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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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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최훈김형준 칼럼에 투고한 일러스트. 여담으로 이 일러스트의 원본 파일명이 wind.jpg다. 바람의 아들에 걸맞는 적절한 파일 네이밍.

Contents

1. 야구천재
2. 일본 진출, 시련의 시작
3. 한계와 싸우는 사나이
3.1. 2009 시즌
3.2. 2010 시즌
3.3. 2011 시즌
3.3.1. 포스트시즌
4. 은퇴

1. 야구천재

안타양준혁이 가장 잘 쳤다.
홈런이승엽이 가장 잘 쳤다.
출루는 장성호가 가장 잘 했다.
수비는 박진만이 가장 잘 했다.
도루전준호가 가장 잘 했다.
마지막으로 처세술이호준이 가장 잘 했다.

그러나 이종범은 그 누구보다도 야구를 가장 잘 했다.[1]


타자는 이승엽이 제일 잘하고, 투수는 선동열이 제일 잘하고, 야구는 이종범이 제일 잘한다. -by 김응용그리고 인생은 이호준 사랑은 김동주 개그는 박석민

광주 출신이며, 광주일고[2]와 건국대[3][4][5]를 졸업하고 1993년에 1차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상급 선수가 될 재목으로 주목받았으며,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지에서도 스카우트를 하려 했지만 동기 선수들도 같이 받아주기로 약속한 건국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본인 왈 건국우유가 맛있었다 카더라 빵에는 역시 우유

데뷔 시즌부터 타율 0.280, 득점 1위, 안타, 도루 2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한국시리즈에서는 한 경기 도루 3개(최다), 총 7개(한국시리즈 최다 도루 타이)를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였다. 다만 아쉽게도(?), 1993년은 양준혁, 박충식, 이상훈, 구대성, 이대진 등 나중에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들이 많이 나온 해로 유명했던지라, 신인왕은 양준혁이 가져가게 된다.

이후의 활약을 보면 알겠지만 90년대 중반의 이종범은 한마디로 완벽한 야구선수였다. 주목할만한 시즌은 1994년도와 1997년도인데, 완전 충격과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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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4년,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릴 거라는 언론을 엿먹이기라도 하듯, 0.393이라는 괴물같은 타율을 기록했다. 백인천의 0.412에 이은 역대 2위 기록. 안타 196개[6], 도루 84개 또한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이런 괴물같은 성적을 낸 만큼 당연히 정규시즌 MVP는 그의 것이었다. 나중에 말하길 94년 당시 4할 타율, 200안타, 100도루 3가지를 한꺼번에 달성하려고 했다고... 흠좀무. 만약 이종범이 좌타자였다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실은 왼손잡이.) 장성호도 홈페이지에서 '만약 종범이가 좌타자였다면 4할 달성했겠냐'에서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꿈의 타율' 4할을 넘나들며 한 시즌에 84개의 도루를 성공시킬 만큼 놀라웠던 주루 능력과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완전히 빠지는 듯한 공을 낚아 내는 수비 능력[7]까지. 한 마디로, 1번 타자로 나와서 안타치고 홈런치고 도루하면서 명수비까지 하는 괴물.
특히 84개라는 무지막지한 도루 개수는 21세기가 온 뒤로도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당시의 도루는 무관심도루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어느 정도 허수는 있다. 우리나라에서 무관심도루라는 개념이 확립된 것은 2003년 이승엽의 도루가 최초. 물론 93, 94년의 전준호와 이종범의 도루 개수는 무관심 도루가 인정되던 다른 시즌과 비교하더라도 초월적히다.

어쨌든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선수의 대표는 이종범이라 할 수 있겠다. 흔히 말하는 5툴 플레이어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선수였다고 해야 할까. 무릎팍도사에서 이종범은 4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한 이유가 생고기를 먹고 탈이 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한때 3할 8푼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본인은 경기 중 사고(?)를 내지 않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발언.

만약 좌타를 했었다면 지금보다도 더 먼치킨 수준이었을 것이다. 본인도 좌타를 못한 게 아쉬운 모양인 듯. 사실은 왼손잡이였다고 한다. 우투우타로 전향하게 된 건 유격수같은 내야 포지션에 좌투가 쓸 곳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오른손으로 치는 당구는 300~400이지만 왼손으로 칠 때는 1000(!)이라고 한다. 야구선수 당구대회에 출전한 좌타 이종범

물론 1996년의 박재홍의 등장 이전까진 장타보다는 주로 도루쪽에 비중이 컸지만[8] 박재홍30-30 도전에 고무받아 1996년부터 장타에도 집중하고, 결국 1997년에는 이승엽과 홈런왕 경쟁을 펼쳤다. 29개까지 기록했을 당시 이종범이 홈런 1위 고지를 밟고 있었는데, 8월까지 이종범은 홈런 29개에 타율 3할 5푼대의 끝판왕이었다. 막판에 체력이 떨어져서 타율도 까먹고 홈런도 9월 15일에 하나 추가하며 30-30에 만족해야 했다. 만약 홈런을 3개만 더 쳤더라면 이승엽을 추월하고 홈런왕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프로야구체제가 110게임 체제였다면 MLB에서도 전무후무(하지는 않다. MLB에서는 타이 콥 선수가 1909년에 9개의 홈런과 76개의 도루를 기록해. 홈런왕-도루왕에 등극한 적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해 그는 홈런-타점-득점-안타-타율-장타율-출루율-도루 등 타격 전 부문에 대해 전관왕을 달성했다는 것.)한 홈런왕-도루왕이 탄생할 뻔했다. 1997년 이승엽 홈런 32개, 이종범 홈런 30개. 이 30개라는 홈런 개수 덕인지, 94년보다 97년의 이종범이 더 5툴 플레이어에 가깝다는 의견도 많다.[9] 2009년 시즌에는 4할 타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94년에 대해 견제가 심하면 안타를 치기 힘들다고 말하며 "나는 어차피 볼넷으로 출루해도 도루를 해버렸기 때문에 심한 견제는 없었다."라고 자기 입으로 말해버렸다.(...) 이종범이 왜 무서운 선수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

그리고 포스트시즌에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앞서 이야기한 93년 말고도 96~97년 해태의 2연패 주역 중 하나였으며, 97년에는 고비 때마다 홈런을 쳐내는 맹활약으로 2번째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이렇게 97년 한국시리즈에서 세번째 우승을 거머쥐고 일본으로 떠나게 됐는데…….

2. 일본 진출, 시련의 시작

일본에서의 데뷔 후 첫달은 맹활약을 펼쳤지만 흔히 말하는 '일본식 분석야구'에 철저히 공략당하면서 약점이 잡히기 시작, 성적도 떨어지던 와중[10]에 1998년 6월 24일 한신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가와지리의 몸쪽 공을 스윙하려다 오른쪽 팔꿈치 안쪽에 맞으면서 골절상을 입게 되고, 그 이후로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의 빈볼이라 우기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 가와지리가 던진 볼은 129km짜리 커브였고 헛스윙 판정에 스트라이크였다. 무엇보다 우타자의 왼쪽 팔꿈치면 모를까, 오른쪽 팔꿈치 안쪽을 노려서 빈볼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공이 유도미사일이 아닌 한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얘기. (못 믿겠으면 거울 보며 우타자의 타격 자세를 취해보면 안다. 타격 준비자세에서 오른쪽 팔꿈치 안쪽을 저격한다는 게 가능한건지.) 어쨌든 반일감정을 이용해 선동하는 찌라시들과 부화뇌동하는 팬들 덕택에 가와지리에 대한 국내에 평가가 굉장히 안 좋아졌는데 가와지리는 그 후에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대동하고 이종범 선수에게 사죄까지 했다. 전후사정 모르고 감정이 앞서 너무 욕만 하진 말자.

어이없게도 황금어장 무릎팍 도사에서는 이 변화구를 150km짜리 강속구로 포장했고 이종범도 이에 동조하며 자신의 부진이 주변의 차별과 압박 탓인양 돌리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 이때 반응으로 김성근이나 선동렬과 비교하기도 하면서 이종범이 일본에서 배운 것도 없고 반감만 키워왔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종범은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의 2군 시절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고, WBC 결승타 후 일본 진출 실패에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점도 있다고 했다. 또 이종범만 특별한 사례는 아니다. 선동렬도 첫해에 부진할 때는 스트라이크존에서 불만을 토로했고 국내로 복귀한 정민태, 정민철도 차별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게 사실. 다만 국내 구단들의 용병에 대한 시선이나 대우를 생각해보면 사실 다른 리그로의 이적에는 용병으로써 어느정도 적응에 대한 의무감이 생기는건 어쩔 수가 없다. 해외 진출한 국내 선수들 중 성공한 케이스와 실패한 케이스로 나뉘는 척도도 보통 한국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리그의 사정이나 본인의 기량에 대해 얼마만큼 사색하고 노력했느냐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1] 그래도 이와는 별개로 일본 야구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남아있는 듯하다.

더군다나 호시노와의 마찰 때문에 외야수로 강제 전향당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듯하다. 호시노는 이종범을 구타하고 방송에서 대놓고 이종범을 폄하하기도 했다. 그래서 감독과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물론 외국인선수가 성적이 안 나오면 감독과 사이가 나빠지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일본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닌 정민태와 하라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호시노와 이종범의 야구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이종범의 단적인 일본 성적만 놓고 보면 이건 넌센스에 가까운 해석이다. 대체 2할 3푼대의 타율에 수비도 좋지 않고 출루율도 특별히 높지 않은데다 주루도 시원찮은 고액연봉의 외야수를 자기 스타일의 선수라고 할 감독이 몇이나 될까? 오히려 호시노는 주니치 시절 이종범의 한국시절 모습처럼 운동능력이 뛰어난 중장거리 호타준족 성향의 선수를 굉장히 선호했고,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이종범을 대려왔다. 더군다나 호시노는 이종범의 이름값을 제외하고 보아도 부진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2년간 평균 타율이 2할 5푼에 불과하고 수비마저 불안한 똑딱이 타자를 해마다 400타석 넘게 기용한 것이 된다. 물론 해태를 지휘하던 김응룡의 스타선수를 방임하던 스타일에서 야구를 하던 이종범에게 이것 저것 간섭하려드는 호시노의 스타일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해석은 가능하다. 실제로 김응룡감독은 주니치에서 부진하고 있던 이종범에 대해 "저 녀석 냅두면 잘 하는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허나 그냥 놔두기에는 주전으로 쓰기에 당시의 이종범은 문제가 너무도 많았다. 일단 내야 수비를 매우 중요시 하는 호시노 스타일상 에러가 많아도 너무 많고[12] 일본 선수들과 비교해 수비 기본기도 부족한 이종범을 유격수로 그냥 쓰기에는 문제가 너무 컸고, 수비 기본기라는 것이, 특히 유격수 자리에서는 단기간에 형성되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강제 외야수 전향은 어떻게 보면 이종범을 주전으로 쓰기 위한 주니치 코칭스탭의 어쩔 수 없는 결정으로 볼 수도 있다. 주니치는 결국 수비시 정면 타구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안 이후 수비형 유격수 구지 테루요시(현 한신 타이거즈 1군 수비코치)를 영입하기에 이른다. 물론 본인은 '외야수 전향 이후 내 야구가 바뀌었다'라고 술회할 정도로 정도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서 슈퍼 스타였던 그가 평범한 기량을 가진 평범한 선수로 대우 받자 생기게 된 단순한 정신적 나약함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호시노가 이종범을 구타하긴 했지만 이는 차별대우가 아니라 자신이 일본선수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대우한 것[13]. 물론 구타를 한 게 올바른 코치로써의 방침인가에 대한 도덕적 이의제기는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다른 일본 선수와 차별했다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반박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이종범이 부진한 성적을 기록해도 플래툰이나 교체요원으로 쓰지 않고 풀타임 주전으로 계속 기용했다. 그리고 비시즌중 한국에 가는 대신 가을 훈련을 하자는 감독 권유를 뿌리친 것은 이종범 본인이었다. 다만 외국인선수는 가을 훈련에 참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원칙. 그런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이종범의 성적은 당장 퇴출을 먹어도 할말이 없는 수준의 성적이었기 때문에 좋은 뜻으로 훈련을 통해 문제점을 교정하려고 제안한 코칭 스탭이 불쾌해 하는건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결국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은 이종범과 호시노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로 인해 성적으로 보나 연봉으로 보나 이병규보다 효율이 좋은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니치팬들 사이에서의 평가가 나쁘다.

역시 주니치를 거쳤던 선동렬이상훈은 밥값을 했고 2군에 떨어졌다고 이종범처럼 다른 선수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당연히 호시노 감독과의 사이도 좋았다. 선동렬은 지금도 호시노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자기가 못한걸 어설프게 변명하지 말라고 이종범에게 한 소리한 적도 있다. 이상훈은 선발로 데려갔다 불펜에서 밥값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였는지 분석해보자면, 그 정도가 크던 적던 부상이 부진의 이유가 된건 사실이다. 부상 전에 페이스가 좋았었던 이종범이었지만 부상 회복 이후에도 타석에서 심각한 부진을 보이며 추락하고 만다. 이종범은 원래 몸쪽으로 오는 코스의 볼을 당겨치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부상 전에는 일본 투수의 몸쪽공을 어느정도 잘 대처했지만 부상 이후 몸쪽공 대처가 예전만 못해지며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 든 일본투수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만다. 그 예가 99년 기록한 .238의 타율.[14]


98년 팔꿈치 골절 후 시즌 막판에 컴백하면서부터 외야수로 보직을 변경. 99년에는 시즌 내내 2할 3푼대의 타격 부진에 에러도 7개를 기록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나, 이 당시 주니치가 리그 우승을 한 덕분인지 생각보다 많은 비난을 받지는 않고 묻어갔다.

2000년에는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하고 2군에서 시즌을 시작. 2군에서 본즈 놀이를 했었다. 새 용병 데이비드 닐슨(등록명 딩고)이 시즌 초반 극악의 부진을 보였고, 팀도 연패에 빠지는 등 어수선하자 바로 1군에 콜업되어 잠깐이긴 했지만 98년 전반기같은 맹활약으로 팀의 10연승에 기여했다. 호시노감독도 이때만큼은 '팀 분위기를 바꿔줄 놈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말로 이종범의 활약을 인정. 시즌동안 에러 3개로 꽤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며 수비는 그럭저럭 함과 동시에 전년도에 바닥을 찍었던 타율도 .275까지 올리며 마감함으로서 어느정도 일본 리그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15]

2001시즌은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긴 했지만 새 용병 듀오인 팀 언로와 아지 티몬스에 밀려 선발 출전하지 못하고 대타와 대수비 등으로만 출전. 출장 기회를 확보하고자 외야수는 물론 고등학교 1학년 이후 처음으로 3루수 준비까지 했던 이종범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개막 얼마 후 2군행 통보를 받고 분노 폭발. 급기야 구단 대표와 담판을 지어 출전 기회가 보장되지 않으면 퇴단하겠다고 했고# 4월 24일 야쿠르트전부터 다시 1군에 복귀해 선발 3번타자 3루수로 기용되었으나... 이틀 연속으로 출루 한번 못하고 8타수 무안타라는 처참한 부진을 보이며 다시 벤치멤버로 내려갔다. 설상가상으로 전 시즌까지 주니치의 붙박이 4번타자였던 용병 레오 고메스가 주니치와의 뒤늦은 재계약에 성공해 컴백하게 되자 더 이상 1군에서 이종범이 설 자리는 없었다.[16] 결국 6월 1일자로 상호 합의하에 주니치를 퇴단하였다.


여담으로 SK 와이번스의 일본인 투수 가도쿠라 겐과는 주니치 시절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인연으로 카도쿠라가 원정 경기가 끝난 뒤에 이종범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3. 한계와 싸우는 사나이

2001년 8월 1일, 해태에서 KIA로 모기업이 바뀐 타이거즈에 복귀했으나, 타격에 집중하기 위해 3루수로 복귀한다. 전성기만큼은 아니었으나, 꾸준히 3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중심축이 된다. 93-97 시즌의 이종범의 포스가 워낙 압도적이었기에 이후에 부진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01-04 시즌까지는 3할에 15~20홈런, 30~50도루를 꾸준히 찍어주는 활약을 펼쳤다. 이 시기 이종범의 타격 기록은 동시기의 이병규, 박재홍등과 비교해도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다. 다만 이 와중에 체력적인 문제로 외야수로 이동하게 된다.
하지만 2004시즌부터 뱃 스피드가 떨어지기 시작해 그 시즌 .260의 낮은 타율을 기록, 이 때부터 노쇠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후 배트를 짧게 쥐는 스윙으로 바꾸며 2005년에 3할을 다시 치게 되지만 장타력은 급격히 하락, 그 이후로 은퇴할 때까지 한 시즌 두 자릿수 홈런과 3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였다.

2002년에는 위협구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입고 한동안 일명 '검투사 헬멧'을 쓰고 타격에 나서기도 했다.

2006년 3월, WBC에서 타율과 안타에서 수위를 차지하며 한국 대표팀을 이끌어 팀의 4강 진출에 큰 활약을 했다. 특히 일본의 후지카와 큐지를 상대로 2루타[17]를 쳤을 때는 그야말로 Play of the day.


하지만 이후 WBC 후유증 및 노쇠화가 찾아오며 두 시즌동안 처참할 정도로 망가진 시즌을 보냈다. 2006년에는 팀의 포스트시즌이 걸린 9월달에 활약하면서 포스트시즈 진출을 이끌었지만, 최악의 시즌이라고 할 수 있는 2007시즌에는 커리어 처음 0.174라는 1할 타율을 찍으면서 시즌이 끝나고 리빌딩이라는 명목으로 은퇴를 종용받았다. 이때 그가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은퇴가 왜 명예로운가?였다. 이후 2008시즌 .284의 타율을 기록,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이후 2009 시즌 노장으로서 팀을 이끌며 타이거즈에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다시 부상. KIA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을 이끌게 된다.

그는 역대 타이거즈 선수 중 김성한, 장성호 다음으로 많은 홈런을 때려 낸 타자이며, 가장 많은 도루를 한 주자이다.

전성기 시절처럼 80도루를 하지는 못했지만, 주루 플레이는 리그에서도 상당한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수비수의 태그를 피해 들어가는 슬라이딩은 최고. 문제는 이게 너무 고급 플레이라서, 심판이 태그를 피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웃을 시켜버린다는 것.

'천재'라 불리던 그 당시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지만, 한계와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타이거즈 팬들은 격려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3.1. 2009 시즌


최악의 한 해를 보낸 2007년 시즌 이후 이종범은 팀으로부터 꾸준하게 은퇴 또는 플레잉 코치직을 권유받았지만 결국 다시 선수로서 계약해서 2008년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고, 2009년 시즌에도 예비 멤버로 뛸 수 있었다.

사실상 스타팅 엔트리에 들기 힘들거라고 예상되었지만, 채종범, 이용규 등 외야 쪽에서 계속 터져나오는 줄부상 때문에 KIA는 이종범이 은퇴했으면 큰일날 뻔한 상황에 직면했다.(...)

팀의 리더격인 인물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물론이고 우익수를 보면서 간염을 앓고 있는 김원섭까지 누워버릴 때는 중견수도 도맡아 하고 시즌 중반에는 똥망한 기아 타선에서 2할 후반대 타율을 유지하며 팀내 수위타자로 올라서기까지 하면서 팀에는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다시 한번 자신을 각인시켰다.

5월 500도루에서 단 한 개만 남겨둔 상황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도루를 해 봤자 축하할 분위기도 아니고 되도록이면 장례가 끝난 뒤 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결국 6월 5일 광주 삼성전에서 500도루를 달성했다. 전준호에 이은 두번째. 전준호가 그랬듯이, 500도루 성공 직후 베이스를 뽑아서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후 김상현의 볼넷에 이은 최희섭의 1루타로 1000득점도 달성. 장종훈, 전준호, 양준혁에 이은 역대 4번째 기록이다. 6월 28일에는 개인통산 300 2루타를 찍었다. 이것도 장종훈, 양준혁, 장성호에 이은 4번째 기록.

9월 11일 금요일에는 류현진을 상대로 통산 20호 1회초 선두타자 홈런을 터뜨렸다.[18] 특히 이 날의 선두 홈런은 에이스 오브 에이스, 이대진의 통산 100승을 이끌어주었기에 더더욱 의미 있는 홈런이었다.

10월 16일 한국시리즈 1경기에서는 3타수 2안타 3타점으로 맹활약하며 기아의 5:3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첫 안타는 1:2로 뒤지던 2사 만루상황에서 터진 역전 2타점 적시타였고 두 번째 안타는 3:3 동점에서 달아나는 적시타로 베테랑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2009시즌 타율은 0.273으로 타율 자체는 2008시즌보다 오히려 떨어졌지만 타율 외의 기록들은 2008시즌에 비해 비약적으로 성장, 또한 영양가가 많은 타격을 보여주며 부활을 알렸다.

3.2. 2010 시즌

시범경기에서 2홈런을 치기도 했다. 이용규가 부진할 때 1번타자로 나서기도 했다. 두산과의 4차전 경기에서는 팀의 대 두산전 연패를 끊는 홈런을 치기도. 이 홈런으로 광주구장 최다 홈런기록을 세웠다.

심지어 이후 대 롯데전에서는 NCK포가 동반침묵하며 3번타자로도 나섰다. 체력에 대한 염려도 있고 2010년 들어서는 시범경기부터 너무 빨리 페이스를 끌어올린 탓인지 타격에서 부진이 이어지고 있고 외야 수비범위도 많이 좁아졌다. 물론 40대 선수가 아직까지 외야 수비를 보는것도 대단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씩 터트려주기도 하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기아의 외야진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 설마 그래서 은퇴를 못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5월 23일 광주 넥센전에서 9회말 13-3으로 크게 이기고 있는 와중에 안치홍을 대신해서 3년만에 2루수 대수비로 출장하며 KIA 타이거즈 갤러리를 폭발시켰다. 어차피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데다가 안치홍도 쉬게 해줄 겸 광주구장 관중을 대상으로 한 팬서비스로 보인다.

6월 8일 드디어 1700안타 고지를 달성했다. 이는 역대 6번째이다.
그리고 7월 9일 광주 한화전에서 한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특히 이날은 기아의 16연패를 끊은 날이라서 더욱 감동적이다..

올스타 브레이크 즈음해서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선발 출전하지 않았지만 선발 출전한 8월 1일 SK와의 경기에서는 결승타와 홈런 포함 2안타 3타점으로 활약, 2년만에 드디어 김광현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는데 큰 활약을 했다.

8월 14일 무등경기장에서 치뤄진 롯데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타구를 잡으려다 펜스에 부딪혀 병원에 실려갔다. 쓰레기같은 구단 지정병원에서는 가벼운 타박상으로 진단을 내렸지만 재검사 결과 갈비뼈에 실금이 발견되어 시즌 아웃이 되었다.

아직 정식으로 기사가 나지는 않았지만 양준혁의 트위터에 의하면 성구회의 4번째 회원이 되었다. 성구회는 기록의 50% 이상을 KBO에서 기록하면 해외 기록을 입회 조건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12월 24일, 연봉 2억6000만원에서 7000만원(26.9%) 깎인 1억9000만원에 재계약했다.

3.3. 2011 시즌

출발이 매우 처참했다. 타율 2할대를 못 지키고 있었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수준. 게다가 딱히 출루율도 좋지 않았다. 초반의 상태로서는 시즌 끝나고 KIA 쪽에서 은퇴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 싶었으나 시즌이 진행될수록 살아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6월 1일에는 LG전에서 선발 출장, 4타수 3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경기 MVP에(!) 선정되었다. 이날 인터뷰에서는 백업이 된 고참 선수로서의 역할과 은퇴에 대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어 팬이라면 한 번 볼만 하다. 인터뷰를 한 이순철 해설위원이 해태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급 공손히 손을 모으는 장면이 재미있다.

6월 4일 문학 SK전 5회초 1-0으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게리 글로버를 상대로 2-0으로 앞서나가는 솔로 홈런을 작렬시켰고, 그 다음날 경기에서 0-1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한 고효준의 초구를 그대로 좌측 담장으로 넘겨버리는 솔로 홈런을 치며 팀의 승리에 공헌했다. 이로 인해 일주일동안 3번의 인터뷰. 오오 노장의 힘.

7월 8일 대 LG전에서 6회 1사 1,2루서 좌전 안타를 때렸는데 그게 결승타가 되었다! 거기에 강우 콜드게임이 선언되어 기아는 1위에 등극! 하지만 다음날인 7월 9일 LG에게 져 다시 2위(...)

8월 2일 대 두산전에서 5타수 4안타로 대활약. 2점 적시타, 안타, 삼진, 안타, 삼진으로 노장의 빛을 발했다. 기아 선수들 중 경기에서 최고 활약. 마지막 타석에서는 엎어지는 몸개그까지 선보였다.

2011년 8월 8일 현재 74경기에 출전, 167타수 47안타(2루타 10개, 3루타 1개, 홈런 3개). 22득점 18타점 15볼넷 29삼진. 타율 0.281에 출루율 0.342, OPS 0.75042세라는 나이를 감안할때 엄청난 성적. 특히 후반기 들어 9경기 연속 선발 출장하며 타율 0.367을 찍으며 기아 공격을 이끌고 있다. 다시 말하는 그의 나이는 42세(...)

부상병동이 되어버린 타이거즈에서 2번타자의 부재로 이용규 이후 타선이 엉망이었는데 이용규가 못치는 날엔 자기가 테이블 세터 역할에 충실하고있다.

9월 18일 시즌 LG와의 19차전 마지막 홈경기에서 3회말 2번째 타석에서 본인의 2루타에서 이어지는 김상현의 적시타로 통산 3번째 1100득점을 달성하였다. 이 전의 두명은 양준혁과 전준호. 모두 성구회 멤버이다.

3.3.1. 포스트시즌

2011년 10월 9일 문학 야구장 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2차전 10회초 1사 1루에 대타로 출장해 유격수앞 병살타로 물러났다. 여담으로 1루쪽에서도 SK를 응원하던 타팀팬도 이종범의 등장때 같이 환호성을 질렀으나 그것은 아마 성지를 느꼈던 거일지도... 2011년 10월 12일 무등 야구장 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 4차전 9회말 2사 주자없는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 삼진으로 물러났다. 여담으로 그의 응원가 "이종범 이종범 안타 날려라" 에서 첫번째가 끝나고 두번째 반복이 시작될 무렵 루킹삼진이 되자 하나같이 응원이 멎었다 그리고 2012년 3월 31일 은퇴의사를 밝힘으로서 이 타석이 그의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이종범이 은퇴경기를 따로 가지지 않고 은퇴식만 가지기로 하면서 KIA팬들은 아쉬움을 표하였다.

4. 은퇴

요약 : 2010년 양준혁의 데자뷰

2015년 현재 역시 스타치고 좋은 감독 될수 없다더니 술친구 허재와 고대후배 홍명보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2012년 스프링캠프에서 좋은 훈련 성과를 보였고 시범경기에서도 12타수 4안타를 치는등 나름대로 활약을 해서 최고령 현역선수로서의 활약이 기대되었지만...

2012년 3월 31일, 한화와의 시범경기 종료후 은퇴를 선언했다. 이순철 수석코치가 이종범을 불러 개막엔트리에 들지 못할것이라고 밝혔고, 이에 이종범은 갑작스런 은퇴를 선언하였다. 노장임에도 현역 선수로써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준비를 많이 했던만큼 이종범 본인도 아쉬웠던 것. 한때 코치진 및 구단 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통해서 논란의 불씨를 잠재웠다. 이후 4월 5일 은퇴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하겠다고 밝혀 결국 현역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수의 여론은 또 이렇게 선동열이순철 은 한명의 레전드를 보내는구나 하고 두 코칭 스태프를 비난하기도 하였으나, 은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은 이종범 본인이었다. 팀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궂은 일도 도맡아 하려고 했었던 것이고, 미팅을 통해서 더 이상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그의 은퇴 선언 배경에는 '타이거즈 색이 약했던' 조범현 감독 체계에서 '타이거즈의 색이 강해' 굳이 타이거즈 프랜차이즈로써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이종범의 역할이 없어진 것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범현 감독 하에서는 전성기를 한창 지난 노장임에도 팀을 결집시킬 수 있는 구심점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이종범이 종용되어 경쟁을 통해서도 선수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새로운 감독 체계에서는 더 이상 이런 역할이 쓸모없어지기 때문에 비슷한 성적을 내는 젊은 선수들을 더 출장시키려는 입장과 충돌하면서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은퇴기자회견에서 언급한 내용을 자세히 곱씹어보자. 본문에 반하는 여론의 총체는 불암콩콩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런데 이종범의 은퇴식 한달 뒤 6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선동열 감독이 이종범에게 은퇴를 권유하는 것과 달리 또 다른 노장 최향남을 영입을 한 것에 대해서 이종범은 야수이고 최향남은 투수이기 때문에 최향남의 복귀가 가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대 투수 출신인 선동열 감독의 야수와 투수를 바라보는 시각 차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19]

2012 시즌이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서 다시 이종범의 은퇴를 다시 생각해본다면, 결과적으로 이종범의 갑작스런 은퇴는 KIA 선수단 운영에 독이 되고 말았다. 이종범의 기량은 예전같지 않았고 다른 젊은 선수들에게 밀린다고 하더라도 그가 팀 선수단에서 여전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선수들에게 직접 조언을 해줄 수 있고 다른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리더형 고참선수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최희섭, 이범호의 이탈이나 젊은 선수들의 기량 저하에 대해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정신적 지주를 갑작스럽게 잃어버린 KIA에게는 큰 공백이 되어버렸고, 결과적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과거 삼성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선동열이 고참을 은퇴시키고 젊은 선수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은 KIA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셈.

기자회견에서 이종범은 SK 김원형처럼 따로 은퇴경기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다만 시즌 중후반 은퇴식을 가지기로 할 예정이라고 한다. 구단에서는 플레잉 코치, 코치 연수 및 연봉 보전 등을 보장하려 했지만 은퇴식과 영구결번을 제외하고 구단의 제안을 사양을 하였고, 현재는 휴식기를 가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돌아올 것임을 언급하면서 지도자로써의 진로를 암시하였다. 사업가나 해설가로써의 진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하였다. 한편 은퇴 발표 이후 음악 전공인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한다고 한다.

2012년 4월 30일에 나온 기사에 의하면 고양 원더스의 김성근 감독 밑으로 들어가서 지도자 수업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고 한다. 이에 김성근 감독도 문은 열려있다고 긍정적으로 반응해 고양 원더스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할 가능성이 커졌다. 김응룡 밑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이제 김성근 밑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게되는 이종범의 차후 지도자 행보에 대한 관심도 커진 상황. 기아팬들은 김성근 감독의 노하우를 전수받아서 타이거즈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2012년 5월 26일 무등 야구장에서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은퇴식을 치른다. 이날 은퇴식에서 시구자로 마운드에 오른다.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 소화 경력이 있는데, 이로써 본인이나 팬들은 시구로 아쉬움을 달랠 듯 하다.

선수 시절 화려한 전성기와 암흑기, 그리고 고난과 좌절을 견뎌내면서 커리어를 지켜왔던 이종범의 선수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은퇴식을 치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대진 선수가 이종범 선수의 아내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는 기사가 나왔다.#[20]

2012년 7월 20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일 레전드 매치에 출전하였다. 여전히 녹슬지 않은 주루플레이와 호수비 등을 보여주었으며, 이날 활약에 힘입어 MVP로 선정되었다. 경기는 한국 OB가 5:0으로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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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종범은 초등학교부터 프로야구까지 모두 우승시키고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떡잎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 [2] 이종범은 이미 서림초등학교와 충장중학교를 우승으로 이끌 만큼 어린 시절부터 정상급 선수였으며, 청룡기에서 역전 2루타를 때리며 광주일고를 39년만에 우승시켜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다. 참고로 어린시절부터 그와 가까이 지내던 2년 선배가 있는데, 노력하기를 정말 싫어했었다. 그 선배가 바로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인 염경엽.
  • [3] 1989년 대학 야구를 호령하던 국가대표 에이스 박동희는 3월 봄철연맹전에서 한 타자에게 2개의 홈런을 맞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 타자는 건국대 1학년 유격수 이종범이었다. 이병훈해설위원의 말에 따르면, 선동열 이후 최고의 선수라 평가 받던 박동희는 그날 멘붕이 와서 술을 엄청 마셨다고 한다.
  • [4] 한국의 박동희와 일본의 노모 히데오의 맞대결로 기억되는 1989년 9월 제1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MVP는 건국대 1학년 이종범이었다. 당시에 이종범은 일본대표팀의 '토네이도' 노모 히데오로부터 4타수 2안타 2도루를 뽑아내는 활약을 펼쳐 공동우승을 이끌어 냈다.
  • [5] 92년 대학야구 가을철리그 결승전에서 건국대와 고려대가 만나 연장 11회 접전 끝에 건국대가 9-6으로 이겨 우승했다. 대회가 끝나고 최우수선수가 된 이종범은 타격상과 함께 홈런상을 차지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종범이 처음에 가기로 한 대학이 고려대였다는 것이다. 고대에서 이종범의 친구들도 받아줬다면,...
  • [6] 2014년 그의 먼 고교 후배인 서건창이 201안타로 20년만에 최다 안타 기록을 깨고 새로운 기록을 세우고 정규시즌 MVP를 수상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7] 허나 유격수 이종범의 수비 능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쉽게 말하자면 화려하긴 했어도 안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것.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게 전진수비에 약했다는 점이 있다. 자세한 건 상위 항목의 수비력 논란 항목 참조.
  • [8] 그래도 데뷔 후 3년간의 홈런 갯수가 각각 16-19-16개로 홈런 순위 10걸 안에는 늘 들었으며, 특히 95년에 기록한 16개는 방위 복무 제한만 아니었다면 20홈런 이상이 가능했을 것이다.
  • [9] 그러나 97년 시즌은 너무 실책이 많아 유격수로는 모자람을 나타냈다는 의견도 있다. 93년과 94년은 수비 범위가 너무 넓었던 탓에 다른 선수였다면 안타로 판정됐을 것이 신책으로 기록된 적이 많다 하지만 97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세한 것은 상위항목 참조.
  • [10] 4월 0.337 2홈런 14타점 10도루 / 5월 0.260 5홈런 10타점 5도루 / 6월 0.235 2홈런 4타점 2도루
  • [11] 단적으로 국내에서 비슷한 평가를 받던 김태균과 이대호가 한국과 다른 일본의 여러가지 환경에 순응하고 적응하려 노력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나뉜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 [12] 98시즌 중반까지 11에러를 기록했다.
  • [13] 호시노 야구관은 일단 못하는 놈은 패고 보자다(...)
  • [14] 다만 복귀 이후 이종범의 부진을 완벽하게 부상 탓으로 돌리는건 부상 탓이 없었다고 하는 것 만큼 무리가 있다. 부상전 이종범도 체력적 약점과 변화구 대응 능력의 약점이 분석당해 성적이 급격히 하향세를 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 [15] 다만 2000년 이종범의 성적은 타율만 보면 전년도에 비해 괜찮아 진것 같지만 사실 그렇게 단정짓기는 힘들다, 에러는 적었지만 수비지표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인데다가 장기인 주루플레이에서도 상당 수의 도루사를 기록했고, 출루율이나 장타율도 나쁜편이었다. 1년에 8~9개 정도의 홈런을 치는 대신 주루력과 수비력이 퇴화된 이대형이라고 생각하면 적절하다.
  • [16] 투수쪽은 지난시즌 다승왕과 구원왕인 번치와 게일러드가 붙박이였고, 고메스의 가세로 남은 2개의 용병 엔트리를 놓고 용병 넷이서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17] 이것은 논란이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팔을 벌리며 환호하는 모션을 취하지 않고 전력질주했다면 3루 주루사를 당하지 않고 더 큰 점수를 낼 수 있었다는 의견, 그리고 무리한 주루플레이로 인해 승리를 위한 점수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득점권 주자가 되지 못하고 아웃카운트를 내어준것 자체가 본헤드 플레이라는 논란 또한 존재한다. 허나 그 안타로 타점을 올리고 두팔을 벌려 환호하는 모션으로 인해 대한민국 대표팀의 사기가 크게 올라갔다는 점, 고로 이종범의 안타는 경기의 하이라이트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 [18] 선두타자 홈런은 1회 초,말 합쳐서 통산 44개. 독보적이다.
  • [19] 2010년 양준혁 은퇴 당시에도 확연히 드러났다.
  • [20] 댓글은 보지 말자.