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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last modified: 2015-04-14 19:24:16 Contributors


伊藤博文(いとうひろぶみ)
이등박문

역대 일본 총리
(내각제 실시) 초대 이토 히로부미 제2대 구로다 기요타카 제3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4대 마츠카타 마사요시 제5대 이토 히로부미 제6대 마츠카타 마사요시 제7대 이토 히로부미
제8대 오쿠마 시게노부 제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제10대 이토 히로부미 제11대 가쓰라 다로

1841.10.16[1] ~ 1909.10.26 (만 70세)

수상 임기
초대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3년 4개월)
제5대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4년 1개월)
제7대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6개월)
제10대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7개월)

도합 8년 6개월(2720일)을 지냈다(역대 세번째로 긺). 1885년 만 44세 2개월의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그리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조선 침탈과 식민화에 착수한 원흉.

Contents

1. 개요
2. 출생과 정치활동
3. 암살
3.1. 1차 시도
3.2. 2차 시도
4. 인격
4.1. 평가 - 음흉한 제국주의 정치인
4.2. 결론: 일본 근대화와 조선 보호국(식민지)화의 일등공신
5. 지폐 속 인물

1. 개요

야마구치 현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3존"으로 불리는 인물.

한자 발음으로는 이등박문이며 한국의 어르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등박문으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2] 역시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식민지 국가에 만행을 일삼았던 데라우치 마사타케, 미나미 지로,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는 아는 사람만 아는정도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정말 말 그대로 온 국민이 다 안다. 근대 제국주의 시대 인물이다보니 중세사람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보다 인지도가 높아서 말 그대로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일본인이다.

이토 씨(氏)는 일본에서 인수로 따지면 5~6위나 될 정도이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동성(同姓)이 별로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흔한 성씨라는 것. 그런데 이 사람 때문에 박힌 '이토' 씨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 때문에 이토 성을 가진 수많은 일본인들이 여럿 봉변당했다(...)[3]

일본에서는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現 일본의 의회 제도와 양원제를 확립한 인물로서 위인으로 분류된다.[4]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심지어 1,000엔짜리 지폐에 화폐 도안의 주인공이었다가[5] 그나마 이런저런 이유로 교체되었다.

히노 아키히로의 대표적인 별명[6]이기도 하며, 가끔 비유되는 경우가 있다.

만화영화 이나즈마 일레븐 GO 크로노 스톤의 막말 편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었지만...다행히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재능방송에서도 막말 편은 개명 없이 그대로 방영했다.

그리고 wikl:"스쿨 데이즈"모 막장게임에서 wikl:"이토 마코토(스쿨데이즈)" 이토 마코토의 성씨인 이토는 히로부미에게서 따왔다.심지어 하는 짓도 그렇고 최후도 비슷하다!

2. 출생과 정치활동


원래 그의 아버지 주조는 무사도 아니고 천민에 불과했지만 미즈이 다케베라는 하층 무사에게 근실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하급 무사계급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하층 무사라고는 해도 이토가 속해있던 주겐 계급은 무사의 신변을 돌보고 잡역을 담당하는, 한마디로 사실상 서민에 불과한 낮은 신분이었다. 이토 자신도 유신3걸의 일원인 기도 다카요시의 시중을 들면서 출세한 경우. 젊어서는 몸이 빼빼 말라 호리병이라고 불렸다 한다.

그래도 이토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당대 조슈번의 교육자로 유명했던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7]에 들어갔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달리 요시다 쇼인에게는 인정받은 일이 없고, 오히려 다카스기 신사쿠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이후 친분이 있었던 상급 무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영국에 유학하면서 조슈번의 외국통으로 인정받았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번에서 일하며 조슈번이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벌인 전쟁의 뒷처리를 맡아 영국과의 평화협상에 통역으로 참여했고, 막부와 초슈 사이에 막장전쟁[8]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도사,히젠 등과 사츠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조슈와 사츠마 파벌을 중재하면서 사츠마 파벌의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되었으며,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의 거물들이 잇따라 숨지면서 생긴 정권의 공백을 메우면서 수완을 발휘하고 1881년 오쿠마 시게노부와의 정쟁 직후 메이지 정권의 명실상부한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정상가도를 달렸다. 평민이나 다름 없던 일개 하급무사가 멀쩡한 무사들도 평민이 되던 시절에 되려 공작이 되는 벼락출세를 한 것이다.[9]

무엇보다도 한국과 관련이 깊은데, 전봉준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간섭을 시작해 을사조약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뒤에는 초대 통감에 취임해 한국을 보호국화한 인물이다.

3. 암살

3.1. 1차 시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하고 얼마 후 수원에 놀러 갔다. 이 와중에 안양[10]에 사는 농부인 원태우라는 사람이 있었다.[11]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조국을 몰수당하게 만든 을사조약에 대단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안양에서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거사가 시작되기 전,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는 열차가 오는 것이 목격되자 동료 중 하나가 겁을 먹고 바위를 치우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나 싶었다. 그럼에도 원태우는 짱돌을 집어서 그걸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힘껏 던졌다.[12] 짱돌은 유리창을 깨고 이토 히로부미의 마빡에 정확하게 헤드샷 되었다.스나이퍼 이 때 깨진 유리조각도 같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켰으나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조치를 해서 안타깝게도 살아났다.[13]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온 몸을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하여 불구가 되었다. 이때 원태우는 너무 모질게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정말로 성불구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경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외롭게 살았는데, 다행히 대한독립을 보고 1950년에 돌아가셨다. 미수에 그쳐 안중근 의사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진다.

이분의 모습이 어땠는가는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이분을 새긴 동판이 있다. 안양역을 다니시는 분들 계시면 한번 보고 묵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 동판이란 게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저게 누군지 이름 읽기도 어렵다. 꼬라지가 이 모양이라 안양 사는 사람 대부분이 저게 그냥 장식인지 원태우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거기에다가 농부였던 분이셨는데 동판은 갓을 쓴 선비의 모습이다.

3.2. 2차 시도

안중근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근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고 하얼빈역에 정차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FN M1900으로 3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4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힘,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힘,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힘.[14]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15]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까레야 우라![16] 까레야 우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고 얼마 후 사망. 참고로 이토는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으며 동반했던 비서 모리의 안부를 묻고 눈을 감았다.

참고로 암살 당시 이토는 이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던데다 더욱이 원태우의 암살 미수사건 때문에 그 후 이토는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저격대상인 이토의 얼굴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얼빈역으로 가게 되었다. 다만 코 옆에 점이 있다는 식으로 설명만 들어 알고 있었을 뿐.

결국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수 없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체념했으나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덕분에 안중근 의사가 그 자의 얼굴을 보고 점 등을 확인하여 본인임을 알아보고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17]

참고로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KBS 역사스폐설에서 그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

그 외의 내용은 # 이 기사 참조. 유언, 제2 암살설 외 다른 떡밥도 분쇄한 기사이다.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암살로 인해 한일합방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주장[18]하지만, 이 사건과는 별개로 이토의 자택에서 가쓰라 총리가 질문했던 1909년 4월의 회동에서 조선병합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그러나 합병이 결정된 후에도 이토 히로부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조선왕실 폐지론에 대해 반대하고, 조선 왕실의 보존과 각 도에서 6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등의 시안을 작성하고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 스스로도 말했듯이, 뷔르템베르크 공국과 같이 일정 자치를 허용하려고 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다만, 자치론자들이 오늘날 매국노 취급당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것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조선인을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일본인과 동일하게 대우하자는 식의 주장이 일본에서 맥이 끊긴 것도 아니고.[19]

다만, 한국의 식민지화 연도를 1905년으로 산정할 경우, 이런 변호의 여지는 사라지고 이토는 빼도박도 못하는 식민지화의 원흉이 된다.

여하간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이란 직책은 그의 정치 행보에선 동양의 세력구도를 결정짓는 요직이었고, 사망 시점에서 이토는 통감 자리도 내놓고 추밀원 의장이 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다른 시각도 있다. 사실상 한일합방을 확정짓기 위한 일들은 대부분 이토가 했고, 메이지 덴노가 그리 반대했는데도 끝내 그를 설득시켜 왕세자 요시히토의 방한을 추진한 것도 조선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통감 자리를 내놓은 후 그는 다시 추밀원 의장 직을 맡았다는 것 등을 보자면 그가 정치권에서 아예 밀려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니까 되려 이토가 조선의 뒷처리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총리직 등 국내 요직을 일부러 떠나있었다는 것이다.

김삼웅 교수는 안중근 평전에서 안 의사가 이토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20]고 썼는데 이는 당시 시간이나 주변에 있던 사람 등을 통해 짐작 가능하다. 취재진도 꽤 있었다는 듯.[21]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때 사용한 권총은 벨기에제 FN M1900 이고 .32 ACP 라는 엄청 작은 권총탄을 사용한 호신용 권총이었다.


흔히 죽을때 남긴 유언이 "당했다" 라거나 자신을 저격한 자가 조선인이란 말을 듣고 중얼거렸다는 "멍청한 놈" 등이라고 알려져있지만[22] 전부 거짓말로 밝혀졌기에 의미는 없다.

혹자는 그래도 온건파였다는 이유로 변호하지만 일본 식민지화의 실무작업을 한국 내 일본의 수장이자 사실상 총독으로서 진두지휘했고 그 비중 역시 가장 큰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독립운동가들 입장에선 충분히 노릴 만 했다고 볼 수 있다. 얼마 뒤 사라예보에선 프란츠 페르디난트 같은 사람도 암살당하는 마당에(...)

4. 인격


"남자는 배꼽 밑으로 인격이 없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가히 원조 색욕마인이라 불리기에 적절한 것. 일제강점기 때 널렸던 대표적인 견공자제분(그런데 정작 히로부미 본인은 한일병합 전에 사망). 오죽하면 여자문제로 덴노에게 야단을 맞았다는 말도 있다. 이토 마코토의 성을 여기서 따왔다는데, 저 말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게다가 관련 일화 중 어린애한테 손댔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리콘이다 가면무도회 등에서 화려한 스텝(…)으로 활약해 뭇 귀족 부인들과 바람을 폈다는 일화도 있다. 다행히(?)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달리 돈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럭저럭 문제없이 지냈다고 한다. 한국인 양녀로 알려진 배정자도 아마 애첩이었을 가능성이 많다.[23] 사망했을 때에도 이토의 여자 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일본 신문에 실렸을 정도. 슬라네쉬가 이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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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해석: 여자 좋아하는(밝히는) 자의 최후[24]
잘 보면 위에서 말한 피탄 위치와 비슷하고 그림자는 '女'의 형상을 하고 있다. 쓸데없이 고퀄

평소 유곽을 번질나게 드나들었고 게이샤 문화에도 매우 밝았다. 당시 어지간한 고관이야 게이샤 한명 정도는 스폰서 서주곤 했지만, 이토가 개인적으로 고용하여[25] 조선까지 데려온 게이샤는 4명에 달했다. 더욱이 용산 일본군 헌병대 및 일본인 거주지역 근처에 거대한 유곽을 세우고 일본식 성매매 문화를 조선으로 적극적으로 수출한다.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풍류통감이라고 불리며 뒷다마가 좀 있었다.

더욱이 통감시절 이토는 한인 고관들과 술자리를 할 때 게이샤를 하나씩 붙여주었다 하는데, 이를 여자를 끼고 노는 잘못된 한국 접대문화의 효시로 보는 시각마저 있다. 뭐 이전에도 관리들이 술자리에서 기생 끼고 노는 것은 흔했지만

그는 살아생전 醉臥美人膝 醒掌天下權(술에 취해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는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라는 한시를 남긴적도 있다.

이하 이토의 여색 밝힘은 해당기사를 참조할것

4.1. 평가 - 음흉한 제국주의 정치인

일본 내에서는 온건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던 탓에,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그가 죽은 덕분에 일본의 급진적인 군국주의가 심화되고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와 패망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물론 이 사람이 온건파였던 건 사실이다. 초대 총리로 입헌군주제의 확립 등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골수 천황주의 계열 보수파들과 대립하면서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며, 가급적이면 전쟁을 억제하려는 평화주의자적인 행보도 사실이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 모두 개전에 반대했다. 이 점이 일본에서는 위인으로 취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안중근 의사에게 죽었을 때 실제로 기뻐한 것은 이토의 정치적인 적들이었던 보수파 정치인들인 것도 사실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경비가 많이 드는 합병보다도 조선을 완충지대로 두고, 강력한 일본의 영향력안에 드는 "조선의 속국화"를 기획한 약간은 온건주의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가쓰라 타로 등 정부 요인들의 조선병합이라는 결과를 승낙한 뒤, 적절한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26]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라는 인물의 출신 성분에 있다는 견해가 보통이다. 일단 정치적 성장 배경이 진보적 유신지사들이 주축이었던 죠슈파였고, 그곳에서 정치적인 기반을 다졌기에 온건파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초대 총리까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정한론 정변에서 정한파를 몰아내고 승리한 주역으로서 일본 정부의 거두 오쿠보 도시미치의 신임을 얻어 다음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다른 말로 당시 이토의 제국주의 정책이 온건하게 보일 정도로 당시 일본에서 과격한 주장들이 많았다

특기할만한 점이라면 일본에서 영어에 능통하다는 점이 크게 먹고 들어갔다는 점.[27] 즉 자기 실력 이전에 정치적 뒷배경이 그를 온건파로 보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거기다 온건파들의 절대적 지지 속에 총리가 되었으니 온건파 코드 인사 등용은 당연할 수밖에….

또 영어에 능통하여 서양 문물과 당시 세계 정세를 잘 알다보니 이 사람의 정책 기조가 서양식 국가라는 점이다. 따라서 인본주의니 민주주의니를 도입하며 국가간 평화 등을 강조하면서도 제국의 확장에 열중하는 서구 열강의 모습까지 그대로 카피해버렸다! 좋은 것만 배우지 ㅉㅉ 이 때문에 강대국의 입장이 되기 위해 근대 제국주의를 그대로 수용한, 말 그대로 전형적인 19세기 정치가였다.[28].

죽기 전에 규장각 보관문서 1,079권을 대출했는데, 도중에 안중근에게 암살당하였기 때문에 반환하지 못했다. 현재까지의 연체료를 계산하면 대략 37억원. 규장각 장서들은 현 일본 왕실 도서관의 전신인 도서료에 보내졌고, 이 장서들은 이후 일본 왕실 도서관인 궁내청 서릉부에 보관 중이었다. 원래 일본에서는 돌려줄 맘따위 없ㅋ엉ㅋ였으나 2010년 하반기 간 나오토 내각과의 협의 결과 1,205권을 마침내 반환받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조선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조선에 올 때마다 기생집에서 놀기를 즐겼으며 조선인 [29]도 있었다. 조선옷을 입은 사진도 여럿 남아있는데, 심지어는

자기 본마누라 우메코(梅子)에게 조선옷을 입히고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코스프레? 가운데의 쓴 노인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또한 명성황후 시해에 당시 총리였던 이토를 비롯해서 무츠 무네미츠 등 일본 내각이 개입했다는 증거 자료가 공개되었다.기사 링크 책 링크

이토 히로부미가 친한파이며, 한국 근대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뉴라이트라고 설명이 필요할까? 근데 진보라는 김기협같은 작가들도 고종을 까다가 이런 주장에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일병합을 묵인하고 을사늑약, 고종 폐위를 통해 조선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노예'를 다루듯이 '채찍과 당근'처럼 채찍을 '덜' 때리면서 이를 통해 조선 사람들을 감화시키려 한 인물이다. 당연히 이런 행보를 일반 백성들이 알리 없었고 이토의 겉모습에 속아넘어가 친일파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리고 아직도 노예근성이 남아있는 친일파들은 이토를 칭송하게 된 것. 기억해라. 덜 때리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자유를 속박한다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

겉(백성)으로는 감화정책을 펼쳤지만 속(조선)으로는 을사늑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폐위시킨 한마디로 조선 사람들의 감정을 고려해 완전 병합하기보다는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려고 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려 했던 대단히 음흉한 인물이다. 그의 행동을 보면 국가라는 정체성을 잃게 만들어 저항의 의지를 흐릿하게 하고 식민지화를 정당하게 만들려고 애를 썼는데 만약 이토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과격한 군부가 감화 정책을 통해 조선을 부드럽게 스며들게 해 조선은 독립의 의지가 무너지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19세기의 영국이 연상될 정도다. 홍콩 반환 때 영국이 15년만 더 대여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중국정부가 일언치하에 거절한 이유가 바로 이거다. 만약 더 대여해줬다면 지금도 독립요구가 끊이질 않는 홍콩이 중국과 손을 잡았을까?

실제로 이런 유화정책이 효과적인지 궁금하다면 아직도 친일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대만을 보도록 하자. 만약 우리나라도 일본의 강점기간이 더 길었더라면 식민지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대만과 같은 꼴이 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대만도 그 당시를 쭉 겪으신 노인분들은 아직도 일본이라 하면 치를 떨지만 그러한 목소리가 유화정책 때 친일파가 된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부족한지라 어림도 없는 상황이다. 이래서 역사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안중근 항목에서도 나와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다. 오죽하면 웬만한 일본 위인들에게 바쳐지는 신사가 없을까.[30][31] 그래도 후술되어 있듯이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디즈레일리,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처럼 근대화의 주역이기에 평가는 엇갈려도 대체로 위인 취급은 해준다. 그리고 귀신같이 넷 모두 제국주의자다

4.2. 결론: 일본 근대화와 조선 보호국(식민지)화의 일등공신

다만 조선 보호국화에 앞장선 점을 제외하고 일본 내에서의 업적만 보면 메이지 유신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점에서 역사적인 평가는 호의적이다. 물론 이토 한 명이 혼자서 일본을 근대화시킨 것은 아니나 그가 일본의 근대화 및 선진국으로의 급부상에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라는 것. 일본에서 평가가 엇갈리긴 해도 대체적으로 이토를 위인으로 대우한다.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비슷한 부류라고 보면된다(근대화의 주역인거에 제국주의자인 것 까지 똑같다). 단 그것과 별도로 한반도에 개입하고 보호국(식민 통치)화한 원흉이라는 점은 잊지말자.

5. 지폐 속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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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G image (Unknown)]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독립을 맞이했다. 이후 1963년에 1000엔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되어 1984년도까지 이 지폐가 사용되었다. 그래도 1984년까지 꿋꿋이 사용하다가, 아시아 이웃 나라들과의 경제교류가 늘어나면서 결국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하였다. 나쓰메 소세키가 그려진 지폐는 2004년까지 발행하다가, 현재는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진 지폐를 사용한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노구치 히데요는 과학사기꾼임이 들통났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그냥 나쓰메 소세키를 계속 쓰지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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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네이버 프로필에는 14일로 나와 있는데 위키백과에는 16일로 나와 있다.
  • [2] 이 자를 기리기 위해서 남산에 지어진 절도 히로부미 절, 즉 박문사이다.
  • [3] 어쩌다 서로 동성동본이란 걸 알게 되면 즉석에서 거의 의형제 사이(...)가 되는 한국인에 비해 일본인성씨에 대한 관념이 상당히 흐릿한 편이다(당장 한국에선 일단 을 바꾸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유가 아니면 금지되어 있다(양육자의 재혼, 부모중 다른 한명의 성으로 바꾸는 경우).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결혼만 해도 성이 바뀐다. 전과자가 성씨까지 개명해서 살아가는 일 또한 흔하다(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항목 '범인의 인적사항' 참조). 그러니 성씨에 대한 관념이 뚜렷할 수 있나).그러니 이런 소리를 듣게 되면 황당함을 넘어서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사실 일본의 다른 역사적 유명인들은 명문 사무라이나 귀족 출신으로 성씨가 워낙 독특하기에 성씨가 같은 사람이면 후손일 확률이 그나마 높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평민 출신이기 때문에 흔하디 흔한 평민 성씨라서 일반인의 이름과 별로 분간이 안 되는 것.
  • [4] 일본 국회건물 정문 쪽 메인 홀에는 방의 4귀퉁이중 한 귀퉁이에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서있다. 현재까지도.
  • [5] 일본제국 시절 얘기가 아니다!
  • [6] 히노 아키히로부미 혹은 히노 히로부미. 물론 나쁜 의미로 부르는 거다.
  • [7]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들은 대부분의 조슈번 유신지사들이 포함되며, 이후 근대 일본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기도 다카요시나 이노우에 가오루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슈계 인사들은 모두 요시다 쇼인의 문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 가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봐도 요시다 쇼인 문하의 천재로 불렸던 다카스기 신사쿠, 부정선거의 달인(...) 시나가와 야지로,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 사실상 중시조격인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대표적인 메이지시대 엘리트코스였다.
  • [8] 막부(幕府)와 초슈번(長州藩)의 앞글자 하나씩을 붙인 명칭이다. 막장이 아니다.
  • [9] 다만 메이지 유신 극초반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비주류노선에 가까웠다는 견해가 있다. 아무래도 사츠마 파벌의 영향력이 워낙 강한 초기에는, 정치인-관료 진영의 (비교적) 온건파 조슈 파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노선은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듯
  • [10] 당시 경기도 과천군 하서면 안양리. 1914년 이후에는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현재 안양시 안양동.
  • [11] 안양시 안양동 출신, 1950년 수푸루지(현 안양시 동안구 비산동)에서 서거.
  • [12] 서리재 고개(현 안양육교, 현재 제2 경인고속국도와 1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 부근, 석수 체육공원 및 안양자동차학원이 있는 곳이다.)에서 돌을 던져 맞췄다.
  • [13] 돌 던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조선시대의 평민들은 석전이라는 돌 던지기 싸움 놀이를 심심찮게 했었다.
  • [14] 3발 다 급소를 맞췄다고 한다.
  • [15] 네이버캐스트 '안중근'과 원재훈의 '안중근, 하얼빈의 11일' 참조.
  • [16] 러시아어로 대한민국 만세. 우라돌격의 그 우라다.
  • [17]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담당했던 유동하 의사의 친척의 증언.
  • [18]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역사의 아이러니" 란 논지로 서술된바 있다. 하지만 저자인 이원복 교수의 역사관에 대한 비난이 이어지자 재판본에서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 라는 내용으로 수정되었다.
  • [19] 심지어 후대에 네임드 극우로 취급받는 타 잇키 역시 이런 주장을 하기도 했었다.
  • [20] 위에 나온 제2 범인설 따위의 얘기가 아니라, 비겁한 암살이 아닌 정정당당한 처단이라는 뜻이다.
  • [21] 참고로 안중근 의사는 일본측에 본인은 독립군 중장의 신분이니 전쟁포로로 취급해달라고 했지만, 굳이 암살당한 이토가 악랄한 일제의 고관이 아니었더라도 이 경우 국제협약상 교전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교전권자임을 상징하는 의상, 즉 독립군복 등을 입고 총을 쏜 것이 아니라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이토를 사살했기 때문.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이미 행정부의 명령으로 안중근을 사형시키기로 정해놓고서 안중근의 의견을 모두 묵살한 채 사형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안중근이 전쟁포로든 아니든 이미 일본 법정은 많은 국제법을 어겼다.
  • [22] 문제는 한국에서도 현재까지도 "안중근 의사가 국제정세에 밝았더라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였을까, 한국이 한일합방을 당한건 안중근이 이토를 죽여서이다." 설령 그렇다쳐도 이미 통감자리도 내놓았다며?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것. 당장 구글에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멍청한 놈>을 키워드로 쳐서 검색하면 2010년 까지만 해도 수도 없이 이런 소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이미 말했지만 이토 생전에 합방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이토도 생각을 안했을 뿐, 반대하지는 않았다.
  • [23] 최승희와 함께 192-30년대를 풍미하였던 무용가 배구자는 배정자의 조카인데 사실은 이토 히로부미와 배정자 사이에서 태어난 숨겨진 사생아 라는 소문이 꾸준히 돌았다. 배구자의 동생 배한라는 "언니가 이토 히로부미와 고모 배정자 사이의 딸이었던 까닭에." 라고 직접 발언했었던 적도 있다. 여담으로 이 배구자는 2003년 까지 살면서 장수를 했는데 말년에는 정신이 햇가닥 돌았는지 자신이 메이지 일왕과 민자영 사이에서 태어난 조선의 공주라는 헛소리를 조잘거리고 다녔다.
  • [24]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
  • [25] 당시 개인 간호사라는 명목으로 고용하여 급여를 주고 데려왔다.
  • [26] 참고로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형식도 이와 비슷한 형식이었다. 베트남 북부와 남부는 떼어내고 비록 중부 지역만을 명목상 주권자로 당시 베트남 황실이었던 응우옌 왕조에게 남겨졌지만 실상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지배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 베트남에 황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누가 봐도 프랑스의 통치임이 명백했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 [27] 정말 영어를 잘 했다고. 측근에게 "난 지금 당장 정치가 그만 둬도, 영어교사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나, 동료 정치가들에게 직접 번역한 영미 신문 발췌본을 돌렸다는 것을 보면...
  • [28] 그리고 고종은 이런 인물에게 대한제국의 최고훈장인 척대훈장을 내리며 꼬시려고 했다. 사람을 잘못 고른 셈…다만 오판은 심지어 이토를 암살했던 안중근 의사까지도 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순 있겠다
  • [29] 가장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의 "첩"은 배정자일 것이다. 헌데 배정자는 이토의 양녀이기도 했으므로, 굳이 그렇게 부르자면 근친"일 수도" 있다.
  • [30] 물론 아주 없지는 않았다. 경술국치 이후 경성부 종로에 박문사라고 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가 건립되긴 했지만 8.15광복 이후 당연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현재 일본 본토에는 그를 기리는 신사는 없다. 더 자세히 아시는 분 계시면 추가바람.
  • [31] 다만 요시다 쇼인을 주제신으로 하는 쇼인신사에서는 그의 제자들도 신으로 섬기는데 제자들 명단에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