해소 차원에서 일본군은 을 이용했는데 심한 음주로 벌어지는 각종 사고도 큰 문제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군기와 정신력을 보이는 듯 하나, 실상은 가혹행위로 정신병적인 기질을 보유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점령지에서 한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가혹행위 등을 살펴보면 그 정도가 인종차별에 눈이 먼 나치 독일군이나 그들의 잔인한 행각에 복수를 부르짖은 소련군이 벌인 유럽의 동부전선보다도 심각할 지경이다..

오죽하면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국 해병대 중 일부가 민간인에게 강간이나 살해 등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미군은 일본군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에게 잘 대해줬다고 평가했을 지경이다.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세뇌시켜 오키나와 전투 중 많은 주민들이 미군을 피해 동굴 등지로 숨었지만 전투 후 주민들을 구호하는 미군들에게 놀랐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이 증언자는 물과 식량도 없이 며칠을 동굴 속에 숨어 있다가 미군들에게 구조되었는데 한 미군이 수통을 건네주면서 자기가 먼저 한 모금 마신 뒤 건네주어서 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안심하고 받아 마셨다고 한다. 그 만큼 일본군들이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허위로 세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언 중엔 일본군의 만행도 나오는데 동굴 속에 숨어있는 동안 아기가 울어대자 조용히 시키라고 다그치던 일본 장교가 아기를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당시에 일본이 오키나와 주민을 식민지가 아닌 점령지 주민 취급했다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일본 국민인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이랬으니 중국인, 한국인, 동남아인들에게 잔혹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셈이다.

이런 구타는 사병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급장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이었다. 일례로 남경 대학살의 주범이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수석참모로 사실상 전투를 지휘한 전쟁 범죄자 조 이사무(長勇) 중장은 연대장이나 여단장급(영관급) 장교들까지도 전 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먹으로 뺨을 갈겼다.[18]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지휘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부하 병사들에게 우습게 보이게 만들어서 각급 지휘관의 권위가 절대적이어야 하는 전시에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고, 일본군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본군의 구타와 병영부조리의 실태는 이미 당시 일본 사회 안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며, 당연히 일본 청년들이 군 복무를 기피하는 주요한 까닭이었다. 도망쳐 숨어버려 실종자로 처리되거나, 도피성 유학과 해외이민, 심지어 고의로 자해하거나 범죄자가 되어서까지 징병을 모면하려는 청년들이 속출했다.

당연히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맛이 갈 대로 간 일본군마저도 구타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너무 폐해가 심해서 일본군도 1944년에 대본영의 명령으로 구타나 영내폭력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는 등 내무생활에서 구타와 폭력을 추방하려 했으나 이미 때리고 맞기가 너무 일상화인 데다가 이 시점에는 군인들의 자질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전 이후 일본군이 강제 해산되어 더 이상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소련군도 원한 문제를 제외하면 대민 사고를 많이 친 건 주로 후방에서 뒤늦게 징집한 보충병들이었고 이들의 상당수는 살인 같은 중범죄만 저지르지 않았다 뿐, 살면서 무수한 문제를 일으켜 온 양아치, 갱스터들이었다.

게다가 전투 중에도 이러한 폭력과 가혹행위로 병사들을 통솔할 수는 없었기에 전투 중에는 잠깐 폭력의 고리가 느슨해졌는데 이 때에는 병사들에 건 통제력도 느슨해진다는 큰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감시의 눈길이 없어진 일본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이 형체도 없이 소멸하는 때도 일어났다. 후임이 원한이 있던 선임을 전쟁 중에 쏴 죽이고 적에게 죽은 걸로 은폐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실 이보다 더욱더 심각한 건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가담하지 않는다고 그 부하를 구타하는 짓을 했다는 거다. 사실 학살과 민간인 강간이 익숙한 일본군으로서 학살에 가담하지 않는 부하들에게 명령 불복종이라는 이름으로 구타와 폭행을 저질렀다. 자세한 건 기무라 헤이타로타치바나 요시오를 참고.

그보다도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대한민국 국군 및 한국 사회가 상당수 물려받았으니 더 무섭다.[19] 국군의 창설기에 구 일본군 장교, 정확히는 구 일본군식으로 양성된 한국인 장교가 대량으로 들어오기도 했으며 20세기 후반까지 군대에서는 이러한 구타가혹행위를 이었으나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21세기가 넘어갈 때쯤 많이 사라졌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530GP 사건이었다. 항목 참고.

그러나 잊을 만하면 여전히 구타 사고와, 또 다른 사고가 나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12년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일부 일본군 관련 단어를 공식적으로 순화시켰다. 예를들면 "구보"라는 용어를 "뜀걸음"으로.

그러나 여전히 체육계, 개그계, 의료계 등의 똥군기는 적극적인 근절 시도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

북한 괴뢰군도 창설 당시에 구 일본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을 뿐이지 일본군식으로 양성된 인재들이 모여들어 간접적으로 일본군의 악습을 물려받았다. 거기다 소련식 위계질서가 섞이고 거기다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교리가 섞여들어가서 오늘날은 과거의 대한민국 국군 보다 더한 부조리 투성이가 되어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일본군의 일부 영향을 없애는데 성공했지만, 북한군은 오히려 일본군과 똑같아지고 있다! 당연하지만 얘네들은 사실상 군국주의인만큼[20] 군대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까지 일본군식의, 아니 일본군 보다 더한 사회 부조리가 일어나고 있다.

9.2. 휴가, 휴식과 재충전의 박탈

일본군에게도 규정상으로는 1년에 20일 정도의 정기휴가가 분명히 보장되었다. 문제는 부대가 전장에 한 번 나가면 그 부대에서는 본토로 다시 철수할 때까지 휴가가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태평양의 휴가 나와 봤자 갈 곳도 없는 코딱지만한 섬들에 주둔했던 부대들이야 그랬다 치더라도, 사이판처럼 비교적 크고 일본 민간인들도 꽤 거주하는 섬에서도, 심지어 대륙인 중국 전선이나 버마 전선에서도 어디를 막론하고 휴가가 일체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방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를 후방으로 빼내서 휴식을 취하게 해주고 재충전을 시킨다는 개념도 거의 없었다.

"전쟁 중인데 휴식이라니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쉴때는 쉬어야 된다.심지어 기계도 재정비 없이 계속 돌리면 망가지는데 평시보다 극심한 피로를 겪는 군인들은 평화시 보다도 도리어 전시에 휴식을 잘 취해야 한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강대국 군대들은 병사를 전쟁터에서 휴식없이 몰아세우다 보면 어느 순간에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극한에 몰려서 산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휴식, 휴가등의 재충전 과정도 매우 중요시 했다. 미국 같은 경우 훈련도가 높고 중요한 전력이 되는 인원, 부대일 수록 더욱 휴식을 신경 썼고, 대표적인 정예부대인 공수부대의 경우 작전이 끝나면 다른 부대와 교대하여 후방으로 빠진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음 작전에 최상의 상태로 투입되도록 하고 있었다. 해병대의 경우도 태평양에서 극심한 전투가 끝나면 역시 호주등으로 빠져서 충분히 쉬도록 배려가 되었고, 조종사 같이 임무 수행에 최상의 컨디션이 보장되어야 하는 경우도 몇 시간 실전임무 뒤에는 휴식기간을 가지도록 배려가 되어 있다.

이런 특수군종이 아니더라도, 일선에서 피해가 심한 해당제대(대대 - 사단)전체를 상급부대의 예비부대로 지명, 후방으로 빼내어 수일에서 수주동안 쉬게 해줬다. 전투가 급하더라도 재충전을 위한 휴식은 중요한 것이다. 심지어 게르만과 슬라브 중 어느 민족이 절멸되느냐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있던 동부 전선의 독일군도 1944년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동부 전선 자체가 사실상 붕괴를 맞기 전까지는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후방으로 빼서 재보충과 휴식을 주거나, 일정기간 전선에서 복무한 군인에게는 휴가를 챙겨주도록 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전황이 막장이 되어 충분한 휴식과 재편성 없이 마구 밀어붙이긴 했지만...[21]

그런데 오직 일본군만은 일단 한 번 전선에 나오면 휴가가 절대 없었다! 휴가는 고사하고 현지에서의 외박이나 외출도 도저히 더는 영내에 병사들을 잡아둘 수 없을 정도로 군기가 해이해진 막장스런 상황 같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사실 일본군의 경우에는 휴가를 '안' 보내 주는 것뿐만 아니라, '못' 보내주는 면도 있었다. 잔혹한 구타와 상급병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하급병이나 조선 출신 병사를 휴가라고 내보내 줬다간 십중팔구 그대로 멀리멀리 도망쳐 일본이 패망할 그날까진 나타나지 않을 게 불보듯 뻔하고, 상급병이라도 휴가다! 야! 신난다~ 하고 비무장 상태로 영외에 나가 쏘다니다간 일본군의 학살, 강간, 에 원한이 골수에 맺혀 있는 현지 저항세력이나 현지인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끔살당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기에 원한 맺힌 전우와 조선 출신 병사에게 뒤지는 건 보너스(...). 어느 유머글에 "나는 황군인데 친구였던 조선 출신 병사가 하룻밤 잔뒤에 독립군진영에서 나한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라는 글이 있었다...흠좀무. 총부리를 겨누는게 당연한건 덤.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일본군은 고급 장교들을 위한 클럽이나 기생집은 전선 코앞에까지 줄줄이 들어서는 제정신이 있는 군대라면 상상도 못할 짓은 태연히 저지르고 있었으니 병영 안에 통조림당한 채로 이 기막힌 꼬라지를 지켜봐야 했을 병사들과 하사관, 하급 장교들이 무엇을 느꼈을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일례로 무타구치 렌야가 임팔 전투 중에 사령부 옆에 기생집 차려놓고 5시면 기생집으로 칼퇴근했다거나, 필리핀에서 타이완으로 적전도주해 온 도미나가 교지가 자기 차에까지 기생을 태우고 다녔다는 일화들이 존재한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도 이런 불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평소에야 가혹행위를 통한 억압적인 분위기로 사병들의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그 통제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전장에서는 부대가 일시에 붕괴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그랬다간 자기들 목숨부터 위험해질 게 뻔하기에 휴가를 못 보내 주는 대신 영내에서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어 줄 방안을 강구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란것이 아주 악랄한 것이었다.

9.2.1. 휴식과 재충전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음주, 약물, 안부, 가혹행위 허락


쉬지 못하는 대신 약 빨고, 술 빨고, 위안부한테 성욕 해소하라고 권장했다.

일본군과 사회 전반에 걸쳐 피로 회복제로 다량 지급된 히로뽕은 전시에 수많은 중독자들을 낳은 뒤 전후에도 사회문제가 되었고, 술에 관대한 문화 역시도 군인들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마찬가지. 위안부도 강제로 끌려나온 점령지 여성들에게서 강제로 성을 착취하여 스트레스를 풀라는 말이니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일본군이 병사들의 불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중국인 등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가혹행위를 적극적으로 명령하거나 또는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일본군 장교들의 회고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의 총부리를 언제 자기가 속한 일본군 자체로 돌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본군의 악행을 한층 더 부추겼던 것이다.

9.3. 부정부패 및

"군대는 잔인해, 이젠 내가 자네에게 그것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내지의 군대는 뼛속까지 속속들이 썩었어. 해외에서 근무했을 때, 난 내지의 군대만큼은 명예와 위엄이라는 오래된 전통을 지키는 줄 알았었지. 불행히도 귀국 후 나는 그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사실을,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추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처음엔 나도 장교로서 할 수 있는 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 몰락을 초래했다네. 난 내 마음을 다해 군을 사랑했네. 그래서 군대를 조롱하거나 좀먹는 놈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소령들과 대령들, 연대장과 사단장 같은 커다란 장애물들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네. 오직 상관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최우선이었어. 장교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도 기쁘게 해주어야만 했지...나는 부대 하사관들 중 최선임자였던 보급계 하사관과 아는 사이였네. 그런데 그의 부인은 대대장의 집에서 떠날 수 있는 날이 없었지. 왜냐면 그녀가 거기 들락날락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봐주지 않으면 남편이 결코 진급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모습들이 날 너무나 부끄럽게 했네...배급받은 보급품들은 곧바로 사령관에게 직행했고 그는 그것들을 사적인 선물용으로 다 써버리곤 했지...자네도 시모라이 중위를 알고 있겠지? 그놈은 자기 부대원들한테 자기 집을 짓게 하고는 지금 거기서 살고 있어. 난 이런 부패를 참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뭔가를 해보려고 애썼지만, 난 곧 지칠 대로 지쳐버렸어. 그건 한 사람이 하기엔 너무나도 큰 일이었지...난 결국 해임당하고 병들어버렸네. 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지.'''
마 히로시, 공지대

참고로 마 히로시는 일본의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되어 필리핀중국 북부 전선에 참전했으며 반체제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오사카 군 형무소에 투옥되었다(1943~44). 전후 군대에서 그 자신이 겪었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2차 대전 후 쓰여진 전쟁소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진공지대>를 집필하였다.

일본군은 외형적 군기의 확립에는 변태적으로 집착했음에도, 정작 정말로 군기가 엄히 선 군대라면 가장 먼저 근절시켰을 부패와 비리가 내부에서 범람했다. 장교들은 사병들의 식단부터 시작해 뜯어먹을 수 있는 모든 군수품을 중간에서 착복했고, 장교의 계급은 곧 그 장교 가족의 계급이었으며, 하급 장교의 가족들과 사병들은 상급 장교들의 사적인 일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부림당해야 했다.

안 그래도 일본 제국의 국력 자체가 부실한데다, 중요한 건 물자가 아니라 정신력이라는 병맛나는 생각이 충만한 군대가 일본군인데, 그나마 쥐꼬리만한 군수품도 중간에서 사정없이 여기 저기서 뜯어먹히니, 근위사단이나 전함 야마토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대에서 군수품이 모자라지 않을 날이 없었다.

그리고 하사관이나 상급병들은 하급병들에게 다른 중대에 몰래 들어가서 모자라는 보급품을 구해 올 것을 묵시적으로 강요했다. 도둑질할 배짱이 없거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보급품을 훔쳐 오지 못한 병사병신 취급을 받고 구타를 당했으며, 약삭빠르고 뻔뻔하게 보급품을 슬쩍해와 중대에 나눠 준 병사는 큰 칭찬을 듣고 똘똘한 병사로 대우받았다. 일단 한 번 보급품이 없어지면 도둑맞은 병사 역시 좋건 싫건 도둑질로 숫자를 채워 놓아야 했다.[22]

일본군에서 모든 보급품은 국가의 재산이기도 했으나 명목상으로는덴노의 하사품이었기 때문에, 일개 병사가 덴노의 하사품을 잃어버린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진한 장교는 거의 없었다. 정말로 보급품을 덴노의 하사품이라 여겼다면, 감히 어떻게 그 하사품을 빼돌려 자기 배를 채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내부 사정 때문에 일본군 부대 간에는 서로 훔치고 도둑맞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일본군의 성전이자 모든 병영부조리의 근거였던 군인칙유에는 "군인은 충절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고 적혀 있었지만, 병사들은 상급자가 없을 때마다 "군인은 요령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라고 자기들끼리 비웃곤 했다.

이렇게 군인정신주입봉은 군법보다 가깝고, 비열한 놈일수록 이득을 보며, 선랑한 이는 짓밟히고, 약한 자는 먹잇감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군인정신주입봉으로 맞아가며 문자 그대로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은 먹은 짬밥에 정비례해 양심이 메말라갔다.

결국 그들은 자기나 자기가 속한 부대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불이익과 고통을 주는 행동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10. 한반도에서의 일본군

10.1. 개관

1910~1945년 사이의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해서는 조선군(일본 제국) 항목을 참조할 것.

10.2. 조선 군인

조선 군인이란 신분도 있었는데 이들은 1907년에 해산당한 대한제국군 가운데 잔류해 일본군에 편입된 자들이다.

그 밖에 일본군에 편입이 아니라 입대한 인원은 조선인 일본군을 참고할 것.

10.3. 한반도에서의 일본군 만행

  • 1875년 운요호 사건.

  • 1894년 6월에 전주화약으로 이미 동학농민운동이 해산되었는데도 억지로 군대를 보내어 한성에 눌러앉았다. 6월 21일에는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면서 경복궁을 기습 점거하는 것과 동시에 여타 조선군 군영을 공략하여 한성을 장악, 흥선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김홍집을 시켜 갑오개혁에 들어갔다. 이어서 7월 25일과 28일에는 각기 해상과 육상에서 청군에게 선전포고 없이 선빵을 날리니 이렇게 시작된 것이 청일전쟁이며 이러한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동학농민운동도 다시 봉기했다.

  •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으로 체결장소인 덕수궁을 대거 점령하고 고종과 관료들이 체결을 거부하게 될 때 언제든지 공격할 태세를 취하면서 대기하였으나 체결이 성사되면서 덕수궁에서 철군하였다.

  •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때 해산에 분개하여 교전을 벌였던 대한제국 군인들을 제압하고 대거 사살 및 체포하며 그야말로 잔인무도한 만악과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에도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대거 합류한 의병이나 독립군과 연이은 교전을 벌였고, 급기야 호남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서 이들을 말 그대로 쓸어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벌인 만행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必要韓紙?

  • 1919년 3.1 운동 때는 경찰과 함께 일본 군경(軍警) 합동 소탕작전을 벌인 끝에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와 조선의 양민들을 대거 학살하였고, 육군이나 헌병은 물론 해군 병력까지 출동시켜서 만세운동을 저지하며 진압하는 강경책을 일삼았다. 이후에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질렀고, 그 외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 및 만세운동을 하는 자들은 모조리 집단학살을 하였다.

  • 1920년에 참전한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에서는 홍범도, 김좌진 등이 이끌었던 조선 독립군에게 대거 병력이 전사하는 참사를 낳았다. 일본군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갔거나 무단탈영까지 하였으며 일부는 그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 있는 조선 양민들을 모조리 잡아서 학살하였다. 1940년 한중 연합군 때에도 기습작전에 휘말려서 대거 전사하였고,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갔거나 탈영하는 사태를 빚었다.

  •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무고한 청년 및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일본군에 강제로 편입시키고 연합국과의 교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에 따라 35년만에 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하였다.

11. 전후의 일본군

11.1. 패전 이후

관동군의 상당수는 남자들이 사망해 여초이던 소련의 재건을 위해 수십 만이 포로로 끌려갔다. 일본군 패잔병을 참고할 것. 그 밖에 일본 열도에 남은 좌관(영관)급 이하의 장교들은 1952년 이후 자위대에 입대가 가능해지면서 일부가 자위대로 흡수되었다.

11.2. 일본군 잔당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태평양 전선에 갔던 일본군들의 일부는 일본의 항복을 부정하거나 통신 두절로 일본의 패망을 통지받지 못하거나 하는 등의 까닭에 종전 뒤에도 계속 무장한 상태로 1970년대 중반까지 활동했다.

이쯤이면 이게 군대인지 산적떼인지 구분이 불가능 할 지경이다. 물론 현지 군대나 경찰들과의 총격전 끝에 많은 수가 죽거나 항복하였고, 일부는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답시고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인도차이나 독립전쟁에도 참여했다.

김형배의 만화 황색탄환에서도 짤막하게 보이는데, 베트콩들의 전술이 구 일본군 전술과 비슷하다. 베트콩들을 훈련시키는 일본군 중령이 있다는 등 일본인 기자의 입을 빌어서 언급한다. 다만 이 때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참전하기 시작한 시기라... 또한 일본에서 하리마오라는 일반 마인어 명사를 널리 알린 데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받는 옛 일본 드라마 쾌걸 하리마오도 전후 동남아 독립투쟁에 숟가락 얹으려는 일본군 잔당들에서 딴 듯하다.

사실 통신 두절로 패망을 통보받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핑계일 뿐이고, 현실적으로는 일본이 이미 패망했다는 사실을 몇 개월 정도라면 모를까, 몇 년씩이나 모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철저하게 세뇌당한 상태라 도저히 패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일본군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이미 끝나버린 전쟁에 낭비하는 얼간이 짓을 벌였을 뿐이다.

가장 유명한 구 일본군 잔당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9년 만인 1974년 필리핀에서 생환한 육군 소위 노다 히로(小野田寬郞)이다. 이 인간은 패전 소식을 들었는데도 패전을 부인하고 종전 뒤에도 계속 숨어 필리핀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수행하다가, 이 사실을 알고 일본 정부에 이끌려 온 전 직속 상관의 투항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투항했다. 이 사람은 숨어 지내는 동안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주변 마을 사람들을 여럿 살해했지만 일본의 극우들은 이를 사소한 문제라며 무시해 버리고 "충성스러운 일본군의 모습"이라고 미화만 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음식을 훔치다 들키면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목격자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며[23] 이는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까지 저지른 짓이다. 필리핀의 일본차관 유입이 아니었으면 살인죄로 당연히 사형이나 최소 무기징역이 기다릴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이 인간의 관점에서는 지금도 전쟁 중이었으니 그 관점에 동의한다면 필리핀군을 출동시켜서 그대로 사살해 버려도 무방하다. 실제로 필리핀군은 오노다 히로를 사살하기 위해 수 차례 토벌군을 파견했고, 처음에 3명이서 활동하던 오노다의 부대는 2명이 차례로 죽어 마지막에는 그만 남았다.

참고로 오노다 히로는 이후 전후 일본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며 브라질로 건너갔다가 일본에 돌아왔고 이후에도 일본 극우 세력과 밀접히 교류했다 물론 그와중에도 간간히 인터뷰나 매체등에서 자위대를 까거나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헛소리를 하다가, 2014년 1월 16일 결국 천수를 누리고 향년 91세로 사망했다, 젊은 시절을 쓰레기 같은일과 전후해도 끝까지 살인과 약탈이나 하면서 낭비한것 치고는 상당히 잘살다가 갔다.

물론 오노다 히로처럼 악질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세뇌된 상태라 차마 항복은 못하고 그저 숨어다니기만 한 일본군도 있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코이 쇼이치. 1972년 발견 당시 그는 무기를 제대로 손질하지 않아 여기저기 녹슬어 있는 등 전형적인 패잔병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패전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채 항복을 거부했지만, 동굴에서 지내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는 형태로 숨는 등 오노다와 달리 최소한 사람으로써 지킬 선은 남겨서 그 때문에 동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뒤 일반인 신분으로 살아가다가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많은 2차대전 종전 이후 일본군 생존자들이 잊을 만하면 발견되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상당수가 필리핀 반군과 함께 활동하면서 그대로 정착한 경우도 많으며 혼란할때 그냥 귀화해버린 이들도있는듯 하다.

12. 대중 매체

12.1. 한국

일제강점기를 겪어왔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주로 구한말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및 드라마 등에서 빠짐없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일본군들은 한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조선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하며, 그 밖에도 위안부 소녀들을 선동하여 성노예로 끌어가는 만행도 저지르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며 포악한 존재로 나온다. [24]

문학 역시 예외없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면 글귀에 일본군의 악행과 만행이 나오고, 조선왕조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에도 임진왜란을 거쳐서 일본군이 자주 등장한다. 구한말 및 근대를 소재로 한 소설 등에는 운요호 사건 및 강화도 불평등조약,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사변 등을 거쳐 자주 그리는 편.

연극에서는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연극배우들이 일본군 연기를 맡으며 일본군의 만행과 악행을 재현한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관객이 현장에서 바로 볼 수 있다는 특성을 보면 일본군의 모습이나 만행 등을 생생히 재현하는 셈이다.

그 밖에도 일부 3.1절 만세운동 재현행사 때 일본군으로 분장한 엑스트라들이 나와서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재현을 거쳐서도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일본군은 악질적이고 살인마와도 같은 존재로 나온다.

다만 영화 놈놈놈과 같이 악랄한 측면보다도 일본군의 멍청함과 병신스러움이 더 드러나는 특이한 때도 있다.

12.2. 중국

중국의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일본군들은 중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한 존재이며, 그 밖에도 위안부 소녀들을 선동하여 성노예로 끌고 가는 만행도 저질렀으니 중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고 포악한 존재인 편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미친 짓거리를 생각하면 당연하다. 중국의 악역(일본병사) 전문 배우는 "악당은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말로 일본군의 역할을 표현한 바 있다. 애초에 중국에도 '쪽바리'와 비슷한 어감의 '르번구이쯔'(악마 일본새끼들)라는 욕이 있으니 일본군을 미화시킬 수가 없는 환경이다.

다만 홍군(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대하드라마라면 잔학한데 졸라 잘 싸우는 것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2011년 방영한 상해, 상해 같은 드라마에서는 팔로군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 트럭 속 소년병 엑스트라가 머리에 총알 관통상을 입는데도 비명 1번 지르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팔로군 게릴라의 공세가 멈추자마자 트럭의 포장을 걷고 압도적인 기관총 화력으로 팔로군 게릴라를 학살하는 것으로 묘사. 아무래도 홍군의 영웅적인 투쟁을 강조하려면 적이 그만큼 강력하다라 보여줘야 하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 전과도 그랬고.

12.3. 서방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일본군은 당연히 악역으로 나온다. 미국 쪽 매체에서는 특히 태평양 전쟁의 지옥같았던 경험담이 들어가 인간미를 찾아보기 힘든 미치광이 집단으로 묘사하는 일이 많다. 다만 이따금 '그들도 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동정적인 묘사를 하는 매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린호넷케이토 같은 경우 일본군이었지만 난징대학살을 목격하고 분노하여 같은 부대원들을 죽이고 탈영했다는 식의 뒷설정도 들어갔다. 다만 작품의 기초적인 설정 자체가 각이 딱 잡혀 있지 않아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설정이 바뀌는 때가 있다.

한때 한국에서 친일논란이 일었던 더 퍼시픽은 의외로 무미건조하게 일본군을 조명한 편이다. 옹호의 시선 그런 것도 없이 일본 극우들이 보면 뒷목잡고 쓰러질 연출을 가감없이 집어넣었다. 특히 오키나와 민간인들을 인간 폭탄으로 미군들에게 내보내 그 자리에서 폭사시켜 버리는 장면 등 일본군 막장 전설의 고증(...)이 리얼하기에(...) 한 화에서만 Kill JapsFucking yellow monkeys같은 과격한 대사가 쉴새없이 남발되고, 상술한 묘사를 포함하여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와 병신스러움이 아주 정확하게 보여지고 있다.

한편으론 현대 일본의 위상이 한때 세계경제 2위까지 했고 지금도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데다 잘 나갈 당시 적극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미화, 포장하여 수출하여 서구에서 상당한 숫자의 와패니즈들, 즉 서양 일빠들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뭐든지 신비주의적으로 보며 동경하는 이들에게 있어 총들고 빵빵 쏴대는 적군을 앞에 두고 군도들어 "반자이!"라 외치며 돌격하는 일본군은 마치 무슨 판타지 군대를 보는 듯해 신선함!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물론 와패니즈들을 서방권 전체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으며, 절대적으로 소수인 것이 현실.

12.4. 일본

사실 일본군의 막장스런 실태는 일본인들도 꽤 잘 아니 주로 반전(反戰)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일본군 내부의 부조리나 병크가 곧잘 나온다. 반면 유명한 사카이 사부로를 비롯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며 좋은 성과를 거둔 몇몇 인물들을 영웅담의 소재로 곧잘 쓴다. 물론 한편으로는 상당히 미화시켜 보여주거나 하는 때도 있지만 의외로 이쪽이 더 마이너하며 크게 인기도 없다. 애초에 보통 과거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다.

일반적으로 일본매체내에서 일본군 내의 가혹행위나 부조리는 반전소설에서도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독일과 매우 대조적인데, 독일의 여러 영화들은 2차대전을 묘사할 때,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클리셰처럼 나치 독일의 군사조직들, 즉 슈츠슈타펠뿐만 아니라 독일 국방군까지도 각종 만행이나 사악함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독일에서 만든 영화 유보트(Das Boot)는 잠수함이라는 특수성때문에 이런면이 잘 안 나타났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 나치시절의 군인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문제는 일본영화에서는 아예 그런 거 없다는 점. 그러니 일본의 2차대전 영화들은 1950년대부터 제작되었지만, 대부분 일본군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미화하며, 스스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버마의 하프"나 "호타루" 같이 극우와 거리가 먼 반전영화도 마찬가지며, 전쟁의 비극은 그리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잠시 구타나 일본군의 육해군 갈등이 묘사되긴 하는데, 아마 일본인 감독이라면 이런 장면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공통적으로 일본 군부가 고의로 전쟁을 일으켰다거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막장 군대다운 면모는 보통 안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자국민에게 "자국군이 악당이었다"라고 생으로 들이밀면 당연히 기분 나빠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얘기하는 의견도 있지만, 일본 사회가 과거사의 반성을 제대로 안했다는 뜻이다.

현대 독일인들은 네오나치 빼고 독일 나치군의 만행을 부정도, 미화도 않는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본군의 만행을 미화하거나 전범들을 영웅시까지 하니, 독일과는 참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독일도 과거를 곰씹으며 반성하기보다는 흑역사니까 잘 수습하고 덮어버리자에 가깝기 때문에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아주 깨끗한건 결코 아니지만(냉전시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재무장을 하면서 최소한의 표시를 한것에 불과하다 사실 유태인 학살을 제외하면 소련내에서의 슬라브인학살,집시학살등은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그것을 2차 창작으로 이어 상품화하는 경우도 있다는게 문제다.

가끔 가공전기 등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도 있다. 그래서 가공전기지만. 게다가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해군만큼은 미국과 동급으로 나온다.

그러나 모든 일본 매체가 일본군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중 전쟁경험을 바탕으로 한 만화들이 있는데, 거리낌없이 묘사하는 당시 일본군의 막장행태가 나오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작가 미즈키는 지옥과 같은 동남아시아 전선에 갔었고 왼팔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어설픈 동경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일품이다.

오시이 마모루 작품에서는 일본군은 그리 안나오지만 군대가 되려는 자위대가 자주 나오는 편으로 일단 작품상의 자위대는 까이는지 안까이는건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세력으로 나오는데 일단은 전반적으로는 약해보이게 나온다(...). 계엄령이 떨어져서 자위대 소속 치안군이 도쿄에 주둔하게 되는 패트레이버 2번째 극장판에서 여러가지 추태를 보이는데, 그중 걸작인것이 비행선이 추락하면서 가스가 누출되자 집단으로 패닉에 빠져서 멈춰있는 에스컬레터로 올라가다가 전부 떨어지거나 하는등의 추태를 보인다. 이 가스는 후에 착색가스로 밝혀졌다.

13. 결론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이 혼자서 전쟁을 다 해먹은 탓에그럴 수 밖에독일군의 빛나는 전공에 밀려 독일의 따까리 정도로 취급받는 그리고 웬만해선 2차대전사에 언급마저 되지 않는 이탈리아와는 달리 일본은 당시 근대화도 미처 못 된 2군집단이었던아시아 최강이라는 수식어구가 있었으며 세계 최강 미국에게 직접 대적하1방 먹이고 나서 미국에게 배로 퇴갤 당했지만기까지도 해 본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다. 자랑이다

당시 일제는 아시아의 국가들에게 어찌 못할 강국이었고 총칼로 악랄하게 착취하였지만, 장님들 사이에서는 애꾸가 왕 결국은 연합군에게 응징받았다.

그렇게 못난 곳이지만 주목이 더 되는 까닭은 소의 꼬리인 이탈리아보단 닭의 머리인 일본이 더 주목받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되겠다.

반자이 어택으로 비웃음을 받는 일본군이지만, 모든 일본군이 다 무개념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런 사단도 있었다. 여기서 언급된 제4사단은 그 유명한 오사카 고스톱 사건을 일으킨 부대다. 다만 일본에서 관서 지역은 다소 지역차별을 받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제4사단은 다른 일본군 사단에 비해 다소 지능적인 활약을 벌였다는 증언도 보인다.

사실 일본군은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아시아 한정으로는 탈아시아 선구자적인 군대였다. 일본군은 세계 최초로 항공모함을 공세에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세계 최초로 전차의 집단운용을 통한 기동작전을 시도했다. 문제는 둘 다 그다지 중요성을 느끼지 못 했고, 어떤건 기술력이 모잘라 결국 시도만 해보고 그대로 덮어놓고 묻어버렸다.

항공모함으로 재미를 봤지만 여전히 중요전력으로 인식하지 못했고, 함대결전사상에만 매달려 그냥 전함을 호위하는 수단 정도로 취급하며 작전에서 미끼로 쓰는가 하면, 최초로 전차를 집단운용해 기동작전을 실시한 할힌골 전투에서의 전훈은 그냥 무시하고, 해당 전투를 패배한 전투라 하여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은폐하기에 바빴다. 그 뒤로도 전차는 물론 기본적인 대전차 수단에조차 딱히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음은 덤이다. 이게 다 기초부터 썩어빠진 똥군기와 부대교육의 부산물이다.

전적을 본다면 일본군이 아시아에서 강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중일전쟁에서 중국군은 손실교환 비율이 컸고, 팔로군이든 국민당군이든 그 약함에 큰 차이는 없었다. 독립군은 '비정규군'이라는 태성적 한계상 병력과 물자의 수에서 부터 열세였고, 외의 요소들 역시 '정규군' 일본군에 비해 너무 불리해 청산리 대첩 이후에는 별다른 큰 전과를 보이지 못하고 국토가 완전히 유린당한 이후 보급 등 기본적인 문제를 풀려면 중국군이나 소련군 등 다른 군대와 연합해야 했다.

또한 일본군의 똥군기 등 뿌리깊은 악습은 전후 대한민국 군대대한민국 사회에 스며들었다. 물론 이와 같은 상명하복은 조직 유지를 위해서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내에서 상명하복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사건중 물리적 충돌 심하면 아랫사람을 죽음까지 몰고가는 사건에 과거 일본군의 영향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군대에게 나라를 빼앗겨 35년간의 지배를 겪은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사실을 정확히 알고 이 모리배들을 훌륭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일본군의 실상은 군대라는 간판을 내건 일인간실격 도적집단들이었다. 아시아 정복이라는 광상을 가지기 위해 침략전쟁을 일으켜서 식민지와 점령지역을 끊임없이 수탈하고, 각종 만행을 저지르다가 패망했음을 생각하면 일본 입장에서도 결코 자랑거리라 할 수 없으니, 일본 역시 일본군의 행태를 절대로 본받아선 안 될 것이다.

14. 기타 관련 항목

14.1. 참고 서적

  • 《미완의 파시즘》
  •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 《대본영의 참모들》
  • 《일본의 군대》
  • 《일본군사사》
  • 이노세 나오키 저《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 한도 가즈토시 저《쇼와사》
  • 니얼 퍼거슨 저《제국》, 《증오의 세기》

14.5. 연관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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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똥군기를 비롯한 국군의 병폐의 근원을 구 일본군 출신이 대거 참여했던 초기 국군의 창설 배경에서 찾는 의견이 많다.
  • [2] 그 앞에 '무적'이라는 수식어는 꼭 붙였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전적을 보면 이건 그냥 코미디다.
  • [3] '止(や)む'는 현대에는 보통 자동사로 쓰여 '멈추다'라는 뜻이지만, 고어에서는 타동사로도 쓰여 '끝내다', 나아가서 '쓰러뜨린다'는 뜻이 있다. 끝의 む는 의지를 나타내는 조동사로, 읽을 때는 ん으로 읽는다. 고사기(古事記)의 진무 덴노 기사에서 나온 표어로, 상당히 고어체라서 당대 일본인도 저 표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해석하기 곤란했다고(…).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높으신 분들이 아랫것들한테 있어 보이려고 한자를 필요 이상으로 마구 섞어 넣은 훈시를 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 [4] 당시의 상황에 가려져 그렇지 국민당 역시 온갖 갖은 부패와 실정으로 민심을 잃어가는 처지였다. 단, 우리가 아는 막장 국민당군의 이미지는 군벌군의 것이고, 장제스 직속의 중앙군은 항전 의지도 충만했고 전투력 또한 일본군 못지 않았기에 장제스 개인으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
  • [5] 정작 할힌골 전투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숨겨버린 일본군
  • [6] 별장에 물건을 훔치러 갔다고 보면 된다.
  • [7] 이게 더 이를 갈게 만드는 이유는 이미 만주와 북한지역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뇌부들과 또 당시 북한에 지사를 두고있던 대기업 간부들은 이미 소련군이 북한으로 입성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첩보를 입수해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으로 들어올 것을 미리 알아낸 이들은 즉시 자신들의 가족과 자신들만 야밤도주격 피난을 한 것.
  • [8] 사실 오송전투서 국민당군이 후퇴를 한 이유는 장제스의 오판이 더 큰 이유였다. 당시 장제스는 일본이 중국과의 전면전을 펼칠거라 예상하지 않았고,일본군의 우회공격에 대비하겠다고 부관들의 만류에도 불구,오송 방어선 병력의 일부와 기타 병력을 합쳐서 총 70만의 병력을 상해-남경 방어선에 집중시켰다.
  • [9] 일본군은 소수를 제외하면 미군의 정신력을 얕보기는 했어도 미국과의 전쟁이 벌어질 시 자기들의 열세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건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 때 러시아처럼 먼저 떄리고 조금 버티면 미국이 지쳐서 먼저 협상 나오겠지라고 생각하고 전쟁을 벌였지만 미국은 차르의 삽질로 막장을 걷던 러시아 제국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네놈들이 진주만을 떄렸으니 우리는 네놈들의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 [10]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의 박정희 전기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일본 육사 교과 과정의 반 이상이 이런 고전과목이라고 한다.
  • [11] 단적인 예로, 블리자드 게임인 스타크래프트만 해도 드랍쉽 조종사의 계급이 '준위' 이다. 그 종이비행기 취급받는 망령 전투기 조종사는 계급이 대위고..
  • [12] 몇몇 몰지각한 사람들이 타국에 가서 타 종교의 시설 앞에서 통성기도를 하는 격이다.
  • [13] 정어리항목을 참조하면, 정어리 2마리면 코스트코에서 파는 내용물 80g짜리 통조림 한 캔이다. 이걸로 한 사람도 아니고 4인 가족이 하루를 버티라는 거다!
  • [14] 한국군 역시 한국전쟁 당시 일단 야전취사를 할 때는 조리에 시간이 걸리는 보리를 빼버리는 일이 많았다.
  • [15] 사실 전국시대에도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해도 칭찬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 [16] 작가 본인도 에이헤이지에서 수행하고 고마자와 대학을 나온 미국인 불교 승려였지만 일본 불교사를 공부하는 와중에 이런 더러운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 [17] 한국에서는 2013년에야 번역 출간되었다.
  • [18] 이때문에 사실은 자살한 게 아니라 분노한 부하들의 원한을 얻어 살해당하고 자살로 위장당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 [19] 완전히 물려받았다는 소리는 과장에 가깝지만 일본군이 '기반'을 깔아둔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다.
  • [20] 대한민국에서 1987년 이후로 군사주의적 분위기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 [21] 참고로 태평양 전구는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휴식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어느 섬을 점령한다음 차기 목표의 섬을 공략하는데는 육,해,공군을 융합한 정교한 입체계획이 필요했고 보통 수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유럽전선과는 다르게 신경써야할 부분이 많았다. 때문에 섬을 점령하는데 투입된 부대는 작전이 끝나고 하와이, 호주/뉴질랜드같은 후방지역, 마리아나제도, 그게 안된다면 기존에 확보한 전진기지 섬들중에 괜찮은 곳에서 몇 달간 주둔하면서 병력보충(육군과 전쟁후반기의 해병부대엔 전투일선으로 보충병의 수시증원이 이루어졌다.)과 재훈련을 실시했다.
  • [22] 간단히 말해 군대에서 도둑질을 배운 격이라 보면 된다.
  • [23] 약탈,살인뿐만아니라 재미로 강간살인,방화같은 온갖 쓰레기 짓을 하였다. 그래서 인지 오노다 히로에게 피해입은 필리핀 주민들은 오노다 히로라고 하면 이를 간다
  • [24]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특성상 현재의 일본 자위대는 주요 소재로 안 다루는 편이라 현대가 배경이던 한국 드라마에는 자위대가 없지만, 한국 영화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해군해상자위대가 대치하는 장면이 나온 적은 있으나 마지막에 아무 일 없이 서로 철수하였다.
  • [25] 하는짓이 점점 일본군을 닮아가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