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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last modified: 2015-04-01 15:20:49 Contributors

仁祖反正

조선 시대의 반정
무인정사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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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반정의 시작
3. 반정의 진행
4. 반정의 영향
5. 인조반정을 다룬 미디어들

1. 개요

조선의 3대 반정(쿠데타)의 하나이자 흑역사로, 1623년(광해군 15년) 3월 21일 서인 반역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진짜로 막장을 달린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능양군의 개인적 원한이 크게 작용하였고 당리당략적인 이해 요소도 있었다.[1][2]

연산군 때는 내각을 구성하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정파도 이를 선선히 응낙했지만(이 때문에 연산군때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죄다 공신이 되었다는 문제로 위훈 삭제 논란이 벌어져 기묘사화의 발단이 된다.) 광해군 때는 사실상 광해군 시기를 거치면서 지지기반인 대북 전체가 타 정파의 공공의 적이 된 판이라 이들 전부를 타겟으로 삼았고, 전부 제거했다. 물론 100% 전멸한 것은 아니지만 대북계열은 '학맥'의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제거당했기 때문에 사실상 당파로써는 완전히 소멸.[3]

2. 반정의 시작

반정이 일어나기 3년전인 1620년 영창대군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불만을 품은 세력이 조금씩 등장한다. 이중에서 능양군의 외삼촌이기도 했던 구굉은 친구 이서와 친척인 구인후, 신경진, 최명길 등을 은밀히 포섭해 거사 준비를 모의했다. 구굉은 그 후 많은 병력을 수하에 둔 장만을 끌어들여 거사를 행하려 했으나 장만은 위험하다 여겨 구굉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고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비록 시작은 구굉,이서 등이 주도했으나 반정 시 실질적인 공을 세운 주도자에 해당되는 인물은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으로 이들은 반정 성공 후 모두 반정공신에 올랐다. 반정은 실행 직전 이이반의 누설 때문에 탄로날 뻔하기도 했지만 일정이 앞당겨져 예정대로 단행되었다.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은 1623년 음력 3월 12일 밤,[4] 홍제원에서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이귀를 호위대장으로 삼았다.

3. 반정의 진행

능양군의 600∼700명의 병력을 필두로 장단의 이서군, 이천의 이중로군이 속속들이 합류했다. 그러나 반정 직전 포섭한 이이반[5]이라는 인물이 어찌된 셈인지 내막을 고변해 반정 세력들 사이에서 혼란이 일어났고 특히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는 집에 틀어막혀 두문불출하자 이에 급한대로 무관인 이괄을 대장으로 창의문으로 진군했다. 게다가 이미 이들과 내통한 훈련대장 이흥립이 창의문을 내어주어 별다른 저항 없이 궁궐을 접수했다. 반정군은 도끼로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로 쳐들어 갔고 반정이 성공했다고 느낄 무렵 궁궐에 불을 질렀다. 반정에 참여한 이들은 가족들에게 궁궐에 불길이 보이지 않으면 실패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라 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반정이 성공하자 서궁에 유폐중이던 인목대비는 혹시나 자신을 해하려는 음모가 아닌가 싶어 궐문을 걸어잠그고 반정의 수뇌부들이 와서 "광해군 개xx를 폐했으니 문 좀 열어주세염." 하고 청했음에도 씹었으나 능양군이 직접 와서 설명을 하고 나서야 믿고 "내가 이 날을 보기 위해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나갔구나!"라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반정 세력을 지지하여 명분을 실어주었다. 광해군은 야밤의 기습에 제대로 대처해 볼 겨를조차 없이 궁궐을 탈출해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했으나, 밀고자 때문에 붙잡혀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강화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옥새를 내리기 전에 인목대비가 '이혼(광해군)과 이지(세자)의 목을 베어 살점을 씹기 전에는 책봉이고 나발이고 없다!'라고 버텨서 잠시 소동이 있었으나 신하들이 임금을 폐한 예는 있어도 주륙한 예는 없다고 만류했고 '그러면 이이첨, 유희분 그 새끼들이라도 내 손으로 조져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했으나 '즉위 후에 하면 늦지 않는데 왜 이러셈?'이라고 눈총을 받았고 별수없이 옥새를 내려주었다.

4. 반정의 영향

광해군 못해서 쫓아내고 자리 차지한게 하필이면 인조다 결국 조선은...
이후는 그 당시 수순이 의례 그러했듯이 타겟인 정인홍, 이이첨, 이위경 등 대북의 핵심 요인들 대부분이 참수되었고 200여명에 달하는 그 추종자들도 유배에 처해졌다. 소북의 경우에는 이귀 등이 폐모론에도 반대한 상황들을 참작하여 가벼이 처분할 것을 청했으나 인조는 닥치고 죽여라!를 주장하여[6] 유희분과 그의 아우 유희발을 비롯하여 소북의 수괴들이 처형당했고 소북은 대북과 사이좋게 역사에서 퇴장하고 만다.

한편 광해군의 부인 유씨와 세자 이지 부부 등 가족들 또한 폐서인시켜 유배에 처해졌으며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죽었다(세자와 세자빈이 탈출을 하려다가 실패해 자결하고, 부인은 이 소식을 듣고 울화로 죽었다.). 그런 와중에도 광해군은 천수를 누린 듯.[7]

또한 반정의 주역인 이귀, 김류, 이서, 신경진[8]을 위시로 한 사대장과 최명길, 심기원, 이시백, 이시방[9], 김자점 등 33명은 정사공신으로 신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고 마침내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반정을 방조했던 남인들도 은근히 떡고물을 얻어먹게 되었다.(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고, 게다가 외교를 막장으로 하는 바람에 병자호란 크리.

그런데, 반정 초기 명나라는 이를 그닥 환영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뭘 잘못했길래 폐위됐냐라는 비난[10]왜군을 끌어들여 광해군을 죽이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다고. 나중에 모문룡의 추천으로 22개월만에 명의 승인을 얻었고, 때문에 이후 모문룡이 가도에 눌러앉아 깽판치는 걸 제대로 억제하지 못해 고생했다(청의 침공의 주요 대의명분 중 하나가 가도의 모문룡이다. 거기다 이 모문룡이 이괄의 난 당시 이괄에게 더 호의적이어서 조정에서 모문룡을 설득하는 데 비상이 걸렸던 적도 있다…).

백성들 입장에서 인조반정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민생을 살피지 않고 지들끼리 권력싸움을 하던가 숙청된 북인정권 실세들 재물분배문제로 서로 다투는 등 인조반정 명분중 하나인 민생에는 신경쓰지 않았으며 오죽하면 " 북인들이 타던 말(가마)을 타고 북인 살던 집에서 떵떵거린다. 니들도 그들과 다른게 뭐냐"라는 식의 기록들이 많이 나올 정도였다.[11]

5. 인조반정을 다룬 미디어들

조선시대의 다른 두 쿠데타인 계유정난과 중종반정에 비해 묘하게 현대 매체에서 덜 다뤄지는 사건이다. 인조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인조 치세 자체가 치욕스러운 시대라는 대중적 인식도 있고 그나마 병자호란 이후의 인조 치세 후반기가 주된 배경이 되며, 광해군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광해군을 다룬 사극들이 크게 흥행하지 못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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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왕기가 흐른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정원군이 저택을 빼앗겼으며 동생인 능창군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당했다가 죽었다. 아버지 정원군도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다만 정원군도 원래 그다지 인망이 좋은 편은 못 되었다고. 여기에 더해 서인의 정치적 선택을 받은 면도 간과할 수는 없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고 세자 후보 중 하나였던 신성군(인빈김씨 소생)의 동복아우인 정원군의 장남이였고 유능해서 제거당한 능창군의 친형이었기 때문에 서인들의 쉬운 포섭대상...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수의 칼을 갈며 참여했다. 책봉의사가 있기도 했던 신성군의 동생이였기에 정치적으로 반정의 명분을 얻기 쉬웠던 것. 인조(능양군)는 이런 상황과 자신의 개별적 원한이 겹쳐서 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 [2] 또한 인조의 장인은 남인계인 한준겸이였던데다 남인계열 또한 광해군시기 대북의 전횡에 갈수록 정계에서 배제되고 있었기에(임란 극복의 일등공신이자 남인의 수장이였던 류성룡을 쫓아낸 게 북인의 수장인 정인홍이며, 류성룡 뒤를 이은 이원익 또한 결국 밀려났다.) 이원익이 암묵적 찬성을 했기에 남인들의 지지도 얻었다.
  • [3] 기준선이 된 것은 인목대비 폐비논란이다. 이걸 리트머스 시험지로 삼고 찬성한 사람들은 악질로 취급하여 처형했다. 반면 소극적이였거나 반대한 사람들은 살아남있으나 소수인데다 학문적으로는 그닥 볼게 없는 사람들이라서...다만, 실무파트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 관료들은 폐비논란에 찬성해도 그 능력 덕문에 살아남았고, 중용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당대 손꼽히는 경제전문가 였던 김신국이나 외교전문가 이경전, 윤휘 등이다. 영혼없는 공무원 전문가는 뭘 해도 산다. 전문가 우대 그외에 소북인 남이공도 김류와 영합하여 이조판서까지 하는등 제법 잘 나갔다. 근데 소북의 경유에는 유희분, 유희발, 박승종에 대해 김류, 이귀 등이 모두 은전론을 주장했으나 인조는 강경론을 주장했고 유희분, 유희발 형제는 참수되었으며 박승종 부자는 반정군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다가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알고 음독자살했다.
  • [4] 어느 야사에는 원래 거사 일은 열흘 뒤인 3월 22일이였는데 마침 당대의 점술의 대가인 김치에게 반정의 성공 여부를 점치러간 심기원은 김치에게 그 날에 거사를 행하면 실패할 것이라는 점괘를 듣고 만다. 이에 놀란 심기원이 방도를 묻자 김치는 열흘 앞당겨 12일에 거사를 실시하면 비록 고변자가 있어 초반에는 고생할지라도 결국에는 성공한다는 점괘를 주었고 반정 세력들은 반신반의하며 12일을 거사 날짜로 잡았다.
  • [5] 참고로 이 사람은 일찍 단명한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의 후손으로 다시 말해 왕가의 종실 출신이다. 결국 고변한 대가로 반정 직후 처형된다.
  • [6]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인조가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유희분에게 가산을 털어 바쳐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들은 체 만체 했다고 하고 결국 그 원한으로 유희분을 죽였다고 한다.
  • [7] 말이 좋아서 천수지 제주도로 같이 딸려온 여종에게까지 영감탱이 드립을 들으며 개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광해군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집은 나중에 하멜 일행이 잠깐 머무르게 된다.
  • [8] 정작 이서와 더불어 무력을 준비했고 이귀나 김류보다도 먼저 반정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지만 무인이라는 이유로 홀대받았다. 안습.
  • [9] 이 두사람은 이귀의 아들들로 현종 때까지 살아 대동법 관철 등에 기여했다.
  • [10] 명나라는 광해군 정권을 명에 협조적인 정권으로 보고 인조반정 직전에 조선군을 단독으로 움직여 청을 공격하는 계획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광해군 거의 혼자만 중립을 주장할 뿐 정권 구성원(대북. 대북은 결코 사대부 대다수가 아니다.)은 거의가 친명반청주의자들인데다, 명의 요구에 따라 대규모 파병한 전례까지 있으니 대외정책이 불확실한 인조정권보다 오히려 광해군정권이 더 친명에 가깝다고 판단한 것. 실제로 인조정권은 명의 청에 대한 공격요구에 대해선 어떻게든 얼버무리곤 했으며, 근래 학계에서는 대중들의 인식과 달리 인조정권의 친명반청적 행보는 전형적인 내부용 정책이고 실제로는 광해군의 그것을 어느 정도는 따라간 게 아닌가 라는 의견이 대세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광해군은 선조의 그것을 이어받았고 다시 인조정권이 이를 계승했다고 본다.
  • [11] 더구나 인조반정은 중종반정때와는 달리 명분이나 민심도 부족한 일종의 쿠테타 였고 광해군때 생긴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였으며 기찰(감시와 검문)을 자주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졸지에 반역자로 몰려 죽는일이 많아 이괄의 난때 반란군이 쉽게 한양을 접수할정도로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