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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

last modified: 2017-12-27 12:42:09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 시대의 인물
1.1. 소개
1.2. 의경세자의 요절
1.3. 성종의 왕 등극
1.4. 사망
1.5. 사극
2. 1을 소재로 한 종합편성채널 JTBC의 사극

1. 조선 시대의 인물

仁粹大妃 韓氏, 혹은 仁粹大王大妃 韓氏
1437년 출생, 1504년 사망.

1.1. 소개

한확의 딸로, 의경세자의 아내.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된 후, 인수왕비(仁粹王妃)를 거쳐 인수대비(仁粹大妃)에 봉해졌고, 사후에 왕후의 시호를 받아 소혜왕후(昭惠王后)로도 알려져 있다. 아들이 즉위하면서 추존되었다는 점에선 신정왕후 조 대비와 비슷하고[1], 남편이 병으로 죽고 시동생이 왕으로 오른 케이스라는 점에서는 민회빈 강씨와 비슷하다.

조선 역사상 강력한 대비로 꼽히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인수대비가 입김을 행사한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흔히 아들 성종을 주물렀다고 하지만, 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의 비협조로 자신의 의견이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굴욕을 맛봤다.

본인은 정치적인 야심을 가지고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물밑 작업을 벌이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조신하게 뒤에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내훈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아랫사람들에게 너무 엄격한 게 문제였다고 한다. 이런 면 때문에 시부모인 세조 내외는 그녀를 폭빈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후에 일어난 며느리 폐비 윤씨와의 갈등도 어느 정도는 이 때문이었다.

1.2. 의경세자의 요절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450년(세종 32년)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 숭과 결혼해서 군부인이 되었다. 이후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며 남편은 왕세자가 되었고 그녀 역시 세자빈이 되었다. 하지만 훗날 성종이 되는 둘째 아들의 출생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요절하면서[2] 정빈으로 봉해져 출궁하게 되었다. 다만 훗날 수빈으로 고쳐져, 주로 수빈이라 불렸다. 남편인 의경세자와의 금슬은 좋았다고 전해져서 결혼생활 5년동안 슬하에 2남 1녀를 두는데, 월산대군, 명숙공주, 자을산군(훗날의 성종)이다.

1.3. 성종의 왕 등극

하지만 수빈은 이대로 버로우타지 않았다. 차남 자산군을 한명회의 딸과 결혼시켰고, 시어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여전히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다. 결국 시동생 예종이 갓난 아기인 제안대군만 남겨놓고 사망하자, 한명회와 왕실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산군을 왕(성종)으로 등극시키는데 성공했다[3].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자산군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한동안 빈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대신 국왕의 생모로서 궁 안에서 살게 되었고, 이후 궁 안에서 애매했던 그녀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인수왕비에 봉해졌지만 성종 2년에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되어 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이리 되면서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와 그녀 중 어느 쪽이 더 서열이 높은지에 대해 논란이 발생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희왕후 윤씨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가 더 서열이 높다"고 공언하면서 이후에 다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서 한자를 잘 알았기 때문에 정희왕후는 "나보다는 문자를 아는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 것이다"라고 수렴을 사양하기도 했다. 또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시기, 언문은 알지만 한자는 잘 몰랐던 정희왕후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유교경전은 물론 범어에도 조예가 깊어 범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고 내훈을 짓기도 했다. 그리고 수렴청정을 했던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사망하자 마침내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다. 이 때 성종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본인부터가 "여인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다녔던지라, 큰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실록에서 인수대비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려한 흔적은, 금승법이 통과되어 불교를 거의 말살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독실한 불자의 입장으로 결사반대한 것 정도가 전부다. 그 유명한 폐비 윤씨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수대비가 아닌 성종이었고, 그녀의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언문 교지를 내려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윤씨를 비판했을 정도였다.

폐비 윤씨를 죽이는데 에 주도적이었다는 야사가 유명한데, 성종의 후궁들과 결탁하여 폐비 윤씨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라는 내관을 협박하여 "폐비 윤씨가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더라"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 내용이지만 100% 구라다. 우선 이 야사의 전제 조건은 성종이 윤씨를 그리워했다는 건데, 성종은 폐비 윤씨라면 치를 떨면서 윤씨가 언급만 되어도 버럭 짜증을 내던 사람이었다.

애초에 윤씨의 2차례 폐비 위기도 대비들이 아니라 성종의 주도였고, 나중에 윤씨의 죽음도 성종이 윤씨 동정론이 나오자 못을 박아 결정한 일이다. 자세한 것은 성종 항목 참조. 엄격한 성격으로 폐비 윤씨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야 없잖아 사실이긴 한데, 일단 실록의 기록만 보면 윤씨의 성격머리가 장난이 아니라서 아무리 천사표 대비라도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1.4. 사망

연산군 재위 초창기에는 성종의 장례에 관하여 자문하기도 하고,[4] 연산군이 그녀를 위해 잔치도 자주 베풀어 주는 등 대체로 사이가 나쁘진 않았는데, 갑자사화폐비 윤씨의 사망이 문제가 되어 연산군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사망한다.

야사에는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할머니!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며 대들다가 머리로 인수대비의 배를 들이 받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실록에는 다만 연산군이 이복형제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인수대비 앞에서 깽판을 치다가 인수대비에게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며 그저 불손한 말이 많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만약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들이 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산군의 막장성과 패악질을 강조하기 위해 사관이 수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상대가 그래도 할머니이니 말로 부렸던 모양.

이날 연산군의 깽판질은 <연산군일기> 연산 10년(1504년) 3월 20일 기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며, 인수대비는 이 때 큰 충격을 받아 이 일이 있은지 1개월 남짓 뒤인 4월 27일에 사망했다.[5] 어쨌든 예나 지금이나 부갈등시어머니는 무섭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증명한 사례.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경릉(敬陵). 남편 덕종과 함께 동역이강 형태로 묻혀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건,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능만 봐도 그녀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남편 따위 그냥 누르는겁니다

1.5.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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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방송된 MBC '조선왕조 500년 - 설중매'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고두심과 임영규.[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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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방송된 KBS1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채시라안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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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방송된 SBS '왕과 나'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았던 전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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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방송된 JTBC '인수대비'에서 어린 시절은 아이돌 티아라 출신의 함은정, 이후에는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를 연기했던 채시라가 맡았다.

사극에서도 몇 차례 등장했는데 왕과 비왕과 나에서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왕과 비에서는 채시라가, 왕과 나에서는 전인화가 각각 냉철하고 권력욕이 강한 인수대비의 모습을 잘 연기해냈다.

작중 묘사의 차이점은 이러하다. 왕과 나의 인수대비는 왕과 비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연산군과 사이가 좋고 연산군을 아끼는 편이다. 실제로 자신이 아끼던 상궁을 잡아가려는 것을 말리려다 연산군에게 밀쳐져서 앓아눕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문병을 온 며느리 정현왕후에게 "주상의 폭정이 더 심헤지면 진성대군을 옹립하자는 말들이 들릴게요. 허나 누가 무슨말을 하더라도 대비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죽기 직전 연산군과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죽은 인수대비에게 연산군이 "어찌 소손의 어미를 그리도 미워하신겁니까!! 소손을 보위에 올리시고도 어찌 따듯하게 안아주지 않으신 겁니까!! 소손은 할마마마가 원망스럽습니다!!"며 슬퍼하는 장면까지 있을 정도. 하지만 연기력의 포스만 보자면 80~90년대에 방영한 MBC 대하사극 조선왕조 5백년에서의 고두심장녹수에서 말년의 인수대비를 연기한 효정이 가장 뛰어났다. 채시라는 같은 작가의 2번 항목의 드라마에 출연함으로써 다시 한 번 인수대비 역할을 맡았다.

2. 1을 소재로 한 종합편성채널 JTBC의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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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반면 혜경궁 홍씨의 경우엔 한중록에서도 드러나듯 사도세자가 추숭되지 못해 대비가 되지 못했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을 때도 추숭되지 못해 정순왕후 사후에는 사실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도 공식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종(대한제국장조)로 추숭된 것은 고종 때의 일이다. 이때 혜경궁도 헌경왕후, 효강대비로 추숭되었으나 남편이 죽은 지 100년, 홍씨가 죽은지 50년이나 넘은 까마득한 사후의 일이었다.
  • [2] 단종을 몰아낸 세조를 미워한 현덕왕후의 저주라고 하는 말이 돌았다. 이 말을 믿은 세조는 형수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을 저지른다(…). 다만 죽은 순서는 야사와는 달리 단종이 1달 뒤다.
  • [3] 물론 이럴 때 후사는 누가 이을지를 결정할 권리가 정희왕후에게 있었다. 즉, 성종의 이런 승계가 왕위를 안정시킬 수 있다고 정희왕후가 인정했기에 성종이 즉위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 [4]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자문을 구한 유일한 예다.
  • [5] 사실 연산군은 평상시에는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위해 큰 를 자주 베풀었고, 선물도 많이 사주는 등 상당히 후하게 모셨다. 불사도 말리지 않았다. 때문에 사건이 터졌던 당일에 연산군이 평소와는 달리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모습은 인수대비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을 수도 있다.
  • [6] 배우 미리의 전 남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