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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여

last modified: 2017-05-07 22:54:19 Contributors

藺相如

전국시대나라의 재상.

염파, 조사 등과 함께 조나라를 지탱하던 인물이며, 세치 혀로 최강 진나라를 쳐바른 희대의 변설가이기도 하였다. 그 유명한 소진, 장의도 한수 접을 명외교관이자 연의의 제갈량 뺨치는 설전의 대가이며, 진나라 입장에서는 악마가 따로 없는 공갈협박범.

조나라를 위해 활약하면서 숱한 업적을 남겼으며, 희대의 정복군주였던 나라의 소양왕을 몇번이나 농락한 일과 염파와의 문경지교[1]의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

의 티를 뜻하는 하자(瑕疵)라는 단어도 인상여가 진왕에게 한 말에서 유래한 것.

Contents

1. 일대기
1.1. 식객시절
1.2. 화씨지벽
1.3. 민지회담
1.4. 문경지교
2. 평가
3.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1. 일대기

1.1. 식객시절

인상여는 조나라의 내시였던 무현(繆賢)의 식객이었다. 어느날 무현은 조왕에게 죄를 지었고, 처벌이 두려워 연나라로 망명하려 했다. 이에 인상여가 무현에게 물었다.

인상여: "공께서는 어떻게 연왕을 알게 되셨습니까?"
무현:"예전 조왕을 따라 연왕과 함께 변경의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연왕이 가만히 내 손을 잡고서 벗의 교분을 맺자고 하였소. 그래서 나는 연왕의 마음을 헤아려 연나라로 가려고 하오."

인상여가 대답했다.

"조는 강하고 연은 약합니다. 그리고 연왕이 공과 교제하려 한 것은 공께서 조왕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께서 조를 버리고 연으로 가시면 연은 틀림없이 조를 두려워해 공을 머물지 못하게 할 것이고 오히려 공을 포박하여 조로 압송할 것입니다. 차라리 공께서 어깨를 드러내고 형틀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 것이 나을 것인데, 그러면 요행으로 죄를 벗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현이 크게 깨닫고 조왕에게 사죄하자 조왕은 다행히도 무현을 용서했고, 무현은 인상여의 용기와 지모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1.2. 화씨지벽

소양왕은 어느날 조나라 왕이 귀한 보물인 화씨지벽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조 혜문왕에게 화씨지벽과 진나라 성읍 열 다섯개를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조나라 혜문왕은 큰 고민에 빠졌다.

당시 진은 중국 대륙에서도 최강의 강대국이었기에 함부로 거스르면 나라는 나라대로 망하고 화씨벽까지 뺏길 상황이었다. 물론 화씨벽을 준다고 해도 진나라가 멀쩡히 열다섯 개나 되는 성을 내줄리가 만무했다. 갈팡질팡하던 조나라 조정은 결국 사신을 파견해 진왕과 교섭하기로 했으나 적임자가 없었다. 이에 무현이 뛰어난 지혜로 자신을 구해주었던 인상여를 추천하자 조왕은 인상여를 불러 물었다.

「진왕이 15개의 성과 과인이 갖고 있는 화씨벽을 바꾸자고 했소. 화씨벽을 보내야 되겠소? 아니면 보내지 말아야 되겠소?」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합니다. 보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진왕이 우리의 화씨벽만을 취하고 성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진나라가 성을 준다고 하면서 화씨벽을 달라고 했으니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그 허물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씨벽을 주었으나 진나라가 성을 주지 않는다면 그 허물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을 저울질 해 볼 때 마땅히 화씨벽을 주고 그 허물을 진나라에 있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사자로 보내야 되겠소?」
「대왕께서 마땅히 보낼 사람을 찾지 못하시겠다면 신이 원컨대 화씨벽을 받들어 사자로 가겠습니다. 성이 조나라에 들어온다면 마땅히 화씨벽을 진나라에 두고 오겠지만, 성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화씨벽을 온전하게 보전해서 조나라에 돌아오게 하겠습니다.(臣請完璧歸趙)」

이에 조왕은 인상여를 특사로 삼아 화씨지벽을 맡겼다. 그리고 바야흐로 인상여의 공갈협박 전설이 막을 올렸다.

진나라로 간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여 화씨벽을 바쳤다. 그런데 화씨벽을 받은 소양왕은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좋아할 뿐 성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소양왕이 성을 내주지 않고 화씨벽을 꿀꺽할 속셈임을 간파한 인상여는 "사실 화씨벽에도 작은 흠집이 있습니다.(璧有瑕) 제가 어딘지 알려드리겠습니다."하고는 소양왕에게 화씨벽을 슬쩍 건네받았다. 그리고 버럭 화를 내면서 기둥을 향해 화씨벽을 내던지려는 시늉을 하며 "진나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화씨벽을 깨부숴버리고 나도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화들짝 놀란 소양왕은 허둥지둥 사죄하며 지도를 가리키면서 성 열다섯개를 주겠다며 인상여를 달랬다. 물론 속셈은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였지만 그건 인상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인상여는 화씨지벽은 천하의 보배인만큼 진나라로 보낼 때 조나라 왕이 5일간 목욕재계를 했으니 소양왕도 5일간 목욕재계를 해야 마땅하며 화씨지벽을 받을 때에도 풍악을 울리며 경건히 받으라고 말해두고는 숙소로 돌아가서 화씨벽을 은밀히 조나라로 빼돌렸다.

그리고 5일 후 소양왕에게 가서는 천연덕스럽게 역대부터 진왕은 한번도 제대로 약속을 지킨 적이 없어서 화씨벽은 일단 조나라로 돌려보냈으니 성 열다섯을 먼저 준다면 화씨벽을 내주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진나라 신하들은 격분해서 인상여의 목을 날려버리자고 아우성을 쳤고 5일동안이나 목욕하며 기다리던 소양왕도 분노에 미쳐 날뛰며 인상여를 죽이려 들었지만 재상이었던 범수가 간곡히 말렸다. "인상여는 목숨을 걸어 화씨벽을 지켜낸 인걸이니, 그를 죽이면 반드시 제후들의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 어차피 화씨벽은 조나라로 돌아갔으니 인상여를 대접해 돌려보내고 성과 화씨벽을 바꾸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펄펄 뛰던 소양왕도 간신히 납득해 사흘밤낮 성대한 잔치를 벌여 인상여를 환대했다. 물론 인상여는 조나라로 돌아가자마자 입을 싹 씻었고 화씨벽 이야기는 유야무야되었다.[2]

바로 이 이야기가 완벽(完璧)의 유래로, 화씨벽을 완벽(完璧 완전한 옥) 그대로 가져왔다고 해서 생겼다. 이에 대해 명나라 시기의 명사였던 왕세정은 인상여완벽귀조론(藺相如完璧歸趙論)이라는 논평에서 그의 용기있고 올바른 처사를 칭송하였다.

하지만 소양왕의 굴욕 전설은 시작에 불과했다.

1.3. 민지회담

굴욕감을 씹으며 분해하던 소양왕은 진나라의 위세를 과시해 조나라의 기를 꺾어놓자는 속셈으로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한 후에 얼마 뒤 조나라에게 민지(澠池)라는 지역에서 회맹(정상회담)을 갖자고 제의했다. 조왕은 내심 거부하고 싶었지만[3] 인상여와 염파의 조언으로 참석을 결정했다. 조나라도 나름 대비책으로 염파는 국내에 남아서 태자를 보위하고[4] 인상여가 조왕을 수행하는 한편, 조사가 5천 군사를 이끌고 조왕을 뒷받침하기로 한다. 혹은 염파가 국경까지 군대를 이끌고 조왕을 호위했다고도 한다.

민지 회담에서 열린 주연 도중 소양왕이 조왕에게 "조왕이 그렇게 금을 잘탄다고 들었는데, 한번 실력을 보여주시오."하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조왕은 울며 겨자먹기로 금을 탔고, 소양왕은 동석한 기록관에게 모월 모일 조왕이 진왕의 명을 받들어 금을 탔다고 적게 하였다.

이에 열받은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다가가서 "진 대왕의 노래와 분부(盆缶=물이 담긴 항아리를 북처럼 두드리는 옛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천하일품이라 하는데, 그 솜씨를 보여주셔서 주연의 흥을 돋궈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물론 아쉬울 것 없는 소양왕은 왕 체면에 그런 짓은 못한다면서 조왕을 조롱하며 뻗댔으나, 인상여가 술잔을 들고 진왕의 가까이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칼을 빼들며 일갈했다.

지금 신과 대왕의 거리는 다섯걸음에 불과합니다. 이 자리에서 제 목을 찌른다면 대왕의 얼굴을 피로 적실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키는대로 안하면 널 찔러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것. 이에 화들짝 놀란 진나라 신하들이 인상여를 끌어내려 달려들자 인상여는 갈!!![5] 고함소리로 그들을 물리쳤고, 안색이 파랗게 질린 소양왕은 분부를 몇번 두들기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제서야 인상여는 칼을 놓고 자리로 돌아가서 동석한 기록관에게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의 명을 받들어 분부를 두들기고 노래를 하였다라고 쓰게 해서 진왕을 조롱했다.

그러자 열뻗친 진나라 신하들이 조나라는 진왕의 장수를 비는 의미로 조나라 성 열다섯개를 바쳐라라고 을러대자 인상여는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받으면 돌려주는 것이 예의라 하였으니, 진나라는 조왕의 장수를 축복하는 의미로 함양(咸陽)을 바쳐라라며 신하들까지 데꿀멍시켰다. 당시 함양은 일개 성이 아니라 진나라의 수도였는데 한마디로 나라를 통째로 바치라는 말(...).

이런 분위기에서 회담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결국 회담은 양국간의 우호를 돈독히 한다는 상징적인 문구 몇 개에만 합의하고 유야무야되었다. 하지만 조나라의 기를 꺾어 관광보내려던 진나라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오히려 망신만 톡톡히 당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말솜씨만으로 진나라를 버로우시킨 인상여의 명성은 천하에 널리 퍼졌다.

1.4. 문경지교

또한 인상여는 함께 조나라를 지탱했던 명장 염파와의 문경지교(刎頸之交)로도 유명하다.

민지회담에서 돌아온 조왕은 뛸듯이 기뻐하며 인상여를 최고 관직이었던 상경에 제수, 그 서열을 염파보다 위에 두었다. 조나라를 위해 무수한 전공을 세운 명장 염파는 인상여가 고작 말 몇마디 잘해서 자신보다 위에 올랐다며 크게 분노했다. 때문에 사적,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인상여를 비방하고 다녔으며 인상여를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창피를 주겠다고 별러댔다.

인상여는 이를 듣고 수레를 타고 다닐 때 길거리에서 염파를 만나면 피해 다녔고, 염파가 조회에 나오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염파는 더욱 기고만장했고, 염파가 부리는 몸종들까지 인상여의 몸종들을 우습게 여겼다. 결국 인상여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인상여가 그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그대들은 진왕과 염파장군 중 누가 더 무서운가?"

"당연히 진왕이 더 무섭습니다."

"나는 진왕을 면전에서 비웃고 그 신하들에게 모욕을 주었다. 그런데 내가 어째서 염파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진나라는 인상여가 있는 조나라도 아니고 염파가 있는 조나라도 아니라 염파와 인상여가 있는 조나라를 두려워한다. 내가 염파장군과 다투지 않는 이유는 다툴 줄 몰라서가 아니라, 염파장군과 내가 다투면 적에게 이롭기 때문이다."

이를 전해들은 염파는 크게 부끄러워하고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걸머진채로 인상여를 찾아가 앞마당에 엎드려 벌을 내려달라 빌었다. 이것이 고사성어 "부형청죄(회초리를 지고 죄를 청하다)"의 유래이다.

비루한 사람의 천박하고 좁은 소견으로 상국의 넓고 큰 도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렇듯 교만하게 행세했으니, 나는 죽어도 그 죄를 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황급히 뛰어나온 인상여가 염파를 일으키자 염파는 눈물을 흘리며 "오늘부터 대인과 생사를 같이하는 결의형제를 맺어 비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결코 변치 않겠습니다."라고 의형제의 교분을 맺으니, 이것이 "목이라도 선뜻 내줄 돈독한 우정"이라는 고사성어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유래이다. 오오 멋진 남자들 오오.

2. 평가

참고로 이런 에피소드만 보면 소양왕은 그냥 시체 호구같지만, 실상은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전국시대 진나라의 영토를 무서운 기세로 확장하여 전성기를 구가한 희대의 패권군주였다. 훗날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종결한 것도 사실상 소양왕이 쌓아놓은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시황은 바로 소양왕의 증손자인데, 족보로는 멀어보이지만 실제 다음 왕들이 단명[6]했기 때문에 소양왕 사후 5년 뒤에 진시황이 즉위했다. 결론적으로 수백년의 전국시대를 종결시킨 패왕에게 일생동안 쓴맛을 보여준 유일한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얼핏 보면 단순히 뻥카가 쎈 문관 타입으로 생각되겠지만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지휘를 해서 제나라를 공격한 경력도 가진 전천후 인물이다. 사기에서는 혜문왕 28년 기원전 271년 인상여(藺相如)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평읍(平邑)에 이르러 그 성의 북쪽의 구문(九門)에서 행군을 멈추고 큰 성을 쌓았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에 염파조사가 현역이었고, 화우의 진으로 명성을 떨친 제나라의 전단도 조나라에 망명해 장수로 활약하고 있던 시점에서 그 사람들을 제치고 직접 사령관을 맡은 걸로 봐서 군사적인 재능도 그들에 못지않게 출중하였던듯 싶다. 괜히 킹덤에서 삼대천으로 나오는게 아닌거다.

이후 소양왕은 인상여가 있는 한 조나라를 침범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조나라도 결국 장평대전에서 진나라한테 제대로 털렸다. 당시 조사는 죽고 인상여는 병환으로 위독한 상태였으나 염파의 지구전으로 진군은 패퇴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진나라 재상 범수의 반간계로 염파는 경질되고 조사의 아들 조괄이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때 병중이었던 인상여는 험없는 조괄에게 대장을 맡기지 말 것을 요청했다. 심지어 조괄의 어머니 조차도 조사가 아들에 대해 남긴 유언을 들며 아들의 기용을 만류했으나 조왕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장평대전으로 이어지고 만다.

결론적으로 전국시대에 보기드문 지략가이자 명재상이며 변설가이자 충신인 인물. 낮은 신분임에도 국가의 위기에 목숨을 걸고 대담하게 적을 기만하여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공로로 출세하고 사사로운 다툼으로 국론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을 피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나라에 간언을 하여 국가의 위기를 피하고자 노력했던 조나라의 만고의 충신.

장의나 소진같은 변설가들이 이리저리 나라를 옮겨타고 다니고, 범수와 이사 같은 재상들이 권력의 정점에서 말기 초심을 잃어버리거나, 염파나 악의, 전단 등의 전략가들이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망명을 해서 경력에 오점을 찍은것을 보면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자신의 처신과 국가의 대계에 중심을 잘 잡고 나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인물이다. 아니, 국가에 대한 충심까지 감안한다면 전국시대 최고의 인재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3.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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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G image (Unknown)]
삼국지 12고대무장일러스트

삼국지 11에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며 특기는 논객. 지력은 80대 중반인데 같은 고대무장인 장의보다는 지력이 낮지만 성격이 대담[7]이라 쓸모가 많다. 간손미중 둘이나 불쌍하게 만드는 고대무장.[8]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이 재미있는데, 친애무장은 등지이고 혐오무장은 마속이다. 친애무장이 등지인 것은 용기를 보인 외교사절이라는 점에서 친애무장으로 설정한 듯 하고, 마속이 혐오무장인 것은 그가 끝내 중용하지 말라고 했던 조괄과 마속이 비슷한 이미지라는 점에서 설정한 듯.

삼국지 12 PK에서도 등장한다. 화씨벽을 들고 소양왕을 협박하는 포스가 넘치는 일러스트를 들고나왔다.
능력은 통/무/지/정 66/39/94/95 병과는 창병 전법은 허유엄살.
염파와 문경지교의 일화가 있음에도 친애무장관계는 아니다. 그 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이벤트로 나온다. 일러스트까지 준비되어 있다.

하라 야스히사만화 킹덤에서는 과거 조나라의 삼대천의 일원으로 소개되며 염파의 회상신 정도로 등장. 염파의 언급에 의하면 진나라의 육대장군이 자신의 최대의 적이자 최고의 벗들이라면 문경지교를 맺은 인상여는 자신의 형제라고 한다. 이미 인상여가 죽인 뒤라서 직접 등장하진 않았으나 그 대신 516화에서 그의 옛 부하들이 이목을 마중나온 모습이 나오는데, 얼핏 보기에도 군기가 바른 정예군이란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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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刎頸之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목을 자른다 해도 기꺼이 자르라고 할 정도의 우정.
  • [2] 사기 중에서는 범수의 이야기는 없고 그냥 소양왕이 대인배 용서했다는 이야기의 판본도 있다.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이를 따랐는지 "큰나라의 왕은 역시 통이 크더라."라고 설명한다.
  • [3] 당시에는 회담을 한답시고는 다짜고짜 뒤통수를 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었다. 한 예로 제환공은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 항복문서를 조인하고 있었는데 노나라 장수가 회담장에 난입해 환공을 죽이겠다고 난리치는 바람에 산통을 깬 적이 있었다.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기로 하고 간신히 자리를 모면한 환공은 다시 노나라를 초토화하겠다고 을러댔지만 재상 관중이 "지배자는 협박당해 맺은 약속이라도 지키는 법입니다."라고 조언하자 (약속을 깨려면 자기가 공적으로 맺었던 약속을 깨야만 하는 이유를 자기 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때 "저건 협박받아서 맺은 계약이니까 무효임" 이라고 솔직하게 밝혀 버리면, 듣는 입장에서는 "왕이라는 인간이 일개 장수한테 협박받은 걸 마음속에 그렇게 담아두고 있나...?" 라고 느끼게 됨.) 꾹 참고 노나라와의 휴전협정을 준수했다. 이 일을 계기로 환공의 명성이 천하에 퍼졌고 결국 환공이 첫번째 춘추패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4] 이 때 이야기가 참 간이 큰 것이, "거리를 재 보건데, 30일 이상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 넘어가면 태자님을 왕으로 모시고 진나라를 막겠습니다(...)." 혹시라도 볼모로 잡히거나 죽을 것까지 염두에 뒀다 할 수 있으며, 그만큼 이 회담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말하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 [5] '일갈'이라고 할 때의 갈 자는 고함을 지른다는 의미를 담는 글자인 동시에 그 자체가 고함소리의 의성어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함치는 것을 일컫는 의성어로 쓸 때에는 '할'이라고 읽는다.
  • [6] 전대 왕들이 3일,3년 즉위하고는 죽었다.
  • [7] 삼국지 11의 설전에는 분노 게이지가 있는데, 성격에 따라 분노시 효과가 달라진다. 대담의 경우는 3턴간 무적. 단 대갈, 무시 이 두 능력에는 막힌다.
  • [8] 하지만 지력이 80대 중반이라는 건 위의 일화를 볼 때 너무 낮다는 평가도 있다. 확실히 인상여를 포함하여 중국의 여러 고대무장들이 평가절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