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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last modified: 2016-08-07 22:53:55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 16대 국왕 인조(仁祖)
1.1. 개괄
1.2. 묘호
1.3. 일대기
1.3.1. 반정과 즉위까지
1.3.2. 이괄의 난
1.3.3. 정묘호란
1.3.4. 병자호란
1.3.5. 삼전도의 굴욕
1.3.6. 비정한 군주
1.3.7. 치세와 정책의 영향
1.4. 총체적 평가
1.5. 인조의 능
1.6. 인조 어필
1.7. 동상
1.8. 대중매체에서의 이미지
1.8.1.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 남한산성
1.8.2. 드라마 일지매
1.8.3. 최강칠우
1.8.4. 추노
1.8.5. 드라마 탐나는도다
1.8.6.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1.8.7.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1.8.8. SNL 게임즈 - 카스2 병자호란
1.8.9. tvN 드라마 삼총사(드라마)
2. 人造

1. 조선 16대 국왕 인조(仁祖)

조선의 역대 국왕
15대 광해군 이혼 16대 인조 이종 17대 효종 이호

묘호 열조(烈祖)→인조(仁祖)
시호 조선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장목(莊穆)[1]
종(倧)
천윤(天胤)/화백(和伯)
출생 황해도 해주
사망장소 한성 창덕궁 대조전
배우자 인열왕후(仁烈王后), 장렬왕후(莊烈王后)
아버지 이부(李琈)[2]
어머니 인헌왕후(仁獻王后)[3]
생몰기간 음력 1595년 11월 17일 ~ 1649년 5월 8일
양력
재위기간 음력 1623년 3월 13일 ~ 1649년 5월 8일
양력

조선의 16대 왕.

1.1. 개괄

선조의 5남인 정원군과 그의 아내 구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4]으로, 능양군으로 책봉되었다. 원래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쿠데타 과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다.

그야말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모태 암군[5]으로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선조도 많이 까이지만 인조 따위와 나란히 평가를 받으면 선조가 상당히 억울해 할 것이다. 선조의 경우 자신은 머리가 좋았으며 재위 초기에는 나름 명군소리 들을만한 일들도 했기 때문이다.물론 그걸 아득히 뛰어넘는 슈퍼 개 졸렬 찌질함이 엄청난 문제지만 [6] 선조 때에는 그 최악의 난리 중에서도 신하들 능력은 좋았고[7]. 반발이 심했던 이순신 장군의 전라 좌수사 발탁 안을 끝까지 밀고 갔던 것 등의 업적을 남겼다. 적자인 영창대군 대신 서자인 광해군을 자리에 앉힌 데서 볼 수 있듯이 최소한의 시국 보는 눈도 있었다.

반면 인조는 애당초 집권 자체가 쿠데타였던데다 집권 중 며느리와 손자들을 손수 죽였다. 선조는 최소한 친족들 피는 안 봤고 자기가 정한 세자가 마음에 안 들어도 내치지 않았었다. 그나마 후손을 잘 둔 것. 그리고 청에게 털린 뒤 늦게나마 그럭저럭 기본은 한 게 인조의 유이한 업적(?)이다.

참고로 조선 임금들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까지 모두 인조의 후손이다. (아들인 효종의 혈통적인 직계는 철종에서 완전 단절[8]되고 고종의 경우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1.2. 묘호

그의 묘호는 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결정되어 있었다. 열조(劣祖)라면 또 몰라 그러나 "호십국시대 의 열조 서지고는 못난 사람인데요? 열조가 말이 됨?"이라는 비판에 의해 수정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의논한 신하들 가운데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있어 갑론을박을 하며 재논의를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실제로 묘호의 최종결재권은 임금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결국 효종이 불만을 드러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뒤이어 재논의 과정에서 "아니 소열황제도 같은 열을 쓰는데 왜 남당의 열조 서지고[9]를 걸고 넘어지는데?"라 옹호하는 반박이 나왔고, 효종 역시도 "이야기 들어보니 열조를 써도 될 것 같은데? 다시 의논해서 올려"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신하들은 "결국 한소열의 사례에 따르면 열조란 묘호도 좋지만 남당의 사례를 봐서는 쓰면 안될 것 같습니다"란 말과 함께 인(仁)을 붙여서 인조(仁祖)로 바꿔올렸다. 그리고 묘호에 인이 들어갔으니 같은 글자가 반복될 수 없으므로 시호 역시 인명(仁明)에서 명숙(明肅)으로 바꿔서 올렸다.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을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임금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를 붙여준 훌륭한(?)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인종과 인조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일단 처음 올린 열조나 나중에 다시 고친 인조나 이 양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묘호이다. 일단 열은 시법에서 모두 세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어딜봐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덕을 지켜 업을 높였다"이다(…). 그리고 한 소열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에 부합된다는 의견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시법에서 인은 유교에서 추앙하는 최상의 덕으로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예를 들어 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다. 심지어 굳이 성종으로 하자면 大자를 붙여서 대성종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성종은 이후 사대부들에게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도 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10] 여기에 조(祖)는 보통 재조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아주 영예로운 묘호이다. 더불어 묘호를 정할 때 조(祖)나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누가 좋고 누가 나쁘다는 없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종보다 더 높게 치는 일이 많았다.

즉,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이라는, 거의 요순 급의 이상적인 초월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묘호란 소리이다.[11] 실제 인조의 행적을 보면 실로 과분하다 못해 기가 막힌 반어법이 아닐 수 없다(…).조선판 블랙 코메디 효종 입장에서야 나름 효도한다는 생각으로 그랬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왕조 최고의 코메디.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이덕일은 인조가 아니라 악조(惡祖)라 불러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일부러 반어법의 의미로 신하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게 아닐까 하는 의견을 보였다. 엄청난 추남 이름이 미남이면 얼굴 한 번 더 보지 않겠냐는 식으로(…). 얼굴은 못생겼는데 이름은 장동건, 원빈

1.3. 일대기

1.3.1. 반정과 즉위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해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 인헌왕후 구씨가 그곳에서 인조를 출산한 것이다. 실록에 실린 인조행장을 보면 마치 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서 할아버지 선조가 이걸 보고 "이거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행장'인 만큼 인조를 돋보이기 위한 기록으로 보는 게 적합할 것이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광해군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띄우는 내용으로 보인다.

선조 때 능양군으로 봉해졌고 집에 왕기가 있다는 설로부터 시작 된 광해군의 경계 때문에 동생 능창군을 잃었고 아버지 정원군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집은 헐려 경희궁이 지어진 것은 덤. 결국 능양군은 중부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게 되었고 서인들과 함께 반정을 꾀하고 성공하여 결국 왕위를 얻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얼떨결에 오른 중종과는 다르며, 반정 대의명분 또한 중종반정에 비하면 약한 편이었다. 당장 명나라조차도 황당해했고, 대북 세력을 박살내고도 남은 반대파가 인조 즉위 중에 끝없이 광해군 복위를 추진했을 정도니까. (물론 폐모살제와 대명정책, 궁궐 공사등으로 광해군이 민심(정확히는 산림 여론)을 상당히 잃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폭군이라 복위 가능성이 전무해 새 왕이 관용을 베풀 겸 살려줘도 문제가 안 됐던 연산군과 달리, 나름 능력이 있었고 인망도 상당해서 존재 자체가 위험했던 광해군을 끝내 죽이지 못하고 내버려둔 것도 실은 이 때문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물론 죽이지 않은 것은 높이 평가 할 만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통성이 약했고, 이에 따라 반정 세력인 서인들의 의견에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반정 당시 앞장서는 등 쿠데타 주도적 측면은 훨씬 강한지라 중종에 비견하면 자기 목소리가 많은 편이었고, 태종이나 세조처럼 자기 세력을 완벽히 장악한 수준의 주도력은 아니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비유에 따르면 태종, 세조는 The First of them(주모자)이라면 인조는 One of them(공모자)이었다.

1.3.2. 이괄의 난

인조 정권은 초장부터 불안했다. 집권 직후에 대북에 이어 소북까지 숙청했다. 소북은 반정의 명분이였던 폐모론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고 소북은 이이첨의 독주로 대북과 사이가 틀어진 상태였다. 비록 대북 숙청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서인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이뤄졌는데, 여기에는 인조 자신의 복수라는 의견도 있다. 능창군의 죽음 당시 능양군이 소북의 영수인 희분에게 전 재산은 물론 빚까지 얻어 가며 뇌물을 바쳐 동생을 살려달라 애원했으나 유희분은 능양군의 말을 무시했고[12] 결국 동생이 죽자 복수를 맹세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게다가 뒤이어 인조반정에 협조적이었던 북인 잔당, 즉 중북들도 바로 벼락을 맞게 된다. 이 배경에는 서인 김류, 이귀 주도설과 인조 주도설이 있는데, 어느쪽이라도 이원익이 한탄할 만큼 지나친 일이었다.

결국 이 중북 숙청으로 인해 인조반정 때 군사적 지휘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재반정을 시도하게 된다. 바로 이괄의 난.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있던 이괄은 반정의 동료들이 자신의 아들을 역모혐의로 하옥하자 화가 폭발하여 여진족을 막기 위해 조련한 군사 1만을 끌고 남하하여 안주, 평양, 황주, 개성전격전의 속도로 함락하고 수도 한성까지 점령한다. 내부 반란으로 한성을 점령당한 조선시대의 반란은 이 반란이 유일무이하다.

인조는 공주로 피신하였으며 이괄은 흥안군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그의 군대는 악재(안령)에서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참패, 이천으로 퇴각하였다가 그의 심복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북방의 방위 체계가 거의 완전히 붕괴되어 후에 청이 조선을 침공할 때 쉽게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괄의 부하들이 청으로 도망친 것도 한몫했다. 이들은 나중에 청군으로 편입되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 참여했고, 또한 명을 멸망시키는 전쟁에도 참전하게 된다.

1.3.3. 정묘호란

서인 정권은 '친명배금' 정책을 명분으로 이를 강력히 고수했던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이와 달리 인조반정을 일으킨 세력 내부에서 인조가 중용한 인사들은 주화론자였고 병자호란 직전까지 인조 정권이(후대의 효종 같은 경우와 비교해) 적극적인 반청정책을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일각에선 광해군 대의 외교적 성과를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계승했다는 연구도 있다[13].

애초에 반정 세력의 주요 인물인 이귀나 최명길 등은 주화파에 근접했다. 특히 김자점은 친청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나중에도 그런 오명을 얻게 되지만 당시에도 숫제 매국노 취급이었다. 이렇게 반정을 일으킨 서인 멤버들을 특별히 공서(훈서)라 하는데 다분히 현실주의적인 세력들이었다. 그러니 주화파의 의견을 어느 정도 가진 것. 그러나 정권의 안정성을 위해 끌어들인 재야 서인들(이들을 청서라고 일컬었다)은 명분을 중요시하여 척화를 강하게 주장했다. 그럼에도 후금을 되도록 자극하지 않고자 하는 의도는 있었을지언정, 쓰러져가는 명나라을 꿋꿋이 상국으로 섬기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친명배금 표방은 버리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이것이 광해군 대부터 이어지는 모든 조선 사대부들의 동일한 인식이었다.

전쟁의 원인은 1차적으로 누르하치청태종의 대조선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와 경제적 원인이 컸다. 애초에 청이 기세등등하게 일어났다고는 하나 산해관을 넘는데는 실패했으며, 누르하치가 조공무역을 독점하며 쌓아올린 경제력이 청태종 때 즈음에 와서는 상당히 소진되어 있었다. 여기에 내몽골을 평정한 이후 만주에 기근이 닥치면서 청 또한 많은 경제적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산해관 너머로 들어갈 국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은 지속적으로 조선에게 공격적인 요구를 했고, 조선은 이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빵셔틀이었다는 이야기다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선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폐기하자는 척화론이 강하게 대두됐으나 정권 내부에선 사실상 무시되었다. 그러나 그 알맹이는 실속도 명분도 챙길 수 없는 어중간한 것으로서, 확실한 화친정책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막장테크중인 명에게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격동하는 주변 정세 속에서 이렇듯 갈피를 못 잡는 마당에 인조는 대외적으로 꿋꿋이 친명배금을 표방했으며 때마침 누르하치 사후 조선에 대해 강경파였던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후의 청태종)의 등극이라는 악재를 연타로 맞이하며 결국 정묘호란(1627년)을 겪게 된다. 당시 부덕하게 권력을 찬탈한 인조 정권의 타도를 기치로 내건 후금은 천천히 진격하며 그 피해를 극대화했고, 조선군은 장기간의 방비도 헛되이 파죽지세로 쓸려버리고 말았다. 결국 강화도로 도망쳤던 국왕은 직접 형제의 맹세를 맺는 단에 나갔고, 스스로 를 마시지 않고 신하가 대신 마시는 선에서 후금과 형제국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정묘화약).

그러나 후금은 어거지로 조선과 명의 관계를 단절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조공 자체에는 문제를 삼지 않았다. 또 가도모문룡을 함께 토벌하기도 했다. 후금에 조공을 보내느라 온갖 공물을 징발하는 통에 애꿎은 조선 백성들만 허리가 휘었지만 조정에서는 대충대충 넘어가며 그렇게 8년이 흘렀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 정벌의 목전에서 여전히 친명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조선의 태도에 앙금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조정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광해군 시기부터 북방지역에 대대적인 군대 개편이 시작되었다지만 이괄의 난 이후 와해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지적한 대로 3차 여요전쟁처럼 적이 기병의 기동성을 이용해 길목의 성들을 그냥 지나치고 바로 수도로 급습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조선은 결국 이런저런 한계와 후술할 잘못된 인사문제 등이 겹쳐 실패한다. (인조는 이 중요한 시기에 왕권 강화한답시고 자기 아버지인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사업에 골몰하고 있었다.) 여기에 후금과의 사이는 다시 나빠져서 인조는 국교 단절까지 생각하게 된다. 도원수 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전쟁나면 큰일난다고 막았지만 결국 둘은 인조의 눈 밖에 나 잘리게 되었다. 그리고 후임으로 임명된 도원수가 바로 김자점이였다.

1.3.4. 병자호란

정묘호란 8년 뒤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가 사망했다. 이에 후금은 조문단을 보냈으나 이와 함께 홍타이지를 황제로 함께 추대하자는 의견도 함께 보냈다. 후금은 나름 형제국이니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으나 상당한 무례함을 보였고 인조는 논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물러가는 후금의 사신단에게 백성들이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연히 홍타이지는 격분하게 된다.

칭제인정은 명에 대한 사대가 완강한 당시 조선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었다. 명이 어려움을 겪었다고는 하나 굳건히 버티고 있으며 과연 무너질지는 확실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청이 산해관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체붕괴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명이 망하지 않은데다 명에게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재조지은이라는 빚까지 있어 이를 저버린다면 내부적으로 반정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도 있다. 이는 명에 대한 의리를 반정의 한 명분으로 정권을 쥔 인조 정권 자체의 한계이기도 했다.

결국 조선을 설득하길 포기한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으로 바꾸었다. 앞서 조선의 태도에 뒤통수가 불안해진 청의 황제 홍타이지는 조선이 신하되기를 강박했고 열받은 인조는 초강경 국서를 투하, 동시에 팔도에 교서를 내려 방비를 분부한다. 최명길의 반박상소에 곧 다시 화친으로 정책을 바꿨지만 사신이 심양에 도착하기 전에 병자호란이 발발한다.[14]. 음력 병자년 12월로, 양력(그레고리력)으로 1637년 1월 되는 해였다.

조선은 외침에 장기간 대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잘 싸우지 못했다. 인조가 임명한 지휘관들 태반이 이괄의 난에서 공을 세운 장만이나 김자점등에 코드 인사였던 까닭에 지휘관 그릇이 되질 못하여 제대로 지휘하질 못한데다, 후금의 기동전략이 탁월했던 탓에 간단하게 한양까지 돌파되었으며 인조는 이틀 전에야 이 모든 소식을 알았다. 결국 인조는 무작정 도망치는 방법 밖에 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인조는 미처 멀리 피하지도 못하고, 강화도도 못가고 남한산성에 갇혀버리고 만다. 남한산성에서 한동안 농성으로 버텼지만 전쟁 전에 식량을 죄다 바깥으로 빼놓은 병크 때문에 결국 식량과 물자가 바닥나게 되고, 각지의 근왕군(속오군)마저도 고질적인 훈련도 및 조직력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며 쌍령전투 등으로 청군에게 각개격파 혹은 차단되었으며, 심지어 숫적으로 압도적 우세에서도 청의 기막힌 기동 전술에 휘말려 패한 경우가 많았다. 일부 승전을 거둔 근왕군들도 삼전도의 굴욕을 거둘 때까지 남한산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자점의 주력 함경도 근왕군은 한번 털린 이후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인조의 결정적인 잘못은 당시 조선군이 집단훈련이나 진법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 것에 있다. 이괄의 난 이후 전쟁에 꼭 필요한 대규모 집단훈련이나 진법훈련을 시행할 경우 기찰(감시와 통제)에 걸리고, 인조는 거기에 걸린 군지휘관을 반역자로 몰아서 의금부에 고문당하거나 죽이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군 지휘관들도 본인들 안위를 위해서 군 훈련자체를 피하게 된 것이다. 결국 몽골 침입 때도 굳건했던 강화도마저 함락당해 강화도에 주둔하던 세자들까지 포로로 붙잡히는 꼴을 연출하게 된다. 물론 몽골군과 달리 청군은 수전을 피하지 않았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15]

결국 이제 인조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조건 항복밖에는 없었다. 어차피 청이야 정 인조가 버티면 좀 수고롭긴 하겠지만 식량도 떨어져가던 남한산성을 함락시킨 이후 목을 치든, 심양으로 끌고 가든 입맛대로 처리한 뒤에 명분도 좋게 광해군을 데려다 앉히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1.3.5. 삼전도의 굴욕

수도 한양과 강화도가 청군 수중에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의병의 구원을 바라면서 40일 동안 농성했으나, 각지의 근왕군마저도 청군에게 각개격파되어 더 이상 희망이 없자 김류, 최명길 등이 "피폐(皮幣), 주옥(珠玉)을 바치는 일은 탕왕(湯王),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하고 성에서 나가기를 청하고 소현세자도 스스로 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청하자, 결국 항복하여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취하고 군신의 의를 맺는 굴욕을 당한다. 이는 한국사에서 왕이 몸소 오랑캐에게 조아린 최대의 흑역사굴욕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굴욕으로 인하여 왕권은 바닥을 쳤는데 인조가 삼전도 굴욕 후 궁으로 복귀하기위하여 한강 둔지에서 배를 타려고 하자, 신하들이 인조 목 뒤를 잡아서 밀어내고 본인들이 먼저 배를 타고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버려 인조를 모시는 내시들이 발품을 뛰어서 배를 구하여 간신히 궁으로 복귀했는 것이다(!). 더 웃긴 것은 인조를 목뒤를 잡아서 본인들 집으로 간 신하들은 인조가 처벌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래저래 안습이다. "왕권" 그게 뭐가요? 먹는거예요? 우걱 우걱

청은 왕에게 굴욕을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왕자들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볼모로 잡아갔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당한 굴욕을 후세에 길이 남기도록 비를 세우게 지시했다. 이에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 줄여서 '삼전도비'가 세워지게 된다.[16] 다시 말해 적장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우리 손으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 비석은 유교국가이자 명에 대한 사대를 견지해온 조선의 입장에서 실로 대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내내 두고두고 조선의 수치를 상징하는 표식으로 남았으며, 특히 청의 국력이 약해진 구한말부터는 줄곧 훼손의 운명을 겪었다. 고종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무너지자 바로 삼전도비를 파묻었고, 일제가 이를 다시 복구했으나 이번에는 1956년 제1공화국 당시 문교부에서 치욕의 상징이라며 또 파묻었다. 1963년 이걸 또 꺼내서 다시 훼손하지 못하게 사적으로 지정했는데(…) 이번에는 2007년 2월 3일 30대 후반의 한 남자가 서울 한복판에 국가적 치욕이 버젓이 서 있는걸 볼 수 없다며 페인트로 훼손을 가했다[17].

페인트로 훼손당한 사적 101호 '삼전도청태종공덕비'. [18]

훼손된 삼전도비는 정부에서 정성껏 복구해 조선 시대의 원위치로 옮겨 세워놨다. 관련 기사 허나 아무리 반면교사적 가치가 있다고는 해도 이쯤 되면 좀 안타깝다.

1.3.6. 비정한 군주

위의 국가적 굴욕 외에도 왕좌를 지키기 위해 아들인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의문 제기도 심심치 않게 제시되는 등 여러모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에 관해 실록을 보면 사관들의 비판으로 가득할 정도. 세종이 정해놓은 적자승계의 원칙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장남이 세손이 되어야 하나 이걸 무시하고 차남 효종(당시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으며, 소현세자의 며느리(강빈)까지 역모를 꾀했다면서 세자빈을 폐한 연후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때 신하들이 당태종의 일을 들고 동정론을 펴자 인조가 '당태종은 성인이 아니고 강씨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비답하였고 너는 성인이냐 다시금 신하들이 '강빈이 비록 전하의 자식은 아니지만 빈(嬪)으로 있을 때는 소현(昭顯)의 배필이었으니, 전하의 자식이 아닙니까'라 하며 선처를 바라자 인조가 윗전을 모욕했다며 '개새끼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라 언급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다.

"개새끼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狗雛[19]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인조실록》 24년 2월 9일[20]. 흠좀무.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을 전부 통틀어 견공자제분이 표현된거는 단 5번이고 그것도 3번은 세종때 진짜 '의 새끼'를 말한 것이고 한번은 왕이 한말도 아니었다. 참고로 그 '한 번'은 성종 16년 2월 28일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이극돈이 성종에게 왜인들이 가져온 무역품에 대해 보고를 할 때였다. 그런데 여기서마저 '구추(狗雛)'는 개새끼란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개 모양의 상자에 담긴 강아지 모양의 물건이라는 말을 할 때 '구추(狗雛)'라는 표현이 쓰인 것이다.

"상자 하나는 개 모양으로 만들어져, 이 상자에 담은 것은 모두 강아지처럼 만든 것이었는데, 이런 물건은 모두 사서 대내(大內)로 들여갔습니다."(有一箱, 制如狗形, 其箱所盛, 皆像狗雛, 而造者也。 如此之物, 皆購之, 入內。)
ㅡ 《성종실록》 16년 2월 28일

즉 임금이 직접 "개XX"라 말한거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인조가 처음이자 마지막.[21] 이런 사실 때문에 그가 독살을 지시하진 않았다고 해도 그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덕분에 송시열 등 예법을 중시하던 서인들은 효종이 정통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이후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던져 죽였네 하는 등, 야사의 이야기에서도 좋은소리 못 듣는 임금 중 한명이다. 설령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손 쳐도 소현세자가 부왕에게 핍박을 많이 받았고 죽기도 일찍 죽은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관련 음모론 가운데 드물게도 정설에 준할 정도로 인정받는다.

호란 이후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치욕을 씻자며 북벌론이 산당 등을 중심으로 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대세도 결정난 상황에서 그럴 이유가 없었던 인조는 김자점과 같은 친청파를 중용하였다.

자신의 왕위 등극 자체가 찬탈 형식이었기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린건지 역모에 대한 불안감으로 애먼 인사들도 많이 숙청시키거나 죽였다. 특히 거의 성공할 뻔한 이괄의 난을 겪은 뒤에는 경계심이 가히 편집증에 가까워졌다고 한다. 이렇게 인조의 경계로 인해서 역모로 매도당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인 몽인[22]과 그 아들도 있었으며, 경세가로 이름 높은 형원 역시 아버지 유흠이 인조에 의해 연좌제로 역적 취급당하여 죽임당한 정치판의 막장스런 현실에 환멸감을 느끼고 재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아들마저 비정하게 죽였던 인조의 권력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소현세자가 죽은 4년 뒤 인조는 날씨가 한창 더워진 6월 어느 날, 전염병이 돌던 시기에 학질 증세로 사망한다. 실록에는 며칠 전부터 감풍등의 증세가 있어, 계속 침을 맞았던 왕이 갑자기 두드러기이 났고, 의원이 진찰한 결과 학질증세가 있다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5세까지 살았던 인조가 조선시대 왕 중에서 단명했다 말하긴 힘들지만 (큰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 권좌를 고작 4년 더 이어가기 위해 자신의 며느리와 어린 손자들을 그토록 비정하게 죽였다는 것은 조선왕조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비극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말년에는 후궁 중 한 명인 조 귀인에게 푹 빠져 지냈는데, 이 조 귀인과 민회빈 강씨 사이가 나빴고 이것이 인조가 강빈을 사사하는데 한 몫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왕비는 2명으로 능양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렬왕후와, 인렬왕후가 1635년 사망한 뒤 3년 뒤인 1638년에 간택된 장렬왕후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로 불리었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이나 어렸다. 나이 차이만 따지면 딱 인목대비-광해군 시즌 2. 그러나 인조에겐 장성한 적자가 셋이나 있었고, 장렬왕후에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인조 사후 그녀는 궁궐에서 국왕들과는 별 충돌없이 지냈다. 그러나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 역사상 최대의 그러나 백성들 입장에서 느끼기엔 정말 세금으로 바치는 쌀이 아까운 정치판 싸움이 벌어지는데 바로 예송논쟁이다. 물론 예송논쟁 자체에 장렬왕후가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지만, 따지고 보면 굳이 간택을 해서 후비를 들이지 않아도 되었던 인조가 후비를 맞이한 게 결과적으로 이런 사태를 초래한 셈이다.

게다가 인조는 이렇게 강화시킨 권력으로 그 동안의 일을 반성하기는 커녕 노는 데 집중했다. 궁 내에 연못을 파고 누각들을 화려하게 꾸미고 후원에서 놀는 걸 좋아했으며 시녀들이 드는 가마(!)를 타고 다니다 천벌을 받아 몇 번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했다고 한다.

1.3.7. 치세와 정책의 영향

성리학이 급격하게 교조화되고 여성의 지위가 내려간 것도 인조 시기. 이괄의 난 당시 이괄이 장만에게 패해 수세에 몰리기 전까지 왕의 몽진에도 나몰라라 하며 방관한 한양백성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정권기반이 극히 미약했던게 인조 정권이었다. 조정은 병자호란으로 기존에 세웠던 집권 명분이 약해지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내부에서부터 정권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졌고 이에 기존에 상당히 느슨하게 적용되던 성리학적 종법질서를 급격하게 강화해 내부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 했다. 덕분에 수많은 여성들이 열녀라는 이름아래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외롭게 수절해야 했다. 환향녀를 비롯한 환속 문제는 인조도 환속 금액 상한 제한과 이혼 금지로 막으려고 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지키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인조가 소현세자를 박대하고 급기야 아예 후계를 세손이였던 석철이 아닌 봉림대군으로 바꿔버리면서 왕권이 약해지게 되는데 당장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즉위 후에도 한동안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고 이후로도 신하들에게 책 잡힐 행동은 하지 못했으며 죽은 다음에도 예송논쟁에서 보듯 계속 시비에 시달렸다. 정통성 문제에서 그나마 자유로워진 현종도 클 대로 큰 산당을 제어하는 데 고생을 했고 결국 숙종 대에 가서야 왕권이 다시 강력해졌다. 정작 인조 본인은 저 난리를 치고도 즉위 자체가 서인 정권의 정당성과 연결되어 있었던 데다 명이 멸망한 후 청이 조선이 뭘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23] 죽을 때까지 나름 강한 왕권을 누리고 갔다. 즐기는 건 내가, 고생은 아들과 손자가.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 속에서 어떻게든 좋게 평가해주려고 해도 사실상 업적다운 업적이 없다는 사실도 문제. 제도사를 깊게 파서 토대를 하나하나 살피고 따져봐야 겨우 인조의 업적이라고 할 게 나오는데 이건 말 그대로 극히 전문적인 이야기이며 이걸로 어떻게든 '제도적 기초를 다졌다'고 옹호를 하려 한들 '그건 기초일 뿐이고, 적당히 시도했다 흐지부지된 조루성 정책이나 되려 역효과만 낸 졸속정책이 흔해터진데다, 애초에 제도적 결과물조차 없다.'라고 해 버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더구나 인조가 모문룡이 죽을때까지 가도에 보낸 군량미가 매년 3만석이며 이마저도 모자라면 모문룡이 주변 조선인들을 약탈한지라 병자호란시기까지 인조정권에서 낭비한 세수는 26만 8천 7백여 석[24]으로 당시 조선의 세수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양을 모문룡에게 갖다 바친것. 이때문에 조선땅에 굶어죽는 백성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그나마 인조의 치적으로 꼽히는 것으로는 1. 양전의 실시, 2. 기존 경대동의 문제점 파악 및 추후 시행책 논의, 3. 공물변통론과 대동법 논의, 4. 인조 말기 흉년기의 임시방편적 구휼제도를 시행 등이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정작 제도의 정착을 위해 왕실의 희생을 감수할 의지는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법 제도의 시행' 영역에는 끝까지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삼도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그는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데다가, 양전이 미비하여 토지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여기에 방납업자 등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산림 등에서도 대동법에 대한 이견이 많아 강원도 외에서는 폐지하고 만다. 요약하자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논의와 몇번의 시범실시[25]가 후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정도라서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결국 교과서상에는 '대동법을 시작했다'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광해군[26]이, 학자들 사이에선 '진정한 대동법의 시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효종(정확히는 이때 정국을 주도해 대동법을 정착시킨 김육)과 '대동법의 확대와 정착기'인 현종에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 조도사를 뜯어고친 것도 반정으로 싸늘해진 민심 수습을 위해 내세운 것이었으며, 양전사업을 실시했다지만 이건 사실 법적으로 20년마다 하도록 규정된 것이라 다른 왕이었더라도 어차피 해야 했다. 게다가 최명길이 올린 상차에서 양전을 다시 해야 한다며 '선왕 때 새로 경작된 땅은 전안에 들지 않았고 묵은 것만 전안에 들었다'라고 발언한 점에 비추면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이 양전 사업마저도 불완전한 요소가 있었다.

인조 대 새로 실시된 '영정법'(영정과율법) 역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기존의 등급을 나누어 징수하던 전세를 일괄적으로 고정해 걷는 것으로, 대부분의 전답을 최하등급 하하전으로 지정해 최저 세인 4말을 걷기로 한 것이다. 대충 보면 취지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건 정작 남의 밭을 가는 농민 대다수 소작농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영정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갖은 세금과 수수료를 추가로 때려서 농민의 허리를 더 심히 휘게 만들었다.[27] 이러다 보니 민중의 원성이 너무 커서 결국 숙종 때엔 영정법의 허점을 보완할 비총법을 만들어 가혹한 징세를 완화시켰고 영조 때 법제화시켰다.

인조는 능력 부족 이전에 막상 반정 후 국가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미래 비전 자체가 매우 부족했다고 평할 수 있다. 인조는 안될거야 아마 교육을 안 받았잖아

1.4. 총체적 평가

인조 인조 구추 노래를 한다 아들 며느리 다 모여서

즉위 직후부터 순탄치 않아 명나라는 "광해군은 우리한테 협조적인데 왜 내쫓았냐?"는 반응이었다. 이 때문에 외교문제에서 거의 호구 수준으로 전락.(...)[28]

거기다 명분에서 중요한 요소인 인륜적 문제도, 광해군은 선조의 차남이며 인조는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의 아들이므로, 인조야말로 동생들과 작당해서 자신의 존속인 삼촌 일가를 조진 패륜을 벌인 셈이 된다. 이렇게 왕위 획득 자체도 찬탈이었고 무엇보다 아버지 정원군이 계승 서열이 낮았기 때문에 정통성이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논란이 많았음에도 불구, 아버지를 강력한 반대들에도 불구하고 우격다짐으로 대원군이 아니라 아예 왕으로 추존한다. 다만 광해군의 내정은 과도한 궁전증축 등 문제의 소지가 아예 없는 건 아니였고 인목대비 폐비론과 과도한 옥사로 유교적 명분을 중시하는 사대부들의 반발을 사는 문제를 일으켜 현대에 들어서는 명분 자체가 아예 없는(...) 계유정난보다는 명분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거기에 신하관리 잘 못해서 반란이 일어났지, 외적들이 처들어와 나라가 2번이나 쑥대밭이 됐지[29], 오랑캐 외적 앞에 나아가 무릎꿇고 기념비도 세워줬지, 친아들인 소현세자를 미워하고 결국 독살의혹을 실록에까지 남겼으며, 거기다 생트집을 잡아서 며느리와 손자 일가까지 박살냈지(...) 이정도까지만 보면 정말로 이덕일이 말한 악조(惡祖)라는 표현은 충분히 쓰일 수 있는 수준이라 하겠다.

과거 서인들이 사회 주류이던 시절에는 침략자 청에 맞서 싸웠다(?)는 명분으로 인조대왕이라고 칭하는 자들도 있었으나, 당연히 현재는 그런 거 없고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전문 학계의 시각으로 보나 일반인들의 시각으로 보나 평가가 심히 좋지 않다. 사실상 조선 왕들 중 최악의 흑역사를 자랑하는 왕. 특히 인조의 가장 큰 실책으로 거론되는 것은 인재보는 눈, 그 중에서도 특히 최고위급 장수를 선임하는 눈이 없었다는 점을 들수 있다. 이 사람이 최고위(도원수,부원수 급)장수로 선임한 장수가 이괄,김자점 등이다...이때문에 양대호란 당시 조선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은 나쁘지 않았으나 지휘하는 상관이 개판이어서 피해가 컸고 그 피해는 결국 인조 자신의 치욕으로 이어졌다.

전반적으로 인조 치세 자체가 조선사에서 유례없는 치욕의 치세로 일컬어지고 본인 또한 문제가 많은 군주임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이렇듯 너무 평가가 좋지 못한 나머지 까가 빠를 만든다적인 반작용으로 재평가해주려는 움직임까지 있을 정도(…). 선조도 비슷한 경우이긴 한데, 선조를 물타기해 인조를 재평가한다면 오히려 선조 쪽이 불쾌해 할 것이다.

인조의 최대 문제점은 다름아닌 인재 보는 눈이 없다는 것. 조선의 역대 정권 중에서도 손꼽히게 열악한 신료 풀을 보유하였으며, 발탁 배경에 있어서도 정실인사와 보은인사에 천착하는 정도가 톱을 달릴 지경이다. 그래서 역대 반정공신들 중, 아니 역대 중신들 중 인조반정의 공신들이 제일 무능한 편에 속한다. 애초에 북인 정권이 오래 지속되느라 인조반정에 참여한 서인 공신들 중에서 관직 경험을 가진 양반이 지방 수령을 지냈던 이귀와 최명길 정도 밖에 없고 나머지는 죄다 백수들 밖에 없으니 한계가 있긴 하지만[30] 거기서 기존 인재들 포섭할 생각이라곤 남인과 소북을 끌여들이려 했던 김류 정도 밖에 없으니 답이 없다. 그나마도 인조 반정 직후 벌어진 이괄의 난과, 수차례 일어난 광해군 복위 시도로 북인 인재풀이 때죽음을 당해버렸다! 전략적 측면을 보면 인조반정의 공신 중에서 그나마 유능한 사람이 이괄인데(물론 전격전 과정에서만. 전면전 과정을 보면 인조의 사람보는 눈을 잘 알 수 있게 만든다.) 그런 사람까지 쳐내버리고...]

거기다 인조는 이런 무능하고 부패한 공신들을 끝까지 끼고 갔다. 그 가운데는 후대에 매국노로 잡혀 죽은 김자점, 김경징까지 있을 정도다. 세조 도플갱어? 개중 최명길 정도가 신료로서 무난한 편이지만[31] 그마저도 사실 인조가 인재 보는 안목이 있어서 발탁한 게 아니라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인조를 왕위에 앉힌 무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등용된 것이다. 다만 두번의 호란으로 트라우마를 입어 내심 전쟁을 꺼리던 인조가 주화파인 그에게 푸쉬를 해주기는 했는데, 이는 같은 주화파인 간신 김자점(…)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명심하자. 결국은 인조가 더 총애한 김자점에 의해 최명길도 몰락하고 말았다.

애당초 인조가 서인과 손잡고 광해군을 쫓아낸 이유가 자기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이였지 딱히 태종이나 세조처럼 정권을 잡고 난 다음 나라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비전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였고 왕이 된 후에도 김자점 같은 무능한 인물도 아부 잘한다고 권신이 될 정도로 자기 주변에는 예스맨들만 채우려 하는 모습에 신하들이 반대하는 추숭에 매달릴 정도로 권력에 집착해놓고 정작 그 권력을 즐기는 데 썼을 뿐 두 차례의 호란을 겪고도[32] 자기 아들이 권력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고 핍박해대고 일가까지 박살내는 등 반성을 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인조의 아들로는 소현세자와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유명한데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도 어찌 보면 중요한 인물이다. 인평대군을 세종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재밋는 건 인평, 안평 모두 셋째 아들이며 시와 그림, 글씨에 능했다고 한다. 인평대군의 장남 복녕군 이유의 5대손이 바로 이채중이란 사람인데 이채중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후사 없이 일찍 죽은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고 이구로 개명했으며 '남연군'이 되었다. 그리고 남연군의 막내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

넷상에서는 일부에서 제기되는 묘호 강등 주장에 따라서 아예 대놓고 능양군이라고 부르거나, 청나라에서 준 시호장목왕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당대에도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니 현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가장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는 군주. 물론 여기서 비판 안 받는 군주는 드물지만 그 중 가장 철저하게 까이는 왕이 바로 인조다. 초반에는 광해군과는 완전히 다른길로 가기로 결심한대로 초기에 광해군처럼 패륜적인 임금이 되지않도록 보여주려고 노려한 모습은 높이 평가하였다.

실제로 인조의 초기 균형감각과 자비는 꽤 괜찮았다. 즉위 직후 이귀가 왕족 인성군이 종친들을 거느리고 인목대비를 폐하자고 주청한 것으로 죽이자고 하자 반대했다. 인성군은 이후 두차례나 역모[33]에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이괄의 난에서도 인성군이 직접 자금 제공을 하는등 참여했다는 진술에도 참고 그를 살려주었다. 결국 끝내 북인 유효립의 역모사건 때문에 인성군을 죽이기는 했지만 성의성의 간언에 인성군의 가족에 대한 연좌제를 물리쳤으며, 이후 사후 10년만에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또한 광해군 같이 특정 당파만 등용하고 특정 개인에게 힘을 몰아주지 않는 것 또한 높은 평가를 내렸다. 이귀가 선조시절에 동인이 이이와 성혼을 비판할떄 선조가 "이이, 성혼이 당이라면 자신이 먼저 들어가고 싶다"라는 것을 회상시키는 작면이 있는데, 이렇게 이귀가 스승을 높이자 인조는 듣기 싫다며 "당이란 말은 비록 주자의 말이라도 듣고 싶지 않소!"라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인조편 마지막 파트의 제목은 대놓고 무엇을 하였는가이며, 선조와 비교해도 사실 선조를 훌쩍 뛰어넘는 왕이었다고 평했다. 박시백 화백도 인터뷰에서 "지도자로서는 빵점이며 가장 그리기 싫었던 편"이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작가가 고종 편에서는 인물 평가를 최대한 배제했기 때문에, 결국 이 작품 전편을 통틀어 인조가 가장 심한 비판으로 묘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건 작가 본인이 최고로 좋아하는 조선 왕 3명 중에 한명으로 광해군을 뽑았을 정도로 광해군에 대해 옹호를 많이 하는 편이기에 그런 점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34]인조 편 마지막 페이지에 "패륜을 명분삼아 반정한 그였지만 '패륜'에 있어서도 밀려 보이지 않는다"라고 써 놓았는데 그 다음 장면에 광해군 그림이 나오면서 "밀리긴? 나보다 더하구먼. You Win!"이라고 써 놓은 걸 보면 진짜 마음에 안 들어하는 듯...

참고로 박시백 화백 본인도 완결 인터뷰에서 작품 속 가장 짜증나는 인물 2명 중 하나였다고 대놓고 말했다. 나머지 1명은 다들 예측했겠지만 인조의 할아버지 선조(…). [35]자세한 것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항목 참조.

그렇다면 북한에서의 평가는? 인조를 잡아 족치는데 거의 성공할 뻔했던 이괄홍경래와도 맞먹는 민중의 영웅으로 취급한다. 북한에서 홍경래는 충무공 이순신 뺨치는 조선사 최고의 영웅으로 대접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에서의 인조의 평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1.5. 인조의 능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한 장릉(長陵). 단종 능,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능도 장릉인데 이 둘과는 한자가 다르니 주의할 것[36]. 중전 인열왕후 한씨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원래 인열왕후가 죽었을 때 파주 운천리에 안장했고 인조가 죽자 그 옆에 묻었는데, 능에 화재가 일어나고 전갈(!)이 능 주위에서 무리지어 살면서 능을 침범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조 때인 1731년 지금의 자리로 이장한 것. 그래서 장릉의 석물들은 17세기 형식과 18세기 형식이 섞여 있는 형태.

2011년 현재 이 능은 비공개 능역이라 들어가 볼 수 없다. 이유는 문화재청의 공식 답변에 의하면 장릉 주변에 주차장이나 진입로 같은 것을 마련할 장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가 참배나 하겠냐마는 2005년 즈음에 파주시에서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능을 공개하자고 했었지만 문화재청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휴전선이랑 가깝기는 하지만 사실 휴전선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장릉 바로 위에 다름 아닌 파주영어마을이 위치해 있고 위쪽에도 탄현면 일대의 관광지가 몰려 있다. 어쨌든 인조의 장릉은 현재 남한에 있는 조선왕릉 중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능이다[37].

비공개 능역이긴 하지만 답사하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다만 과정이 번거로울 뿐. 장릉은 파주삼릉관리소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문화재청 파주삼릉관리소에 전화를 걸어서 답사하고 싶다고 말하면 여기서 양식서류를 메일로 보내준다. 답사예정일과 목적을 적어 서류를 작성하고 팩스로 보내면 며칠 후에 출입허가서를 보내준다. 학술연구목적으로만 허가되는 것이 원칙이므로 들어가보고 싶다면 답사 목적을 대충 적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장릉 관리소'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인조의 장릉이 아니라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 능인 장릉을 관리하는 곳이니 주의할 것.

여담이지만 삼전도비 테러범이 다음 표적으로 타겟팅한 물망에 오른 곳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1.6. 인조 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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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과 완전히 딴판인 글씨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어필로, 행서체로 적혀 있다. 대대로 필체가 반듯한 조선 왕가의 특질은 계승된 듯[38]. 다만 필체를 남기는 것 자체를 싫어해, 상소에 대한 비답도 내시들에게 베끼게 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필체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음험하고 냉혹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는 성향이라 하겠다.

1.7.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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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알려진 찌질함과 악명에 비해 의외(?)로 태조 이성계, 세종대왕, 정조와 더불어 동상이 세워진 조선 국왕 중 한 명이다. 물론 다른 왕들처럼 인조를 기리고자 만들어진 동상은 결코 아니고 다른 인물의 일담에 꼽사리 껴서 만들어진 거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송파도서관에 세워진 일종의 미담 반영 동상으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때 인조를 업고 피신한 나무꾼 서흔남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대에 만들어진 동상이다. 한마디로 전쟁에서 깨지고 목숨만 부지해 도주중인 초라한 꼴을 묘사한 동상이란 소리(…). 도쿠가와 이에야스패전 인증샷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그런데 이에야스는 나중에라도 최후의 승자가 되기라도 했지만 이 사람은… 안습.

이 동상의 주인공은 서흔남이고 인조는 옆에 있는 병풍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좀 좋게 표현하더라도 왕이라는 뽀대용 아이템 정도. 실존인물 서흔남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실존인물로 대장장이나무꾼을 하는 비천한 신분이였지만 포위된 상황에서 남한산성 외부의 근왕군과 연락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공로로 양반이 되어 벼슬까지 하게 되었다. 위의 동상에서 보듯 인조를 업고 피신시켰다는 전설이 가장 유명하며 그 외에도 인조가 그에게 상으로 자신이 피난 당시 입던 곤룡포(!)를 하사했다는 전설도 유명하다. 전령퀘 깨고 레어템 득템! .[39]

1.8. 대중매체에서의 이미지

소현세자 관련한 이야기 때문에 사극 등지에서 조선시대의 왕들 중에서 연산군과 함께 악역으로 잘 나오는 편.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워낙 인조 치세가 치욕적인 시대로 인식이 뿌리박힌 탓인지 정통 사극보다는 주로 퓨전 사극의 배경으로 자주 쓰인다.

또한 사극에서 악역이나 흑막, 심지어는 최종보스 역으로 나오다 보니 그 악명과는 달리 꽤 무게감 있는 배우가 인조 역을 맡기도 하며 배우 보정 때문에 소위 '찌질한 모습'보다는 의외로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 사극에서는 최종보스 보정+배우 보정의 수혜자.

1.8.1. 조선왕조오백년 시리즈 남한산성

아무래도 80년대 작품이라서 그런지 폭군으로 묘사된 광해군을 인조반정으로 밀어내고 등극한 것으로 묘사된다. 배우는 문화관광체육부장관을 지낸 바 있는 유인촌. 그저 한없이 착하게만 나온다. 청나라가 쳐들어와도 명나라와의 의리 드립을 하며 끝까지 싸우다가 남한산성으로 도주 후 용골대에게 잡혀서 어쩔 수 없이 청나라에 항복했다. 소현세자를 상대로 저지른 추한 짓거리는 일절 언급조차 없다.

1.8.2. 드라마 일지매


SBS 드라마 일지매에서 대표적인 악역으로 등장한다. 청나라에게 휘둘려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자신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겸(극중에서의 일지매)의 아버지(인조의 동생으로 나온다.)를 죽이는 만행도 저지른다. 들과 만날 때는 성군인 것 같이 행동하지만 궁에 들어오면 본색을 드러내는 교묘한 이중 플레이의 인물. 걱정하지 말라며 덥썩 평민 의 손을 잡고 달래다가 다음 신에서는 삐뚤어진(;;;) 얼굴로 을 말끔히 물로 씻는다. 결국 마지막 화에서 일지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일지매가 용서해줘서 간신히 살게되었으나, 이후 정신착란 증세에 걸린다.

김창완이 연기했는데, 왕 역할을 하는 배우들이 대체로 후덕하게 생기거나 카리스마가 있는거와는 달리 좀 빈약하게 보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부분 때문에 과장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무엇보다 직접 기른 수염으로 연기했다. 다만 목소리랑 싱크가 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1.8.3. 최강칠우

최정우가 연기했다. 드라마 전개상 비중이 크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악의 축. 측근인 김자선[40]에게 소현세자를 죽이도록 지시했다.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소현세자의 막내아들 이석견이 살아있는 것을 알게되자, 데리고 와서는 역시 독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석견을 보호하고 있던 소윤이 총으로 쏴 죽이려고 하자 미쳐버리고, 자신을 부르는 소현세자의 환청을 들으며 자신이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린적이 없다며 세자를 부르며 갑자기, "그놈이 세자 그놈이 내 자리를 노렸단 말이다 아들이 어찌 애비의 자리를 노릴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왕이야 감히 누가 나를죽여 누구든 내 자리를 탐내면 다 죽여버릴게야라 발광하나 다시 내가 그런게 아니야 내탓이 아니야 세자야 내가 아니야" 하며 결국 이 일이 원인이되 얼마뒤 숨을거두었다.

1.8.4. 추노


현자타임에 들어간 듯한 모습이 압권이다.

짤방에 나온 것처럼 김갑수 선생이 연기, 첫 등장은 대전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는 장면으로, 석견이 귀양간 제주도에 역병이 돈다는 말에 석견의 안위를 근심하는 척 하는 등 겉보기에는 성군 흉내를 내고 있으나, 불안정한 눈빛으로 음험한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그 뒤로 등장하지 않다가 청나라 용골대가 사신으로 방문하는 에피소드에서 다시 등장. 용골대가 소현세자와 의형제를 맺은 인연으로 석견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자[41] 크게 근심하며 이경식에게 제주도의 일은 어찌되었는가 묻고, 이경식이 용한 의원을 내려보냈다 하자 안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용골대와의 회담에서 석견을 보낼 수 없다고 하나, 이경식에게 석견 암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고받고는 분노한다. 이때의 위압감은 악의 축 이경식도 움츠러들 정도. 용골대와 을 쏘며 대화를 나눌 때를 보면 용골대 말마따나 조선인답게 활을 잘 쏜다. 마지막에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석견의 사면을 청하자 이는 자신이 죽고 봉림이 왕이 된 후에 하라고 한다. 이때 남긴 "이건 내 역사니라."라는 독재자카리스마는 압권.

처음엔 그저 배경 정도로만 등장하는 왕인가 하고 시청자들의 관심에 없다가 갑자기 김갑수 선생의 폭풍간지 인조 연기를 보고 충공깽에 빠진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쉽게 말해 같은 배우가 연기한 연개소문(드라마)에서의 수양제를 연상시키는 사례. 갑수옹이 괜히 악역본좌 소릴 듣는게 아니다

1.8.5. 드라마 탐나는도다

공부의 신의 영어선생 양춘삼 역으로 유명한 이병준이 연기했다. 외국인인 박연(벨테브레)와 윌리엄을 등용하여 재능을 발휘해서 조선에서 기거하도록 명했다. 윌리엄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연극 햄릿을 왕실에서 연출하는데 하필 인조의 트라우마를 건드려서 거의 죽을 뻔했다. 같은 드라마에서 광해군이 은거 중인 현자처럼 묘사되는 것과는 비교된다.

1.8.6.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서는 이덕화가 인조 역할을 맡았다. 이 드라마에서는 궁중 여인들에게 휘둘리는 인조의 악역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소현세자 독살설을 채택했다. 병자호란 이후 스스로 갖게 된 열등감 등으로 인해 며느리 민회빈 강씨에게 불만을 갖게 되고, 청나라가 자신을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과 조 귀인과 김자점의 농간으로 인해 결국 아들 부부를 죽음에 이르게끔 만든 걸로 나온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판단력이 흐려져, 이 드라마에서의 인조는 폭군이면서도 막후 실세인 조 귀인의 야욕에 이용당하는 꼭두각시 국왕이라 봐도 될 정도가 된다. 현재까지 극 중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성 사이코. 새로 15세의 어린 장렬왕후를 신부로 맞이하면서 첫날 밤에 다른 후궁의 방에서 술을 마시는 진상(?)을 부리기도 했는데, 김자점은 이런 인조를 가르켜 "정숙한 여인 앞에선 뭐가 그렇게 찔리는지 오금이 저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화를 다른 여인에게 푸는 걸 보면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 따로 없다. 안 그렇소? 능양군 나리!"라는 대사를 날리기도 했다. 그 김자점이 바른 말을! 극중에서 위 사진처럼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익선관을 쓰지 않고 등장하는데, 이것도 왕 자격이 없는 인간(...)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토리가 진행되어 갈수록 안습한 인간이 되어가는데, 조 귀인의 농간에 넘어가 아들 내외와 손자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그 죄책감으로 미쳐가기 시작하고, 덤으로 조 귀인이 몰래 인조의 차에 아편을 넣는 바람에 아편 중독자까지 된 비참한 몰골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심지어 임종이 가까워오자 조 귀인이 자신이 중전이 되려는 음모로 인조를 감금하기까지 하는 바람에 죽기 직전까지 안습한 꼴을 당한다. 그나마 세자(봉림대군)와 중전, 상선이 힘을 합쳐 인조를 구해낸 덕분에 죽는 순간까지 조 귀인에게 이용당하는 꼴은 면했다.

1.8.7.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

재미있게도 김훈의 전작 칼의 노래의 싸이코 선조와는 달리 굉장히 동정적으로 묘사된다. 두 임금 모두 무능한 권력을 상징하지만, 두 소설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인 듯. 조용하고 속을 읽을 수 없는 인물로, 청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어떻게든 상황을 타계하려 노력하지만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항복하게 된다.

1.8.8. SNL 게임즈 - 카스2 병자호란

민교는 더이상은 안 속는다면서 처음부터 조선군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전작과 달리 잡졸, 왕 인조, 장군 중 한 명을 고를 수 있어서 인조를 골랐다. 마음대로 하라는 해설을 듣고 옥새로 궁녀를 희롱하며 궁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데, 청나라군이 문을 열고 들어와 잡혀서, 삼전도의 굴욕을 재현해야 하는데, GTA 군대 시리즈의 모션 인식이라서 키보드의 키가 이마에 붙을 정도로 머리를 키보드에 박아야 했다.

1.8.9. tvN 드라마 삼총사(드라마)

김명수가 인조 역할로 출연. 아직 방영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드라마 공홈에 있는 캐릭터 소개를 보면 여기서도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암군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말로 암군이었다. 백성들의 원성과 청에 대한 분노로 갑자기 용골대의 목을 치고 청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포하나, 주인공과 삼총사의 활약으로 결국 취소한다. 작중 겁이 많아 세자에게 의존하며 의심도 많아 말을 바로 믿지 않는 행태를 보인다. 마지막화 전까지만 해도 능력은 없더라도 불쌍한 왕이라며 동정표가 많았는데 마지막 화에서 그런 동정표 마저 싸그리 사라졌다. 김자점과 최명길을 불러 태자가 자신보다 그릇이 크고 왕의 품격을 갖췄다고 겁을 내며 나보다 뛰어난 아들은 원하지 않는다며 어떻게 처리해야하냐고 말했고, 이후 청의 침략에 겁을 먹고 "빨리 움직여라!"면서 도망치는 모습이 나와 동정표가 완벽히 사라지게 되었다.

2. 人造

어떤 자연적으로 있는 물체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 보통은 인공이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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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것이 청에서 받은 첫 시호지만 조선 조정은 청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의 표제를 살펴 보면 선조실록까지는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고 명의 시호를 붙여서 사용해 왔지만 인조실록부터는 그냥 '인조대왕실록'으로만 제목을 정해두게 된다.
  • [2] 인조반정 이후, 묘호가 '원종'(元宗)으로 추숭.
  • [3] 인조반정 후 추숭.
  • [4] 위로 이복형 능풍군이 있었는데, 그는 서자인데다 일찍 사망했다.
  • [5] 증조부는 덕흥대원군 , 할아버지는 선조, 아버지는 정원군.
  • [6] 선조가 본격적으로 맛탱이가 간건 임진왜란+이몽학의 난 이후였다. 그 이후에도 파천을 주도하는 등 대전략적인 파악이 신하들보다도 뛰어났다.
  • [7] 이원익, 이항복과 이덕형, 류성룡, 이이 등의 명신과 이순신, 김시민, 권율 등의 명장이 모두 선조 때 사람. 사실 인재 풀로만 따지면 세종대왕 이후 가장 포텐셜이 터졌을 때가 선조 시대다. 물론 이 사람이나 이 사람같은 지뢰가 섞여있기는 했지만
  • [8] 일단 형식적인 양자관계를 따지면 왕통은 계속 이어지는 걸로 간주한다.
  • [9] 남당의 건국자. 원래 이름은 이변(李昪)으로, 서지고란 이름은 오대십국 당시 오나라의 섭정이었던 서온(徐溫)의 양자로 들어갈 때 바꾼 이름이다.
  • [10] 다만 이때는 명나라에도 인종이라는 왕이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봐서 성종으로 정해졌으며, 연산군이 통감에 나온 중국 송나라송인종을 들어 성종이라는 묘호가 더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굳이 설명할 것도 없는 얘기지만 성종은 인조 따위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모욕인 명군이다.
  • [11] 이외에 인조라는 묘호를 받은 사람은 명나라 주원장의 아버지 주세진(朱世珍).
  • [12] 유희분이 뇌물을 먹고 입을 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13] 광해군 대의 외교관련 업무를 맡은 대신들을 유임하고, 내부적으로 후금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들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에게나 대외적으로는 후금과의 외교 단절을 포함, 친명배금을 표방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 [14] 방비 분부의 경우 상당히 감정의 산물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국서 투하 이전에 청 사신들이 돌아가자 바로 다음날부터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 조정에서 나오게 된다.
  • [15] 이 강화도 함락 상황이 걸작인데, 당시 인조의 지휘관 인선이 얼마나 졸렬했는지 그 극치를 보여준다. 자세한 것은 김경징 항목 참조.
  • [16] 삼전도비는 이 사진에 나온 위치에 있지 않고 2010년에 촌호수 공원으로 옮겨놓았다. 고증에 따르면 정확한 위치가 석촌호수 물 속이라고 하며(당연히 조선시대에 물 속에 세운 게 아니라, 원래 삼전도비를 세운 위치에 석촌호수의 물이 찼다는 의미다.) 물 속에 비를 세울 수가 없어서 공원 내부에 세웠다고 한다.# 근데 이거 철거한다고 역사까지 철거될까?
  • [17] 그는 동학운동을 촉발케 했던 고부 군수 조병갑의 선정비도 공격한 이력이 있으며, 국가적 치욕의 장본인인 인조의 사당도 공격 타겟에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이 남자는 2012년 15일에 노태우 생가 방화 용의자로 붙잡혀 언론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스스로를 정의실천행동당이라는 진보 단체 소속으로 밝혔으며, 방화 현장에 노 전대통령에 대한 단죄 편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
  • [18] 출처 :위키피디어, 그리고 위키피디어
  • [19] 참고로 실록에는 개X끼를 표현할때 '狗雛'말고도 '狗兒'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지만, 이 경우엔 '개새끼'보다는 '강아지'라는 표현으로 해석한다. 물론 뜻은 어느 쪽이든 견공자제분이다.
  • [20] 인조 47권, 24년(1646 병술 / 청 순치(順治) 3년) 2월 7일(갑신) 2번째기사, 2월 8일(을유) 3번째기사, 2월 9일(병술) 1번째기사
  • [21] 다른 조선의 왕들도 욕설을 했지만 기록상 개새끼라는 걸쭉한 표현을 남긴 인물은 인조가 유일하다. 세종대왕이 자주 사용했던 욕설(?)은 '더벅머리 선비놈'. 정조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맘에 들지 않는 신하를 가리켜 '호로자식'이라고 한 정도가 기록에 남아 있다. 경종도 영조가 연루된 역모사건과 관련하여 "차마 입에 담지 못할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는 언급이 있다. 다만 보통 왕의 욕설은 주로 '임금께서 대노하여', '차마 듣지 못할 전교' 등으로 필터링한다. 그런데 이를 감안하면 사실 인조의 저 발언도 '순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22] 당대의 대표적인 정치인이자 설화문학가. 그 유명한 어우야담이 그의 손에 집대성된 작품이다.
  • [23] 물론 조선인 포로 송환문제라든지 군사적으로 불온해보이는 움직임 등을 감시하는 등의 간섭은 있었지만 그외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 [24] 약 5만톤 가량
  • [25] 흉년이 심할 때 공물가를 쌀로 대신 내게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 [26] 광해군이 대동법에 회의적이었고 재위 초엔 대동법 확대 요청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이는 교과서상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 [27] 이같은 제도상의 폐해는 고교 한국사 과목에서도 비중있게 가르칠 정도다. 시험에서도 영정법의 취지만을 설명해서 마치 실제로 괜찮았던 제도마냥 낚는 페이크성 출제가 많다. 게다가 세수 보충을 위해 궁전 경비용으로 쓰는 땅인 궁방전, 관청 경비용 토지인 관둔전을 대폭 증가시켰는데 이 토지에서 걷는 세금들은 호조주관의 중앙재정에 편입되는 세금이 아니었다. 때문에 호조 입장에서는 면세지가 잔뜩 늘어난 셈이고 실질적으로 국가재정 증대효과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게 정설.
  • [28] 이때문에 인조는 명나라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문룡에게 뇌물을 바쳤다는 이야기 까지 있었을 정도이다. 단 진위는 불분명. 또 이설로는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기름칠을 좀 하기 위해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왔고, 결국 이걸 은으로 못 갚아서 인삼으로 갚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 [29] 물론 후자의 경우는 김자점탓이 더 크다. 애시당초 인조도 국경 방위군을 제외한 전반적인 조선군의 상태를 잘 알아서 함경도군을 끌어다 청군 저지에 쓰려고 했는데 그걸 무시한 게 바로 김자점이었으니까. 만일 김자점이 명령에 따랐다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인조가 안전 지대로 피신했을 것이고 그 동안 근왕병들이 유연하게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사 문제 하나라면 운이 나빴다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여러 부분에서 난리가 난 만큼 김자점 문제도 결국 인조의 실책인 셈이라 할 수 있겠다.
  • [30] 다른 반정들은 조정 유력자들이나 관직에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일으켰거나 그런 사람들을 포섭했는데 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동네 양아치와 깡패들 모아서 한 거라서...
  • [31] 그조차도 다른 시대의 명신들과 비교하면 딱히 탁월하다고 평하기는 힘들지만,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한해에 모두 급제한 괴수에 가까운 인물이다. 인조 정권에서 최명길은 군계일학의 현실주의자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고, 그러면서도 청의 파병 요청을 극렬 반대하여 부결시켰으며, 명나라와 몰래 연락을 취해서 조선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하고, 환향녀 박대에 반대하고, 강빈 사사도 반대하는 등 종종 인조의 뜻에 반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은 축출당했기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인조 편에선 유일하게 동정과 옹호를 받는 인물이다.
  • [32] 두 차례의 호란조차 이괄의 난으로 인한 북방의 방위체제의 붕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 [33] 박홍구와 아들들이 광해군을 태상왕 삼고 인성군에게 전위시킨다고 했었다.
  • [34] 그렇다고 편만 들어준 것도 아니기는 하다. 광해군 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 [35] 작가님께서 선조에 대해 상황 평가는 잘 하는데 책임을 지지 않고 잔머리를 너무 굴린다고 깠다.
  • [36]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장릉(章陵)은 김포에 있다.
  • [37] 덧붙여 조선왕릉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왕릉은 개성에 있는 정종의 후릉이다.
  • [38] 영조의 경우는 필체가 너무 파격적이라는 평가도 받지만
  • [39] 맹꽁이 서당과 소설 남한산성에도 나오는 이야기이다. 맹꽁이 서당에선 나무꾼이 설마 자신이 업고 가는 사람이 임금인지 몰라서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는데 나라꼴이 이 모양인 건 새로 올라온 나랏님이 전 나랏님보다 잘난 것도 별로 없으면서 나대다가 이 꼴 난 거 같음. 아 이 얘기는 누가 들으면 큰일나니 우리 둘만의 비밀임."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인조는 찔려서 기가 막히기도 하고 자신의 이런 처지가 한심해서 울었다고 한다. 잘 알겠다. 능지처참에다가 삼족 멸하기를 플러스 옵션으로 내려주마! 다만 이건 윤승운씨가 덧붙인 이야기인 듯 하다.
  • [40] 모티브는 아무래도 김자점인 듯.
  • [41] 실제 역사에도 있었던 에피소드, 단 이때 용골대가 데려가겠다 한 아이는 소현세자의 맏아들 석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